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ail : juntonggahun@naver.com
>> 한국의 성씨


나주임씨(林)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나주임씨)

 

본관(本貫): 나주(羅州)

시조(始祖): 임비(林庇)

유래(由來):

 

나주 임씨(羅州林氏)의 시조(始祖) 임비(林庇)는 고려조(高麗朝)에서 벼슬을 지내고, 충렬왕(忠烈王)이 원()나라를 다녀올 때 호종(扈從)했던 공으로 보좌 2등공신(輔佐二等功臣)에 책록 되어 철권(鐵券)을 하사(下賜)받았으며, 뒤에 상장군(上將軍)에 올랐다.

 

가문의 중요 인물

 

임탁(林卓)

시조의 9세손 탁(: 호군 선의 아들)이 고려 말에 해남 감무(海南監務)을 역임한 후 고려의 국운이 기울고 조선(朝鮮)이 개국되자 망국의 한을 가슴에 안은 채 송도(松都) 부조현(不朝峴)에서 조천관(朝天冠)을 벗고 북쪽을 향해 통곡하면서 금성(錦城) 회진(會津)으로 내려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을 지켰으며 두문동(杜門洞) 72()의 한 사람으로 후세에 추앙을 받았고 그로부터 나주 임씨의 시원(始源)을 이루게 되었다.

 

임붕(林鵬)

1486(성종 1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중거(仲擧), 호는 귀래당(歸來堂). 시소(始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귀연(貴椽)이고, 아버지는 평()이며, 어머니는 김로(金潞)의 딸이다. 명종 때 승문원정자를 지낸 복()의 아버지이고, 선조 때 정랑을 지내고 시인으로 유명한 제()의 할아버지이다.

1510(중종 5) 생원이 되었다.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 ( 趙光祖 ) 일파가 화를 입게 되자 그를 구출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였다. 유생들이 대궐 마당에 들어가 호곡(號哭)하자 왕은 주모자를 감금하기까지 하였다.

그는 소를 올려 유생들이 옥에 갇혔으니 신 등이 홀로 편안히 있을 수 없다. ” 하고 생원으로 대학생 240여명을 이끌고 궐문 밖에서 명령을 기다렸다. 3일째 되는 날 왕은 갇힌 자를 석방하고 상소에 답하며 타일러 보냈다.

다음해 과거시험의 제목을 낼 때 시관이 간사한 집권자에게 아부하기 위하여 사류(士類 : 조광조 등 기묘명현들)를 간사한 무리로 지칭함을 보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 어찌 차마 이 시에 글을 지으랴! ” 하고 붓을 던지고 나와버렸다. 1521(중종 16)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삼사를 두루 지내고 벼슬은 승지 · 병사에서 그쳤다.

 

임복(林復)

1521(중종 16)1576(선조 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희인(希仁), 호는 풍암(楓巖). 귀연(貴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평()이고, 아버지는 승지 붕()이며, 어머니는 이종의(李宗義)의 딸이다.

1540(중종 35) 사마시를 거쳐 1546(명종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정자에 등용되었다가 이듬해 양재역(良才驛)의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삭주에 유배되었다.

1551년 순회세자 ( 順懷世子 )의 탄생으로 특사령이 내려져 고향에 돌아갔다가 선조 초기에 박사에 임명되었으나 무고를 받아 취임하지 못하고 고향에 은거하였다. 젊었을 때부터 기상이 높았으며, 왕래하는 벗들은 모두 당대의 일류명사들이었다.

특히, 윤결 ( 尹潔 이운손(李雲孫) 등과 교분이 두터웠고 가난하게 살면서도 이에 개의하지 않고 산과 호수를 찾아 시를 읊으며 유유자적하였다.

 

임진(林晉)

복의 아우 진()은 무신(武臣)으로 제주 목사(濟州牧使)5도 병마절도사(五道兵馬節度使)를 역임하며 선정(善政)을 베풀어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고 청정비(淸政碑)가 세워졌다.

 

임서

1570(선조 3) 1624(인조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나주(羅州). 초명은 업( ). 자는 자신(子愼), 호는 석촌(石村). 나주 출생.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붕()이고, 아버지는 정자 복()이며, 어머니는 서열(徐說)의 딸이다.

1589(선조 22)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9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승문원권지정자에 뽑히고, 1601년 승정원주서에 제수되었다가 성균관전적에 승진하고, 이어 공조 · 예조 · 병조의 좌랑을 거쳐 전라도안핵사 · 무장현감 등을 지냈다.

