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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정씨(鄭)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鄭(동래정씨)

 

 

본관(本貫): 동래(東萊)

시조(始祖): 정회문(鄭繪文)

유래(由來):

 

동래 정씨(東萊鄭氏)는 신라(新羅)의 전신(前身)인 사로(斯虜)의 6부 촌장(六部村長)으로 정씨(鄭氏)의 성(姓)을 하사(下賜) 받았던 취산진지촌장(취山珍支村長) 지백호(智白虎)의 원손(遠孫) 정회문(鄭繪文 : 안일 호장)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고려(高麗) 초에 보윤(甫尹)을 지낸 정지원(鄭之遠)을 일세조(一世祖)로 하며, 누대(累代)에 걸쳐 정착세거(定着世居) 해온 동래(東萊)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정목(鄭穆)

목(穆)은 고려 문종(文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상서좌복야를 역임하고 슬하에 아들 제(濟). 점(漸). 택(澤). 항(沆). 4형제를 두었다.

 

정선조(鄭先祚)

목의 아우 선조(先祚)는 호장(戶長)을 지냈고, 그의 후손들이 동래(東萊)와 양산(梁山) 등지에 산거(散居)하면서 명문(名門)의 기틀 을 다져왔다.

 

정택(鄭澤)

좌복야 목(穆)의 세째 아들 택(澤)이 고려 때 찬성사(贊成事)를 지내고 문장(文章)과 재능(才能)으로 명망을 떨쳤다.

 

정항(鄭沆)

1080(문종 34) ∼ 1136(인종14). 고려 중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 ( 東萊 ). 자는 자림(子臨). 호장의 자손으로 중앙에 진출해 섭대부경(攝大府卿)이 된 목(穆)의 셋째 아들이며, 서(敍)의 아버지이고, 숙종 때 공신인 왕국모(王國 當 )의 사위이다.

숙종 때 문과에 급제, 상주사록(尙州司錄)에 임명되었다. 나이가 적으나 잘 판단해 정극영 ( 鄭克永 ) · 한충 ( 韓沖 )과 더불어 사록으로는 이정 일한(二鄭一韓)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이어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다가 예종 때 내시 ( 內侍 )에 속하였다.

1116년(예종 11) 집주 ( 執奏 )를 맡아 공평 정직하며 출납(出納)에 상세하고 밝았다. 이자량 ( 李資諒 )을 수행해 송나라에 갔을 때, 관반학사(館伴學士) 왕보(王 螺 )가 표장(表章)을 보고 칭송하였다.

이듬해 귀국해 우정언에 올랐으나 뜻을 굽히지 않아 전주통판(全州通判)으로 좌천되었다. 이어 우사간을 거쳐 양광(楊廣) · 충청도의 안찰사를 역임하였다.

인종 때 이자겸 ( 李資謙 )이 집권했으나 아부하지 않아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로 좌천되었다. 1126년(인종 4) 이자겸이 몰락한 이듬해 ≪ 서경 書經 ≫ 의 열명(說命) · 주관편(周官篇)을 강의하고, 1129년 서적소(書籍所)에서 송조(宋朝)의 ≪ 충의집 忠義集 ≫ 을 강독하였다. 1132년 기린각(騏麟閣)에서 ≪ 예기 禮記 ≫ 중용편(中庸篇)을 강의하였다.

이어 왕이 묘청 ( 妙淸 )의 건의로 서경에 행차했을 때, 묘청 · 정지상 ( 鄭知常 )이 왕을 오래 머물게 할 의도로 간관들을 풍유해 개경의 궁궐수리를 중지하기를 청하자, 2회의 소(疏)를 올려 궁궐수리와 환어(還御)를 요청해 받아들여졌다.

이 해에 지공거 ( 知貢擧 ) 최자성 ( 崔滋盛 )이 시제(試題)를 잘못 내어 유사 ( 有司 )가 파할 것을 청하였다. 이 때 거자 ( 擧子 )인 김이영 ( 金貽永 )이 사위이며, 왕비의 모제(母弟)가 되므로 공예태후 ( 恭睿太后 ) · 한유충 ( 韓惟忠 )과 더불어 간청해 파하지 않게 하였다.

1135년 우승선 ( 右承宣 )으로 동지공거 ( 同知貢擧 )가 되어 허홍재 ( 許洪材 ) 등을 합격시켰다. 이 해에 수락당(壽樂堂)에서 한림학사로서 ≪ 시경 ≫ 의 7월편(七月篇)을, 이듬해에는 천성전(天成殿)에서 ≪ 당감 唐鑑 ≫ 을 강독하였다. 1136년 지추밀원사 예부상서 한림학사승지로 승진되었으나 이튿날 죽었다. 시호는 문안(文安)이다.

 

정서(鄭敍)

생몰년 미상. 고려시대 문인. 본관은 동래 ( 東萊 ). 호는 과정(瓜亭).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항(沆)의 아들이다. 인종비 공예태후 ( 恭睿太后 ) 동생의 남편으로서 왕의 총애를 받았다. 음보로 내시낭중(內侍郎中)에 이르렀으며, 1151년(의종 5)에 폐신 정함(鄭 歟 ) · 김존중(金存中)의 참소로 동래 및 거제로 유배되었다가 1170년(명종 1)에 풀려났다. 문장에 뛰어났으며 성격이 경박하였다고도 하나 그에 대한 뚜렷한 기록은 없다. 저서로는 ≪ 과정잡서 瓜亭雜書 ≫ 가 있고, 배소에서 지은 〈 정과정곡 鄭瓜亭曲 〉 이 있다.

인종비(仁宗妃) 공예대후 동생의 남편으로 문명(文名)을 떨쳤던 서(敍)는 의종(毅宗) 때 폐신(嬖臣) 들의 참소로 동래(東萊)에 유배 되었는데, 그 곳에서 정자(亭子)를 짓고 오이를 심어 과정(瓜亭)이라 당호(堂號)를 삼고 연군(戀君)의 정을 가요(歌謠)로 읊은 <정과정곡 (鄭瓜亭曲)>을 지어, 우리나라 국문학사(國文學史)에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정흠지(鄭欽之)

1378(우왕 4) ∼ 1439(세종 21).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 ( 東萊 ). 자는 요좌(堯佐). 호(湖)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고려 감찰대부(監察大夫) 낭생(郎生)이고, 아버지는 부(符)이며, 어머니는 이희필(李希泌)의 딸이다. 진사성균시에 합격한 뒤 음사(蔭仕)로 벼슬이 지평에 이르렀다.

1408년(태종 8) 좌정승 하륜 ( 河崙 )을 탄핵하다가 먼 곳에 유배되었다. 그 뒤 풀려나와 141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조정랑 · 병조정랑 · 좌헌납을 거쳐 1416년 장령이 되었다. 이 때 좌의정 박은(朴 賻 )이 정탁 ( 鄭擢 )과 노비문제로 송사를 일으키자, 박은을 탄핵하다 미움을 받아 배척당하여 4년 동안이나 등용되지 못하였다.

1418년 세종이 즉위하면서 봉상시소윤(奉常寺少尹)이 되고, 이어 집의 · 지형조사(知刑曹事) · 대언 ( 代言 )을 거쳐 지신사 ( 知申事 )가 되어 기밀(機密)을 관장하였다. 그 뒤 이조참판 · 대사헌을 거쳐 형조판서에 오르고, 충청 · 전라 · 경상 3도의 도순무사가 되어 연해의 주군(州郡)의 성터를 심정(審定)하였다.

