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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전씨(全)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全(천안전씨)

 

 

본관(本貫): 천안(天安)

시조(始祖): 전낙(全樂)

유래(由來):

 

천안(天安) 전씨의 관조는 도시조 전 섭(全 攝:환성군)의 후손인 전낙(全樂)이다. 문헌에 의하면 낙(樂)은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삼사 좌복야(三司左僕射)를 지냈고 천안군(天安君)에 봉해졌으므로, 본관을 천안(天安)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전홍술(全洪述)

홍술(洪述)이 고려조에서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지내고 영산군(寧山郡)에 봉해졌다.

 

전충우(全忠佑)

홍술의 아들 충우(忠佑)는 환계군(歡溪君)에 봉군되었다.

 

전인량(全仁亮)

충우(忠佑)의 손자 인량(仁亮)은 1211년(희종 7)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이르렀으며,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제수 되고 은자광록대부(銀紫光祿大夫)로 책록되었으며, 귀국 후 천양군(天陽君)에 봉해져서 영평군(寧平君)에 봉해진 아들 단(旦), 지공거(知貢擧)에 오른 승(昇)과 함께 명성을 날렸다.

 

전신(全信)

1276(충렬왕 2) ∼ 1339(충숙왕 복위 8).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천안(天安). 자는 이립(而立), 호는 백헌(栢軒). 밀직사를 지낸 승(昇)의 아들이다. 음서로 관직에 나아간 뒤 내의직장(內衣直長)으로 1301년(충렬왕 27) 문과에 급제하고, 다음해 숭경부승(崇慶府丞)이 되었다.

이어서 정방관(政房官)에 발탁되었고, 비서랑(秘書郞)에 올랐다. 1304년 국학직강(國學直講), 1307년 안동부판관, 1309년(충선왕 1) 전의부령(典儀府令), 1311년 김해부사, 1314년(충숙왕 1) 사헌장령 · 선부의랑(選部議郎)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317년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에 오르고 1319년 계림부윤, 1321년 복주목사(福州牧使)를 지낸 뒤 면직되었다.

1330년(충혜왕 즉위년) 감찰대부 진현관대제학 상호군(監察大夫進賢館大提學上護軍)에 올랐고, 다음해 동지밀직사사 상의 회의도감사(同知密直司事商議會議都監事)가 된 뒤 1332년(충숙왕 복위 1) 은퇴하였다. 그는 성품이 엄격하고 근면하였으며, 집이 가난하였으나 산업에 뜻을 두지 않았다.

일찍이 백이정(白 蓬 正) · 김제안 ( 金齊顔 ) · 이제현 ( 李齊賢 ) 등 현사들과 교의(交誼)가 두터웠으며, 또한 최해 ( 崔瀣 )와도 친교가 있었으므로 그의 묘비문을 썼다. 충청남도 천안의 검계서원(儉溪書院)에 봉향되었으며,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전윤장(全允藏)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문신. 1342년(충혜왕 복위 3) 조적(曺 使 )이 반역을 꾀하였을 때 상호군으로서 왕을 시종한 공으로 2등공신이 되었다.

1343년에 우상시(右常侍)에서 서해평양도순위사(西海平壤道巡尉使)가 되었다가 1347년(충목왕 3)에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 교주도도순문사(交州道都巡問使)가 되어 쌍성 ( 雙城 )의 인구를 조사하였다.

1348년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어 왕의 총애를 믿고 횡포한 짓을 자행하여 자기의 직무를 다하지 못하면서 궁중의 요리사와 결탁하여 몰래 왕의 음식을 훔쳐내어 자기집으로 빼돌리고, 또 민상정(閔祥正)과 한패가 되어 원나라 황제에게 충혜왕이 일국의 왕이 될 만한 자격이 없다고 하여 감찰장령 송천봉 ( 宋天逢 )으로부터 탄핵을 받으니, 도리어 그를 참소하여 초도구당(草島勾當)으로 좌천시켰다.

1349년(충정왕 1) 원나라에 가는 강릉대군(江陵大君 : 뒤의 공민왕)을 호종한 공으로 1351년(공민왕 즉위년)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공민왕이 원나라에서 돌아오자 감찰사에서, 그가 일찍이 금을 뇌물로 받고 발각되자 원나라로 도망하였다가 왕을 호종하고 돌아와 재상에 임명되었으니 그 직을 파하고 죄를 주어야 한다고 탄핵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전순의(全循義)

세종·문종·세조의 3조()에 걸쳐 전의감()의 의관을 지냈는데, 1445년(세종 27) 왕명에 따라 『의방유취()』(365권)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세종이 죽자 그의 직첩이 회수되어 전의감 서원()으로 강직되었다가 곧 해제되었으며, 1452년(문종 2) 내의로서 밀성군()의 병을 고쳐 안마()의 상을 받았다. 그러나 이 해 5월 문종의 종양을 절개수술하였으나 곧 문종이 죽음으로써 의금부에 하옥되어 전의감 청직()으로 강등되었다가 단종이 즉위하자 석방되었다.

