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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장씨(張)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張(안동장씨)

 

 

본관(本貫): 안동(安東)

시조(始祖): 장정필(張貞弼)

유래(由來):

 

안동장씨(安東 張氏)의 시조(始祖) 장정필(張貞弼)은 888년(신라 진덕여왕2) 중국(中國) 절강성(浙江省) 소흥부(蘇興府)에서 대사마 대장군(大司馬大將軍) 원(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원(源)이 어지러운 난국을 피하여 동래(東來)할 때 함께 따라 와 강원도 강릉 땅에 정착, 후에 경북 노전(盧田)으로 옮겨 살았는데, 930년(고려 태조 13) 고창(古昌) 성주(城主)인 김선평(金宣平), 판관(判官) 권 행(權 幸)과 함께 태조(太祖)를 도와 후백제(後百濟) 견 훤(甄萱)의 군대를 대파한 공(功)으로 삼한벽상삼대광아보공신태사영운사(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太師領雲事)에 오르고 고창군(古昌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정필(貞弼)을 시조로 삼고, 본관(本貫)을 안동(安東)으로하여 세계를 이어왔으며, 모든 장씨(張氏)는 덕수(德水)와 절강(浙江)을 제외하고는 그의 후손(後孫)들이다.

 

가문의 중요 인물

 

장사길(張思吉)

?∼1418(세종 즉위년).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 본관은 안동(安東). 아버지는 의주만호 열(烈 : 고려사에는 侶)이며, 개국공신 사정(思靖)의 형이다.

아버지는 본래 안동에서 살았으나 북방으로 이주해 의주의 참리(站吏)가 되었으며, 사어(射御)에 능했다 한다. 그 뒤 권귀(權貴 : 힘과 권세가 있는 귀족)에게 뇌물을 바쳐 만호가 되어 의주지방의 토호 ( 土豪 )로 자리잡았으며, 고려 조정에 복종하지 않고 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직을 세습해 만호가 되었다. 이성계 ( 李成桂 )에게 무예를 인정받아 위화도에서 함께 회군한 뒤 회군공신 ( 回軍功臣 )에 서훈되고, 1390년(공양왕 2) 밀직부사를 거쳐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었다.

1392년(태조 1) 아우 사정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해 개국공신 1등에 봉해지고,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서 의흥친군위동지절제사(義興親軍衛同知節制使)를 겸해 이성계의 친병(親兵)을 통솔하였다.

이듬해 황해도의 문화· 영녕 ( 永寧 )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했으며, 1398년 왕자의 난 때 방원(芳遠)을 도와 정사공신 ( 定社功臣 ) 2등으로 영가군(永嘉君)으로 개봉(改封)된 뒤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판공조사(判工曹事)·의흥삼군부우군절제사(義興三軍府右軍節制使)를 지내고, 이어 화산군(花山君)으로 개봉되었다.

1400년(정종 2) 사헌부로부터 제2차 왕자의 난 때 사정과 함께 반역을 모의했다는 탄핵을 받았으나 왕의 비호로 무사하였다. 태종 때 우군총제(右軍摠制)·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 등을 지낸 뒤,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에 진봉되어 공직을 물러났다.

용맹이 뛰어나고 병략(兵略)에 익숙했으며, 수염이 배까지 닿았다 한다. 첩기(妾妓)를 아내로 삼아 좋은 평을 얻지 못하였다. 의주토호의 반란이 멈추고, 의주에서 여연 ( 閭延 )에 이르는 압록강연안 1,000리를 조선 영토로 편입하는 데 공헌하였다. 시호는 희양(僖襄)이다.

 

장홍효(張興孝)

1564(명종 19) ∼ 1633(인조 11).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행원(行源), 호는 경당(敬堂). 부장(部長) 팽수(彭壽)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이다. 김성일 ( 金誠一 ) · 유성룡 ( 柳成龍 )을 사사하고, 뒤에 정구 ( 鄭逑 )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문명이 높았다.

