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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장씨(張)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張(덕수장씨)

 

 

본관(本貫): 덕수(德水)

시조(始祖): 장순룡(張舜龍:일명 舜)

유래(由來):

 

덕수 장씨(德水張氏)의 시조(始祖) 장순룡(張舜龍:일명 舜)은 원(元)나라 필도치 경(卿:일명 백 창)의 아들이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순룡(舜龍)을 시조(始祖)로 하고 덕수(德水)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장양(張良)

순룡(舜龍)의 맏아들 양(良)이 판사(判事)를 지냈다.

 

장운(張芸)

순룡의 둘째 아들 운(芸)은 신호위 대장군(神虎衛大將軍)을 역임했다.

 

장우(張羽)

양의 손자인 우(羽)는 문과에 급제한 후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오르고 이조 판서(吏曹判書) 및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역임했다.

 

장정(張珽)

? ∼ 1508(중종 3).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덕수 ( 德水 ).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고, 그 뒤 의주판관으로서 무재(武才)를 발휘하여 이름을 떨쳤다. 1490년(성종 21) 한성판관으로 전임하여 대마도치위관(對馬島致慰官)으로 일본에 다녀왔고, 그 뒤 품계를 뛰어넘어 특별히 하동군수에 제수되었다.

1496년(연산군 2) 노모봉양을 위하여 중앙관직으로의 전임을 요청하자 대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납되었고, 1500년 다시 변방으로 나가 창성부사가 되었는데, 이 때 의창 ( 義倉 )에 불이 났다. 이 때문에 파직이 될 뻔하였으나 그의 무재를 중히 여긴 재상들에 의하여 불문에 붙여졌다.

1504년 수원부사가 되어 연산군의 총애를 받고 있던 장녹수 ( 張綠水 )가 부당하게 차지한 농토를 농민에게 나누어주어 명관으로 이름이 났으나 이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연산군의 학정이 날로 심해져 박원종 ( 朴元宗 ) · 성희안 ( 成希顔 ) 등이 반정을 도모하자, 이에 가담하여 군대동원의 책임을 맡았고, 거사중에 진성대군(晋成大君 : 중종)의 사저를 호위하였다.

그 공으로 정국공신 ( 靖國功臣 ) 1등에 책록되고, 하음군(河陰君)에 봉해졌다. 이 해 함경북도병마절도사에 제수되었고 하원군(河源君)에 개봉되었으며, 품계가 자헌대부 ( 資憲大夫 )에 올랐다. 1507년(중종 2) 박원종의 추천으로 아들 언량(彦亮)과 사위 신숙(申 瞞 )도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장언량(張彦良)

호조 판서(戶曹判書) 언량(彦良)은 중종(中宗) 때 무과(武科)에 올라 북청 판관(北靑判官)을 역임한 후 명종조(明宗朝)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이르렀다.

 

장운익(張雲翼)

1561(명종 16)∼1599(선조 3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덕수 ( 德水 ). 자는 만리(萬里), 호는 서촌(西村). 승문원판교 옥(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장례원사의 임중 ( 任重 )이고, 아버지는 목천현감 일(逸)이며, 어머니는 성자제(成子濟)의 딸이다. 우의정 유(維)의 아버지이다.

1579년(선조 12) 사마시에 합격하고, 1582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전적·공조좌랑을 거쳐 고산찰방으로 좌천되었다가 예조정랑으로 돌아왔다. 선천군수로 있을 때에는 평안도 목민관으로는 으뜸가는 치적을 남겼다.

장령을 거쳐, 1591년 양양부사로 재직중 정철 ( 鄭澈 )의 일당이라 하여 온성으로 귀양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귀양에서 풀려나 망혜령(芒鞋嶺)을 넘어 왕을 호종하였다. 특히, 중국어에 능통하여 왕의 총애를 받았고, 이듬해 집의로서 주청사 ( 奏請使 )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도승지·해주목사·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이조판서로서 접반사 ( 接伴使 )가 되어 명나라 제독 마귀(麻貴)를 영접하고, 그와 함께 울산싸움에 참전하였다. 뒤에 형조판서가 되었고, 사후에는 영의정의 추증되고, 덕수부원군(德水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정민(貞敏)이다.

 

장유(張維)

1587(선조 20) ∼ 1638(인조 1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덕수 ( 德水 ). 자는 지국(持國), 호는 계곡(谿谷) · 묵소(默所). 장례원사의 자중(自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목천현감 일(逸)이고, 아버지는 판서 운익(雲翼)이며, 어머니는 판윤 박숭원(朴崇元)의 딸이다. 우의정 김상용 ( 金尙容 )의 사위로 효종비 인선왕후 ( 仁宣王后 )의 아버지이다. 김장생 ( 金長生 )의 문인이다.

1605년(선조 39) 사마시를 거쳐 1609년(광해군 1)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 호당(湖堂 : 독서당의 다른 이름)에 들어갔다. 이듬해 겸설서를 거쳐 검열 · 주서 등을 지냈다. 1612년 김직재 ( 金直哉 )의 무옥(誣獄)에 연루해 파직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해 정사공신 ( 靖社功臣 ) 2등에 녹훈되고 봉교를 거쳐 전적과 예조 · 이조의 낭관을 지내고, 그 뒤 대사간 · 대사성 ·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 ( 李适 )의 난 때 왕을 공주로 호종한 공으로 이듬해 신풍군(新豊君)에 책봉되어 이조참판 · 부제학 · 대사헌 등을 지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로 왕을 호종하였다.

그 뒤 대제학으로 동지경연사 ( 同知經筵事 )를 겸임했고, 1629년 나만갑 ( 羅萬甲 )을 신구(伸救 : 억울하다고 여긴 죄를 바로잡아 구제함)하다가 나주목사로 좌천되었다.