1435년(세종 17) 함길도도관찰사가 되어서는 새로 설치한 회령 등 4진(鎭)의 수비에 공헌하고, 어머니의 병환으로 돌아와 중추원사가 되어 죽었다. 사람됨이 풍채가 좋고 밖으로는 유화하나 내심은 강직하였으며, 독서를 좋아하였는데, 특히 ≪ 사기 史記 ≫ · ≪ 한서 漢書 ≫ 를 잘 외었다.

일찍이 황보인 ( 皇甫仁 )과 함께 ≪ 진설 陣說 ≫ 을 지어 올렸고, 천문에도 밝아 세종의 명으로 역법(曆法)을 연구하기도 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정갑손(鄭甲孫)

∼1451(문종 1).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 ( 東萊 ). 자는 인중(仁仲). 양(良)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부(符)이고, 아버지는 중추원사 흠지(欽之)이며, 어머니는 최병례(崔丙禮)의 딸이다. 문종의 후궁 소용 정씨(昭容鄭氏)의 아버지이다.

1417년(태종 17) 식년문과에 동진사로 급제한 뒤 부정자·감찰·병조좌랑·헌납·지평 등을 두루 거쳐 지승문원사가 되었다. 1435년(세종 17)에 강직한 성격을 인정받아 좌승지로 발탁되고 지형조사(知刑曹事)·예조참판을 거쳐 1438년 전라도관찰사로 나갔다.

1441년 대사헌으로 이도(吏道)를 바로잡아 더욱 세종의 신임을 받았다. 그 뒤 경기도와 함경도의 관찰사, 중추원사·판한성부사 등을 역임한 뒤 우참찬을 거쳐 1450년(문종 즉위년) 좌참찬이 되어, 판이조사(判吏曹事)를 겸하였다. 그는 청렴하기로 널리 알려져 중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시호는 정절 ( 貞節 )이다.

 

정창손(鄭昌孫)

1402(태종 2) ∼ 1487(성종 18).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 ( 東萊 ). 자는 효중(孝仲). 양생(良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한성부윤 부(符)이고, 아버지는 중추원사(中樞院使) 흠지(欽之)이며, 어머니는 최병례(崔丙禮)의 딸이다. 좌참찬 갑손(甲孫)의 아우이다.

1423년(세종 5) 사마시를 거쳐, 1426년 식년문과에 동진사 ( 同進士 )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 이어 집현전의 저작랑과 교리를 역임하면서 ≪ 통감훈의 通鑑訓義 ≫ 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1441년 사섬서령(司贍署令)으로 전임하였다. 1443년 집현전응교가 되었는데 재직중인 이듬해 한글의 제정을 반대하다가 파직, 투옥되었다.

같은 해 풀려 나와 응교로 복직된 뒤 1445년 집의가 되었는데, 이듬해 세종이 불경 ( 佛經 )을 간행하려 하자, 왕실의 불교 숭상을 강력히 반대하다가 다시 좌천되었다. 이듬해 용서를 받아 직예문관에 등용되고, 같은 해 문과중시에 장원급제하여 집현전직제학을 거쳐 1448년 집현전부제학이 되었다.

그 동안 여러 번 왕실의 불교 숭상에 반대하는 소(疏)를 올렸으나 세종은 듣지 않았다. 1449년 부제학으로 춘추관편수관과 수사관(修史官)을 겸직하면서 ≪ 고려사 ≫ · ≪ 세종실록 ≫ · ≪ 치평요람 治平要覽 ≫ 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문종이 즉위하자 우부승지를 거쳐 1451년(문종 1) 대사헌이 되었는데, 조정의 관원들로부터 남달리 깨끗하며 절조를 잘 지키면서 자신의 산업(産業)을 일삼지 않는다는 찬사를 받았다. 이어 제학 · 대제학 · 병조판서 등을 지내면서 ≪ 문종실록 ≫ 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1453년(단종 1) 이조판서가 되었는데 외척 홍원용 ( 洪元用 )과의 상피관계(相避關係)로 사헌부에서 피혐하기를 주장했으나 왕명으로 피혐되지 않았다. 1455년(세조 1) 우찬성으로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과 판이조사를 겸했으며, 좌익공신 ( 佐翼功臣 ) 3등에 녹훈되고 봉원군(蓬原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사위 김질(金 銷 )이 성삼문 ( 成三問 ) · 박팽년 ( 朴彭年 ) · 이개 ( 李塏 ) · 하위지 ( 河緯地 ) · 유성원 ( 柳誠源 ) · 유응부 ( 兪應孚 ), 단종의 외숙인 권자신 ( 權自愼 ) 등과 함께 단종 복위를 모의했는데, 일이 여의치 않자 질이 이 사실을 자신에게 폭로함에 이를 세조에게 고변하였다. 이 공으로 좌익공신 3등에서 1자급을 올려 2등 수충경절좌익공신(輸忠勁節佐翼功臣)이 되고 보국숭록대부 ( 輔國崇祿大夫 )가 더해졌으며 부원군 ( 府院君 )으로 진봉(進封)되었다. 이어 대사성 · 대제학을 겸직하고 우의정에 올랐다.

그는 이러한 처사로 절의를 숭상하는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 ( 金時習 ) 등으로부터 많은 비난도 받았다. 그러나 세조로부터는 대단한 신임을 얻어 1457년 좌의정이 되었고, 이듬해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사직을 하자 세조는 1일간 조회를 정지하고 부의(賻儀)를 내렸으며, 여묘(廬墓)살이를 하고 있는 그를 기복(起復:나라의 일이 있을 때 상중에 있는 대신을 3년상이 지나기 전에 벼슬에 임명하던 제도)시켜 영의정으로 삼았다.

이에 여러 번 소를 올려 이를 사양했으나 세조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1462년 세자에게 양위할 것을 말했다가 삭직되고 여산 ( 礪山 )에 부처(付處)되었으나, 곧 용서받고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에 복작(復爵)되었다. 1468년(예종 즉위년) 예종이 즉위한 뒤 남이 ( 南怡 )와 강순 ( 康純 )의 옥사를 잘 다스려 익대공신 ( 翊戴功臣 ) 3등에 올랐다. 1469년 성종이 즉위하자 대광보국숭록대부 ( 大匡輔國崇祿大夫 )로 승품되고 원상 ( 院相 )이 되었다.

1470년 나이가 70이 되어 치사(致仕)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고 궤장이 하사되었다. 1456년(세조 2)에 죽은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懿敬世子)를 덕종 ( 德宗 )으로 추존하는 데 적극 앞장섰다. 한편, 남효온 ( 南孝溫 )이 소를 올려 세조 즉위 초에 폐위된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 ( 顯德王后 )의 소릉(昭陵) 복위를 주청하자, 소릉의 폐출에 참여한 그는 복위에 반대했는데, 후일 복위된 뒤 이 일로 지탄을 받았다.

1475년 영의정에 재임되었으며, 이듬해 왕이 왕비를 폐하려고 할 때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강력하게 간하지 못하였다. 이후 여러번 사직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다가 1485년 나이 84세에 영의정으로 재임된 지 1년 만에 사직하였다. 그리고 2년 뒤인 1487년 86세로 죽자 왕은 청빈재상이라 하여 많은 물품 등을 부의로 하사하였다.

