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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조씨(趙)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趙(양주조씨)

 

 

본관(本貫): 양주(楊洲)

시조(始祖): 조잠(趙岑)

유래(由來):

 

양주 조씨(楊州趙氏)의 시조(始祖)는 고려 때 호장(戶長)을 지내고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추증된 조잠(趙岑)이다.

그의 선계(先系)는 문헌(文獻)이 실전(失傳)되어 상고(詳考)할 수 없으며, 「조선시족통보(朝鮮氏族統譜)」의 기록에는 고려 때 사람인 군우(君祐)의 손자이며, 경질(景質)의 아들이라 전(傳)하고 있다.

후손들은 잠(岑)을 시조(始祖)로 하고 양주(楊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조계생(趙啓生)

∼1438(세종 20).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양주 ( 楊州 ). 자는 경부(敬夫), 호는 두곡(杜谷). 1388년(우왕 14) 문과에 급제, 조선 태조 때 검열·수찬을 거쳐 삼사의 도사에 승진하였고, 이천현령(利川縣令)을 역임하였다. 그 뒤 감찰·평택현령을 거쳐 계림판관(鷄林判官)이 되었다.

1404년(태종 4) 좌정언·우정언이 되고, 이어 지평·장령·사인·직제학을 거쳐 1412년 판군자감사(判軍資監事)가 되었다. 이어 수원부사를 역임하였고, 사간·참의를 거쳐 판원주사(判原州事)로 나갔다가, 1419년(세종 1) 인수부윤(仁壽府尹)에 임명되었다.

다시 외임(外任)으로 1420년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다음해 동지총제(同知摠制)로 천추사 ( 千秋使 )에 임명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423년 전라도관찰사를 지냈으나 곧 인순부윤(仁順府尹)이 되었다가, 다음해 부유후(副留後)에 임명되었다.

1426년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가 되었고, 다음해 대사헌에 올랐으나 얼마 안 되어 서달(徐達 : 黃喜의 사위)의 아전 ( 衙前 ) 표운평(表芸平)의 타살사건에 관련되어 전라도 태인으로 귀양갔다가, 다음해 2월 풀려났다. 1428년 예조참판·대사헌을 지냈으며, 이어 병조·이조·공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435년 참찬에 이르렀다.

마음가짐이 항상 경외(敬畏)로 일관하였고, 또 조행이 염결(廉潔) 간정(簡整)하였으며, 비록 복잡하거나 급거(急遽)함을 당하여도 일찍이 질언(疾言)함이 없었다. 시호는 정평(靖平)이다.

 

조말생(趙末生)

계생의 동생 말생(末生)은 태종(太宗)의 총신(寵臣)으로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냈고, 세종(世宗) 때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거쳐 영중추원사(嶺中樞院事)에 이르렀으며, 그의 아들 3형제 중 맏아들 선(璿)은 태종(太宗)의 부마(駙馬 : 임금의 사위)로 한원군(漢原君)에 봉해졌다.

 

조극관(趙克寬)

∼1453(단종 1).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양주 ( 楊州 ). 인필(仁弼)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의(誼)이고, 아버지는 계생(啓生)이며, 말생(末生)의 조카이다.

1414년(태종 14) 알성문과에 을과 3등으로 급제하여 사관 ( 史官 )에 등용되고, 1418년 정자 ( 正字 )에 승진하여 서연 ( 書筵 )에 나가 세자인 양녕대군 ( 讓寧大君 )을 보필하던 중, 이 해 세자의 난행(亂行)을 막지 못한 죄로 파직되었다.

그 뒤 1420년 (세종 2) 다시 우정언이 되고 지평 ( 持平 )을 거쳐 1426년 이조정랑이 되었다. 1427년 진하사 ( 進賀使 )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사헌부장령(司憲府將令)을 거쳐 1437년 지형조사(知刑曹事)가 되었고, 1441년 형조참의를 거쳐 우승지가 되었다.