다음 해 대사헌 · 좌부빈객 ( 左副賓客 ) · 예조판서 · 이조판서 등을 역임했으며, 1631년 원종추숭론(元宗追崇論)이 대두하자 반대하고 전례문답(典禮問答) 8조를 지어 왕에게 바쳤다. 1636년 병자호란 때 공조판서로 최명길 ( 崔鳴吉 )과 더불어 강화론을 주장하였다.

이듬해 예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의 부음(訃音)으로 18차례나 사직소를 올려 끝내 사퇴했고, 장례 후 과로로 병사하였다.

일찍이 양명학 ( 陽明學 )에 접한 그는 당시 주자학 ( 朱子學 )의 편협한 학문 풍토를 비판해, 학문에 실심(實心)이 없이 명분에만 빠지면 허학(虛學)이 되고 만다 하였다. 또한,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 마음을 바로 알고 행동을 통해 진실을 인식하려 했던 양명학적 사고방식을 가졌다.

이식 ( 李植 )은 그의 학설이 주자(朱子)와 반대된 것이 많다 하여 육왕학파(陸王學派)로 지적했으나, 송시열 ( 宋時烈 )은 “ 그는 문장이 뛰어나고 의리가 정자(程子)와 주자를 주로 했으므로 그와 더불어 비교할만한 이가 없다. ” 고 칭송하였다.

천문 · 지리 · 의술 · 병서 등 각종 학문에 능통했고, 서화와 특히 문장에 뛰어나 이정구 ( 李廷龜 ) · 신흠 ( 申欽 ) · 이식 등과 더불어 조선 문학의 사대가(四大家)라는 칭호를 받았다.

많은 저서가 있다고 하나 대부분 없어지고 현재 ≪ 계곡만필 ≫ · ≪ 계곡집 ≫ · ≪ 음부경주해 陰符經注解 ≫ 가 전한다.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장신(張紳)

? ∼ 1637(인조 15). 조선 후기의 문신. 1619년(광해군 11) 자기 소유의 집터를 왕실에 바쳐 벼슬을 얻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시 형 유(維)와 함께, 당시 궁궐을 수비하던 장인 이흥립 ( 李興立 )을 설득하여 내응하게 하는 한편, 직접 왕궁진입에도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유는 정사공신 ( 靖社功臣 ) 2등에, 그는 3등에 책록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이후 남한산성을 수비하기 위하여 삼전도 ( 三田渡 )를 요새화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그해 황해도감사가 되자 황주성을 수축하였다.

그러던 중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이 가도( 假 島)에 근거를 두고 후금에 항전하다가 황해도로 옮겨온다는 소문을 듣고, 이를 꺼려 그 이듬해 감사직을 사퇴하였다. 그 뒤 수원부사, 다시 황해도감사 · 평안도감사를 지냈고, 1636년 강화유수로 전임되었다.

그 해 12월 병자호란을 당하여 강도 ( 江都 )방위를 맡게 되었는데, 전세가 불리하여지자 왕실과 노모를 버리고 먼저 도망하여 강도가 함락되었다. 사헌부에서 그를 참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전일의 공로를 생각하여 자진하게 하였다.

 

장선징(張善生)

1614(광해군 6)∼1678(숙종 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덕수 ( 德水 ). 자는 정지(淨之), 호는 두곡(杜谷). 목천현령 일(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형조판서 운익(雲翼)이고, 아버지는 대제학 ( 大提學 ) 유(維)이며, 어머니는 김상용(金尙容)의 딸이다. 효종 비 인선왕후 (仁宣王后)의 오빠이다.

인조 때 공신의 아들이라 하여 음보로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에 보직되었으며, 세자익위사위수를 거쳐 1648년(인조 26) 김화현감을 지냈다. 효종 때 공조정랑·배천군수를 역임하였으며, 현종 때 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를 지냈다.

1662년(현종 3) 철원부사로 있을 때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성균관직강·사헌부지평·장령·부교리·헌납·교리·수찬·사간·우부승지·병조참지 등을 지냈다. 병조참판으로 아버지의 작위를 승습하여 풍양군(豊陽君)에 봉하여진 뒤 대사간·도승지·대사헌·공조판서·예조판서·우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1674년 숙종이 즉위한 뒤 좌참찬·판의금부사·지경연춘추관사(知經筵春秋館事) 등을 역임하였다. 1677년(숙종 3) 한성부판윤으로 있을 때 외척 김우명(金佑明)의 무소(誣訴)로 송시열 ( 宋時烈 )이 거제부에 안치되자 이에 대한 철회를 간청하였으나 숙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 뒤 사헌부집의 이상 ( 李翔 )이 소를 올려 신원(伸寃)하여줄 것을 청하다가 관직을 삭탈당하자, 이상의 관직삭탈명령을 환수해줄 것을 주청하다가 척신으로서 사(私)를 앞세우고 공(公)을 뒤로 한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송시열의 신원을 간청하는 상소를 하였으나 용납되지 않자 고향에 돌아가 두문불출하였다. 시호는 정장(正莊)이다.

 

 

출전 <하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21

世(세)

29

桓(환)

37

鎔(용)

22

鎭(진)

30

燮(섭)

38

求(구)

23

淳(순)

31

圭(규)

39

材(재)

24

秀(수)

32

鎬(호)

40

燁(엽)

25

慶(경)

33

源(원)

41

基(기)

26

在(재)

34

杓(표)

42

鐸(탁)

27

鉉(현)

35

志(지)

43

海(해)

28

永(영)

36

坤(곤)

44

植(식)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덕수 장씨(德水張氏)는 남한(南韓)에 총 4,554가구, 19,36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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