그 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에 연산군의 생모를 폐출하는 논의에 참여한 죄로 윤필상(尹弼尙) · 한치형 ( 韓致亨 ) · 한명회 ( 韓明澮 ) · 어세겸 ( 魚世謙 ) · 심회 ( 沈澮 ) · 이파 ( 李坡 ) · 김승경 ( 金升卿 ) · 이세좌 ( 李世佐 ) · 권주 ( 權柱 ) · 이극균 ( 李克均 ) · 성준 ( 成俊 ) 등과 함께 십이간(十二奸)으로 몰려 부관참시(剖官斬屍)되었다.

그러나 1506년(중종 1)에 신원되고 청백리에 녹선되어 부관참시 때 철거한 석물을 다시 세우고 예로써 개장(改葬)하였다. 박학강기(博學强記)하고 문장과 글씨에 능했으며, 풍채가 준수하고 수염이 배까지 내려왔다고 한다. 성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정구(鄭球)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 ( 東萊 ). 자는 대명(大鳴), 호는 괴은(乖隱). 자순(子順)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결(潔)이고, 아버지는 무안현감 유의(有義)이며, 어머니는 조찬(趙瓚)의 딸이다.

1501년(연산군 7) 진사시에 합격한 뒤, 1510년(중종 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검열을 거쳐, 사간을 역임하였다. 성품이 정직하고 영리를 좋아하지 않고 요인과 사귀지 않았으므로 1519년 조광조 ( 趙光祖 )를 제거하는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두문불출하면서 다리뼈가 물렁하여졌다고 칭병하여 자리에 앉아 있기를 18년 동안 계속하였다.

아들인 장령 희등(希登)이 재혼할 때 비로소 일어나 걸었다고 하며 칭병을 집안사람들도 몰랐다고 한다. 평생 있는 것 없는 것을 묻지 않고 문장으로 자위하였다. 저서로 ≪괴은집≫ 4권이 있다.

 

정희등(鄭希登)

1506(중종 1) ∼ 1545(명종 즉위년).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 ( 東萊 ). 자는 원룡(元龍). 결(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의(有義)이고, 아버지는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 구(球)이며, 어머니는 광주김씨로 사지 ( 司紙 ) 김중문(金仲文)의 딸이다. 승지 원(源)의 조카이다.

1528년(중종 23) 진사가 되고, 1534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에 보직되었다. 이어 정언으로서 상처하였을 때 김안로 ( 金安老 )가 그의 인물됨을 높이 평가하여 사위로 맞이하려고 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였다.

이로 인하여 김안로의 모함을 받아 함경도도사 · 광흥창수(廣興倉守) · 사복시첨정 등의 한직으로 전전하다가, 1537년 김안로가 제거된 뒤 수찬 · 정언 · 교리 · 헌납 등 청요직(淸要職)에 중용되었다.

1541년 지평으로서 그 해의 흉황(凶荒)과 수령의 폐해를 조사하기 위하여 별견어사(別遣御史)로 파견되었고, 1544년 세자시강원우필선 · 장령을 지냈다.

이듬해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권세를 잡게 된 소윤의 윤원형 ( 尹元衡 ) · 이기(李 咬 ) · 정순붕 ( 鄭順朋 ) 등이 을사사화를 일으켜 대윤의 윤임 ( 尹任 ) · 유관 ( 柳灌 ) · 유인숙 ( 柳仁淑 ) 등을 제거하려 하였을 때 극력 반대하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용천(龍川)으로 유배가던 도중에 죽었다.

1547년(명종 2) 정미사화 때 죄가 추가되어 가산을 적몰당하였다. 1568년(선조 1) 신원(伸寃: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고 이조판서로 추증되었으며, 적몰된 가산도 환급받았다. 시호는 의민(毅愍)이다.

 

정난종(鄭蘭宗)

1433(세종 15) ∼ 1489(성종 20). 조선 전기의 명신 · 서예가. 본관은 동래 ( 東萊 ). 자는 국형(國馨), 호는 허백당(虛白堂). 진주목사 사(賜)의 아들이다. 1456년 생원 · 진사시와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를 거쳐 검열 · 대교 · 통례문봉례랑(通禮門奉禮郎) · 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463년 시강원문학을 거쳐 예조정랑 · 종부시소윤(宗簿寺少尹)을 지내고, 1466년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어 좌부승지 · 예조참판을 지낸 뒤 형조참판으로 오위장을 겸하였다. 1467년 황해도관찰사로 이시애 ( 李施愛 )의 난 평정에 공을 세우고 이듬해 호조참판에 전임되었다. 1469년 동지춘추관사로 ≪ 세조실록 ≫ 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70년 동지중추부사로서 사은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1471년 순성좌리공신(純誠佐理功臣)에 올라 동래군(東萊君)에 봉하여졌고, ≪ 예종실록 ≫ 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영안도관찰사 · 호조참판 · 한성부판윤 · 전라도관찰사를 지냈다. 1483년 주문부사(奏聞副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평안도병마절도사 · 우참찬 · 이조판서 · 공조판서 · 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정난종은 훈구파의 중진으로 성리학에 밝았고, 서예에도 일가를 이루어 특히 조맹부체(趙孟 琅 體)에 뛰어났다. 성임 ( 成任 )과 함께 세조 · 성종 대의 일류 서예가로, 1465년(세조 11, 乙酉)에 ≪ 원각경 圓覺經 ≫ 을 인쇄하기 위하여 그에게 주자체(鑄字體)를 쓰도록 하였는데, 이 활자가 을유자 ( 乙酉字 )이다.

성현 ( 成俔 )은 ≪ 용재총화 ≫ 에서 “ 정난종이 쓴 창덕궁 전문(殿門)들의 액(額)은 자체가 바르지 않다. ” , “ ≪ 원각경 ≫ 의 자체가 고르지 않다. ” 고 혹평하기도 하였다. 금석문에도 그의 필적이 적지 않다.

석문으로 서울 파고다공원의 〈 원각사비음 圓覺寺碑陰 〉 , 양주의 〈 고령부원군신숙주묘표 高靈府院君申叔舟墓表 〉 · 〈 윤자운신도비 尹子雲神道碑 〉 · 〈 윤자운묘표 〉 , 연산 ( 連山 )의 〈 김철산비 金鐵山碑 〉 가 있다.

또 금문으로 양양의 〈 낙산사종명 洛山寺鐘銘 〉 , 고성의 〈 유점사종명 楡岾寺鐘銘 〉 , 양주의 〈 봉선사종명 奉先寺鐘銘 〉 , 덕수궁의 〈 흥천사종명 興天寺鐘銘 〉 이 있다. 진적은 보기 어려우며, ≪ 동국명필 東國名筆 ≫ · ≪ 해동명적 海東名跡 ≫ · ≪ 대동서법 大東書法 ≫ 등에 그의 글씨가 모각되어 있다. 시호는 익혜(翼惠)이다.

 

정광필(鄭光弼)

1462(세조 8) ∼ 1538(중종 33).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 ( 東萊 ). 자는 사훈(士勛), 호는 수부(守夫). 구령(龜 狗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진주목사 사(賜)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난종(蘭宗)이며, 어머니는 장사랑 이지지(李知止)의 딸이다.

1492년(성종 23) 진사에 오르고, 그 해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 그 뒤 성균관학유 · 의정부사록 · 봉상시직장을 역임하였다. 성균관학정 때 좌의정 이극균 ( 李克均 )의 발탁으로 ≪ 성종실록 ≫ 편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직제학을 거쳐 이조참의가 되었는데, 임금의 사냥이 너무 잦다고 간했다가 아산으로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 후 부제학에 오른 뒤 이조참판 · 예조판서 · 대제학을 거쳐 1510년 우참찬으로 전라도도순찰사가 되어 삼포왜란을 수습하고 병조판서에 올랐다. 1512년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기민 구제에 공헌하였다.

