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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천임씨(任)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任(풍천임씨)

 

 

본관(本貫): 풍천(豊川)

시조(始祖): 임온(任溫)

유래(由來):

 

풍천 임씨(豊川任氏)의 시조(始祖)는 본래 중국 소흥부(紹興府) 자계현(慈溪縣) 사람으로 고려 때 은자광록대부(銀紫光祿大夫)에 오른 임온(任溫)이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온(溫)은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를 배종(陪從)하고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풍천(豊川)에 사적(賜籍)된 것으로 전하는데 이로 인해 후손들은 풍천(豊川)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임인주

온(溫)의 6세손(世孫) 인주가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경상도 안찰사(慶尙道按察使)를 거쳐 조봉대부(朝奉大夫)에 올라 감문위대장군(監門衛大將軍)을 역임하였는데, 풍천 임씨는 그의 아들 대(代)에 와서 백파(伯派 : 자송)와 중파(仲派 : 자순)로 크게 나뉘며 두 파(派)에서 고루 인물을 배출하여 가문을 중흥시켰다.

 

임자송(任子松)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 淵 川). 어사 주(澍)의 아들이다. 1319년(충숙왕 6) 복국장공주( 洛 國長公主)가 죽자 원윤으로 사신이 되어 원나라에 가서 상을 고하였다.

1321년 이의풍(李宜風)과 더불어 동지밀직사사가 되었으며, 1324년 직조언량익찬공신(直朝言亮翊贊功臣)에 올라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었다. 1327년 심양왕 고(瀋陽王暠)의 일이 수습되면서, 왕이 원나라에 억류되어 있을 때 보필하였던 신하들에 대한 포상이 내려졌는데, 서하군(西河君)으로서 1등공신에 봉하여졌다.

1330년 충혜왕이 원나라에 있다가 즉위하자 만호 권겸(權謙)과 같이 원나라 객성부사(客省副使) 칠십견(七十堅)을 따라 국왕인(國王印)을 가지고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이 해 찬성사가 되었다. 1342년(충혜왕 복위 3) 조적(曺 使 )을 토죄하고 왕을 원나라에서 잘 옹위한 공으로 다시 1등공신의 호를 받았다.

 

임자순(任子順)

자순(子順)은 통헌대부(通憲大夫)로서 민부 전서(民部典書)를 지내고 개성 부사(開城府使)를 역임하였다.

 

임원준(任元濬)

1423(세종 5)∼1500(연산군 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 ( 豊川 ). 자는 자심(子深), 호는 사우당(四友堂). 고려 밀직사판사 군보(君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거경(巨卿)이고, 아버지는 견(肩)이며, 어머니는 송호(宋瑚)의 딸이다. 10세에 글을 지어 신동으로 불렸다.

1445년(세종 27) 세종이 효령대군 ( 孝寧大君 )의 농장에 갔을 때 그가 글을 잘 짓는 것을 보고 칭찬하였으며, 얼마 되지 않아 동반직의 벼슬을 주었다. 1456년(세조 2)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집현전부교리가 되었다.

다음해 중시에 병과로 합격하여 사헌부장령·봉상시판사(奉常寺判事) 등을 거쳐 이조참의에 오르고, 호조·예조·병조·형조 등 4조의 참판을 지냈다. 1466년 발영(拔英)·등준(登俊)의 양시에 합격하여, 바로 예조판서와 의정부좌·우참찬에 올랐다.

1471년(성종 2) 좌리공신 ( 佐理功臣 ) 3등이 되고 서하군(西河君)에 봉해졌다. 문장으로 이름이 났고, 풍수·의복(醫卜)에도 능통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교활하고 탐사(貪邪 : 탐용스럽고 사악함)하며, 그의 아들 사홍(士洪), 손자 숭재(崇載)도 탐욕스럽고 간사하여 나라를 그르치게까지 되어 당시 사람들이 대임(大任)·소임(小任)이라고 하였다. 시호는 호문(胡文)이다.

 

임사홍(任士洪)

? ∼ 1506(연산군 1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 ( 豊川 ). 초명은 사의(士毅). 자는 이의(而毅). 거경(巨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견(肩)이고, 아버지는 좌찬성 원준(元濬)이며, 어머니는 남규(南珪)의 딸이다.

효령대군 ( 孝寧大君 )의 아들 보성군 ( 寶城君 )의 사위이다. 자신뿐만 아니라, 세 아들 중 두명이 왕실의 사위가 되었다. 광재(光載)는 예종의 딸 현숙공주(顯肅公主)의 남편으로 풍천위(豊川尉)가 되고, 숭재(崇載)는 성종의 딸 휘숙옹주(徽淑翁主)에게 장가들어 풍원위(豊原尉)가 되었다.

