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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동장씨(張)-1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張(인동장씨)-1

 

 

본관(本貫): 인동(仁同) (上將軍系)

시조(始祖): 장금용(張金用)

유래(由來):

 

 

인동 장씨(仁同張氏)(上將軍系)

인동 장씨(仁同 張氏)의 시조(始祖) 장금용(張金用)은 태사공(太師公) 장정필(張貞弼)의 원손(遠孫)으로 고려(高麗) 때 삼중 대광(三重大匡)에 올라 신호위 상장군(神虎衛上將軍)을 역임했고, 그의 아들 선(善)이 고려 문종조(文宗朝)에서 금오위 상장군(金吾衛上將軍)을 지냈다. 그 후 자손(子孫)들이 본향지(本鄕地)인 인동현(仁同縣)에 세거(世居)하면서 본관(本貫)을 인동(仁同)으로 삼게 되었다.

 

가문의 중요 인물

 

장국신(張國伸)

시조(始祖)의 증손 국신(國伸)이 고려 때 봉정대부(奉正大夫)로 내사령(內史令)을 거쳐 직사관(直史館:역사를 편수하는 관청의 벼슬)을 지냈다.

 

장위(張偉)

시조의 현손(玄孫) 위(偉)가 통의대부(通議大夫)로 검교군기감사(檢校軍 器監事)에 올라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장안세(張安世)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충신. 본관은 인동 ( 仁同 ). 호는 송은(松隱). 균(均)의 아들이다. 고려 말 정헌대부 ( 正憲大夫 ) 덕녕부윤(德寧府尹)의 관직에 있을 때 함주(咸州 : 지금의 함경남도 함흥)에 있는 갈한천(乫罕川)이 해마다 범람하여 재해가 많았으나 해당 수령들이 그 대책을 세워 해결하지 못하자 특별히 함주부사로 임명되었다.

10여 년 동안 함주에 재임하여 있으면서 치수공사를 완수하였으며, 또 목판으로 길이 70간이나 되는 만세교(萬世橋)라는 다리를 놓았다.

그 뒤 조선이 개국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향리로 돌아갔다. 태조가 친필의 편지로 여러 번 불렀으나 끝내 나가지 아니하고, 아들 중양(仲陽)과 함께 경상북도 구미의 인동에 은거하면서 절의를 지켰다.

≪기우자집 騎牛子集≫의 〈두문동칠십이현록 杜門洞七十二賢錄〉에 16번째로 기록되어 있다. 이상정 ( 李象靖 )이 지은 유허비문(遺墟碑文)을 보면, 그의 거관치적(居官治績)과 애국충절이 잘 기술되어 있다. 인동 옥계사 ( 玉溪祠 )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송은실기≫가 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장중양(張仲陽)

안세의 아들로 김해 부사(金海府使)를 지냈던 중양(仲陽)은 한성좌윤(漢城左尹)의 벼슬을 내려 회유하던 이성계(李成桂)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은거생활(隱居生活)로 일생을 마침으로써 부자(父子)가 함께 인동 장씨의 절맥(節脈)을 이었다.

 

장잠(張潛)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고제(高弟)로 학행(學行)이 뛰어났던 잠(潛)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스승이 사사(賜死)되자 식음을 전폐하며 스승의 억울함을 상소한 후 향리(鄕里)로 돌아가 죽림정사(竹林精舍)를 세워 후진양성에 진력했다.

 

장만(張晩)

1566(명종 21) ∼ 1629(인조 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인동 ( 仁同 ). 자는 호고(好古), 호는 낙서(洛西). 증 이조판서 철견(哲堅)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인 ( 舍人 ) 계문(季文)이고, 아버지는 군수 기정(麒禎)이며, 어머니는 백천 조씨(白川趙氏)로 광침(光琛)의 딸이다.

1589년(선조 22) 생원 · 진사에 모두 합격하고 1591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 · 승문원의 벼슬을 거쳐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그 뒤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 · 형조좌랑 · 예조좌랑 · 전적 · 직강 · 사서 · 정언 · 지평을 역임하고, 1599년 봉산군수로 나갔다.

이 때 서로(西路)에는 명나라 군사가 내왕했으므로 그들에게 급식을 제공하였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마음에 차지 않으면 수령들을 결박하고 욕을 보이는 등 행패가 심했으나 그들을 잘 다스려서 도리어 환심을 샀다. 이러한 일이 조정에 전해져 통정대부 ( 通政大夫 )에 승계(陞階 : 품계가 오름)되고 동부승지에 승진되었다.

이듬해 특별히 가선대부 ( 嘉善大夫 )에 오르고,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다시 조정에 들어와 도승지 · 호조참판 · 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 왕후의 고명주청부사(誥命奏請副使) · 세자책봉주청부사(世子冊封奏請副使)로서 두 차례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수년 동안 안으로는 형조 · 병조의 참판, 밖으로는 전라 · 함경 양도의 관찰사가 되었다.

특히, 함경도관찰사 때에는 누르하치(奴兒哈赤)의 침입을 경고해 방어책을 세우도록 상소했고, 1610년(광해군 2) 동지중추부사로 호지(胡地)의 산천지도를 그려 바쳤다.

이듬해 이항복 ( 李恒福 )의 건의로 평안도병마절도사로 나가 관서민(關西民)들이 편리하도록 군제 ( 軍制 )를 개혁하고, 여진추장에게 공첩(公牒)을 전달해 여연 ( 閭延 ) 등 오래 폐지되었던 4군(郡)이 조선의 땅임을 인식시켜 들어와 사는 여진사람들을 철수하게 하였다.

그 뒤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가 호조참판으로 조정에 들어와 동지의금부사를 겸하였다. 당시 대북의 전횡을 힐책하다가 일시 삭직되었으나 곧 승계되어 형조판서에 올랐다.

1619년 체찰부사가 되어 요동 파병에서 패망해 서쪽 국경이 동요되자 이의 무마에 힘썼으며, 왕명으로 찬획사(贊 怜 使) 이시발 ( 李時發 )과 함께 대후금정책을 협의하였다. 이어 숭정대부 ( 崇政大夫 )에 오르고 병조판서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공명정대한 공사처리가 도리어 권간(權奸)들의 시기를 받자 벼슬을 포기할 각오로 시정(時政 : 당시의 실정)을 극론하다가 광해군의 노여움을 사서 병을 칭탁하고 통진으로 물러갔다. 다음해 인조반정으로 새 왕이 등극하자 도원수에 임명되어 원수부를 평양에 두고 후금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 ( 李适 )이 반란을 일으키자 각지의 관군과 의병을 모집해 이를 진압하였다. 이 전공으로 진무공신 ( 振武功臣 ) 1등에 책록되고 보국숭록대부 ( 輔國崇祿大夫 )에 올라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어 우찬성에 임명되고 팔도도체찰사로 개성유수를 겸했으며, 그 뒤 병을 구실로 풍덕 별서(別墅)로 내려갔으나 왕의 준책(峻責)을 받고 다시 조정에 들어와 병조판서로 도체찰사를 겸하였다.

