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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정씨(鄭)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鄭(경주정씨)

 

 

본관(本貫): 경주(慶州)

시조(始祖): 지백호(智伯虎)

유래(由來):

 

우리나라 정씨(鄭氏)의 시원(始源)을 이룬 경주 정씨(慶州鄭氏)는 진한국(辰韓國) 사로(斯蘆)의 6촌(村) 중 취산진 지촌장 지백호(智伯虎)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동경지(東京誌)]에 의하면, 지백호(智伯虎)는 기원전 117년(한무제 원수6) 경주 화산(慶州花山)에 강림(降臨)하여 부족국가(部族國家)이던 사로(斯盧)의 여섯 고을 중 취산 진지촌을 다스리면서 신라건국(新羅建國)에 모체(母體)를 이루었고, 서기 32년 (신라 유리왕 9) 그의 현손대(玄孫代)에 와서 다른 다섯 촌장들과 함께 사성(賜姓)받을 때 본피부(本彼部)로 개칭(改稱)되면서 정씨(鄭氏)의 성(姓)을 하사(下賜)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신라 법흥왕 때 문화(文和)로 시호를 받았고, 656년(태종무열왕 3)에 감문왕에 추봉되었다.

그후 경주 정씨는 시조의 후대로 내려오면서 문헌공파(文獻公派). 양경공파(良景公派). 월성위파(月城尉派). 평장공파(平章公派) 등 크게 4파로 갈라졌고, 지손(支孫) 계통에서는 30여 본(本)으로 본적(本籍)되어 우리나라 모든 정씨(鄭氏)의 대종(大宗)을 이루었다.

 

가문의 중요 인물

 

정진후(鄭珍厚)

첫째 문헌공파에서는 시조의 42세손 진후(珍厚: 검교첨의 평리 극중의 맏아들)가 고려(高麗)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夫)로 호부상서(戶部尙書)와 정당문학(政堂文學) 겸 판군기시윤(判軍器寺尹)을 지내고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정현영(鄭玄英)

진후의 증손으로 좌복야(左僕射)를 지낸 위(偉)의 아들 현영(玄英)은 호부 상서와 수문전태학사를 거쳐 벽상삼중대광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한 후 문헌(文獻)으로 시호(諡號)를 받았으므로 문헌공파의 파조(派祖)가 되었다.

 

정인조(鄭仁祚)

정헌대부로 이부 상서를 지내고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던 종철(宗哲)의 둘째 아들 인조(仁祚)는 공양왕 때 길주 목사(吉主牧使)와 병부 시랑(兵部侍郞)을 역임한 맹장(猛將)으로 이성계와 함께 일본군 장군 아지(阿只)를 격퇴시켜 더욱 무명을 떨쳤다.

 

정홍덕(鄭弘德)

조선 세종(世宗) 원년(元年)에 무과(武科)에 급제했던 홍덕(弘德: 사간원 정언 인량의 아들)은 단종(端宗)이 손위하고 죽음을 당하자 팔순노모(八旬老母) 와 함께 남원(南原)의 교룡산(蛟龍山) 아래에 은거(隱居)하며 단(壇)을 만들고 단종(端宗)과 사육신(死六臣)의 기일(忌日)에 분향하고 곡(哭)을 했다.

 

정지년(鄭知年)

1395(태조 4) ∼ 1462(세조 8). 조선 전기의 문신 · 학자. 본관은 경주 ( 慶州 ). 자는 유영(有永), 호는 노송정(老松亭). 아버지는 염(廉)이며, 어머니는 최씨(崔氏)로 묵(默)의 딸이다. 1438년(세종 20) 하위지 ( 河緯地 ) · 성삼문 ( 成三問 ) 등과 함께 문과에 급제하였다.

중훈대부 ( 中訓大夫 ) 성균관사예로 있을 때 단종이 손위(遜位:임금의 자리를 사양함)하자 전리(田里)로 퇴거하여 경서(經書)연구에 전념하였다. 정자 이름을 ‘ 노송정 ’ 이라 하고, 자호(自號)를 ‘ 망칠(望七) ’ 이라 하였는데, 육현(六賢)에 하나를 첨가한다는 뜻이다.

