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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정씨(鄭)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鄭(봉화정씨)

 

 

본관(本貫): 봉화(奉化)

시조(始祖): 정공미(鄭公美)

유래(由來):

 

봉화 정씨(奉化鄭氏)의 시조(始祖) 정공미(鄭公美)는 고려 성종(成宗) 때 봉화(奉化) 호장(戶長)을 역임하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봉화(奉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정영찬(鄭英粲)

시조 공미의 아들 영찬(英粲)이 비서랑(秘書郞)과 동정(同正)을 지냈다.

 

정균(鄭均)

영찬의 아들 균(均)이 검교군기감정(檢校軍器監正)을 역임했다.

 

정운경(鄭云敬)

1305(충렬왕 31)∼1366(공민왕 15).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봉화(奉化). 봉화현 호장 공미(公美)의 증손이다.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균(均)의 아들이며, 조선 개국공신인 도전(道傳)의 아버지이다.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이모집에서 자랐다. 어려서 영주 ( 榮州 )와 복주(福州 : 안동)의 향교에서 수학한 뒤 개경에 올라와 십이도 ( 十二徒 )와 교유하며 이곡 ( 李穀 ) 등과 사귀었다. 1326년(충숙왕 13)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어 1330년 문과에 급제해 이듬 해 상주목 사록으로 나갔다.

이후 전교교감(典校校勘)· 주부 ( 注簿 )·도평의녹사(都評議錄事)·삼사도사(三司都事)·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전의주부(典儀注簿)· 홍복도감 ( 弘福都監 )의 판관을 거쳐 1343년(충혜왕 복위 4)에 밀성군지사(密城郡知事)가 되었다.

당시 재상 조영휘(趙永暉)가 밀성인에게 대여했던 포(布)의 징수를 종용했으나 이를 묵살하였다. 다음 해 복주목의 판관에 전임되어서도 정실에 기울지 않으며 송사(訟事)를 잘 처리하였다.

삼사판관을 거쳐 서운부정(書雲副正)이 되어 1346년 하정사 ( 賀正使 )의 서장관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그 뒤 성균사예·보문각지제교(寶文閣知製敎)를 지냈다. 1348년(충목왕 4) 양광도안렴사(楊廣道按廉使), 이듬해 교주도안렴사(交州道按廉使) 등을 거쳐 1352년(충정왕 3) 전법총랑(典法摠郎)에 이르렀다.

1353년 전교시판사(典校寺判事)로 전주목사로 나가 치적을 쌓았다. 1356년(공민왕 5) 병부시랑에 올라 무반의 전선(銓選 : 인사행정)을 관장하였다. 1357년 비서감보문각직학사(秘書監寶文閣直學士)로 옮겨 강릉도(江陵道)와 삭방도 ( 朔方道 )의 존무사 ( 存撫使 )로 파견되어 백성을 안찰하였다.

1358년 지형부사(知刑部事), 1359년 형부상서에 특별히 제수되었다. 1363년 검교밀직제학(檢校密直提學)에 제수되었다. 1365년 병이 들어 사퇴하고 영주에 돌아와 이듬해 별세하였다. 사시(私諡)는 염의(廉義)이다.

 

정도전(鄭道傳)

1342(충혜왕 복위 3) ∼ 1398(태조 7). 고려 말 조선 초의 정치가 · 학자.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峰). 봉화호장 공미(公美)의 고손자로, 아버지는 형부상서 운경(云敬)이다. 선향(先鄕)은 경상북도 영주이며, 출생지는 충청도 단양 삼봉(三峰)이다.

〔생 애〕 아버지와 이곡 ( 李穀 )의 교우관계가 인연이 되어, 이곡의 아들 색(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정몽주 ( 鄭夢周 ) · 박상충 ( 朴尙衷 ) · 박의중(朴宜中) · 이숭인 ( 李崇仁 ) · 이존오 ( 李存吾 ) · 김구용 ( 金九容 ) · 김제안 ( 金齊顔 ) · 윤소종 ( 尹紹宗 ) 등과 교유했으며, 문장이 왕양혼후(汪洋渾厚)해 동료 사우의 추양(推讓)을 받았다. 1360년(공민왕 9) 성균시에 합격하고, 2년 후에 동 진사시에 합격해 충주사록(忠州司錄) · 전교주부(典校注簿) · 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를 역임하였다.