이듬해 공조참판을 지내고 1443년 평안도도관찰사가 되었다. 1446년 병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이조참판이 되었으며, 그 해 8월 황해도도체찰사가 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부임하지 않아 전라도 용안현(龍安縣)에 부처되었다.

1449년 다시 예조참판에 기용되었고, 이 해 9월 요동지휘사(遼東指揮使) 왕무귀(王武貴)가 명제(明帝)의 조칙을 가지고 왔을 때 왕이 병으로 마중을 나가지 못하자, 왕을 대신해서 칙사를 맞이하였다.

그 해 10월 형조판서에 올랐고, 12월 함길도도관찰사가 되었다. 그때 마침 침입해 온 야인들을 물리쳐 전공을 세웠고, 1451년(문종 1) 그 공으로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었을 때 함경도 일대에 축성을 해야만 국가의 이익이 된다는 것을 상계하여 성곽을 보수 또는 신축하고, 군사의 훈련제도를 강화하는 등 국방 경비에 힘을 기울였다.

이 해 7월 형조판서와 대사헌을 거쳐 곧 병조판서가 되었다가, 얼마 뒤 우찬성이 되었다. 1453년 이조판서가 되었지만,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에 김종서 ( 金宗瑞 )의 일파로 몰려 피살되었다. 영조 때 신원(伸寃 :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었다.

 

조정(趙挺)

1551(명종 6) ∼ 1629(인조 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양주 ( 楊州 ). 자는 여호(汝豪), 호는 한수(漢 馬 ) · 죽천(竹川). 수견(壽堅)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방보(邦 喇 )이고, 아버지는 충수(忠秀)이며, 어머니는 양윤형(梁允亨)의 딸이다.

1582년(선조 15) 진사가 되고, 이듬해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사관 ( 史官 )으로 등용되었으며, 1586년 사정으로서 다시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예문관 · 홍문관에 등용되고, 이어 수찬 · 교리를 거쳐 정언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보덕으로 세자를 호종(扈從)하였고, 그 뒤 전적 · 필선을 거쳐 회양부사 · 광주목사(廣州牧使) · 남양부사 · 안변부사로 나아갔다. 그 뒤 호조판서 · 대사간 · 동부승지 · 부제학 · 동지중추부사 · 대사성, 이조 · 호조 · 형조의 참판 및 지의금부사 · 대사헌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601년 성절사 ( 聖節使 )로 명나라에 다녀와 한성판윤이 되고, 1609년 형조판서로 또 다시 성절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우참찬 · 형조판서 · 우의정을 역임하였고, 형난공신 ( 亨難功臣 ) 2등에 책록되었으며, 한천군(漢川君)에 봉해졌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난 뒤 광해군을 가리켜 ‘ 전주(前主) ’ 라 하였다 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아 관작을 삭탈당하였고, 이어 광해군 때 공신이 되었다는 죄목이 가중되어 1628년 해남에 유배, 풍토병에 시달리다가 이듬해 죽었다.

1675년(숙종 1) 신원(伸寃 :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었고, 저서로는 ≪ 동사보유 東史補遺 ≫ 가 있다.

 

조존성(趙存性)

1554(명종 9)∼1628(인조 6).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수초 ( 守初 ), 호는 용호(龍湖) 또는 정곡(鼎谷). 참봉 방좌(邦佐)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준수(俊秀)이고, 아버지는 증좌찬성 남(擥)이다. 어머니는 이몽규(李夢奎)의 딸이다. 성혼 ( 成渾 )·박지화(朴枝華)의 문인이다.

20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더욱 많은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으며, 특히 이항복 ( 李恒福 )·신경보(辛慶普) 등과 가장 친하였다. 1590년(선조 2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관 ( 史館 )에 들어가서 검열이 되었다.

이듬해 대교에 승진되었으나 모함을 입어 파면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에 있다가 이듬해 의주의 행재소 ( 行在所 )에 가서 다시 대교에 복직되고, 이어 전적에 승진되었다.

