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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궁전씨(全)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全(용궁전씨)

 

 

본관(本貫): 용궁(龍宮)

시조(始祖): 전방숙(全邦淑)

유래(由來):

 

 용궁(龍宮) 전씨의 관조는 도시조(都始祖) 전 섭(全 攝)의 28세손이며, 충렬공 전이감(全以甲)의 14세손인 전방숙(全邦淑)이다.

 「전씨대동보(全氏大同譜)」에 의하면 그는 고려 충렬왕 때 한림학사(翰林學士),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 등을 지냈고 나라에 공을 세워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축산은 용궁의 옛 지명이며, 용궁은 지금의 경북 예천군 용궁면이 되므로 후손들이 그 곳에서 살면서 정선 전씨에서 분적, 관향을 용궁으로 삼아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가문의 중요 인물

 

전정민(全正敏)

방숙의 아들 정민(正敏)이 고려에서 중서사인(中書舍人), 삼중대광(三重大匡), 첨의(僉議)를 거쳐 태사(太師)에 이르렀다.

 

전충경(全忠敬)

방숙의 손자 충경(忠敬)은 전법 총랑(典法摠郞)을 역임하여 가문을 크게 중흥시켰다.

 

전진(全進)

충경(忠敬)의 손자 진(進)은 전서(典書)를 지냈다.

 

전원발(全元發)

? ∼ 1421(세종 3).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용궁 ( 龍宮 ). 호는 국파(菊坡). 전법총랑(典法摠郎) 충경(忠敬)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도총랑(判圖摠郎) 대년(大年)이며, 아버지는 응양군 민부전서(鷹揚軍民部典書) 진( 說 )이다.

고려 말기에 원나라에 가서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병부상서 집현전 태학사에 오르고 영록대부 ( 榮祿大夫 )에 가자되었다. 뒤에 귀국하여 조선 태조 때 축산부원군(竺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서예에 뛰어났으며, 용궁의 소천서원 ( 蘇川書院 )에 제향되었다.

작품으로 〈 법주사자정국존보명탑비 法住寺慈淨國尊普明塔碑 〉 가 있다. 아들에 사복판사(司僕判事) 한( 淹 )이 있으며, 손자 강(强) · 근(謹) · 경(敬)은 모두 장원급제하여 청환(淸宦 : 학식과 문벌이 높은 인물에게 주는 벼슬)으로서 현달(顯達 : 높은 지위에 오름.)하였다

 

전삼성(全三省)

선조 때의 학자 삼성(三省)이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크게 공을 세웠다.

 

전오익(全五益)

오익(五益)은 인조 대의 박학다식(博學多識)한 학자로서 당세에 이름을 떨쳐 가문을 빛냈다.

 

 

 

全五倫(전오륜)의 효행.

 

도둑 떼와 늙은 어머니

 

전 오륜(全五倫), ()는 천서 (天叙), ()는 어주(漁洲)요 용궁인 (龍宮人)이다.

그는 1631(인조 9) 예천군 용궁면 가야리에서 태어났으며, 백제조에 십제공신인 시조 황성군 전 섭(全聶)17세 손이고, 아버지는 호조 참의로 추증된 전 상구(全尙耈)이며, 어머니는 숙부인 의성 김씨 이조 좌랑 김 시주의 딸이다.

 

그는 타고난 성품이 순하고 행실이 착하여 선비로서의 면모를 갖추었었다.

일찌기 갈암 이 현일 선생으로부터 학문을 닦아 문장이 유창하였으며, 시 또 한 흐르는 물과 같이, 맑고 깊은 호수와 같이 잔잔한 느낌을 주며, 풍류를 곁들여 마치 옛 신선의 아악을 듣는 듯하였고, 특히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1660(현종 원년)에 사마시(司馬試)에 응시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고, 매사를 부친의 뜻에 따라서 행동하였으며, 조금도 뜻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 언제나 의관을 바르게 하고 정좌하여 부친께서 말하는 것을 일일이 글로 적어서 실행 하였다. 부친을 대하는 것이 이러하였으니 조상을 모시는 데도 정성을 다하였다. 또한 자손들을 훈육하는 데도 스스로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여 대접하였으니 어찌 사람의 도리에 어긋남이 있었겠는가? 또한 효행 이 지극하여 100 세의 노모롤 받들어 효양(孝養)이 이르지 아니 함이 없었다.

 

그의 나이 70 세 때의 일이다. 화적 (火賊)이 칼과 창을 마구 휘두르고 들어오는지라 그는 자신의 안위보다도 어머니의 안전을 위하여 모발이 허연 늙은 아들이 늙은 어머니를 업고 황급히 나오자 도둑의 우두머리가 이를 보고 감동하여 하는 말이

이는 진실한 효자이니 너희들은 이 집의 물건을 조금이라도 강탈하거나 해친다면 어김없이 목을 베리라.”