이듬해 우의정 · 좌의정을 거쳐, 1516년 영의정에 올랐다. 1519년 기묘사화 때 조광조 ( 趙光祖 )를 구하려다 영중추부사로 좌천되었다가 1527년 다시 영의정에 올랐다.

1515년 장경왕후 ( 章敬王后 )가 죽고 중종의 총애를 받던 후궁이 자기의 소생을 끼고 왕비의 자리에 오르려 하자, 홍문관 동료들을 이끌고 경전(經傳)을 인용, 극간해 새로이 왕비를 맞아들이게 하였다.

1519년 중종이 사정전 ( 思政殿 )에 들러 천재(天災)의 원인이 될만한 정치의 잘못을 물었을 때 한충 ( 韓忠 )이 비루한 재상이라고 탄핵하자, 신용개 ( 申用漑 )가 선비가 대신을 면대해 배척하는 풍토는 근절해야 한다며 한충의 논죄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젊은 사람들이 바른말하는 풍조를 꺾어 억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여 재상의 넓은 도량을 보이기도 하였다. 1531년 70세에 궤장( 廓 杖)이 하사되었다.

1533년 견파(譴罷)되어 영상에서 물러나 회덕에 있을 때, 후임 영상 김안로 ( 金安老 )로부터 장경왕후 국장 때 총호사(摠護使)를 맡아 능지(陵地)를 불길한 땅에 잡았다는 무고를 받아 김해로 유배되었다.

이것은 김안로의 아들 희(禧)가 중종의 장녀 효혜공주(孝惠公主)와 혼인해 부마가 되어 호곶목장(壺串牧場)을 받아 밭을 일구고자 하므로, 이를 저지한 일로 김안로의 원한을 샀기 때문이었다. 1537년 김안로가 사사(賜死)되자 곧 풀려나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저서로는 ≪ 정문익공유고 鄭文翼公遺稿 ≫ 가 있다. 중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회덕서원, 용궁의 완담향사(浣潭鄕祠)에 향사되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정유길(鄭維吉)

1515(중종 10) ∼ 1588(선조 2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 ( 東萊 ). 자는 길원(吉元), 호는 임당(林塘). 난종(蘭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 광필(光弼)이고, 아버지는 강화부사 복겸(福謙)이다. 어머니는 이수영(李壽永)의 딸이다. 김상헌 ( 金尙憲 ) · 김상용 ( 金尙容 )의 외할아버지이다. 아들 창연(昌衍)은 좌의정까지 올랐다.

1531년(중종 26) 사마시에 합격하고, 1538년 별시문과에 장원하여 중종의 축하를 받고 곧 사간원정언에 올랐다. 그 뒤 공조좌랑 · 이조좌랑 · 중추부도사 · 세자시강원문학 등을 역임하였다.

1544년 이황 ( 李滉 ) · 김인후 ( 金麟厚 ) 등과 함께 동호서당(東湖書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일으키기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하였다.

그 뒤 이조정랑 · 의정부사인 · 사헌부집의 · 교리 · 직제학을 거쳐 1552년(명종 7) 부제학에서 가선대부 ( 嘉善大夫 )에 승자하여 도승지가 되었다. 이 때 이황과 더불어 성학(聖學)을 진흥시켜야 함을 진언하였다. 이어 이조참판 · 예조참판 · 대사간 ·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560년 찬성 홍섬 ( 洪暹 )이 대제학을 사양하고 후임으로 예조판서 정유길, 지사 윤춘년(尹春年) · 이황을 추천했는데, 이 중에서 가장 많은 지지를 얻어 홍문관 · 예문관의 대제학이 되어 문형 ( 文衡 )에 들어갔다. 얼마 뒤 이조판서에 오르고 지중추부사가 되어 1567년 진하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68년(선조 1) 경상도 · 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하면서 옥사(獄事)를 바로잡고, 민생안정에 진력하였다. 1572년 예조판서로 있으면서 명나라 사신 접반사가 되어 능란한 시문과 탁월한 슬기를 발휘하여 명나라 사신과 지기지간이 되었다.

그 뒤 우찬성 · 판의금부사 · 판돈녕부사를 거쳐 1581년 우의정이 되었으나, 명종 때 권신인 윤원형 ( 尹元衡 ) · 이량 ( 李樑 ) 등에게 아부한 사람을 상신(相臣)에 앉힐 수 없다는 사헌부의 탄핵으로 사직하였다.

그 뒤 1583년에 우의정에 오르고, 그 이듬해 궤장( 廓 杖)이 하사되어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1585년 좌의정이 되었다. 충효와 근신을 근본으로 삼고 넓은 도량을 가지고 있어 포섭력이 강했으며, 큰 일에는 대의를 가지고 과감하게 이를 처결하였다. 시문에도 뛰어났으며, 서예에도 능해 임당체(林塘體)라는 평을 받았다. 작품에 〈 한기비 韓琦碑 〉 가 있고, 저서로 ≪ 임당유고 林塘遺稿 ≫ 가 있다.

 

정창연(鄭昌衍)

1552(명종 7) ∼ 1636(인조 14). 조선 중 · 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 ( 東萊 ). 자는 경진(景眞), 호는 수죽(水竹). 광필(光弼)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복겸(福謙)이고, 아버지는 좌의정 유길(惟吉)이며, 어머니는 원계채 ( 元繼蔡 )의 딸이다.

1579년(선조 12)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독서당 ( 讀書堂 )에 들어갔고, 이조좌랑을 거쳐 동부승지 등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614년(광해군 6) 우의정이 되고 이어 좌의정이 되어 기사 ( 耆社 )에 들고 궤장( 廓 杖)을 받았다.

이 때 강화부사 정항 ( 鄭沆 )이 광해군의 뜻을 받들어 영창대군 ( 永昌大君 )을 죽이니, 부사직 정온 ( 鄭蘊 )이 상소하여 “ 항을 죽이고 영창을 대군의 예로써 장사지내야 한다. ” 고 하였다. 이에 광해군이 크게 노하여 정온이 화를 당하자 그는 이원익 ( 李元翼 )과 더불어 상소하여 정온을 구하여주었다.

이어 폐모론이 일어나자 벼슬을 사퇴하고 두문불출한 가운데 정방 ( 政房 )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 때문에 다른 대신들이 합계(合啓)하여 말썽을 일으켰으나, 때마침 인조반정이 일어나 무사하였을 뿐 아니라 다시 좌의정이 되었다. 한편, 광해군 비 유씨(柳氏)는 그의 생질녀로, 옥사가 일어날 때에는 혹 광해군이 그에게 묻기도 하여 옥사에 억울하게 걸린 많은 사람들을 구하여주었다.

 

정광성(鄭廣城)

1576(선조 9)∼1654(효종 5). 조선 중·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 ( 東萊 ). 자는 수백(壽伯), 호는 제곡(濟谷). 복겸(福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길(惟吉)이고, 아버지는 좌의정 창연(昌衍)이며, 어머니는 한세건(韓世建)의 딸이다. 참판 광경(廣敬)의 형이고, 영의정 태화 ( 太和 )의 아버지이다.

1601년(선조 34)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03년(선조 3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대교 등을 거쳐, 1605년 이후 정자 ( 正字 )^ 수찬 ( 修撰 )^ 교리 ( 校理 )^ 지평 ( 持平 ) 등 초년에 주로 삼사의 현직(顯職)을 역임하였다.