1370년 성균관박사로 있으면서 정몽주 등 교관과 매일같이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수업, 강론했으며, 이듬 해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임명되고 5년간 전선(銓選 : 인사행정)을 관장하였다. 1375년(우왕 1) 권신 이인임 ( 李仁任 ) · 경복흥 ( 慶復興 ) 등의 친원배명정책에 반대해 북원(北元) 사신을 맞이하는 문제로 권신 세력과 맞서다가 전라도 나주목 회진현(會津縣) 관하의 거평부곡(居平部曲)에 유배되었다.

1377년에 풀려나서 4년간 고향에 있다가 삼각산 ( 三角山 ) 밑에 초려(草廬:三峰齋)를 짓고 후학을 가르쳤으나, 향인(鄕人) 재상이 서재를 철거해 부평으로 이사하였다. 그곳에서도 왕모(王某)라는 재상이 별업(別業)을 만들기 위해 재옥(齋屋)을 철거하자 다시 김포로 이사하였다. 1383년 9년간에 걸친 간고한 유배 · 유랑 생활을 청산하고, 당시 동북면도지휘사로 있던 이성계 ( 李成桂 )를 함주 막사로 찾아가서 그와 인연을 맺기 시작하였다.

1384년 전교부령(典校副令)으로서 성절사 정몽주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다음 해 성균좨주 · 지제교 · 남양부사를 역임하고,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관대사성으로 승진하였다. 1388년 6월에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 일파가 실권을 장악하자 밀직부사로 승진해 조준 ( 趙浚 ) 등과 함께 전제개혁안을 적극 건의하고, 조민수 ( 曺敏修 ) 등 구세력을 제거해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았다.

1389년 이성계 · 심덕부 ( 沈德符 ) · 지용기 ( 池湧奇 ) · 정몽주 · 설장수( 律 長壽) · 성석린 ( 成石璘 ) · 조준 · 박위(朴 輹 ) 등과 모의해 폐가입진 ( 廢假立眞 )의 명분을 내걸어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해 좌명공신(佐命功臣 : 中典功臣)에 봉해지고, 삼사우사(三司右使) · 지경연사(知經筵事)를 지냈다. 그 뒤 정당문학 ( 政堂文學 )으로서 성절사 겸 변무사(聖節使兼辨誣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윤이 ( 尹彛 ) · 이초(李初)의 무고사건을 해결하고 돌아와 동판도평의사사 겸 성균관대사성(同判都評議使司兼成均大司成)이 되었다. 그리고 1391년 삼군도총제부 우군총제사(三軍都摠制府右軍摠制使)가 되어 병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구세력의 탄핵으로 봉화에 유배되었다가 이듬 해 봄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중에 낙마한 사건을 계기로 고려 왕조를 옹호하던 정몽주 · 김진양 ( 金震陽 ) · 서견 ( 徐甄 ) 등의 탄핵을 받아 보주(甫州 : 지금의 예천)의 감옥에 투옥되었다. 이유는 “ 가풍이 부정(不正)하고 파계(派系)가 불명(不明)하다. ” 든가, "천지(賤地)에서 기신(起身)해 당사(堂司)의 자리에 몰래 앉아 무수한 죄를 지었다. ” 는 것으로, 특히 신분적 약점이 많이 거론되었다.

그러나 정몽주가 이방원 ( 李芳遠 ) 일파에 의해 격살되자 유배에서 풀려 나와, 같은 해 7월에 조준 · 남은 ( 南誾 ) 등 50여 명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해 조선 개창의 주역을 담당하였다. 조선 개국 후 개국1등공신으로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郎贊成事) · 동판도평의사사사 · 판호조사(判戶曹事) · 겸판상서사사(兼判尙瑞司事) · 보문각대학사(寶文閣大學士) · 지경연예문춘추관사(知經筵藝文春秋館事) · 겸의흥친군위절제사(兼義興親軍衛節制使) 등의 요직을 겸임해 정권과 병권을 한 몸에 안았다.

같은 해 겨울에 사은 겸 정조사로서 두 번째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3년(태조 2) 〈 문덕곡 文德曲 〉 · 〈 몽금척 蒙金尺 〉 · 〈 수보록 受寶 蘿 〉 등 3편의 악사(樂詞)를 지어 바쳐 이성계의 창업을 찬송했으며, 문하시랑찬성사로서 동북면도안무사(東北面都安撫使)가 되어 동북면 개척에도 힘을 기울였다.

