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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정씨: 영일정씨(鄭)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鄭(연일정씨)

 

 

본관(本貫): 연일(延日)

시조(始祖): 지백호(智伯虎): 정습명(鄭襲明),정극유(鄭克儒)

유래(由來):

 

정씨(迎日鄭氏)는 신라(新羅)의 전신(前身)인 사로(斯盧)의 육부촌(六部村) 중 취산진지촌장 지백호(智伯虎)가 서기 32년(신라 유리왕 9) 봄 유리왕(儒理王)으로 부터 다른 다섯 촌장들과 함께 사성(賜姓)받을 때 본피부(本彼部)로 개칭되면서 정씨(鄭氏)의 성(姓)을 하사(下賜) 받은 것이 시초가 되며, 그의 원손(遠孫) 종은(宗殷)이 신라조(新羅朝)에서 간관(諫官)으로 직언(直言)을 하다가 인동(仁同) 약목현(若木縣)에 유배된 후 후손 의경(宜卿)이 영일(迎日)로 이거(移居)하여 호장(戶長)을 지내고 영일현백(迎日縣伯)에 봉해졌으므로 영일정씨 (迎日鄭氏)로 시적(始籍)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의 계대(系代)가 실전(失傳) 되고 소목(昭穆)을 고증할 문헌이 전하지 않아 고려(高麗) 예종(睿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인종조(仁宗朝)에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추밀원 지주사(樞密院 知奏事)를 지낸 정습명(鄭襲明)을 시조(始祖)로 받드는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와 감무(監務)를 역임한 정극유(鄭克儒)를 시조로 받드는 감무공파(監務公派)로 갈라져서 세계(世系)를 있고 있다.

 

가문의 중요 인물

 

정몽주(鄭夢周)

1337(충숙왕 복위 6) ∼ 1392(공양왕 4). 고려 후기의 문신 · 학자. 본관은 영일 ( 迎日 ). 경상도 영천 출생. 초명은 몽란(夢蘭) 또는 몽룡(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습명(襲明)의 후손으로 운관(云瓘)의 아들이다. 어머니 이씨(李氏)가 난초화분을 품에 안고 있다가 땅에 떨어뜨리는 꿈을 꾸고 놀라 깨어나 낳았기 때문에 초명을 몽란이라 했다가 뒤에 몽룡으로 개명하고, 성인이 되어 다시 몽주라 고쳤다.

1357년(공민왕 6) 감시 ( 監試 )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장원해 1362년 예문관의 검열 · 수찬이 되었다. 이 때 김득배 ( 金得培 )가 홍건적을 격파해 서울을 수복하고서도 김용 ( 金鏞 )의 음모로 상주에서 효수되자, 그의 문생으로서 왕에게 청해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냈다.

1363년 낭장 겸 합문지후(郎將兼閤門祗候) · 위위시승(衛尉寺丞)을 거쳐,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 ( 從事官 )으로 종군, 서북면에서 달려온 병마사 이성계 ( 李成桂 )와 함께 여진토벌에 참가하고 돌아와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 · 전농시승(典農寺丞)을 역임하였다.

당시 상제(喪制)가 문란해져서 사대부들이 모두 백일 단상(短喪)을 입었는데, 홀로 부모의 상에 여묘(廬墓)를 살아 슬픔과 예절을 극진히 했기 때문에 1366년 나라에서 정려를 내렸다.

이듬해 예조정랑으로 성균박사를 겸임하였다. 당시 고려의 ≪ 주자집주 朱子集註 ≫ 에 대한 그의 강설이 사람의 의표를 찌르게 뛰어나 모두들 의아해 하였다. 그러다가 송나라 유학자 호병문(胡炳文)의 ≪ 사서통 四書通 ≫ 이 전해지면서 이와 서로 맞아떨어지는 것을 보고 모두 탄복하였다.

대사성 이색 ( 李穡 )은 그를 높이 여겨 ‘ 동방 이학 ( 理學 )의 시조 ’ 라 하였다. 태상소경(太常少卿)과 성균관 사예 · 직강 · 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372년 서장관 ( 書狀官 )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 풍랑으로 배가 난파되어 일행 12인이 익사하였다.

다행히 그는 13일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명나라 구조선에 구출되어, 이듬해 귀국하였다. 경상도안렴사(慶尙道按廉使) ·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 등을 거쳐, 1376년(우왕 2) 성균관대사성으로 이인임 ( 李仁任 ) · 지윤(池奫)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가 언양에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풀려났다.

당시 왜구의 침해가 심해 나흥유 ( 羅興儒 )를 일본에 보내어 화친을 도모했으나 그 주장(主將)에게 붙잡혔다가 겨우 죽음을 면하고 돌아왔다. 그에게 앙심을 품었던 권신들의 추천으로 구주 ( 九州 )지방의 패가대(覇家臺)에 가서 왜구의 단속을 요청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겼으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건너가, 교린(交隣)의 이해(利害)를 설명해 맡은 임무를 수행했고, 왜구에게 잡혀갔던 고려 백성 수백명을 귀국시켰다.

이어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전공사(典工司) · 예의사 ( 禮儀司 ) · 전법사 ( 典法司 ) · 판도사(判圖司)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1380년 조전원수로 이성계를 따라 전라도 운봉에서 왜구를 토벌하였다.

이듬해 성근익찬공신(誠勤翊贊功臣)에 올라 밀직부사 상의회의도감사 보문각제학 동지춘추관사 상호군(密直副使商議會議都監事寶文閣提學同知春秋館事上護軍)이 되었다. 1382년 진공사(進貢使) · 청시사(請諡使)로 두 차례 명나라에 갔으나, 모두 입국을 거부당해 요동(遼東)에서 되돌아왔다.

동북면조전원수로서 다시 이성계를 따라 함경도에 다녀온 뒤, 1384년 정당문학 ( 政堂文學 )에 올라 성절사 ( 聖節使 )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당시 명나라는 고려에 출병하려고 세공(歲貢)을 증액하며, 5년간의 세공이 약속과 다르다 하여 고려 사신을 유배하는 등 국교관계가 몹시 악화되어 있었다.

이에 모두 명나라에 봉사하기를 꺼렸으나, 사신의 임무를 다해 긴장상태의 대명국교를 회복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1385년 동지공거 ( 同知貢擧 )가 되어 우홍명 ( 禹洪命 ) 등 33인을 뽑고, 이듬해 다시 명나라에 가서 증액된 세공의 삭감과 5년간 미납한 세공의 면제를 요청해 결국 관철하였다.

귀국 후 문하평리 ( 門下評理 )를 거쳐 영원군(永原君)에 봉군되었으며, 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으나 다시 국교가 악화되어 요동에서 되돌아와, 삼사좌사(三司左使) · 문하찬성사 · 예문관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389년(공양왕 1)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세워, 이듬해 문하찬성사 동판도평의사사사 호조상서시사 진현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겸 성균대사성 영서운관사(門下贊成事同判都評議使司事戶曹尙瑞寺事進賢館大提學知經筵春秋館事兼成均大司成領書雲館事)로 익양군충의군(益陽郡忠義君)에 봉군되고, 순충논도동덕좌명공신(純忠論道同德佐命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초(彛初)의 옥사가 일어나, 당시 조정에서 몰려난 구파정객들에 대한 대간의 논죄가 끊임없이 계속됨을 보고 이를 부당하다고 말해 탄핵을 받았다.

이에 사직하려 했으나 허락되지 않았으며, 이어 벽상삼한삼중대광 수문하시중 판도평의사사병조상서시사 영경령전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경연사 익양군충의백(壁上三韓三重大匡守門下侍中判都評議使司兵曹尙瑞寺事領景靈殿事右文館大提學監春秋 館事經筵事益陽郡忠義伯)이 되었다.

고려 말 다사다난하던 때 정승의 자리에 올라 아무리 큰 일이나 큰 의혹이라도 조용히 사리에 맞게 처결하였다. 당시 풍속이 모든 상제(喪祭)에 불교의식을 숭상했는데, 사서(士庶)로 하여금 ≪ 가례 ≫ 에 의해 사당을 세우고 신주를 만들어 제사를 받들게 하도록 요청해 예속이 다시 일어났다.

또, 지방수령을 청렴하고 물망이 있는 사람으로 뽑아 임명하고, 감사를 보내 출척(黜陟)을 엄격하게 했으며, 도첨의사사 ( 都僉議使司 )에 경력과 도사를 두어 금전과 곡식의 출납을 기록하게 하였다.

서울에는 오부학당 ( 五部學堂 )을 세우고, 지방에는 향교를 두어 교육의 진흥을 꾀하였다. 그리고 기강을 정비해 국체를 확립하고, 쓸데없이 채용된 관원을 없애고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였다. 또, 의창 ( 義倉 )을 세워 궁핍한 사람을 구제하고, 수참 ( 水站 )을 설치해 조운 ( 漕運 )을 편리하게 하는 등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바로잡고자 노력하였다.

1391년 인물추변도감제조관(人物推辨都監提調官)이 되고, 안사공신(安社功臣)의 호를 더했으며, 이듬해 ≪ 대명률 大明律 ≫ · ≪ 지정조격 至正條格 ≫ 및 본국의 법령을 참작, 수정해 신율(新律)을 만들어 법질서를 확립하려고 힘썼다.

당시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높아지자, 조준 ( 趙浚 ) · 남은 ( 南誾 ) · 정도전 ( 鄭道傳 ) 등이 그를 추대하려는 책모가 있음을 알고 이들을 제거하려 하였다.

그런 와중에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 석(奭)을 마중나갔던 이성계가 황주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벽란도 ( 碧瀾渡 )에 드러눕게 되자, 그 기회에 먼저 이성계의 우익(羽翼)인 조준 등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이를 눈치챈 이방원 ( 李芳遠 )이 아버지 이성계에게 위급함을 고해 그날 밤으로 개성으로 돌아오게 하는 한편, 정몽주를 제거할 계획을 꾸몄다. 정몽주도 이를 알고 정세를 엿보려 이성계를 문병하고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 ( 善竹橋 )에서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 ( 趙英珪 ) 등에게 격살되었다.

그는 천품이 지극히 높고, 뛰어나게 호매(豪邁)해 충효를 겸하였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해 게을리 하지 않았고, 성리학을 연구해 조예가 깊었다. 그의 시문은 호방, 준결하며, 시조 〈 단심가 丹心歌 〉 는 그의 충절을 대변하는 작품으로 후세까지 많이 회자되고 있으며, 문집으로 ≪ 포은집 ≫ 이 전하고 있다.

1405년(태종 5) 권근 ( 權近 )의 요청에 의해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수문전대제학 감예문춘추관사 익양부원군(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修文殿大提學監藝文春秋館事益陽府院君)이 추증되었다.

1517년(중종 12) 태학생(太學生) 등의 상서(上書)로 문묘에 배향되었고, 또 묘에 비석을 세웠는데, 고려의 벼슬만을 쓰고 시호를 적지 않아 두 왕조를 섬기지 않은 뜻을 분명히 하였다.

또, 개성의 숭양서원 ( 崧陽書院 ) 등 13개의 서원에 제향되었고, 묘 아래에 있는 영모재(永慕齋), 영천의 임고서원 ( 臨皐書院 ) 등 몇 곳의 서원에는 그의 초상을 봉안하고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정종성(鄭宗誠)

몽주의 아들 종성(宗誠)이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를 지냈다.

 

정보(鄭保)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영일 ( 迎日 ). 호는 운곡(雲谷). 할아버지는 몽주(夢周)이며, 아버지는 이조참의 종성(宗城)이다. 학문이 뛰어나 세종의 총애를 받았고, 한때 예안현감으로 나갔다가 감찰이 되었다.

