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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동장씨(張)-2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張(인동장씨)-2

 

 

본관(本貫): 인동(仁同) (直提學系)

시조(始祖): 장계(張桂)

유래(由來):

 

 

인동 장씨(仁同張氏)(直提學系)

우리나라 장씨(張氏) 중에서도 가장 많은 인구수를 차지하는 인동 장씨(仁同張氏)는 고려 창업(高麗創業)애 훈공을 세웠던 태사공(太師公) 장정필(張貞弼)을 도시조(都始祖)로 받들고,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 때 국자진사 도평의녹사(國子進士都評議錄事)에 등과(登科)하여 보문각 대제학(寶 文閣大提學)을 지내고 옥산곤(玉山君)에 봉해졌던 장계(張桂)를 시조(始祖)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인동현 발영전(仁同縣拔英田)에 전거(奠居)하였다.

그 후 후손(後孫)들은 7세(世)에 이르기까지 인동현 발영전(拔英田)에 세거(世居)하면서 훌륭한 인재(人材)를 많이 배출시켜 명문(名門)의 기틀을 다졌으며, 조선(朝鮮) 성종(成宗) 이후로 임지(任地)에 따라 서울 창동(倉洞)을 비롯한 충북(忠北) 제천(堤川) 및 단양(丹陽)과 경북(慶北)의 영주(榮州), 예천(醴泉), 문경 (聞慶), 의성(義城), 자인(慈仁)등 전국 각지(各地)로 산거(散居)하게 되었다.

 

가문의 중요 인물

 

장안량(張安良)

6세 손 안량(安良:일명 重智)이 조선 초에 통덕랑(通德郞)으로 홍산현감(鴻山縣監)을 역임했다.

 

장안식(張安式)

안식(安式)은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을 역임했다.

 

장자원(張自遠)

한편 시조(始祖)의 손자로 광주 부사(光州副詞)를 역임했던 용서(龍瑞)의 증손(曾孫) 자원(自遠)은 검교세자시강원 필선(檢校世子侍講院弼善)을 지낸 후 황해도 장연(黃海道長淵)으로 이거(移居)하였으므로 그의 후손들이 평안도 용천(龍川)과 정주(定州), 중화(中和), 구성(龜城) 등지에 집중세거하고 있다.

 

장선손(張善孫)

옥산군(玉山君) 안량(安良)의 후손에서는 그의 아들 5형제 중 장남 선손(善孫)이 승훈랑(承訓郞)으로 의정부(議政府) 첨서(簽書)와 녹사(錄事)를, 차남 경손(敬孫)은 사재감 주부(司宰監主簿)를 지냈다.

 

장말손(張末孫)

1431(세종 13)∼1486(성종 17).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인동 ( 仁同 ). 자는 경윤(景胤). 순효(純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경원(敬源)이고, 아버지는 현감 안량(安良)이며, 어머니는 고승안(高承顔)의 딸이다.

1459년(세조 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463년 승문원박사를 거쳐 한성참군·사헌부감찰·함길도평사를 역임하였다. 1467년 이시애 ( 李施愛 )의 난 때 예조좌랑으로서 진북장군(鎭北將軍) 강순 ( 康純 )을 따라 평정에 공을 세워 적개공신 ( 敵愾功臣 ) 2등에 녹훈되고, 내섬시첨정에 임명되었다.

1470년(성종 1) 장악원부정을 거쳐 행부사직·첨지충추부사·행사직을 역임하고, 1479년 해주목사에 임명되었으며, 1482년 연복군(延福君)에 봉하여졌다. 시호는 안양(安襄)이다.

 

장순손(張順孫)

1457(세조 2) ∼ 1534(중중 2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인동 ( 仁同 ). 자는 사호(士浩) 또는 자활(子活). 성주(星州) 출신. 순효(純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경원(敬源)이고, 아버지는 군수 중지(重智)이며, 어머니는 고승안(高承顔)의 딸이다.

