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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청해이씨(李)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청해이씨)

 

본관(本貫): 청해(靑海)

시조(始祖): 이지란(李之蘭)

유래(由來):

 

 

 

청해(靑海)는 중국 북서부에 있는 지명이다.

 

청해(靑海)이씨의 시조는 조선 개국에 공을 세운 공신 이지란(李之蘭)이다. 지란의 본 성명은 퉁두란으로서 아버지 아라부카(阿羅不花)는 여진(女眞)의 금패천호(金牌千戶)였다.

아버지에 이어 천호가 되었다가 원나라 말기 고려 공민왕 때 많은 부하를 이끌고 귀화, 북청에 거주하면서 이성계 휘하에 들어가 이씨(李氏) 성을 하사 받았으며, 이어 조선 개국공신 일등에 올라 청해백(靑海伯)에 봉해졌다.

 

가문의 중요 인물

 

이화영(李和英)

?1424(세종 6).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 본관은 청해(靑海). 할아버지는 여진 금패천호(金牌千戶) 아라불화(阿羅不花)이고, 아버지는 태조 배향공신 ( 配享功臣 )이며 개국공신 1등 청해백양렬공(靑海伯襄烈公) 지란(之蘭)이다. 부인은 태조 원종공신 ( 原從功臣 ) 판사 동안로(童安老)의 딸이다.

개국원종공신 첨절제사(簽節制使) 화상 ( 和尙 )의 아우로 일문이 조선 건국의 군사적 기반을 제공한 동북면(東北面) 세력의 주축으로서, 이성계 정치집단의 핵심을 이루어 조선 초기에 권문세가(權門勢家)로 군림하였다.

여진 사람으로 18세에 낭장으로 벼슬길에 올랐는데, 파격적인 대우였다. 여기에는 간접적으로 충혜왕 후 공민왕 기간에 여진인을 포함한 동북면 출신이 현저하게 고려의 중앙관료로 진출했던 배경이 자리하였다.

직접적으로는 이성계가 동북면병마사로서 여진의 여러 추장을 통할해 대군사집단을 이룩한 휘하의 중핵 인물인 원나라의 천호(千戶)를 습봉받은 지란의 아들에 대한 음직 ( 蔭職 )이자, 공민왕의 동북면 사람에 대한 우대책 때문이었다.

1388(우왕 14) 요동원정군이 위화도에서 회군해 군사정변을 일으키자 우왕을 시종해 성주(成州)에 있던 이성계의 아들 방과(芳果방우(芳雨) 및 형 화상 등이 탈출해 반군에 합세했으며, 남아 있던 동북면 사람과 여진 사람 1,000여 명이 치달아 개경에 진격하였다.

1392년 태조가 즉위하면서 동북면 유력자들을 대거 공신에 책봉할 때 사복시정에서 상장군에 올라 개국원종공신에 책봉되었으며, 1395(태조 4) 공신전 15결과 특전을 명문화한 녹권 ( 錄券 )을 받았다. 1398년 보공대장군(保功大將軍)을 거쳐 1400년 태종이 즉위해서도 아버지가 좌명공신 ( 佐命功臣 ) 2등에 책봉되는 등 일족이 각별한 우대를 받았다.

아버지가 죽자 시묘(侍墓 : 묘 곁에서 항상 생활하면서 묘를 돌보고 애도함.)를 하기 위해 북청에 기거하던 중, 1402(태종 2) 이성계를 재옹립하려는 조사의 ( 趙思義 ) 등 동북면 사람의 반란이 발생하자 탈출해 태종에게 귀부해 난을 조기에 종식시키는 데 공헌해, 1403년 임오공신(壬午功臣 : 조사의 난 토평공신) 2등의 예에 준하는 사전 ( 賜田 ) 40결을 특사(特賜)받았다.