1618년(광해군 10) 대비삭호문제(大妃削號問題)와 아울러 재차 폐모론이 일어났을 때 부친 창연의 정청불참문제(庭請不參問題)로 인하여 탄핵을 받았으나 계속 등용되어 형조참의^우승지^남양부사^경기도관찰사 등을 지낸 다음, 병자호란 후 벼슬에 뜻을 버리고 향리에 물러가 있었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형조판서에 오른 뒤 부호군을 거쳐 지돈녕부사가 되어 죽었다

 

정광경(鄭廣敬)

1586(선조 19)∼1644(인조 2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 ( 東萊 ). 자는 공직(公直), 호는 추천(秋川). 복겸(福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길(惟吉)이고, 아버지는 좌의정 창연(昌衍)이며, 어머니는 한세건(韓世建)의 딸이다. 판서 광성(廣成)의 아우이다.

1612년(광해군 4)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그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수찬 ( 修撰 )· 정언 ( 正言 )을 지내고 이듬해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이 일자 이론(異論)을 내세워 반대하고 청의(淸議)를 따랐다.

그 뒤 1616년 사간이 된 뒤, 상의원정(尙衣院正)·사인·응교·전한·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618년 대비삭호(大妃削號)를 포함한 폐모론이 재론되었을 때, 아버지 창연이 두문불출하여 정청(庭請)에 불참, 화를 입을 지경에 이르자 아버지를 위하여 대신 참가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때 사간에 임명되자, 과거의 정청참여를 자책하여 간관으로서 자격이 없음을 스스로 지적, 사퇴하고자 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괄 ( 李适 )의 난 때 형 광성은 아버지를 모시고 그는 어가 ( 御駕 )를 호종하였으며, 정묘호란 때는 형이 임금을 따르고 자신이 아버지를 모심으로써 형제가 군부(君父)에 대한 충효를 함께 실천하였다 하여 칭송을 받았다. 그뒤 예조참의·충청도관찰사·대사헌· 동지경연사 ( 同知經筵事 )·대사간·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정태화(鄭太和)

광서의 아들 태화(太和)는 효종(孝宗)과 현종조(顯宗朝)에서 영의정을 지내며 현상(賢相)으로 명망이 높았다.

1602(선조 35) ∼ 1673(현종 1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 ( 東萊 ). 자는 유춘( 捧 春), 호는 양파(陽坡). 영의정 광필(光弼)의 5대 손이며, 유길(惟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창연(昌衍)이고, 아버지는 형조판서 광성(廣城)이다. 어머니는 황근중 ( 黃謹中 )의 딸이다. 좌의정 치화(致和)와 예조참판 만화(萬和)의 형이다.

1624년(인조 2)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 1628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로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다. 1637년 세자시강원의 보덕이 되어 소현세자 ( 昭顯世子 )를 따라 심양(瀋陽)에 가기까지, 당하관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홍문관에서는 수찬 · 교리 · 응교를, 사간원에서는 정언 · 헌납 · 사간을, 사헌부에서는 집의를, 세자시강원에서는 설서 · 사서 · 필선을, 성균관에서는 사예 · 사성을 각각 지냈다. 또, 행정부서에서는 예조의 좌랑, 이조의 좌랑 · 정랑, 의정부의 사인, 예빈시 ( 禮賓寺 ) · 제용감 ( 濟用監 ) · 장악원의 정 등을 역임하였다.

1631년 시강(試講)에서 우등으로 뽑혀 숙마(熟馬) 1필을 수상하는 문재를 보였고, 또 사간으로 있던 1636년, 청나라 침입에 대비해 설치된 원수부의 종사관에 임명되어 도원수 김자점 ( 金自點 ) 휘하에서 군무(軍務)에 힘쓰다가 병자호란을 맞자 황해도 여러 산성에서 패잔병을 모아 항전하는 무용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듬해 비변사가 유장(儒將)으로 합당한 인물 4인을 천거하는 가운데 한 사람으로 뽑힌 것도 이 까닭이었다.

1637년 말 심양으로부터 귀국하자 그 이듬해 충청도관찰사로 발탁되어 당상관에 올랐다. 그리고 6개월만에 승정원동부승지가 되어 조정에 돌아온 이후 1649년 48세의 나이로 우의정에 오르기까지, 육조의 참의 · 참판, 한성부우윤 · 대사간, 평안도 · 경상도의 관찰사, 도승지 등을 두루 지내다가 1644년 말부터 육조의 판서와 대사헌을 되풀이 역임하였다.

이 무렵 소현세자의 죽음과 그 후계 문제로 조정 정신(廷臣)들 사이에 심한 충돌이 일었는데, 그 결과 소현세자의 부인 강씨(姜氏)가 사사(賜死)되고 그 아들들이 제주에 유배되는 사태까지 빚어졌으며, 때문에 중진 관료로서 처신이 매우 어려웠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조 · 형조 · 사헌부의 장관과 같은 난감한 직책을 되풀이 역임할 수 있었던 것은 성품이 온화하고 대인관계가 원만하여 적대세력을 두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전한다. 심지어 뒷날에 사신(史臣)이 “ 조정의 의논이 자주 번복되어 여러 차례 위기를 맞았으나, 그의 영현(榮顯)은 바뀌지 않았으니, 세상에서는 벼슬살이를 가장 잘하는 사람으로 그를 으뜸으로 친다. ” 고 평할 정도였다.

우의정에 오른 직후 효종이 즉위하자 사은사 ( 謝恩使 )가 되어 명나라 연경(燕京)에 갔고, 그 뒤 곧 좌의정에 승진되었으나 어머니의 죽음으로 취임하지 못하고 향리에 머물렀다. 1651년(효종 2)에 상복을 벗으면서 영의정이 되어 다시 조정에 나아갔다.

1673년(현종 14) 심한 중풍 증세로 사직이 허락되기까지 20여 년 동안 5차례나 영의정을 지내면서 효종과 현종을 보필하였다. 북벌정책과 예송 ( 禮訟 )으로 신료들의 반목이 격화되던 시기여서 당색을 기피했고, 또한 치화 · 만화 · 지화(知和) 등을 비롯한 일가 친족들이 현 · 요직에 많이 올라 있었으므로 매우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냈다.

때문에 “ 이 나라를 정가(鄭哥)가 모두 움직인다. ” 는 야유를 듣기도 하고, 또 “ 재주가 뛰어나고 임기응변에 능숙하여 나라 일은 적극 담당하지 않고 처신만 잘하니, 사람들은 이를 단점으로 여겼다. ” 는 비평을 듣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이 시기의 예송에서 일어나기 쉬웠던 선비들의 희생을 예방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와 그의 형제들은 이 무렵 청나라와의 어려운 관계를 해결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청나라의 고위 관원들과도 적절히 교유했기 때문에 곤란한 경우를 당할 때마다 대체로 그와 그의 형제들에게 해결의 책무가 주어졌던 것이다. 그가 노구를 무릅쓰고 1662년에 진하 겸 진주사(進賀兼陳奏使)로 연경에 다시 다녀온 것도 이 까닭이었다.

1673년 다섯 번째의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난 지 6개월이 되던 달에 나이 72세로 죽으니, 현종은 3년 동안 늠록( 鹿 祿)과 제수를 내리도록 특명하였다. 그 뒤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시 · 문을 모아 엮은 ≪ 양파유고 ≫ 2권 2책과, 1656년(효종 7)까지의 일기인 ≪ 양파연기 ≫ 2권 2책이 있으며, 시조 1수가 전한다. 시호는 익헌(翼憲)이다(뒤에 忠翼으로 바꿈.).

