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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아산장씨(蔣)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蔣(아산장씨)

 

 

본관(本貫): 아산(牙山)

시조(始祖): 장서(蔣壻)

유래(由來):

 

장씨(蔣氏)의 득성(得姓) 근원은 중국 춘추시대의 나라 이름으로 주나라 주공(周公)의 세째 아들 백령(伯齡)이 하남성(河南省) 기사현(期思縣)을 장국(蔣國)으로 하사 받아 국명을 성(姓)으로 삼았다고 한다.

우리나라 장씨(蔣氏)의 본관은 문헌에 아산, 청송, 김포 등 여러 본이 기록되어 있으나 모두가 동원(同源)이므로 현존(現存)하는 장씨는 아산 장씨로 단일화하고 있다.

아산장씨의 시조인 장서(蔣壻)는 중국 송조에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신경위 대장군(神慶衛大將軍)을 지냈으며 고려 예종 때 금나라가 송을 침입하자 상서(尙書)이 강(李 綱)과 함께 항전(抗戰), 적에게 한치라도 빼앗겨서는 안되며 끝까지 사수(死守)할 것을 조정에 건의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의론(議論)이 불합(不合)하여, 자기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자 배를 타고 동으로 망명, 우리나라의 충남 아산군 인주면 문방리에 표착(漂着)하였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예종이 중국에 탐문(探問)한 바 후히 대접하라는 전달을 받았다. 예종은 서(壻)에게 식읍을 하사하고 아산군(牙山君)에 봉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서(壻)를 시조로 하고 아산을 관적으로 하여 누대에 걸쳐 세거하면서 세계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장숭(蔣崇)

서의 증손 숭(崇)이 고려조에 정록대부(正祿大夫)로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 겸 도총사(都摠事)를 역임하였다.

 

장득분(蔣得芬)

숭의 아들 득분(得芬)은 정순대부(正順大夫)로 서운관사(書雲觀事) 겸 도총사(都摠事)를 거쳐 판군기시사 (判軍器侍事)에 이르렀다.

 

장균(蔣均)

그리고 서의 6세손 균(均)이 봉익대부(奉翊大夫)로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올랐다.

 

장자방(蔣自芳)

균의 아들 자방(自芳)이 봉상대부(奉常大夫)로 삼사부사(三司副使) 겸 검교 예빈경(檢校禮賓卿)을 역임하였다. 자방(自芳)은 아들 5형제를 두었는데 맏아들 성길(成吉)이 판도판서(版圖判書), 평장사(平章事)를, 둘째 아들 성발(成發)은 가정대부(嘉靖大夫)로 전공 전서(典工典書)를 역임하였으며, 세째 아들 성휘(成暉)가 전서(典書)를, 네째 아들 성호(成昊)는 전법 전서(典法判書)를, 다섯째 아들 성미(成美)는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역임하는 등 모두 전서를 역임하였으므로 그들의 출생지인 경북 의성군 점곡면 교동은 5전서로 전해지고 있다.

 

장극맹(蔣劇孟)

상서우복야(尙書右僕揶)를 역임했다.

 

장모(蔣耗)

장사랑(將士郞)으로 동정(同正)을 지낸 모(耗)가 유명하다.

 

장영실(蔣英實)

생몰년 미상. 조선 세종 때의 과학기술자. 중국계 귀화인과 기녀 사이에서 태어났다. ≪ 동국여지승람 ≫ 에는 아산(牙山)의 명신으로만 기재되어 있다. 동래현의 관노로 있을 때 그의 재주가 세종에게 인정되어 중국에 파견, 천문기기 연구의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귀국하자 면천되고 1423년(세종 5) 상의원별좌(尙衣院別坐)에 임명되어 궁중기술자로서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등용된 그 다음해인 1424년에 물시계를 완성하였다. ≪ 세종실록 ≫ 에는 중국의 것을 참고하여 청동으로 경점(更點)의 기(器)를 부어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공로로 정5품의 행사직(行司直)으로 승진하였다.

1432년에 경복궁과 서운관 두 곳에 설치할 많은 천문관측의기(天文觀測儀器)를 만드는 계획이 착수되었는데, 이때부터 이천(李 蓚 )과 함께 천문기기를 설계하고 제작을 지휘하였다. 먼저 간의 ( 簡儀 )와 혼천의 ( 渾天儀 )의 두 기본 관측기계를 완성하였고, 1437년에 완성된 천문관측의기에는 대간의 · 소간의를 비롯하여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懸珠日晷) · 천평일구(天平日晷) · 정남일구 ( 定南日晷 ) · 앙부일구 ( 仰釜日晷 ) · 일성정시의 ( 日星定時儀 ) · 규표 ( 圭表 ) 등이 있다.