일찍이 성삼문 ( 成三問 )· 박팽년 ( 朴彭年 ) 등과 친교를 맺고 학문을 논하기도 하였다. 1456년(세조 2) 6월에 단종복위사건이 일어나자, 인척 되는 한명회 ( 韓明澮 )에게 사육신의 무죄를 주장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자 천추의 악인이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한명회가 그 해 12월 그를 난언죄(亂言罪)로 고발하여 죽음을 받게 하였으나, 세조는 그가 고려 충신 정몽주의 손자임을 감안하여 죄질을 한 등급 감하여 연일 ( 延日 )에 유배시켰다. 그 뒤 단성으로 이배되었다가 간사한 무리들의 참소로 그곳에서 죽음을 당하였다.

1699년(숙종 25) 지경연사(知經筵事) 이유 ( 李濡 )의 상소로 신원(伸寃),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용인의 충렬서원 ( 忠烈書院 )에 제향되었으나 대원군 때 서원이 헐렸다.

 

정종소(鄭從韶)

1447년 (세종 29) 문과에 급제했던 종소(從韶)는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에 올랐으나 병자년(丙子年)의 변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향리에 은거 했다.

 

정세아(鄭世雅)

1535(중종 30) ∼ 1612(광해군 4). 조선 중기의 의병.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이다. 본관은 영일 ( 迎日 ).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호수(湖 馬 ). 영천(永川)에서 세거(世居)하였다. 사성 종소(從韶)의 현손으로, 아버지는 참봉 윤량 ( 允良 )이다. 1558년(명종 13)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족(士族)으로 향촌의 자제들을 동원하여 편대를 정하고 격문을 작성하여 의병을 규합, 900여명을 모집하여 의병대장이 되었다. 그 때 곽재우 ( 郭再祐 )는 의령에서, 권응수 ( 權應銖 )는 신령에서 각각 기병하여 서로 성원하였다.

그 해 8월 권응수의 지휘 아래 영천 의병장 정대임 ( 鄭大任 ) · 정천뢰(鄭天賚) · 조성(曺誠) · 신해(申海) 등과 함께 영천 박연 ( 朴淵 )에서 왜적과 싸워 큰 전과를 거두고 영천성을 수복하였으나, 전공포상은 받지 못하였다. 영천성을 수복한 데 이어 다시 경주의 왜적을 격퇴하였다.

이로 인하여 낙동강 왼쪽이 온전하였다. 이듬해 평양과 서울이 차례로 수복되자 군사를 조희익(曺希益)에게 맡기고 자양(紫陽)으로 돌아갔다. 체찰사 이원익 ( 李元翼 )에 의하여 여러 번 천거되었으나 사양하였고, 나중에 황산도찰방(黃山道察訪)을 잠시 지내고 곧 사직하였다.

장현광 ( 張顯光 ) · 조호익 ( 曺好益 ) · 이준 ( 李埈 ) 등과 학문을 토론하며 후진을 양성하였다.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영천의 환고사(環皐祠)에 봉향되었으며, 그에 대한 ≪ 호수실기 ≫ 가 있다. 시호는 강의(剛義)이다.

 

정의번(鄭宜藩)

1560(명종 15)∼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의병. 본관은 영일 ( 迎日 ). 자는 위보(衛甫), 호는 백암 ( 栢巖 ). 아버지는 의병장 세아(世雅)이다.

1585년(선조 18)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영천에서 승리, 이어 경주에 진격하여 싸우다가 좌장군 박진(朴晋)의 패전으로 적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빠진 아버지를 구출하기 위하여 혈전을 벌이다가 적에게 사로잡혔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고 죽임을 당하였다.

우순사 김성일 ( 金誠一 )의 장계로 호조정랑에 추증되고, 1732년(영조 8) 좌승지로 가증(加贈)되었다. 1784년(정조 8) 정려가 내려졌으며, 영천 환고사(環皐祠)에 제향되었다.

 

정대임(鄭大任)

1553(명종 8)∼1594(선조 27). 조선 중기의 의병장. 본관은 영일 ( 迎日 ). 자는 중경(重卿), 호는 창대(昌臺). 영천 출신. 아버지는 용(容)이며, 어머니는 증참판 김응생(金應生)의 딸이다. 증조부 윤식(允湜)에게 수학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당지산(唐旨山)에서 복병으로 적을 크게 무찌르고 이어 7월에 영천전투에 참가, 의병 100여명을 이끌고 의병대장 권응수(權應洙)의 휘하에 들어가 중총(中摠)의 직책을 맡고 활약하였다.

그 뒤 영천에서 신령으로 이동하는 적군을 권응수와 함께 요격, 박연 ( 朴淵 )에서 대승하고 영천수복에 공을 세웠다. 용궁·비안의 전투에서도 다수의 적을 참획(斬獲)하고 병사 박진 ( 朴晉 )과 함께 경주탈환전에 용명을 떨쳤다.

이듬해 태화강 ( 太和江 )의 적군을 공격, 종일 역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린 공으로 1593년 비안현감·훈련원첨정·예천현감·경상좌도병마우후를 역임하였다. 1594년 무과에 급제, 승품(陞品)되기도 전에 적군과 싸우다가 죽었다.

그 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고, 가선대부 ( 嘉善大夫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다. 창대서원 ( 昌臺書院 )에 제향되었으며, 공산회맹 (公山會盟) 때 창화한 시 한수가 전한다.

 

정유성(鄭維城)

1596(선조 29) ∼ 1664(현종 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영일 ( 迎日 ). 자는 덕기(德基), 호는 도촌(陶村). 강화 출신. 몽주(夢周)의 9대손이며, 운(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구응(龜應)이고, 아버지는 박사 근(謹)이다. 어머니는 황치경 ( 黃致敬 )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기재로 소문이 났으며 10세 때 외할아버지 황치경으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 학문을 닦은 뒤 1627년(인조 5) 강도에서 보인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에 들어가 실력을 인정받은 뒤 예문관검열을 거쳐 춘추관기사관에 뽑히고, 다시 주서 · 수찬 · 집의를 지냈다.

1644년에 황해도관찰사로 나간 뒤 승지 · 전라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1649년(효종 즉위년) 평안도관찰사로 나갔으며, 이어 중앙으로 돌아와 대사간 · 대사성 · 도승지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이어 동지경연사 ( 同知經筵事 )를 거쳐, 1653년에는 경기도관찰사에 임명되어 선정을 베풀고 민생 안정에 힘썼다.

이어 우참찬에 승진되고 호조판서 · 예조판서를 거쳐 대사헌이 되었으며, 뒤이어 이조판서 · 형조판서가 되었다. 특히 이조판서에 재직할 때는 오직 공도(公道)로써 관리들의 임명을 결정, 인사 관리에 조금도 부정이 없게 하였다. 한성판윤과 호조판서를 지내는 동안에는 낭비를 막아 국고를 윤택하게 하였다.

1660년(현종 1) 우의정으로 고부사 ( 告訃使 )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런데 이 당시 이조판서 송시열 ( 宋時烈 )이 경성판관 홍여하 ( 洪汝河 )의 상소로 사직하게 되자, 효종에게 ‘ 선왕(先王:효종)이 중용한 인물을 소인배들의 모함으로 배척당하게 할 수는 없다. ’ 고 하고, 송시열의 사직을 철회시켰다. 한때 대사성 서필원 ( 徐必遠 )이 대신들을 모함하는 데만 급급하자 서필원의 이조참의 취임에 반대, 이를 관철시켰다.

그런데 이 때 사간원에서 서필원을 두둔하고 논구(論救)하자, 사의를 표명했으나 허락되지 않고 영중추부사로 좌천되는 데 그쳤다. 품성은 온량(溫良)했으나 판단력이 뛰어나 공사 처리에는 명석하고 과단성 있게 추진하였다.

군왕의 실정이나 불의를 보면 대세의 이해에 관계없이 직간을 서슴지 않아 효종대는 중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이해한 현종대는 경상(卿相)의 자리까지 올려줄 정도로 총애를 받았다. 가정에서도 겸허하고 근신했으며, 청빈(淸貧)을 가훈으로 하는 선비다운 생활을 즐겼다. 저서로 ≪ 은대일기 銀臺日記 ≫ 가 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정제두(鄭齊斗)

1649(인조 27) ∼ 1736(영조 12). 조선 후기의 양명학자. 본관은 영일 ( 迎日 ). 자는 사앙(士仰), 호는 하곡(霞谷). 몽주(夢周)의 후손으로, 우의정 유성(維城)의 손자이고, 진사 상징(尙徵)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한산 이씨(韓山李氏)로 호조판서 기조(基祚)의 딸이다. 서울에서 출생해 어려서는 이상익(李商翼)에게 수학하였다. 몇 차례 과거 시험에 실패한 뒤 24세 때부터는 과거 공부를 그만둔 다음 학문 연구에만 전념하였다.

32세 때는 영의정 김수항 ( 金壽恒 )의 천거로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에 임명되었고, 그 뒤 종부시주부 · 공조좌랑에 임명되었다. 40세 때는 평택현감에 임명되고 그 뒤 서연관 ( 書筵官 )을 비롯해 상령군수 · 종부시주부 · 사헌부장령 · 사헌부집의에 임명되었다. 61세 때 강화도 하곡(霞谷)으로 옮겨 살았으며, 호조참의 · 강원도관찰사 · 동지중추부사 · 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다.

74세에는 사헌부대사헌 · 이조참판에 임명되고 그 뒤 성균관좨주 ·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었다. 78세 때는 이정박(李廷撲)이 조정에서 그가 양명학을 한다고 배척했으나 영조의 보호를 받았으며, 80세에 의정부우참찬, 88세에는 세자이사(世子貳師)로 임명되었다.

〔양명학의 확립〕 20여세 때부터 박세채 ( 朴世采 )를 스승으로 섬기며 수학했고, 처음에는 주자학을 공부했으나 일찍부터 양명학에 심취하였다. 당시의 도학은 정통주의적 신념에서 양명학을 이단으로 배척했으나, 그는 확고한 신념으로 양명학의 이해를 체계화시키고 양명학파를 확립하였다.

그는 당시 주자학의 권위주의적 학풍에 대해 학문적 진실성이라는 관점에서 비판하면서, "오늘날에 주자의 학문을 말하는 자는 주자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곧 주자를 핑계대는 것이요, 주자를 핑계대는 데에서 나아가 곧 주자를 억지로 끌어다 붙여서 그 뜻을 성취시키며, 주자를 끼고 위엄을 지어서 사사로운 계책을 이루려는 것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는 송시열 (宋時烈)과의 서한을 통해 경전의 뜻과 처신의 의리 문제에 관한 논의를 펼치고, 스승 박세채를 비롯해 윤증 ( 尹拯 ) · 최석정 ( 崔錫鼎 ) · 민이승(閔以升) · 박심(朴 麵 ) 등 스승과 벗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양명학의 문제를 토론하고 있다. 치양지설(致良知說)이나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에서 양명학의 견해를 받아들여 ≪ 학변 學辨 ≫ · ≪ 존언 存言 ≫ 등의 저술을 남겼다.

박세채는 〈 왕양명학변 王陽明學辨 〉 을 지어 양명학을 비판, 그에게 양명학을 버리도록 종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제두는 "왕씨(王守仁)의 학설에 애착을 갖는 것이 만약 남보다 특이한 것을 구하려는 사사로운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면 결연히 끊어 버리기도 어려운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학문하는 것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성인의 뜻을 찾아서 실지로 얻음이 있고자 할 뿐입니다"라고 결연한 자세를 보여 주었다.

특히, 민이승과는 여러 차례 만나서 토론을 벌이거나 서한을 통해 조목별로 심즉이(心卽理) · 치양지 · 지행합일 · 친민 ( 親民 ) 등 양명학의 문제들에 관한 논란을 전개함으로써 양명학과 주자학, 두 견해에 관한 본격적인 토론을 전개하였다. 민이승에게 왕수인의 글을 초록해 제시하기도 하고, 〈 양지체용도 良知體用圖 〉 와 〈 여명체용도 麗明體用圖 〉 를 그려서 양명학의 심성론 내지 양지론의 도상적 표현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는 왕수인의 심즉이설을 받아들여 주자의 마음 〔 心 〕 과 이(理)를 구별하는 견해를 비판한다. 마음과 이의 일치뿐만 아니라 이와 기(氣)의 이원화도 거부하고 이기합일론의 입장을 취하였다. 이처럼 이가 마음과 일치되어 마음 밖에 이가 따로 존재할 수 없게 되기에 이가 공허하지 않고 실실하게 있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양지의 개념에 대해서도 지각이나 지식의 뜻과 구별해 성체(性體)의 지(知)요, 본연의 선(善)이며, 곧 오상(五常 : 仁 · 義 · 禮 · 智 · 信)의 지(知)임을 가리키는 것이라 하고 성의 본체라 한다. 〈 양지체용도 〉 에서도 중심의 원 속에는 마음의 성과 인 · 의 · 예 · 지와 마음의 본원과 양지의 본체를 동일시하고 있으며, 바깥의 가장 큰 원은 천지만물인 동시에 마음을 가리키고 있다고 하였다.