관계진출을 단념하고 후진의 교도에 전념하여 제자가 수백명에 달하였다. 특히, 역학 ( 易學 )을 깊이 연구하여 호방평(胡方平)의 ≪ 역학계몽통석 易學啓蒙通釋 ≫ 의 분배절기도(分配節氣圖)를 보고 오류된 것을 의심, 이를 고증, 연구하여 20년 만에 십이권도(十二圈圖)를 추연(推演)하였다.

12월을 배열하고 24절후를 분배하고, 또 원회운세(元會運世)와 세월일진(歲月日辰)의 수를 그 위에 더하여 〈 일원소장도 一元消長圖 〉 라 하였는데, 장현광 ( 張顯光 )이 이를 보고는 “ 참으로 전인이 발명하지 못한 것을 발명하였다. ” 라고 극찬하였다.

문하에 이휘일 ( 李徽逸 ) 등 학자가 있다. 1633년에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교지가 도착되기 전에 죽었다. 뒤에 지평에 추증되고 안동의 경광서원 ( 鏡光書院 )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 경당문집 ≫ 이 있다.

 

장세량(張世良)

1627(인조 5) ∼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언경(彦卿). 호는 화암(和庵). 민덕(敏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염(濂)이고, 아버지는 운상(雲翔)이며, 어머니는 박응물(朴應物)의 딸이다.

1651년(효종 2) 생원으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공조좌랑을 거쳐 여러 지방관을 역임하고 희천군수에 이르렀다. 이로 인하여 평양의 외성에 복거하였으며 자손들도 대대로 이 곳에서 살게 되었다.

일찍이 선우 협(鮮于浹)으로부터 학업을 배워 성리학에 정통하였으며, 특히 역학에 밝아 세상사람들이 ‘ 우역동(禹易東 : 고려시대 주역에 밝은 禹倬의 별칭) ’ 이라고 칭하였다

 

장천용(張天用)

1703(숙종 29)∼1785(정조 9).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여룡(汝龍). 의주 출신. 증군기시정 후건(厚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호조참의 우익(羽翼)이고, 아버지는 한규(漢奎)이며, 어머니는 경주김씨로 우필(禹弼)의 딸이다.

1735년(영조 11) 정시무과(庭試武科)에 급제, 평안도 변장(邊將)을 거쳐 1746년 수문장으로 있을 때 성실한 직무수행이 왕의 눈에 띄어 훈련원주부로 승진하였다. 1750년 황해도 우후 ( 虞候 )를 지내고 백마외성(白馬外城)의 축성감을 맡아 대역사를 완수한 공으로 절충장군 ( 折衝將軍 )에 가자되었다.

1756년 이후 오위장·첨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다음 칠곡부사 재임 중 어사로부터 선정보고가 있었고, 임기를 마친 뒤에도 주민들의 간절한 청원으로 연장하여 유임한 일이 있었다. 그 뒤 내금위장·사복시정을 역임하고, 창성부사 겸 방어사로 있을 때 역시 선정이 드러나 뒤에 혜정비(惠政碑)가 세워졌다.

1773년 나이 70에 이르러 가선대부 ( 嘉善大夫 )에 가자됨과 아울러 동지중추부사가 제수되었으며, 영조의 신임이 두터워 누차 왕명에 의한 직접적인 승은(陞恩)을 입었다. 그가 죽자 지방수령 재직시에 은혜를 입은 칠곡과 창성의 백성들이 멀리 의주에까지 부의(賻儀)를 보내고 혹은 직접 상가의 일을 분주히 도왔다고 한다.

 

장몽설(張夢設)

순조(純祖) 때 홍경래(洪景來)의 난(亂)에 공(功)을 세움.

 

장낙현(張洛賢)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운거(雲擧). 아버지는 군수 몽열(夢說)이다.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몸이 민첩하여 무장의 재목이라 일컬었다. 1807년(순조 7) 무과에 급제하여 별군직으로 승전색 ( 承傳色 )이 되었다가 얼마 뒤 경성판관이 되었다.