1466년(세조 12) 사재감사정(司宰監司正)으로서 춘시 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여러 관직을 거쳐 홍문관교리 · 승지 · 도승지 ·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중국말에 능통해 관압사 ( 管押使 ) · 선위사 ( 宣慰使 ) 등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승문원에서 중국말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477년(성종 8) 서얼 출신인 유자광 ( 柳子光 )과 손을 잡고 지평 김언신(金彦辛)을 사주해 효령대군의 손자 서원군(瑞原君)의 사위인 도승지 현석규 ( 玄錫圭 )를 왕안석(王安石) 같은 소인이라고 탄핵하도록 하였다. 김언신에 이어 유자광도 현석규를 공척(攻斥)하는 소를 올리자, 성종은 이를 붕비(朋比)로 보고 김언신을 하옥하였다.

그러나 사헌부와 사간원의 구해(救解 : 풀려나도록 구제함) 상소가 계속되었으며, 이듬 해 4월 홍문관부제학 유진 ( 兪鎭 ), 예문관봉교 표연말 ( 表沿沫 ), 종실 주계부정(朱溪副正) 심원(深源) 등의 잇따른 상소에서 임사홍의 사주로 밝혀져 그는 의주로, 유자광은 동래로 각각 유배되었다. 후에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성종조에는 정권에서 소외되어 큰 활약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연산군 때 재기해 사화를 주도하였다.

유자광은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를 일으켜 김종직 ( 金宗直 ) · 김일손 ( 金馹孫 ) 등 사림계열에 보복을 가했고, 그는 1504년 갑자사화를 주도해 훈신 계열을 축출하는 데 앞장섰다. 즉,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 ( 愼守勤 )과 제휴해 연산군의 생모가 죽은 내막을 밀고해 폐비사사(廢妃賜死) 당시의 중신들을 타도하고, 사림계 인사들에게도 다시 화를 입혔다.

그의 아들 희재(熙載)는 김종직의 문하가 되어 무오사화 때 화를 입었으며, 그는 1506년 중종반정 때 아버지와 함께 처형되었다.

 

임열(任說)

1510(중종 5)∼1591(선조2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 ( 豊川 ). 자는 군우(君遇), 호는 죽애(竹崖). 장손(長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제(濟)이고, 아버지는 참봉 명필(明弼)이며, 어머니는 윤훤(尹萱)의 딸이다.

1531년(중종 26)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533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가 되어 사관 ( 史官 )을 겸하였다. 1536년 수찬으로서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여 그 해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일으키기 위하여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를 하였다.

그 뒤 부교리·집의·전한을 거쳐, 1543년 직제학이 되었고, 이듬해 병조참의가 되었다가 승지로 전보되었다. 명종 때 대사간·이조참의·대사헌·병조참의를 역임하였고, 그뒤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서 예조참의가 되었다.

이어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다시 한성부좌윤·우윤을 거쳐, 공조판서로 임명되었으나 탄핵을 받아 부임하지 않았다. 1560년(명종 15) 예문관제학을 지내고, 이듬해 동지춘추관사·도총부도총관이 되었다.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가 1567년 한성부판윤에 이어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세 번 과거에 급제하여 문명을 떨쳤고, 60년을 조정에 있으면서도 시종 권간(權奸 : 권세있는 간사한 관리)이나 사화 ( 士禍 )에 굴복하거나 따라붙는 일이 없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임유겸(任由謙)

1456(세조 2)∼1527(중종 2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 ( 豊川 ). 자는 숙양(叔讓). 중선(中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호조참판 효돈(孝敦)이고, 아버지는 수안군수 한(漢)이며, 어머니는 남양 홍씨로 심(深)의 딸이다.

1480년(성종 11) 사마시를 거쳐 1489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 권지부정자·박사·검교 및 감찰을 역임하고, 1495년(연산군 1) 정조사 ( 正朝使 )의 서장관 ( 書狀官 )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정언으로 있으면서 중국사신을 능멸했다는 죄를 받기도 하였다. 이듬해 부수찬·교리를 거쳐 병조정랑으로 승문원교리·춘추관기주관을 겸직해 ≪성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98년 부응교 때 길에서 대신을 만나 말에서 내리지 않아 무례하다는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 그러다가 이듬 해 부사용 ( 副司勇 )의 무반 ( 武班 ) 말단직에 서용된 뒤 훈련원첨정 등을 거치면서 7년 동안 여러 한직을 옮겨다녔다.

1504년 갑자사화 때 윤비 폐위에 관련된 관원들의 처벌을 주장했고, 이어 형조·이조참의, 병조참판을 거쳐 시혜청제조(施惠廳提調)를 겸직하였다.