심(心) · 성(性) · 정(情)의 관계도 성은 양지의 본체이고, 정은 양지의 작용이며, 마음은 바로 양지의 전체라 이해한다. 지행합일설에 대해서도 그는 지와 행을 둘로 나누어 놓는 것은 물욕에 가리운 것이라 하고, 양지의 본체에서 보면 지와 행이 하나라고 지적한다. 그는 이황과 이이의 성리설도 비판하면서 양명학의 확립에 전념하였다.

저술로는 ≪ 학변 ≫ · ≪ 존언 ≫ 이외에도 ≪ 중용설 ≫ · ≪ 대학설 ≫ · ≪ 논어설 ≫ · ≪ 맹자설 ≫ · ≪ 삼경차록 三京箚錄 ≫ · ≪ 경학집록 ≫ · ≪ 하락역상 河洛易象 ≫ 등 경전 주석이 있으며, ≪ 심경집의 心經集義 ≫ 와 ≪ 정성서해 定性書解 ≫ · ≪ 통서해 通書解 ≫ 등 송대 도학자의 저술에 대한 주석도 하였다.

아들 후일 (厚一)을 비롯해 윤순 ( 尹淳 ) · 이광사 ( 李匡師 ) 형제, 김택수(金澤秀) 등이 그의 문인으로서 학풍을 이었으며, 그가 속하는 소론의 가학으로서 학파를 형성해 강화도를 중심으로 표면에 나타나지 못한 채 계승해 나갔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정사도(鄭思道)

고려 대 감무(監務)를 역임한 정극유(鄭克儒)를 시조로 받드는 감무공파의 인맥(人脈)으로는 극유의 6세손 사도(思道 : 자한의 아들)가 1336년(충숙왕 복위 5)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직제학 (直堤學)을 역임했고, 우왕(禑王) 때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낸 후 오천군(烏川君)에 봉해졌다.

 

정진(鄭鎭)

사도의 손자(孫子) 진(鎭)이 조선 때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한 후 오천부원군(烏川府院君)에 추봉되어 세종(世宗) 때의 명신(名臣) 연(淵)과 함께 명문의 기틀을 다졌다.

 

정효전(鄭孝全)

∼1453(단종 1).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연일 ( 延日 ). 아버지는 판서 진(鎭)이다. 태종의 딸 숙정옹주(淑貞翁主)의 부마로, 1422년(세종 4) 일성군(日城君)에 봉하여졌다.

1433년 사은사 ( 謝恩使 )로, 1450년(문종 즉위년) 진하사 ( 進賀使 )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병조판서를 거쳐 삼군도진무사(三軍都鎭撫使)에 올랐다. 1453년 (단종 1) 계유정난 때 김종서 ( 金宗瑞 ) 등 중신이 살해되자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다가 파직되었다.

의분을 참지 못하여 주먹으로 가슴을 치다가 피를 토하면서 죽었다. 이듬해 그의 죄를 추론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하기에 이르렀다. 성종 때 신원되었으며, 뒤에 단종묘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정완(鄭浣).

1473(성종 4)∼1521(중종 1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연일 ( 延日 ). 자는 신지(新之), 호는 겸재(謙齋). 병조판서 연(淵)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자재(自濟)이고, 아버지는 남부참봉(南部參奉) 진(溱)이며, 어머니는 배천군수 윤우(尹遇)의 딸이다.

남효온 ( 南孝溫 )과 함께 산사에서 학문을 닦다가 1504년(연산군 10) 참봉으로 갑자사화를 입어 영천으로 유배되고, 1506년 중종반정으로 석방되었다. 1507년(중종 2)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514년 선릉참봉(宣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18년 학행으로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에 등용되고, 이어서 공조·호조의 정랑을 지냈다. 1519년 현량과 ( 賢良科 )에 병과로 급제, 예조·이조의 정랑을 지내다가 이 해 기묘사화로 현풍에 부처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신의가 높고 언론이 정대하였으며, 마음과 처사가 탄이(坦易), 관유(寬裕)하고, 이해와 시비를 가리는 데 촛불처럼 환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시귀(蓍龜)로 일컬었다.

 

정숙(鄭潚)

완의 아들 숙(潚)이 절효(節孝)로 명망을 떨쳤는데, 특히 친구 성수종(成守琮)이 죽자 과부가 된 그의 처를 평생 동안 먹여 살려 우애의 본보기로 선비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정순(鄭洵)

1456(세조 2) ∼ 1527(중종 22). 조선 전 ·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영일 ( 迎日 ). 자는 노천(老泉). 홍(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병조판서 연(淵)이고, 아버지는 김제군수 자숙(自淑)이며, 어머니는 중추원부사 이대(李臺)의 딸이다.

부인은 판관 심원(沈湲)의 딸(초취)과 의정부사인 남윤종(南潤宗)의 딸(계실)이다. 1477년(성종 8) 진사시에 합격하고, 1482년 음직으로 중부참봉(中部參奉)에 보임되고, 그뒤 사헌부감찰, 장례원의 사평 ( 司評 ) · 사의 ( 司議 ), 사헌부지평, 제용감첨정을 거쳐 1507년(중종 2) 고부군수로 나갔다.

군수 재임 중인 1510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1512년 상의원정(尙衣院正) 재직 중에 이조판서 송질(宋 悲 )의 천거로 승지에 주의(注擬)되었다. 그러나 고부군수로 있을 때 송질의 청을 들어주어 관둔전의 사취를 방조하고, 관곡으로 파종시켜 준 것과 관련되어 천거하였음이 드러나면서 파직되었다.

1515년 3월에 은계찰방으로 복직되었으나 대간의 반대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그 뒤 서용되어 사재감정(司宰監正) · 사도시정(司 歸 寺正) · 통례원우통례 · 원주목사와 승문원의 참교 ( 參校 ), 판교 겸 춘추관수찬관(判校兼春秋館修撰官) 등을 역임하였다.

1523년 통정대부 ( 通政大夫 )에 오르면서 광주목사(光州牧使)로 나갔고, 이듬해 장례원판결사로 입조, 곧 첨지중추부사에 개수(改授)되었다. 성품이 근검하고 관후하였으며, 교유를 삼가고 학문에 증진하여 자못 성취가 있었다.

 

정자(鄭滋)

돈령부 판관(敦寧府判官)을 역임했던 유침(維 )의 아들 4형제 중 장남 자(滋)는 명종(明宗) 때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있었으나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 대윤(大尹)인 윤 임(尹 任)의 처남이라 하여 화를 입었다.

 

정소(鄭沼)

침유의 둘째 소(沼)는 형인 자가 죄 없이 화를 당하자 이를 애통하게 여기고 순천(順天)에 은거하여 학문과 덕행으로 이름났었다.

 

정황(鄭滉)

유침의 셋째 아들 황(滉)은 명종(明宗)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군기사첨정(軍器寺僉正)을 거쳐 김제(金堤). 안악 군수(安岳郡守)를 지내고 내섬사 부정(內贍寺副正)에 올라 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정철(鄭澈)

1536년(중종 31) ∼ 1593년(선조 26). 조선 중기의 문인 · 정치가. 본관은 연일 ( 延日 ).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 서울 장의동(藏義洞 : 지금의 종로구 청운동) 출생. 아버지는 돈녕부판관 유침(惟沈)이다.

어려서 인종의 숙의 ( 淑儀 )인 누이와 계림군 유(桂林君瑠)의 부인이 된 막내누이로 인연하여 궁중에 출입, 같은 나이의 경원대군(慶源大君 : 명종)과 친숙해졌다.

10세 되던 해인 1545년(인종 1 · 명종 즉위)의 을사사화에 계림군이 관련되자 그 일족으로서 화를 입어 아버지는 함경도 정평(定平)으로, 맏형 자(滋)는 광양(光壤)으로 유배당하였다. 곧이어 아버지만 유배가 풀렸다.

12세 되던 1547년(명종 2) 양재역 벽서사건이 터지면서 다시 을사사화의 여파로 아버지는 경상도 영일 ( 迎日 )로 유배되었고, 맏형은 이 때 장류(杖流) 도중에 32살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이 시기 정철은 아버지를 따라 유배지 생활을 하였다.

1551년 원자(元子) 탄생의 은사(恩赦)로 아버지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자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전라도 담양 창평 당지산(唐旨山) 아래로 이주하게 되고, 이곳에서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10년간을 보내게 되었다.

여기에서 임억령(林億齡)에게 시를 배우고 양응정(梁應鼎) · 김인후(金麟厚) · 송순(宋純) · 기대승 ( 奇大升 )에게 학문을 배웠다. 또, 이이 ( 李珥 ) · 성혼 ( 成渾 ) · 송익필 ( 宋翼弼 ) 같은 큰 선비들과도 사귀었다.

17세에 문화유씨(文化柳氏) 강항(强項)의 딸과 혼인하여 4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25세 때 〈 성산별곡 〉 을 지었다고 하는데, 이 노래는 성산(별뫼) 기슭에 김성원이 구축한 서하당(棲霞堂)과 식영정 ( 息影亭 )을 배경으로 한 사시(四時)의 경물과 서하당 주인의 삶을 그리고 있다.

1561년(명종 16) 26세에 진사시 1등을 하고, 이듬해 문과 별시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성균관 전적 겸 지제교를 거쳐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다. 이어 좌랑 · 현감 · 도사를 지내다가 31세에 정랑 · 직강 · 헌납을 거쳐 지평이 되었다.

함경도암행어사를 지낸 뒤, 32세 때 이이(李珥)와 함께 호당 ( 湖堂 )에 선출되었다. 이어 수찬 · 좌랑 · 종사관 · 교리 · 전라도암행어사를 지내다가 35세 때 부친상을, 38세 때 모친상을 당하여 경기도 고양군 신원(新院)에서 각각 2년여에 걸쳐 시묘살이를 하였다.

40세인 1575년(선조 8) 시묘살이 복을 벗고 벼슬길에 나아가 직제학 성균관 사성, 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이 무렵 본격화된 동서분당에 따른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벼슬을 버리고 담양 창평으로 돌아갔다. 창평 우거시에 선조로부터 몇 차례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43세 때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으로 승진하여 조정에 나아갔다. 그 해 11월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되나 진도군수 이수(李銖)의 뇌물사건으로 반대파인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1580년 45세 때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이 때 〈 관동별곡 〉 과 〈 훈민가 訓民歌 〉 16수를 지어 시조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의 재질을 발휘하였다.

그 뒤 전라도관찰사 · 도승지 · 예조참판 · 함경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48세 때 예조판서로 승진하고 이듬 해 대사헌이 되었으나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음해(1585)에 사직, 고향인 창평으로 돌아가 4년간 은거생활을 하였다. 이 때 〈 사미인곡 〉 · 〈 속미인곡 〉 등의 가사와 시조 · 한시 등 많은 작품을 지었다.

54세 때 정여립 ( 鄭汝立 )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서인의 영수로서 최영경 ( 崔永慶 ) 등을 다스리고 철저히 동인들을 추방하였다. 다음해 좌의정에 올랐고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에 봉해졌다.

56세 때 왕세자 책립문제인 건저문제 ( 建儲問題 )가 일어나 동인파의 거두인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와 함께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기로 했다가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혼자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였다.

