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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전씨(田)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田(담양전씨)

 

 

본관(本貫): 담양(潭陽)

시조(始祖): 전득시(田得時)

유래(由來):

 

담양 전씨(潭陽田氏)의 시조 전득시(田得時)는 고려 때 누대에 걸쳐 담양(潭陽)에 토착(土着) 세거해 온 고을 향리의 아들로 태어나 1155년(의종 9) 현량(賢良)으로 천거되고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좌복야(左僕射), 참지정사(參知政事) 등을 지낸 후 담양군(潭陽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득시(得時)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담양(潭陽)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면서 6세까지 독자로 내려오다가 희경(希慶)의 아들 3형제 대(代)에서 맏아들 녹생(祿生)은 양은공파(惹隱公派), 둘째 귀생(貴生)은 뇌은공파(牢隱公派), 세째 조생(祖生)은 경은공파(耕隱公派)로 갈리었다.

 

가문의 중요 인물

 

전녹생(田祿生)

1318(충숙왕 5) ∼ 1375(우왕 1).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담양(潭陽). 자는 맹경(孟耕), 호는 야은( 敾 隱). 충혜왕 때 과거에 급제, 제주사록(濟州司錄)을 지낸 후 전교 ( 典校 ) · 교감 ( 校勘 )이 되었고, 정동성(征東省)의 향시 ( 鄕試 )에 합격하였다.

1347년(충목왕 3) 정치도감 ( 整治都監 )의 교감으로서 좌랑 서호 ( 徐浩 )와 함께 기황후 ( 奇皇后 )의 친척 동생인 기삼만 ( 奇三萬 )의 죄를 다스렸는데, 그가 옥사하였으므로 옥에 갇혔다가 곧 풀려났다.

1357년(공민왕 6)에 기거사인 ( 起居舍人 )으로서 우간의 이색 ( 李穡 ), 우사간 이보림(李寶林), 좌사간 정추 ( 鄭樞 ) 등과 함께 염철별감(鹽鐵別監)의 폐단을 논해 그의 파견을 금하도록 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361년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왕이 남행할 때, 전라안찰사로 왕을 호종해 2등공신이 되었다.

그 뒤 벼슬을 여러 번 옮겨 좌상시 ( 左常侍 )가 되고, 감찰대부(監察大夫)를 거쳐 대사헌 · 정당문학 ( 政堂文學 )을 지내고, 문하평리 ( 門下評理 )에 이르러 추충찬화보리공신(推忠贊化輔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1371년(공민왕 20)에 동지공거 ( 同知貢擧 )로서 지공거(知貢擧) 이색과 함께 진사를 선발하였다. 1373년에 서북면도순문사로서 충혜왕의 얼자(蘖子)라고 칭하던 석기(釋器)가 이안 ( 李安 ) · 정보(鄭寶) 등과 어울려 반역을 꾀했다는 명목으로 체포해 목을 베었다.

1375년(우왕 1)에 간관 이첨 ( 李詹 )과 전백영 ( 全伯英 )이 이인임 ( 李仁任 ) · 지윤(池奫)을 벨 것을 왕에게 청하였다. 그런데 이첨(李詹)과 전백영(全伯英)을 옥에 가두고, 최영 ( 崔瑩 ) · 지윤 등을 시켜 국문하게 하였다.

이들의 말이 박상충 ( 朴尙衷 ) · 전녹생에게 관련되므로 최영이 이들을 심하게 국문하고 귀양을 보냈는데, 모두 가던 도중에 죽었다. 저서로 ≪ 야은집 ≫ 이 있다.

 

전귀생(田貴生)

고려 말에 삼사 좌윤(三司左尹)과 밀직제학(密直提學)을 역임한 그의 아우 귀생(貴生)과 참지정사를 역임한 조생(祖生)은 모두 문장에 뛰어나고 학문이 깊어 3형제가 함께 명성을 날렸는데,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귀생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갔으며 누차 벼슬할 것을 권유받자 절해고도(絶海孤島)로 자취를 감추었고, 조생은 깊은 산속에 숨어서 절개를 지킴으로서 〈두문동 72현록(杜門洞七十二賢錄)〉에 올랐다.