이듬해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나라에 가서 조선 표류민을 환국시키는 교섭을 담당한 뒤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 이어 중종반정이 일어난 뒤 1506년(중종 1) 동지중추부사로 청승습사(請承襲使)를 겸직하고, 다시 중국에 다녀왔다. 이듬해 동지중추관사를 겸직, ≪연산군일기≫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508년 대사헌에 이르고, 이후 공조·병조 참판, 전라도관찰사·호조참판·경기도관찰사·형조판서·한성부판윤·공조판서 등을 거쳐, 1526년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이행 ( 李荇 )이 그의 비명을 지었다. 시호는 소간(昭簡)이다.

 

임추(任樞)

1482(성종 13)∼1534(중종 2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 ( 豊川 ). 자는 사균(士均). 효돈(孝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한(漢)이고, 아버지는 판서 유겸(由謙)이며, 어머니는 이신(李愼)의 딸이다.

1507년(중종 2)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이어서 같은 해의 식년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였다. 곧 문한관(文翰官 : 문필을 맡은 관원)을 거쳐 1513년 지평을 지낸 뒤 다음해에 교리가 되었다.

1516년 조광조 ( 趙光祖 ) 등과 함께 천문이습관(天文肄習官)이 되었고, 이어서 장령이 되어 언관의 역할 및 언로의 개방에 대해서 상소하였다. 또, 경연에 참여하여 중국 사신이 올 때마다 일어나는 처녀선발 및 그에 따른 헛소문의 금지를 건의하였다.

이후 전한·직제학·좌부승지 등을 역임하고, 1526년 대사간이 되어 시정(時政)에 대한 장문의 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30년 좌승지로 경상도감사에 발탁되었고, 다음해에 한성우윤이 되었다.

그 다음해에 권신 김안로 ( 金安老 )에게 추부하지 않아 다시 강원감사로 외직에 나갔다. 1533년 그 자신은 동지사 ( 冬至使 )로, 아들은 서장관으로 함께 명나라에 파견되는 영광이 있었지만, 귀환 중에 순직하였다.

 

임권(任權)

1486(성종 17) ∼ 1557(명종 1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 ( 豊川 ). 자는 사경(士經), 호는 정곡(靜谷). 보은현감 효돈(孝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수안군수(邃安君守) 한(漢)이고, 아버지는 공조판서 유겸(由謙)이며, 어머니는 청단찰방(靑丹察訪) 이신(李愼)의 딸이다.

1507년(중종 2) 진사가 되고, 1513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 권지부정자에 제수된 뒤 검열 · 정자 · 저작 · 부수찬 · 수찬 · 정언 · 이조 · 정랑 · 병조정랑 등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1519년 지평으로 사림의 공론을 좇아 정국공신 ( 靖國功臣 )의 개정을 주청했고, 기묘사화로 헌납에서 승문원박사로 좌천되었다.

1524년 이후 지평 · 세자시강원필선 · 검상 · 사인 · 세자시강원보덕 · 집의 · 전한 등을 거쳐, 1527년 직제학에 올랐다. 1530년 사인을 거쳐 종부시정으로 있을 때 종친들의 잘못을 철저히 규찰하였다.

이 해 집의로 전보되고, 이조판서 장순손 ( 張順孫 )의 미움을 사서 사섬시정(司贍寺正)으로 좌천되었다. 그 뒤 종부시정 · 사섬시정 · 보덕을 거쳐 다시 집의가 되었을 때, 김안로 ( 金安老 )의 폐정을 논박하다가 대사간 심언광 ( 沈彦光 )의 모함으로 파직되어 예산으로 퇴거하였다.

1537년 김안로 · 허항 ( 許沆 ) · 채무택 ( 蔡無擇 ) 등이 제거되자 봉상시부정을 거쳐 예조참의로 중용되었다. 1539년 동지사로 주청사인 권벌(權 胴 )과 함께 명나라에 가서 종계(宗系)의 정정을 주청하였다.

이후 전라도관찰사 · 동지중추부사 · 병조판서 · 지중추부사를 거쳐 1544년 예조판서로 지의금부사를 겸하고, 빈전제조(殯殿提調)를 맡아 중종의 국장의례를 관장하였다.

1546년(명종 1) 위사원종공신(衛社原從功臣)에 녹선되고, 지춘추관사를 겸임해 ≪ 중종실록 ≫ 과 ≪ 인종실록 ≫ 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좌참찬 · 우참찬에 오르고, 동지경연사 ( 同知經筵事 ) 및 오위도총관을 겸하였다. 1551년 양종(兩宗) 및 선과(禪科)가 다시 설치되자 이단의 혁파를 적극 주장하였다. 시호는 정헌(貞憲)이다.

 

임병(任柄)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 ( 豊川 ). 자는 사측(士則). 효돈(孝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이조판서 한(漢)이고, 아버지는 공조판서 유겸(由謙)이며, 어머니는 청단찰방 이신 ( 李愼 )의 딸이다.