 

조선조(朝鮮朝)에서 17명의 상신(相臣)을 비롯한 수많은 명신 현관(名臣賢官)을 배출해 낸 동래 정씨는 전주 이씨(全州李氏), 안동 김씨(安東金氏)와 더불어 <삼대상신가문(三大相臣家門)>으로 유명을 떨쳤으며, 국난이 있을 때마다 충의열사(忠義烈士)가 배출되어 도덕과 학문이 뛰어났던 석학(碩學)들과 함께 명문 동래 정씨의 가통(家統)을 더욱 빛나게 하였다.

 

鄭甲孫(정갑손) 선생의 일화

아들의 합격을 취소.

조선 초 재상 鄭甲孫(정갑손)이 함길도 감사로 있을 때였다. 마침 조정에 일이 있어 도성으로 가던 중, 과거 합격자 명단에 아들의 이름이 있는 것을 보게 됐다. 그는 서둘러 말을 몰아 도성에 도착한 후 곧바로 試官(시관)을 찾아가 꾸짖었다.

“늙은 놈이 감히 나에게 여우처럼 아양을 떠는구나. 내 아들놈은 아직 공부가 되어 있지 않거늘 어찌 임금을 속이고 과거에 합격시켰느냐!” 정갑손은 그 자리에서 아들의 이름을 지워버렸다.

 

鄭壽銅(정수동)  선생의 일화.

1

정수동은 부정하게 생긴 돈은 술을 마셔서 써버려야 한다면서 늘 술에 취하여 살았다.
그러다 어느 날 가깝게 지내던 趙斗淳(when순)의 잔치에 초대를 받은 정수동이 솟을대문을 들어서니, 사람들이 어린애가 동전 한 닢을 삼켰는데 창자에 동전이 붙으면 죽게 된다고 야단법석이었다.

이때 그가 나서서 사랑에 모인 대감들이 들으라는 투로,
“걱정할 것 없네. 아랫배만 슬슬 쓰다듬어 주면 그만일세. 어느 대감은 남의 돈 몇 만 냥을 삼키고도 배만 쓸고 있으면 아무 일 없는데, 까짓 제 돈 한 닢을 삼키고야 무슨 배탈이 나겠는가!” 하고 소리를 쳤다.

대감들이 이 말에 흠칫하였으나, 이윽고 술잔이 돌고 유흥이 무르익자 조 대감이 좌중에게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어느 대감은 호랑이라 하고 도둑이라고도 하는데, 다른 대감이 나서더니, “양반의 호령 한마디면 호랑이도 잡고 도둑도 잡을 뿐 아니라, 양반네의 명령에 누군들 꿈쩍하겠소. 그러니 가장 무섭고 두려운 것이 양반이오.” 하며 좌중을 둘러보자, 잠자코 있던 정수동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호랑이를 탄 양반 도둑입니다. 가슴에 호랑이(옛날의 호패)를 달고 온갖 도둑질을 자행하여 백성들의 고혈을 빨고 삼천리강산을 망치니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이 어디 있겠소!”라고 하여 좌중을 숙연하게 하였다.

1808(순조 8)∼1858(철종 9).
조선 후기의 시인. 본관은 東萊(동래). 본명은 芝潤(지윤). 자는 景顔(경안), 호는 夏園(하원). 태어날 때 손바닥에 壽(수)자의 문신이 있었고 이름  지윤의 ‘芝(지)’가 ≪한서 漢書≫에 ‘芝生銅池(지생동지)’로 있다고 하여 銅(동)자를 따서 수동이라는 별호를 사용하였다.

 

 

2

공자님께 다녀온 정수동

신동으로 알려졌던 정수동이 어렸을  때 서당에서 졸다가 들켜서 후장 에게 야단을 맞았다. 그 며칠 후, 이번에는 훈장이 졸다가 정수동에 들켰다.  
「훈장님은 왜 조르세요?」
「이놈, 내가 언제 졸아. 좀 모르는 글귀가 있어서 공자님께 여쭈어 보려고 하늘에 올라갔었다.」

다시 며칠 후, 정수동이 또 졸고 있자, 선생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놈, 또 졸고 있구나.」
「졸지 않았어요.」
「졸지 않고 무얼 하고 있었나?」
「잠깐 공자님을 뵈러 갔었어요.」
「요놈  봐라, 공자님을  뵈러 갔다고?  그래 공자님이  뭐라 시더냐?]
「예, 제가  일전에 우리  선생님이 오셨느냐고 여쭈었더니 그런 일 없다고 하시던데요.」

 

 

3

삼킨 동전 한 잎

정수동은 자라서 양반들과 상종이 많았지만, 토색질과 착취를  일삼는  양반들을 특히 미워했다. 어느 날 정승  조두순(趙斗淳)의 집에 들렀더니, 시골 부자 한 사람이 뇌물로 10만 냥을 보내 왔는데, 깨끗한  줄만 알았던 조 정승도 그 돈을 냉큼 받아 챙기는 것을 보았다.    
이런 일이 있는지  며칠 후 우연히 그 집에 들렀는데, 행랑어멈의 어린애가 돈 한 푼을 입에 물었다가 그만 삼켜 버렸다고 야단들이다.

행랑 어멈은 평소에 존경한 정수동이 나타나자,
「나리, 이 애가  엽전 한 푼을 삼켰어요. 죽지 않을까요?「하고  걱정하였다. 그러자 정수동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조정승의 방에 들릴 만한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염려말게.남의 돈 10만양도 꿀꺽 삼키고도 아무 탈이 없는데 제 돈 한 푼 삼킨 것쯤이야 어떨라구.」       
 

鄭榮邦(정영방) 선생의 일화.

鄭榮邦(정영방) 본관: 東萊(동래)

石門(석문) 鄭榮邦(정영방)(1577~1650)   선어대
선생은 조선 중기의 숭정처사로 東萊(동래)인이고, 자는 慶補(경보)이며, 호는 石門(석문)으로 우복 정경세 선생의 문인이다. 선조 38년인 1605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의 실정을 보고 벼슬을 단념하고서 영양군 입암면 연당리로 이주하면서 동래정씨의 집성촌을 형성하게 된다.
입향조인 석문 선생은 산수가 수려한 자연을 벗 삼아 소요자적하며 이 마을에 敬亭(경정)과 主一齋(주일재)를 짓고, 瑞石池(서석지)를 만들었다.
서석지는 중요민속자료 제108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조선조 광해군 5년(l613) 石門(석문) 정영방 선생이 "자연과 인간 합일사상"을 토대로 만든 조선시대 민가 연못의 대표적인 정원 유적이다.
우리나라 조경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윤선도가 전남 완도에 만든 부용원, 전남 담양에 있는 소쇄원과 더불어 3대한국 정원으로 뽑히고 있다.

 

 

鄭昌國(정창국)落巖(낙암) 전설.

 

조선조 인조 때 인물인 정창국(鄭昌國)이 그의 부인과 함께 포천군 신북면 기지리에 살다가 그만 부인을 남겨두고 병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부인 유씨(兪氏)는 남편의 분묘 앞에 막()을 짓고 주야로 애절하게 곡을 하면선 남편의 명복을 빌고 있었다.

때마침 병자호란으로 그 지방으로 호군(胡軍)이 쳐들어오자, 그들에게 잡혀 욕을 면하기 위해 피난하지 않고 남편 분묘 옆에 있는 큰 바위 위에 올라가서 몸을 날려 남편의 뒤를 따라 즉어 버렸다.

