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鄭(김포정씨)
본관(本貫): 김포(金浦)
시조(始祖): 정응문(鄭應文)
유래(由來):
김포 정씨(金浦鄭氏)의 시조(始祖) 정응문(鄭應文)은 김포(金浦) 사람으로 고려조(高麗朝)에서 어사대중승(御史臺中丞)을 지냈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의하면 그는 고려 인종(仁宗)때 동남해 안무사(東南海按撫使)가 되어 남해안(南海岸) 일대에 봉기한 도적을 진압할 때 좌성(佐成) 등 해적 828명이 귀순(歸順) 해 오자, 합천(陜川) 삼기현(三岐縣)에 귀원장(歸原場), 취안장(就安場), 진주(晋州), 의령현(宜寧縣)에 화순장(和順場)을 설치하여 그들을 수용하고 생활의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응문(應文)을 시조(始祖)로 하고 누대(累代)에 걸쳐 토착 세거(土着世居)해 오며 호족(豪族)을 이룬 김포(金浦)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 (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정초(鄭楚)
응문의 증손(曾孫) 초(楚)가 고려에서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냈다.
정곤수(鄭昆壽)
응문의 현손(玄孫) 곤수(昆壽)는 조선(朝鮮)에서 부사(府使)를 역임했다.
정흥인(鄭興仁)
응문(應文)의 7세손이며 중랑장(中郞將) 희(曦)의 아들인 흥인(興仁)이 호조 참판 (戶曹參判)을 지냈다.
정송(鄭松)
홍인의 아들 송(松)이 공조판서(工曹判書)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정을생(鄭乙生)
송(松)의 아들 을생(乙生)이 (副司職)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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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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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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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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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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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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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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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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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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錫(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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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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鉉(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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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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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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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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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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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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祚(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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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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煥(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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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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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김포정씨(金浦鄭氏)는 남한(南韓)에 총 494가구, 2,37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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