1513년(중종 8) 사마시에 합격하고, 1524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홍문관정자가 되고 전경 ( 典經 )으로서 경연 ( 經筵 )에 참석하였다. 그 뒤 홍문관의 저작·박사 등을 역임하고 1526년 부수찬이 되었으며 교리를 거쳐 이조좌랑에 이르렀다. 글씨에도 뛰어났다

 

임호신(任虎臣)

1506(중종 1) ∼ 1556(명종 1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 ( 豊川 ). 자는 무백(武伯). 한(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서 유겸(由謙)이며, 아버지는 호조참판 추(樞)이다. 1528년(중종 23) 유생전강(儒生殿講) 때 ≪ 대학 ≫ 으로 합격하고, 1531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검열 · 대교를 거쳤다.

1533년 세자시강원설서가 되어 동지사인 아버지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와서 예문관봉교가 되었으나 권신 김안로 ( 金安老 )에 의해 황간현감으로 쫓겨났다. 1538년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시강원필선(侍講院弼善)을 거쳐 1541년 의정부검상, 이듬 해 충청도진휼경차관으로 나가 가흥창 ( 可興倉 ) · 아산창(牙山倉)의 곡식으로 기민을 진휼하는 한편, 수령 · 방백을 문책하였다.

1543년 도원수 이기(李 咬 )의 종사관 ( 從事官 ), 사간, 황해도재상어사로 나가 지방관의 탐학상을 지적, 견책하도록 하였다. 1544년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가 되었으나 신병으로 사직하였다. 이어 군자감정(軍資監正) · 홍문관직제학, 1545년(명종 즉위년) 우부승지에 경연참찬관을 겸하고, 1546년 우승지 · 도승지 · 가선대부 ( 嘉善大夫 )에 올랐다. 1547년 한성부우윤 때 정미조약의 체결에 반대했고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1550년 동지중추부사로 동지춘추관사를 겸하고 ≪ 중종실록 ≫ 편찬에 참여하였다. 1551년 성절사 ( 聖節使 )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이 때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1552년 경연특진관, 이듬 해 한성부좌윤, 1554년 우윤을 거쳐 1555년 형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신병으로 사직하였다. 1556년 호조판서에 기용되었으나 다시 병으로 사직하고 지돈녕부사로 죽었다. 청정(淸淨)하고 신중함이 뛰어나다는 평을 받았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임보신(任輔臣)

?∼1558(명종 1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 ( 豊川 ). 자는 필중(弼仲), 호는 포초(圃樵). 증 이조판서 한(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겸(由謙)이고, 아버지는 추(樞)이며, 어머니는 남효온 ( 南孝溫 )의 딸이다. 익양군 회(益陽君懷)의 사위이다.

1544년(중종 3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전경 ( 典經 )·저작·박사·부수찬·부교리 등을 거쳐, 1551년(명종 6) 교리를 지냈다.

1547년부터 3년 동안 이조좌랑을 역임한 뒤 1551년 수안군수를 거쳐, 강원도·전라도의 암행어사로 나갔다. 1554년 장악원정·승문원판교 등을 거쳐, 1557년 형조참의에 이르렀다.

익양군의 사위라는 이유로 비변사관리로 등용하려 하자 이를 거절하였고, 경연석상에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소학≫의 보급 및 실천을 주장하였으며, 문정왕후 ( 文定王后 )가 종실에 불교진흥정책을 지원하도록 명하였을 때 이에 반대하여 문정왕후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저서로는 ≪병진정사록 丙辰丁巳錄≫이 있다.

 

임내신

현감(縣監) 주(柱)의 아들로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와 전주 부윤(全州府尹)을 지냄.

 

임탁(任鐸), 임현(任鉉)

몽신(夢臣)의 아들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공을 세운 탁(鐸)과 현(鉉) 등이 대(代)를 이어 훌륭한 풍천 임씨(豊川任氏) 가문을 빛냈다.

 

사명대사(四溟大師)

승려의 몸으로 국가(國家)가 위기에 봉착하자 분연히 일어나 의승(義僧)을 이끌고 왜병(倭兵)에 대항하여 전공(戰功)을 세운 사명대사(四溟大師)인데, 그는 자순(子順)의 6세손으로 본명(本名)은 응규(應奎), 법명(法名)은 유정(惟政)이며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지낸 수성(守成)의 둘째 아들이다.

 

임광

1579(선조 12) ∼ 1644(인조 2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 淵 川). 자는 자정(子瀞). 공조판서 유겸(由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종묘서영 간(幹)이고, 아버지는 사헌부감찰 익신(翊臣)이며, 어머니는 완산이씨(完山李氏)로 원기(元紀)의 딸이다.