그러나 1627년 정묘호란에 후금군을 막지 못한 죄로 관작을 삭탈당하고 부여에 유배되었으나 앞서 세운 공으로 용서받고 복관되었다. 문무를 겸비하고 재략이 뛰어났다 한다. 1635년 영의정에 추증되고, 통진의 향사 ( 鄕祠 )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 낙서집 ≫ 이 있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장돈(張暾)

?∼1627(인조 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인동 ( 仁同 ). 과거에 등제한 적은 없으나 인조반정 시 정사공신 ( 靖社功臣 ) 2등에 책록됨으로써 관직에 나갔다. 개천군수를 역임하다가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자원하여 안주전투에 참여하였다.

당시 상관인 남이흥 ( 南以興 )에게 성을 지킬 군사는 결국 민정(民丁)이니 포(砲)의 배치를 백성 중심으로 하자는 건의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마침내 성이 함락되기에 이르렀는데, 그는 끝까지 성을 지키다가 전사하였다.

이 때의 공훈으로 1627년 옥산군(玉山君)에 봉하여졌으며, 그 뒤 1681년(숙종 7) 안주에 순절자를 위한 충민사 ( 忠愍祠 )가 건립되었을 때 그곳에 배향되었다.

 

장사진(張士珍)

?∼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의병장. 어려서부터 호협심이 대단하여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여 남이 당하는 것을 보고는 앞뒤를 가리지 않고 뛰어들어 손해를 보는 일이 가끔 있었으나 개의하지 않았다. 이웃사람들은 의협인(義俠人)이라고 불렀다.

재주도 있어 군위향교의 교생이 되어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1592년 때마침 임진왜란이 일어나 승승장구하는 왜세를 당하지 못하여 국토는 초토화되어갔다.

충의가 남다른 터라 교생들과 상의하여 의병을 일으키고 사방에 격문을 보내 나라가 위태로울 때 충의의 마음을 내어 나라를 구하자고 권하니 모여든 의사가 수백명이 되었다. 의병을 인솔하여 고을의 주위를 돌면서 우선 고을만이라도 지키기로 하고 적을 만나는 대로 격살하여 막대한 전과를 올렸다.

왜적들도 장사진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군위에는 들어오지 못하고 통과할 일이 있어도 길을 우회하여 다녔다. 어느날 왜적이 복병을 해놓고 유인하는 것을 모르고 추격하다가 적의 함정에 빠져 사면으로 포위되었으나 오히려 큰 소리를 지르며 역전하였다.

적병이 휘두르는 칼에 한쪽 팔이 잘렸으나 굴하지 아니하고 외팔로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전사하였다. 뒤에 그 공으로 수군절도사에 추증되었다.

 

장봉한(張鳳翰)

1566(명종 21) ∼ 1644(인조 22). 조선 중기의 의병. 본관은 인동 ( 仁同 ). 자는 문거(文擧), 호는 개옹( 桿 翁). 아버지는 참의 곤(崑)이며, 정구 ( 鄭逑 )의 문인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적군이 성주를 함락시키고 승 찬희(贊熙)와 찬숙(贊夙)에게 주사(州事)를 맡기고 향도(嚮導)로 삼았다. 찬희는 곧 잡혀 주살되었지만, 찬숙은 더욱 창궐하여 관병이 이를 제어하지 못하므로, 총병(摠兵) 유정(劉綎)과 의병장 임계영 ( 任啓英 ) 등이 전세가 불리하다 하여 물러나려 하자 이를 말리고 계교를 써서 찬숙을 사로잡아 의병장 김면 ( 金沔 )에게 넘겼다.

김면이 그 공을 행재소에 알리고자 하였으나 그가 극구 사양하자 당시 사람들이 의롭게 여겼다. 아우 홍한(鴻翰)과 사촌아우 사진(士珍)과 더불어 일문삼의사(一門三義士)라 칭하여졌다. 성주의 이양사(伊陽祠)에 제향되었다.

 

장홍한(張鴻翰)

상주 판관(尙州判官)으로 외적과 싸우다 전사함.

 

장현광(張顯光)

1554(명종 9) ∼ 1637(인조 15).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인동 ( 仁同 ).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 아버지는 증이조판서 열(烈)이며, 어머니는 경산 이씨(京山李氏)로 제릉참봉(齊陵參奉) 팽석(彭錫)의 딸이다. 경상북도 인동에서 성장하였다.

14세 때인 1567년(명종 22)부터 진사 장순(張 肋 )에게 배웠고, 18세 때 〈 우주요괄첩 宇宙要括帖 〉 을 지어 대유(大儒)의 면모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침식을 잊으며 학문에 정진해 23세 때인 1576년(선조 9)에 재능과 행실이 드러나 조정에 천거되었다.

1591년 겨울 모부인의 상중에 전옥서참봉(典獄署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다음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오산 ( 金烏山 )으로 피난하였다.

1594년 예빈시참봉 · 제릉참봉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해에 유명한 〈 평설 平說 〉 을 지었다. 다음해 가을 보은현감에 임명되어 부임했으나 12월 관찰사에게 세 번씩 사직을 청했고, 이듬해 2월 또 세번 사직을 청한 뒤 허가를 기다리지 않고 향리에 돌아갔다가 직무유기 혐의로 의금부에 잡혀갔다.

1597년 여러 차례 그를 조정에 추천했던 유성룡 ( 柳成龍 )을 만났는데, 그의 학식에 감복한 유성룡은 아들을 그 문하에 보내어 배우게 하였다. 1601년 경서교정청낭청(經書校正廳郎廳)에 임명되었고 여러 번 부름을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다.

1602년 거창현감 · 경서언해교정낭청(經書諺解校正郎廳)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다가 그해 11월 공조좌랑으로 부임해 ≪ 주역 ≫ 교정에 참가했고, 형조좌랑에 옮겨졌으나 이듬해 2월 돌아왔다.