1485년(성종 16) 별시 문과에 3등으로 급제한 뒤 정언 · 회령판관을 역임하고, 1496년(연산군 2) 홍문관에 들어와 부응교 · 응교를 지냈다. 1499년 사인 ( 舍人 )으로 춘추관편수관을 겸해 ≪ 성종실록 ≫ 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홍문관의 직제학 · 부제학, 승정원의 동부승지 · 좌부승지 · 우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오르고 곧 외직으로 전라도관찰사에 나갔다.

1504년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먼 지방에 부처(付處)되었다가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경상도관찰사에 보임되었으며, 이듬해 한성부좌윤이 되었다. 이어 대사헌 때 정국공신 ( 靖國功臣 ) 박영문(朴永文)의 불법을 탄핵하는 등 언론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듬해 이조참판 · 형조판서 · 우참찬을 거쳐 1509년(중종 4) 호조판서로서 경연특진관을 겸해 폐지된 저화 ( 楮貨 ) 재사용을 주장했고, 좌참찬으로 군량확보책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1515년부터 호조판서 · 병조판서를 역임하면서 노모의 연로함을 들어 계속 사직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이에 대해 사신(史臣)은 그의 탐오(貪汚)와 회뢰(賄賂)로 공론이 비등하자, 거짓으로 사직을 요청했다고 비난하였다.

1518년 병조판서 때 조광조 ( 趙光祖 )를 중심으로 하는 사림파가 과거제의 폐단을 들어 현량과 ( 賢良科 ) 실시를 주장하자 그 의결에 반대했다가 이듬해 김안로 ( 金安老 )의 일파로서 사림을 축출하려 했다는 삼사의 탄핵으로 파면되었다.

기묘사화로 조광조 일파가 축출되자, 복직되어 판중추부사 ( 判中樞府事 )를 역임한 뒤 다시 이조판서 · 판의금부사를 거쳐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이 때 나이 70으로 궤장( 廓 杖)을 받기도 하였다. 이어 권신 김안로가 정권을 장악하자, 그에 의해 우의정에 오르고, 좌의정을 거쳐 1533년 영의정에 올랐다가 이듬 해 죽었다.

사신은 사람됨이 용렬하고 김안로에 당부(黨附 : 당여로 참여해 붙음)해 재상이 되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모두 비루하게 여겼다고 평하였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장수희(張壽禧)

퇴계(退溪) 이 황(李 滉)의 고제(高弟)로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했고 영주(榮州)에 이산서원(伊山書院)을 세워 후진양성에 진력했던 과재(果齋) 수희(壽禧:연복군 말손의 증손)가 유명했다.

 

장세희(張世禧)

유생(儒生)으로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수비했다.

 

장신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개령 헌감(開寧縣監)을 지내며 선정(善政)을 베풀고 유집(遺集)을 남겼다.

 

 

장후상(張后相), 장위규(張緯奎)

숙종(肅宗) 때 양산 군수(梁山郡守)와 선전관(宣傳官)을 지내고 영조(英祖) 때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공을 세웠던 후상(后相)과

위규(緯奎) 등이 유명했다.

 

장진

현종(顯宗) 때 문과에 급제했던 진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과 울산 군수(蔚山郡守)를 지내고 강계 도호부사(江界都護府使)를 역임했다.

 

장기연(張紀淵)

구한말 고종(高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시독(弘文館侍讀)과 괴산 군수(槐山郡守)를 지냈다.

 

장화식(張華植)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거쳐 봉화(奉化), 영덕(盈德) 등지의 현감(縣監)을 역임한 후 한성 판윤(漢城判尹)과 육군참장(陸軍參將)을 지냈다.

 

장봉환(張鳳煥)

평리원검사(平理院檢事)를 역임했다.

 

장승환(張昇煥)

외부참서관(外部參書官)을 역임하였다.

 

 

 

 

張嫡孫(장적손)의 효행.

 

망추정을 떠날 줄 모르는 형제

 

조선조의 성종 때 (1470년대), 인동 장씨 적손(嫡孫)과 신손(信孫) 형제는 본래 타고난 성품이 남달리 지극한 효성으로 이름난 효자였다.