이에 신성군 ( 信城君 )을 책봉하려던 왕의 노여움을 사서 “ 대신으로서 주색에 빠졌으니 나랏일을 그르칠 수밖에 없다. ” 는 논척을 받고 파직되었다. 명천(明川)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진주(晋州)로 옮기라는 명이 내린 지 사흘 만에 또다시 강계(江界)로 이배되어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1592년(선조 25) 57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귀양에서 풀려나 평양에서 왕을 맞이하고 의주까지 호종, 왜군이 아직 평양 이남을 점령하고 있을 때 경기도 · 충청도 · 전라도의 체찰사를 지내고 다음해 사은사 ( 謝恩使 )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동인의 모함으로 사직하고 강화의 송정촌(松亭村)에 우거(寓居)하다가 58세로 별세하였다.

작품으로는 〈 성산별곡 〉 · 〈 관동별곡 〉 · 〈 사미인곡 〉 · 〈 속미인곡 〉 등 4편의 가사와 시조 107수가 전한다. 시조는 ≪ 송강별집추록유사 松江別集追錄遺詞 ≫ 권2에 〈 주문답 酒問答 〉 3수, 〈 훈민가 〉 16수, 〈 단가잡편 短歌雜篇 〉 32수, 〈 성은가 聖恩歌 〉 2수, 〈 속전지연가 俗傳紙鳶歌 〉 1수, 〈 서하당벽오가 棲霞堂碧梧歌 〉 1수, 〈 장진주사 將進酒辭 〉 등이 실려 있다.

상당히 중복되기는 하나 성주본(星州本)과 이선본(李選本) ≪ 송강가사 松江歌辭 ≫ 에도 많은 창작시조가 실려 있다. 그의 작품세계는 대체적으로 애군(愛君) · 애민(愛民) 사상을 저변에 깔고 있다.

이 외에도 훈훈한 인정을 느끼게 하는 인간미 넘치는 작품, 강호 산수의 자연미를 노래한 작품이 있다. 그리고 선취(仙趣)적 기풍과 풍류적 호방함을 담아낸 작품 등 폭넓은 사대부의 정신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 송강집 ≫ 과 시가 작품집인 ≪ 송강가사 ≫ 가 있다. 전자는 1894년(고종 31)에 간행한 것이 전한다. 후자는 목판본으로 황주본(黃州本) · 의성본(義城本) · 관북본(關北本) · 성주본(星州本) · 관서본(關西本)의 다섯 종류가 알려져 있다. 그 중 관북본은 전하지 않고 나머지도 책의 일부만 전한다.

필사본으로는 ≪ 송강별집추록유사 ≫ 와 ≪ 문청공유사 文淸公遺詞 ≫ 가 있다. 한시를 주로 실은 ≪ 서하당유고 棲霞堂遺稿 ≫ 2권 1책도 판각본으로 전한다. 창평의 송강서원, 영일의 오천서원 ( 烏川書院 ) 별사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정종명(鄭宗溟)

송강의 아들 4형제 중 장남 종명(宗溟)은 인조(仁祖) 때 강릉 부사(江陵府使)를 지냈다.

 

정홍명(鄭弘溟)

1592(선조 25)∼1650(효종 1).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연일 ( 延日 ). 자는 자용(子容), 호는 기암(畸庵) 또는 삼치(三癡). 아버지는 우의정 철(澈)이며, 어머니는 문화 유씨(文化柳氏)로 강항(强項)의 딸이다. 송익필 ( 宋翼弼 )· 김장생 ( 金長生 )의 문인이다. 어려서 송익필에게 글을 배우고 약관에 김장생의 문하에 들어가 ≪주역≫·≪근사록≫ 등을 배웠다. 김장생의 아들 집(集)은 그를 중히 여겨 국사(國士)로 대우하였다.

1616년(광해군 8) 문과에 급제, 승문원에 보임되었으나 반대당들의 질시로 고향으로 돌아가 독서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1623년(인조 1) 예문관검열을 거쳐, 홍문관의 정자·수찬이 되었다. 이 때 이괄 ( 李适 )의 난이 일어나자, 임금을 모시고 공주까지 몽진 갔다 돌아와 사간원의 정언·헌납과 교리, 이조정랑을 거쳐 의정부의 사인으로 휴가를 받아 호당 ( 湖堂 )에 머물면서 독서로 소일하였다.

1627년에 사헌부집의·병조참지·부제학·대사성을 역임하고, 자청해서 김제군수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인렬왕후(仁烈王后) 상을 마친 뒤 예조참의·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소모사(召募使)로 활약하였다. 적이 물러간 뒤 고향으로 돌아가 벼슬을 사양하다가 다시 함양군수를 지내고, 1646년 대제학이 되었으나 곧 병이 들어 귀향하였다.

1649년 인조가 죽자 억지로 불려 나왔다가 돌아갈 때 다시 대사헌·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뛰어나게 총명하여 제자백가서에 두루 정통했으며, 고문 ( 古文 )에도 밝았다. 하지만, 김장생의 영향으로 경전(經傳)을 으뜸으로 삼았고, 예학에도 밝아 김장생의 학통을 이었다. 저서로는 ≪기옹집≫·≪기옹만필 畸翁漫筆≫이 있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정양(鄭瀁)

1600(선조 33)∼1668(현종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일 ( 延日 ). 자는 안숙(晏叔), 호는 부익자(孚翼子)·포옹(抱翁). 할아버지는 철(澈)이고, 아버지는 강릉부사 종명(宗溟)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참의 인걸(仁傑)의 딸이다.

1618년(광해군 10)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로 피신하였으나 성이 함락되자 자살하려다가 미수에 그쳤다. 난 후 수년간 은거생활을 하다가 동몽교관에 제수된 뒤 의금부도사·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수운판관을 역임하였다.

1650년(효종 1) 용안현감으로 나가 치적(治蹟)을 올렸으며, 이 후 비안현감·종부시주부·진천현감·금구현령·한성부서윤 등을 역임하였다. 1661년 지평으로 발탁되었으나 교리 민유중 ( 閔維重 )으로부터 인망(人望)에 부응(浮應)하는 인물이라는 탄핵을 받은 바 있었다.

이 후 간성군수·시강원진선을 거쳐 1668년 장령에 이르렀으며, 이 해에 죽었다. ≪어록해 語錄解≫를 중수, 간행하였다. 초시(初諡)는 정절 ( 貞節 )이었으나 뒤에 문절(文節)로 개시되었다.

 

정호(鄭澔)

1648(인조 26) ∼ 1736(영조1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일 ( 延日 ). 자는 중순(仲淳), 호는 장암(丈巖). 철(澈)의 현손이며, 종명(宗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직( 穆 )이고, 아버지는 감찰 경연(慶演)이다. 어머니는 민광환(閔光煥)의 딸이다.

송시열 ( 宋時烈 )의 문하로 매우 촉망받았으며, 1675년(숙종 1) 송시열이 귀양가게 되자 과거를 단념하고 성리학 ( 性理學 )에 힘썼다. 그 뒤 여러 형제의 권유로 1682년 생원이 되고, 1684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을 거쳐 정언이 되자, 오도일 ( 吳道一 )이 붕당을 키우고 권세를 부린다고 탄핵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인현왕후 ( 仁顯王后 )가 폐출되고 송시열이 사사(賜死)당하자, 그는 파직되고 문외출송(門外黜送)당했다가 경성에 유배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로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풀려나 지평 · 수찬 · 교리 등을 역임하고, 1696년 이사상 ( 李師尙 )을 논핵하는 등 과격한 발언으로 파직되었다.

1698년 다시 수찬 · 집의 · 사간을 거쳐 이듬해 동래부사로 나갔다가, 1700년에 신은(新銀) 12만여 냥을 왜에 상매(商買)한 관계로 파직되었다. 이듬해 광주부윤(廣州府尹)으로 기용되었고, 1702년 승지 · 부제학을 거쳐 1704년 함경도관찰사에 이어 1710년 대사간 · 대사헌을 지냈는데, 당론을 일삼는다 하여 흥해 · 갑산 등지에 유배되었다.

1713년 대사성에 재임용되어 송시열의 묘정배향을 건의하였다. 1715년에는 부제학으로서 유계 ( 兪棨 )의 유저(遺著)인 ≪ 가례원류 ≫ 의 발문을 썼다. 그 내용에 소론인 윤증 ( 尹拯 )이 송시열을 배반했다는 내용이 문제되어 파직되었다. 이듬해 노론이 승리함으로써 대사헌이 되었는데, 이 때 윤선거 ( 尹宣擧 )의 문집 ≪ 노서유고 魯西遺稿 ≫ 가 간행되자, 효종에게 불손한 내용으로 썼다 하여 훼판(毁板)하고 윤선거 부자의 관작도 추탈하게 하였다.

1717년 세자(世子 : 뒤위 경종)의 대리청정에서 소론의 반대를 물리치고 이를 시행하도록 했고, 예조판서를 거쳐 다음 해 이조판서에 올랐다. 1721년(경종 1) 실록청총재관(實錄廳摠裁官)으로 ≪ 숙종실록 ≫ 의 편찬에 참여하다가 신임사화로 노론 4대신과 함께 파직되어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1725년(영조 1) 노론의 재집권으로 풀려나와 우의정에 승진되어 신임사화로 죽은 노론 4대신의 신원(伸寃 :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을 누차 상소했으며,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1729년 기로소 ( 耆老所 )에 들어갔으며, 영중추부사로 죽었다.

일생을 노론의 선봉으로 활약했으며 늘 가난하게 지냈다 한다. 시문과 글씨에 모두 솜씨가 있었다. 충주의 누암서원 ( 樓巖書院 )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 장암집 ≫ 26권이 전해지고, 편서로 ≪ 문의통고 文義通攷 ≫ 가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정하연(鄭夏彦)

[속대전(續大典)] 편찬에 참여했던 하연(夏彦) : 목사 무의 아들)은 좌부승지(左副承旨)와 병조 참의(兵曹參議)를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으며,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 어제(御製)의 편제(篇題)와 홍화문(弘化門)의 편액을 썼다.

 

정후겸(鄭厚謙)

1749(영조 25) ∼ 1776(정조 즉위년).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일 ( 延日 ). 자는 백익(伯益). 아버지는 석달(錫達)이며, 일성위(日城尉) 치달(致達)에게 입양되었다. 본래 인천에서 어업에 종사하던 서인 출신(庶人出身)이었으나 영조의 서녀(庶女) 화완옹주(和緩翁主:치달의 처)의 양자가 되면서부터 궁중에 자유롭게 출입하게 되었다.

영조의 총애를 받아 16세로 장원봉사(掌苑奉事)가 되고, 1767년(영조 43) 수찬에 올랐다. 이어 부교리 · 지평을 역임하고 1768년 승지가 되었으며, 이듬해 개성부유수를 거쳐 호조참의 · 호조참판 · 공조참판을 지냈다.

성격이 매우 교활하고 간사하였으며, 영조의 총애를 바탕으로 당시 세도가였던 홍인한 ( 洪麟漢 )과 더불어 국정을 좌우하였다. 1775년 세손(世孫:정조)이 대리청정(代理聽政)하게 되자 화완옹주 · 홍인한 등과 이를 극력 반대하였으며, 동궁에 사인을 비밀리에 보내어 세자의 언동을 살피게 하였다.

또한 한편으로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세손의 비행을 조작하고 심상운 ( 沈翔雲 )을 시켜 세손을 보호하는 홍국영 ( 洪國榮 )을 탄핵하는 등 세손을 모해하는 데 광분하였다.

이듬해 정조가 즉위하자 군신들이 그를 주살할 것을 요청, 드디어 경원에 유배되어 천극( 筍 棘:조선시대 유배된 중죄인을 가둔 가옥 둘레에 가시울타리를 쳐서 외출하지 못하게 하였음. )되었다가 곧 이어 사사되었다. 양모인 화완옹주 역시 사사되었다.