1603년 용담현령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곧 의성현령에 임명되어 부임했으나 몇 달만에 돌아갔다. 1604년 순천군수, 1605년 합천군수, 1607년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55세 때 〈 주역도설 周易圖說 〉 을 지었고, 68세 때 〈 경위설 經緯說 〉 을 지어 ‘ 이체기용 (理體氣用) ’ , 즉 ‘ 이경기위설(理經氣緯說) ’ 을 제창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김장생 ( 金長生 ) · 박지계(朴知戒)와 함께 여러 번 왕의 극진한 부름을 받았고, 사헌부지평 · 성균관사업 등에 여러 번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다음해 사헌부장령으로 부임해 왕을 알현했고, 곧 사헌부집의 · 공조참의로 승진되어 경연 ( 經筵 )과 서연 ( 書筵 )에 참석하도록 부탁받았으나 사양하고 돌아갔다. 이어 이조참의 · 승정원동부승지 · 용양위부호군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626년(인조 4) 형조참판에 특제되어 마지못해 사은했고 계속해 사헌부대사헌 · 부호군에, 1628년 이조참판, 1630년 다시 대사헌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지중추부사 · 의정부우참찬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여러 군현에 통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게 하고 군량미를 모아 보냈다. 그러나 다음해 2월 삼전도 ( 三田渡 )에서의 항복 소식을 듣고 세상을 버릴 생각으로 동해가의 입암산(立 末 山)에 들어간 지 반년 후에 죽었다. 1655년(효종 6) 의정부좌찬성, 1657년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그는 일생을 학문과 교육에 종사했고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으나 당대 산림의 한 사람으로 왕과 대신들에게 도덕정치의 구현을 강조했고, 인조반정 직후에는 공신들의 횡포를 비판하고 함정수사를 시정하게 하는 등의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그는 정구 ( 鄭逑 )에게 수학한 적이 있어 퇴계학파로 분류되고 있으나 이기론 · 심성론 등에서는 이황 ( 李滉 )의 학설과 상이한 점이 많았다.

그는 이(理)와 기(氣)를 이원적으로 보지 않고 합일적 혹은 한 물건의 양면적인 현상으로 파악하였다. 그의 〈 경위설 〉 에서는 이를 경(經)으로, 기를 위(緯)로 비유해 이 · 기가 둘이 아니고 체(體)와 용(用)의 관계에 있음을 주장하였다.

심성론에서는 도심(道心)을 ‘ 미발지성(未發之性) ’ 으로, 인심을 ‘ 이발지정(已發之情) ’ 으로 파악했으나 이미 발한 뒤에도 역시 도심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즉, 도심이 인심 가운데 있고 인심이 도심 가운데 있어 별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또한 그는 사단(四端)이 칠정(七情)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칠정 가운데에서 본성을 따라 발현해 거짓되지 않은 것이 사단일 뿐이라 하여 사단의 순수고유한 발현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철학은 명나라의 나흠순(羅欽順)과 이이(李珥)의 이기심성론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남인계열의 학자들 중에서는 매우 이색적이고 독창적인 학설이다.

저서로는 ≪ 여헌집 ≫ 11권, ≪ 속집 ≫ 5권, ≪ 성리설 性理說 ≫ 6권, ≪ 역학도설 易學圖說 ≫ 9권, ≪ 용사일기 龍蛇日記 ≫ 2권 등이 있다. 성주의 천곡서원 ( 川谷書院 ), 서산의 여헌영당(旅軒影堂), 인동의 동락서원(同洛書院), 청송의 송학서원(松鶴書院), 영천의 임고서원 ( 臨皐書院 ), 의성의 빙계서원 ( 氷溪書院 )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장붕익(張鵬翼)

숙종(肅宗)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훈공을 세웠다.

 

장태소(張泰紹)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역임했다. 태소(泰紹),

 

장응일(張應一)

숙종 때 우승지(右承旨)와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부제학(副提學)을 지내고 <청명직 절(淸名直節)>의 명신으로 이름났다.

 

장경우(張慶遇)

병자호란 때 인동(仁同)에서 의병장(義兵將)으로 활약했다.

 

장석룡(張錫龍)

현종 (顯宗) 때 정시문과에 장원하여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올랐다.

 

장태수(張泰秀)

1841(헌종 7) ∼ 1910. 조선 말기의 문신 · 순국지사. 본관은 인동 ( 仁同 ). 자는 성안(聖安), 호는 일유재(一 孵 齋). 전라북도 김제 출신. 내부협판 한두(漢斗)의 아들이다.

1861년(철종 1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에 제수된 뒤 전적 · 선략장군부사과(宣略將軍副司果), 예조정랑 · 사헌부지평 · 정언 · 장령 등을 역임하였다. 1867년(고종 4) 양산군수에 임명되어 부국양병에 주력하고 임진왜란 당시 순절한 조영규 ( 趙英珪 )의 제단을 고쳐 제향하였다.

당시의 공으로 통정대부 ( 通政大夫 )에 제수되고 1872년 고종을 수행하여 송도에 다녀왔다. 그 뒤 병조참의 ·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 · 동부승지 ·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 춘추관수찬관(春秋官修撰官) 등을 지내고, 1894년 동학란 중에 고산현감에 부임하였다.

1895년 단발령이 내리자 사직하고 스스로 남강거사(南岡居士)라 하고 은거하였다. 그러나 1904년 이후 다시 관계에 진출하여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 시종원부경(侍從院副卿) · 칙임관3등에 임명되었다.

1910년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그는 일제의 회유책에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불충과 불효한 죄를 죽음으로 씻는다고 단식하여 24일만에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장지연(張志淵)

1864(고종 1)∼1921. 조선 말기의 언론인·애국계몽운동가. 본관은 인동 ( 仁同 ), 초명은 지윤(志尹). 자는 화명(和明)·순소(舜韶), 호는 위암(韋庵)·숭양산인(嵩陽山人). 경상북도 상주 출신. 용상(龍相)의 아들이며. 장석봉(張錫鳳)의 문인이다.

1894년(고종 31) 진사가 되었다. 1895년 8월 일제의 민비시해 만행이 자행되자 의병의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지어 각처에 발송하였다. 1896년 아관파천 ( 俄館播遷 )이 일어나자 고종의 환궁을 요청하는 만인소 ( 萬人疏 )를 기초하였다.

한편, 사례소(史禮所) 직원으로 ≪대한예전 大韓禮典≫ 편찬에 참여하고, 이듬 해 내부주사(內部主事)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였다. 같은 해 7월 독립협회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1898년 9월 ≪황성신문 皇城新聞≫이 창간되자 기자로 활약하였다. 같은 해 11월 만민공동회 ( 萬民共同會 )의 간부로 맹활약하다가 그 해 말 독립협회·만민공동회가 해산당할 때 체포, 투옥되었다.

