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鄭(낭야정씨)
본관(本貫): 낭야
시조(始祖): 정선감(鄭先甲)
유래(由來):
낭야는 중국(中國) 산동성 청주부 제성현(山東省淸州府諸城縣) 근방에 위치하는 지명이다.
중국(中國)에서 귀화해온 성씨(姓氏)인 낭야 정씨는 명(明)나라 세종(世宗 : 제12대 황제, 재위기간 : 1522 - 1566) 때 문연각태학사(文淵閣太學士)를 지낸 정문겸(鄭文謙)의 증손 정선감(鄭先甲)이 봉림 대군(鳳林大君 : 후에 효종이 됨)을 배종(陪從)하고 동래(東來)하여 조선(朝鮮)에 귀화한 것이 시초가 된다.
[낭야정씨신유보] 서문(序文)에 의하면 그는 1617년(명나라 만력 45) 산동성(山東省) 낭야(낭야)에서 출생하여 진사(進士)로 있다가 1644년(숭정 17) 명(明)나라가 청(淸)에 멸망되자 구국의거(救國義擧)를 하려다가 청군(淸軍)에게 포로가 되어 심양(瀋陽)에 끌려갔다.
수용중인 그 곳에서 풍삼사(馮三仕). 황 공(黃 功). 왕이문(王以文) 등 9의사(九義士)와 함께 멸청복명(滅淸復明)의 동지(同志)로 결합(結合)하였는데, 이 때 병자호란 (丙子胡亂)의 볼모로 심양에 와 있던 봉림대군(鳳林大君) 일행을 만나 함께 합력도모(合力圖謨) 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듬해 봉림대군을 배종하고 동래(東來)하여 조양루(朝陽樓) 남쪽 황조인촌(皇朝人村 : 지금의 연지동 1번지 부근)에 살면서 효종(孝宗 : 봉림대군)과 북벌밀계(北伐密計)를 추진 중 1659년(효종 10) 왕(王)의 급서(急逝)로 북벌대계가 좌절되고 그리하여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게 되자 조선에 귀화하여 살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은 150여 년간 황조인촌에 집단거주하면서 조정에서 베푸는 특별 후대(厚待)를 받아왔고, 임진왜란 때 원군(援軍)을 보내준 명(明)나라 신종(신宗)의 은의(恩義)를 추모하기 위해 숙종(肅宗)이 비원(秘苑) 내에 대보단(大報壇)을 만들어, 배향할 때 동래조 선갑(先甲)을 포함한 9의사(九義士)를 함께 배양하는 은전(恩典)이 내렸고, 대보단 수직관직(守直官職)을 9의사 자손에게 세수(世守) 하도록 하였다.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낭야 정씨는 남한(南韓)에 총 194가구, 87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출전 <한민족대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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