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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결성장씨(張)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張(결성장씨)

 

 

본관(本貫): 결성(結城)

시조(始祖): 장사(張楒)

유래(由來):

 

 결성 장씨(結城張氏)의 시조(始祖) 장사(張楒)는 930년(고려 태조13) 후백제(後百濟) 견훤군(甄萱軍)을 크게 무찔러 삼중대광보사벽상공신태사(三重大匡保社壁臣太師)에 오른 정필(貞弼)의 14세손이며 중랑장(中郞將),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낸 상겸(尙謙)의 네째 아들이다.

 그는 고려조(高麗朝)에 추성보리찬화안사공신(推誠輔理贊化安社功臣)으로 광정대부(匡靖大夫)에 올라 삼한벽상삼중대광문하시중판전리 감찰사사(三韓壁上三重大匡門下侍中判典理監察司事)를 역임하였고, 결성부원군(結城府院君)에 봉(封)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사를 시조로 삼고 본관(本貫)을 결성(結城)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장하(張夏)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관인. 본관은 결성 ( 結城 ). 용문(用文)의 아들이다. 홍건적이 침입하였을 때 개경을 수복한 공으로 1363년(공민왕 12) 전의주부(典儀注簿)로서 2등공신에 올랐다.

1372년 신돈 ( 辛旽 )이 제거된 뒤 이보림(李寶林) 등과 함께 간관으로 있으면서 신돈의 일당인 김문현 ( 金文鉉 )을 탄핵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378년(우왕 4) 밀직부사에 올랐으며, 1381년 가뭄이 무척 심하자 밀직제학으로서 개경 대정 ( 大井 )에 비를 빌었더니 비가 내려 포상을 받았다.

다음해 각 도의 산성순심사(山城巡審使)에 임명되었다. 1383년 한양부윤으로 있으면서 의성에서 왜구를 쳐부수기도 하였고, 몰래 숨어 들어온 왜구의 간첩 3명을 체포하는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1388년(창왕 즉위년) 제도(諸道)의 안렴사(安廉使)를 도관찰출척사 ( 都觀察黜陟使 )로 개편하였는데, 이때 경상도도관찰출척사(慶尙道都觀察黜陟使)가 되었다.

다음해 문하평리 ( 門下評理 )에 올랐으나, 1390년(공양왕 2) 명나라에 몰래 숨어 들어가서 이성계 ( 李成桂 ) 일파를 모함하였다는 윤이(尹 紛 ) · 이초(李初)의 사건에 연루되어 탄핵을 받고 먼곳으로 유배를 당하였다가 얼마 뒤에 풀려 나왔다. 조선개국 후에는 결성군(結城君)에 봉하여졌다.

 

장언호(張彦浩)

조선조(朝鮮朝)에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장서익(張瑞翼)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

 

장후중(張後中)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였다.

 

장혼(張混)

1759(영조 35) ∼ 1828(순조 28). 조선 후기의 학자 · 시인. 본관은 결성 ( 結城 ). 자는 원일(元一), 호는 이이엄(而已 渼 ) 또는 공공자(空空子). 우벽(友璧)의 아들로 서울에서 대대로 살던 중인 출신이다. 그의 증조인 필한(弼漢)은 유명한 위항시인(委巷詩人)으로 ≪ 소대풍요 昭代風謠 ≫ 에 시가 실렸다.

아버지 우벽은 문음(공신이나 전 · 현직 고관의 자제를 과거에 의하지 않고 관리로 채용하던 일)으로 통례원 ( 通禮院 ) 우통례 ( 右通禮 )에 보직되었다. 그러나 곧 그만두고 가객으로 일생을 보냈다고 한다. 아들 창(昶)과 욱(旭), 손자 효무(孝懋)도 시로 이름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상당한 문학세가였음을 알 수 있다.

장혼은 어린 시절부터 지극한 효자로 이름이 났다. 그는 시에 천재적인 소질을 보였다. 그가 시 한 수를 지으면 서로 읊어 전해졌다고 한다. 1790년 정조가 감인소(監印所)를 설치하자 대제학이던 오재순 ( 吳載純 )의 추천으로 교서관사준(校書館司準)이 되어 서적편찬에 종사하였다. 1816년경까지 여기에서 근무하면서 사서삼경을 비롯한 수많은 어정서(御定書)를 교정하였다. ≪ 율곡전서 ≫ 등의 문집류를 수교(修校)하고 간행하였다.

장혼은 인왕산 옥류동(玉流洞) 골짜기에 ‘ 이이엄 ’ 이라는 집을 짓고 자기와 같이 중인에 속하는 위항시인들과 더불어 시주(詩酒)를 즐겼다. 1786년 여름에 천수경 ( 千壽慶 ) 등과 함께 송석원시사 ( 松石園詩社 )를 결성하여 그 모임을 이끌어 가는 중추적 구실을 담당하였다.

1797년에는 천수경과 더불어 ≪ 풍요속선 風謠續選 ≫ 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이이엄활자라는 목활자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것으로 그의 수많은 편저들을 인쇄하고, 주변의 위항시인들의 시문집을 간행하였다.