1899년 ≪시사총보 時事叢報≫의 주필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출판사인 광문사(光文社)를 설립해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 牧民心書≫와 ≪흠흠신서 欽欽新書≫ 등을 간행하였다. 1901년 황성신문사의 사장에 취임해 민중 계몽과 자립정신 고취에 진력하였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황성신문≫ 1905년 11월 20일자에 〈시일야 방성대곡 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제목으로 국권침탈의 조약을 폭로하고, 일제의 침략과 을사5적을 규탄하면서, 국민의 총궐기를 호소하는 논설을 써서 일제 헌병대의 사전검열을 거치지 않고 전국에 배포하였다. 이 일로 체포, 투옥되어 65일 후 석방되었으며, ≪황성신문≫도 압수 및 정간 처분되었다.

이 후 1906년 윤효정 ( 尹孝定 )·심의성(沈宜性)·임진수(林珍洙)·김상범(金相範) 등과 함께 대한자강회 ( 大韓自强會 )를 조직, 국권 회복을 위한 본격적 애국계몽운동을 시작하였다. ≪대한자강회월보≫·≪조양보 朝陽報≫ 등에 전국민이 각성해서 실력을 배양해 구국운동에 나설 것을 호소하는 논설을 다수 발표하였다.

1907년 1월 대구의 김광제(金光濟)· 서상돈 ( 徐相敦 ) 등이 국채보상운동 ( 國債報償運動 )을 전개하였다. 이에 이 운동을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시키고자 신문과 잡지 등에 다수의 논설을 게재해 전국민이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같은 해 7월 일제가 헤이그특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 양위시키고, 애국계몽운동에 대한 탄압법들을 잇달아 제정하자, 대한자강회 회원들과 함께 격렬한 반대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일로 인해 8월 19일 대한자강회는 강제 해산되었다. 그 후 11월에 권동진 ( 權東鎭 )·남궁 억(南宮檍)· 여병현 ( 呂炳鉉 )· 유근 ( 柳瑾 )· 오세창 ( 吳世昌 ) 등과 함께 대한협회 ( 大韓協會 )를 발기해 조직하였다.

1908년 2월 일제의 탄압을 피해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 정순만 ( 鄭淳萬 ) 등이 간행하고 있던 ≪해조신문 海潮新聞≫의 주필에 취임하였다. 재정난으로 ≪해조신문≫이 폐간되자, 상해(上海)와 난징(南京) 등 중국 각지를 유랑하다가 양쯔강의 배 안에서 일제의 첩자로 보이는 괴한의 습격을 받고 부상당해 8월에 귀국하였다.

귀국 즉시 ≪해조신문≫에서의 격렬한 일제침략 규탄이 문제되어 일제 헌병대에 체포되었다가 얼마 뒤 석방되었다. 1909년 1월 영남지방의 교육구국운동 단체인 교남교육회 ( 嶠南敎育會 )의 취지문을 지어 지원했으며, 학회의 편집원으로 활약하였다.

같은 해 2월 대한협회의 〈정정부문 呈政府文〉을 지었으며, 신민회 ( 新民會 )에도 가입, 활약하였다. 1909년 10월 진주에서 발행되는 ≪경남일보≫의 주필로 초빙되어 언론구국운동을 다시 계속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나라를 병탄함에 따라 항의하는 선비들이 잇달아 자결하자, 황현 ( 黃玹 )의 〈절명시 絶命詩〉를 ≪경남일보≫에 게재해 일제를 규탄하였다. 이로 인해 ≪경남일보≫가 폐간되어 활동 무대를 잃었다.

1911년 이후 향리에 칩거하면서 나라를 빼앗긴 울분을 통탄하다가 1921년 마산에서 죽었다. 묘지는 창원시 구산면 현동리 독마산(禿馬山)에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저서는 ≪증보대한강역고 增補大韓疆域考≫·≪유교연원 儒敎淵源≫·≪위암문고 韋庵文稿≫·≪대한최근사 大韓最近史≫·≪동국역사 東國歷史≫·≪대동문수 大東文粹≫·≪대한신지지 大韓新地志≫·≪대한기년 大韓紀年≫·≪일사유사 逸事遺事≫·≪농정전서 農政全書≫·≪만국사물기원역사 萬國事物紀原歷史≫·≪소채재배전서 蔬菜栽培全書≫·≪화원지 花園志≫·≪숭산기 嵩山記≫·≪남귀기행 南歸紀行≫·≪대동시선 大東詩選≫ 등 많은 작품이 있다. 그의 저작을 수집해 ≪장지연전서≫가 간행되었다.

 

장지영(張志暎)

1887(고종 24) ∼ 1976. 국어학자 · 교육자 · 언론인. 본관은 인동 ( 仁同 ). 호는 열운(洌雲). 서울 출신. 1891년부터 가숙(家塾)에서 한문을 수학하다가, 1903년 4월 관립 한성외국어학교 ( 漢城外國語學校 ) 한어과(漢語科)에 입학, 1906년 6월에 졸업하고 모교에서 부교관으로 근무하였다.

1908년 7월부터 1911년 6월 사이에 주시경 ( 周時經 )의 문하(사저)에서 국어학을 연구, 여기서 나라사랑의 정신과 학문의 기초를 다졌다.

1908년 9월 사립 정리사(精理舍, 數理專門)에 입학, 1911년 3월에 졸업하였다. 그뒤 곧 교육계에 종사하기 시작하여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 1911. 7. ∼ 1912. 5.) 교사(국어 · 수학), 서울의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 1912. 9. ∼ 1914. 8.) 교사(국어 · 수학) 겸 학감, 경신중학교(儆新中學校) 교사 (국어 · 수학)겸 교무주임을 역임하였다.

1912년경에 유지들과 ‘ 물산장려회 ’ 를 조직하여 무명을 손수 짜서 옷을 지어 입는 운동을 벌였으며, 1913년경에는 독립운동단체의 하나인 청년비밀결사대 ‘ 흰얼모(白英社) ’ 를 조직하여 국내는 물론 상해 임시정부와 연락을 통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1919년 2월 28일, 그는 그의 동지 조규수 · 김정섭 · 신경우 · 노대규 등과 교남동 자택에 모여 고종황제의 승하 내막을 폭로하여 국민들의 의분을 불러일으키기로 하고, 조선일보 정치부장 조규수가 국민대회 포고문을 지어 시내 곳곳에 붙여 3 · 1운동을 측면에서 도왔다.