그가 이룩한 가장 훌륭한 업적은 1434년에 완성된 자격루 ( 自擊漏 )의 제작이었다. 세종의 명을 받아 김빈(金 聆 )과 함께 제작한 이 자동 시보장치의 물시계는 중국과 아라비아의 자동 물시계를 비교, 연구하여 새로운 형태의 물시계를 만든 것이었다. 그 공로로 대호군에까지 승진하였고, 그 은총에 보답하려고 다시 천상시계와 자동 물시계 옥루 ( 玉漏 )를 만들어냈다.

1438년에 만들어져 흠경각 ( 欽敬閣 )에 설치된 이 옥루는 그가 심혈을 기울여 중국과 아라비아의 물시계에 관한 모든 문헌들을 철저히 연구하여 이룩한 독창적인 천상시계였다. 또, 이천 등과 함께 금속활자의 주조사업에도 심혈을 기울여 조선시대의 활판인쇄기술을 대표하는 갑인자 ( 甲寅字 )와 그 인쇄기를 완성하였다.

 

장처용(蔣處勇)

조선 성조조에 경기병사(京畿兵使)를 역임했다.

 

장후완(蔣後腕)

1572(선조 5)∼1644(인조 22).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아산(牙山). 자는 군좌(君佐). 아버지는 첨절제사 용삼(龍三)이다. 음보로 옥포진만호가 되고, 훈련원정·문경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1605년(선조 38) 무과에 급제, 부총관으로 울산 소모대장(召募大將)을 거쳐 정평부사로 나갔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 ( 李适 )의 난에 관련되었다는 무고로 파직되어 동래에 귀양갔다가 뒤에 풀려나 복관, 도총부총관이 되었으나 곧 사임하고 은퇴하였다.

 

장희양(蔣希陽)

희양(希陽)은 원종3등공신(原從三等功臣)에, 책록되었다.

 

장언기(蔣彦起)

언기(彦起)는 호종3등공신(扈從三等功臣)에 올랐다.

 

장계현(蔣啓賢)

희춘(希春)의 재종형(再從兄) 계현(啓賢)은 의병장 곽재우(郭再祐)를 도와 화왕산토벌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아산 장시의 가문을 더욱 빛냈다.

 

 

蔣英實(장영실) 선생의일화.

 

조선 세종 때의 과학자로 본관은 아산, 봉건신분제도가 철저한 당시 사회에서 동래현 기녀 소생의 관노 출신으로 뛰어난 과학기술적 재능을 발휘하여 정3품인 상호군(上護軍)까지 올랐던 우리나라 최고 과학자중의 한사람이었다.

 

모든 일에 과학적인 재능을 발휘하여 제련, 축성과 농기구, 무기 등의 수리에 뛰어났다. 이에 세종대왕은 여러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영실을 발탁해 세종5(1423) 5품 벼슬인 상의원(尙衣院) 별좌에 올라 노예의 신분을 벗었으며, 세종14(1432) 중추원사 이천을 도와 간의대 제작에 착수하고 천문의를 제작 감독하였다.

 

세종15(1433)에 호군에 올랐으며, 이 해에 혼천의 제작에 착수하여 1년만에 완성하였다. 이듬 해 동활자인 경자자의 결함을 보완한 금속활자 갑인자의 주조에 힘썼다.

 

한편, 김빈(金殯)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물시계인 보루각의 자격루를 제작 완성했다.

세종19(1437)에 제작 착수 5년 만에 천체 관측용 대소간의,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와 천평일구, 해시계인 앙부일구, 주야 겸용의 일성정시의, 태양의 고도와 출몰을 측정하는 규표, 다음해에는 자격루의 일종인 흠경각의 옥루를 제작 완료하고 경상도 채방결감이 되어 동(), ()의 채광, 제련을 감독했다.

 

1441년 세계 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와 수표(水標)를 발명하여 하천의 범람을 미리 알 수 있게 했다. 그 공으로 상호군에 특진되었으나 세종24(1442) 그의 감독으로 제작된 왕의 가마가 부서져 불경죄로 의금부에 투옥, 장형을 받은 뒤에 파면 당했다.