 

정기원(鄭岐源)

1809(순조 9) ∼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연일 ( 延日 ). 자는 봉수(鳳 馬 ). 아버지는 태락(台樂)이다. 1849년(철종 즉위년)부터 전라좌도수군절도사 · 충청도병마절도사 · 평안도병마절도사 · 삼도수군통어사 등 주요무직을 편력한 뒤 1870년(고종 7) 어영대장과 훈련대장이 되었다.

이듬해 강화도에 진무사 ( 鎭撫使 )로 부임하였는데 이 때 강화 손돌목에 침입, 불법행위를 자행한 미군함대의 처사에 강력히 항의하는 한편 통상제의를 거절하였다.

이에 무력을 앞세운 미군이 광성진(廣城津)에 쳐들어오자, 중군 어재연 ( 魚在淵 )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독려, 수비하게 하였다. 이 신미양요 이후 총융사(摠戎使)를 거쳐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장숙(莊肅)이다.

 

정유

순조(純祖) 때 동지춘추관사 (同知春秋館事)를 역임했다.

 

정경원(鄭敬遠)

1841(헌종 7)∼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연일 ( 延日 ). 자는 염조(念祖). 충청북도 충주 출신. 해안(海晏)의 아들이다. 1890년(고종 2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같은 해 12월 홍문관 부교리, 다음 해 11월에는 겸사서 ( 兼司書 )가 되었다.

1893년에는 시강원문학·이조참의·참의내무부사가 되고, 미국박람회 출품사무대원(出品事務大員)이 되었다. 1894년 이조참판이 되고, 같은해 동학농민봉기가 발발하자 호서선무사(湖西宣撫使)로 차하(差下)되었다가 이어 삼남선무사가 되었다.

갑오개혁으로 군국기무처 ( 軍國機務處 )가 설치되자 그 회의원(會議員)에 선출되고, 이어 김홍집 ( 金弘集 )내각의 법무협판(法務協辦)이 되었다. 이듬해에는 평양부관찰사가 되었다

 

 

鄭夢周(정몽주) 선생의 일화.

1

이성계를 문병하고

이성계가 사냥을 하다가 낙마를 해서 병석에 누었다.
이성계가 낙마하여 병환 중에 있다 하니, 문병을 아니 갈 수 없었다. 동태도 살필 겸 정몽주는 그의 사저로 가기로 하였다. 상황이 이성계의 아들 방원은 조영규를 데리고 아비 옆을 떠나지 않고 지켰다.

조영구가 이성계더러 들으라고 한 마디 하였다.  
 「정몽주 대감의 병문안은 곁으로의 명분일 뿐 그 속셈은 다른 데에 있을 것입니다. 조심하여야 하옵니다.」
 「당치않은 소리, 정대감과 나는 오랜 친구 사이인데 그럴 가 있나?」
그러자 방원이 답답하다는 듯, 침상에 손을 짚으면서 말했다 「아닙니다. 아버님!「마침내 정몽주가 문병을 마치고 방원과 대좌하게 되었다. 먼저 방원이 말문을 열었다.
 「포은선생, 술이나 한잔 드시며 여러 가지 종은 말씀이나 해주시오.」 「내가 무슨 대학자라고 좋은 말이 있겠소?」
 「대감께서는 당대의 대학자이신데 성리학에 대해 좋은 말씀을 좀 해주시오.」
 「성리학이라면 심신의 수양이 으뜸이지요.」


   학문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일 뿐, 화제는 바뀌어 고려조의 정치이야기가 나왔다. 이방원은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정몽주의 속마음을 떠보기 위하여 시조 한 수를 유려하게 뽑아 내려갔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료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고저」
  
저 후세에 널리 알려진 '하여가' 였다. 다 썩어져 가는 고려 왕실 만 붙들기 위해 고집을 부리지 말고, 칡덩굴처럼 얽혀서 사이좋게 사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는 내용이다. 정몽주는 노래를 다 듣고 나서 좋은 시라고 칭찬한 다음,  「 젊은 사람의 노래만 듣고 그대로 있을 수야 없지, 화답하는 것이 내 인사이니 내 노래도 들어보게「 하였다

 「 이몸이 죽고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줄이 있으랴.」

  만고의 충절 포은은 '단심가'를 통하여 고려조에 대한 충성을 거듭 피력한 것이다. 방원에게는 시조가 아니라 자기를 나무라는 호령처럼 들렸다. 이로써 두 사람은 서로의 뜻을 알고 헤어졌다.

 

2

선주교의 참변

정몽주는 기우러가는 고려조의 가냘픈 운명을 슬퍼하며 전부터 자주 드나들던 술집에 들었다. 초여름의 싱그러운 신록이 송도를 곱게 물들이는 가운데, 숲 사이에서는 이름 모를 새들이 노래하고 있었다.
 「 대감마님, 오랜만에 오십니다. 오늘은 마침 좋은 생선을 지져 놓았으니 많이 잡수시고 가시지요.」
 「고맙네, 한잔 먹고 가야겠네.」
  그리고는 주막 마루에 걸터앉았다. 눈앞에는 얕은 울타리에 꽃이 만발하여 나비가 날아들고 있었다. 낯선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수군거리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 주모, 술을 가져오게.」  한참 후에야 술상이 나왔다. 뿌연 막걸리에 생선 지짐이가 구미를 돋웠다. 대작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연거푸 석 잔을 마신 후, 지는 해를 바라보며 혼자 울고 있었다. 도시 일어서려는 기색이 없자 보기에 딱했든지 녹사가 곁으로 다가섰다.
 「 대감, 해가 선산에 지고 있습니다. 그만 진정하십시오.」  어느덧 만수산의 서늘한 산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그는 할 수 없이 말에 올라야만 했다.
무심한 말은 정몽주를 싣고 선죽교 돌다리를 향해  걸어갔다. 말이 선죽교에 다다르자
 「 멈추어라!」 하는 외침이 들려왔다. 저녁노을이 지기 시작한 선죽교의 돌다리 위에는 판위위시사 조영규가 가로막아 서 있었다.
 「 누구요, 누가 우리 대감마님 행차를 가로막는 거요? 정몽주 대감의 행차임을 모르시오?」겁에 질린 녹사가  조영규의 앞을 가로막으며 외쳤다
 「조영규가 여기서 기다린 지 오래였느니라. 비키지 못하겠느냐? 철편의 맛을 보아야 하겠느냐?」
   녹사가 울면서 조영규의 몸을 안으려고 뛰어 덤벼들자 몸이 닿기 전에 조영규의 철편이 녹사를 힘껏 갈겼다. 녹사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 버린다.
 「 자, 대감. 이미 천명이 다하였으니 말에서 내려 철편을 받으시오.」
  정몽주가 태연한 자세로 말에서 내리는 것을 본 녹사가
 「 시중대감, 어서 도망가십시오! 역적 조영규는 소인이 막겠습니다.「  피를 쏟으면서 땅에 쓰러졌던 녹사가 조영규의 두 다리를 잡고 덤볐으나 조영규의 철편은 여지없이 녹사를 정통으로 맞추었고 녹사는 그만 시체처럼 나뒹굴고 말았다.
이때 말에서 내린 정몽주가 태연히 조영규에게 다가서면 말을 던진다. 추호도 당황하는 빛이 없는 정몽주의 얼굴에서는 오히려 미소마저 감돌고 있는 듯 했다.
 「 이 시중대감이 시킨 것이 아니라, 이 나라 삼천리의 명령이오.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이를 악문 조영규가 철편을 바짝 낚아 공격의 자세를 취하자
 「 이놈, 천하에 죽일 놈!」
이성계의 분부가 아니라는 말을 들은 정몽주가 천둥 같은 호령을 한다.
 「쥐만도 못한 네놈이 감히 천명을 사칭하다니......고려 조정의 녹을 먹는 臣子(신자)의할 짓이 고작 이거더냐?」  그러나 조영규의 손에 들린 철편은 이미 원을 그리고 있었다.
 「 컥....」  우뚝 선 자세로 조영규를 노려보던 정몽주의 입, 코, 눈에서는 피가 쏟아져 나왔다.

철편이 정몽주의 머리를 친 것이다.
 「 에익!」
  다시 한 번 뼈 부서지는 무서운 소리가 어둠의 장막이 드리워진 주위에 울려 퍼졌다.
 「 이놈, 역적 놈들...」
  겨우 한마디 꾸짖는 소리가 쓰러지는 정몽주의 입 밖에서 새어나왔을 때, 조영규의 철편은 세 번째의 원을 그렸다. 만고의 충신 정몽주가 선죽교 돌다리 위에서 털썩 쓰러졌다.
다리 밑에 숨어 이 광경을 지켜보던 방원이 우르르 달려 나와 넋을 잃고 서있는 조영규와 나란히 서서 장엄한 충신의 최후를 지켜보고 있었다.
날짜는 공양왕 4년 4월 4일 이었다.

 

 

 

3

鄭夢周(정몽주) 선생의 일화

 

무너져가는 고려의 마지막 대들보인 정몽주는 이성계의 문병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의 자객에게 선죽교에서 철퇴를 맞고 죽었었다.

 

정몽주가 이성계의 집을 떠날 때 한 무사가 말을 타고 그 일행의 옆을 급히 지나가는 것을 목격하였다. 당시 이성계의 집은 개성의 동대문 부근이었고. 정몽주의 집은 자남산 동남쪽이었다. 정몽주는 자신들의 옆을 스쳐간 무사가 분명 자기를 해칠 것을 알고 따라온 녹사(비서겸 호위)金慶祚(김경조)까지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 녹사에게 "다른 곳에 들를 데가 있으니 먼저 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혼자가 된 정몽주는 어느 술집에 들어가 술을 마시며,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었다. 그리하여 술집에서 나온 정몽주가 말을 타고 선죽교를 지날 때 다리 아래 숨어있던 자객이 달려 나와 철퇴로 먼저 말머리를 쳤다. 말이 쓰러지면서 정몽주도 굴러 떨어지자 철퇴로 머리를 처서 죽였다. 말하자면 정몽주는 스스로 죽음을 예견하고 슬에 취하여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 죽음을 혼자서 받아들이고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 먼저 돌려보냈던 녹사 김경조가 달려드니 자객은 그 사랑까지 죽이고 말았다. 충직한 김경조는 정몽주의 말을듣지 않고 밖에 숨어서 기다리며 그의 뒤를 따르다가 그도 변을 당하였던 것이다.

 

전죽교의 원래 이름은 선지교였다. 절몽주가 그 곳에서 죽은 다음 다리 옆에 대나무가 솟아났는데, 사람들은 그 대를 굳고 충성스런 정몽주의 넋이 소생한 것이라 하였으며, 이때부터 선지교를 善竹橋(선죽교) 라고 그쳐 불렀다.

 

그 후 이 선죽교는 정몽주의 흘린 피가 비바람에도 씻기지' 않아서 지금도 아련하게 붉은 흔적이 나타난다고 한다.

 

 

 

 

 

鄭澈(정철) 선생의 일화.

개조암을 지킨 정철

계조암은 누가 창건했는지 사실이 분분하여 잘 알 수가 없으나, 계조암의 특징은 아직까지 계조암에는 사람이 죽어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 절 안에서 사람이 앓아서 죽을 무렵이 되면 자연히 그 사람이 저절로 나가게 되는데 그게 특징이고, 계조암에는 남자바위, 여자바위가 있다.

여자바위는 문으로 들어가는 남쪽에 마치 여자의 옥문처럼 쫙 벌리고 있는데 그 바위를 수문바위 라고도 한다.
그런데 남자바위는, 옛날엔 흔들바위가 둘이라고 하였는데, 둘인 흔들바위 사이에 전나무가 하나가 있고 그 밑에 뾰쪽하게 나온 작은 바위가 남자바위 라고 하였답니다.

어느 때 송강(松江) 정철(鄭澈)이가 그걸 보고 그 바위를 그냥두면 계조암에 해가 온다고 흙으로 덮어버렸다고 한다.