뒤에 좌찬성에 증직되고, 계림군(鷄林君)에 봉하여졌다. 남원 덕암서원 ( 德巖書院 ), 순천 옥계사 ( 玉溪祠 ), 공주 숙모전(肅慕殿)에 배향되었다. 그에 대한 ≪ 노송실기 ≫ 가 있다.

 

정효항(鄭孝恒)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 慶州 ). 증병조참판 인검(仁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이조판서 염(濂)이고, 아버지는 사예 ( 司藝 ) 지년(知年)이며, 어머니는 현감 주창(周昶)의 딸이다.

1447년(세종 29)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451년(문종 1) 생원으로 증광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였고,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부교리로서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고, 1467년 (세조 13) 지평이 되었다.

성종 때 서거정 ( 徐居正 ) 등과 함께 ≪동국여지승람≫·≪동국통감≫ 편수에 참여하고, 벼슬이 대사성을 거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정효상(鄭孝常)

1432(세종 14)∼1481(성종 1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 慶州 ). 자는 가구(可久). 인검(仁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염(濂)이고, 아버지는 증좌찬성 화년(和年)이다.

1451년(문종 1) 생원시에 합격하고, 1454년(단종 2) 별시문과에 을과로 장원하여 집현전부수찬이 되고, 1455년(세조 1) 2월 원종공신 ( 原從功臣 ) 2등에 책록되었다. 이듬해 6월 경연사경(經筵司經)으로 있으면서 단종복위사건에 연루된 혐의를 받았으나 화를 면하였다.

1459년 6월 승문원부교리로서 한가한 관직에 제수하여 학문에 전념하게 하는 한관독서(閑官讀書)의 혜택을 입었다. 이 후 감찰·이조좌랑·세자시강원필선을 거쳐 1466년 문과중시에 급제하였다.

1468년(예종 즉위년) 10월 동부승지에 발탁되어 곧 남이 ( 南怡 )의 옥사를 다스리는 데 공을 세워 익대공신 ( 翊戴功臣 ) 3등에 책록되고, 가선대부에 올라 계림군(鷄林君)에 봉하여졌다. 그 뒤 우부승지·좌부승지·도승지를 거쳐 1471년(성종 2) 3월 성종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다시 좌리공신 ( 佐理功臣 ) 3등에 책록되고 정헌대부 ( 正憲大夫 )에 올랐다.

1472년 경상도관찰사를 겸하였고, 1474년 공조판서에 승진, 이어 이조판서가 되었다. 1476년 진하사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477년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학문이 뛰어나고 우애가 돈독하여 명성이 있었다. 시호는 제안(齊安)이다.

 

정지운(鄭之雲)

1509(중종 4)∼1561(명종 16).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경주 ( 慶州 ). 자는 정이(靜而), 호는 추만(秋巒). 경기도 고양 출신. 인필(寅弼)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했으며, 김정국(金正國)· 김안국 ( 金安國 )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나중에 이황 ( 李滉 )에게 ≪심경≫·≪역학계몽≫ 등을 배웠다.

20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23세에 어머니 상을 당해 지극한 효심으로 예를 다하였다. 스승 김정국이 죽은 뒤에도 심상 ( 心喪 ) 3년을 지냈다. 집이 너무 가난해 끼니를 걸러도 개의치 않았으며, 마음이 바르고 악을 매우 미워하는 성격이었다. 일찍이 벼슬에 천거하는 이가 있었어도 나가지 않고 사양하였다.

〈천명도설 天命圖說〉을 지어 조화 ( 造化 )의 이(理)를 구명하고, 그 뒤 1553년(명종 8) 이황의 의견을 따라 다시 정정하였다. 먼저 지은 것을 〈천명구도 天命舊圖〉라 하고, 뒤에 정정한 것을 〈천명신도 天命新圖〉라 해 현재까지 전해 온다. 우리 나라에서 〈천명도설〉을 시도한 것은 그가 처음인 것으로 본다.

