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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정씨(鄭)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鄭(광주정씨)

 

 

본관(本貫): 광주(光州)

시조(始祖): 정신호(鄭臣扈)

유래(由來):

 

광주 정씨(光州鄭氏)의 시조(始祖) 정신호(鄭臣扈)는 고려 충선왕(忠宣王)과 충숙왕조 (忠肅王朝)에 걸쳐 상호군(上護軍)을 지내고 봉은사 진전직(奉恩寺眞殿直)으로 삼중대광 문하찬성사(三重大匡門下贊成事)에 추봉되었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광주(光州)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정세운(鄭世雲)

? ∼ 1362(공민왕 11). 고려 후기의 장군. 본관은 광주(光州). 출신지는 장택현(長澤縣 : 지금의 전라남도 장흥)이다. 공민왕이 세자 때 함께 원나라에 들어가 숙위하고, 왕으로 즉위하자 호종한 공으로 1등 공신이 되어 김용 ( 金鏞 )과 더불어 총애를 받았다.

1354년(공민왕 3) 원나라가 고우(高郵)에 진을 치고 있던 장사성(張士誠)을 토벌하기 위해 사신을 보내어 그를 비롯한 여러 장수와 서경의 수군 300명, 또 날쌔고 용감한 병사들을 징발해 8월 10일을 기한으로 연경(燕京)에 모여 공격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그가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지원하였다.

1359년 기철 ( 奇轍 )을 주살해 사직을 안보한 공으로 남양후(南陽侯) 홍언박 ( 洪彦博 ), 참정상의(參政商議) 경천흥 ( 慶千興 )과 함께 1등 공신이 되었다. 그 해 11월 압록강이 언 것을 이용해 홍건적이 공격해 들어오자 다음 해 정월에 서북면도순찰사로 임명되어 이에 대비하였다.

1361년 홍건적이 군사 10여만 명을 이끌고 다시 공격해오자, 서북면군용체찰사(西北面軍容體察使)에 임명되어 절령( 上 嶺 : 자비령)의 성책을 지켰다. 그러나 성책이 무너지자 곧 왕을 호종해 복주(福州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로 남행하였다.

그는 성품이 충성스럽고 청백해, 밤낮으로 울분을 참지 못하고 적을 소탕할 것을 스스로 맹세하였다. 왕에게 빨리 조서를 내려 민심을 위로하고 제도(諸道)의 군사를 징발해 적을 칠 것을 주청(奏請)하였다. 이에 왕은 그를 총병관으로 임명해 절월(節鉞 : 생산권을 상징하는 수기와 도끼)을 주어 모든 군사를 총독하게 하였다.

이 때 홍건적은 개경을 함락시키고 이 곳을 본거지로 삼아 각지를 공격하고 있었다. 이에 1362년 정월 안우 ( 安祐 ) · 이방실 ( 李芳實 ) · 황상 ( 黃裳 ) · 한방신 ( 韓方信 ) · 이여경 ( 李餘慶 ) · 김득배 ( 金得培 ) · 안우경 ( 安遇慶 ) · 이구수 ( 李龜壽 ) · 최영 ( 崔瑩 ) 등 여러 장수와 함께 군사 20여만 명을 거느리고 나갔다. 개경(開京)을 포위하고 공격을 가해 적들을 압록강 밖으로 몰아내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의 공을 시기한 김용이 왕의 뜻을 거짓으로 꾸미고, 안우 · 이방실 · 김득배를 비밀히 꾀어 그를 살해하였다. 그 뒤 왕이 그를 살해한 죄를 논핵했고, 첨의정승(僉議政丞)을 추증해 장사를 지냈다.

홍건적을 피해 복주로 피난했을 때 호종한 공과 경성을 수복한 공을 추록해 1등 공신으로 벽상도형(壁上圖形)되었다.

 

정귀진(鄭龜晋)

귀진(龜晋)은 생원(生員)으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다.

 

정인인(鄭麟仁)

조선조(朝鮮朝)에서 연산군(燕山君) 때 목사(牧使)를 역임했다.

 

정만종(鄭萬鐘)

명종(明宗) 때 형조참판(刑曹參判)과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했다.

 

정이주(鄭以周)

1530(중종 25) ∼ 1583(선조 1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방무(邦武) · 유성(由盛), 호는 성재(醒齋). 찬우(纘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순인(純仁)이고, 아버지는 성균진사 경( 醵 )이며, 어머니는 평강채씨(平康蔡氏)로 진사 순(恂)의 딸이다.

1558년(명종 13) 생원시 ·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568년(선조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갑과로 급제하여, 의영고직장(義盈庫直長)에 초수되었다. 이 후 예문관검열 · 승정원주서 · 성균관전적을 거쳐, 공조 · 형조 · 예조의 좌랑을 역임하였다.