이 때 세상 사람들은 이들 3형제를 가리켜 〈삼은전선생(三隱田先生)〉이라 불렀으며, 지금도 전라남도 담양읍 향교앞에 〈삼은전선생유허비(三隱田先生遺墟碑)〉가 전해지고 있다.

 

전우(田愚)

야은공파(惹隱公派) 녹생(祿生)의 후손에서는 성리학의 대가인 우(愚)가 이율곡(李栗谷), 송시열(宋時烈) 등의 학통을 이어받아 크게 명성을 떨쳤다.

1841(헌종 7) ∼ 1922. 조선 말기의 성리학자. 본관은 담양(潭陽). 초명은 경륜(慶倫) 또는 경길(慶佶). 자는 자명(子明), 호는 구산(臼山) · 추담 ( 秋潭 ) · 간재(艮齋). 재성(在聖)의 아들이다. 전주에서 태어나 서문 밖 청석동(靑石洞)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학문이 뛰어나, 14세 때에는 아버지를 따라 서울 정동 · 삼청동 · 순화동(順化洞) 등에서 살았는데, 이 때부터 임헌회 ( 任憲晦 )의 사랑을 받기 시작하였다.

21세 때에는 임헌회를 아산의 신양(新陽)으로 직접 찾아가 사제의 의를 맺었다. 임헌회가 죽을 때까지 아산 · 전의 · 연기 · 진천 · 상주 · 문천 등지로 따라가 살면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후학들을 가르치는 한편, ≪ 안자편 顔子篇 ≫ · ≪ 오현수언 五賢粹言 ≫ · ≪ 연원정종 淵源正宗 ≫ 등을 편찬해 많은 학문적 영향을 끼쳤다.

1882년(고종 19)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 · 감역 · 전설사별제(典設司別提) · 강원도도사, 1894년 사헌부장령, 이듬해 순흥부사 · 중추원찬의(中樞院贊議)를 제수받았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자 1895년 을미년에는 박영효 ( 朴泳孝 ) 등이 수구(守舊) 학자의 우두머리로 지목해 개화를 실현시키려면 전우를 죽여야 한다고 여러 번 청했으나 고종의 승낙을 얻지 못하였다.

68세 되던 해부터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왕등도( 力 嶝島) · 군산도(群山島) 등으로 들어가 나라는 망하더라도 도학 ( 道學 )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하겠다고 결심, 지금의 부안 · 군산 등의 앞 바다에 있는 작은 섬을 옮아가면서 학문을 폈다.

72세 되던 해에 계화도 ( 界火島 )에 정착, 계화도(繼華島 : 중화를 잇는다는 뜻)라 부르면서 82세에 죽을 때까지 수많은 제자를 길러 냈으며 60여 책의 저서를 남겼다. 지금의 계화도에 있는 집은 모두 당시의 제자들이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의 성리학 연구 업적은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전통적인 유학 사상을 그대로 실현시키려 한 점에서 조선조 최후의 정통 유학자로서 추앙 받고 있다.

그러나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나라가 망해도 의병을 일으키려 하지 않고 도학 군자만을 자부하고 있었다는 것과, 이른바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해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그의 학문은 스승인 임헌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임헌회는 홍직필 ( 洪直弼 )의 문인으로서, 홍직필이 이재 ( 李縡 )의 문인에게서 학문을 닦았으므로, 자연히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같다는 견해를 가졌다.

그리하여 이들은 이른바 낙론(洛論) 계열의 학자라 불리운다. 전우는 이와 같은 사상의 영향을 받아 인성과 물성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한원진 ( 韓元震 )과는 전혀 의견을 달리하였다.