1610(광해군 2) 병조정랑이 되었고 이듬해 지평으로 있을 때 정인홍 ( 鄭仁弘 )이 이언적 ( 李彦迪 ) · 이황 ( 李滉 )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하였다가 성균관 유생들에 의하여 유적(儒籍)에서 삭제되자 그는 수성찰방(輸城察訪)으로 좌천되고, 이어 덕원군수로 나갔다가 파직되었다.

1612년 봉산군수가 되고 이어 승지 등을 역임하다가, 폐모론이 일어나자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621년 공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다시 고향에 내려갔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안동부사가 되고, 이어 황해도관찰사가 되어 쌓였던 폐단을 일소하고 농업의 권장과 군사의 조련 등에 힘썼다.

이듬해 이괄 ( 李适 )의 난이 일어나자 도원수 장만 ( 張晩 )을 도와 적을 토벌하는 한편, 군량을 보급하는 등 열성을 다하여 그 공으로 가선대부 ( 嘉善大夫 )에 승계(陞階)되고 임기가 만료되자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도총부부총관에 제수되었다. 입조(立朝) 26년 동안 출입이 깨끗하여 칭송을 받았다. 저서로 석촌유고 1권이 있다.

 

임제(林悌)

1549(명종 4) 1587(선조20). 조선 중기의 시인. 자는 자순(子順), 호는 백호(白湖) · 풍강(楓江) · 소치(嘯癡) · 벽산 ( 碧山 ) · 겸재(謙齋). 본관은 나주(羅州). 절도사 진()의 맏아들이다.

임제는 어려서부터 지나치게 자유분방하여 스승이 따로 없다가 20세가 넘어서야 성운 ( 成運 )을 사사하였다. 교속(敎束)에 얽매이기보다는 창루(娼樓)와 주사(酒肆)를 배회하면서 살았다. 23세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이에 창루와 주사를 그만두고 한때는 글공부에 뜻을 두어 몇 번 과거에도 응시하였다. 그러나 번번이 낙방하였다. 창루와 주사에서 벗어나 현실세계로 뛰어든 그의 눈에는 부조리와 당쟁만이 가득 찼다.

임제가 22세 되던 어느 겨울날 호서(湖西)를 거쳐 서울로 가는 길에 우연히 지은 시가 성운에게 전해진 것이 계기가 되어 성운을 스승으로 모셨다. 그로부터 3년간 학업에 정진하였다. 그 때에 중용 800번이나 읽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임제는 157628세에 속리산에서 성운을 하직하고, 생원 · 진사에 합격하였다. 이듬해에 알성시에 급제한 뒤 흥양현감 · 서도병마사 · 북도병마사 · 예조정랑을 거쳐 홍문관지제교를 지냈다. 그러나 서로 헐뜯고 비방하고 질시하면서 편당을 지어 공명을 탈취하려는 속물들의 비열한 몰골들이 그의 호방한 성격에 용납되지 않았다. 벼슬에 대한 선망과 매력, 흥미와 관심은 차차 멀어져 가고 환멸과 절망과 울분과 실의가 가슴속에 사무쳤다. 그러기에 10년 간의 관직생활은 아무런 의의가 없었다.

임제는 벼슬에 환멸을 느껴 유람하였다. 가는 곳마다 숱한 일화를 남겼다. 사람들은 임제를 기인이라 하고 또 법도에 어긋난 사람이라 하였다. 그래서 임제의 글은 취하되 사람은 사귀기를 꺼렸다. 서도병마사로 임명되어 임지로 부임하는 길에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가 시조 한 수를 짓고 제사지냈다가 임지에 부임도 하기 전에 파직당한 것과 기생 한우(寒雨)와 주고받은 시조의 일화, 평양기생과 평양감사에 얽힌 로맨스도 유명하다.

성운이 세상을 등진 이래로 지기(知己 ; 친구 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가 끊어지고, 이리저리 방황하다 고향인 회진리에서 39세로 죽었다. 운명하기 전에 여러 아들에게 천하의 여러 나라가 제왕을 일컫지 않은 나라가 없었다. 오직 우리 나라만은 끝내 제왕을 일컫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못난 나라에 태어나서 죽는 것이 무엇이 아깝겠느냐! 너희들은 조금도 슬퍼할 것이 없느니라. ” 고 한 뒤에 내가 죽거든 곡을 하지 마라. ” 는 유언을 남겼다. 칼과 피리를 좋아하고 방랑하며 술과 여인과 친구를 사귀었다.