1406년 도총제(都摠制), 3년 후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를 거쳐 1415년 참찬, 1423년 판좌군도총제(判左軍都摠制)가 되고 판우군부사(判右軍府事)에 이르렀다. 특히 태종의 총애를 받아 1411년 잠시 고향에 갈 때는 왕이 성밖까지 전송했다 한다. 시호는 무후(武厚)이다.

 

이인기(李麟奇)

1549(명종 4) 1631(인조 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해(靑海). 자는 인서(仁瑞), 호는 송계(松溪). 개국공신 청해백(靑海伯) 지란(之蘭)6대손이며, 부호군 ( 副護軍 ) 순희(淳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걸(挺傑)이고, 아버지는 충청도병마절도사로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옥()이며, 어머니는 여흥민씨(驪興閔氏)로 희증(希曾)의 딸이다.

1590(선조 23) 늦게 사마시에 합격하고, 도화서별제(圖 怜 署別提)로 출사, 경안도찰방(慶安道察訪) · 내자시주부(內資寺主簿) · 형조좌랑 등을 거쳐 1605년에 보은현감, 형조정랑을 거쳐 영덕현감이 되어서는 치적이 우수하여 명망이 높았다.

그러나 광해군의 여러 가지 실정이 계속되자 관직에서 물러나 동교(東郊)의 송계(松溪)로 나가 근 10년간 성문 안에 들어오지 않았다. 1623(인조 1)의 인조반정과 함께 가평군수가 되었으며, 이듬해 이괄 ( 李适 )의 난 때 아들 중로(重老)가 경기강원양도좌방어사(京畿江原兩道左防禦使)로 우방어사 이성부 ( 李聖符 )와 함께 적군을 예성강 상류의 마탄(馬灘)에서 막아 싸우다가 전사하니 크게 슬퍼하며 사직하였다.

후에 다시 군기시정(軍器寺正) · 동지중추부사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성질이 강직하고 명분을 중히 여겨 권문세가에 몸을 굽히지 않았으며, 박순 ( 朴淳 ) · 유성룡 ( 柳成龍 ) 등이 만나기를 청하였지만 그들이 높은 지위에 있으므로 만나지 않았다.

만년에는 시를 짓고, 글씨를 쓰며 정작(鄭 殯 ) · 김상헌 ( 金尙憲 )과 친교를 맺었다. 163081세로 우로(憂老 : 연로함을 경하함)의 특전을 받아 가선대부 ( 嘉善大夫 )에 승진되었다. 좌찬성에 증직되고, 청릉군(靑陵君)에 봉하여졌다. 저서로는 송계유고 가 있다.

 

이중로(李重老)

인기(麟奇)의 아들 중로(重老)가 유명했다.

1577(선조 10)1624(인조 2).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청해(靑海). 자는 진지(鎭之), 호는 송계거사(松溪居士). 개국공신 지란(之蘭)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인기(麟奇)이고,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감찰 경()의 딸이다.

1605(선조 38)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과 훈련도감낭청을 지내고, 1621(광해군 13)에 이천부사(伊川府使)가 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때 훈련대장 이흥립 ( 李興立 ), 장단부사 이서 ( 李曙 ) 등과 함께 장졸을 모아 참여하였으므로 정사공신 ( 靖社功臣 ) 2등에 녹훈(錄勳)되었고 청흥군(靑興君)에 봉하여졌다.

광해군이 강화도로 쫓겨나자 강화부윤에 임명되어 보살피었다. 그 뒤 오위도총부부총관·훈련도정을 겸임하고, 포도대장을 지냈다.

1624년 이괄 ( 李适 )이 반란을 일으키자 부도체찰사 이시발 ( 李時發 )과 함께 황해방어사로서 반란군을 저지하는 책임을 맡았다. 예성강 상류인 마탄(馬灘)에서 여울물을 지켜 적을 막으려는 싸움준비를 하던 중, 적의 급습으로 관군이 패할 때 우방어사 이성부 ( 李聖符 )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왕은 그가 늙은 아버지가 있음에도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하여 매우 슬퍼하였다 한다. 다행히 그의 시신은 유효걸 ( 柳孝傑 )이 전복 ( 戰服 )으로 싸서 묻고 표를 해놓았기 때문에 찾았다.