예조좌랑으로 재직시에는 기사관을 겸하여 ≪ 명종실록 ≫ 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성절사 ( 聖節使 )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 후 정언이 되어 활발한 언론활동을 전개하였으며, 평안도도사를 거쳐 1573년 지평이 되고, 직강과 형조 · 예조 · 호조의 정랑을 지낸 뒤 경상도경차관으로 나갔다.

이 때 민폐를 많이 끼치고, 무뢰배인 서제(庶弟)를 이목으로 삼아 토색(討索)을 심히 한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으나, 대사헌 심의겸 ( 沈義謙 )이 이를 변호하여 병을 명목으로 체직되었다. 1576년 경기어사를 거쳐 헌납에 이르렀다.

이 때 심의겸 · 김효원 ( 金孝元 )의 대립이 있자, 대사간 정지연 ( 鄭芝衍 ), 부제학 이이(李珥) 등과 더불어 그들을 외보(外補)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후 장령 · 봉상시첨정 · 사예 · 사성 · 사섬시정을 거쳐, 1578년(선조 11) 다시 어사로서 양계 · 하삼도를 순무하고 정주목사를 역임한 뒤 춘천으로 내려가 있다가 죽었다. 저서로는 ≪ 성재집 ≫ 이 있다.

 

정사호(鄭賜湖)

1553(명종 8) ∼ ? 조선 중 ·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몽여(夢輿), 호는 화곡(禾谷). 순인(純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경( 醵 )이고, 아버지는 장령 이주(以周)이며, 어머니는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 정창손 ( 鄭昌孫 )의 5대손으로 부사과 응서(應瑞)의 딸이다.

1573년(선조 6) 사마시에 합격하고, 1577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주서로 있었으나 1582년 경망(輕妄)하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586년 안동부사가 되었고, 1599년 호조참의로 구관당상(句管堂上)을 겸직하였다.

대사헌으로 진하사은사(進賀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이조참의 · 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607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정철 ( 鄭澈 )의 아들 종명(宗溟)을 안성군수로 삼은 책임을 지고 파직되었다. 그러나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병조참판에 복직되었다.

곧 이조참판에 올라 동지춘추관사가 되어 ≪ 선조실록 ≫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한성부우윤을 거쳐 1611년(광해군 3) 대사헌 · 지의금부사를 지냈으며, 1612년 평안도관찰사가 되었으나 김직재 ( 金直哉 )의 무옥(誣獄)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이듬해 서인으로서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 ( 金悌男 )의 역모에 관련하였다는 혐의를 받았으나 죄가 없어 경기도관찰사 · 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일찍이 임진왜란 때 군량을 관장하여 보급에 힘썼으며, 소를 올려 정인홍 ( 鄭仁弘 ) · 이이첨 ( 李爾瞻 ) 등을 논책하였다.

글씨를 잘 썼으며, 작품으로는 연성대첩비(延城大捷碑)가 있다. 청주 수락서원(壽樂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敏)이다.

 

정선(鄭敾)

1676(숙종 2) ∼ 1759(영조 35). 조선 후기의 화가.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원백(元伯), 호는 겸재(謙齋) · 겸초(兼艸) · 난곡(蘭谷). 아버지는 시익(時翊)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이다. 2남 1녀 중 맏아들이다. 그의 선세(先世)는 전라남도 광산 · 나주 지방에서 세거한 사대부 집안이었다. 뒤에 경기도 광주로 옮기고, 고조부 연(演) 때 서울 서쪽 〔 西郊 〕 으로 다시 옮겨 살기 시작하였다.

〔생애〕 1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늙은 어머니를 모시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하며 그 뒤 김창집 ( 金昌集 )의 도움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위수(衛率 : 王世子를 따라 호위하는 직책)라는 벼슬을 비롯하여, 1729년에 한성부 주부, 1734년 청하 현감을 지냈다. 또 자연 · 하양의 현감을 거쳐 1740년경에는 훈련도감 낭청(訓練都監郎廳), 1740년 12월부터 1745년 1월까지는 양천의 현령을 지냈다.