1462년(세조 8) 행첨지중추원사를 거쳐 동지중추원사로 승진되고, 1463년 내의로서 입시, 의약()하고, 비현각()에서 의학을 시강하였다. 이듬해 시약()의 공로로 자헌대부()에 가자되고 1467년 내의로 상호군에 이어 좌익원종공신() 1등에 녹선되었다.

저서로는 『식료찬요()』(1권)와 김의손()과의 공저인 『침구택일편집()』(1책)이 있다.

    출전:  [네이버 지식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全琫準(전봉준)

東學黨布告文(동학당포고문)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여김은 人倫(인륜)이 있기 때문이며 君臣(군신)父子(부자)는 가장 큰 인륜으로 꼽는다.

임금이 어질고 신하가 충직하며 아비가 자애롭고 아들이 효도를 한 뒤에야 국가를 이루어 끝없는 복록을 불러오게 된다.

 

지금 우리 임금은 어질고 효성스럽고 자애로우며 지혜롭고 총명하시다.

현량하고 정직한 신하가 있어서 잘 보좌해 다스린다면 예전 훌륭한 임금들의 교화와 치적의 좋은 세월을 기다려도 될 만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신하가 된 자들은 나라에 보답하려는 생각을 아니하고 한갓 작록과 지위를 도둑질하여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아부를 일삼아 충성스런 선비의 간언을 요사스런 말이라 하고 정직한 사람을 비도(匪徒)라 한다.

 

그리하여 안으로는 나라를 돕는 인재가 없고 바깥으로는 백성을 갈취하는 벼슬아치만이 득실거린다.

인민의 마음은 날로 더욱 비틀어져서 들어와서는 생업을 즐길 수 없고 나와서는 몸을 보존할 대책도 없도다.

학정은 날로 더해지고 원성은 줄을 이었다.

군신의 의리와 부자의 윤리와 상하의 구분이 드디어 남김없이 무너져 내렸다.

管子(관자)가 말하길 사유(四維)[예의염치]가 베풀어지지 않으면 나라가 곧 멸망한다.’고 하였다.

 

바야흐로 지금의 형세는 예전보다 더욱 심하다.

위로는 공경대부(公卿大夫) 이하, 아래로는 방백수령(方伯守令)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위태로움은 생각지 아니하고 거의 자기 몸을 살찌우고 집을 윤택하게 하는 계책만을 몰두하여 벼슬아치를 뽑는 문을 재물 모으는 길로 만들고 과거 보는 장소를 사고파는 장터로 만들고 있다.

 

그래서 허다한 재물이나 뇌물이 국고에 들어가지 않고 도리어 사사로운 창고를 채운다.

나라에는 부채가 쌓여 있는데도 갚으려는 생각은 아니하고 교만과 사치와 음탕과 안일로 나날을 지새워 두려움과 거리낌이 없어서 온 나라는 어육이 되고 만백성은 도탄에 빠졌다. 진실로 수령들의 탐학 때문이다.

 

어찌 백성이 곤궁치 않으랴.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근본이 깎이면 나라가 잔약해지는 것은 뻔 한 일이다. 그런데도 보국안민의 계책은 염두에 두지 않고 바깥으로는 고향집을 화려하게 지어 제 살길에만 골몰하면서 녹위만을 도둑질하니 어찌 옳게 되겠는가?

 

우리 무리는 비록 초야의 유민이나 임금의 토지를 갈아 먹고 임금이 주는 옷을 입으면서 망해 가는 꼴을 좌시할 수 없어서 온 나라 사람이 마음을 함께하고 억조창생이 의논을 모아 지금 의로운 깃발을 들어 보국안민을 생사의 맹세로 삼노라.

오늘의 광경이 비록 놀랄 일이겠는가, 결코 두려워하지 말고 각기 생업에 편안히 종사하면서 함께 태평세월을 축수하고 모두 임금의 교화를 누리면 천만다행이겠노라.