1609년(광해군 1) 사마시에 합격한 뒤 성균관에 들어가 재사(才士)로서 이름을 떨쳤으나, 정치가 어지러움을 보고 낙향하여 공직에 나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순릉참봉이 되었다가 이듬해 별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풍저창직장( 淵 儲倉直長)을 거쳐 승정원주서 · 성균관전적 · 호조낭관 · 병조낭관을 지내고, 1628년(인조 6) 정언 ( 正言 ), 1632년 지평을 지냈으며, 지방수령으로 나가 함종현령과 영광군수를 지냈다.

다시 중앙관직에 돌아와 홍문관수찬 · 사헌부장령 · 필선이 되고 암행어사로 평안도지방에 내려가 지방행정을 바로잡았다. 또, 균전사 ( 均田使 )가 되어 영남지방을 돌아보고 토지행정을 바로 잡았다.

첨지중추부사로서 통신사가 되어 일본에 다녀왔으며, 그 뒤 좌승지 · 한성우윤이 되었다. 그 때 남쪽지방에 소요가 있었으므로 삼남주사검찰사(三南舟師檢察使)가 되어 삼도수군을 순찰하고 돌아와 형조참판이 되고 오위도총부부총관을 겸하였다.

충주목사 · 안동부사를 거쳐 1642년 황해도관찰사 · 동지중추부사 · 도승지를 지내고, 이듬해 좌부빈객 ( 左副賓客 )으로 김육 ( 金堉 )과 함께 심양(瀋陽)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 ( 昭顯世子 )가 환국하게 되었을 때 이들을 수행하기 위하여 청나라에 갔다가 1644년 그곳에서 죽었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임유후(任有後)

1601(선조 34)∼1673(현종 1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 ( 豊川 ). 자는 효백(孝伯), 호는 만휴(萬休). 윤(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서 국로(國老)이고, 아버지는 홍문관교리 수정(守正)이다.

1626년(인조 4)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627년 정묘호란 때 가주서로 척화를 주장하였다. 이듬해 반란을 음모하던 아우 지후(之後)와 숙부 취정(就正) 등이 죽음을 당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울진 산중으로 내려가 향인을 교유하면서 학문을 연구하였다.

그 뒤 문장이 뛰어나고 지행(至行 : 지극히 훌륭한 행위)이 있다는 조신들의 의론으로 특채되어 1653년(효종 4) 장령이 되었다. 이어 1658년 종성부사가 되어 수항루 ( 受降樓 )를 세우고 학사(學舍)를 지어 변경에 치적이 많았다.

1661년(현종 2) 담양부사가 되고, 1663년 승지를 거쳐 예조참의가 되었다. 그 뒤 1669년 다시 담양부사로 나가 재난에 처한 백성들을 잘 구휼한 관계로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관품도 승자되었다.

이듬해 병조참판이 되자 정언 윤지선 ( 尹趾善 )으로부터 전에 아우가 저질렀던 역모사건을 들어 탄핵을 받았으나 본인이 저지른 죄가 아닐 뿐더러 문재와 행의가 뛰어난 관리임을 내세운 왕의 비호로 무사하였다. 이어 1672년 경기감사로 나갔다가 돌아와 호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은퇴한 뒤 유유자적하며 〈목동가 牧童歌〉를 지었다고 한다. 그는 문장이 뛰어났고, 만년에는 ≪주역≫을 가장 좋아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울진의 고산서원 ( 高山書院 )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정희(貞僖)이다.

 

임한백(任翰伯)

1605(선조 38)∼1664(현종 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 ( 豊川 ). 자는 경익(景翼 또는 慶翼), 호는 남곡(南谷). 열(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로(榮老)이고, 아버지는 정랑 장(章)이며, 어머니는 황정신(黃廷愼)의 딸이다.

1642년(인조 20)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이듬해 지평·정언 등을 지내고, 1644년 사서로서 소현세자 ( 昭顯世子 )가 심양에 볼모로 갈 때 최명길 ( 崔鳴吉 )· 김상헌 ( 金尙憲 ) 등과 함께 배종하였다. 이듬해 돌아와 지제교가 되고 지평에 재임하다가 수찬이 되었다.

1659년(현종 즉위년) 교리로서 춘추관기사관을 겸임하여 ≪효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이어 헌납·영남좌도감시관을 역임하였다.

1663년 길주목사로 임명되어 부임하였으나 외직에 나갔음에 불만을 품고 병을 핑계삼아 행정에 소홀히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음주로 나날을 보내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가자(加資 : 공이나 능력을 인정받아 품계나 자품을 더해 줌.)가 환수되었다. 시문에 뛰어난 재능을 지녀 팔대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임홍망(任弘望)

1635(인조 13) ∼ 1715(숙종 4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 ( 豊川 ). 자는 덕장(德章), 호는 죽실거사(竹室居士). 기(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희지(羲之)이고, 아버지는 증좌참찬 환(喚)이며, 어머니는 평산신씨(平山申氏)로 감역 방헌(邦憲)의 딸이다.

