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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나주정씨(鄭)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鄭(나주정씨)

 

 

본관(本貫): 나주(羅州)

시조(始祖): 정해(鄭諧)

유래(由來):

 

 나주 정씨(羅州鄭氏)의 시조(始祖)는 고려(高麗)에서 벼슬을 지냈고 군기감(軍器監)에 추증된 정해(鄭諧)이다. 그의 후손들은 나주(羅州)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면서 호족(豪族)을 이루어 해(諧)를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나주(羅州)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정송수(鄭松壽)

해(諧)의 손자(孫子) 송수(松壽)가 부사(副使)를 역임했다.

 

정가신(鄭可臣)

∼1298(충렬왕 24).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나주(羅州). 초명은 흥(興). 자는 헌지(獻之). 향공진사(鄕貢進士) 송수(松壽)의 아들이다. 어려서 승려 천기(天琪)를 따라 개경에 왔으나, 의지할 곳이 없다가 태부소경(太府少卿) 안홍우(安弘祐)의 데릴사위가 되었다.

고종 때 과거에 급제해 요직을 여러 번 거친 뒤 1277년(충렬왕 3) 보문각대제(寶文閣待制)에 임명되었다. 1280년 첨의중찬 ( 僉議中贊 ) 김방경 ( 金方慶 )이 퇴직하기를 청하자 승지로서 왕명을 받아 이를 물리쳤다. 1290년 세자가 원나라에 갈 때 세자의 스승으로 민지 ( 閔漬 )와 함께 수행하였다.

1291년에 정당문학 ( 政堂文學 )이 되어 원나라에 가서 성절(聖節)을 축하했으며, 첨의찬성사 세자이사(僉議贊成事世子貳師)에 임명되었다. 1294년에는 원나라의 성종 ( 成宗 )이 한림학사 살자만(撒刺蠻)을 통해 고려가 귀부한 연월(年月)을 물어오자 그가 글로 답하였다. 1295년에 지공거 ( 知貢擧 )가 되어 진사를 취하고, 강훤(姜萱) 등 27명을 급제시켰다.

1296년에 왕이 상화연(賞花宴)을 향각(香閣)에서 베풀자 축하하는 시를 올렸는데, 왕은 도첨의낭사(都僉議郎舍)와 금내육관(禁內六官) 및 학관(學官)에게 명해 상화내연시(賞花內宴詩)를 써서 화답하였다. 1297년에 첨의중찬 판전리사사(僉議中贊判典理司事)·세자사(世子師)에 임명되었다.

1298년에 왕에게 글을 올려 첨의중찬으로 퇴관하기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고 5일에 한 번씩 조회에 참석하도록 하였다. 곧 벽상삼한삼중대광 수사공(壁上三韓三重大匡守司空)이 되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별세하였다.

성품이 정직하고 엄정해 일을 처리하는 데 법도(法度)가 있어 국인(國人)들의 칭송이 자자했다고 한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설이 있다. 거소에 편액 ( 扁額 )하기를 설재(雪齋)라 하고, 매일 현사(賢士)· 대부 ( 大夫 )로 고금(古今)을 의논하니, 벼슬이 대관 ( 大官 )에 올랐어도 행동은 서생 ( 書生 )과 같았다고 한다.

고려 호경대왕(虎景大王 : 고려 태조의 5대조로 추정됨.)부터 원종까지의 일을 기록한 역사서인 ≪금경록 金鏡錄≫을 찬집하였다. 그 밖에 많은 사령(辭令)을 지었다. 충선왕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정식(鄭軾)

1407(태종 7)∼1467(세조 13).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빙보(憑甫). 가신(可臣)의 6세손이며, 문진(文振)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수(思修)이고, 아버지는 자신(自新)이며, 어머니는 최사위 ( 崔士威 )의 딸이다. 이극근(李克勤)의 문인이다.

1432년(세종 1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지평 ( 持平 )· 장령 ( 掌令 )을 역임하였다. 1443년 예조좌랑으로 있을 때 함길도에 심한 기근이 들자, 경차관 ( 敬差官 )으로서 도를 순시하고 돌아와 조정에 상황을 보고한 뒤 간신들의 농간으로 벼슬에서 쫓겨나기도 하였다. 또한, 1445년 이조정랑 때에도 낭청 연회 문제로 다시 삭직당하였다.

1446년 세종의 비(妃) 소헌왕후 ( 昭憲王后 )가 죽자 국장도감판관(國葬都監判官)이 되어 능실의 제도를 맡아보았으며, 그 이후 의정부검상과 사인을 지냈다. 1450년 정이한 ( 鄭而漢 )의 종사관으로 의주성 축성을 감독했고, 1453년(단종 1)에는 지사간원사로 발탁되었다. 1455년(세조 1)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3등으로 봉해졌으며, 1458년에는 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

1460년 우승지에 임명되었다가 곧 형조참판이 되었으며, 다시 함길도관찰사로 전천(轉遷)되었다. 1461년 겸함흥부윤이 되었을 당시 모련위(毛憐衛) 야인을 정벌할 때 그가 병기의 조달을 모두 관장하여 창졸간에 판비(辦備)하였다. 또, 따로 군사 1,000기(騎)를 거느리고 아치랑귀(阿赤郎貴)까지 깊숙이 들어갔다 돌아왔다. 그 공으로 자헌대부 ( 資憲大夫 )에 초자(超資)되었다.