임제는 호협한 성격과 불편부당을 고집하는 사람이다. 수성지 愁城誌 · 화사 花史 · 원생몽유록 元生夢遊錄 3편의 한문소설이 있다. 그의 작품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이밖에 시조 3수와 임백호집 4권이 있다.

 

임탄(林坦)

제의 아들 탄()은 벼슬을 하지 않았으나 시명(詩名)이 높았다.

 

임환

1561(명종 16) 1608(선조 41).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자중(子中), 호는 습정(習靜). 전라병마우후 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경주부윤 붕()이고, 아버지는 평안도절도사 진()이며, 어머니는 선전관 윤기(尹 句 )의 딸이다.

1590(선조 23)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천일 ( 金千鎰 ) 밑에서 종사관으로서 군무(軍務)를 맡았다. 김천일의 군대가 강화에 진을 치고 있었을 때 당시 수안에 피난하였던 왕세자를 찾아가 남하하여 중흥의 기업을 세울 것을 청하고 사포별제(司圃別提)가 되어 돌아왔다.

적이 물러간 뒤에 먼저 서울에 들어가 건학(建學)의 필요성을 주장하였으며, 다시 김천일을 좇아 남하하는 적을 추격하였으나 상주에 이르러 병을 얻어 귀가하였다. 또한, 전란으로 인하여 많은 유민이 생기자 이를 진휼하는 데 힘쓰기도 하였다.

정유재란이 일어나 이순신 ( 李舜臣 )이 보화도(寶化島)에서 군량이 떨어졌을 때 자기 집의 곡식 수백석을 지출하였으며, 전라도에서 의병을 모아 대장이 되어 8도에 격서(檄書)를 보내 백성의 궐기를 호소하였다. 이 소식이 조정에 전하여 공조좌랑에 보직되었으며 수천의 적병과 대치하면서 고두성(孤頭城)을 지켰다.

이 때 그의 군대는 용맹을 떨쳐 진사군(進士軍)이라는 군호를 얻었다. 뒤에 무주현감 · 문화현령을 거쳤으나 조정의 권신들의 미움을 사서 끝내는 벼슬을 그만두고 향리에 돌아와 후진양성에 여생을 바쳤다.

 

임담(林潭)

1596(선조 29) 1652(효종 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나주(羅州).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복()이고, 아버지는 관찰사 서( )이며, 어머니는 구성부사 임식 ( 林植 )의 딸이다.

1616(광해군 8) 생원이 되고, 1635(인조 1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병자호란 때 사헌부지평으로 남한산성에 들어가 총융사의 종사관이 되어 남격대(南格臺)를 수비하였고, 화의가 성립된 뒤 진휼어사(賑恤御史)로 호남지방에 내려갔다.

1639년 좌승지로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고, 1644년 경상도관찰사로 서원이 사당화하는 폐습을 상소하였다. 1646년 충청도관찰사로 유탁 ( 柳濯 )의 모반사건을 처결, 그 공으로 품계가 오르고 토지를 하사받았다.

그 뒤 형조 · 예조 · 병조 · 이조의 참판과 대사간 · 도승지를 거쳐 이조판서가 되고, 1650(효종 1) 다시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지경연사(知經筵事)를 겸하였다. 1652년 청나라 사신의 반송사(伴送使)로 다녀오다가 가산에서 죽었다.

천품이 영오(穎悟 : 밝고 명석함)하고 풍의(風儀)가 활달하였으며, 희노(喜怒)를 표정에 나타내지 않고 호오(好惡)에 치우침이 없었다. 식견이 넓고 깊었으며 전략에도 밝았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임타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공을 세워 정사원종공신(靖社原從功臣)에 책록되고 9군의 목사(牧使)와 부사(府使)를 지낸 후 시명(詩名)을 떨졌다.

 

임게

이 괄(李 适)의 난에 의병(義兵)을 일으켰다.

 

임세량(林世良)

안산 군수(安山郡守)와 장성 부사(長城府使)를 지내며 선정(善政)을 베풀어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졌다.

 

임영(林泳)

1649(인조 27)1696(숙종 2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덕함(德涵). 호는 창계(滄溪). 아버지는 군수 일유(一儒)이며, 어머니는 임천조씨(林川趙氏)로 석형(錫馨)의 딸이다. 이단상 ( 李端相 박세채 ( 朴世采 )의 문인이다.

