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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정씨(鄭)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鄭(서산정씨)

 

 

본관(本貫): 서산(瑞山)

시조(始祖): 정신보(鄭臣保)

유래(由來):

 

서산 정씨(瑞山鄭氏)의 시조(始祖)는 송(宋)나라에서 원외랑(員外郞)을 지낸 정신보(鄭臣保)이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그는 원래 중국(中國) 절강(折江) 사람으로 증조부(曾祖父)인 응충(應沖)이 송(宋)나라에서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를, 아버지인 수거(秀 )는 원외랑(員外郞)을 지냈다 한다.

 송(宋) 나라가 망(亡)하자 신보(臣保)가 바다를 건너 고려로 망명(亡命)하여 서산(瑞山)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게 된 것이 서산 정씨의 시초이다.

그리하여 후손들을 시조(始祖)의 정착 세거지(定着世居地)인 서산(瑞山)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정인경(鄭仁卿)

1237(고종 24)∼1305(충렬왕 31).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서주(瑞州 : 지금의 충청남도 서산). 인주(麟州 :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의 수령을 지낸 신보(臣保)의 아들이다. 처음 몽고어 통역관으로 출발했으나 고종 말 몽고병의 침입 때 종군해 야습으로 전공을 세워 제교(諸校)에 보임되었다.

1269년(원종 10) 세자(뒤의 충렬왕)가 원나라에 갈 때 시종하였다. 세자가 돌아오다가 파사부(婆娑府)에 이르렀을 때, 임연 ( 林衍 )의 변(變)을 고하는 자가 있어 인주의 수령으로 있던 아버지에게 이를 알려 세자를 다시 원나라로 되돌아가게 하였다.

이 공으로 1274년(충렬왕 1) 시종일등공신(侍從一等功臣 : 高麗史 정인경열전에는 2등공신으로 되어 있으나 여기에서는 세가의 기록을 따름.)에 올랐다. 또한 고향인 부성현(富城縣)이 서산군(瑞山郡)으로 승격되었다.

1279년 장군으로 원나라에 가서 일본 원정준비에 홍다구 ( 洪茶丘 )가 간섭하지 못하게 할 것을 건의하였다. 1282년 친종장군(親從將軍)으로서 요동(遼東)·심양(瀋陽)에 가서, 이듬해에는 대장군으로 요양(遼陽)·북경(北京)에 가서 유민(流民)들을 추쇄(推刷)해 왔다. 1288년 상장군에 올랐다.

1290년 동녕부 ( 東寧府 )를 고려에 귀속시키는 데 공을 세워 부지밀직(副知密直)에 오르고, 서북면도지휘사로서 서경유수가 되었다. 1292년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올랐으나 나라에서 혼인을 금하는 기간을 어겨 섬에 유배되었다.

1299년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어 정조사 ( 正朝使 )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를 거쳐 중찬으로 치사했으며, 벽상삼한삼중대광 추성정책안사공신 (壁上三韓三重大匡推誠定策安社功臣)의 호를 받았다.

성품이 정직하고 몽고어에 능해 통역관으로 이름이 알려져 원나라로부터 무덕장군 정동성이문관 (武德將軍征東省理問官)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정신유(鄭信柔)

인경(仁卿)의 아들 4형제가 모두 관직에 올라 크게 현달 하였는데, 그 중 장남 신유(信柔)가 상서(尙書)를 지냈다.

 

정신화(鄭信和)

인경의 차남 신화(信和)는 중랑장(中郞將)을 역임하였다.

 

정신영(鄭信英)

전의령(典醫令)을 역임한 신회의 동생 신영(信英)과 함께 가문을 증흥시켰다.

 

정희(鄭僖)

조선조(朝鮮朝)에서 인경(仁卿)의 8세손 희(僖)가 김종직(金宗直)에게서 글을 배워 연산군(燕山君) 때 과거에 급제하여 현감(縣監)을 지냈다.