물론 권근 ( 權近 )의 ≪입학도설 入學圖說≫과 같은 도상학(圖象學)이 있기는 하나 〈천명도설〉은 그의 독창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김인후 ( 金麟厚 )가 지은 〈천명도〉가 있다고 그 선후를 논하기도 하나, 정지운의 〈천명도설〉의 구도(舊圖)는 독창적이어서 최초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이것이 뒤에 사칠논쟁(四七論爭)의 발단이 되었다.

1561년(명종 16) 제자인 풍덕군수 안홍 ( 安鴻 )의 주선으로 천마산(天磨山)에 유람갔다가 병이 들어, 돌아오는 도중에 승평부(昇平府 : 지금의 개풍군 풍덕리)의 강구(江口)에서 죽었다. 대표적인 제자로는 정지림(鄭之霖)· 정식 ( 鄭軾 )·김은휘(金殷輝) 등이 있다.

고양의 문봉서원(文峰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1640년(인조 18)에 목판본으로 간행된 ≪천명도설≫이 있다.

 

정사준(鄭思竣)

을묘왜변(乙卯倭變)에 추자도(楸子島)에서 수 차레 전공을 세워 함흥 판관(咸興判官)에 제수되고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이르렀던 승복(承復)의 아들 사준(思竣)과 사횡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역전의 무공을 세워 헌종(憲宗) 때 창의비(倡義碑)와 대첩비(大捷碑)가 세워져서 가문에 절맥(節脈)을 세웠다.

 

정창문(鄭昌文)

호조 참의(戶曹參議) 윤근(允謹)의 아들 창문(昌文)은 부친이 임진왜란에 진주성(晋州城)에서 순절하자 원한을 마음속에 새겨 정유재란 때 10촌 형(兄) 원길(元吉)과함께 남원(南原) 율치(栗峙)에서 적군 수십명을 사로 잡았으나 용성(龍城) 북문(北門)에서 적의 계략에 휘말려 순절하였다.

 

정희계(鄭熙啓)

?∼1396(태조 5).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경주 ( 慶州 ). 호는 양성헌(養性軒). 아버지는 문하평리 ( 門下評理 ) 월성군 휘(月城君暉)이며, 부인은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의 질녀이다.

공민왕 때 총애를 받아 근시(近侍)가 되었다가 대호군에 이르렀고, 우왕 때 최영 ( 崔瑩 )의 막하에 들어가서 서북면도순문사를 거쳐 밀직사에 이르렀다. 최영이 패한 뒤 이성계 ( 李成桂 )가 실권을 잡자 그의 인친(姻親)임을 고려하여 판자혜부사(判慈惠府事)에 등용하였다.

그러나 1390년(공양왕 2) 이성계를 해치려는 이른바 이초(李初)의 옥(獄)에 연루되어 안변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392년 이성계의 도움으로 판개성부사에 이어 문하평리로서 응양위상호군(鷹揚衛上護軍)을 겸임하였다.

이 해 이성계를 추대하는 데 참여하여 개국공신 1등으로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팔위상장군(八衛上將軍)에 올라 계림군(鷄林君)에 봉하여졌다. 이어 판팔위사(判八衛事)·좌참찬 등을 거쳐 판한성부사로 죽었다. 학식이 부족하고 사람됨이 가볍다는 세인의 평을 받았다.

개국 당시 세 정씨(鄭氏)가 삼한 ( 三韓 )을 멸한다는 도참설이 널리 퍼졌는데, 사람들은 그들이 정도전 ( 鄭道傳 )· 정총 ( 鄭摠 )·정희계를 가리킨다고 믿었다 한다. 시호는 양경(良景)이다.

 

정승조(鄭承祖)

희계의 현손(玄孫) 승조(承祖)는 김종직(金宗直)의 문인(門人)으로 성종(成宗)때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감찰(監察)을 거쳐 연산군(燕山君) 때 검열(檢閱)에 재직 중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스승인 김종직은 사사(賜死)되고, 그는 곽산(郭山)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와 다시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학문연구에만 진력했다.

 

정발(鄭撥)

1553(명종 8) ∼ 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경주 ( 慶州 ). 자는 자고(子固), 호는 백운(白雲). 판윤 지례(之 慮 )의 고손으로, 할아버지는 돈녕부도정 세현(世賢)이고, 아버지는 군수 명선(明善)이며, 어머니는 관찰사 남숙(南淑)의 딸이다.