1665(현종 6) 사마시에 장원하였고, 1671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호당 ( 湖堂 )에 뽑혀 사가독서하였다. 그 뒤 이조정랑·검상·부제학·대사헌·전라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694(숙종 20)에 대사간·개성부유수 등을 역임, 이듬해 부제학으로 있을 때 병이 들어 약물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그 뒤 참판에까지 이르렀다. 뜻이 크고 박식하였으며, 소성(小成)에 만족하지 않고 천인성명설(天人性命說)을 깊이 연구하였다. 경전과 역사서에 두루 정통하였고, 제자백가의 글에도 밝았으며, 문장에도 뛰어났다.

뒤에 송시열 ( 宋時烈 송준길 ( 宋浚吉 )에게도 수학하여, 이기설 ( 理氣說 )에 있어서 이이(李珥)의 이기일원론 ( 理氣一元論 )에는 찬성하고 기발이승설(氣發理乘說)에는 반대하였다. 나주의 창계서원 ( 滄溪書院 ), 함평의 수산사(水山祠)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창계집27권이 있다.

 

임상덕(林象德)

1683(숙종 9)1719(숙종 45).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윤보(潤甫이호(彛好). 호는 노촌(老村). 아버지는 도사 세공(世恭)이며, 어머니는 이형생(李逈生)의 딸이다. 큰아버지 세온(世溫)에게 입양되었으며, 윤증 ( 尹拯 )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어릴 때부터 가까운 집안인 임영 ( 林泳 )의 학문의 영향을 받았다.

1705(숙종 31) 증광문과에 갑과로 장원, 문학·수찬을 거쳐 1709년 남평현감(南平縣監)이 되었다가 사가독서 ( 賜暇讀書 )하였다. 1710년 이조정랑으로 사서를 겸하였으나 사직되었다가 다시 취임하였다. 뒤에 호당 ( 湖堂 ) 응제(應製)에 수석하여 초모(貂帽)를 하사받았다.

홍문관교리를 거쳐 진산군수·능주목사(綾州牧使) 등을 역임, 대사간에 올랐으나 37세에 병사하였다. 경세(經世)의 뜻을 품고 당시의 제도와 시책들을 경장(更張)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여 많은 건의책을 내놓았으며, 위기지학 ( 爲己之學 )과 성리학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우리나라 역사에 관심을 기울여 많은 연구 업적을 남겼다. 대표적인 제자로는 김응상(金應祥) 등이 있다. 저서로는 동사회강 東史會綱·노촌집이 있다.

 

임한수(林翰洙)

한수(翰洙)는 철종(哲宗) 때 강원도와 함경도 관찰사를 지내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임창택(林昌澤)

1682(숙종 8)1723(경종 3).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대윤(大潤). 호는 숭악(崧嶽). 아버지는 절충장군 ( 折衝將軍 ) 영준(英儁)이며, 어머니는 개성김씨로 국건(國健)의 딸이다.

1711(숙종 37) 사마시에 합격하고 송도의 백운동(白雲洞)에 서당을 짓고 후진양성에 힘썼다. 고체시 ( 古體詩 )를 비롯하여 각체의 문장에 능통하였고, 한나라 사마천(司馬遷)과 반고(班固)의 문장을 추모하여 그들의 문체를 모방하였으며, 당나라 이백(李白)의 시를 좋아하여 애송하였다.

1732(영조 8) 생전에 학행과 문장이 사회에 끼친 공로로 특별히 사헌부지평에 추증되었으며, 숭남사(崧南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숭악집4권이 전한다.

 

임용상(林龍相)

1877(고종 14)1958. 조선 말기의 의병장.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충서(忠瑞). 호는 중호(中虎). 경상북도 청송 출신. 효수(孝洙)의 아들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일제에 대항하여 거의를 결심하고 김재서(金在瑞) 등과 의병을 조직하여 동해창의대장(東海倡義大將)에 추대되어 청하·영덕 등지에서 일본군 주재소를 습격하여 큰 피해를 주었다.

1907년 정용기 ( 鄭鏞基 )를 중심으로 의병진을 결성하기 위하여 각 지방별로 계획을 추진하는 담당자를 선정할 때, 서종락(徐鍾洛) 등과 청송지역을 맡아 산남의진 성립에 기여하였다.