 

 

鄭襲明(정습명)공의 일화

 

열일군 대송면 남성리에는 영일정씨(迎日鄭氏)시조인 정습명을 제향(祭享)하는 남성재(南城齋)와 신도비가 읍성터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연일현청이 있던 곳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새로 부임하는 현감마다 원인도 모르게 죽는 것이었다. 아무도 현감으로 부임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이 소문을 들은 담력이 좋은 한 선비가 자청하여 현감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부임 첫날, 두려움 중에 밤을 새우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비몽사몽간에 한 노인이 나타나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내가 누운 자리에 무엄하게 현청을 지었으니 빨리 옮겨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현감이 엉겁결에 대답하였다.

"정확한 묘자리가 어디입니까? 알려주시면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내일 새벽 일찍 까치 한 마리 날아와서 맨 처음 앉는 자리가 그 자리니라."

놀라서 깨어보니 꿈이었다. 이제 살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잠이 쏟아졌다.

 

까치소리에 놀라 깨어보니 까치는 벌써 날아온 후였다. 정확한 위치를 알 길이 없었다. 현감은 마을의 촌로들에게 수소문한 결과 현청 자리가 정습명의 묘역임을 알게 되었다. 현감은 서둘러 현청을 고읍리로 옮겼다고 한다.

 

 

 

鄭敦翼(정돈익)의 효행.

 

鄭敦翼(정돈익)은 고려 충신 포은 정몽주의 후손으로서 조선 시대 말기의

사람이다.

 

집이 가난하였으나 어렸을 적부터 남의 일을 잘 돕고 아버지 어머니에게 효성이 지극하였다.

 

여름철 날씨기 더울 때먼 부모님의 베개와 이부자리에 부채질을 하여 시 원하게 헤 드렸고, 추운 겨울이면 자기 몸으로 이부자리를 따뜻하게 해 드렸 다.

엄동설한 가기 몸에 온천한 옷을 두르지 못해도 부모에게는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께서 갑자기 앓아눕게 되었다.

鄭敦翼(정돈익)은 걱정이 되어 거의 침식을 잊을 지경이었다. 밤이 되면 뜰 가운데서 머리를 조아려 병이 낫기를 하늘에 빌곤 하였다.

 

아버지의 병세는 갈수록 더욱 심해 혼수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돈익은 생각다 못해 왼쪽 무명지를 깨물어 아버지의 입에 피를 흘러 넣었다.

 

한참 있으니, 신기한 효험이 나다나기 시작했다. 인사불성이던 아버지가 차차 의식을 회복하고 있는 게 아닌가! 분명히 하늘이 도우는 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것을 본 향리 사람들은 그른 가리켜 돈익은 청생 효자다.’라며 칭잔의

찬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희생한 아버지는 몇 달을 더 사시다가 끝내 운명 하고 말았다. 鄭敦翼(정돈익)은 몹시 슬피 울었다. 너무너무 울어 피를 토하기까지 했다.

 

돈익은 아버지 무덤 옆에 여막을 짓고 마치 부모가 살아 계실 때와 같이 3 년 동안을 모셨다. 무덤 옆에 살면서 손수 밥을 지어 아침저녁의 상을 올 렸고 추운 겨울에도 흩 상복만을 입고 묘 앞에 엎드려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간혹 이를 본 사람들이 위로의 말이라도 건너보면

나무가 조용히 서 있고 싶어도 바람이 멈추지를 않고,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고 싶어도 그 부모는 기다려 주시지 않는다. 흘러가기만 하고 돌아오지 않는 것은 세월이고, 돌아 가서매 따라 갈 수 없는 것은 부모이다.”

라고 했다.

그래도 돈익은 생전에 효도를 못 다한 것처럼 아쉬워하는 것이었다.

 

돈익은 3 년을 하루같이 무덤가에서 지냈지만 조급도 외롭다거나 무서움을 타지는 않았다. 날마다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 무덤 주위를 맴돌며 돈익의 친구가 되어 주는 것이었다.

 

인명을 헤치는 일이 전혀 없어 세인들은 아마도 산신령이 돈익의 효성을 알아보는 것이라고 말하며 신기해했다.

 

이 소식을 진해들은 고을원이 돈익의 효행을 임금님게 상주했다.

임금은 즉시 곡식과 비단을 상으로 내려 鄭敦翼(정돈익)의 효행을 표창하고 비각을 세워 그 얼을 기리도록 했다. 때는 1881년 고종 때였다.

 

참고 물헌 孝烈行誌, 경주시지.

 

 

 

 

鄭襲明(정습명) 선생이 남긴 시.

 

世愛牡丹紅 세애모단홍

裁培滿院中 재배만원중

誰知荒草野 수지황초야

亦有好花叢 역유호화총

色透村塘月 색투촌당월

香傳娘樹風 향전낭수풍

地偏公子少 지편공자소

嬌態屬田翁 교태촉전옹

 

세상에선 모두들 붉은 모란꽃만 사랑하여

정원에 가득히 심고 가꾸지만

누가 이 거친 초야에

좋은 꽃떨기 있는 줄 알기나 하랴

어여쁜 모습은 연못 속의 달을 꿰뚫었고

향기는 밭두렁 나무의 바람에 전하네

외진 땅에 있노라니 찾아주는 귀공자는 적지만

아리따운 자태를 늙은 농부에게나 보여주네

 

 

鄭平九(정평구)의 비천

 

횡성 사람인 鄭平九(정평구)가 임진왜란 때 오랜 연구 끝에 비차(飛車)를 만들어 성 안팎을 날아다니며 성을 침공하는 왜구를 무찔러 혼비백산하게 했다는 전설이 지금 까지 횐성군 일대에 전해 오고 있다.

 

 

 

鄭夢周(정몽주) 선생 일화.

 

고려 말 (삼은)사림으로 일컬어지는 圃隱(포은)는 자는 딜가, 호는 圃隱(포은)이다. 어머니 이씨가 그를 임신했을 때 난초꽃 화분을 안다가 놀라 떨어뜨리는 꿈을 꾸었다.

포은이 세상에 태어나자 이름을 夢蘭(몽란)으로 지었다.

포은의 어깨에는 북두칠성 모양의 일곱 개가 있었다.

그가 아홉 살때 였다. 어느 어머니가 낮짐을 자다가 용이 동산의 배니무 위로 올라가는 꿈을 꾸었다.

깜짝 놀라 깨어난 어머니가 동산의 배나무를 비라보았다. 이때 포은이 거기에 앉아 있었다. 그래서 이름을 夢龍(룡으)로고쳤다.

 

이후 관례를 치르면서 이름을 夢周(몽주)로고쳤다.

 

 

 

鄭夢周(정몽주) 선생 일화.

 

포은은 과거시험에 연달아 3에 정원으로 급제하였고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으며 마침내 벼슬이 시중에 이르렀다.

포은은 李成桂(이성계)매우 절친한 사이였다. 두 사람은 조정의 신진 세력으로 친명파의 핵심이었다. 이성계가 병마사로서 그의 외종사삼선 · 삼개 형제를 격퇴할 때 포은은 종사관으로 활약했다.

그 후 이성계가 운봉에서 왜장 아기바두를 칠 때에도 포은은 이 씨움에 참전하여 함께 공을 세웠다. 뿐만 아나라, 이성계가 女眞(여진)때에 포은은 동북면 조전원수로서 이성계를 옆에서 도왔다.

13888이성계는 위회군 회군 후에 포은과 힘께 수시중이 되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두 사람은 서로 갈 길이 달라졌다.

포은은 김진양 등과 힘께 딴 미음을 품은 이성계 일파를 견제하여 고려 사직을 끼지 지커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때 고려 조정의 대세는 기울어 중신들이 이성계에게 줄을 . 그러나 포은은 이에 굴하지 않고 오직 충성으로 사직에 매달렸다.

 

이때 포은은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고 은밀히 계획을 세웠다.

 

 

 

鄭夢周(정몽주) 선생 일화.

 

포은은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고 은밀히 계획을 세웠는데 그 낌새를 알이 챈 이방원이 먼저 포은을 없앨 것을 아버지에게 건의했다.

아버님, 포은이 이무래도 수상쩍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더냐?”

아무래도 그가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 같사옵니다

너는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느냐?’

하오면 포은이 우리 집안을 배반하지 않는다는 말씀이옵니까?’ 이성계는 묵묵히 방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포은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었다.

우리가 혹시 부당한 모함을 당한다면 포은은 반드시 죽음으로써 우리를 변명해 줄 것이야. 그러나 국가에 관계된 일이라면 알 수 없을게야.”

아버님, 어찌할까요?’

어찌하다니?’

어차피 우리와 갈라서야 할 사람이라면 우리가 당하기 전에.......”

딴 마음먹지마라!”

이성계는 방원의 뜻을 알고 단호히 거절했다.

 

포은은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행동했다. 때마침 세자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성계가 미중을 나갔다가, 해주 사냥터에서 사냥을 하다가 낙마한 사건이 일아 났다.

포은은 이성계가 개성에 없는 사이에 趙浚(조준) · 鄭道傳(정도전) 등을 역모로 몰아 귀양을 보내고, 심문관을 귀양지에 보내 그들을 죽이려고 을 서둘렀다. 이성계의 참모들을 제거하려는 계획이었다.

이러한 계획을 눈치 챈 방원이 이성계에게 달랴가, 이성계를 개성으로 모셔갔다. 이때 圃隱(포은)은 몹시 당황했다 즉시 그리하여 圃隱(포은)의 계획에는 막대한 차질이 생겼고, 역사는 이성계 쪽으로 기울고 말았다.

 

 

鄭夢周(정몽주) 선생 일화.

 

병문안을 구실 삼아 이성계를 방문.

방원이 병문안을 포은을 초청하여 주안상을 차려 놓고 그의 마음을 떠보았다.

이때 방원은 포은에게 술을 권하고 시조 한 수를 읊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와 같이 얽혀서 년까지 누리리라. ”

 

포은은 방원이 자신의 마음을 떠보는 것을 알고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대구를 읊조렸다.

이 몽이 죽고 죽어 일백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 있으랴.

 

세상 사람들은 이방원의 시조를 하여가했고, 정몽주의 대구하여가불렀다.

그리하여 포은의 미음을 읽은 방원은 포은을 제거할 결심을 굳혔다.

포은은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다. 돌아가는 길에 전에 자주 가던 술친구의 집을 들렀다.

 

이때 친구는 집에 없었다, 포은은 한 잔 술을 청하여 뜰에 활짝 핀 꽃을 심아 죽 들이켰다.

 

 

 

鄭夢周(정몽주) 선생 일화.

 

포은은 큰 사발로 술 잔을 연거푸 마시고 그 술집을 나왔다.

그때 활을 매고 포은 앞을 지나치는 무시들이 있었다. 그들은 선죽교 쪽으로 곧장 달려갔다.

이때 포은이 뒤따라오는 녹사에게 말했다.

너는 뒤에 멀리 떨 이져 오너라.”

녹사는 포은의 마음을 이미 헤아리고 있었다.

소인, 대감을 따르겠나이다. 어찌하여 물리치시옵니까?”

 

너는 나를 따르면 안 되느니라.”

제 갈 길을 가게 주십시오.”

포은이 밀쳤으나 녹시는 기어이 따라왔다.

포은은 선죽교에서 방원이 보낸 趙英珪(조영규) 등의 철퇴를 맞고 쓰러졌다. 녹사도 그들의 칼에 목숨을 잃었다.

표은에 대한 일화는 후세에도 많이 전해 내려온다

 

 

 

鄭夢周(정몽주) 선생 일화.

송도에 포은의 집터가 있었다.

선조 때에 그곳에 서원을 세우고 숭양이라는 사액을 내렸다. 숭앙서원에는 花潭(화담) 徐敬德(서경덕)을 함께 모셨다. 서원이 완성되자 그 고을 사또가 포은의 신주를 어떻게 것인지 선조에게 물었다.

포은은 고려 사람인데 어찌 우리 조정의 관작을 받으리오. 비록 우리 조정에서 영의정을 추증했으나 그냥 포은 선생으로 쓰는 것이 좋겠노라.”

선조는 포은의 충절을 훼손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鄭保(정보) 선생의 일화.

 

鄭保(정보)圃隱(포은) 鄭夢周(정몽주)의 손자이다.