예조좌랑·정언을 역임할 때 남방의 왜구들을 회유하려 했으나 죄없는 백성들만 괴롭힌 격이 되어 그들에 대한 회유 정책을 철회하고 힘으로 물리칠 것을 강변, 이를 성사시켰다.

이듬해에는 사신으로 명나라에 가서 병부상서 석성(石星)에게 우리 나라에서 명군을 철수하려는 것을 중지시키고, 또 초황(哨黃 : 화약연료) 수만 근을 가지고 와 그 공으로 직강에 승진되었다.

1597년 어사로 군량미를 운반했는데, 그 양이 무려 40여 만 섬을 넘어 군량이 떨어지지 아니했다 한다. 1601년 강화부사가 되어 1년 만에 백성들을 안정시켰다. 그 뒤 호남어사·충주목사·단산군수를 역임했는데 가는 곳마다 선치하여 백성들의 환심을 샀다.

1613년(광해군 5) 광해군의 생모추존에 반대하여 파직당하고, 1623년 인조반정 뒤에 형조·호조의 참판, 부총관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이괄 ( 李适 )의 난이 일어나자, 검찰사(檢察使)로 왕을 공주로 호종(扈從)하였다. 난이 평정된 뒤 지의금부사가 되어 기로소 ( 耆老所 )에 들어갔다.

뒤에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왕이 강화도로 가면서 분조 ( 分朝 )의 호조판서에 임명하여 세자를 따라 전주에 갔으나 돌아와 병사하였다. 시조 4수가 ≪해동가요≫에 전한다. 시호는 소민(昭敏)이다.

 

조창원(趙昌遠)

1583(선조 16)∼1646(인조 2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양주 ( 楊州 ). 자는 대형(大亨), 호는 오은(悟隱). 아버지는 지돈녕부사 존성(存性)이며, 인조의 국구(國舅)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0세의 나이로 아버지를 따라 종군하였다. 진사시에 합격하고, 별좌 ( 別坐 )·의금부도사 등을 지냈다. 광해군의 난정이 심해지고 아버지가 옥사에 연좌되어 화를 당하자, 관직을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가 아버지를 봉양하였다.

인조반정 후 형조좌랑에 제수되었다. 직산현감으로 나가 민심을 무마하고 많은 치적을 올렸다. 군자감정에 승진되었다가 다시 여산군수에 제수되었으며, 이어 인천부사 재직시 딸이 인조의 계비(繼妃 : 莊烈王后)로 간택되자 보국숭록대부 ( 輔國崇祿大夫 )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영돈녕부사에 배수되었다. 시호는 혜목(惠穆)이다

 

조계원(趙啓遠)

1592(선조 25)∼1670(현종 1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양주 ( 楊州 ). 자는 자장(子長), 호는 약천(藥泉). 준수(俊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남(擥)이고, 아버지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존성(存性)이며, 어머니는 이신충(李藎忠)의 딸이다. 신흠 ( 申欽 )의 사위로 숙부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뒤에 이항복 ( 李恒福 )의 문인이 되었다.

1616년(광해군 8) 진사시에 합격하고, 인조반정 후 의금부도사가 되었다. 1628년(인조 6)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정언을 거쳐 형조좌랑이 되었다. 1631년 일시 파직당하였다가, 그 뒤 1636년 병자호란 때 유장(儒將)으로 천거되기도 하였다.

사헌부장령(司憲府將令), 옥당의 수찬 ( 修撰 )· 교리 ( 校理 )를 거쳐 사간이 되었다. 이 때 김상헌 ( 金尙憲 )이 탄핵당하자 이를 힘써 구원하였다.

