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張(예산장씨)
본관(本貫): 예산(禮山)
시조(始祖): 장유(張裕)
유래(由來):
예산 장씨(禮山張氏)의 시조(始祖)는 정필(貞弼:장씨 도시조인 태사 충헌공)의 9세손으로 고려에서 예산군(禮山君)에 봉해진 장유(張裕)로 전하며, 그의 아들 영위가 고려 때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거쳐 평장사(平章事)에 올라 나라에 공(功)을 세워 예산군(禮山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예산(禮山)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며 예산(禮山)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장빈(張斌)
유(裕)의 손자(孫子) 빈(斌) 이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했다.
장진영(張鎭永)
빈의 아들 진영(鎭永)이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했다.
장근수(張根秀)
진영의 손자 근수(根秀)가 우복야(右僕射)를 역임하여 가문을 중흥시켰다.
장용일
조선조(朝鮮朝)에 와서 수군안찰사(水軍按察使)를 역임했다.
장경지(張敬持)
군수(郡守)를 역임했다.
장계선(張繼先)
1570(선조 3)∼1619(광해군 11).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예산(禮山). 자는 효백(孝伯). 아버지는 장사랑(將仕郞) 석린(石麟)이며, 어머니는 통사랑(通仕郞) 노공좌(盧公佐)의 딸이다.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하고, 1609년(광해군 1)에 부장 ( 部將 )에 이르렀으나 1611년에 파직되어 임천 ( 林川 )으로 돌아갔다. 다리에 병이 있어 한가롭게 지낸 지 몇 년이 되었으나 무용으로 이름이 있었다.
1618년에 다시 기용되어 명나라의 요청으로 건주위(建州衛) 정벌에 나선 도원수 ( 都元帥 ) 강홍립 ( 姜弘立 )의 휘하에 들어가 심하(深河)에서 싸우다가 김응하(金應河)와 함께 1619년 전사하였다.
효종이 즉위하자 자손들의 상소로 병조참의로 추증되었고, 1681년(숙종 7) 정려를 요구하는 자손들의 청이 있자 예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의 특명으로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장근(張謹)
근(謹)은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하였다.
장경고(張景高)
경고(景高)는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장인덕(張麟德)
인덕(麟德)은 참판(參判)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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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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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
세
|
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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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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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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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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克(극),綱(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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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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基(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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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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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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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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車(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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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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鎭(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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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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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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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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翼(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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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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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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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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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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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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應(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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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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勳(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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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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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천),賢(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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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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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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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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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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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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景(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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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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德(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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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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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예산 장씨(禮山張氏)는 남한(南韓) 에 총 304가구, 1,31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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