그 해 4월 산남의진은 청하읍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정용기가 투옥되고 전력이 약화되어 7월경 해산되었으나, 이듬해 4월 다시 의진이 창군되자 동해지구 유격장에 임명되어 청송·영천 등지에서 항쟁하였다. 그 해 7월 산남의진이 동해방면으로 진출할 때 본진에 합류, 좌포장이 되었다.

9월 영일군 죽장면전투에서 정용기가 전사하자 그의 아버지 환직(煥直)을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200여 신병을 이끌고 청도 운문산 ( 雲門山 )에 들어가 훈련시켰으며, 1908년 봄에는 운문산을 근거지로 경주·언양·양산·밀양·영산·창녕 등지의 적을 격파하였다.

그 해 6월 일본군에 붙잡혀 징역 3년을 선고받았으나 10개월 만에 석방되어 19104월에 옛 동지들을 다시 규합하여 보현산에서 산남의진을 재결성, 대장이 되어 청송·의성 등지에서 적과 교전하다가 다시 붙잡혀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임병직(林炳稷)

1893(고종 30)1976. 독립운동가·정치가. 호는 소죽(小竹). 충청남도 부여 출생. 1913년 이승만(李承晩)의 알선으로 미국 오하이오 디킨스대학에서 수학하였다. 재학 중 한국학생평론을 창간하고 편집장이 되어 일제의 한국 강점을 폭로하면서 세계에 독립 지원을 호소하였다. 뒤에 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18년부터 1919년까지 3·1운동 당시 독립운동에 필요한 독립운동자금 조달에 진력하고 한국학생평론특집을 발간하였다. 일제의 양민 학살, 잔혹한 고문 만행 등을 사진과 함께 적나라하게 보도해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19194월 이승만(李承晩서재필 ( 徐載弼 ) 등과 같이 필라델피아에서 재미한인대회(在美韓人大會)를 소집하고 서기장으로 독립운동 방안을 토의하는 등 독립투쟁의 방향을 모색하였다. 이 대회가 종료된 뒤 이승만의 비서로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회(歐美委員會)에서 이승만을 도와 독립운동의 세부적인 방안을 헌의(獻議)하였다.

일본왕에게 보낸 한국독립을 절대적으로 승인하라는 이승만의 서한을 일본공관에 전달하는 등 비서로서의 임무 수행을 충실히 하였다. 19206개월간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의 상해 부임을 수행하였다. 1943년 재워싱턴한인협회 수석비서관으로 활동했으며, 1944년 미국전략사령부에 근무하면서, OSS작전을 적극 도왔다.

임시정부 대통령부 무관으로 대령에 임관되어 전시중에도 한미교섭에 크게 활약하였다. 정부수립 후 1949년 외무부장관에 기용되었으며, 1951년 주유엔대사가 되어 한국의 국제적 지위향상에 공헌하였다.

1961년 재건국민운동본부장을 지냈고, 1964년 주뉴델리총영사 사무취급대사, 1968년 국토통일원고문과 신체장애자재활협회장, 1974년 한국반공연맹이사장 등을 지냈다. 1976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저서에 소죽회고록·임정(臨政)에서 인도까지등이 있다.

 

 

林悌(임제)  선생의 일화.

 

나막신과 가죽신
백호 임제가 술이 취해 한쪽엔 나막신, 한쪽엔 가죽신을 신고 말에 올라탔다.
하인이 짝짝이라고 일러주자 어차피 사람들은 한 쪽 면밖에 보지 못하므로 상관없다고 대꾸한다.
인간은 온전한 전면을 다 보지 못하고 한 쪽만 보고 전부인 양 착각한다.

 

 

林星立(임성립) 선생의 일화.

 

一家三代(일가삼대)에 걸친 孝(효): 義昌郡(의창군)

지금의 의창군 東面(동면) 龍岡里(용강리) 들 가운데는 羅州林氏(나주임씨) 일가 삼대의 孝子碑(효자비) 3基(기)가 나란히 서 있다.
이 비는 효자 林星立(임성립)을 비롯하여 그의 두 아들 彰(창), 彬(빈) 그리고 彬(빈)의 아들 潤國(윤국)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旌閭(정려)이다.