1812년 홍경래 ( 洪景來 )가 난을 일으키자 의주부에 들어가서 의병을 초모하여 장정 70명과 포수 30명을 얻었다. 정주성으로 달려가서 관군을 도와 남문을 공격하여 성을 점령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이어 순천군수가 되어서는 백성을 사랑하고 세역을 감면하여 선정을 베풀었다.

1818년에 홍경래의 난에 공을 세운 사람으로 응분의 보상을 받지 못한 사람을 조사할 때 명단이 올라가서 국가에서 기회를 보아서 선천(宣薦 : 무과 출신으로 행실이 좋은 선전관으로 추천함.)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뒤 죽산부사가 되었으나 1840년(헌종 6) 지방관원은 교자(轎子)를 탈 수 없게 한 제명(制命 : 제도적인 명령)을 어겨서 한 때 면직되었다.

 

 

안동장씨 시조 묘

 

張貞弼(장정필) 高麗建國功臣 安東張氏 始祖

 

永嘉志(영가지) 冢墓條(총묘조)공의 묘는 ()의 서쪽 城谷里(성곡리)에 있다.고 전하는데, 성곡리 부민들이 아마도 이 묘를 훼손히고 많은 석물들은 파손하여 그 자리마저 흔적을 없애 버볐으나 燈臺石(등대석)만은 아직도 남아 있다. 이것이 장태사 묘를 가리키는 유일한 것이라고 하는데 姓孫(성손)한 사람이 嘉靖(가정) 계혜(명종 13. 1563) 년간에 誌石(지석)을 찾고자 의심이 가는 곳을 파 보았으나 그 자리는 아직도 남아 있지만 은수저 한 벌만 발견하고 나머지는 없었다.라 하여 후손들이 몹시 찾을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후 헌종 7년 신축(1841)에 종중회의에 발의하여 府營(부영)에 제소하여 古塚(고총)破墓(파묘)하였으나 소득이 없고, 묘 아래 虛塚(허총)이 있어 발술하니 (), () 두 글자의 지석이 발견되었다 한다.(후손 九鶴(구학)이 기술한 발굴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祭壇記(제단기)는 순조 15년 을해(1815)에 사현부지평 李周楨(이주정)撰文(찬문)이며 신도비는 규정각직학 張吉相(장길상) 찬문이다.

 

 

그 후 순조 갑자 4(1804)太師廟(태사묘)에서 예부터 소장되어 오던 宣德(선덕) 정미(세종 9, 1427)년에 邑誌(읍지)를 발견 했는데 그 기록에 장태사 묘는 부의 서쪽 17城谷(성곡)에 있다.하여 그 지명을 詳考(상고)하니 과연 큰 고분이 있는데, 옛날 豊山(풍산) 南氏(남씨)가 점유하고 있어, 관부에 파보라고 성소 하였으나, 남씨가 불응하여 순조 6년 병인(1806) 1220일에 그곳에 설단하고 제향하게 되었다,

 

 

 

 

안동장씨 시조 장정필공 묘 제단기

 

장태사묘 제단기

안동부의 서쪽으로 17리를 나가면 성곡이 있다. 성곡의 언덕에 큰 묘가 있으니 이 큰 묘의 옆 정갈한 땅에 제단을 쌓아 고려 태사 장공 포음 선생 휘 정필공의 제사를 모시니 가히 이 땅에 후손들이 있다고 하겠다.

삼가 이 문순공의 삼공신묘기를 살피면, 공은 권김 양 태사와 더불어 모두 고창군 사람이다. 역적의 무리 견훤이 천하를 휩쓸었을 때 공이 양 태사와 더불어 고려 태조를 도와 병산대첩을 올려 군부의 원수를 설욕해 백성들에게 큰 공덕이 있었고 군은 이에 부로 승격되었다.