그는 방벽이 심했고 성품매우 활달하여, 사물에 구애받지 않으려고 했다.

그는 成三問(성삼문) · 朴彭年(박팽년)을 매우 좋아했다. 그의 서매가 韓明澮(한명회)의 첩이 되었다. 한명회는 세조의 장자방이라 부를 만큼 세조의 참모로서 권력이 욱일승천하는 판이었다.

 

세조가 사육신을 잡이들여 국청에서 피비린내를 풍길 鄭保(정보)가 한명회의 집을 찾았다

매제는 어디 갔는가?’

지금 죄인들을 국문하느라고 대궐에 있습니다.” 서매가 대답했다.

아니, 그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닦달한다든가?’

오라버니, 말씀삼가세요. 역모를 다루는 사건입니다.”

매제기 만약 그 사람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한다면 만고의 죄인이 될 것일세.”

정보는 손을 휘휘 저으면서 한명회의 집을 떠나버렸다.

저녁에 퇴청하여 이 말을 들은 한명회는 곧장 입궐하여 세조에게 고해바쳤다.

 

전하, 정보라는 자가 간언을 늘어놓고 다닌다 하옵니다. 그자를 잡아다가 죄를 물으시옵소서.

 

정보가 세조 앞에 꿀려 왔다. 이때 세조가 친히 국문했다

네가 무슨 연유로 성삼문 박팩년을 두둔하는 말을 하고 다니느?

신은 항상 그 두 분을 성인군자로 생각하고 있었사옵니다.”

뭣이라? 성인 군자라?’

그러하옵니다.”

전하, 이자의 죄상이 이미 드러났사오니 극형에 처하시옵소서. 이지는 역모를 방조한 자이옵니다

신하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鄭保(정보)의 눈에는 그들이 하나같이 더기로 보였다. 몹시 가소로운 인간들이었다. 정보는 전혀 두려운 기색이 전혀없었다.

 

다시 묻겠다. 두 사림이 정녕 성인군자이더냐?’

그러하옵니다.”

저자를 찢어 죽여라!”

세조는 몹시 화나서 소리쳤다.

정보를 형징으로 끌고 갔다. 그가 국청에서 나간 후에 세조가 물었다.

저자는 어떤 사림인가?’

전하, 정보는 圃隱(포은) 鄭夢周(정몽주)의 손자이옵니다.” 이때 세조는 생각을 바꾸었다.

 

충신의 손지를 죽일 수는 없다. 그의 형을 감여 연일 땅으로 귀영을 보내라!”

정보는 할아비지 덕택으로 죽음 직전에 살아났다.

                      <출전: 한국대표 야사 집 >

 

 

鄭好仁(정호인) 선생의 일화.

 

정몽주가 죽은 지 약 4백년 뒤 정조 때 후손 정호인 (鄭好仁) 이 개성유수로 부임해 선죽교에 난간을 세워 기념물로 만들고 그 대신 옆에 새로 다니는 다리를 놓았다. 오직 고려의 충신 정몽주 하나 만을 위한 존재가 선죽교인데 그래서 고려와 고려의 서울 개성의 표상이 바로 이 알뜰한 규모의 다리인 것이다. 그의 집터에 사당 송양서원을 세워 '만고강산 일대충의' 를 선양함도 오늘의 나그네 걸음을 멈추게 하고 남는다. 그런데 정몽주 무덤은 남한 경기도 용인에 있다.

                    출처: 다움 토픽.

 

 

 

鄭榮晙(정영준)의 효행.

 

鄭榮晙(정영준)은 조선조 25대 철종 때 사람이다.

고려 말 3은의 한 사람으로서 만인의 추앙을 받았던 문충공 圃隱(포은) 鄭夢周(정몽주) 선생의 후손으로서, 경상북도 영일군 거계면 융산 2동에서 태어났다.

 

명문의 후예였으나, 얼찌기 초야에 은거한 선조들 탓으로 가청이 몹시 어려웠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착하고 예절 발랐으며, 특허 부모를 섬기는 효생이 뛰어나 그 이름이 널리 이웃 마을까지 알려졌다.

 

어려운 가청 형펀 때문에 어련 나이로 남의집살이를 해야 했는데, 들에 점심을 가져 오면 고기반찬은 먹지 않고 싸 두었다가 집에 가지고 가서 반드시 부모님께 올렸다. 그러면서도 험이 모자라 늘 부모님께 맛있는 음식을 돼접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와 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즉시 세수를 단정히 하고 부모님이 주무서는 방으로 건너가 아침 문안을 드라고, 저녁에는 아무리 몸이 고단하더라도 부모님 곁에 있으면서 말동무도 해 드리고 팔다리도 주물러 드리다가, 부모님이 자리를 펴고 잠드신 뒤에야 제 방으로 돌아오기를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그런데, 불행허도 나이 열 살 때에 그만 아버지가 급환으로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어린 鄭榮晙(정영준)은 사흘 동안이나 음식을 입에 대지 않은 채 땅을 치고 통곡하며,

천지신명이 굽어 살피서어, 제 아버지의 명을 돌려주시고, 대신 저를 대리고 가 주십시오.”

 

라고 하며 애끓는 호소를 하였다.

 

그러나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가 다시 살아나실 까닭이 없었다. 그 때부터 영준은 3 년 동안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마을에서 5 리나 떨에진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가 종일을 슬프게 울었으나, 혹 어머니가 상심할까 두려워, 집에 돌아와 어머니 앞에서는 전혀 내색조차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3 년 상을 치른 영준은 홀로 계신 어머니를 위하여 아버지께 못 다한 효성을 다하기로 작정하였으나, 어려운 가청 형편이라 집을 자주 비우고, 늙은 어머니 홀로 계시게 함을 안타까워하다가 마침내 이씨 성을 가진 부인과 결혼을 하였다. 다행히 부인 이씨도 그 남펀을 본받아, 시어머니 모시는 청성이 지극하였다.

 

영준의 나이 15에 어머니 몸에 종치가 났는데, 온갖 약을 썼으나 낫지 않고 날로 병가 깊어질 뿐이었다. 마침 이웃사람하나가 말하기를, 암제비의 피를 상처에 바르면 종기가 낫는다고 하였다.

 

며칠 뒤에 우연허 제비 한 마리가 날아와 마당에 떨어졌다. 부인이 기뻐하며 그 피로 즉시 시험 해 보자고 하니 영준이 오랫동안 생각하다가,

 

사람들의 말을 다 믿을 수 없고, 또한 제비의 암수도 구별할 수가 없으니, 생명 있는 것을 이찌 가벼이 죽일 수 있겠소.”

 

하고 제를 도로 날려 보낸 후,

 

어머니의 병세가 저렇게 위중한데 하찮은 제비의 피를 발라서 나을 것이 아니오.”

 

이렇게 말하며,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어머니의 업에 피를 흘려 넣었다.

 

그러나, 너무 많은 피를 흘련 까닭으로 영준은 기력을 잃고 실신하였다. 부인이 놀라, 손가락을 싸매고 극진히 간호한 끝에 반나절이 지난 후에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이튿날 어머니의 몸에서 마침내 종기가 터졌는데 피고름이 그칠 새 없이 흘렀다. 영준은 모친의 한부에 입을 대고 그것을 빨아내었다. 다음날 다시 상처에 고인 고름을 빨아내고, 다시 빨아내기를 한 달을 계속하니 그제야 성차가 아물고 병이 깨끗이 나았다.

 

鄭榮晙(정영준) 내외의 기 쁨은 이루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듣고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몇 해 뒤 영준의 노모가 한겨울에 해소병이 심하여, 밤새도록 기첨을 하며 싱싱한 과일을 찾으니, 영준 내외는 이 말을 들어주지 못함을 슬퍼하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이튿날 날이 밝아 내외가 밖에 나갔더니 난데없이 까마귀 한 마리가 입에 포도송이를 불고 와 마당에 떨어뜨리는 것이 아닌가 ! 몹시 기뻐하며 이를 곧 어머니께 바쳤더니 어머니의 기침이 일시나았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병은 갈수록 심해져 나중에는 음식을 넘기지 못하고, 구토까지 하게 되나, 영준은 정성으로 하늘에 벌면서 어머니의 변을 손으로 쩍어 맛을 보아 병세를 진단하였고, 부인이씨는 혹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그런가 하여 토한 것을 먹기까지 하였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영준내외의 지극한간호로 어머니는 조금씩 차도를 보이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병석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그 후로는 잔병조차 앓지 않았다.

 

영준 내외의 정성스런 봉양으로 어머니가 남다른 장수를 누리어 나이 91 세가 되던 해에 불행히도 영준은 중병에 들어 회복의 가망이 없게 되었다. 그는 임종 전에 아내 이씨를 머리맡에 불러,

내 평소에 어머니를 충분히 모서지 못하여 큰 죄를 지었는데, 이제 또 어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불효를 저지르게 되었으니, 내 대신 당신이 어머니께 내가 못다한 봉양을 지성으로 해주오.”

 

눈물을 흘리며 간곡한 유언을 남기고 죽으니, 온 동리의 남녀노소가 식음을 전폐 하고 함께 울면서 , ‘하늘이 내린 효자가 갔구나. ’ 하였다.

 

마침 내 이 마을의 진사 이장익 (李章翊)은 주위 사람들의 뜻을 쫓아 임금님 께 鄭榮晙(정영준)의 효행을 일일이 적 상소를 올리니, 당시의 철종 임금께서 이를 읽으시고 크게 단복하며 만고에 이름 높은 효자라 하여, 영준에게 동몽교관조봉대부라는 벼슬을 추증하고, 이말을에 旌門(정문)을 세우게 하였다.

 

뒤에 영준의 처 이씨에게도 남편 못잖은 孝婦(효부)라 하여 왕의 敎旨(교지)가 내려졌으나, 鄭榮晙(정영준)과 그의 처 이씨의 효행은 두고 두고 뒷사람들의 거울이 될 것이며, 생각 있는 많은 이들의 가슴을 촉촉이 적셔 주는 단비가 될 것이다.

 

참고 문헌孝烈行誌

 

 

 

열녀  鄭氏(씨부) 부

 

이야기는 4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주시 사정동에는 월성 최 씨들이 살고 있었다. 그 중에는 성균관 진사를 지낸 최신린(崔臣隣)이라는 사란이 있어, 부인 진씨(陣氏)와의 사이에는 4 형제 진한(震翰), 진간(震幹), 진복(震復), 진문(震文)을 두고 있었다.

 

그의 고향 사정동은 천 년의 고도 경주 남단에 있는 고분군인 봉황대가 있는 곳이며, 그 곁에는 난천이 흐르고 또 그 너머는 오릉의 솔숲이 빽빽 하게 둘려 서 있다.

 

사전동에서 서쪽으로 불과 수심 보만 걸으면 곱게 단청해 놓은 아담한 비각을 만난다. 겉으로는 아무 말이 없는 듯 한 것 이었지만 유심히 마음을 기울이는 사람들에게는 적잖은 일령임을 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지금 이야기의 주인공들의 혼이 담겨진 효열각이다.

 

최신한의 둘째 아들 진간은 헝제 중 모슴이 빼어났고 기상도 늠름하며 아버지의 가르침을 잘 받아서 행동거지가 올바르지 않은 것이 없으며, 부모 섬기는 일에 정성을 다하였다.

 

첫닭이 우는 새벽에 문안드리고 잠든 후에야 돌아가곤 하였고, 겨울에는 방을 따뜻하게 해 드리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였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 드리기 위해 부채질을 그쳐 본 일이 없었을 뿐 아니라, 밖으로 나갈 때는 반드시 행선지를 알리는 인사를 드렸고, 돌아와서도 반드시 부모를 뵙는 예절을 어기는 일이 없는 훌륭한 효자였다.

 

부모 아래서 학문을 익히고 덕행을 쌓던 중 세월이 흘러서 관연한 나이가되어 정씨(鄭氏) 부인을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다. 부인 정씨의 본판은 오천 (烏川)이요, 영양공(榮陽公), 승명(襲明)의 후손으로서 성풍은 곧고 유순하며 하는 일이 자상 한데다가 예법을 존중하는 점안에서 태어나 부덕을 익힌 현숙한 부인이었다.