1641년 세자시강원보덕으로서 볼모로 심양(瀋陽)에 갔던 소현세자 ( 昭顯世子 )가 청나라의 요구로 명나라의 진저우(錦州) 공격에 참가하게 되자 그를 시종, 모래주머니를 이용하여 성을 쌓는 기계(奇計)를 써서 세자 일행이 무사히 돌아오게 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심양에서 돌아와 수원부사·홍청감사(洪淸監司)·동부승지·예조참의·강화유수·도승지·경상감사 등을 거쳤다. 1654년(효종 5)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오고 경기감사·전라남도감사를 거쳐 1659년 함경감사, 형조와 공조 참판, 동지의금부사를 지냈다.

1662년(현종 3) 형조판서에 이르러 사직하고 보령에 은퇴하여 한가한 여생을 보냈다. 그뒤 조정으로부터 여러 차례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만년에 민전 ( 民田 )을 광점(廣占)하였다는 비판도 받았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조태채(趙泰采)

1660(현종 1) ∼ 1722(경종 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양주 ( 楊州 ). 자는 유량(幼亮), 호는 이우당(二憂堂). 존성(存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형조판서 계원(啓遠)이고, 아버지는 괴산군수 희석(禧錫)이다. 어머니는 백홍일(白弘一)의 딸이다. 태구(泰耉)의 종제이며, 태억(泰億)의 종형이다.

1686년(숙종 12) 별시문과에 종형 태구와 함께 병과로 급제하였다. 내직으로 승문원의 정자 · 저작 · 박사와 성균관의 전적 · 직강, 사헌부의 감찰 · 지평 · 대사헌, 사간원의 정언 · 헌납 · 대사간, 홍문관의 수찬 · 교리, 승정원의 동부승지, 장례원의 판결사, 한성부의 판윤, 그리고 육조의 판서, 좌참찬 겸 판의금부사 등을 거쳐, 1717년 좌의정에 이르고 판중추부사에 전직하였다.

외직으로는 옥구현감 · 공주목사 · 평안감사 등을 역임하였다. 1713년 동지사 ( 冬至使 )로, 1720년(경종 즉위년) 사은사 ( 謝恩使 )로 두 차례 청나라에 다녀온 바 있다. 그는 도량이 크고 사려가 깊으며 해학을 즐겨 담론을 잘 했고, 풍채가 썩 훌륭했다고 한다.

족질이 대부분 소론에 기운 데 반해, 유독 노론에 머물렀다. 그는 당시 공론(公論)의 부재 현상을 통렬히 비판했고, 당론에 대해서도 비판적 입장을 취하였다. 윤선거 ( 尹宣擧 )의 문집을 훼판(毁板)하고 이어 그를 배향하던 서원까지 훼철하려 하자, 은액(恩額)만을 철회한다면 다른 일반 향사 ( 鄕祠 )와 다를 바 없이 되고, 또 향사는 조정에서 간섭할 바가 아닌 것을 들어 은액만을 철회할 것을 왕에게 진언, 이를 관철시켰다.

이는 당시 정언 성진령(成震齡)의 논핵(論 逆 )을 받게 되기는 했으나, 후일 성진령이 후회한 것으로 보면, 당시 정국의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던 그의 식견에서 나온 처사라 할 것이다.

경종이 즉위한 후 정국이 더욱 혼란해져가는 가운데 정언 이정소(李廷 聊 )의 건저상소(建儲上疏)를 채택, 영의정 김창집 ( 金昌集 ), 판부사 이이명(李 蓬 命), 좌의정 이건명 ( 李健命 ), 호조판서 민진원 ( 閔鎭遠 ) 등과 함께 1721년 연잉군(延 艀 君 : 뒤의 영조)의 세제책봉을 건의, 실현시켰으며, 이어 세제의 대리청정까지 이르게 하였다.