 

그리하여 그 바위의 이름이 落巖(낙암)이 되었고, 동네 이름도 낙암동(落巖洞)이라 일컬어졌다는 이야기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출전: 미족문화대백과사전>

 

 

국방을 튼튼히 한 정언섭

 

정인섭의 자는 공리(公理), 동래정씨로 숙종 12(1686)에 태어났다. 숙종 43(1717)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영조 1(1725) 증광문과에 장원급제,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 1727년 사 간원 정언이 되었으나 김일경 등을 처벌할 것을 간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파면되었다. 그러나 영조 4(1728) 김일경의 여당인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영조는 사헌부 지평으로 발탁, 그후 동래부사, 충청도관찰사, 동부승지, 광주부윤, 도승지, 한성부우윤, 병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호조, 예조의 참판을 지냈다. 영조 17(1741) 동지부사로 청나라를 다녀온 뒤 나아가 많은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 영조 24(1748)에 별세하였다.

정언섭은 영조 6(1730) 11월에 동래부사로 부임하였다. 당시 동래는 임진왜란 때 성이 함락된 후 140여년이 지나는 동안 성터는 허물어져서 동래가 나라의 관문임을 중시하고 성을 수축할 것을 계획하고 정부에 건의하였다.

 

1731년 정월 축성의 재가가 내려지자 축성 공사를 시작 동래읍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였다. 현재 망월산 부근에 남아 있는 동래읍성은 바로 동래부사 정언섭이 축성한 것이다. 공사가 시작된지 1백일이 좀 지나 4월에 길이 8, 높이가 수십척이 되는 큰 성을 쌓았으며, 5월에 성문을 준공한 뒤 7월에는 문루를 완성해 역사(役事)를 시작한 지 2백여일만에 견고한 성이 완비되었다. 성을 완공 뒤 수성청 (守城廳)과 수성창(守城倉)을 설치해 군비에 만전을 꾀하였다.

 

또한 공사 때 옛성의 남문터에서 부러진 창, 화살촉 등과 함께 출토된 유해들을 거두어 삼성대 부근에 6개의 봉분을 만들어 이들을 안정시켜 주었다. 이 무덤들은 임진왜란 당시 장렬히 싸우다 전사한 동래성민들의 무덤이며 이를 6총묘라 하고 뒤에 기를 추가하여 7총묘라하고, "임진전망유해지총" 동래의총이라고 불린다.

 

정언섭 부사는 군비를 완비 한 뒤 문교(文敎)쪽으로 방향을 돌려 시술제라는 제실을 짓고 고을 유생들이 학업을 익히게 하였다. 이 밖에도 정언섭 부사는 관사인 연심당 건립과 청사인 교방, 구휼, 창고인 사 창, 고마청 주사 등을 중건하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치적을 남기고 영조 9(1733) 1월 만 26개월의 임기를 마치고 퇴임해갔다.

 

 

 

鄭允弼(정윤필)의 묘

 

鄭允弼(정윤필) 成宗(성종) 5()

甲午(갑오)(1474)~ 中宗(중종) 30()

乙未(을미)(1535) 62

 

안동시 안기동 뒷산(현 상일 아파트 자리)에 묘표가 있어 살펴보니 忠順衛秉節校尉行司直 鄭允弼 墓(충순위병절교위행사직 정윤필 묘)라 기록되어 있고 뒷면에 음기는 5행에

公資憲大夫知義禁府事 鄭綸子生成

化甲午卒於 嘉靖 乙未 享年 六二

一男禧 二男裕 一女 南麒壽 二女

李若瑊餘皆幼

嘉靖 十六年 丁酉 二月 日

 

공자헌대부지의금부사 정륜자생성

화갑오졸어 가정 을미 향년 육이

일남희 이남유 일녀 남기수 이녀

이약감여개유

가정 십육년 정유 이월 일

 

라고 조각되어 있다. 공의 묘아래 의성 김씨 신령현감 金永命(김영명)의 묘가 있고 그 계하에 안동 권씨 효자 伯宗(백종)의 묘가 연분으로 자리자고 있다. 의성김씨 족보를 살펴보면 신령현감은 伯宗(백종)의 아들 景惠公(경혜공) 權專(권전)의 사위가 되고, 鄭允弼(정윤필)은 신령현감의 외손자이며, 반남 박씨 進勇校尉(진용교위) 忠佐衛司直(충좌위사직) 朴磁(박자)의 사위가 된다. 朴磁(박자)는 경태 연간에 안동 권씨 權琨(권곤)의 사위가 되어 안동에 정착하게 되고 묘는 서후면 마감산 안동 권씨 묘역에 있다.

19915월 이 묘역이 택지개발로 이장되게 되었는데 鄭允弼(정윤필) 묘는 무연고 묘라고 오래도록 방치되어 있었다. 그 다음 해 3월 풍양면 청곡리 동래 정씨 三樹亭(삼수정) 답사 때 浣潭所(완담소) 소장 鄭載基(정재기)씨에게 이 정씨 묘 이야기를 하였더니, 후손이 대구에 살고 있는데, 이 묘는 실전 된지 오래되었다 하였으며, 가까운 날자 중에 연락하여 찾아본다 하였다. 413일 후손이 이를 알고 묘를 찾기 위해 내려 왔는데, 이때는 이미 이장된 뒤였다. 그래도 비석이 있었으니 중년에 실전되었어도 찾을 수가 있게 된 것이다.

四佳(사가) 徐居正(서거정)調賢驛(조현역) 시구에도 陽川(양천) 許氏(허씨) 文敬公(문경공) ()의 묘를 실전 했다가 찾게 되었다 하였고, 慵齋叢話(용재총화)에도 慵齋(용재)5대조 君美(군미: 판도서 총랑)의 베위 同福(동복) 吳氏(오씨)의 묘를 실전했는데, 백씨와 함께 개성으로 가는 길에 坡山(파산) 별장에서 유하면서 문득 고향의 이야기를 하다가 5대조모의 분묘가 생각나서 세월이 오래되어 봉분이 평평하게 무너졌을 것이니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아버지께서도 그때 나이가 어려서 미처 자세히 여쭈어 못한 것이 큰 한이 된다 하셨는데...하면서 형제가 서로 한탄하였다. 다음날 洛河(낙하)를 건너다가 길을 잘못 들어 큰 재를 넘고 오르고 하느라 몸이 피곤한지라 말에서 내려 잠깐 쉬는데 골짜기에 石碑( )가 많은 무덤 사이에 비가 우뚝하게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가보자 하니 백씨가 날이 저물고 컴컴하니 가지 말라고 하였다. 내가 말을 달려 가보니 三韓國大夫人同福吳氏之墓(삼한국대부인동복오씨지묘)라 앞면에 큰 글씨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고조와 증조 삼형제의 휘자가 쓰여져 있었다.

이렇게 선대의 실전된 분묘를 찾게 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옛날부터 비를 세우는 것은 실전을 염려해서지 조상의 업적을 유명한 사람에게 부탁해서 과시하는 목적은 아니었을 것인데, 조선 후기로 내려오면서 비도 커지고 미사려구가 많아진 경향으로 흐른 것 같다. 공의 묘소도 袒褐(단갈)이 없었으면 영구히 실전되었을 것인데 400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 비석으로 인하여 찾게 되었으니 다행한 일이다.

 

 

 

 

 

鄭鳳鎭(정봉진)의 효행.