 

그 부부가 정성을 모아 부모를 섬기고 집안을 돌보며 자녀 교육에 여념이 없는 화목한 가칭을 꾸며 가고 있었다.

 

1592년에는 뜻하지 않게 임진왜란이 얼어나고 말았다.

일본은 우리 냐라를 침략하기 위해 많은 병력을 보냈는데 그 중 왜군 제 2 진은 부산을 출발하여 경주성을 함락시키고 말았다. 이때 밀양 부사 박진(朴晉)이 거느리는 군병 일만여 명이 경주성을 되찾으려고 총공격을 펴 보았으나 병력의 약세와 왜병의 새 무기인 조총의 위력에 밀려 무너지고 말았다.

 

진간의 부친 최 신란 진사는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병환으로 신음 중인 늙은 어머니를 모시는 처지를 무릅쓰고 최진핍(정무공), 최계종(육이당), 최봉천 등 집안사람들과 함께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의병이 되기를 자진하였다.

 

그는 의병장인 김호(金虎)의 진으로 달리가기에 앞서 아들들을 불러 놓고 내가 어머님의 말씀에 쫓아 싸움터로 나가니 병환으로 계시는 할머니를 너희 형제들에게 부덕해야겠구나.”

 

하면서 두 주먹을 불끈 쥐었으나 눈에는 두 둘기의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아버지, 염려 마십시오, 할머니는 저희들이 목숨을 바쳐 모실 것이옵니다.” 하고 형제들은 힘있게 대답하였다.

 

이윽고, 아버지 최신련은 싸움터로 떠났고, 늙은 할머니를 모신 청제들은 난리를 피하려고 황룡산(지금의 덕동호 안쪽) 깊은 골짜기를 찾아들어갔다.

그런데, 산 속에서 며칠이 지난 어느 날, 가자기 왜적들이 산 속을 뒤지게 되었다.

 

할머니를 등에 엽은 진간은 숲 그늘과 바위틈을 찾아 숨어 지냈으나 하늘의 명이 다되었을까! 그만 왜적의 무리에게 붙잡히는 몸이 되고 말았다.

왜적 대장이 번쩍이는 칼로 할머니를 내리치려 할 때 진간은 큰 소리로

 

이놈들아, 내게 덤벼라. 나를 죽여도 좋으나 우리 할머니는 손도 대지 말아다오.”

 

하면서 시퍼런 왜적의 칼날을 겁내지 않고 할머니를 덮어 가리었다. 그러나, 슬프다. 잔악한 외적들은 이 피맺힌 하소연을 들은 척도 아니하였다. 왜적의 칼날이 다시 한 번 번찍이는 순간 검푸른 피는 하늘로 치솟고 진간의 몸은 힘없이 땅바닥에 쓰려지고 말았다.

 

짐승보다 못한 사나운 왜놈들은 할머니마저 그냥 두지 않았으니 황룡산 골짜기에는 원한의 핏자국을 남기게 되었다. 이 에 남펀 진간을 따라 황룡산으로 피란 갔던 정씨 부인은 피비린내 나는 남편의 사체를 안고 땅을 치고 통곡하면서

 

할머니는 왜적의 손에 무참히 돌아가셨고 남편인 진간은 지극한 효도를 다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는데 아내 된 도리로 어찌 죽기가 싫어 구차스럽게 살아있겠는가! ,,

 

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갸륵한 효지와 정령의 부인 !

하늘도 감동하고 땅도 함께 울었으리라.

 

몸서리 난 임진왜란이 끝나자 선조 임금님께서는 이 최진간의 갸륵한 효성의 얘기를 전해 듣고 그 효행을 드높이기 위해 독효자(篤孝子)’로 표창 하였고, 부인 정씨에게는 백미 일백 석을 내리면서 정렬부인으로 높여 포창 장하였다.

 

그 뒤로 마을 이름을 효문동이라 하였고 남천에 놓인 다리를 효문교라고 부르게 된 것도 그의 넔을 후세에 길이 알리기 위한 것이다.

 

출전 경로효친교육>

 

 

 

 

백암(栢巖) 정의번(鄭宜藩) 선생의 효행

 

 

기룡산 기슭의 시총

 

영천시에서 북동쪽으로 20km 떨어진 자양면 노항동 산기슭에 소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고, 소치는 머슴들은 나무 그늘에 둘러앉아 얘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 때, 바람을 쐬러 나온 선비 한 분이 이곳을 지나가고 있었다. 선비는 걸음을 멈추고 소들이 풀을 뜯고 있는 모양을 바라보다가 이 소는 뉘 집 소냐?”하고 머슴에게 물었다. 머슴은 벌떡 일어나서 꾸벅 절을 하고는 싱긋 웃으며 서방님은 자기 집 소를 모르십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이 선비가 바로 백암(栢巖) 정의번(鄭宜藩) 선생이었다.

선생이 얼마나 학문에 열중하였었나 하는 것은 이것을 봐도 알 수 있다.

1560, 지금은 영천댐 건설로 수몰지구가 된 자양면 노항동에서 호수 정 세아(鄭世雅) 선생의 맏아들로 태어난 백암은 어려서부터 맛있는 고기와 좋은 과일을 얻으면 먼저 부모님께 드리고 나서 먹었다. 25세 때 지방 시험인 향시에 응시하여 장원이 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한 백암은 이듬해 1584(선조 18) 국가 시험인 과거에 합격하였다. 그 때 시험관이 글 솜씨가 뛰어나고 이치에 맞는 글이다.”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옷매무새를 가다듬어 부모님께 문안을 드린 후 자기 방에 돌아와 공부에 열중하였고 저녁에도 문안을 드리고 잠자리를 보살펴 드렸다. 이런 백암이기 때문에 부모님께서 병환이라도 나시면 곁을 떠나지 않고 눈물을 흘리셨고 밤을 꼬박 새우는 일도 있었다. 탕약과 미음은 몸소 살피고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않았다.

 

1592413, 임진왜란이 일어나 나라 안은 매우 어지럽고 여러 고을이 왜군의 손에 들어가는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백암 선생은 부모님을 모시고 지금의 영천군 자양면 성곡동에 위치한 기룡산 밑으로 피난하였다.

선조 임금님은 평양으로 몽진하시고 나라의 장수와 관리들은 지레 겁을 먹고 도망하였다. 호수공은 백암을 보고

"임금님께서 몽진하시고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 같으니 신하된 사 람이 어찌 자기의 몸만 지키려고 펀안하게 앉아 지켜 볼 수만 있겠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백암 선생은 나라를 위해서 싸우기로 결심하였다.

 

의병들은 대열을 가다듬고 왜적과 싸울 태세를 갖추었다. 임진년 515 일 백암이 이끄는 의병 부대는 의병장 권 응수, 정 대임 등의 의병부대와 힘을 합쳐 영천군 화산면 석촌동 박연소 일대에서 왜군을 크게 무질렀다. 727일에는 바람을 이용해 불길을 번지게 하여 전국에서 맨 먼저 영천성을 적으로부터 탈환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대 왜병들의 시체에서 흐르는 피는 영천시내로 흘러가는 이수 강물을 붉게 물들였고 불에 타는 시체 냄새는 십 리 밖까지 퍼졌다. 이와 같이 기묘한 전략으로 적을 크게 무찌를 수 있었던 것은 백암의 뛰어난 지략뿐 아니라 학식과 덕망이 높고 충의에 찬 아버지를 향상 곁에 모신 까닭이었다.

 

영천성을 탈환한 여세를 몰아 5천여 의병의 선봉장이 된 아버지 호수공을 옹위하여 경주성을 탈환하는 대격전에 참가했다. 아군이 온 힘을 다하여 공격하자 적진은 뭉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갑자기 북문으로부터 터져나 온 적의 기병은 아군의 뒤를, 복병은 아군의 전면을 공격해 오는 것이 아닌 가, 앞 뒤로 적의 공격을 받게 된 아군들은 당황하여 갈팡질팡하였다. 원수 박 진(朴 晋)이 잠시 후퇴하자 아군은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 바람 에 호수공의 부대도 흩어지게 되고 적은 호수공을 포위할 수 있었다.

 

아버지와 헤어지게 된 백암 선생이 적진에 뛰어들어 칼을 휘두르자 겁에 질린 적병들은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호수공은 이 틈을 타서 적의 포위망을 벗어 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정을 모르는 백암은 적진을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달아나는 적을 무찌르다가 온 몸이 창에 찔려 피투성이가 되었다. 또 다시 말에 힘껏 채찍질을 가하여 적진으로 달려갔다. 선생의 화살을 맞은 적병은 백발백중 쓰러졌다.

 

적은 여러 차례 선생을 위협하며 항복할 것을 권해 왔으나 노하여 다음과 같은 호통으로 왜군을 크게 꾸짖었다.

 

예절을 아는 조선 사람이 개나 돼지와 같은 너희들에게 어찌 무릎을 꿇을 수 있겠느냐?”

1592(임진년) 820, 벡암 선생은 끝내 적과 싸우다가 장렬한 최후를마쳤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놀라고 슬퍼하며 그 효행에 감복하였으나 이것은 싸움터 에서도 죽음으로 효행을 꽃피운 한 본보기 때문이다. 적군의 장수도 후에 이 사실을 알고

조선에는 과연 효자가 많구나 ! ”

하며 감탄했다 한 다.

 

옳은 일이 아니면 따르지 않고 옳은 일을 위해서는 자기의 주장을 굽히는 바 없이 싸웠다. 이와 같이 그의 성품이 지극히 곧고 충효 정신이 뛰어난 것도 모두 호수공의 교육의 힘이었다고 할수 있다.

 

호수공이 죽은 후 백암 선생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선생이 평소 입던 옷과 갓으로 경주 싸움터에 가서 혼을 모셔와 빈소를 만들었다. 온 고을 사람들이 애통해 하고 추모하여 조문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또 평소에 백암 선생과 다정하게 지내던 벗들은 선생을 추모하는 시를 지어 관속에 넣어 선영 곁에 장사지내 주었다. 이것이 오늘날 이른바 기룡산 기슭에 있는 시총이다.

 

그 후 1784(정조 8) 2월에 조정의 여러 대신들이 백암 선생의 충효 행적을 심의한 끝에 왕명으로 백암의 뜻을 후세에 전하도록 교지를 내려 충효각을 영천군 임고면 선원 2동 속칭 대환 마을에 세우게 하였으니 우리가 영원히 자랑할 충효의 거울이라 할 것이다. 지금도 그 때의 충효각이 남아 있고 현판에 충신 효자라고 새겨진 교지의 내용은 오늘의 우리들에게 선생의 충효 정신을 일깨워 주고 있다.

 

출전英陽誌, 孝烈行誌, 내 고장 전통 가꾸기>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24

夏(하),範(범)

28

鎭(진),基(기)

九(구)

32

起(기),基(기)

克(극),在(재)

圭(규),培(배)

然(연)

25

休(휴),翰(한)

玉(변),台(태)

29

淵(연),海(해)

源(원),鎔(용)

載(재)

33

鉉(현),鐘(종)

錫(석),鎬(호)

敎(교),喆(철)

26

裕(유),虔(건)

采(채)

30

植(식),東(동)

相(상),永(영)

箕(기)

34

 

27

致(치),在(재)

煥(환),顯(현)

31

炳(병),容(용)

熙(희),煥(환)

和(화),華(화)

35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연일 정씨(迎日鄭氏)는 남한(南韓)에 총 57,504가구, 237,21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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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0 고성 장.jpg 고성정씨(鄭) 청남 14-08-30 2936
629 경주 정.jpg 경주정씨(鄭) 청남 14-08-30 4473
628 한산점씨(占) 청남 14-08-30 2598
627 문경 전.jpg 문경전씨(錢) [1] 청남 14-08-30 3696
626 하음전씨(田) [3] 청남 14-08-30 3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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