그러나 소론인 우의정 조태구의 지휘를 받은 사직 ( 司直 ) 유봉휘 ( 柳鳳輝 )의 건저반대소(建儲反對疏)와 좌참찬 최석항 ( 崔錫恒 )의 대리청정 환수(還收)를 청하는 소 등 소론의 적극적인 반대로 대리청정의 명이 철회되고 건저를 주장했던 노론세력이 대거 정계에서 제거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이 해 전 승지 김일경 ( 金一鏡 )이 올린 노론 4대신 축출의 소가 승정원에서 채택되어 판중추부사로 있던 그도 그 중 한 사람으로 진도에 유배되고 다음해 적소에서 사사되었다. 1725년(영조 1) 우의정 정호 ( 鄭澔 )의 진언으로 복작(復爵)되었으며 절도(絶島)에 나누어 유배되었던 자녀들도 모두 풀려나게 되었다.

그는 조정의 공론이 땅에 떨어지고 함묵(含默)이 성풍(成風)이 되어가는 실정을 크게 문제삼았으며, 민생의 사활이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는 수령의 현부(賢否)를 중요시하였다.

특히 수령의 어질고 못됨을 가리고 백성의 질고를 살피며, 진휼 상황을 감독하는 등 경외(京外)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까이 모시는 신하 중에서 명망이 있는 자로 하여금 어사로 삼아 파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면서도, 빈번한 어사의 파견은 비용만 낭비하고 감사와 수령의 처지를 손상시킨다 하여 절제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는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으로 다양한 경력이 말하듯, 정적도 추종자도 많다. 그렇지만 어느 한쪽에 크게 기울어짐이 없이 끝까지 대의를 따르려 하여 세인의 칭송을 얻었다. 과천의 사충서원 ( 四忠書院 )과 진도의 봉암사(鳳巖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 이우당집 ≫ 이 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조태구(趙泰耉)

1660(현종 1) ∼ 1723(경종 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양주 ( 楊州 ). 자는 덕수(德 馬 ), 호는 소헌(素軒) · 하곡(霞谷). 존성(存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형조판서 계원(啓遠)이고, 아버지는 우의정 사석(師錫)이다. 어머니는 권후(權 譽 )의 딸이다. 태채(泰采) · 태억(泰億)의 종형이다.

1683년(숙종 9)에 생원이 되고 1686년 별시문과에 종제 태채와 함께 병과로 급제, 설서 · 문학 · 승지를 거쳐, 1702년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가 1705년 형조참의 · 대사성을 지냈다. 그

뒤 우참찬에 오르고, 1720년(경종 즉위년) 복상(卜相) 때 우의정에 올랐다. 당시 영의정은 김창집 ( 金昌集 ), 좌의정은 이건명 ( 李健命 )이었다.

신임사화로 노론4대신을 사사(死賜)하게 한 뒤, 영의정에 올랐다. 1710년 동지사 ( 冬至使 )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당시 소론의 영수로서 노론과 대립하던 중 1721년 정언 이정소(李廷 聊 )의 건저상소(建儲上疏)와 김창집 · 조태채 · 이이명(李 蓬 命) · 이건명 등 노론4대신의 주청에 의해 연잉군(延 艀 君 : 뒤의 영조)이 세제(世弟)로 책봉되자, 유봉휘 ( 柳鳳輝 )에게 반대의 소를 올리게 하였다. 이후 세제의 대리청정이 실시되자 최석항 ( 崔錫恒 ) · 조태억 · 박태항(朴泰恒) · 이광좌 ( 李光佐 ) · 한배하 ( 韓配夏 ) · 이조 ( 李肇 ) 등과 함께 이를 반대, 대리청정의 환수를 청하여 실현시켰다.

이어 같은 해 12월 전 승지 김일경 ( 金一鏡 )과 이진유 ( 李眞儒 ) · 윤성시 ( 尹聖時 ) · 박필몽 ( 朴弼夢 ) · 서종하 ( 徐宗廈 ) · 정해 ( 鄭楷 ) · 이명의 ( 李明誼 ) 등이 상소하여 건저(建儲)를 주장하던 노론4대신을 4흉(凶)으로 몰아 탄핵한 뒤 결국 4대신의 사사(死賜)를 관철시키고, 영의정에 올랐다. 이어 소론 정권을 수립, 최석항 · 김일경 등과 국론을 주도하였다.