그는 의리를 숭상하고자 조선조에 있어서 다섯 사람의 어진 이로서 조광조 ( 趙光祖 ) · 이황 ( 李滉 ) · 이이(李珥) · 김장생 ( 金長生 ) · 송시열 ( 宋時烈 )을 동방의 오현(五賢)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문집 가운데서 좋은 말을 뽑아 ≪ 오현수언 ≫ 을 만들었다. 이는 ≪ 근사록 近思錄 ≫ 과 같은 체재를 모방한 것으로서 그의 의리 정신이 어떠했는가를 엿보게 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 조금이라도 의견을 달리하는 점이 있으면 주저하지 않고 그 잘못을 지적해 자기의 성리학설을 세웠다. 그러므로 그 자신 김창협 ( 金昌協 )을 연원으로 사상적인 영향을 받았지만, ≪ 농암사칠의의 農巖四七疑義 ≫ 를 지어서 그 불합리함을 지적했고, 기정진 ( 奇正鎭 )의 〈 외필 猥筆 〉 을 반박하는 〈 외필변 猥筆辨 〉 을 썼다.

그리고 이항로 ( 李恒老 )에게도 〈 화서아언의의 華西雅言疑義 〉 로, 이진상 ( 李震相 )에게는 역시 〈 이씨심설조변 李氏心說條辨 〉 으로 반박하였다.

그는 오직 이이와 송시열의 사상을 계승하는 데 힘썼으며, 그 나름대로 성리학적 경지를 창안해 심본성설(心本性說)을 주제로 성존심비(性尊心卑) 또는 성사심제(性師心弟)의 설을 부르짖었다.

그는 이러한 창안이 주희(朱熹)의 학설을 올바로 이해한 것이라 하였다. 이는 주자가 인간의 도덕적 의지와 작용을 설명하면서 성을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여겼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주희가 모든 도덕적 의지는 성(性)에 근본하고 성은 천리(天理)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천리인 성은 당연히 높고 마음은 낮은 것이라 하였다.

그는 “ 주자가 말하기를 성은 태극이라 하였고 심(心)은 음양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늘과 태극은 마땅히 높은 것이고 심과 음양은 마땅히 낮은 것이다. ” 라 했고, 또 “ 이를 미루어 보면 성은 스승이고 심은 제자라는 것은 주희의 설에 바탕을 두기는 했으나 내가 새로 창시한 것이니 의리가 지극히 정미한 것이며 절실한 공부이며 이것이 스스로 만든 심제(心弟) 두 글자다. ” 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심성론 ( 心性論 )에 있어서도 성은 천리이며 심은 기(氣)라고 주장함으로써 ‘ 심즉이(心卽理) ’ 설에 반대하였다. 이와 같은 견해는 송시열의 학설을 이어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기(理氣)에 대해서는 〈 이기유위무위변 理氣有爲無爲辨 〉 에서 태극은 이만 있고 동정(動靜)의 능력은 없으며 음양이 동정한다고 하였다. 이를 무위(無爲), 기를 유위(有爲)한 것이라 했고, 인간에게 있어서도 성은 무위한 것이며 심은 유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심성(心性)에 대해서는 성은 천리로서 무형 · 무위이며 심은 유위의 기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은 순선(純善)이므로 대본(大本)이며 심은 작용이니 성명 ( 性命 )의 도덕성에 근본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학문적 성격과는 달리 처신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김평묵 ( 金平默 )은 “ 간재는 죽기가 무서워 의병을 일으키지 못했고, 화가 미칠까 두려워 외세를 배척하지 못하였다. ” 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전우 자신은 정통 왕권(王權)의 계승만이 국권의 회복이라 했고, 파리장서에 가담하지 않은 것도 이적(夷狄)을 끌어들이는 일이라고 하여, “ 이는 척화를 하기 위해 또 다른 외세의 간섭을 자초하는 일이니 열강의 세력을 빌려 이들에게 호소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 ” 고 거절하였다.