1394년 정월에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로서 경상 · 전라 · 양광삼도도총제사(慶尙全羅楊廣三道都摠制使)가 되어 재정 및 지방 병권을 장악하였다. 한편, 같은 해 6월 ≪ 조선경국전 朝鮮經國典 ≫ 을 지어 올리고 이 해 ≪ 심기리 心氣理 ≫ 3편을 저술했으며, 한양 천도를 계획, 실천해 수도 경영에 주동적으로 참획하였다.

1395년 정총 ( 鄭摠 ) 등과 더불어 ≪ 고려국사 高麗國史 ≫ 37권을 지어 올리고, ≪ 감사요약 監司要約 ≫ 을 저술해 전라도관찰사 이무 ( 李茂 )에게 주었으며, ≪ 경제문감 經濟文鑑 ≫ 을 저술해 재상 · 대간 · 수령 · 무관의 직책을 밝혔다. 1396년 이른바 표전문(表箋文) 문제로 명나라에서 이를 트집잡아 내정을 간섭하자, 전부터 추진해오던 요동(遼東) 수복운동에 박차를 가해 군량미확보, 진법훈련(陣法訓鍊), 사병혁파를 적극 추진하였다.

1397년 ≪ 경제문감별집 經濟文鑑別集 ≫ 을 저술해 군도(君道)를 밝히고, 12월에 동북면도선무순찰사가 되어 군현의 지계(地界)를 획정하고 성보(城堡)를 수선하며 참호(站戶)를 설치하였다. 1398년 권근 ( 權近 )과 더불어 성균관제조가 되어 4품 이하의 유사(儒士)들에게 경사(經史)를 강습시키고, 여름에 ≪ 불씨잡변 佛氏雜辨 ≫ 을 저술해 배불숭유(排佛崇儒)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하였다.

9월에 진법훈련을 강화하면서 요동 수복계획을 추진하던 중 이방원의 기습을 받아 희생되었다. 죄명은 세자 방석(芳碩)에 당부(黨附)해 종사를 위태롭게 했다는 것이었다. 이를 공소난(恭昭難) · 무인난(戊寅難) 혹은 제1차 왕자의 난이라고 한다.

〔정치개혁사상〕 그는 문인이면서 동시에 무(武)를 겸비했고, 성격이 호방해 혁명가적 소질을 지녔으며, 천자(天資)가 총민해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군서(群書)를 박람해 의론(議論)이 정연했다 한다.

개국 과정에서 자신의 위치를 한(漢)나라 장량(張良)에 비유하면서, 한고조(漢高祖 : 劉邦)가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고조를 이용했다고 하면서 실질적인 개국의 주역은 자신이라고 믿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노약 노비(老弱奴婢) 약간 명을 상속받았을 뿐, 오랫동안 유배 · 유랑 생활을 보내면서 곤궁에 시달렸다. 더욱이, 부계혈통은 향리 ( 鄕吏 )의 후예로서 아버지 때에 이르러 비로소 중앙 관료의 벼슬다운 벼슬을 했으며, 어머니와 아내가 모두 연안 차씨(延安車氏) 공윤(公胤)의 외예 얼속(外裔 椧 屬)이었다. 특히 모계에 노비의 피가 섞여 있었다.

이러한 혈통 때문에 구가세족이나 명분을 중요시하는 성리학자들로부터 백안시 당하는 경우가 많았고, 조선시대에도 3노가(奴家)의 하나라는 세인의 평을 받았다. 그와 건국사업을 함께 한 조영규 ( 趙英珪 ) · 함부림 ( 咸傅霖 ) 등 개국공신과 태종 때의 중신 하륜 ( 河崙 ) 역시 연안 차씨의 외척 얼손( 椧 孫)으로서, 조선 개국에는 신분적 하자가 큰 인물들이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청 · 장년의 시기를 맞았던 고려 말기는 밖으로 왜구 · 홍건적의 침구로 국내가 어수선했고, 안으로는 구가세족의 횡포로 정치기강이 무너지고 민생이 곤핍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9년간의 시련에 찬 유배 · 유랑 생활은 그로 하여금 애국적이며 애민적인 의식을 깊게 만들었으며, 그의 역성혁명운동은 이러한 개혁의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된다.

그의 개혁운동이나 그에 수반된 왕조건국사업은 단순한 정치적 실천운동으로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 제도로서 정착시켜 사상 · 제도상으로 조선의 기초를 놓았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발견된다.