 

장영실의 이러한 과학적 결실은 그의 뛰어난 탐구정신에 기초한 것이지만, 또 하나의 역사적 배경으로 고려 이래 이어온 과학적 결실과 함께 조선왕조 개창을 정당화 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음도 사실이다. 특히 천문역산학의 발전은 조선왕조의 개창이 천명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표명하려는 것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출전 부사 시지>

 

 

蔣英實(장영실) 선생의 일화.

 

測雨器(측우기)를 만들다

빗물의 양을 정확하게 잰다는 것은 농업이 주요 산업인 조선왕조의 경우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뭄괴 홍수를 미리 알아서 막기 위해서는 세월을 두고 빗물의 양을 재어서 평균값을 알아 필요가 있었다. 장영실은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끝에 측우기를 만들 있었다.

그 가 처음 만든 측우기는 높이 14.2cm에 지름은 16.5cm였다.

영실은 여기에 민족하지 않았다. 측우기를 더욱 개량하여 나갔다.

니중에 만든 만든 측우기는 높이가 30.9cm에 지름은 14.4cm였다. 빗물의 양을 정확하게 잴 있는 길이 20. 6cm주척(비가 온 양을 젤 수 있는 자)도 만들었다. 그리고 세종에게 아뢰어 측우기와 척을 고을에 설치하도록 했다. 장영실이 측우기를 발명한 것은 1441(세종 23)의 일이었다.

서양에서 측우기를 만들어 비가 양을 재기 시작한 것은 장영실이 측우기를 만든 지 200년이 지난 1639년 의 일이었다.

 

이천과 함께 갑인자를 만들다

1443(세종 15) 장영실은 이천과 함께 새로운 金屬活字(금속활자)를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이천은 태종 때에 만들어진 구리활자인 癸未字(계미자)(癸未년에 자자소를 두고 만든 가장 오래된 구리활자)를 개량하여 更子字(경자자)를 만사람이었다.

계미자는 고정된 동판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누런 밀납을 녹여 부은 다음 구리로 주조한 불규칙한 다각형의 동활자를 꽂아서 밀랍이 굳어진 뒤에 인쇄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밀랍은 무르기 때문에 활자가 흔들려서 하루에 장씩 밖에 찍어 내지 못 하 는게 문제점이었다.

경자자는 계미자보다 글자 모양이 작으며 치밀한 입방체로 된 구리활자였다. 글자의 모양이 똑 같기 때문에 통판을 고정시킬 수가 있어서 밀납을 쓰지도 않고서도 하루에 수십 장씩 인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종은 이 경자자도 더욱 개량 하여 더 성능이 좋은 활자를 만들도록 했던 것이다.

 

장영실은 이천을 도와 활자의 모양을 작게 만들었다. 그러나 글자를 작게 만들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천과 함께 장영실은 열심히 력하여 새로운 금속활자인 갑인자를 만들어 냈다,

갑인자는 글자와 작은 글자의 종류로 구분되어 있었으며 글자의 수는 20만 자가 넘었다. 글자의 모양도 작아 하루에 수십 장이나 찍어낼 수 있었다.

실로 대단한 발명이 있다.

<출전: 인물 왕조실록 >

 

 

蔣英實(장영실) 선생의 일화.

 

자격루를 만들다.

세종은 해시계를 완성한 후에 다시 정초와 장영실, 김돈, 김조 등을 어전으로 불렀다.

너희들은 해시계를 만들어서 시각을 알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이십사절기와 날짜까지 한눈으로 보고 알게 했으니, 내 마음이 몹시 기쁘다. 그러나 날이 흐리거나 비와 눈이 내려서 해가 뜨지 않았을 때, 해시계는 아무 쓸모가 없어진다. 이번에는 새로운 방법으로 시간의 변화를 알 수 있는 기구를 만들어 보도록 하라.”

세종이 말했다.

만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장영실이 한동안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선공감에 명하여 장영실이 청하는 대로 모든 물자를 지체 없이 대어 주도록 하라.”

세종이 옆에 있는 승지에게 명령했다.

 

장영실은물시계에 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했다.

물시계는 좁은 구멍을 통해서 물이 일정한 속도로 떨어지게 하여 그 분량을 헤아려 시간을 계산하는 시계로, 누수기 또는 누호라고도 했다. 장영실은 물시계에 관한 문헌을 조사하여 자세 히 읽어나갔다. 그는 중국과 아라비아 등지에서 만들었던 물시계들의 문제점을 하나하나 조사하여 부족한 점을 보충하여, 그 모형을 일일이 그림으로 그렸다.