그의 이와 같은 견해를 따로 모은 책이 ≪ 추담별집 秋潭別集 ≫ 이다. 이 책에 의하면 “ 국권을 회복한다고 하면서 외세와 손잡게 되면 이는 나라를 회복하기 이전에 내 몸이 먼저 이적이 되는 것이니 이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 , “ 500년 종사도 중요하지만 3,000년의 도통(道統)을 잇는 것이 더 소중하니 무가치하게 목숨을 버리지 말고, 학문을 일으켜 도(道)로써 나라를 찾아야 한다. ” , “ 을사년의 수치에도 통곡할 수밖에 없었고, 우리의 모든 선비는 마땅히 피를 토하고 눈물을 흘리며 이를 악물고 살 수밖에 없으나, 눈앞의 위태함만을 알고 나라의 참된 힘이 무엇인가를 깨닫지 못하면, 그것은 총칼 앞에 헛되이 목숨을 버리는 일일 뿐이니, 차라리 몸과 마음을 올바로 가다듬어 신명을 얻어 학문을 열심히 닦아 뜻을 편다면 1년, 2년, 10년, 20년 어느 때인가는 우리의 힘으로 이룰 수 있을 것이다. ” 고 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견해는 도학 정신에 더욱 투철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이는 이에 대해 “ 수천 년의 도학이 간재 한 몸에 달렸으니 가벼이 죽기보다 학문을 북돋우는 것이 더 큰일이라. ” 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 스스로는 일제의 탄압에 대해 조선 사람으로 자처하면서 전혀 일인을 상대하지 않았고 세금은 물론 제자 가운데 개화하는 사람은 이름을 지웠다.

이와 같은 학문적 업적에 대해 영남의 거유 곽종석 ( 郭鍾錫 )은 그의 저서 ≪ 면우집 潭 宇集 ≫ 권111의 〈 홍성길 (洪成吉)에게 답하는 글 〉 에서 “ 나 스스로는 간옹(艮翁)에게서 평소에 그 청절(淸節)을 흠앙(欽仰)했던 것이요, 성존심비(性尊心卑)의 뜻은 모든 사람들이 미치지 못했던 바이니 간옹이야말로 나의 의혹된 바를 풀어줄 수 있는 분이다 ” 고 하였다.

이상을 종합해 볼 때 전우 자신은 전통적 도학의 중흥만이 국권 회복의 길로 여겼기 때문에 이 정신에 투철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전우에 대한 처신의 평가가 어떠했던지간에 조선조 최후를 장식했던 성리학적 공헌은 큰 것이라 할 수 있다.

제자로는 오진영 ( 吳震泳 ) · 최병심 ( 崔秉心 ) · 이병은(李炳殷) · 송기면 ( 宋基冕 ) · 권순명 ( 權純命 ) · 유영선(柳永善) · 김병준(金炳駿) · 김택술(金澤述) 등 3,000여 명을 헤아리고 있다. 그의 묘소는 전라북도 익산에 있다.

계화도의 계양사(繼陽祠), 의령의 의산사(宜山祠), 고창의 용암사(龍巖祠), 정읍의 태산사(台山祠)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 간재집 ≫ (60책) · ≪ 간재사고 艮齋私稿 ≫ (30책) · ≪ 추담별집 ≫ (2책) 등이 있다.

 

전한(田漢)

뇌은공파(牢隱公派)에서는 귀생(貴生)의 아들 한(漢)이 중랑장(中郞將)을 역임하였다.

 

전묘(田苗)

귀생의 손자 묘(苗)가 소윤(少尹)을 역임했다.

 

전가종(田可種)

조선조에 와서 가종(可種)이 군수(郡守)를 역임했다.

 

전가식(田可植)

가식(可植)이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지냈다.

 

전구주(田九疇)

구주(九疇)는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참의(吏曹參議), 춘추관지제교(春秋館知製敎)까지 지낸 후 문명을 날렸다.

 

전순(田順)

경은공파(耕隱公派) 조생(祖生)의 후손에서는 그의 아들 순(順), 엄(俺), 회(澮), 개(慨)가 뛰어났다.

 

전균(田畇)

세조 때 판내시부사(判內侍府使)로 하음군(河陰君)에 봉해짐.

 

전여림(田汝霖)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등을 역임.

 

전벽(田闢)

보령현감(保寧縣監)으로 선정을 베풀어 「삼옥태수(三玉太守)」란 칭송을 들음.

 

전윤(田潤)

1554(명종 9) ∼ 1637(인조 15).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담양(潭陽). 호는 야곡( 敾 谷). 무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파천하였을 때 임진강가에서 왕에게 밥과 국을 얻어다 바쳐 신임을 얻었다.

