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全(옥천전씨)
본관(本貫): 옥천(沃川)
시조(始祖): 전유(全侑)
유래(由來):
옥천(沃川) 전씨의 관조 전유(全侑)는 환성군(歡城君) 전섭(全 攝:전씨의 도시조)의 27세손으로 고려 충숙왕 때 밀직부사(密直副使), 판도판서(版圖判書), 상호군(上護軍)등을 지내고 나라에 공을 세워 관성(管城:옥천의 옛 지명) 군(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정선(旌善) 전씨에서 분적하여 옥천(沃川)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전지(全智)
고려 때 부제학(副提學)을 역임하였다.
전숙(全淑)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했다.
전희철(全希哲)
희철(希哲)은 조선 세종 때 생원(生員)으로 진사시(進士試)를 거쳐 무과에 급제하여 단종 때 상장군(上將軍)으로 있다가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단종이 영월에서 죽자 삼년상을 지냈으며, 임종 때에는 자손들에게 1년에 한번 씩 영월에 찾아가 단종릉(端宗陵)에 참배하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전식(全湜)
1563(명종 18) ∼ 1642(인조2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옥천(沃川). 자는 정원(淨遠), 호는 사서(沙西). 팽조(彭祖)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혼( 鹽 )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여림(汝霖)이며, 어머니는 월성이씨(月城李氏)로 참봉 신(信)의 딸이다. 유성룡 ( 柳成龍 ) · 장현광 ( 張顯光 )의 문인이다.
1589년(선조 22)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왜적을 토벌해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김응남 ( 金應南 )의 추천으로 연원도찰방(連原道察訪)이 되었다.
1599년 예빈시직장(禮賓寺直長)으로 전임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1603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1607년 전적 · 예조좌랑과 정랑을 거쳐, 1611년 울산판관이 되어 고을 백성들의 교화에 힘썼다.
다음해 전라도도사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실정으로 벼슬을 단념하고 정경세 ( 鄭經世 ) · 이준 ( 李埈 ) 등과 산수를 유람해 세칭 상사(商社)의 삼로 ( 三老 )라 일컬어졌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새 왕이 등위하자 예조정랑에 이어 수찬 · 교리가 되어 경연 ( 經筵 )에 참석하였다.
1624년 이괄 ( 李适 )의 난이 일어나자 태복시정(太僕寺正)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 천안에 이르러 집의가 되었으며, 연평군(延平君) 이귀 ( 李貴 )와 원수 장만 ( 張晩 )의 실책을 논하였다. 이어 병조참의 · 병조참지에 승진했으나 나가지 않고 고향에 돌아갔다.
그 뒤 대사간 · 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적을 방어했고, 왕이 도성으로 돌아오자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그 뒤 예조참의와 예조참판에 임명되고 가선대부 ( 嘉善大夫 )에 승계(陞階)했으나 사양하였다.
1638년 대사간 · 대사헌을 거쳐 예조참판 · 대사성이 되었다. 왕이 순검사에 명해 하삼도의 수군을 정비하게 했으나 적절한 시책이 아니라고 반대하였다. 1642년 자헌(資憲)의 품계에 오르고 지중추부사 겸 동지경연춘추관사(知中樞府事兼同知經筵春秋館事)에 임명되었다.
그 뒤 재차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상주 백옥동서원(白玉洞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전명룡(全命龍)
인조 때 도학과 문장에 뒤어났던 명룡(命龍)이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대사헌(大司憲)에 올랐다.
전익희(全益禧)
1598(선조 31)∼1659(효종 1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옥천(沃川). 자는 자수(子綬), 호는 망일당(望日堂)·설월당(雪月堂). 상장군 ( 上將軍 ) 희철(希哲)의 5세손으로, 할아버지는 군자감직장 개(漑)이고, 아버지는 봉사 ( 奉事 ) 뇌(磊)이며, 어머니는 대제학 정척 ( 鄭陟 )의 현손녀이다. 정경세 ( 鄭經世 )의 문인이다.
1624년(인조 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중앙관직으로 정자 ( 正字 )를 거쳐, 박사·전적, 형조·예조 좌랑, 형조정랑, 전라도사, 성균관직강, 예조정랑, 강진현감 등을 역임하였고, 1641년 사헌부지평을 거쳐, 정언 등을 지냈다.
정언으로 있을 때 권신 김자점 ( 金自點 )의 죄를 탄핵하다가 북변의 외직으로 쫓겨났다. 외직으로는 함경도사·고산찰방·봉산군수·충청도사·장흥부사·선산부사 등을 지냈다.
그는 지방에 부임한 곳마다 공덕비가 세워졌는데, 특히 선산부사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어 청덕비(淸德碑)가 세워졌다. 서예에도 뛰어났다. 그의 저서로 ≪설월당문집≫과 유고(遺稿)가 전한다. 경북 영주의 방산서원 ( 方山書院 )에 배향되었다.
전극항(全克恒)
병자호란 때 순절한 극항(克恒)은 예문관 검열(蘂文館檢閱)을 거쳐 예조 정랑(禮曹正郞)을 지냈다.
전황(全煌)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전유담(全有淡)
부사(府使)를 역임했다.
전룡(全龍)
목사(牧使)를 역임했다.
전충립(全忠立)
도사(都事)를 역임했다.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세
|
항렬자
|
세
|
항렬자
|
세
|
항렬자
|
26
|
愚(우)
|
34
|
廷(정)
|
42
|
桂(계)
|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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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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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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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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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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榮(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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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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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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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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泳(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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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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圭(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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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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基(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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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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柱(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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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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兌(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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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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鎔(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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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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煥(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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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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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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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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雨(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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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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埰(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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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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秉(병)
|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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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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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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鎭(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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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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炯(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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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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燮(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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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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澈(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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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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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옥천(沃川) 전시는 남한에 총 8,981가구, 37,38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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