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張(영동장씨)
본관(本貫): 영동(永同)
시조(始祖): 장항(張沆)
유래(由來):
영동 장씨(永同張氏)의 시조(始祖)인 장항(張沆)은 고려(高麗) 충숙왕조(忠肅王朝)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사헌부 규정(司憲府糾正)을 거쳐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로 충숙왕(忠肅王)이 원(元)나라에 5년 동안 억류(抑留)당하였을 때 시종하여 귀국 후 나주 목사(羅州牧使)가 되었다.
그후 1327년(충숙왕 14) 2등공신(二等功臣)에 책록되고 충혜왕조(忠惠王朝)에 밀직제학(密直提學), 평양윤(平壤尹)을 역임, 영산군(永山君)에 봉(封)해졌다. 1345년(충목 왕 1) 참리(參理),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1348년(충목왕 4) 판삼사사(判三司事) 이제현(李齊賢)과 경사도감(經史都監)의 제조(提調)가 되었고, 공민왕(恭愍王) 때 예학(禮學) 밝아 종묘(宗廟)의 예복(禮服)과 악기(樂器)를 수리했다. 영동(永同)의 화암서원(花巖書院)에 제향(祭享)되었으며, 청렴결백하고 문명이 높았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通報)>를 살펴 보면 그의 후손(後孫)으로 예빈령(禮賓令)을 지낸 윤신(允愼)과 정랑(正郞)을 지낸 익(翼)이 있으나, 그의 선대(先代)나 후손(後孫)의 소목(昭穆)에 대해서는 상고(詳考)할 수 없다.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영동 장씨(永同張氏)는 남한(南韓)에 총 203가구, 1,03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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