그는 ≪ 학자지남도 學者指南圖 ≫ · ≪ 심문천답 心問天答 ≫ (1375) · ≪ 심기리편 ≫ (1394) · ≪ 불씨잡변 ≫ (1398) 등의 철학서를 차례로 저술해 고려 귀족사회의 정신적 지주였던 불교의 사회적 폐단과 철학적 비합리성을 비판, 공격하고, 성리학만이 실학(實學)이요 정학(正學)임을 이론적으로 정립해 유교 입국의 사상적 기초를 다졌다. 그러나 성리학을 강력하게 옹호했다 해서 주자학의 전 체계를 다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 주자가례 朱子家禮 ≫ 라든가, ≪ 자치통감강목 資治通鑑綱目 ≫ , 그리고 주자학에서 중요한 사회정책으로 간주되는 사창제(社倉制) · 향약(鄕約) 등에 관해서는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또 주자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이단시하는 한당(漢唐)의 공리적 사상(功利的思想)이나 부국강병에 유용한 제도 · 문물에 대해서는 포용적이었다.

그것은 주자학만으로는 당시의 시대적 과제인 부국강병 달성이나 천민 · 서얼의 인심 수람, 무인세력의 지위 안정, 무전농민(無田農民)의 구제 등 새 왕조 개창에 필요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까닭이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층신앙(基層信仰)으로 굳어진 불교 · 도교 · 참설(讖說) 등을 부분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그의 사상체계는 기본적으로 주자학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음성적으로 이단을 포용하는 절충성을 띠었음이 특색이다.

〔사회개혁사상〕 그의 경세론(經世論)은 ≪ 조선경국전 ≫ (1394) · ≪ 경제문감 ≫ (1395) · ≪ 경제문감별집 ≫ 등에 제시되어 있다. 특히, 조선의 통치규범을 종합적으로 제시한 ≪ 조선경국전 ≫ 은 ≪ 주례 周禮 ≫ 에서 재상 중심의 권력체계와 과거제도, 병농일치적인 군사제도의 정신을 빌려오고, 한당(漢唐)의 제도에서 부병제 ( 府兵制 ) · 군현제(郡縣制, 守令制) · 부세제(賦稅制) · 서리제(胥吏制)의 장점을 받아들였다. 또, 명나라로부터는 ≪ 대명률 大明律 ≫ 을 빌려왔다.

≪ 경제문감 ≫ 은 재상 · 감사 · 대간 · 수령 · 무관의 직책을 차례로 논하고, ≪ 경제문감별집 ≫ 에서는 군주의 도리를 밝혔다. 그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정치제도는 재상을 최고실권자로 하여 권력과 직분이 분화된 합리적인 관료지배체제이며, 그 통치권이 백성을 위해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민본사상을 강조하였다.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때에는 물리적인 힘에 의해 교체될 수 있다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긍정했고, 실제로 혁명 이론에 입각해 왕조 교체를 수행하였다.

사 · 농 · 공 · 상의 직업분화를 긍정하고, 사를 지배층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사의 직업은 도덕가 · 철학자 · 기술학자 · 교육자 · 무인 등의 역할을 겸비해야 하고 사에서 능력위주로 관리가 충원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또한, 적서(嫡庶)나 양천(良賤)과 같이 혈통에 의한 신분차별을 주장하지 않은 것이 주목된다.

한편, 여말에 나라가 가난하고 민생이 피폐하였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농업생산력의 증대와 토지균분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해결책으로서 민구수(民口數)에 따른 토지재분배와 공전제(公田制) 및 10분의 1세의 확립, 공(工) · 상 (商) · 염(鹽) · 광(鑛) · 산장(山場) · 수량(水梁)의 국가 경영을 실현시키고자 하였다.

따라서 경세론은 자작농의 광범한 창출과 산업의 공영을 통해 부국강병을 달성하고, 능력에 토대를 둔 사 위주의 관료정치를 구현하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의 개혁안은 상당 부분이 법제로서 제도화되었지만 모두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저 서〕 저서로는 위에 적은 것 이외에 경세(經世)에 관한 것으로 ≪ 경제의론 經濟議論 ≫ · ≪ 감사요약 監司要約 ≫ 이 있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고, 고려 역사를 편년체로 엮은 ≪ 고려국사 ≫ 가 있다. 이 책은 뒤에 김종서 ( 金宗瑞 ) 등이 찬한 ≪ 고려사절요 ≫ 의 모체가 되었으나 지금 전하지 않는다.