또한, 1920년 대동단(大同團) 당수 전협 ( 全協 )의 부탁으로 의친왕 ( 義親王 )을 상해로 모셔가서 왕정을 세우려는 계획을 온 국민에게 알리기 위한 독립선언문을 기초하기도 하였다.

1921년 12월, 휘문의숙(徽文義塾)에서 임경재(任暻宰) · 최두선(崔斗善) · 이규방(李奎昉) · 권덕규(權悳奎) · 이승규(李昇圭) · 신명균 ( 申明均 ) 등과 더불어 국어 · 국문을 체계 있게 연구하기 위하여 한글학회의 전신인 ‘ 조선어연구회 ’ 를 조직하였다.

1926년 10월부터 1931년 7월 사이에는 조선일보 기자 겸 지방부장 · 문화부장 · 편집인으로 근무하면서 문맹퇴치와 한글보급운동을 맹렬히 펴 큰 성과를 올렸다.

1927년 1월 신석우(申錫雨) · 조병옥(趙炳玉) · 안재홍(安在鴻) 등과 ‘ 신간회 ( 新幹會 ) ’ 를 조직하고 조사부 간사 일을 보며, 동시에 조선일보에 신간회란을 만들어 각 지방의 활동상황을 소상히 알렸다.

그 뒤 총독부 언문철자법 심의위원(1928. 5. ∼ 1930), 조선어학회 ‘ 한글맞춤법통일안 ’ 제정위원(1930. 12. ∼ 1933. 10.), 서울 양정중학교(養正中學校) 교사(국어 · 중국어, 1931. 7. ∼ 1942. 7.), 조선어학회 조선어표준어사정위원회 위원(1936. 1. ∼ 1937. 8.) 등으로 활약하였다.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홍원과 함흥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 때 그는 한글동지 30여명과 함께 홍원경찰서에 갇혀서 모진 고문과 심문을 받고 잡힌 지 1년 만에 함흥형무소로 갔으며, 1944년 10월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함흥에다 거주제한을 당하여 바로 떠나지 못하다가 3년 만에 귀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곧 경성헌병대에 또 잡혀서 얼마 동안 갇혀 있다가 풀려나왔다. 그뒤 양주땅에서 농사를 짓다가 광복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다.

미군정청 문교부 편수국 부국장(1945. 10. ∼ 1948. 8.), 조선어학회 제6대이사장(1946. 2. ∼ 1949. 9.), 국립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강사(1946. 10. ∼ 1947. 6.), 세종중등국어교사양성소 소장(1948. 9. ∼ 1951)을 지냈다.

1948년 9월 연희대학교 교수로 부임하고,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대우도 겸하여 근무하였다. 1950년 12월, 6 · 25중 제주도로 피난하여 제주여자고등학교 · 제주농업고등학교 강사, 제주대학 설립위원, 제주대학 교수, 제주대학 문학과장을 지내다가, 1952년 11월 연희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에 복직하였다.

1956년 10월 이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사를 지냈다. 1957년 3월 이화여자대학교 교수직을 사임하였고, 1958년 3월 연희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하였다. 1957년 9월 문교부장관으로부터 국어 · 국문연구발전공로 표창을 1958년 서울시교육회장으로부터 교육공로표창을 받았다.

1958년 대통령으로부터 교육공로표창을, 대한교육연합회장으로부터 교육공로표창을 받았고, 1962년 광복절에 대통령으로부터 문화훈장을, 1962년 한글날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부터 한글공로표창을 받았다. 1964년 2월 학문의 업적과 한글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연세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7년 12월 건국 포장을 추서받았다.

주요저서로는 ≪ 조선어전 ≫ (중등말본책, 유인본, 1924) · ≪ 조선어철자법강좌 ≫ (활문사, 1930) · ≪ 국어입문 ≫ (한글사, 1946) · ≪ 옛글 ≫ (고등학교 교재, 정음사, 1946) · ≪ 향가 ≫ (연희대학교 강의안, 유인본, 1955) · ≪ 중국어 ≫ (고등학교 교재, 김용현과 공저, 정음사, 1957) · ≪ 홍길동 · 심청전 ≫ (주해서, 정음사, 1964)과 유고를 정리, 간행한 ≪ 이두사전 ≫ (정음사, 1976)이 있다.

 

장면(張勉)

민주당을 조직하여 부통령(副統領)에 당선되었던 운석(雲石) 면(勉)이 유명하다.

 

장택상(張澤相)

1893(고종 30)∼1969. 정치가. 호는 창랑(滄浪). 경상북도 칠곡 출신. 경상도관찰사 승원(承遠)의 아들이다. 16세에 영국 에든버러대학에 유학하였다가 중퇴하고 귀국, 청구회(靑丘會) 회장을 지냈다.

광복을 맞아 수도경찰청장·제1관구 경찰청장을 지내면서 치안유지에 공을 세웠다.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초대 외무부장관에 취임하였고, 1950년 고향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그해 민의원 부의장이 되었다.

1950년∼1951년 유엔총회 한국대표로 참석하고, 1952년 국무총리가 되었다. 1954년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되었고, 1956년 원내국민주권옹호투쟁위원장을 지냈으며, 1958년 제4대 민의원에 당선되었다. 1960년 제5대 민의원에 당선되었으나 5·16군사쿠데타로 국회가 해산되었다.

그뒤 제6대 선거에서 공화당후보에게 패하였으며, 한일협정반대투쟁위원회에 참여하고 신민당고문을 지내기도 하였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지고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장기영(張基榮)

한국일보(韓國日報)와 서울경제신문을 창간하고 국제올림픽조직위원과 남북조절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던 백상(百想), 기영(基榮) 등이 인동 장씨(仁同張氏)를 더욱 빛냈다.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인동 장씨는 남한(南韓)에 총 129,731가구, 538,80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張顯光(장현광)선생의 일화.

속솟바위

그는 보은현감으로 잠시 재직하는 동안 학문과 덕이 높아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가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자 사람들은 아쉬워하며 전별의 선물을 가지고 왔다. 하지만 그는 모두 물리치고 부임할 때와 같이 초라한 모습으로 길을 떠났다.

보은군의 경계지역까지 왔을 때 길가에서 쉬다가 문득 그는 아내의 치마 밑으로 나온 비단 속곳을 보았다. 연유를 물으니 보은 백성들이 선물로 준 것이라 하므로, 그는 “ 청빈을 낙으로 살아왔는데 남에게 폐를 끼쳤다. ” 고 탄식하였다.

그러자 아내는 속곳을 벗어 바위에 걸쳐놓으며, “ 보은에서 받은 물건을 보은에 돌려준다. ” 고 하고는 길을 떠났다.