예로부터 忠(충)과 孝(효)는 天出(천출)이라 하였거니와 이처럼 일가삼대의 孝行旌閭(효행정려)는 그 유례가 드문 일이라 하여 오랫동안 세인들의 추앙을 받고있다.
여기에 이들 林氏一家(임씨일가) 3대에 걸친 효행의 행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林星立(임성립)은 동면(東面)의 新豊(신풍) 사람이다.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효성이 지극하여 고을에 이름이 드러났다.

14세에 모친이 우연한 병을 얻어 자리에 누었으니 백방으로 약을 썼으나 아무런 효험이 없고, 이 병에는 구렁이가 특효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때가 마침 엄동설한의 한 겨울이라 구렁이를 어디 가서 구할 방도가 없더니 앞산의 山頂(산정)에서 난데없는 구렁이 한 마리가 기어 나오므로 이를 잡아 다려 드리니 모친의 병이 거짓말 같이 나았다.
사람들은 그의 효성에 감동한 산신령의 조화로 이런 기적이 생긴 것이라 하여 모두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그 후 노모가 천수를 다하매 3년을 廬墓(여묘)하였는데, 그 동안에는 일체의 魚肉(어육)을 입에도 대지를 않았으니 이 효행이 알려져 나라에서 復戶(복호)하여 旌閭(정려)를 내렸다

林彰(임창) 林彬(임빈) 형제의 효행은 이와 같다.
임창은 임성립의 맏아들이다. 그 또한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어느 때 부친의 병이 깊어서 매우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 그는 손가락을 잘라서 注血(주혈)을 하여 부친을 회생 시켰다. 그러다가 父親喪(부친상)을 당하게 되자 3년을 侍墓(시묘)하였다.

林彬(임빈)은 彰(창)의 아우이며 그도 부친의 병에 斷指注血(단지주혈)하고 3년 侍墓(시묘)를 형과 같이 하였다. 시묘 사리를 마치고는 일체의 魚肉(어육)을 금식하매 집안의 가축들 마저 따라서 어육을 먹지 않더라고 한다.
나라에서 이들 형제를 復戶(복호)하고 역시 旌閭(정려)하였다

林潤國(임윤국)의 효행은 이러하다. 임윤국은 林彬(임빈)의 아들인데  할아버지와 백부(伯父) 그리고 아버지대로 이어오는 孝門(효문)에 태어났으니 그도 역시 특이한 효행을 남겼다. 부모의 병에 양손가락을 모두 잘라서 感天(감천)의 효성을 다하였으며, 부모의 喪(상)에 모두 6년을 侍墓(시묘)하였다.

 

 

출전 <하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24

()

29

()

34

()

25

()

30

()

35

()

26

()

31

()

36

()

27

(),()

32

()

37

()

28

()

33

()

38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나주 임씨(羅州 林氏)는 남한(南韓)에 총 62,205가구, 262,86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게시물 목록
번호 제 목 글쓴이 등록일 조회
565 옥구임씨(林) 청남 14-08-30 2263
564 예천 임.jpg 예천임씨(林) 청남 14-08-30 4072
563 안의 임.jpg 안의임씨(林) 청남 14-08-30 2774
562 선산임씨(林) 청남 14-08-30 2958
561 부안 임.jpg 부안임씨(林) 청남 14-08-30 4293
나주 임.jpg 나주임씨(林) 청남 14-08-30 4801
559 경주 임.jpg 경주임씨(林) 청남 14-08-30 3048
558 교동 인.jpg 교동인씨(印) 청남 14-08-30 3335
557 밀양이씨(異) 청남 14-08-30 2841
556 태원이씨(伊) 청남 14-08-30 2158
555 초산 이.jpg 초산이씨: 정읍이씨(李) 청남 14-08-30 2736
554 차성 이.jpg 차성이씨: 기장이씨(李) [1] 청남 14-08-30 3159
553 진성 이.jpg 진성이씨:진보이씨(李) 청남 14-08-30 6097
552 흥양 이.jpg 흥양이씨(李) 청남 14-08-30 4843
551 원주 이2.jpg 원주이씨(李)-2 청남 14-08-30 2858
550 원주 이1.jpg 원주이씨(李)-1 청남 14-08-30 3600
549 동성 이.jpg 동성이씨: 사천이씨(李) [1] 청남 14-08-30 4732
548 과평 이.jpg 광평이씨: 성산이씨(李) 청남 14-08-30 3697
547 화산 이.jpg 화산이씨(李) 청남 14-08-30 3106
546 홍주 이.jpg 홍주이씨(李) 청남 14-08-30 6731
게시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