1618년(광해군 10) 행사직으로 있을 때 서궁(西宮) 폐위의 논의가 있자, 이를 찬성하기도 하였다. 벼슬이 부총관에 이르렀다. 뒤에 위성원종공신(衛聖原從功臣)으로 추봉되었다.

 

 

田愚治(전우치)의 전설

 

해적이 들끓고 관리의 탐욕이 심하여 백성들은 하나같이 살기가 어렵고 도탄에 빠져 사는 것이 말 할 수 없이 고생이었다. 그때 도술을 자유로이 부리는 전우치는 한 童子(동자)로 변신하여 구름을 타고 中國(중국)으로 건너갔다.

구름 위에서 宮中(궁중)을 내려다보며 나는 仙官(선관)으로서 옥황상제가 지상의 임금들에게 황금들 보를 하나씩 거두어오라 하여 왔다.고 하면서 황금들보를 한씩 거두었다. 그리하여 들보의 일부는 팔아서 쌀을 사 가난하고 헐벗은 백성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머지는 때를 만나면 쓰기 위해 지금의 황금리에 묻어 두었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전우치는 역적으로 몰려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그 뒤 사람들이 숨겨놓은 금괴를 찾기 위해 이 일대를 파헤쳤으나 아직 까지 찾지 못했다고 한다

 

 

 

田禧(전희)의 효행.

 

효자 田禧(전희)는 지금부터 약 250여 년 전 조선 축종 해 사람으로 당시의 경장북도 연일현 북연 임강촌(지금의 포항시 효자동)에서 태어났다.

 

어릴 배 부터 책을 가까이하여 옛 성현들의 가르침을 본받기에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

 

田禧(전희)의 나이 아홉 살이 되렌 해 겨울에 어머니가 이름모를 병으로 자리에 눕 되니, 전회는 밤낮으로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고 병 수발을 했다.

 

어느 날 어머니가, 싱싱한 잉어라도 한 마리 구해서 푹 고아 먹었면 이놈의 병이 나으려는 지 ------.

 

혼잣말쯤을 하서는 것을 듣고, 마음 날로 형산강으로 갔다.

 

그러나 꽁꽁 얼어붙은 강 어디에서 영어를 구한단 말인가? 어린 田禧(전희)는 어머니의 작은 소원 하나를 들어드리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며 강바닥에 퍼져 앉아 슬피 울었다. 그 때 갑자가 바로 몇 발짝 앞의 얼음이 쩡하고 칼라지 며 어른의 팔뚝만한 큰 영어 한 마리가 뛰어올라 얼음판 위에서 펄떡거리는 것이 아닌가?

 

천회는 크게 기뻐하며 영어를 둘러메고 집으로 달려와서 그 것을 어머니께 고아 올렸다.

 

그러나 전희의 온갖 정성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얼마 후 세상을 떠나 시고 말았다. 어란 田禧(전희)는 자식의 효성이 부족하여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스스로를 원망하면서, 어머니 묘 옆에 움막을 짓고 그 곳에서 밤낮을 지내 기를 3년을 하였다. 사람들의 말로는 밤이 되면 큰 호랑이가 나타나서 田禧(전희)를 지켜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田禧(전희)의 효행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업을 모아 田禧(전희)를 칭찬하였다.

어린 아이가 어찌 저토록 어머니 생각하는 마음이 간절하단 말인가?”

 

정성이 하늘에 닿아 산신령이 호랑이로 둔갑해서 아이를 지켜 준 거야·” 연일 현강도 소문을 듣고 田禧(전희)를 직접 동헌으로 불러 크케 칭찬한 후 그에게 상을 내리었다.

 

전회는 이때부터 혼자 남으신 아버지 성기기에 또한 정성을 다하였는데, 아버지 앞에서는 찌푸린 얼굴을 보인 적이 없었고, 한번도 뜻을 어긴 적이 없었다.

 

田禧(전희)16실 되던 해 어느 날, 나이 많으신 아버지가 갑자기 토끼 고기기 먹고 싶다고 했다.