그 뒤 약 10년 동안은 활동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1754년에 사도시 첨정(司 歸 寺僉正), 1755년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그리고 1756년에는 화가로서는 파격적인 가선대부 지중추부사(嘉善大夫知中樞府事)라는 종2품에 제수되기까지 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주가 있었다는 기록과 현재 남아 있는 30세 전후의 금강산 그림 등을 통하여 젊었을 때 화가로서 활동한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40세 이전의 확실한 경력을 입증할 만한 작품이나 생활 기록 자료는 없다. 그가 중인 ( 中人 )들이 일하고 있었던 도화서 화원(圖 怜 署 怜 員)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그의 집안은 원래 사대부 출신으로 신분상의 중인은 아니며 몇 대에 걸쳐 과거를 통하여 출세하지 못한 한미한 양반이었다. 그리고 그의 뛰어난 그림 재주 때문에 관료로 추천을 받았으며 마침내 화단에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지금까지 막연한 중국의 자연을 소재로 하던 시나 문학의 영향에서 이루어진 산수화의 화제( 怜 題)는 빛을 잃고, 대신 우리 자연으로 대치하게 되는 시기에 태어난 그는 마침 중국에서 밀려 들어오는 남종화법(南宗 怜 法)이나 오파(吳派)와 같은 새로운 산수화 기법에 접하게 되었다. 또 당시 다시 유행하게 된 시서화 일체 사상을 중시하던 문인들 사이에 참여하여 자신의 교양을 높이거나 창작하는 계기를 얻게 되었다.

특히 이병연(李秉淵) 같은 시인과의 교우를 통하여 자기 회화 세계에 대한 창의력을 넓히고 일상적 생활의 주제를 회화로 승화시킬 수 있는 자극을 받게 되었다. 우리 나라 자연을 다룬 그의 화제들은 당시 기행문의 소재였던 금강산, 관동 지방의 명승 그리고 서울에서 남한강을 오르내리며 접할 수 있는 명소들과 그가 실제 지방 수령으로 근무하던 여가에 묘사한 것들이다.

그밖에도 자기 집과 가까웠던 서울 장안의 사철의 경치들, 특히 인왕산 동북 일대의 계곡과 산등성이들이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문인지우(文人知友)들과 관련되는 여러 곳의 명소나 특수한 고장들의 자연을 다루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사도(故事圖) 같은 중국적 소재도 많이 다루고 있으며, 성리학자들의 고사도 제작에서 그의 관심거리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다.

〔예술 세계〕 회화 기법상으로는 전통적 수묵화법(水墨 怜 法)이나 채색화(彩色 怜 )의 맥을 이어받기도 하지만, 자기 나름대로의 필묵법(筆墨法)을 개발하였다. 이것은 자연미의 특성을 깊이 관찰한 결과이다. 예를 들면, 호암미술관 ( 湖巖美術館 ) 소장의 〈 인왕제색도 仁王霽色圖 〉 에서는 인왕산의 둥근 바위 봉우리 형태를 전연 새로운 기법으로 나타내었다. 즉, 바위의 중량감을 널찍한 쉬운 붓으로 여러 번 짙은 먹을 칠하여 표현한다(積墨法).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의 〈 통천문암도 通川門巖圖 〉 에서는 동해안 바위 구조를 굵직한 수직선으로 처리하여 세밀한 붓놀림이나 채색 · 명암 등 효과를 무시하면서도 물체의 외형적 특성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다. 두드러진 붓 쓰임의 한 예는 서울 근교나 해금강은 물론 우리 나라 도처에서 볼 수 있는 소나무의 묘사법이다. 몇 개의 짧은 횡선과 하나의 굵게 내려긋는 사선(斜線)으로 소나무의 생김새를 간략하면서도 들어맞게 그린다.

호암미술관 소장의 1734년 작 〈 금강전도 金剛全圖 〉 (130.7 × 95 ㎝ )는 금강내산(金剛內山)을 하나의 큰 원형 구도로 묶어서 그렸다. 이는 기법상 천하도 ( 天下圖 )라는 전통적인 지도 제작 기법에 근거하며, 금강내산을 한 떨기 연꽃 또는 한 묶음의 보석 다발로 보는 종래의 자연 묘사시에서 조형적 원리(造形的原理)를 따오는 기발한 착상이다.

우선, 원형을 대강 오른쪽의 골산(骨山 : 금강내산의 화강암 바위로 된 삐쭉삐쭉한 모습)과 왼쪽의 토산(土山 : 금강내산의 수림이 자라는 둥근 멧부리)으로 구분하되, 골산은 예리한 윤곽선으로, 토산은 그의 독특한 침엽수법(針葉樹法)과 미점(米點)으로 묘사한다. 그 다음 이 원형 외곽을 엷은 청색으로 둘러 여타 공간을 생략함으로써 산 자체만을 돋보이게 한다.

골짜기마다 흐르는 물은 원의 중심이 되는 만폭동(萬瀑洞)에 일단 모이게 하여 구도상의 중심을 이룬 다음, 화면의 앞쪽으로 흘러 장안사 비홍교(長安寺飛虹橋)를 지난다. 이 그림은 실제의 자연을 새로 해석하여 조형화한 좋은 예이며, 오른편 위쪽에 쓴 제시(題詩)의 내용과 형태가 일치한다.