모형이 완성되자 경복궁 궁궐 안 경회루 남쪽 넓은 뜰에 삼층 누각을 짓고 나무로 三神(삼신)十二神(십이신)을 조각했다.

물수레와 누호 등을 만들었다. 그리고 꼭대기 상층에는 나무인형 三神(삼신)이 종과 북과 ()을 철사로 꼬아 잡고 있었다. 마침내 자동시보장치의 물시계가 완성된 것이다. 1438(세종201)의 일이었다.

 

세종이 친히 경회루 남쪽 뜰로 나왔다.

벼슬아치들이 시립한 가운데 물시계는 돌아갔다. 누호 통에 층층이 물을 들이부었다. 물은 물구멍으로 흘러내렸다. 이윽고 가운데 시간을 나타내는 12개의 나무 인형 이 층층이 시각표를 잡고서 있는 몸통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드디어 몸통에 물이 기득 갔다.

물은 조금 씩 조금 씩 아래층 퇴수기로 떨어졌다. 가운데 층 12개의 나무 인형이 서 있는 물통에 물이 줄어들었다.

子時(자시)를 맡은 나무 인형의 팔꿈치가 움직였다. 그곳에 연결된 철근과 탄환과 쇠주걱은 상층에 시각을 맡은 삼신 가운데의 한 나무 인형의 팔꿈치를 움직였다.

종이 울려 퍼졌다.

이렇게 해서 일경, 이경, (삼경)이 될 때는 북을 맡은 나무인형이 북을 울렸다.

一點(일점), 이점을 알때는 정을 맡은 나무 인형이 정을 쳤다. 退水(퇴수)는 아래층 수차의 힘으로 다시 누호로 채워졌다.

스스로 소리쳐 자동적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물시계가 완성되다니!” 세종이 기쁜 얼굴로 말했다. 장영실은 공로로 대호군에까지 승진 했다.

<출전: 인물 왕조실록 >

 

 

 

蔣英實(장영실) 선생의 일화.

 

앙부일구를 만들다

세종의 부름을 받고 장영실은 대궐로 불려갔다. 그의 다리가 부들부들 멀리고 있었다. “네가 장영실이냐? 어서 고개를 들라.”

세종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장영실은 감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남양부사 윤시웅에게 말을 들으니, 네가관 상감에서 천문을 관측하기구를 만든 일이 있다고 하니 과연 그러한가?”

 

관상감에서 별을 관측하는 기구를 만들어 본 일이 있습니다.”

네가 글공부를 한 일이 있느냐?”

글공부랄 것이 무어 있겠습니까? 천문과 역법을 알려고 주역서경을 조금 읽었습니다.”

손재주만 있는아니라, 천문과 역법에 대한 공부도 한 모양이 구나.”

세종의 얼굴에 환한 웃음빛이 떠올랐다. 세종은 장영실을 중국으로 파견하여 천문기기에 대한 연구를 하도록 했다. 장영실 일행은 압록강을 건너 요동을 거쳐 연경으로 들어갔다. 장영실은 중국 각처를 돌아다니며 천문 시설을 돌아보고, 천문학과 산학에 관한 수백 권을 사가지고 일 만에 돌아왔다.

세종은 장영실을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나도록 면천시켜주고, 상의원별좌에 임명했다. 본격적으로 궁중기술자로서의 활동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1432(세종14)의 어느 날이었다.

농사를 지으려면 하늘의 움직임을 알아야 하오, 하늘의 움직임을 살필 수 있는 천문 관측기구를 만들도록 하시오. ”

세종이 명령했다.

鄭麟趾(정인지)鄭招(정초)는 고전을 연구하고 참고하여 그 원리를 찾아내려고 애썼다. 중추원사 이천과 호군 장영실은 천문 관측기구를 만들 실제 준비를 하였다. 이천과 장영실은 먼저 나무로 천체 관측을 수 있는 간의를 만들었다. 세종은 날마다 천추전 앞에 나아 가 간의를 만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장영실이 목수를 지도하여 만든 치수와 도수는 세종의 뜻과 틀림없이 들어맞았다.

장영실은 그것으로 하늘을 살펴보았다.

북쪽을 기준으로 할 때 한성 의 위치는 38도쯤 되었다.

마침내 그들은 1433(세종 15) 간의와 혼천의를 만들었다.

간의는 천체를 관측하는 기구였으며, 혼천의는 공처둥근 모양으로 별들이 움직이는 것을 살펴봄으로써 위치를 알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기구였다.

