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李(원주이씨)-2
본관(本貫): 원주(原州)2
시조(始祖): 이춘계(李椿桂)
유래(由來):
원주 이씨(原州李氏)는 중국 중원(中國中原) 출신인 선조(先祖 : 성명 미상)가 한(漢)나라 고조(高組: 한나라 시조왕, 재위기간 기원전 206 ∼ 195) 때 진란(秦亂)을 피하여 동래(東來)하여 진한(辰韓)에 정착(定着)하였다. 그 후 그의 후손 이진민(李眞民)이 신라 흘해왕(訖解王 : 제16대 왕, 재위기간 310 ∼ 356) 때 관직을 역임했고, 그의 28세손 춘계(椿桂)가 고려 의종(毅宗) 때 병부 상서(兵部尙書)를 지낸 후 원주(原州)에 정착세거(定着世居)하였으므로 후손들이 춘계(椿桂)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본관(本貫)을 원주(原州)로 삼게 되었다.
가문의 중요 인물
이겸(李謙)
시조 춘계의 현손(玄孫) 겸(謙)이 고려 때 호장(戶長)을 지내고 예의판서(禮儀判書)에 이르렀다.
이희백(李希伯)
겸의 증손(曾孫) 희백(希伯)은 남부 부령(南部副令)을 역임하여 가세(家勢)를 일으켜 중흥조(中興祖)로 받들고 있다.
이인(李璘)
정순대부(正順大夫)로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를 지낸 녹규(祿圭 : 회백의 아들)의 둘째 아들 인(璘)이 <동국군자(東國君子)>로 불리워져 개성 두문동(開城杜門洞) 모현사에 배향되었다.
이윤남(李胤男)
통사랑(通仕郞) 몽호(夢虎)의 아들 윤남(胤男)은 조선 인조(仁祖) 때 횡성(橫城)의 반적(叛賊) 인거(仁居)를 토벌(討伐)하는데 공(功)을 세워 소무3등공신(昭武三等功臣)으로 원성군(原城郡)에 봉해져서 크게 무용을 떨쳤다.
이응순(李應順),이응인(李應寅)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한 욱(旭)의 아들 응순(應順)과 응인(應寅) 형제는 임진왜란 때 선조(宣祖)가 의주(義州)로 피난갈 때 안주(安州)에 있는 청천강(淸川江)을 무사히 건너게 해준 공(功)으로 호성3등공신(扈聖三等功臣)에 책록되고 익흥부원군(益興府院君)과 원흥부원군(原興府院
君)에 각각 봉해져서 가문의 영예를 누렸다.
이침(李琛)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강원도 병마절도사(江原道兵馬節度使)를 역임했다.
이방진(李邦珍)
재령현령(載寧縣令)을 역임하였다.
이덕립(李德立)
무산 절제사(茂山節制使)를 역임했다.
이성준(李成俊), 이덕의(李德義)
목사(牧使)를 역임했다.
이석조(李碩祚)
군수(郡守)를 역임했다.
이강중(李剛中)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역임했다.
이만매(李萬枚)
감찰(監察)를 역임했다.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원주 이씨(原州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681가구, 2,78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출전 <한민족대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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