정선의 회화 기법은 다른 화가들에 비하여 아주 다양하여 정밀 묘사법에서부터 간결하고 활달한 사의화(寫意 怜 : 묘사 대상의 생긴 모습을 창작가의 의도에 따라 느낌을 강조하여 그린 그림)까지 있어, 자연에서 얻은 인상을 나름대로 재구성하는 과감성과 회화의 원리를 발전시키는 등 여러 단계의 작품을 보여 준다. 이 가운데 특히, 우리 주위에서 친숙하게 대할 수 있는 구체적 자연을 특징짓는 기법이 독창적인 면이다.

이러한 그의 창의력은 그가 즐겨하였다는 역(易)의 변화에 대한 이해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림의 소재 · 기법 어느 것에나 구애됨이 없이 소화하였으며, 심지어 지두화(指頭 怜 )까지도 실험하고 있다. 또한 문인들과의 가까운 교류와 자신의 성리학에 대한 지식 등 중국 고전 문학과 사상도 두루 섭렵하여 이들을 조형 세계에 반영하고 있다.

특히 이미 청나라 문인들 사이에서도 유행한 시화첩(詩 怜 帖) 같은 것은 선비들간에 시 짓고 그림 그리기와 글씨 쓰기 놀이를 통하여 이루어지는데, 실경 산수화를 다루는 경우에는 시인들과 함께 하는 여행에서 이루어질 때도 있다.

정선은 이미 말한 노론의 명문인 안동 김씨네와의 관계에서 관로(官路)에 진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선진적인 사상과 우수한 수장품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김창흡 ( 金昌翕 )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특정한 파벌에만 치우치지 않은 매우 폭넓은 교우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생애 후반의 계속적인 승진은 영조가 세제로 있을 때 위솔이라는 직책으로 있었기 때문에 입은 배려로 생각된다. 이것이 노년에도 창작에 전념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라고 하겠다.

〔작품 세계〕 정선은 조선시대의 어느 화가보다 많은 작품을 남겼다. 뿐만 아니라 선비나 직업 화가를 막론하고 크게 영향을 주어 겸재파 화법(謙齋派 怜 法)이라 할 수 있는 한국 실경 산수화의 흐름을 적어도 19세기 초반까지 이어가게 하였다. 이들 중에는 강희언 ( 姜熙彦 ) · 김윤겸 ( 金允謙 ) · 최북 ( 崔北 ) · 김응환 ( 金應煥 ) · 김홍도 ( 金弘道 ) · 정수영 ( 鄭遂榮 ) · 김석신 ( 金碩臣 )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두 아들인 만교(萬僑)와 만수(萬遂)는 아버지의 가업을 잇지 못하고 손자인 황(榥)만이 할아버지의 화법을 이어받고 있다.

정선에 관한 기록은 어느 화가보다 많으며 작품 수도 가장 많다. 그러나 그가 지었다는 ≪ 도설경해 圖說經解 ≫ 라는 책과 유고(遺稿) 수십 권은 전하지 않으며, 자작시나 화론( 怜 論)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그를 더 깊이 연구하는 데 아쉬움을 주고 있다. 또한 초년기의 작품이 거의 밝혀지지 않아 화가로서의 생애를 전부 조명하는 데 공백이 있다.

 

정춘수(鄭春洙)

근대에 와서 독립운동가로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춘수(春洙)가 유명하다.

1875(고종 12)∼1951. 종교인.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명옥(明玉), 호는 청오(靑吾). 충청북도 청주 출신. 석준(錫駿)의 아들이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다. 어려서 한문을 배우고 함경남도 원산에서 영국인 선교사를 만나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그 뒤 상경하여 경성신학교(京城神學校)· 협성신학교 ( 協成神學校 )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사가 되어 전국 각지를 돌며 포교활동을 벌였다. 1919년 원산 남촌동교회(南村洞敎會) 목사로 재직하던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석방된 뒤에도 계속 종교운동을 벌여, 1938년 경성기독교연합회의 부위원장에 피선되었으며 1939년에는 조선감리교 제4대 감독으로 피선되었다. 1941년에는 전시 일제 지원단체인 국민총력조선연맹과 조선임전보국단에서 활동하는 등 친일행각을 하였다.

 

정용대(鄭用大)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규합하여 왜군과 싸운 용대(用大)가 가문을 빛냈다.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23

思(사)

27

熙(희)

31

啓(계)

24

胤(윤)

28

庸(용)

32

 

25

雨(우)寧(녕)

29

宰(재)

33

 

26

義(의)

30

憲(헌)

34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광주 정씨(光州鄭氏)는 남한(南韓)에 총 3,446가구, 14,922명이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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