田禧(전희)는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산에다 토끼 틀을 놓기도 하고, 토끼 굴을 찾기도 하며, 헤매었으나, 산짐승인지라 쉽게 잡힐 리가 없었다.

 

이 날도 기진맥진한 채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드리지 못함을 죄스러워하며 대문을 들어서는데, 뜻밖에도 집에서 키우고 있던 개가 어디선가 토끼룹 물고 와 마당 한가운데서 田禧(전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田禧(전희)는 뛸 듯이 기뻐하며,

말 못하는 짐승이지만 네가 이 불효한 자식보마 낫구나.” 개의 머리를 수 없이 쓰다듬으며 눈문을 흘렸다.

 

그런데, 1 년 후 전회가 19 살 되던 해 아버지가 갑자기 피를 토하 며 쓰러지고 말았다. 뜻밖에 당한 일이라 田禧(전희)는 어쩔 할바를 몰랐다. 그러다 가 피를 흘린 아버지께 피를 보태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났다. 田禧(전희)는 그 자 리에서 자신의 집게손가락人指을 깨물어 흐르는 피를 아버지의 업에 흘려 넣었다.

 

아버지는 일순간은 의식이 회복되고 기운을 차리는 듯했으나, 결국 완쾌를 보지 못한 채 얼마 뒤에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田禧(전희)는 이머니 때와 마찬가지로 아버지 묘 옆에 움막을 짓고 3 년 동안 侍墓(시묘)살이를 하니, 역시 밤마다 호랑이가 나타나 그를흔 지켜 주었다.

 

3 년간의 시묘살이를 마치고 돌아온 田禧(전희)는 그 떠1부터 자신이 부모에게 못다한 효를 마을의 어른들에게 바치기로 작정하였다.

 

당시 마을 사람들은 모두 연일장을 보았는데, 마을 앞에 형산강이 있어 불편하기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겨울철이면 얼음물은 맨발로 건너야 했다. 나이 많은 노인네들이 강을 건널 때는 추운 것도 추운 것이려니와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전회는 장날이면 종일을 물가에 나가 지키고 있다가, 나이 많은 어른들을 일일이 업어서 강을 건너 주곤 하였다.

 

그러나 그 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지 마침내 전희는 조상 대대로 아끼며 가꾸어 오던 자기 집의 재산인 전답을 팔아, 그 돈으로 강 가운데 일곱 개의 돌기둥을 세우고 나무를 걸치어 다리를 놓았다.

 

또한 일 년에도 몇 차례씩 마을어른들을 모시서고 잔치를 베풀며, 웃어른 공경하기를 부모나 친척같이 하니, 이를 아는 사람들이 진희를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고, 마을의 아이며 어른들이 모두 그를 존경하여 다투어 본받으려 했다.

 

그러다 보나 자연, 이 마을 사람들은 한 결같이 인성이 순박하고 어질어 모두가 효자 아난 이가 없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일들이 연일 현감을 통해 관찰사에게 알려지고, 관찰사는 다 시 한양에 있는 숙종 대왕께 품신을 올리게 되니, 숙종 임금께서는 크게 감동하시어 전회에게 通政大夫(통정대부)의 관직을 내리서고 전회의 훌륭한 일들을 기록하여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여러 해 뒤에 효자 전희가 죽으니 온 고을 사람들이 모두 어버이를 잃은 듯 슬피 울고, 나라에서는 마을 가운데 사당을 짓게 하여 그의 영흔을 추앙하였을 뿐 아니라, 효자 田禧(전희)의 효행과 그를 본받은 고을 사람들을 후세에 전 하기 위하여 본시 임강촌이었 던 마을 이름을 효자동이라 고쳐 부르게 하고, 다리를 놓았던 강을 효자강이라 이름하게 하였다.

 

지금의 포항시 효자동(孝子洞)이 바로 거기이며, 전회의 효자비는 현재 포향 효자 초등학교 교정 세워져서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효에 살고 효에 죽었던 조장의 거룩한 얼을 전하는 거울로서, 산 교훈을 오늘도 푸르게 전해 주고 있다.

 

인용 <경상북도 지명유래 총람>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담양(潭陽) 전씨는 남한에 총 26,602가구, 109,21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田宅五(전택오) 선생의 효행.