이 밖에 병법에 관한 것으로 ≪ 팔진36변도보 八陣三十六變圖譜 ≫ · ≪ 오행진출기도 五行陣出奇圖 ≫ · ≪ 강무도 講武圖 ≫ · ≪ 진법 陣法 ≫ 등이 있다. 의서(醫書)로는 ≪ 진맥도결 消 脈圖訣 ≫ , 역산서 (曆算書)로서 ≪ 태을72국도 太乙七十二局圖 ≫ 와 ≪ 상명태을제산법 詳明太乙諸算法 ≫ 등이 있다.

그는 또 많은 악사(樂詞)를 지어 〈 문덕곡 〉 · 〈 몽금척 〉 · 〈 수보록 〉 · 〈 납씨곡 納氏曲 〉 · 〈 정동방곡 靖東方曲 〉 등을 남겼으며, 회진현의 유배시절과 삼각산 · 부평 · 김포 · 영주 등지에서의 방랑시절에 쓴 수많은 시문들이 지금 ≪ 삼봉집 ≫ 에 전해지고 있다.

≪ 금남잡영 錦南雜詠 ≫ 과 ≪ 금남잡제 錦南雜題 ≫ 는 특히 유배시절의 시문을 모은 것으로 그의 시련기의 사상을 살펴보는 데 좋은 자료이다. 동시에, 당시의 부곡(部曲)의 실상을 이해하는 연구 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 삼봉집 ≫ 은 1397년(태조 6)에 처음 간행되고, 1487년(성종 18)에 중간되었다. 그 후 1791년(정조 15) 누락된 것을 수습해 재간했으며, 이것이 오늘날 전해지고 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정도복(鄭道復)

고려 우왕(禑王) 때 문과에 급제한 도복(道復)은 도전의 동생으로, 중추원 좌승선(中樞院左承宣)을 역임했으며, 조선이 개국하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에 올랐고, 이어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과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역임했다. 1403년(태종 3)에 성주(星州) 유학교수(儒學敎授)로 천임(薦任)하였고, 1409년(태종 9)에 인녕부 사윤(仁寧府司尹)을 지냈다.

 

정진(鄭津)

1361(공민왕 16)∼1427(세종 9).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봉화(奉化). 아버지는 개국공신 도전(道傳)이다. 1382년(우왕 8) 낭장이 되고, 사재령(司宰令)·전농령(典農令)을 지냈다.

1391년(공양왕 3) 정몽주 ( 鄭夢周 ) 등 고려를 지키려는 구세력의 탄핵을 받아 그의 아버지인 도전과 함께 삭직되었다가, 1392년(태조 1)에 조선이 개국되자 풀려나와 개국공신의 아들로서 연안부사로 등용되었다.

1393년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를 거쳐 경흥부윤·영원주목사 등을 역임하고, 그 뒤 내직으로 들어와 공조전서와 형조전서를 지냈다. 1398년 중추원부사로 있을 때에 제1차왕자의 난이 일어나 그의 아버지 도전이 주살되자, 그도 벼슬을 삭직당하여 전라도 수군에 충군되었다.

1407년(태종 7) 다시 판나주목사로 기용되고, 1416년 인녕부윤(仁寧府尹)이 되어 크게 치적을 올렸다. 1419년(세종 1)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가 1420년 판한성부사가 되었다. 그 해 성절사 ( 聖節使 )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평안도도관찰사가 되었다. 1423년 공조판서를 역임하고, 1424년 개성유후사유후(開城留後司留後)가 되었으며, 1425년 형조판서가 되었다.

그의 아버지 도전의 후광을 받아 조선 개국 초에는 한때 화려한 직책에 중용되었으나, 왕자의 난으로 도전이 몰려 주살되자 일개 수군으로 전락되어 모진 역경을 겪었다. 그러나 성실한 인품이 인정되어 다시 등용되어 재상의 영직(榮職)을 누렸다. 시호는 희절(僖節)이다.

 

정담(鄭澹)

담(澹)은 도존(道存)의 아들로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를 지냈다.

 

정간(鄭諫)

담의 아들 간(諫)은 대호군(大護軍)을 역임하였다.