 

영약 고련고

 

이 분은 동래 정씨로서 이름이 봉진(鳳鎭)이고, 정 법한(鄭法漢)과 김녕 김씨 사이의 맏아들로 예천군 지보면 도장리에서 1875년에 태어났으며, 효성과 우애가 극진하고 성품이 온후하여 세상의 칭송을 받았다.

 

조상 대대로 선비 집안이었으나 가세가 몰락하여 어려서부터 글을 배우지 못했고, 품을 팔아 가면서 농사에만 힘써 부모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으며,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품속에 품어 와 부모님께 드렸으며, 형제간에는 재산 의 구분이 없을 정도로 우애로왔다. 항상 힘을 다하여 부모를 섬기고 부모 의 뜻에 따라 하루하루 착실히 일하여 청년기에 이르러서는 집안 형편이 나 아져서 먹고 입는 것에 걱정이 없게 되니 이웃 사람들은 효성이 지극하여 하늘이 돌본 것이라고 칭찬하고 부러워하였다.

 

그러나, 그런 시절도 잠깐 뿐이었다. 아버지가 43 세 때 이웃 마을에 문상 갔다가 찬 술을 마신 것이 덧나 속병 병을 얻게 되었다. 크게 상심한 봉진은 논밭을 팔아 약을 쓰고, 의원을 모시고, 심지어 점도 치는 등 좋다는 것은 다해 보았지만 병세는 점점 악화되어만 갔다. 아버지는 등에 업혀야 잠을 이룰 수 있었으므로 그 후 10 년의 세월을 밤이면 밤마다 신음하는 아버지를 업고 정원을 돌았으며, 비 오는 날이나 추운 겨울에는 좁은 방 안에서 병든 아버지를 업은채 밤을 지새워야 했다.

 

가세는 점점 기울고, 봉진의 몸은 야위어 갔지만, 그의 효심은 더 해만 갔다. 옛날부터 대변 맛이 쓰지 아니하면 그 사람의 병을 고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매일 아버지의 대변을 받아 맛보며 밤마다 뜰 가운데 정화수를 떠 놓고 북두칠성을 향해 지성으로 빌기를 내 몸으로 대신 아버지의 병을 앓게 해 주시고 내 목숨을 대신하여 아버지를 살려 주소서.’라고 하였다. 끼니조차 잇기가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속앓이에 좋다는 약은 어떤 품이라도 팔아 구했으며, 용하다는 의원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아무리 먼 곳이라도 달려가서 아버지의 병을 고쳐 달라고 애원하였다.

 

그의 부인 예천 임씨도 남편에 못지 않은 효부였다. 이웃 마을까지 나가서

방아품도 팔고, 밥도 빌고 하여 가계를 돕는 한편 시부모를 모시는 데는 한 치의 빈틈도 없고, 그 정성은 눈물겨울 정도로 지극하였다. 이런 소문이 널 리 퍼지니 스스로 도와주기 위해서 찾아오는 의원들도 허다하였다.

 

이렬 즈음, 하루는 한 의원이 나타나서 비방올 알려 주었다. 그것은, 고련고라는 약이었는데 소태나무 열 너 말에 물 열 넉 짐을 부어서 이렛동안을 계속해서 고으면 한 되 정도의 조청처럼 되는데 그것을 하루 세 번씩, 한 번에 한 숟가락씩 먹여서 끝까지 다 먹이면 반드시 병을 고칠 수 있을 것이지만, 그것을 이루고 못 이루고는 아들의 정성에 달렸다고 말한 후 홀연히 사라졌다. 봉진은 뛸 듯이 기뻤으나 당장 소태나무가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으며, 스물 여덟 말이나 들어갈 수 있는 솥을 구하지 못해 애를 태우다가 아버지를 업은 채 잠이 들었는데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서

이 사람아, 아버지를 업고만 있으면 어쩌는고? 빨리 소백산 명봉산으로 가게.”

하거늘 놀라 잠을 깨니 꿈에 들은 말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들리는 듯했다. 그래서 부랴부랴 잠든 아버지를 편히 눕혀 드리고 부인에게 시중을 부탁한 뒤 그 밤으로 달음질쳐 다음 날 해질 무렵 명봉산 아래에 이르러 보니 창호 지 만드는 곳이 있고 거기에 닥나무를 삶는 큰 솥이 걸려 있었다. 주인을 찾아 솥을 빌려 달라고 간청하니 처음에는 거절하던 주인도 봉진의 지극한 효성에 감동하여 마침내 솥을 빌려 주었다.

 

봉진은 뛸 듯이 기뻐 산으로 뛰어 올라가 소태나무를 베어다가 썰어서 고련고를 고으는데 땔나무는 산중 이라 흔했지만 주머니에 엽전 한 푼도 없었으니 낯선 두멧골에 식사를 할 길이 없었다. 송주(소나무 속껍질)도 벗겨 먹고, 찔래순도 꺾어 먹으며 7 일을 고으니 드디어 한 되 남짓한 고련고가 고여졌다. 이제 아버지의 병을 고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하늘에 날 듯이 기뻐 곧바로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너무 허기에 지쳐 몇 발자국 못가서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마침 그 광경을 본 그 근처의 사람이 따뜻한 좁쌀 미음을 끓여 주어 정신을 차릴 수 있게 되었다. 이 고마운 분은 명봉동에 살던 김 서울 댁이라고 하였는데 그 후로 두 집안이 매우 다정하게 지냈다고 한다. 과연 그 약으로 아버지의 병을 고치고 건강을 회복했으니 발병한 때로부터 꼭 10 년이 되었다.

 

아버지는 그로부터 5 년 후인 190559 세로 세상을 떠났다. 봉진은 너무 슬퍼한 나머지 몇 번이나 정신을 잃었으며 무덤 앞에 엎드려 흘린 눈물이 상복을 썩히고 대나무 지팡이가 여러 번 부러졌다 한다.

봉진은 그 뒤로 아무리 좋은 일이 있어도 결코 이를 드러내어 웃지 아니 하였으며 돌아가신 아버지 섬기기를 살아 계실 때 섬기 듯하였다. 또한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병을 얻었으므로 평생 동안 술을 마사지 않았다 이를 본 그 아우들도 형님이 아버지 생각에 술을 멀리하는 것을 알고 그 뜻을 따라서 우리도 술을 멀리해야 한다면서 모두 술을 끊었으니, 참으로 빛나는 가풍이 아닐 수 없다. 또 평생 동안 침 맞기, 약 먹기, 점치기를 피했다.

 

봉진은 홀로 계시는 어머니를 극진히 모시어 80 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효성을 다하였다. 어머니가 거처하는 방에 불을 때거나 침구를 펴고 청소하는 일은 아들이나 손자에게 미루는 일이 없이 몸소 보살폈다. 늙으신 어머니가 즐겨 드시는 음식은 일 년 내내 준비해 두고 언제나 잡수시도록 정성을 다했다.

 

이리하여 온 고을 사람들은 그를 큰 효자라고 불렀으며, 그의 지극한 효성을 기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도 이 고장에서는 이 분을 효자 중의 효자로 기리고 있다.

 

출전예천 지보초등학교 손 교감

참고 문헌 東萊鄭民金石集 孝行褒彰文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33

愚(우)

37

茂(무)

41

廷(정)

34

鳳(봉)

38

紀(기)

42

揆(규)

35

會(회)

39

庸(용)

43

 

36

可(가)

40

鐘(종)

44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동래 정씨(東萊鄭氏)는 남한(南韓)에 총 98,423가구, 414,78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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