이들 형제는 성종 때 인동현 인의방(仁同縣 仁議坊), 지금의 구미시 인의동 3862번지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부터 총명하여 글을 좋아하였고 부모를 섬기는 마음이 지극하여 마을 어른들의 칭찬이 자자하였다.

효자 장 적손과 장 신손 형제는 부모가 돌아가시자, 지금의 칠곡군 석적면 반계동의 소학산에 장례지내고 부모가 이 세상을 떠나신 것을 몹시 슬퍼한 나머지, 그 무덤 옆에 움막을 짓고 살아계실 때 모시는 것과 같이 3 년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꼬박꼬박 시묘(부모 상을 당하고 무덤 옆에 움막을 짓고 지냄)에 정성을 다하였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이면 잊지 않고 삭망제(초하루와 보름마다 돌아가신 분에게 올리는 제사)를 올리었다. 소학산 일대는 지금과 달라서 아름드리나무가 우거져 굉장히 무서운 산골짜기였다.

그 곳에 호랑이가 나타나, 이들 형제가 마음을 다하여 어버이를 섬기는 정성에 감동하여 매달 초하루와 보름날의 삭망에는 어김없이 산짐승을 잡아다 주었고, 움막 앞 뜰에는 겨울에 나물이 나서 자라나는 이상한 일들이 있었다. 형제는 산짐승과 나물로 제사 음식을 만들게 했다고 전해 온다.

 

삼년상을 마친 후에도 무덤 부근의 거친 땅에 집을 지어 이르기를 망추정 (望楸亭)이라 하고, 이 곳에 있으면서 삭망 때는 반드시 제사를 지냈다.

 

이 사실은 지금도 옥산지(玉山誌)와 인동 읍지(仁同邑誌)에 자세히 적혀있다.

 

또한 초하루와 보름에 제사를 지냈다는 뜻으로 무덤이 있는 아랫마을을 삭제동이라 하고 소학산을 삭제산이라 부르고 있다.

또 형제가 살았던 망추정 터전을 일컬어 망정(望亭)이라 불러 오니 이는 사람들이 보고 느껴 전해 온 이름이다. 또한 무덤의 아래쪽에 후손들이 재실을 지어서 해마다 음력 108 일에는 묘제를 지내고 있는데, 이 재실 이름을 삭제재(朔察齋)라 한다.

 

장 적손의 자는 자장(子長)이요, 벼슬은 어모장군 (禦侮將軍) 충순위 (忠順衛)에 이르렀고, 묘는 구미시 구포동 북정산(北鼎山)에 모시고, 옥계사(玉溪祠)에서 제사를 지낸다.

동생 신손은 자가 사립(斯立)이고 호는 죽창(竹窓)인데, 1507(중종 2 )에 성균관 진사가 되고 조선조 중기에 유학에 뛰어난 학자였다.

묘는 칠곡군 석적면 망정동 뒷산 기슭에 있으며 역시 옥계사에서 제사 지낸다.

 

신손의 묘비에 쓰여져 있는 글에, 어버이를 섬기는 마음은 수없이 많은 착한 일 가운데 으뜸이라 하였는데 그 한 구절을 적으면

정성이 아니면 어찌 부모를 잘 섬기는 일을 다하리오.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니라, 하늘이 보는 것이 참으로 밝아 상서로운 빛도 내리고 착한 일도 낳고 한다. 산새는 깊이 들어 이르고 겨울 채소도 아름다운 냄새가 난다. 마을 이름은 삭제요. 정자가 있었던 곳은 망정이라. 만물이 달라지는 대로 사람이 느끼고 들은 대로 전해 내려온다.”

 

출전칠곡군 석적초등학교 오 교장

참고 문헌 玉山誌, 仁同邑誌, 嶠南誌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인동 장씨(仁同張氏)는 남한(南韓)에 총 129,731가구, 538,80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출전 <한민족대성보>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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