 

정문형(鄭文炯)

1427(세종 9) ∼ 1501(연산군 7). 조선 전 · 중기의 문신.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명숙(明叔), 호는 야수(野 馬 ). 개국공신 도전(道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진(津)이며, 아버지는 속(束)이다.

1447년(세종 29) 생원으로 별시문과에 정과로 급제, 정자가 되고, 감찰을 거쳐 예조좌랑으로 궐내에서 다른 관리들과 더불어 기생을 불러들여 가무음주한 죄로 장형 ( 杖刑 )을 받았다. 1455년(세조 1) 교리로서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사간을 거쳐 예조정랑으로 가례색도감낭청(嘉禮色都監郎廳)을 겸직, 이어 사인 재직시에 또 한번 기생을 불러들여 음주한 죄로 장형을 받았다. 1464년 좌간의대부 · 공조참의를 거쳐 경상도관찰사로 나갔고, 이듬해 진주에 살던 소훈 ( 昭訓 ) 윤씨(尹氏)의 어머니 병환을 잘 돌보지 않았다는 죄로 의금부의 국문을 받고 파직되었다.

1466년 함길도절도사 · 변정원(辨定院:掌隷院)의 판결사를 거쳐, 이듬해 동지중추부사로 성절사 ( 聖節使 )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72년(성종 3) 병조참판 · 평안도관찰사 · 형조판서 · 중추부지사 · 황해도관찰사 · 평안도관찰사 · 행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하고 1489년 우참찬이 되었다.

이어 호조판서 · 세자시강원빈객 · 경상도순변사를 거쳐 1492년 우찬성, 1494년 공조판서로 산릉도감제조(山陵都監提調)를 겸직하였다. 이듬해 판중추부사, 이어 우의정에 승진되고 궤장( 廓 杖)을 하사받았으나 이해 용렬하고 탐학한 재상이라는 탄핵을 받고 영중추부사로 체직, 영경연사를 겸직하였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조정대신들과 함께 김종직 ( 金宗直 )을 대역죄인으로 논단하고 부관참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시호는 양경(良敬)이다.

 

 

鄭道傳(정도전)

 

 

이성계의 참모 정도전

조선 역시를 통틀어 정도전만큼 매우 공이 많았음에도 불행한 인물은 드물 것이다.

그는 개국공신으로 이성계의 오른팔이 되어 나라의 기초를 다지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

조선 초기 국책 사업은 대부분 그에게서 나왔다.

 

그는 한양의 궁궐과 종묘의 위치 도성의 자리를 정하고, 궁궐 궁문의 이름, 도성의 8대문과 48의 이름을 지었다. 그리고 [조선경국전] · 경제문감, 경제문감별집등을 지어, 나리를 다스리는 대요와 관제 등 모든제도와 문물을 제정했다.

그가 지은 몽금척· 수보록. [문덕곡] 등 수많은 악장은 태조의 공덕을 찬양한 작품으로 조선 500년간 궁중애서 연주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그도 정권욕에 휘말려 세자 이방석을 옹위하려다가 태종 이방원에 의해 13988월에 죽고 말았다.

 

이후 그는 조선 500년 동안 역적으로 몰려 신원하지 못한 불행힌 사람이 되었다. 정도전은 문장에 뛰어난 문필가이기도 했다.

정도전은 고려 우왕 1년에 친원파였던 이인임 · 경복흥의 노여움을 사서 회진현으로 귀양을 갔다가 2년 만에 석방되었으니, 그 후에도 5동안 조정에 나오지 못하고 학자들과 학문을 토론했다.

 

이성계가 동북면 병마사로 있던 시절 어느 정도전은 안변으로 이성계를 찾아 갔다.

삼봉(정도전의 호)이 어인 일로 이 곳까지 오셨소?’

세상을 떠돌면서 많은 인물들을 만나 보았으나 제가 찾을 곳은 이곳뿐이었소.”

정도전의 말에 이성계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래, 앞으로 어찌하실 잠이오?’

그저 막막할 뿐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소이다.”

그러면 우선 이곳에 머물면서 조정에 들어갈 궁리를 하십시다.”

장군께서 거두어 주시니 이 은해 백골난망이오이다.”

 

이때 고려의 조정은 친명파들이 힘을 수가 없을 때였다.

조정에는 이인임 · 경복흥 . 최영 등의 친원파들이 있어, 그들에게 쫓겨 난 정도전은 발붙일 곳이 없었다. 이때 이성계는 신진 세력으로서 전쟁터를 누비는 장수에 불과했다. 정도전은 이성계의 막하에 들어가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의 개국에 힘을 기울였다.