 

간의 원리를 이용하여 해시계를 한번 만들어 보겠느냐?” 세종이 말했다.

만들 수 있습니다.”

蔣英實(장영실)이 대답했다.

장영실은 해시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먼저 구리로 반구형을 만들고 그 안에 24 절기의 緯線(위선)을 그려서 24절기를 기고 經線(경선)으로 시각을 나타내는 선을 그렸다. 한복판에 바늘 그림자가 북극을 향해 비스듬히 박혀 있었다.

햇빛을 받으면 그릇 판에 바늘 그림자 끝의 그림자가 시각을 표시하는 부분에 떨어진다. 그런데, 이 바늘 그림자가 떨어지는 바닥에는 시각을 표시하는 시신(時神 십이지신)의 그림을 그려서 글자를 모르는 사람도 그때 그 절기의 날짜와 시각을 알아맞힐 수 있게 했다.

장영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해시계를 만드는 일에 몰두해 해시계를 완성할 수 있었다. 겉모양이 마치 가마솥을 젖혀놓은 듯 하다 하여 그 이름을 앙부일구라고 했다.

세종은 해시계를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곳에 설치하여 들여다보면 시간을 알 수 있게 하였다.

하나는 정교(지금의 서울 광화문 우체국 건너 북쪽 부근으로 추측된다)에 설치하도 록 하고, 다른 하나는 종묘 앞에 설치하도록 했다.

<출전: 인물 왕조실록 >

 

 

 

蔣英實(장영실) 선생의 일화.

 

노비 출신의 과학기술자 蔣英實(장영실)

손재주가 뛰어난 아이

조선시대 세종 때의 과학기술자 蔣英實(장영실)은 언제 태어나고 언제 죽었는지 기록이 없다. 장영실은 경상도 동래현(지금의 부산광역시 동래구)관청노비였으며 어머니는 동래현의 관기였다. 아버지는 중국계 귀화인으로 알려져 있고, 동국여지승람에는 아산의 훌륭한 신하로만 기록되어있다.

동네 아이들로부터 기생의 아들이라고 놀림을 받으며 자란 영실은 여섯 살이 때까지 동무가 없었다.

영실은 바깥에서 혼자 노는 것을 좋아했다. 그 날도 영실은 개울에 나가 혼자서 장난을 치며 놀았다. 개울에는 물줄기가 졸졸 흘러가고 있었다. 영실은 그 물을 막아서 작은 폭포를 만들었다. 그리고 보릿대로 물레방아를 만들어 폭포 밑에 바로 걸쳐놓았다.

, 물레방아 잘 돈다.”

서당에서 아이들이 우우 몰려왔다. 물레방아는 물방울을 튕기며 돌아갔다.

나도 하나 만들어줘.” 아이 하나가 히죽 웃었다.

蔣英實(장영실)는 보릿대로 물레방아를 만들었다.

, 정말 물레방아를 잘 만드네.”

아이들이 탄성을 질렀다.

해는 왜 아침이변 동쪽에서 뜨고, 저념이면 서쪽으로 지는 것일까?’ 영실이는 동구 돈대에 올라가 해가 곳을 바라보았다. 놀이 엷어지면서 서쪽 하늘이 어둑어둑해졌다. 어느새 셋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영실이는 고개를 돌려 북두칠성을 찾아보았다. 국자 모양을 한 북두칠성이 북쪽에서 빛나고 있었다.

저 별들은 왜 저렇게 반짝일까?’

영실은 별들을 쳐다보며 끝없는 생각에 잠겼다. 영실은 손재주가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관찰력이 뛰어났다. 어떤 물건을 보든지 예사로 보아 넘기는 법이 없었다.

 

영실은 동네 아이들의 주문대로 물레방아도 만들었고, 팽이도 만들었고, 칼도 만들어주었다. 이제 동네아이들 가운데 영실이를 기생의 아들이라고 놀리는 아이는 없었다. 어느덧 영실은 살이 되었다. 관청으로부터 영실을 종으로 바치라는 령이 있었다. 영실의 어머니는 하늘이 무너지는 같았다.

영실아, 오늘부터 너는 관청에 가서 살아가야만 해......” 어머니가 울먹였다.

알고 있어요. 어머니.” 영실이 침착하게 말했다.

알고 있다고?”

.”

누구한테 들었니?’‘

아이들 한태요.”

아이들 한태……

어머니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날이 밝아왔다. 영실은 어머니를 따리 집을 나섰다. 동구 돈대에는 이이들이 몰려와 있었다.