1657년(효종 8) 생원시에 합격하고, 1666년(현종 7)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소속되었다가 도원찰방(桃源察訪) · 가례도감 감조관(嘉禮都監監造官) · 전적을 거쳐 현종이 죽자 산릉도감낭청(山陵都監郎廳)이 되었다.

숙종 때 정언으로 송시열 ( 宋時烈 )의 예론사건에 대하여 적극 옹호하다가 경성판관에 좌천되었고, 다시 울산부사가 되어 송시열의 적소(謫所 : 長 垢 )를 자주 내왕하였다. 뒤에 병조참지 · 승지 · 예조참의 · 황해도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진위사 ( 陳慰使 )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승지가 되었으나 정치가 날로 어지러워짐을 보고 벼슬에서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1689년(숙종 15) 다시 경주부윤이 되어 부임하던 중에 이이(李珥) · 성혼 ( 成渾 )이 문묘에서 쫓겨났다는 소식을 듣고 사표를 냈으나 허락되지 않았으며, 민비 ( 閔妃 )가 폐위되자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 후에 형조참의 · 도승지를 거쳐 지중추부사가 되어 기로소 ( 耆老所 )에 들어갔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고 경사(經史)에 정통하여 이름이 높았으며, 성품이 강직하여 불의에 굴하는 일이 없었다. 저서로는 ≪ 죽실집 ≫ 2책이 있다. 시호는 효정 ( 孝貞 )이다.

 

임방

대사성(大司成)·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한 방( ) 등은 명망 높은 가문을 더욱 유명하게 하였다.

 

임수적(任守迪)

근세(近世)의 명필(名筆)로 형조 참판(刑曹參判)·도승지(都承旨)를 지냄.

 

임정(任挺)

1694(숙종 20)∼1750(영조 2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 ( 豊川 ). 자는 성방(聖方), 호는 호재(扈齋). 양(量)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원(胤元)이고, 아버지는 형조참판 수적(守迪)이며, 어머니는 유이정(柳以井)의 딸이다.

숙종 때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722년(경종 2) 황감시(黃柑試)에서 일등하여 전시에 직부(直赴)되고, 이듬해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문한관을 역임하다가 1728년(영조 4) 지평에 올랐다.

다음해 도당록(都堂錄 : 홍문관의 제학이나 교리를 선발하기 위한 의정부의 제1차 인사기록)에 올랐고, 그 뒤 수찬·부수찬·정언·교리·부교리 등을 번갈아 역임하였다. 1731년 수찬으로 탕평책에 따른 시정의 폐단을 건의하여 왕의 칭찬을 받았다.

1735년 사간이 되었고, 다음해에 응교로서 중시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였다. 곧 승지가 되고, 1740년 대사간에 올랐다. 그 뒤 대사간·승지·이조참의 등을 거듭 역임하다가 1748년 곡산도호부사가 되어 외직에 나갔고 2년 후에 대사성이 되었다.

고금의 시가에 능했으며 글씨도 뛰어났다고 한다. 저서는 ≪호재집≫, 글씨는 해주축성비(海州築城碑), 개성의 계성사비(啓聖祠碑) 등이 남아 있다.

 

임성주(任聖周)

1711(숙종 37) ∼ 1788(정조 12). 조선 후기의 학자.

〔생 애〕 본관은 풍천( 淵 川). 자는 중사(仲思), 호는 녹문(鹿門). 충청북도 청풍 ( 淸風 ) 출신. 아버지는 함흥판관 적(適)이며, 어머니는 호조정랑 윤부(尹扶)의 딸이다. 이재 ( 李縡 )의 문인이다. 청주에 거주하다가 1733년(영조 9) 사마시에 합격, 1750년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가 되고 시직(侍直)에 승진하였으나 곧 사직하고 1758년 공주의 녹문(鹿門)에 은거하였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한 뒤 동궁을 보도(輔導)하고 지방관을 지내다가 다시 녹문에 은거하여 학문연구로 여생을 보냈다. 초년에는 스승의 학설을 신봉하여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하였으나 중년에 이르러 기존의 학설을 비판하고 호락(湖洛)의 양론을 기일원론적(氣一元論的) 입장에서 종합하여 자신의 학설을 수립하였다. 저서로 ≪ 녹문집 ≫ 26권이 있으며, 그 가운데 〈 녹려잡지 鹿廬雜識 〉 · 〈 산록 散錄 〉 등이 중요하다.

〔철학사상〕 당시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의 동이(同異)에 대한 입장의 차이로 호론(湖論)과 낙론(洛論)이 분열되었다. 인물성동이론 ( 人物性同異論 )은 정주(程朱)의 이일분수설(理一分殊說)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 이일분수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로서 기정진 ( 奇正鎭 )이 분수지리(分殊之理)의 개별성의 논리적 근거를 이일지리(理一之理)에 정초시키려고 한 반면, 그는 보편성의 근거를 기 자체에서 찾고 있다.