 

정인홍(鄭仁弘)

1535(중종 30) ∼ 1623(인조 1). 조선 중기의 학자 · 의병장 · 정치가. 본관은 서산(瑞山). 자는 덕원(德遠), 호는 내암(來庵). 합천(陜川) 출신. 희(僖)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언우(彦佑)이고, 아버지는 건(健)이다.

조식(曺植)의 수제자로서 최영경 ( 崔永慶 ) · 오건 ( 吳健 ) · 김우옹(金宇 裵 ) · 곽재우 ( 郭再祐 ) 등과 함께 경상우도의 남명학파(南冥學派)를 대표하였다. 1573년(선조 6) 학행으로 천거되어 6품직에 오르고, 1575년 황간현감에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이듬해 지평을 거쳐 1581년 장령에 승진하였다.

당파가 동서로 양분되자 다른 남명학파와 함께 동인편에 서서 서인 정철 ( 鄭澈 ) · 윤두수 ( 尹斗壽 ) 등을 탄핵하려다가 도리어 해직당하고 낙향하였다. 1589년 정여립옥사(鄭汝立獄事)를 계기로 동인이 남북으로 분립될 때 북인에 가담하여 영수(領首)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합천에서 성주에 침입한 왜군을 격퇴하고, 10월 영남의병장의 호를 받아 많은 전공을 세웠다. 이듬해 의병 3,000명을 모아 성주 · 합천 · 고령 · 함안 등지를 방어했으며, 의병 활동을 통해 강력한 재지적 기반(在地的基盤)을 구축하였다.

1602년 대사헌에 승진, 동지중추부사 · 공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유성룡 ( 柳成龍 )이 임진왜란 때 화의를 주장했다는 죄를 들어 탄핵하여 파직하게 한 다음, 홍여순 ( 洪汝諄 ) · 남이공 ( 南以恭 ) 등 북인과 함께 정권을 잡았다. 이어 유성룡과 함께 화의를 주장했던 성혼 ( 成渾 ) 등 서인을 탄핵하였다.

북인이 선조 말년에 소북 · 대북으로 분열되자, 이산해 ( 李山海 ) · 이이첨 ( 李爾瞻 )과 대북을 영도하였다.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仁穆大妃)에게서 영창대군 ( 永昌大君 )이 출생하자 적통(嫡統)을 주장하여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소북에 대항하여 광해군을 적극 지지하였다.

1607년 선조가 광해군에 양위하고자 할 때 소북의 영수 유영경 ( 柳永慶 )이 이를 반대하자 탄핵했다가 이듬해 소북 이효원(李效元)의 탄핵으로 영변에 유배되었다. 이어 광해군이 즉위하자 유배도중 풀려나와 대사헌에 기용되어 소북일당을 추방하고 대북정권을 수립하였다.

대북정권의 고문 내지 산림 ( 山林 )의 위치에 있던 그는 유성룡계의 남인과 서인세력을 추방하고 스승 조식의 추존 사업을 적극 추진하는 한편, 문묘종사 문제를 둘러싸고 이언적 ( 李彦迪 )과 이황 ( 李滉 )을 비방하는 소를 올려 두 학자의 문묘종사를 저지시키려 하다가 8도유생들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그리고 성균관 유생들에 의하여 청금록(靑襟錄 : 儒籍)에서 삭제되는 등 집권을 위한 싸움으로 정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1612년(광해군 4) 우의정이 되고, 1613년 이이첨과 계축옥사를 일으켜 영창대군을 제거하고 서령부원군(瑞寧府院君)에 봉해졌다. 같은 해 좌의정에 올라 궤장( 廓 杖)을 하사받고 1618년 인목대비 유폐사건에 가담하여 영의정에 올랐다.

그는 광해군 때 대북의 영수로서 1품(品)의 관직을 지닌 채 고향 합천에 기거하면서 요집조권(遙執朝權 : 멀리서 조정의 권세를 좌지우지함.)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참형되고 가산이 적몰(籍沒)당했으며, 끝내 신원되지 못하였다. 이이(李珥)는 일찍이 그를 평하여 “ 강직하나 식견이 밝지 못하니, 용병에 비유한다면 돌격장이 적격이다. ” 라고 하였다.