한때는 정몽주의 탄핵을 받아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그가 정당문학으로 있을 때 고려 조정의 분위기는 이성계의 친명파 쪽으로 기울었다. 이때 이성계의 주변에는 정도전을 비롯하여 조준 · 남은 · 윤소종등 신진들이 때를 기다리며 웅크리고 있었다.

공양왕의 세자 석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이때 이성계는 횡주에 나가 세지를 맞으려고 개경을 떠났다. 사냥을 무척 좋아했던 이성계는 황주로 기던 길에 해주에서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진창에 거꾸로 처박혔는데 이때 매우 심한 상처를 입어 민가에 누워 있게 되었다.

 

정몽주 등은 이 소식을 듣고 이성계를 제거할 절호의 기회라 여겼다. 그는 조정의 대간들을 부추겨, 이성계의 참모인 조준 · 정도전 · 남은 윤소종 · 남재 · 조박을 먼저 귀양을 보내 버렸다.

그런 김귀련 · 이번등을 조준등이 귀양을간곳에 보내 심문 한 후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태종 이방원이 재빠르게 조치를 하여, 이성계가 곧장 개성으로 돌아옴으로써 무산되고 말았다.

 

그 후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는 여론은 급물살을 탔다

이성계가 조선의 왕으로 등극한 후 정도전은 동북면 선무사로 · 현의 경제를 정하고 자신이 편리한 대로 일하라는 영을 받았다.

 

이때 이지란 · 이원경이 정도전의 부사가 되었다.

태조는 중추부사 신득공을 동북면 도선위시로 멍하고 정도전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 주었다 편지에는 태조가 정도전을 몹시 아끼는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작별한 지까 오래되어 생각이 몹시 깊소이다. 짐이 중추를 보내어 공의 행역에서의 수고를 위로하려고 하는데, 최긍이 와서 지낸다고 하니 조금은 위안이 되요. 솜옷도 벌 보내니 발아 주기 바라요. (이지란) 이 절제(이원경)에께도 솜옷 벌씩을 보내니, 나의 생각이 간절함을 해주오. 조정의 예기는 중추에게 들으시요. 봄추위에 때에 따라 몸을 잘 보호하여 변방의 공적을 부디 완성해주시요.’

정도전은 편지와 솜옷을 받고 태조에 대한 충성심을 거듭 마음 깊이새겼다

어느 태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새 궁전에서 여러 신하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 이 주연에 정도전도 참석하여 시 한 수를 지어 올렸.

 

궁중의 동산에 봄이 깊어 꽃이 화창했는데

늙은이를 불러 금준(금으로 만든 술통)벌이었네.

하늘에서 갑자기 때를 알아 비를 내려 보내니

다시 온 몸에 우로의 은혜가 스미는 것을 깨닫겠네.

 

어느 날 밤, 태조는 개국공신들과 술에 몹시 취하여 정도전에게 자신의 고마운 마음을 나타냈다.

삼봉, 내가 이 자리에 있게 것은 그대의 힘일세.” 이말에 정도전은 엎드려 전하, 바라옵건대 전하께오서는 옛날 해주 사냥터에서 낙마한 일을 부디 잊지 마시옵소서. 신은 한때 역모로 몰려 귀양지에서 을 날 기다리 때를 잊지 않겠나이다. 전하와 신이 이 일을 잊지 아니 하오면 자손만대를 이을 것이옵니다.”

또한 정도전은 격식에 크게 얽매이지 않았다. 그의 겸손하고 소박한 면이 엿보이는 일회까 야사에 전한다.

 

어느 날 정도전이 등청하여 자리에 앉았다. 아랫사람이 살펴보니 정도전의 신발이 하나는 희고 하나는 검었다.

대감, 신발이 짝이 아니옵니다.”

 

정도전이 자기 신발을 내려다보고 빙긋이 웃었다. 그는 태연한 모습으로 일과를 마쳤다.

그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고삐를 잡은 하인에게 그가 말했다

신발이 짝짝이라 우스우냐?’

'니올시다. 대감마님.”

하인이 웃음을 참고 대답했다.

신의 검고 흰 것을 괴이하게 보지 마랴. 왼쪽에서는 흰 것만 보일 것이고 검은 것은 보지 못할 것이며, 오른쪽에서는 검은 것만 볼 것이고 흰 것은 보지 못할 것이니 걱정할 것 없느니라.”