그는 우주의 본원적 일기(一氣)를 제시하여 그것을 원기(元氣)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장재(張載)가 말한 태허태화(太虛太和) 및 맹자의 호연지기(浩然之氣)에 해당된다.

보편적 일자(一者)가 현상계의 개체로 나타날 때 띠는 특수성을 그는 생의 ( 生意 )를 본질로 하는 기의 자기원인적 전개로 보고 자연이연(自然而然)한 내재적 법칙을 도(道) 또는 이(理)라고 하여, 기와 논리적으로 일단 구별된 소이연자(所以然者)를 이로 보려는 주희(朱熹)의 이기론 ( 理氣論 )을 비판한다. 이와 같은 일원적 이기론의 구조로써 이일분수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기일분수설을 제시한다.

그는 태극으로부터 음양오행, 만상(萬象)으로서의 전개를 원기가 분수지기(分殊之氣)로 개체화되는 과정이라고 보고, 기의 특수성만을 인정하는 이일분수설을 비판하여, 이의 보편성은 곧 기의 보편성에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일분수설은 주리적(主理的)으로 말한 것이므로 분수도 이에 속하여야 하며, 주기적(主氣的)으로 말한다면 기일분수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성론 ( 人性論 )에 있어서 성즉기(性卽氣)를 주장하고 있는데, 본연지성 ( 本然之性 )과 기질지성 ( 氣質之性 )도 구분하지 않고 인성의 선(善)은 곧 기질의 선이요, 기질 이외에 선한 성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요, 기질의 본체는 담일(湛一)한 것으로 천지의 본원적 기와 상통하는 것인데, 기기(氣機)가 움직일 때 사재(渣滓)가 용사 ( 用事 )함으로써 심성이 흐려져 본래의 선성(善性)이 엄폐된다고 하였다.

임성주의 철학은 일원론적 구조 위에서 정초되고 있으며, 이기를 기일원론적 관념으로 통일함으로써 조선시대 성리학의 결정(結晶)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임정주(任靖周)

1727(영조 2) ∼ 1796(정조 20). 조선 후기의 문신 · 학자. 본관은 풍천( 淵 川). 자는 치공(穉恭). 호는 운호(雲湖). 아버지는 함흥판관 적(適)이며, 어머니는 호조정랑 윤부(尹扶)의 딸이다. 성주(聖周)의 아우이다.

1762년(영조 38) 사마시에 합격, 1772년 동몽교관에 제수, 익위사시직(翊衛司侍直)을 거쳐, 서연관으로 세손(世孫 : 정조)을 보필하며 학문을 강론하였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한 뒤 홍국영 ( 洪國榮 )의 세도정치에 밀려나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 · 송화현감 · 사옹원주부 · 온릉령(溫陵令) · 청산현감 등의 미관말직만 역임하였다.

청산현감 때 선정이 보고되어 왕의 특명으로 가자(加資)되고 중추(中樞)의 직함을 받았다. 평생 동안 영리에 마음쓰지 않고 오직 위기(爲己)의 학문에 전심하여 거경궁리 ( 居敬窮理 )로써 상달(上達)하는 문로(門路)를 삼고, 체험하여 존심양성(存心養性)에 오르도록 힘썼다.

그의 학문은 형 성주의 학통을 이어받아 이기이원론 ( 理氣二元論 )을 배격하고 이기일원의 주기설(主氣說)을 확립하였다. 저서로는 ≪ 운호집 ≫ 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任應奎(임응규)  대사의 일화.

 

1

        그네 띠는 처녀를 보고

팔공산 금강산 청량산 등을 다니며 선을 닦아 오도한 사명대사(四溟大師)는 임진왜란 당시 승병장(僧兵長)이며 외교가로, 일본에 건너가 많은 문제를 외교적으로 해결하였고, 또한 포로로 잡혀간 우리나라 사람들을 구해오는 등 많은 공을 세운 분이다.

속성은 풍천임씨(豊川任氏)고 아명(兒名)은 응규(應奎)이었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그의 재주는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깜작 놀라게 한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어느 해 봄, 영남루에 올라 바람을 쐬며 주위의 경치를 구경하고 있는데 남천강 건너 숲 속에서 처녀들이 그네를 매어 놓고 뛰고 있었다.

신록의 아름다운 초록빛 속에 울긋불긋한 고운 옷자락이 마치 재비가  이리저리 하늘을 날렵하게 날듯, 나비가 꽃향기에 취해 날라 다니는 듯 아름답기 그지없다.

젊은 응규(應奎)는 이를 보고 다음과 같은 시를 한 수 읊었다.