하니, 도둑 떼들은 우두머리의 명령대로 고히 물러가 화적의 피해를 면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자 1714(숙종 40)에 암행어사 이 병상(李秉常)이 이 말을 듣고 포상할 것을 조정에 보고하기를

전 오륜은 그 어머니를 봉양함에 성심을 다하고 마음을 순하게 가지고, 모시는 정성이 지극하였으므로 그 어머니의 향년이 100세에 이르고 전 오륜의 나이는 70여 세가 되도록 조석으로 맛있는 음식을 스스로 친히 검사하여 올리고, 항상 불편함이 없도록 보살펴 드렸으며,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서는 매일 성묘를 하며 춥고 더움을 가리지 않았다. 그의 나이 84 세인데도 시종여일 늙음에 이르러서도 성효(誠孝)함에 게을리하지 않았으니 가히 나라에서 포상함이 합당한지라 청컨대 전 오륜이 죽기 전에 특별히 한 관직을 제수하옵소서.”

하니, 왕이 갸륵하게 여겨서 첨지중추부사(정삼품)를 제수하였다. 당시 용 궁 현감 이 지석(李志奭)이 그의 효행을 아름답게 여기어 손수 내무당(萊舞 堂) (옛날 중국의 효자 노래자가 나이 70 세인데도 색동 옷을 입고 어린 아 이 놀음을 놀며 춤을 추던 집이라는 뜻)이라는 세 글자를 새겨 붙이고 시와 서기(序記)를 지어 보냈다.

 

그의 저서로는 인심도심변(人心道心辦), 내외교수펀(內外交修篇), 사무사설 (思無邪設), 사단칠정 (四端七情) 등이 있고, 남긴 글로는 어주집 (漁州集) 이 있다. 그가 남긴 시 한 수를 소개하면

 

書釰悠悠不可期 前途人事亦難推

邇來獨立江湖上 笑矣平生我自知

(글도 칼도, 넓고 넓어 스스로 약속하지 못하니, 앞날의 어찌됨을 짐작도 힘들 수밖에, 늘그막에 낯익은 도덕의 큰물위에 나서니, 웃는 슬기로 살 인생이 저절로 트이네.)라 하였고, 또 한때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김 세흠(金世欽)의 시폐소(임금님께 알려는 정보)를 대신 초안 한 바 있었는데, 그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국방 요새지대인 남한산성에는 군량을 저축해 둠으로써 불시의 필요시에 도 완전 대비되어 국가 변란에 끄떡 않게 하고자 함이 가장 중요하다. 뿐만이 아니건마는 신이 몰래 듣기로는 남한의 대장이 임의로 산성 양반집에 빌려 주고 즉시 그 해로 반납하지 않고 버려둬서 여러 해를 묵히는 가운데 빈 껍데기 장부만 남았다 하니 혹시라도 나라 변이 닥칠 때 어찌 응급 되리까? 나라의 작은 걱정이 아니련마는 조정 대관들도 염려로 삼지 않음을 보고 신은 속으로 걱정되오니 원컨대 전하께서 따로 사람을 골라 뒀다가 불시에 출동시켜 문서와 현물을 따져서 내줬던 놈이나, 받아 내간 놈이나 중죄로 다스리고 조금도 빈 틈을 주지 않는다면 군량이 충족해지는 동시에 불의의 변란에도 응변될 수 있으오리다.

 

그리고, 군인이 시골에서 와 번 서는 자들은 궁성을 지킴에 가장 책임이 무겁건만 신이 듣는 바로는 근래 번 나올 사람이 나오지 않고 품군을 사서 대신 서 있게 하고는 임의로 돌아가 버리면 이른 바 품삯군인 장돌뱅이거나 아니면 양반집 아랫것들이므로 품값을 바라고 나와 섰을 뿐 국방의 책임이 목숨보다 무거운 줄은 깜깜히 모르는 채 적군이 쳐들어 왔을 때 그 품군들은 그저 버리고 달아날 뿐일 터인데 어떻게 궁과 성이 지켜지며 창피도 면해질지 국가의 근심이 크나크오니 전하께서는 병권 당국을 감독하게 하여 품군 교대의 예를 금하고 금령을 범하는 자의 벌을 끔찍하게 내리신다면 군정도 소홀을 면하오리다.”

라고 되어 있다.

 

그는 이와 같이 국방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유사시를 대비하여 군량미의 부정 유출을 막고 언제 침공을 받을지 모르는 산성의 경계를 일반 서민에서 군인으로 대치하고 병권 당국을 철저히 감독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만년에 용궁 향교의 세심류의 기문(記文)을 짓고, 후생 계도에 전념 하다가 1720(숙종 46) 12490 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1730(영종 6)에 조정에서는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추종되었다.

부인은 정부인 진주 이씨 익형(益馨)의 딸이고 효녕 대군(孝寧大君) () 의 후손이다.

 

출전예천군 용궁초등학교 권 교감

참고 문헌 鎭南人物考, 嶺南文獻錄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24

煥(환)

26

鎬(호)

28

植(식)

25

載(재)

27

洪(홍)

29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용궁(龍宮) 전씨는 남한에 총 5,567가구, 22,37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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