 

<原文(원문)>

人之於世 最貴者 以其人倫也 君臣父子 人倫之大者 君仁臣直 父慈子孝 然後乃成家國 能逮無疆之福 今我聖上 仁孝慈愛 神明聖睿 賢良正直之臣 翼贊佐明 則堯舜之化 文景之治 可指日而希矣 今之爲臣 不思報國 徒竊祿位 掩蔽聰明 阿意 ?容 忠諫之士 謂之妖言 正直之人 謂之匪徒 內無輔國之才 外多虐民之官 人民之心 日益?變 入無樂生之業 出無保軀之策 虐政日肆 怨聲相續 君臣之義 父子之倫 上下之分 遂壞而無遺矣 管子曰 四維不張 國乃滅亡 方今之勢 有甚於古者矣 自公卿以下 以至方伯守令 不念國家之危殆 徒切肥己潤家之計 銓選之門 視以生貨之路 應試之場 擧作交易之市 許多貨賂 不納王庫 反充私藏 國有積累之債 不念圖報 驕侈淫 無所畏忌 八路魚肉 萬民塗炭 守宰之貪虐 良有以也 奈之何民不窮且困也 民爲國本 本削則國殘 不念輔民安民之方策 外設鄕第 惟謀獨全之方 徒竊祿位 豈其理哉 吾徒雖草野遺民 食君土 服君衣 不可坐視國家之亡八路同心 億兆詢議 今擧義旗 以輔國安民 爲死生之誓 今日之光景 雖屬驚駭 切勿恐動 各安其業 共祝昇平日月 咸休聖化 千萬幸甚

 

전몽성(全夢成)

몽성(夢成)은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몽진(夢辰), 김덕흡(金德洽) 등과 함게 의병을 모집하여 수차에 걸쳐 왜적을 무찔러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全一貴(전일귀)선생의 전설

 

전일귀 전설

 

장성군 북이면 원덕리라는 아담한 마을 앞에 전일귀라는 비석이 있다.

이 비석은 원덕마을 사람들이 세워 주었던 것으로 동학란 때 전봉준을 위시한 동학군들이 여기서 쉬어가다가 전윌귀의 효도에 탄복하고 또한 같은 전()씨이고 하여 성대하게 제사를 지내주었는데 그 뒤에 관군들이 이곳을 지나다가 그 사실을 알고 전봉준에 대한 악화된 감정이 올라와 그 비석을 때려 부수니 자는 떨어져 나가 버리고 지금은 일귀자만이 남았다. 이 비석에는 이런 일화가 얽혀 있다.

 

입암산성의 깊은 산속에 다정한 노부부가 살고 있었다. 이들에게 늙을 때까지 걱정이 있었다면 애기가 없다는 것 뿐 이었다. 그동안 그 들은 아기를 낳을 수 있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지지 않고 지성을 다 해왔다. 이러한 그들의 정성이 갸륵했던지 신령님께서 그 부부가 갈망하던 귀여운 옥동자를 낳게 하니 이이가 바로 전일귀다.

 

이 들 노부부는 일귀가 하도 예뻐서 금이야 옥이야 하며 키웠으며 일귀의 어떤 재롱도 흐뭇하게 받아 주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의 일귀의 생활은 말할 수 없이 난장판이 되어갔다. 부모의 빰을 때리는 등 열 살이 넘어서도 부모를 노리갯감으로밖에 생각지 못했다. 이들 부부는 악동이 되어버린 일귀와의 생활에 견딜 수가 없었다.

 

어느 하루는 일귀가 애비의 빰을 쳐 볼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노부부는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생활하면 버릇이 고쳐질까 생각하여 원덕리라는 마을로 이사 왔다. 과연 일귀는 시간이 갈수록 자신의 잘못을 알아서 반성하고 지나간 날의 부모에 대한 불효가 후회될 뿐이었다. 그는 지난 불효를 어떻게 해서라도 갚아야 된다는 신념에 가득 찼다.

 

그 뒤로 일귀의 부모에 대한 봉양은 말로 표현할 길이 없었다. 눈보라가 치나 바람이 부는 날에도 나무를 해다가 십리가 먼 사거리 장터에 나가 팔아 고기를 사다가 봉양하곤 했다.

 

이러한 일귀의 효도도 죽음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던지 부모가 같은 날 돌아가시는 것이었다. 그 뒤로 일귀는 삼년 시묘를 하고 하늘에 죄를 지어 하늘이 무섭다고 땅만 쳐다보고 다녔다고 한다.

                                                                                       <출전: 장성군지>

 

 

출전 <한미족대성보>.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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