1579년(선조 12) 무과에 급제, 선전관이 되고, 곧바로 해남현감 · 거제현령이 되었다. 이어 비변사의 낭관이 되었으며, 위원군수 · 훈련원부정이 되었다. 1592년 절충장군 ( 折衝將軍 )의 품계에 올라 부산진첨절제사가 되어 방비에 힘썼다.

이 해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부산에 상륙한 왜병을 맞아 분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마침내 성이 함락되고 그도 전사하였다. 이 때 첩 애향(愛香)은 자결하였고, 노(奴) 용월(龍月)도 전사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동래의 충렬사(忠烈祠:뒤의 樂安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정흔(鄭昕)

발(撥)의 아들 흔(昕)은 정유재란 때 조정에서 복수청(復讐廳)을 창설하여 젊은 장정(壯丁)을 모집하자 나라에 은혜를 보답하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모집에 응하고는 가산(家産)을 털어 군수(軍需)에 힘썼으며, 사량만호(蛇梁萬戶)가 되어 왜군을 섬멸하여 전라 수사(全羅水使)에 승진되었고 첨정(僉正)과 정선 현감(旌善縣監) 등을 역임했다.

 

정호(鄭浩)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돌격대장이 되어 당포(唐浦). 노량(露梁) 해전에서 적선 300여 척을 대파하여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정응신(鄭應莘)

인조(仁祖) 때 강화(講和)에 항거하다가 해남(海南)으로 유배되어 화원(花源)에 살았다.

 

정인중(鄭麟重)

숙조(肅宗) 때 <오사인(五士人)>의 한 사람으로 4대신(4대신: 조태채.김창집.이건명.이이명)과 더불어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수호했다.

 

정시휘(鄭時輝), 정동윤(鄭東潤)

학행(學行)이 탁월하여 사림(士林)의 추앙을 받았던 시휘(時輝)와 동윤(東潤)등이 양경공파(良景公派)를 대표했다.

 

정광업(鄭光業)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 금실(金實)의 아들로 부마(駙馬)가 되어 월성위(月城尉)에 봉해졌던 이기( 奇)의 후손에서는 선무원종2등공신(宣武原從二等功臣)에 올랐던 구(龜)의 아들 광업(光業)과 홍업(弘業) 형제가 유명했다.

선조(宣祖) 때 제용감 봉사(濟用監奉事)를 역임했던 광업(光業)은 임진왜란 때 숙부 원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참전했다가 장렬하게 순절하였고, 그의 아우 홍업(弘業)은 학행(學行)으로 이름났었다.

 

정공청(鄭公淸)

1581년(선조 9) 무과(武科)에 급제했던 공청(公淸)은 진도 군수(珍島郡守)를 역임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 호신(好臣)과 함께 창의(倡義)하여 안강(安康). 경주(慶州). 울산(蔚山). 동래(東萊) 등지에서 전공을 세워 무공을 떨쳤다.

 

정극온(鄭克溫)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던 손경(遜卿)의 둘째 아들 극온(克溫)은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내고 북벌남정(北伐南征)에 대공을 세워 대장군(大將軍)에 올랐으며,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좌복야(左僕射)를 거쳐 판삼사 참지정사(判三司參知政事)에 이르렀다.

 

정필(鄭弼)

극온의 아들 필(弼)이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으로 중추원사(中樞院使)와 한림학사(翰林學士). 평장사(平章事) 등을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고 사후(死後)에 계림군(鷄林君)에 추봉되었다.

 

정기(鄭其)

한편 조선(朝鮮) 태종조(太宗朝)에 유일로 천거되어 과천(果川). 의성(義城) 등지의 현감(縣監)을 역임했던 기(其)는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과 호조 정랑(戶曹正郞)을 지내고 봉렬대부(奉列大夫)로 한성부 소윤(漢城府少尹)에 추증되었으며, 슬하에 아들 5형제가 크게 현달하여 평장공파(平章公派)의 중추적인 인맥(人脈)을 형성하였다.