장혼의 편저작은 대단히 많다. ≪ 호산외기 壺山外記 ≫ 에 책명이 소개되어 있다. 자신의 문집 ≪ 비단집 扮 段集 ≫ 20권이 있었으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중국의 고대로부터 명대(明代)까지의 시가를 수집하고 분류한 ≪ 시종 詩宗 ≫ 과 ≪ 당률집영 唐律集英 ≫ · ≪ 이견 利見 ≫ · ≪ 아희원람 兒戱原覽 ≫ · ≪ 몽유편 蒙喩篇 ≫ · ≪ 근취편 近取篇 ≫ · ≪ 절용방 切用方 ≫ · ≪ 동습수방도 童習數方圖 ≫ 등이 간행되었다.

≪ 고문가칙 古文柯則 ≫ · ≪ 정하지훈 庭下至訓 ≫ · ≪ 대동고식 大東故寔 ≫ · ≪ 소단광악 騷壇廣樂 ≫ · ≪ 초학자휘 初學字彙 ≫ · ≪ 동민수지 東民須知 ≫ · ≪ 문단성보 文壇姓譜 ≫ · ≪ 제의도식 祭儀圖式 ≫ 등이 가장(家藏)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하지 않는다. 현재 전하는 것으로는 ≪ 이이자초 而已自艸 ≫ · ≪ 동사촬요 東史撮要 ≫ 가 있다. 문집 ≪ 이이엄집 ≫ 14권이 전한다.

장혼의 저술은 상당히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있다. 특히 아동용 교과서가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어서 주목된다. 그 중에 ≪ 계몽편 啓蒙篇 ≫ 은 1913년에서 1937년까지 열 차례나 간행되어 아동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시는 표현이 새롭고 용어의 구사가 자유롭다는 평을 받았다. 고체(古體)에 뛰어났다.

 

장덕진(張德震)

?∼1924. 독립운동가. 황해도 재령 출신. 붕도(鵬道)의 아들이다. 1920년 8월 하순 미국의원단 49명이 내한할 때, 광제청년단장(廣濟靑年團長) 오동진 ( 吳東振 )의 명을 받고 박태열 ( 朴泰烈 ) 등과 황해도일대의 일제기관을 폭파하려 하였으나, 거사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 뒤 문일민(文一民) 등과 평안남도 경찰부에 폭탄을 던져 담장을 파괴하고 일본인 경관 2명을 사살, 도주하여 궐석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22년 8월 강석훈(姜錫勳)·이한호(李漢浩)·박태열·김성득(金成得)·방달성(方達成)·박진(朴震)·정유린(鄭有隣)·박관해(朴寬海)·최찬학(崔燦學) 등과 함께 연서하여 국민대표회주비회(國民代表會籌備會) 후원을 약속하는 선언문을 발표하여, 조국독립을 위한 민족의 대동단결을 호소하였다.

1923년 12월에는 최천호 ( 崔天浩 )와 함께 상해임시정부에서 설치한 교민단 ( 僑民團 ) 의경대원(義警隊員)이 임명되었으나 다음해 상해에서 중국인에게 피살되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유고로는 ≪장덕진전≫이 있다.

 

장덕수(張德秀)

1895(고종 32) ∼ 1947. 독립운동가 · 정치가. 호는 설산(雪山). 황해도 재령 출신. 붕도(鵬道)의 아들이며, 김성수(金性洙) · 송진우 ( 宋鎭禹 )와 교유하였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10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소학교육도 변변히 받기가 힘들었다. 진남포의 한 기관의 급사로 있으면서 강의록으로 공부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학부를 졸업하였다.

모교 은사가 조선총독부의 관리가 되기를 종용하였으나, 조선총독부의 머슴이 되려고 배운 공부가 아니라며 이를 거부하고 상해(上海)로 망명, 조국광복운동에 가담하였다.

3 · 1운동의 모의를 위하여 국내에 들어오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전라도 하의도에 거주제한을 당하였으나 여운형 ( 呂運亨 )의 이른바 ‘ 동경회담 ’ 에 통역으로 동행하게 되어 거주제한에서 풀려났다.

1920년 ≪ 동아일보 ≫ 창간과 더불어 초대 주필이 되었다. 변설(辯說)에도 능하였지만 문재(文才)에도 뛰어났다. 그가 집필한 창간사는 명문장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1923년 미국유학의 길에 올라 컬럼비아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 한때 보성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였다. 1936년 동아일보사 부사장으로 언론계에 복귀하였으나, ≪ 동아일보 ≫ 가 폐간당한 뒤에는 조용히 광복되는 날까지 기다렸다.

광복과 더불어 송진우 · 김병로 ( 金炳魯 ) 등과 한국민주당을 창당, 외교부장 · 정치부장 등을 지내면서 보수진영의 대표적 이론가로 활약하였다. 광복 직후 민주국가를 위하여 노력하다가 현직경관인 암살범에 의하여 피살되었다.

 

 

출전 <하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41

淳(순)

47

植(식)

53

烈(열)

42

來(래)

48

赫(혁)

54

遠(원)

43

勳(훈)

49

珪(규)

55

鎬(호)

44

均(균)

50

鏞(용)

56

漢(한)

45

善(선)

51

演(연)

57

 

46

澤(택)

52

東(동)

58

 

5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결성 장씨(結城張氏)는 남한(南韓)에 총 4,758가구, 19,43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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