桃花一點落來儀(도화일점낙래의)
燕子三春飛去態(연자삼춘비거태)
非天非地半空中(비천비지반공중)
綠水靑山自進退(녹수청산자진퇴)

        복숭아꽃 한 송이 떨어져 오는 듯
        제비가 봄철에 날아가는 듯
        하늘도 땅도 아닌 반공중에
        속수청산이 저절로 오락가락 하노라.

그네를 뛰는 처녀에게는 녹수청산이 스스로 다가 왔다가 스스로 물러간다는 뜻으로 지은 아름다운 시이다.
사명대사에게도 이러한 시정도 있었다.

 

2

물고기를 먹고

후처가 종을 시켜 전처소생인 장남을 장가 든 첫날밤에 죽였는데 이 사실을 탐지한 며느리가 자살하였다.
이에 임유정은 후처와 후처 소생을 집에 가두어 불을 질러 타죽게 하고 진사였던 자신은 산으로 들어가 중이 되었다. 뒷날 임유정은 이름보다 호로 널리 알려졌는데 이가 곧 사명당(四溟堂)이다.

유정은 어느 날 휴정(休靜)과 추어탕을 먹은 뒤 승려가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먹은 것을 모두 토하기로 하였다. 휴정은 산 미꾸라지를 토하였으나, 상좌로 있던 유정은 치어 같은 송어 물고기를 토하였다. 이를 부끄럽게 여긴 유정이 열심히 수도하여 뒷날 훌륭한 고승이 되었다고 전한다. 한편 송어 같은 물고기는 중의 턱에서 나왔다고 하여 중텍이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3

        풀과 나무에도 생명이

젊어 한 때 사명대사(四溟大師)는 어느 집에서 머슴살이를 한 적이 있었다.
주인은 나무를 해오라고 하였는데, 저녁에 돌아오는데 그는 소를 몰고 빈 지게만 지고 왔다.

주인이 왜 그랬느냐고 물으니 다음과 같은 시로 대답을 했다.

草草花孕胎(초초화잉태)
松松鶴架棲(송송학가서)
携鎌無着處(휴겸무착처)
騎牛下西溪(기우하서계)

        풀무다 꽃마다 봉오리 꽃을 맺어있고
        솔이란 솔마다 학이 앉아 있으니
        낫을 가져갔으나 댈 곳이 없어
        소만 타고 시내로 내려 왔지요.

한 포기의 풀과 나무도 함부로 벨 수 없는 자비심이 그의 가슴 깊은 곳에 싹트고 있었음을 잘 나타내는 글이다.

 

 

4

       수염

스승 서산대사(西山大師)가, 머리는 깎았어도 수염을 기르고 있는 사명대사(四溟大師)에게
[삭발위승(削髮爲僧)이라 하였는데, 머리는 깎았으면서도 왜 수염은 그냥 두었는고?]
[머리털을 깎았는 까닭은 속세를 떠났다는 뜻이고, 수염을 그냥 두었음은 대장부의 기개(氣槪)를 표시함이 옵니다.]

두 대사는 서로 마주보고 껄껄 웃었다고 한다.

 

 

5

  보물은 너의 머리

금강산 유점사에 침입한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은 모든 스님들을 결박하고, 서릿발 같은 총칼을 세워 위엄을 떨고 있는 틈 사이로 한 석장(錫杖)을 집고 수염을 휘날리며 걸어 나가 가등청정(加藤淸正)과 마주 앉았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뭇으로 글을 써서 의사를 전하는데, 먼저 가등이
[此寺有寶乎(이 절에 보물이 있나?)]
[山僧無以爲寶. 但 汝頭爲寶(산중에 중 보물 될 것 없고, 다만 너의 머리가 보물이로다.)]
성난 눈초리로 사명을 한참 노려보던 가등이 다시 붓을 들어
[何謂也(무슨 뜻인가?)]
사명은 즉시
[방금 우리나라에서 왜장의 목을 배어 오면 높은 상과 벼슬을 내린다고 했으니, 네 머리가 바로 보물인데, 보물은 네가 갖고 있으면서 어디 달리 보물을 구하느냐?]
[......하하하하.]
가등은 기가차서 억지로 웃고 말았다.

당시의 기록은
言下淸正强笑(언하청정강소)로 기재되어 있다.

 

 

출전 <하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25

準(준)

29

彬(빈),植(식)

東(동)

33

源(원),洙(수)

漢(한)

26

鎬(호)

30

赫(혁)熙(희)

烈(열)

34

桂(계),相(상)

九(구)

27

宰(재)

31

中(중),均(균)

世(세)

35

炳(병),憲(헌)

煥(환)

28

公(공),淳(순)

32

鐘(종),善(선)

鎭(진)

36

孝(효),範(범)

圭(규)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풍천 임씨(豊川任氏)는 남한(南韓)에 총 24,682 가구, 103,10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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