그 뒤 이 바위를 ‘ 속곳바위 ’ 혹은 ‘ 치마바위 ’ 라 부르게 되었으며, 사람들은 장현광을 기리는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
                                                                                                          <출전: 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미래를 예언

장현광 선생이 壬辰倭亂(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진전 까지 義城(의성)縣令(현령)으로 있었는데, 그 때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왜란이 임박하던 때에 주미들의 제소를 처결하던 중, 돈을 빌린 채무자와 채권자의 쟁송사건을 판결 할 때 이색적인 말을 해서 세상을 어리둥절하게 하였다.

借用(차용)한 사람을 향해
「세상에 바른 마음을 가지고도  옳게 살기 힘들거늘 너는 어찌하여 남의 돈을 쓰고도 갚을 생각을 그렇게도 하지 않는가?」하고 크게 꾸짖어 즉시 갚도록 명령을 했다.

다음에는 縣令(현령) 판결에 기뻐하는 빌려준 사람에게
「남에게 돈을 빌려 줄 때에는 반드시 되돌려 받아야 할 일이나 世上(세상)에는 그렇지 못한 形便(형편)도 許多(허다)히 있거늘 너희 사이에 좋던 人情(인정)은 이번 일로서 너무도 變質(변질)되었으니 딱하다.」하였고 이어서
「그 돈을 되돌려 받아 보았자 너도 그 돈으로 별 수가 없겠으니 그 일을 어찌 하겠나?」고 뜻 모를 말을 하여 모두가 어리등절 하였다.

그런데 그 뒤에 壬辰倭亂(임진왜란)이 이어서 터졌고나니, 그때 서야 張顯光(장현광)성생의 眞意(진의)를 사람들은 알 수가 있었다.

온 강산이 초토화되는 판국에 무거운 엽전 꾸러미가 아무리 많이 있어도 별로 소용없는 물건이되었다.
돈은 평화로울 때 가치가 있지 전란 속에서는 별로 귀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豫言(예언)은 5월 飛霜(비상)을 짐작하여서 南原(남원) 들에 公同(공동) 못자리를 하도록 권영 한하였다.
서리가 내리던 밤에 못자리 옆에 사람들을 모아 크게 불을 피우게 하고 술과 안주를 내려서 즐겁게 놀게 하였다. 
 날이 새고 보니 天地(천지)는 때 아닌 서릿발이 내려 높은데 못자리는 모두 얼어죽고 말았는데 들에 공동으로 만든 못자리는 파랗고 생생하며 무사히 구재되었다고 한다.
밤개 피운 불의 연기가 서리를 막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해에 벼농사를 무사히 잘 지을 수가 있었다고 한다.

 

3

검소한 선생

선생은 평소 번거로운 것을 득도로 싫어하시고 조용한 것을 좋아하였으며, 검소함을 편안히 여기고 살았다.
평생 비단옷을 몸에 걸치지 아니하고, 화려한 장식을 멈에 지니지 아니하였으며, 거처하는 집에는 편액과 그림이 없으며, 뜰에도 꽃나무와 관상수가 없었다.
다만 책상위에 책 몇 권만 있을 뿐 사치스러운 장식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담 곁에 매화 두 그루 만 마주보고 서있었을 뿐이었다.
영남 제일의 석학 여현 선생은 이렇게 검소하게 사르셨다.

 

 

張漢相(장한상)  선생의 일화.

울고개

이조 숙종(肅宗) 때에 함경북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낸 장한상이 의성(義城) 지금의 비산동(飛山洞) 청석 마을 출신인데 권리를 내세워 나라의 큰 힘을 빌어서 고향 지방에 수리사업을 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지금의 선창 마을에 큰 못을 막기로 결심하였고, 곧 공사가 시작 되었다. 지방의 인력을 최대한으로 동원하였으나 공사가 너무 커서 무리한 부역으로 일이 지연되자, 멀리 전라도의 장정까지도 동원하여 왔다는 말이 있단.

공사장에는 면회가 지극히 제한되어 있어서 부역으로 동원되어 온 사람들의 가족은 가족을 직접 만라 수가 없어 여기 높은 고개에 와서 공사장에서 일하는 혈육들을 멀리서 바라다보기라도 하고 싶어 했다.
날마다 멀리서 가까이서 찾아오는 가족들은 여기 산천에 모여들고 애타게 지켜보다가 울면서 넘어 가고, 또한 울면서 찾아온 고개라 하여 그 고개의 이름을 「울고개」라 하였다고 한다.

불국사에서 석가탑을 만들 적에 멀리 백제(百濟) 땅에서 아사녀(阿斯女)가  그의 남편 아사달(阿斯達)을 찾아 와서 서라벌의 영지(影池)에 가서 기다림에 지쳐 간 애화(哀話)가 생각 난다.

을고개의 전설은 진정 슬픈 옛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張侯杞(장후기) 선생

 

藥泉(약천) 張侯杞(장후기) 先生 遺訓(유훈)

爲國忠誠 孝友篤實 爲民致力

齋家有度 和睦親戚 救恤隣里

治産勤儉 處事詳愼 不求名利

早就塾師 接人務恭 文藝超倫

 

<해석>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형제간에 우애 있고 남을 위해 착한 일을 많이 하라.

법도로서 가정을 다스리고 친척 간에는 화목하며, 이웃을 도와라.

검소와 근면으로 재산을 관리하고 모든 일에 산중하고 정확하며 쓸데없이 명리를 구하지 말라.

일찍 서당의 선생을 찾아 공부를 하고, 사람을 대함에 공경으로 하고 윤리와 도덕을 잘 지켜라.

 

 

 

 

張錫奎(장석규)의 일화.

 

아버지의 누명을 씻다

 

효자 장석규(張錫奎)1800(청조 24) 인동부의 옥중에서 그 지방의 선비 장시호의 둘쩨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시호는 성품이 곧고 정직하여 거짓말이나 옳지 못한 일을 보 면 조금도 용서하지 않으며, 옳은 일에는 서슴지 않고 앞장서는 의리를 중 히 여기는 모범척인 선비였다.

 

1800년 정조 임금이 돌아가셔서 국상을 당하였을 때, 그는 고기반찬을 삼가하고 초하룻날과 보름날에는 임금이 계신 곳을 향해서 곡을 하여 슬픔을 표시했다.

 

이 무럽에 인동 부사 이모는 자기 아버지 생일을 맞이해서 많은 음식을 차려 놓고 많은 사람을 청해서 큰 잔치를 벌여 고기와 술로 흥청을 부리고 가무로 즐기고 있었다.