 

정차온(鄭次溫)

조선 세종(世宗) 때 학행으로 천거되어 언양 현감(彦陽縣監)과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던 차온(次溫)은 상주 판관(尙州判官)을 거쳐 권농병마절도사(勸農兵馬節度使)를 지냈으나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어린 단종(端宗)을 쫓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평양 판관(平壤判官)을 마다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후생강학에 진력했으며, 그이 아우 차량(次良)은 부호군(副護軍)을지냈다.

 

정차공(鄭次恭)

기(其)의 셋째 아들 차공(次恭)은 세종(世宗) 때 등과(登科)하여 영천 군수(永川郡守)와 평산도호부사(平山都護府使)를 지내고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봉직되었다.

 

정차검(鄭次儉)

기의 넷째 아들 차검(次儉)은 수의교위(修義校尉)로 부사직(副司直)을 역임했다.

 

정차양(鄭次讓)

청백수절(淸白守節)은 정(貞)이요 정직무사(正直無邪)는 간(簡)이라하여 정간(貞簡)으로 시호(諡號)를 받았던 차양(次讓)은 1452년(문종2)에 학해으로 봉직랑(奉直郞)에 천거되어 해남 현감(海南縣監)을 지냈으며, 단종(端宗)이 폐위되자 형(兄)들과 더불어 5형제가 모두 관직에 올랐다가 고향에 돌아오면서 함께 다리를 건너왔는데, 세상 사람들은 이 다리를 <오영교(五榮橋)>라 불렀다.

 

정대영(鄭大英)

견(堅)의 아들 대영(大英)이 임진왜란 때 사촌동생 대방(大方: 후의 아들)과 더불어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휘하에서 창의(倡義)하여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지키는데 공을 세웠다.

 

정대방(鄭大方)

대방(大方)은 대구 팔공산(八公山)에서 권 제(權 濟). 최 입(崔 笠). 조호익(曺好益). 정경세(鄭經世) 등 31명과 회맹(會盟)하고 전투에 임하여 공을 세웠고, 정유재란 때는 대영(大英)과 더불어 화왕산성(火旺山城) 방어에 참전하여 무공을 세웠다.

 

정구(鄭構)

선조 때 음성 현감(陰城縣監)을 지냈던 구(構)는 경주 정씨를 더욱 빛냈다.

 

 

부산첨사 鄭撥(정발) 선생의 일화.

 

鄭撥(정발)의 자는 자고(子固), 호는 백운(白雲)으로 본관은 경주이다.

그는 무과를 거쳐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가 해남현감을 거쳐 북변 종성에 여진족의 침략이 있어 원수의 막하로 부임하여 구란을 평정하였다. 그 뒤 거제현령을 지내고 들어와 비변사의 낭요(郎僚)가 되어 팔사의 낭관을 겸하고 있다가 위원군수로 제수되기도 했다.

 

강섬의 천거로 훈련원 부정(副正)이 되고 다시 사복시로 옮겼다. 이때부터 왜인이 침략할 기미가 보였는지 조정에서는 드디어 그를 절충장군으로 품계를 올려 부산진첨사로 삼았으니 이 해가 바로 임진왜란 발발해인 1592년이었다.

 

부산으로 부임할 때 아들과 동행하였다.

왜인의 침입이 예상되어 아들을 억지로 고향으로 돌려보내고자 하였다. 아들은 남아있기를 간청하니 "너는 돌아가서 내 어머니와 할머니를 봉양하라"면서 종자를 시켜 떠나도록 하였다.

한편, 남행하고 있던 조방장 이정헌을 막빈으로 초빙하여 부산진성의 방위를 함께 의논하였다.

 

임진 413일 저녁 왜적의 제118,700명이 부산앞바다에 쇄도하였다.

13일 당일에는 적군은 절영도 전방에서 가박하고 공격은 개시하지 않았다. 다만 왜군의 장인 소서행장(小西行長)의 막료인 대마도 주()인 종의지(宗義智)가 약간의 군사를 거느리고 상륙하여 부산진성의 경비 상황을 정탐하고는 휘하 장수인 평조신(平調信)을 시켜, 군의 내침의 사유를 말하고는 길을 빌리는 가도를 요구하는 글을 목판에 쓴 것을 성 밖에 세웠다고 한다.