강경한 지조, 강려(剛戾)한 성품, 그리고 지나치게 경의(敬義)를 내세우는 행동으로 좌충우돌하는 대인관계를 맺어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 저서로 ≪ 내암집 ≫ 이 있다.

 

정근승(鄭瑾昇)

군자감(軍資監)을 역임하였다.

 

정사용(鄭士鎔)

판관(判官)을 역임하였다.

 

정의열(鄭義烈)

의열(義烈)은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鄭仁弘(정인홍) 장군의 일화.

 

조식은 일찍이 덕원이 있으면 내가 죽지 않을 것이다.’라 하면서 분신처럼 정인홍을 아꼈다고 한다. 조식은 죽기 직전 평소 차고 있던 칼인 경의검(敬義劒)을 정인홍에게 전해 줄 정도로 그에 대한 믿음을 두터이 했고, 정인홍은 평생 의리를 지키며 스승에 화답했다.

 

 

鄭仁弘(정인홍) 장군의 일화.

 

정인홍은 합천 사람이다. 유년 시절에 조식에게서 글을 배웠는데, 조식이 지조가 보통 아이와는 다른 것을 기특하게 여겨서 지경(持敬) 공부를 가르치니, 이로부터 굳은 마음으로 어려움을 무릅쓰고 공부하여 밤이나 낮이나 게을리 하지 않았다.

 조식은 항상 방울을 차고 다니며 주의를 환기시키고 칼끝을 턱 밑에 괴고 혼매한 정신을 일깨웠는데, 말년에 이르러 방울은 김우옹에게, 칼은 정인홍에게 넘겨주면서 이것으로 심법(心法)을 전한다고 하였다. 정인홍은 칼을 턱 밑에 괴고 반듯하게 꿇어앉은 자세로 평생을 하루같이 변함없이 공부 하였다.

                                    ( 출전 [선조수정실록], 선조 651)

 

 

鄭仁弘(정인홍) 장군의 일화.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정인홍이 태어날 때 상왕산에서 기이한 징조가 나타났다고 한다.

산의 풀과 나무가 모두 말라 죽었다고 하며, 정인홍의 눈은 별처럼 빛나서 사람을 쏘아보면  압도하는 기세가 있어서 감히 마주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은 사실 여부를 떠나 정인홍의 강인한 기질을 뒷받침해주는 이야기로, 정인홍은 훗날 정치에 참여하여 죽을 때까지도 이러한 강한 기질을 그대로 나타냈다.

 

 

鄭仁弘(정인홍) 장군의 일화.

 

정인홍은 조선중기 지성사에서 한 획을 그은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의 수제자라는 학문적 정통성뿐만 아니라,  1592년 임진왜란 때는 58세라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직접 의병을 일으킬 만큼 충의(忠義)를 실천한 인물이었다. 선조 후반의 정국에서도 대사헌의 직책을 역임하면서 추상같은 선비의 면모를 잘 보여 주었다.

鄭仁弘(정인홍)1608년 광해군 정권 출범 시 이미 70세가 넘은 고령의 정치인이었지만 임진왜란시의 의병 활동, 경상우도(慶尙右道)를 중심으로 한 향촌사회에서의  기반, 조식의 수제자라는 후광, 광해군 즉위의 일등공신이라는 점은 광해군대 정국에서 최대의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20

萬(만)

27

章(장)

34

柱(주)

21

九(구)

28

重(중)

35

熙(희)

22

昞(병)

29

采(채)

36

圭(규)

23

永(영)

30

源(원)

37

鎭(진)

24

璣(기)

31

相(상)

38

泓(홍)

25

弼(필)

32

煥(환)

39

植(식)

26

康(강)

33

均(균)

40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서산 정씨(瑞山鄭氏)는 남한(南韓)에 총 3,287가구, 13,81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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