 

이 날 잔치에 서호도 초청을 받았으나 가지 않고 집에 있었더니 부사가 사람을 시키어 고기와 떡, 그러고 술을 보내온 것을 보고 옳지 못한 행동을 하는 일로 울화가 치밀어서 심부름 온 사람에게

임금께서 돌아가신 상중에 이럴 수가 있는가? 예절에 어긋나는 이런 음식은 받을 수가 없으나 이 음식은 가져가거라.”

하고 타일러서 돌려보냈더니 부사는 되돌아온 음식을 받아 들고 매우 어짢게 생각하고 한편 부끄럽게 생각해서

 

이놈 ! 어다 두고 보자.’

하는 앙심을 품게 되었다.

 

추석 명절이 가까워지자 부사는 시호에게 앙갚음을 하려고 까닭도 없이

 

소를 잡아 추석 명절에 쓰려고 고기를 마련하였지 ?”

하고 시호를 관아로 잡아들었다.

 

부사는 박 모라는 사람과 작당하여 소머리를 몰래 서호의 집 뒤 대밭에 묻어 두었던 것이다. 관청의 나졸들을 데라고 가서 대밭을 파 보게 하여

이래도 소콜 안 잡았다고 하겠는가?” 하였다.

 

시호가 잡혀 가자, 시호의 형은 두 아우를 데리고 관아로 가서 향의 하니 너희들은 국법을 어겼더니 또 난동을 부리는구나.” 하고 죄목을 보태어 경상 감사에게 올려서 시호가 처형되고 처자는 천라도로 귀양가게 되었다.

 

석규의 어머니 박씨는 석규를 낳은 지 한 달도 못 되어 그를 강보에 싸가지고 머나멈 남쪽 바다 구석진 강진 땅의 외로운 섬에 갔다.

3 남매를 거느리고 이집 저집의 허드렛일이나 하고 바느질품을 팔아 겨우 목숨을 유지하는 원 한 맺힌 세월을 보내면서도 향상 어린 아들에게 이르기를

화를 업던 그 날 내가 죽지 못하고 오늘까지 살아온 것은 오로지 너희들 형제가 있기 때문이 다. 그려니 네가 어서 자라서 어떤 수를 쓰든지 아버지의 원한을 풀어드린 다면 나는 죽어도 한이 없겠다.” 라고 타일렀다.

 

그런데, 귀양살이하는 처지에 더구나 외로운 섬에서는 글을 가르칠 방법도 막연하여 어머니 배씨는 한문책 한 권 구할 길이 없어서 귀양올 때 몰래 가져왔던 한글로 쓴 소학이 라는 책을 기지고 밤늦게까지 가르치고 틈만 있으면 집안의 내력이나 사람다운 행실과 몸가짐에 대한 교육도 잊지 않고 가르치니, 어린 나이에도 어머니께 효성이 지극하며, 이웃 어른에게 대한 예절이 바르고 칭찬 받는 어린이로 자라가고 있었다.

 

석규의 집이 귀양살이 온 것을 잘 알고 있는 마을의 불량배들은 석규의 집에 와서 이유 없이 치근거리며 무례하게도 석규의 어머니와 누나를 희롱 하며 성가시게 굴리기 때문에 이들 모녀는 이 구석 저 구석으로 피해 다니며 어린 아들이 빨리 자라치만 기다리고 있던 중 석규가 9 살이 되던 어느 날, 강진 고을의 관속들 몇 사람이 엄큼한 마음을 먹고 배씨와 17 살 된 석규의 누이를 욕보이려고 섬에 들어온 것을 미리 알아챈 모녀는 바닷가로 몰래 빠 져나가서 캄캄한 밤중에 바다에 몸을 날려 모녀는 서로 껴안고 영원히 못 올 길을 떠나고 말았다.

 

이제 어린 석규는 아무도 그를 돌 불 사람이 없는 외로 운 고아로 된 것이다. 고아가 된 석규는 늘 망음속으로

내가 죽으면 이 원한을 누가 씻으며 우리의 가문은 누가 다시 일으키겠는가?’ 하고 열심히 살아갔다.

 

석규는 아버지 어머니의 원한을 풀어드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무식해 서는 안 되며 가난해도 어려운 일을 감당할 수 없으나, 글을 배우고 돈을 모아야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이웃집 아이들이 배우는 글소리플 듣고 책을 끼고 길거리로 나가 지나는 사람을 붙잡고 글자를 익히고 뜻을 물어서 독학 으로 經書(경서)를 통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열심히 공부하고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해가며 부지런히 저축하여 자립할 수 있게 되었고 이웃 사람들의 주선으로 결혼도 하게 되었다.

 

결혼 한 석규는 부친의 얼굴도 보지 못하였고 부모의 상을 당하여도 상주로서 아버지의 복을 입어 보지 못한까닭으로 그는 3년 추복(追服:셰월이 흐른 뒤에 상주 노릇하는 일)을 입어 고기와 떡을 먹지 않으며 생활을 절약하여 열심히 저축하고 밤바다 목욕재계하고 신령님께 기도하기를 하루도 거르지 않으니,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하였다.

 

이렇게 부모의 한을 풀기 위하여 열 심히 살아온 석규는 가산도 넉넉해지고 얼마 후에는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기원(騏遠)이라고 하였다.

석규는 아들 기원을 기르면서

 

내가 귀양살이하는 몸으로 이곳을 떠날 수 없어 억울함을 나라에 호소할 길이 없더니 이제 이 아이가 자라면 소원을 풀 수 있으리라.’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기원을 열심히 가르쳐, 학문과 행실을 배우고 예절을 익혀서 효성이 지극한 아들로 성장시켰다.

 

기원의 나이 15 살이 되자 그를 서울로 보냈다.

강진으로 귀양 온 나라의 고관들이 있을 때 석규는 극진히 그들을 돌보며 대접을 융숭히 하고 자기 집안의 억울한 사연을 호소하였다. 이들 가운데 특히 윤 모 판서는 석규의 사연을 동정하고

 

내가 귀양에서 풀리면 힘써 보겠다.’ 하고 자주 말해 왔다.

그러던 중, 윤 모 판서는 귀양이 풀려서 서울로 가서 전날처럼 높은 자리의 벼슬을 하고 있었다.

 

치원은 어련 나이로 수륙 수천 리 머냐먼 걸을 혼자 아버지의 펀지를 가지고 서울로 윤 모 판서의 집을 찾아 길을 나섰다. 먼 길을 떠난 기원은 가다가 보면 집도 절도 없는 산중을 헤멜 때도 있었고, 낯선 남의 접 처마 밑에서 잘 때도 있었으니 그 고생이 매우 심하였다.