이때 정발은 가도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고. 그리고 일전을 불사한다는 굳은 결의를 하고 전투태세를 공고히 하였다.

 

이튿날 14일 적은 예측한대로 부산포 우암에서 삼분하여 결진하고는 배를 포안에 붙여 차례로 상륙하여 성을 공격하였다. 적군은 성을 첩첩으로 포위하였다. 절대다수의 병력을 가진 적군은 신무기인 조총을 마구 발사하여 천지를 진동시키며 성을 넘어오려고 하였다. 이에 아군은 이를 제지하기 위해 4면에서 혈전을 벌였다. 총탄이 터지는 소리 화살이 나는 소리 순식간에 처절한 공반전이 전개되었다. 이때 정발은 휘하의 장사를 거느리고 성내를 순시하며 독전하였다.

 

, 성민은 적을 물리치지 않으면 모두 죽게된다는 마음으로 분전을 계속하였다. 정발은 이미 예측한 일이나 최후의 일각까지 싸우다가 무인답게 죽을 각오를 하고 더욱 사졸을 격려하며 자신도 분전하였다. 그러나 노도와도 같이 밀어닥쳤던 적군의 일부 군사들 이 북쪽의 허술한 곳을 넘어 쳐들어왔다. 따라서 순식간에 성중(城中)은 혼란에 빠졌다. 이에 피아쌍방 육박전이 전개되고 적의 무차별 살육이 시작되었다. 이 가운데 정발도 탄환에 맞아 전사하고 사기는 급격히 떨어졌다. 파상적으로 밀고 들어오는 적의 수는 늘기만 했으며 소수 군민의 필사적인 저항으로는 이를 막을 도리가 없었고 차례로 순사하며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부산진성 전투에서 순사한 이의 이름을 남기고 있는 자는 적은데 순사한 애향, 용월은 정공단에 합사하고 있다. 영조 37(1761 좌수사 박재하가 공의 전망비를 세웠으며, 영조 42(1766)첨사 이광국이 정공단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조정에서는 시호를 내리어 충 장공(忠壯公)이라 하고 좌찬성을 증하였다.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24

行(행)

29

鎬(호),鉉(현)

34

鎰(일)

25

海(해)

30

澤(택),泰(태)

35

求(구)

26

東(동)

31

稷(직)

36

樂(락)

27

薰(훈),煥(환)

32

愿(원)

37

 

28

址(지),奎(규)

載(재)

33

埰(채)

38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경주 정씨(慶州鄭氏)는 남한(南韓)에 총 70,645가구, 300,73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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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2 영일 정1.jpg 연일정씨: 영일정씨(鄭) [1] 청남 14-08-30 9630
641 영덕정씨(鄭) 청남 14-08-30 3018
640 야성 정.jpg 야성정씨(鄭) 청남 14-08-30 3085
639 서산 정.jpg 서산정씨(鄭) 청남 14-08-30 3193
638 서경정씨(鄭) 청남 14-08-30 2435
637 봉화 정.jpg 봉화정씨(鄭) 청남 14-08-30 3680
636 동랴 종.jpg 동래정씨(鄭) 청남 14-08-30 6751
635 낭야 정.jpg 낭야정씨(鄭) 청남 14-08-30 3295
634 나주 정.jpg 나주정씨(鄭) 청남 14-08-30 3438
633 김포 정1.jpg 김포정씨(鄭) 청남 14-08-30 2523
632 금성 정.jpg 금성정씨(鄭) 청남 14-08-30 4386
631 광주 정.jpg 광주정씨(鄭) 청남 14-08-30 3332
630 고성 장.jpg 고성정씨(鄭) 청남 14-08-30 2936
경주 정.jpg 경주정씨(鄭) 청남 14-08-30 4474
628 한산점씨(占) 청남 14-08-30 2598
627 문경 전.jpg 문경전씨(錢) [1] 청남 14-08-30 3696
626 하음전씨(田) [3] 청남 14-08-30 3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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