 

 

종가와 북극성

 

 

울진 고을 용제동 서편에 전 택오(田宅五) 선생의 정려각이 찾는 사람 없이 퇴락된 모습으로 쓸쓸히 서 있다.

그 허물어져 가는 모습에서 모든 행실의 근본이 되는 효가 차차 사라져 가는 세태를 보는 것 같아 안타깝다.

 

선생은 담양 전씨 24세 손으로 1806(순조 6) 정월 팔일, 울진군 호윌 리에서 부친 전 재등(田載登) 공과 모친 영양 남씨(英陽南民) 사이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자는 치극(致極)이며, 호는 신묵재(愼默齊), 조선조 건국 무렵 세상에 나가지 아니하고 숨어서 스스로 절의를 지킨 회정(晦亭) 공의 후손으로, 세상 사람들은 조상의 높은 뜻을 배태하여 태어났다고 하였다.

선생은 여덟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상례를 치르는데, 어린아이답지 않게 성인과 같이 하여 동리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형제는 세 사람이었는데 선생은 둘째였다. 형이 먼저 세상을 뜬 후 선생은 홀로 계신 어머니를 섬기는 데 정성을 다하였다. 아첨 저녁으로 어머니가 기거하시는 방에 들어가 안부를 물어 살피는데 게으름을 피우지 아니하였으며, 넉넉하지 못한 살림살이에도 불구하고, 모친이 좋아하시는 음식을 준비하는데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

 

모친이 병환이 나서 위중하자 처 영양 김씨 (英陽金氏)와 더불어 이렛밤을 수요 장단(壽夭長短 : 오래 삶과 일찍 죽음)을 관장하는 북극성을 향하여 뜬 눈으로 밤을 세우며 비니, 하늘에 그 정성이 통하여 완쾌되었다.

, 세 번 옹저 (癰疽 : 악성의 종기 )의 병이 돌자 모든 사람이 얼굴을 돌 리는 그 더러운 고름 덩어리로 덮인 환부를 입으로 다 빨아 마침내 천수를 누리게 하였다.

종가에 종부가 없어 수십 년간 크고작은 집안일을 몸소 보살피고 감당하여 조금도 때에 늦음이 없이 일을 행하였다.

 

조상의 제사를 받들 때에도 신이 계시는 것 같은 정성으로 하였고, 형제 사이의 우애가 지극하였으며, 스승이 돌아가자 근신하는 태도가 다른 사람에게 본이 되었다.

이와 같이 선생은 평생을 효를 바탕으로 한 삶을 살다 돌아가시니 1871(고종 8) 정월 3, 향년 66 세였다.

 

그 후, 선생의 효행에 감복한 고을 원이 고종 임금께 아뢰니, 1890(광서 16) 10월에 조봉대부 동몽교관(朝奉大夫童蒙敎官)이라는 벼슬을 내렸다. 이에 더하여 정려의 은전을 다시 내렸다.

면암(勉菴) 최 익현(崔益鉉) 선생은 그 정려기에서

 

효도와 우애가 인의 근본이라, 임금을 섬기는 충성으로부터 천하의 모든 선에 이르기까지 다 이 효도와 우애로부터 일어나나니..... 공의 일을 기록 하여 지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글을 외고 그 행실을 상세히 참고해 보아 효도와 우애의 마음이 저절로 왕성히 일어나게 할 것이라.”

라고 하여 그 효행을 기리고 있다.

선생은 구한말 서양의 풍조가 도도히 흘러들어 백성들이 사람으로서의 법 도가 땅에 떨어지는 때를 당하여, 전래의 미풍인 효행의 본을 널리 세상 사 람들에게 보였다. 선생의 효행은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머리를 숙여 존경하 는 마음을 일게 하고 감동하게 하여, 그와 같은 효행을 행하고자 하는 생각 을 갖게 하였다고 하겠다.

 

출전울진군 후포중학교 이 교사

참고 문헌 潭陽田民奉禮公派譜, 蔚珍郡誌, 孝烈行誌

 

 

 

 

출전 <한미족대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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