1462년 대사헌에 임명되었다가 곧 중추원부사가 되었으며, 다시 판한성부사로서 수장(守將)이 되었다. 1463년 지중추원사에 제수되었다. 1465년에는 경상·전라도군적사(慶尙全羅道軍籍使)가 되었다가 곧 의금부제조가 되었으며, 1466년 동지중추원사로 임명되었다. 조선 초기의 군사제도와 군적 정리에 많은 공을 세웠다. 시호는 경무(景武)이다.

 

정국(鄭菊)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역임했다.

 

정심(鄭諶)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역임하였다.

 

정상(鄭詳)

 부사(府使)를 역임했다.

 

정여린(鄭如麟)

임진왜란 때 용맹을 떨쳐 별칭(別稱) [비장군(飛將軍)]으로 일컬어진 여린(如麟)이 뛰어났다.

 

정기수(鄭麒壽)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라 사정(司正)과 용양위부호군(龍 衛副護軍)을 지냄.

 

정응(鄭應)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된 응(應)이 가문을 대표하는 후손들이다.

 

鄭忠信(정충신) 선생의 일화.

 

꿈에 무등산을 삼키다.
정충신의 탄생이야기

조선시대 전라도 광주지역에 鄭綸(정륜) 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그는 광주 목사 관직에 앉아있었다.
그가 재직한지 얼마 되지 않던 어느 해 봄의 아지랑이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낱, 광주의 동헌에서 근무를 하는데, 이날 점심을 먹고 난 후 춘곤증 때문인지 갑자기 온몸이 나른하고 정신이 몽롱하여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따스한 봄빛이 비추이는 창가에서 비몽사몽 중이던 차에 꿈을 꾸었는데 난데없이 거대한 크기의 무등산이 한 입안으로 쑥 들어오고 있지 않는가.
꿈에서도 범상치 않는 징조로 여기고 좌수영감은 입술 끝에 걸린 산꼭대기부분이 쉽게 빨려오도록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며 안간힘으로 낑낑대었어. 수십여 차례 씨름 끝에 드디어 그 큰 덩치의 무등산이 통째로 입안에 들어오게 되었는바, 이는 慶事(경사)라도 보통 경사가 아닌 驚天動地(경천동지)할만한 큰 경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정 좌수는 가슴으로부터 용솟음치는 기쁜 마음으로 이 꿈을 고스란히 담고 아내와 동품을 하면 틀림없이 영특한 아이를 낳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홀연 떠일라 그길로 줄달음질쳐서 자기 집에 도착하였다.
그는 자기 집 대문 앞에 도착한 후 꿈꿀 때 들어온 정기를 누설시킬 수가 없어서 입을 열지 듯하고 콧소리만 내면서 손등으로 대은만 두드리니 부인은 대낮에 왠 남자가 들어오려는 것인지 섬뜩하여 한사코 대문을 열어주지 않고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하는 수없이 정 좌수는 굳게 입을 다문 채로 다시 관아로 들아 갔는데. 이때 마침 관아건물 모퉁이 양지바른 곳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젊고 못생긴 여자종을 관아 한편으로 데리고 들어가 동품을 하게 되었고 좌수영감은 동품을 마치고서야 몇 시간 동안 열지 못하였던 입을 벌릴 수가 있었다.

그 관비는 入胎(입태)를 하자마자 문둥병 환자처럼 온몸의 피부가 흉측하게 곪아터져 아무도 가까이 하려하지 않았는데, 금남공 鄭忠信(정충신)이 태어난 직후 흥한 허물이 떨어져 나가고 감쪽같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고 했다.

이를 두고 주변사람들은 비범한 인물을 몸 안에 담고 있는 여인을 다른 사람(남자)들이 함부로 범접하지 믓 하도록 하기 위해 하늘이 내린 조화가 아니겠느냐 라고들 하였다.

이렇게 미천한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금남공 정충신은 영특한 지략과 기지로 어려서부터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으며 후에 李适(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데 커다란 戰功(전공)을 세워 累卵(누란)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해낸 큰 인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출전: 광주의 설화>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24

會(회)

28

均(균),衍(연)

32

烈(열),奇(기)

25

遇(우)

29

鐘(종),茂(무)

33

在(재),喜(희)

26

勉(면)

30

洙(수),範(범)

34

鎬(호),揆(규)

27

光(광),炳(병)

31

相(상),廣(광)

35

永(영)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나주 정씨(羅州鄭氏)는 남한(南韓)에 총 13,110가구, 55,64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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