이후 소론은 과격파와 온건파로 나뉘어 정책 결정에 논란이 많았는데, 그는 윤순 ( 尹淳 )과 함께 온건파의 주장이 되었다. 성격은 온아하고 위풍이 있었으며, 평소 검소한 생활을 하여 여러 번 외직에 나갔어도 재물이 쌓이지 않았다. 다만 강인한 성격이 못 되어 남의 부탁을 잘 받아들였기 때문에 잘 다스렸다는 치성(治聲)은 얻지 못했다고 한다.

1725년(영조 1) 신임사화의 원흉으로 탄핵을 받고 관작이 추탈되었다. 글씨를 잘 썼으며, 산법 ( 算法 )에 관계되는 책을 펴냈는데 양전 ( 量田 ) 등의 목적에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편서로 ≪ 주서관견 籌書管見 ≫ 이 있고, 글씨로는 〈 이충무공고하도유허비 李忠武公高下島遺墟碑 〉 · 〈 왕자연령군명비 王子延齡君明碑 〉 · 〈 완산백조구석비 完山伯趙龜錫碑 〉 · 〈 길성군허유례비 吉城君許惟禮碑 〉 등이 있다.

 

조운규(趙雲逵)

좌참찬(左參贊)과 호조 판서(戶曹判書) 등 여러 벼슬을 두루 역임하였다.

 

조영순(趙榮順)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동지 부사(冬至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온 영순(榮順)이 유명했다.

 

조두순(趙斗淳)

1796(정조 20)∼1870(고종 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양주 ( 楊州 ). 자는 원칠(元七), 호는 심암(心菴). 영극(榮克)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종철(宗喆)이고, 아버지는 진익(鎭翼)이다. 어머니는 박종악 ( 朴宗岳 )의 딸이다.

1826년(순조 26) 황감제시(黃柑製試 : 매년 제주도에서 진상한 밀감을 임금이 성균관 유생들에게 하사하면서 거행하는 일종의 과거시험)에 장원으로 뽑히고, 이어 그 해 4월에 열린 경과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규장각대교로 선발되었다.

그 뒤 1866년(고종 3) 영의정으로 치사(致仕)하기까지 40년 동안을 줄곧 벼슬하면서 순조·헌종·철종·고종을 보필하였다. 순조 때에는 승지를 거쳐 대사성을 지냈고, 헌종 때에는 동지사행(冬至使行)의 부사로 중국에 다녀온 뒤 이조참판·황해도관찰사를 거쳐 1841년(헌종 7) 공조판서에 올랐다.

뒤이어 형조판서·한성부판윤·평안도관찰사를 지내다가 1849년 예문관대제학이 되어 ≪헌종실록≫의 편찬을 주관하였다. 이듬해 철종의 생부인 전계대원군 ( 全溪大院君 )의 신도비문을 지었으며, 병조판서가 되었다.

이듬해 ≪동문휘고 同文彙考≫의 편찬을 담당하고, 이어 이조판서가 되었다가 1853년(철종 4) 우의정에 올랐으며, 1865년 영의정이 되기까지 지중추부사 및 판중추부사를 역임하면서 우의정·좌의정을 연임하였다.