 

이리하여 정씨 기문의 억울함이 임금님께 알려져서, 어련 나이로 먼 길 서울까지 갈 수 있던 기원의 용기와 아버지를 생각하고 효도하는 마음씨와 집안의 억울함을 밝히고 가문을 바로 일으키겠다는 끈질긴 효성을 높이 찬양하고 석규 일가의 해묵은 누명을 벗겨 귀양살이를 풀어 주게 되었다.

 

기원은 이 반가운 소식을 우선 빨리 알려드리기 위하여 절약하여 쓰다 남 은 돈으로 말과 사람을 사서 강진으로 달려 보냈다. 이 소식을 학수고대 기 다리던 석규는 기원을 서울로 보낸 그 날부터 원인도 알 수 없이 시난고난 아파서 벽석에 눕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반가운 소식을 듣고 곧

나는 할일을 다했으니 이제는 안심하고 가겠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고한다.

 

참고 문헌 <조선기인열전>

 

 

 

張顯光(장현광)

유훈

여헌선생 장문강공 현광이 말하기를,

내 한 몸은 곧 백 천만대의 선조에게서 전하여 준 것을 물려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가히 내 몸은 나의 소유라고 말하겠는가? 내 몸을 가벼이 하는 것은 곧 선조를 가벼이 하는 것이다.

 

또 그 몸을 욕되게 하고 그 몸을 패망하게 만드는데 이르는 것은 그 선조를 욕되게 하고 그 선조를 패망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을 다하는 이치와 효도를 다하는 도리가 과연 그 자신을 잘 사랑하고 공경하고 중히 하는 것에서 벗어나겠는가?

 

한번 생각을 해도 선조를 생각하여 선조의 마음에 어긋남이 있을까 염려하고, 한번 말을 해도 선조를 생각하여 선조의 덕망에 어긋남이 있을까 염려하고, 한번 행동을 해도 선조를 생각하여 선조의 도리에 어긋남이 있을까 염려하라.

 

이렇게 두려워하고 조심하여 항상 깊은 연못에 다다른 듯 엷은 얼음을 밟는 듯이 삼가면 거의 선조께서 남겨 놓은 교훈을 떨어뜨리지 않는다고 말 할수가 있고 선조들께서도 또한 가히 훌륭한 자손을 두었다고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여헌 문집에서>

 

旅軒先生張文康公顯光曰

旅軒先生張文康公顯光曰, 吾一身, 乃百千萬代祖先流傳以遺之者, 卽其敢曰吾身卽吾所有哉, 輕吾身, 卽輕吾祖先也, 或至辱其身, 敗其身者, 無非辱其祖先, 敗其祖先, 然卽盡愛之理,致孝之道, 果外於能愛其身, 而敬重之者乎, 一思慮而思祖先, 有違於祖先之心也, 一云爲而思祖先, 恐有違於祖先之德也, 一動作而思祖先, 恐有違於祖先之道也, 戰戰焉兢兢焉, 常若臨深淵,履薄氷焉, 卽庶乎可以能不墜祖先之遺訓, 祖先亦可謂有子孫也.

於旅軒文集.

 

 

張旅軒先生(장여헌선생)

 

가족들에게 남긴 말씀.

장 여헌선생 가족들의 계모임에서 의논할 때 말씀하시길

가족의 은의를 돈독히 하려면 한마음이어야 하고,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는 정해진 규약에 따라야 한다.

때때로 화목을 의논하여 그 화기를 융성케 함으로써 정을 좋게 하고 일에 있어서도 함께 힘을 써 그 바탕이 서로 통하면 서로를 의롭게 도와준다. 부자(富者)가 되면 나누어야 하고, 가난하면 도움을 받아야 하며 경사 때는 함께 즐거워하고 근심에는 함께 위로해 주는 것이 집안과 종족을 보전하는 깊은 생각이며 원대한 계책이다.

 

우리는 ()를 물려받음이 같고, 조상의 성씨를 물려받음이 같다.

세력이 비록 소원한 지경이 되고 일에 혹 원망하는 마음이 있을지언정 어찌 소원함 때문에 서로를 잊어버리고, 원망하는 마음 때문에 원수가 되겠는가.

아아! 만약 조상님 스스로 부모님이 되어 양쪽을 살펴보면 일찍이 한 꾸지람, 한 채찍에 불과한 것으로 끝날 것이다.

자손을 위하여 조상님의 몸은 계시지 않지만 자애로운 은혜는 마찬가지이다. 백 가지를 생각할 필요 없이 의리의 근본은 하나다. 성냄은 감추고, 원한은 재우라. 이것이 결국 한 핏줄을 대하는 길이요, 이것이 우리 집안사람의 마땅한 바, 깊은 계책인 것이다.

 

다른 성씨끼리 소원한 것 또한 윗대 선배들의 은의로 받들어야 한다.

혼인으로 친목의 길을 넓혔으니 먼저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의 은혜로다. 그 분들의 자애롭고 정다운 시각에서 본다면 어찌 친족과 외족의 간격이 있으리오. 사람들은 아들딸을 두지 않음이 없고, 그러한 정은 하나이니 우리 앞 분들의 마음을 상상할 수 있으리라.

마땅히 성씨가 같고 다름을 구분하지 말고 두터운 의리로 상대하면 즉 그런 간격은 없으리라.

 

<原文(원문)>

張旅軒先生(장여헌선생)

張旅軒先生 族契議曰 篤其恩 以一其心 定其規 以濟其事 時焉講睦 以融其和 好之情 事焉同力 以通其資 助之義 使之富有所分 貧有所濟 慶同其喜 憂同其恤 此所以保家 宜族之深慮 遠計也

同吾所受之氣 同傳祖先之姓者 勢雖至於疎遠 事或涉於咎怨 豈以疎遠而忘之 咎怨而讎之哉 嗚呼 若自祖先之爲父母者 而兩視之 則曾不過 一呞一撻 而止者 爲子孫者 不體祖先 同慈之恩 不念百枝 一本之義 怒焉藏之 怨焉宿之 此果待同氣之道乎 此吾族人所當深戒者也

異姓疎遠 亦推先世之恩 廣婣睦之道 以先世視之 慈情 豈間於內外 人莫不有子女 以其情而體 吾先世之心 則可以想矣 當不分同異姓 其相厚之義 則宜無間矣

(見旅軒集)

 

 

 

 

 

 

출전 <한민족대성보>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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