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鄭(영덕정씨)
본관(本貫): 영덕(盈德)
시조(始祖): 정자영(鄭自英)
유래(由來):
영덕 정씨(盈德鄭氏)의 시조(始祖) 정자영(鄭自英)은 봉례(奉禮)를 지낸 도(道)의 아들로,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학유(學諭). 직강(直講). 사예(司藝) 등을 지내고, 경연(經筵)에서 경사(經史)를 강론하자 그 박식한 지식에 세조(世祖)가 감동하여 장령(掌令)으로 발탁되었다. 1465년(세조 11) 사성(司成).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시강원 우보덕(侍講院右輔德)을 지내고 이듬해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를 거쳐 공조 참판(工曹參判), 1470년(성종 1) 지중추부사(知中樞府使)가 되었다. 특히 학문(學問)을 즐겼고 역학(易學)에도 밝았으며 후에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가문의 중요 인물
정영국(鄭英國)
1564(명종 19)∼1623(인조 1). 조선 중·후기의 문신. 본관은 영덕(盈德). 자는 방언(邦彦), 호는 관원(灌園). 계전(繼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인(允仁)이고, 아버지는 홍(鴻)이다.
1594년(선조 2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1599년에 병조좌랑에 임명되자 채겸길 ( 蔡謙吉 )과 함께 홍여순 ( 洪汝諄 )의 사주에 의하여 유성룡 ( 柳成龍 )을 비방, 배척하였다. 이 때 그는 간사한 언론으로 사람을 현혹시키고 사특한 행동을 일삼다가 좌의정 이원익 ( 李元翼 )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그 뒤 세자시강원사서·장령을 거쳐 해주판관·보령현감·대구판관·평안도도사·은계찰방(銀溪察訪) 등 외직에 전전하였지만, 그 조처가 모두 어리석고 교활하였다고 한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통례원좌통례(通禮院左通禮)로서 춘추관편수관을 겸직하여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광해군 때에는 행신(幸臣) 이이첨 (李爾瞻)의 일당으로 활동하였고, 해주목사가 되어서는 최기 ( 崔沂 )를 무고하여 옥사를 일으키는 등 비행을 자행하다가 인조반정 후 처형되었다.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영덕 정씨(盈德鄭氏)는 남한(南韓)에 총 520가구, 2,21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