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李(원주이씨)-1
본관(本貫): 원주(原州)1
시조(始祖): 이신우(李申佑)
유래(由來):
원주 이씨(原州李氏)의 시조(始祖) 이신우(李申佑)는 신라의 전신(前身)인 진한(辰韓) 양산촌장(楊山村長)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의 원손(遠孫)이며 소판공(蘇判公) 이거명(李居明 : 경주 이씨의 일세조)의 12세손으로 1004년(고려 목종 7)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문종조(文宗朝)에서 병부 상서(兵部尙書)를 지내고 나라에 공(功)을 세워 경흥군(慶興君)에 봉해졌다. 그로 인하여 후손들은 신우(申佑)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경주 이씨(慶州李氏)에서 분적(分籍)하여 본관(本貫)을 원주(原州)로 삼게 되었으며, 후대로 내려오면서 판도공파(版圖公派)·월성군파(月城君派)·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 : 종파)·시랑공파(侍郞公派 : 뒤에 경원군공파와 강릉공파로 분파됨) 등 크게 네 계통으로 갈라져서 세계(世系)를 잇게 되었다.
가문의 중요 인물
이반계(李攀桂)
시조의 13세손 반계(攀桂 : 자성의 아들)가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신호위 영중랑장(神虎衛領中郞將)을 지내고 예부 상서(禮部尙書)에 올랐으나 고려의 국운(國運)이 기울자 망국의 한을 안고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을 지키다가 끝내 견디지 못하고 고려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恭讓王)을 따라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과 같이 강원도 치악산(稚岳山)으로 은거(隱居)하였다. 태종(太宗)과 친분이 두터웠던 반계는 누차 영상(領相)의 벼슬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끝내 거절하자, 태종(太宗)이 그를 만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식음을 전폐하다가 7일 만에 <은(殷) 나라가 이미 망했으니 누구의 녹(祿)을 먹겠는가(殷室己喪誰粟司食)>하며 세상을 떠나니, 그의 절의(節義)를 가상히 여긴 왕이 영의정(領議政)에 추증하고 경원군(慶原君)에 추봉하였다.
이이
반계의 아들 4형제 중 장남 이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수제자(首弟子)로서 학식(學識)이 고명(高明)하고 정주학(程朱學)에 정통한 유학자(儒學者)였으나 태종이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의 벼슬을 내려 관직에 오를 것을 종용하자 자식들을 불러놓고 "충효(忠孝)는 우리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가훈(家訓)이다. 일찍이 아버지께서 벼슬을 버리시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를 지켜 순사(殉死)하셨으니 내가 벼슬에 나가는 것은 자식으로서의 어찌 신자(臣子)의 도리라 하겠는가" 하면서 음독 자결하여 충의(忠義)의 가통(家統)을 지켰다.
이견(李肩)
반계의 둘째 아들인 견(肩)은 정산 현감(定山縣監)으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고을 백성들이 그의 청백(淸白)한 치적(治積)을 영원하게 기리기 위하여 <영사불망철비(永思不忘鐵碑)>를 세웠으며, 그의 묘소가 있는 여주군 북내면 운촌리(驪州郡北內面雲村里)는 그의 호(號)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족(李足), 이요(李腰)
견의 아우 요(腰 : 파주 목사)와 족(足 : 산음 현감)도 모두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병(病)을 핑계로 사직하고 향리(鄕里)로 돌아와 여생을 보내니 세상 사람들은 이들 형제를 <일문사충(一門四忠)>으로 일컬었다.
이영화(李永華)
반계의 아우 을계(乙桂 : 통례문 봉례를 지냄)의 후손에서는 생원(生員) 분의 아들 영화(永華 : 을계의 손자)가 유명했다. 세종(世宗) 때 무과(武科)에 급제한 그는 감찰(監察)·직산 현감(稷山縣監)을 거쳐 단종(端宗) 때 강릉 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로 나갔으나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王位)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개탄하여 벼슬을 버린 후 홀로 천 리(千里) 길을 남행(南行)하여 해남(海南)의 무진산(無塵山)에 산막(山幕)을 짓고 세상을 등지며 은거(隱居)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그의 절의(節義)를 숭모하여 산막이 있었던 마을 이름을 산막리(山幕里)라 하며 그의 묘소가 있는 산(山) 이름을 이영산(李英山)이라 부르고 있다. 그 후 영화의 후손들은 그의 뜻을 이어받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을 통하여 아홉 사람의 충신(忠臣)이 배출되었고, 삼대(三代)에 걸쳐 효자(孝子)가 나와서 가문의 영예를 누렸으며, 영와의 묘역에는 <구충삼효(九忠
三孝)>의 사당(祠堂)과 정문(旌門)이 세워져서 충절(忠節) 전통가문인 원주 이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원주 이씨(原州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13,248가구, 56,00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출전 <한민족대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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