그러하옵니다. 대감마,”

일회는 그가 겉치레의 신경 쓰지 않고 소탈했음을 말해 주는 일화이다.

 

 

鄭道傳(정도전)

 

우왕(禑王) 초 북원(北元)의 사신이 왔을 때 이인임(李仁任)지윤(池奫)이 그들을 받아들이려고 하자 정도전(鄭道傳)이 김구용(金九容이숭인(李崇仁권근(權近)과 함께 도당(都堂)에 글을 올려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인임과 경복흥(慶復興)이 그 글을 물리쳐버리고 정도전에게 원나라 사신을 영접하라고 지시하자 정도전은 경복흥의 집으로 가서,내가 사신의 머리를 베어 오든지 그렇지 않으면 명나라로 묶어 보낼 것이오.”라고 대들었다. 경복흥이 노해,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신하 김의(金義)와 무엇이 다른가?”라고 꾸짖으니 정도전이 이해득실을 자세히 말했는데 그 태도가 매우 불손했다.

또한 태후(太后)에게도 사신을 받지 말아야한다고 건의하자 경복흥이 더욱 노해 이인임과 함께 정무를 보지 않으니 왕이 정도전을 회진현(會津縣 :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으로 유배 보냈다.

 

대성(臺省)의 시종관(侍從官)들이 도성의 동쪽 교외에서 전송했는데, 염흥방(廉興邦)이 배상도(裵尙度)를 보내어,내가 시중(侍中)에게 말씀드려 화가 어느 정도 풀렸으니 가지 말고 잠시 기다리라.”는 전갈을 보냈다. 정도전이 술을 마시다가 분연히,내가 주장한 것이나 시중이 노한 것은 각자의 견해를 지킨 일로 모두 나라를 위해 그리한 것이오. 지금 왕명이 내린 터에 어찌 공의 말을 듣고 중지하겠소?”하고는 말을 타고 떠나버렸다. 재상(宰相)이 그 말을 듣고 아직 뉘우치지 않았다고 여겨 사람을 보내 곤장을 때리려고 하였는데, 마침 석기(釋器)의 난이 일어나는 바람에 중지했다.얼마 후에 사면하여 편의대로 거주지를 선택

하게 하자 정도전은 삼각산(三角山 : 지금의 서울특별시 북한산) 아래에 움막을 짓고 경서를 강의했는데 배우는 자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그는 항상 후학들을 가르치고 이단을 물리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고성(固城 : 지금의 경상남도 고성군)의 요망한 백성 이금(伊金)이 스스로를 미륵(彌勒)이라고 칭하면서,“만약 내 말을 믿지 않으면 3월에 이르러 해와 달에 모두 빛이 없어질 것이다.”라고 많은 백성들을 현혹시키자 승려 찬영(粲英),“이금이 말하는 것은 모두 황당무계하다. 해와 달에 빛이 없어질 것이라는 그의 말은 더욱 가소롭다. 나라 사람들이 어찌 그 같은 헛된 말을 믿겠는가?”라고 했다. 이에 정도전이,“이금과 석가(釋迦)는 그 말에 있어서 다름이 없다. 다만 석가는 멀리 전생(前生)이나 후생(後生)의 일을 말하니 사람들이 그 거짓됨을 알지 못하고, 이금은 바로 석 달 뒤의 일을 말하니 거짓이 바로 나타날 뿐이다.”고 하니 승려 찬영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국역 고려사: 열전, 2006.11.20, 경인문화사)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21

應(응)

28

鎔(용),銧(광)

銑(선)

35

樂(락),根(근)

宋(송)

22

在(재)

29

泰(태),洛(락)

36

熙(희),烈(열)

23

鐘(종)

30

榮(영),東(동)

37

吉(길),五(오)

孝(효)

24

洙(수),淳(순)

31

思(사),翊(익)

炫(현)

38

錫(석),鍝(우)

欽(흠)

25

炳(병),桄(광)

32

重(중),堯(요)

培(배)

39

求(구),海(해)

26

燮(섭),熹(희)

然(연)

33

鎬(호),鍵(건)

鏞(용)

40

 

27

基(기),圭(규)

34

濟(제),湜(식)

41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봉화 정씨(奉化鄭氏)는 남한(南韓)에 총 4,939가구, 20,46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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