정원용 ( 鄭元容 )·김흥근(金興根)· 김좌근 ( 金左根 ) 등 세도대신들과 함께 삼정이정청 ( 三政釐整廳 )의 총재관(摠裁官)을 지내고, 고종의 영립(迎立)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흥선대원군 ( 興宣大院君 ) 집권 초기에 영의정이 되어 1년간 경복궁 재건, ≪대전회통≫ 편찬, 삼군부 ( 三軍府 ) 설치 등의 지휘를 맡았다. 1866년 치사하고 기로소 ( 耆老所 )에 들어 갔으며, 봉조하 ( 奉朝賀 )가 되었다. 저서로 ≪심암집≫이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조병세(趙秉世)

1827(순조 27) ∼ 1905. 조선 말기의 문신 · 순국열사. 본관은 양주 ( 楊州 ). 자는 치현(穉顯), 호는 산재(山齋). 현감 유순(有淳)의 아들이다. 음관(蔭官)으로 참봉에 임명되었다가 1859년(철종 10)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관 ( 史官 )이 되고 1864년(고종 1) 실록청도청낭청으로서 ≪ 철종실록 ≫ 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874년 함경도암행어사, 1877년 대사헌에 승진되었고 이어 의주부윤, 다시 대사헌, 1887년 공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예조 · 이조의 판서, 1889년 한성부판윤을 지내고 곧이어 우의정에 올랐다.

1893년 좌의정이 되었으나, 이듬해 동학농민운동 · 청일전쟁 · 갑오개혁 등 큰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고, 일제의 침략이 가중되면서 세상이 어수선하게 되자 정계를 떠나 가평으로 은퇴하였다.

뒤에 다시 중추원의장(中樞院議長)과 의정부의정(議政府議政)을 역임하고 국왕의 고문인 특진관 ( 特進官 )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주로 가평에 은퇴하고 있으면서, 1896년 폐정개혁을 요구하는 시무(時務) 19조를 상소하였다. 그 뒤 1898년 재상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으며, 1900년 다시 입궐하여 국정 개혁을 건의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을사5조약이 체결되자 국권회복을 위해 79세의 노구를 이끌고 상경, ‘ 을사5적 ’ 의 처형을 주청하려 하였으나 일본군의 방해로 고종과의 면담이 거절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당시 장지연 ( 張志淵 )이 ≪ 황성신문 皇城新聞 ≫ 에 〈 시일야방성대곡 是日也放聲大哭 〉 을 써서 민족의 울분을 터뜨리고, 13도유생들이 5적의 처형과 조약폐기를 상소하였다. 그리고 19일에는 특진관 이근명(李根命),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 이상설 ( 李相卨 ) 등을 비롯한 조관(朝官) 30여 명이 개별 상소하여 5적의 처형과 조약폐기를 요청하였으나, 국왕의 확고한 대답은 내려지지 않았다.

이에 26일 참정(參政) 심상훈 ( 沈相薰 ),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 민영환 ( 閔泳煥 ), 이근명 등과 함께 백관을 인솔하고, 입궐하여 정청(庭請)의 소두(疏頭)로서 을사조약의 무효, 5적신의 처형, 새로 충량(忠良)한 인재를 뽑아서 외부대신에 임명하고, 각국 공사와 협의하여 5조약을 파기할 것 등을 연명으로 상소하다가 일본군에 의해 강제 해산당하고 표훈원 ( 表勳院 )에 연금되었다.

곧 방면되었으나 다시 대한문(大漢門) 앞에서 석고대죄하며 을사조약의 파기를 주장하다가 또다시 일본 헌병에 강제 연행되었다. 연행당한 뒤 민영환이 대신 소두가 되었다. 그러나 민영환도 곧이어 평리원 ( 平理院 )에 연금되었다가 특명으로 풀려났다. 그 뒤 비분을 참지 못하여 29일 자결하였다.

강제연행된 뒤 곧 가평 시골집에 추방되었으나 30일 다시 상경하였다. 표훈원에 되돌아와 유소(遺疏)와 일본공사 및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상소하였다. 그런데 또다시 일본군이 가마에 태워서 강제추방하자 가마 안에서 음독하여, 조카 민희(民熙)의 집에 당도하여 죽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출처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22

重(중)

25

植(식)

28

鏞(용)

23

鎬(호)

26

煥(환)

29

永(영)

24

源(원)

27

載(재)

30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양주 조씨(楊州趙氏)는 남한(南韓)에 총 5,462가구, 23,22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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