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張(흥덕:흥성장씨)
본관(本貫): 흥덕(興德): 흥성(興城)
시조(始祖): 장유(張儒)
유래(由來):
흥덕, 흥성 장씨의 시조 장유(張儒)는 상질현(尙質縣) 사람으로 도시조 장정필(張貞弼:문헌공)의 9세손이다. 신라 말에 난(亂)을 피하여 오월구(吳越國:중국 춘추 시대의 오나라와 월나라)에 들어가 중국어를 배우고 돌아와, 고려 광종이 여러 번 객성(客省)의 관원에 임명하여 중국 사신이 올 때마다 접대하게 하였다.
그 후 벼슬이 광평 시랑(廣評侍郞)에 이르렀고, 그이 6세손 기(機)가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한 후 흥산(興山:흥성의 별호) 군(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흥성(興城)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장연우(張延祐)
?∼1015(현종 6). 고려 전기의 관인. 본관은 흥덕 ( 興德 ). 객성 ( 客省 )을 지낸 유(儒)의 아들이다. 1011년(현종 2) 거란이 침략하여 태묘(太廟 : 종묘)와 궁궐을 불태우자 현종은 나주로 피난하였다.
이 때 여러 신하들이 하공진 ( 河拱辰 )이 붙잡혔다는 풍문을 듣고 모두 달아났으나 채충순 ( 蔡忠順 )·주저(周佇)· 유종 ( 柳宗 )· 김응인 ( 金應仁 ) 등과 더불어 호종한 공으로 중추사(中樞使)를 거친 뒤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가 되었다.
1014년 일직(日直) 황보 유의(皇甫兪義)와 더불어 거란침입 이후 군액(軍額)의 증가로 백관의 녹봉이 부족해지므로 경군 ( 京軍 )의 영업전 ( 永業田 )을 빼앗아 녹봉에 충당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상장군 최질 ( 崔質 )과 김훈 ( 金訓 ) 등이 주동이 되어 난을 일으키자 사적(仕籍)에서 제명되었다. 1015년 병부상서로 있다. 별세한 후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로 추증되었다
장인신(張隣臣)
조선조에서 인신(隣臣)이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하고 홍문관전적(弘文館典籍)에 올랐다.
장우(張佑)
응량(應糧)의 아들 우(佑)가 진도 군수(珍島郡守)를 역임했다.
장현휘(張賢輝)
후손 현휘(賢輝)는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
장왕(張旺)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장석(張釋)
부관으로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오름.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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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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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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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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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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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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震(진),錫(석)
銓(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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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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圭(규),奎(규)
在(재),均(균)
坤(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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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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勳(훈),然(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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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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淳(순),澤(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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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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鎬(호),鍈(영)
鏞(용),鐘(종)
鉉(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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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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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교),重(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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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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植(식),柱(주)
根(근),柄(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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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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洙(수),浩(호)
海(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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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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銖(수),鍊(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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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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烈(열)煥(환)
埈(준),熙(희)
燁(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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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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桓(환),東(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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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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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흥덕(興德), 흥성 장씨는 남한에 총 8,837가구, 37, 69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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