()의 충의의 습속은 이로부터 더욱 힘쓰게 되었다. 그 뒤에 명종, 신종, 공민왕 때의 변란을 막은 것은 모두 죽을힘을 다해 공로를 세우니 이것은 누가 인도한 것인가. 이러한 연유로 해서 부의 사람들의 옳음은 그 공덕을 잊지 않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경건히 제사지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독 공의 의관을 갈무리한 산소가 불행히도 실전 되었으니 우주의 옛과 지금에 깊이 눈여겨둔 자를 만나지 못한 것은 거의 장씨들의 무궁한 한이라 하겠다.

순조 4년 갑자(1804)에 후손 동혁과 익한 등이 안동부에 예부터 갈무리되어 익던 문적을 보다가 선덕 정미(1427)에 기록된 장태사묘는 부의 서쪽 몇 리 무슨 땅에 있다는 것을 찾으니 지금 제단을 설치한 곳이다. 그 위에 한 커다란 고분이 있는데 옛 노인들이 서로 전하기를 장태사묘라 하니 무릇 지명이나 잇수가 딱 부합한다. 또 양 태사의 묘 사이는 각각 2리가 되며 차례로 땅을 차지한 순서가 대략 태사묘에 배향된 위치와 같으니 이 또한 기이하다 하겠다. 그러니 이 미을에 사는 남씨들은 일찍이 이 언덕에 무덤을 썼고 이 큰 무덤을 자기들 선조의 묘라고 했다. 부사에게서 비록 지석이 나오나 파서 징험하라는 교시가 있기는 했으나 형세가 징험을 행하지 못하게 했다. 이것이 이 제단의 논의가 일어난 까닭이며 제단의 설단은 김태사 제단 설단을 따라서 한 것이다.

오호라! 장씨들이 이 제단을 설치하기 전에는 허둥지둥하며 고적을 찾아 헤맸고, 분주히 관가에 소송하며 귀하고 천함을 가리지 않고 한 마음으로 도로를 분주히 오가며 심지어 꿈에까지 방불한 만남에 이르렀다. 이미 설단한데 이르러서는 장공의 하늘에 있는 밝은 영혼은 마치 물이 땅속에 스며들어서 없어지지 않고 근원이 길어서 끊어지지 않는 것과 같지 않겠는가. 이것으로 자손과 선조가 더불어 한 기운이 흘러 통해 비록 천년이나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도 그 정성스러움이 밝게 나타나게 된다는 이치를 가리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설단은 병인년(1806) 10월에 했고 비석은 같은 해 섣달에 세웠다. 두어 해가 지나서 제수를 마련하는 재사가 이루어졌다. 그 사이에 이미 일을 주관하던 이도 세상을 달리한 이가 있어 한탄스럽다. 그러나 건의하고 관가에 호소하는 일을 이끈 것은 중구와 일섭이었다. 계획하고 시작하는 것을 담당하는 이는 익한과 세규였으며 예산과 작업에 정성스러운 힘을 다해 시종 현명하게 힘쓴 이는 귀서와 원필이다. 나에게 이 글을 쓰라고 부탁한 이는 곧 세규다.

증자가 말하기를 마지막을 삼가 정성을 다하고 지나간 먼 일을 그리워하면 백성의 덕이 도타운 풍속이 된다고 했다. 장씨들이 선조를 그리워하는 정성이 저와 같이 진지하니 고을 백성들은 어떠하겠는가.

통훈대부 전 행 사헌부 지평 고성 이주정 삼가 쓰다.

 

 

 

 

 

 

 

출전 <하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31

載(재)

37

鎔(용)

43

永(영)

32

善(선)

38

洙(수)

44

相(상)

33

泰(태)

39

來(래)

45

煥(환)

34

柱(주)

40

燁(엽)

46

基(기)

35

勳(훈)

41

孝(효)

47

鎬(호)

36

玹(현)

42

鐵(철)

48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안동 장씨(安東張氏)는 남한(南韓)에 총 15,086가구, 64,81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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