영실아, 잘가.”

얘들아, 잘있어.” 영실은 목이 메었다.

 

영실이 관청의 종이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사또 부인이 시집올 가지고 온 값비싼 장롱의 돌쩌귀가 고장이 났다. 영실이는 다른 돌쩌귀를 구해고쳐주었다.

정말로 손재주가 뛰어난 이이구나.”

 

사또 부인은 매우 기뻐했다. 영실이는 노비들이 두레박으로 물을 긷느라 꽁꽁대는 것을 보고는 나무로 도르래를 만들어 손쉽게 물을 긷도해주었다. 영실이가 손재주가 비상하다는 소문이 관청 구석구석에 까지 퍼져나갔다.

관청의 기계를 고치거나 무기를 수리하는 일은 모두 영실이가 도맡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해, 날이 몹시 가물었다. 논에 심어 놓은 벼들이 발갛게 타들어갔다. 논바닥은 쩍쩍 갈라졌다.

이러다 흉년이 들어 모두 굶어 죽을 거야.” 농민들의 한숨소리가 끊일 사이가 없었다.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이방의 뒤를 띠라가며 영실은 골똘히 생각했다. 그러다가 마을에서 십리만 올라가면 물이 마르지 않고 흐르는 개울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 렸다.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영실은 십 리쯤 떨어져 있는 개울물을 꿀어 논에 물을 수 있다고 말했다.

십 리나 되는 곳에 있는 물을 어떻게 여기까지 꿀어 오느냐 말이야?” 이방이 역정을 내듯 말했다.

물길을 내면 됩니다. ”

영실이 말했다.

옳구나! 그렇게 하면 되겠구나.”

이방은 무릎을 쳤다. 마침내 물길 내는 공사가 시작되었다. 고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 공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열흘쯤 지나지, 도랑이 만들어졌다. 물이 도랑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 물이 흘러내려온다!”

물은 도랑을 타고 흘러 내려와 타들어 가던 벼들을 축여 주었다.

영실에 대한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갔다. 소문은 마침내 나라 에 퍼져나갔다.

 

기술이 뛰어난 사람을 찾던 관상감에서 장영실을 불러 올렸다. 장영실은 어머니와 함께 한성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장영실은 관상감에서 천문을 관측하는 기구를 여러 가지로 만들었다.

때마침 세종은 鄭麟趾(정인지), 鄭招(정초) 등의 학자들에게 명하여 중국과 아라비아에서 만 물시계를 연구하도록 했다. 그러나 학지는 이치를 캐내는 데는 능숙했으나, 물시계를 실제로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이치보다는 뛰어 난 기술이 필요했던 것이다.

어느 한 사람도 실제로 만들어 보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나도 글만읽었지만 너희들도 한갓 글자만 읽었구나.” 세종은 책상을 치며 탄식했다.

제가 관상감에 있을 때 손재주가 아주 뛰어나고 數理(수리)에 밝은 자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라면 만들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남양부사 윤사웅이 아뢰었다.

그런 사람이 있었더란 말이냐? 이름이 뭐라 하더냐?” 세종이 물었다.

蔣英實(장영실)이라 하옵니다. 동래현의 관노로 있던 자입니다.”

그 사람을 빨리 이 자리로 데리고 오너라.”

그러자 옆에 있던 승지가 반대하고 나섰다.

상감마마! 벼슬하지 못한 사람도 감히 어전에 알현을 하지 못하는 법인데, 관노로 있던 자를 어찌 감히 배알을 하옵니까?”

너희들 양반은 애초부터 양반이냐? 히늘 아래 천한 사람이 어디 따로 있단 말이냐? 당장 護軍(호군) 벼슬을 주어 데려 오도록 하라.”

윤시웅은 승지와 함께 護軍(호군) 첩지를 장영실에게 내리고 곧 함께 들어오라.”

윤시웅은 승지의 뒤를 따라 나섰다.

 

사람팔자 알 수 없구나. 장영실이가 호군벼슬을 하게 되다니.”

장영실이가 양반이 되다니.”

체부정골 동네는 발각 뒤집혔다.

<출전: 인물 왕조실록 >

 

 

여기에 사진 설명을 넣으세요.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25

金(변)

28

火(변)

31

水(변)

26

水(변)

29

土(변)

32

木(변)

27

木(변)

30

金(변)

33

火(변)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아산(牙山) 장씨는 남한에 총 3,937가구, 16,10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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