이괄의 난은 이수백 ( 李守白 ) 등이 이괄의 목을 베어와서 항복함으로써 끝을 맺었으나, 그의 아들 문웅(文雄)은 이수백이 아비를 죽인 이괄의 무리라 하여 대낮에 목베어 복수하였다. 후에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금천의 민충사(愍忠祠)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이유민(李裕民)

1658(효종 9) 1729(영조 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해(靑海). 자는 덕유(德裕). 개국공신 지란(之蘭)의 후손이며, 명로(明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문주(文柱)이고,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핵( )이며, 어머니는 이승효(李承孝)의 딸이다.

1696(숙종 2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고, 병조좌랑 · 부안현감을 거쳐 홍주목사로 있으면서 백성들의 토지를 빼앗은 권문세가의 횡포를 조정에 알려 토지를 백성에게 반환하도록 하였다. 충주 · 의주 등 각 지방관을 지내고, 수원부사가 되어 백성을 잘 다스림으로써 왕으로부터 표리(表裏 : 속과 겉의 옷감)가 하사되었다.

1714년 지평 · 장령 · 정언 등을 거쳐 1718년 승지에 이어 형조참의가 되고, 이듬해 여주목사, 뒤에 함경도병마절도사를 거쳐 1721(경종 1) 한성부좌윤, 이어 형조참판이 되었다. 이 해 이진유 ( 李眞儒 ) 등 소론에게 배척을 당하여 관직을 삭탈당하고 고향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다.

1725(영조 1) 사직을 거쳐 자헌대부 ( 資憲大夫 )로 병조판서에 특진되고, 이어 기로소 ( 耆老所 )에 들어갔다. 1728년 공조판서로서 이인좌 ( 李麟佐 )의 난의 평정을 도와 왕의 신임을 받았으며, 도총관 · 지의금부사를 지냈다. 뒤에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정민(貞敏)이다.

 

이수민(李壽民)

1651(효종 2)1724(영조 즉위년).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청해(靑海). 자는 일경(一卿). 개국공신 지란(之蘭)의 후손이다. 1676(숙종 2)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고, 훈련원 주부·도총부도사·경력을 거쳐, 고원군수·낙안군수(樂安郡守장흥부사가 되었다.

1701(숙종 27) 나주토포사(羅州討捕使)에 발탁되고 이어 우림위 ( 羽林衛 )의 사복장(司僕將우후 ( 虞候 ) 등을 지낸 다음, 철산부사를 거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체배(遞拜)되어 임기를 마친 후 선전관에 환배(還拜)되었다. 그 뒤 장단방어사를 거쳤다.

이 후 전라병마절도사에 임명되고 삼도통제사에 승진하였다. 1719년 어영중군(御營中軍)으로 가선대부에 오르고 금군별장 겸 도총부부총관에 전직되었다가, 다시 통제사가 되었다.

1721(경종 1) 신임사화로 노론의 대신 김창집 ( 金昌集 )이 유배도중 통영을 지나자, 그는 원문(院門)에 나가 인사를 하고 비장을 시켜 창집을 호행(護行)하도록 한 것으로 소론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고, 이어 목숨만은 구하여 제주 정의 ( 旌義 )에 유배된 지 1년 만에 그곳에서 죽었다.

1725(영조 1)에 신원되어 용인 굴암(窟巖)으로 환장(還葬)하였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청해(靑海)이씨는 남한에 총 2,484 가구, 10,012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李之蘭(이지란)

 

이지란과 이성계는 의형제의 결연을 맺었다.

李之蘭(이지란)은 북청에 와서 살고 있었는데, 당시 북쪽에서 활동하던 이성계와 만나 첫눈에 의기가 투합하여 친구가 되었고, 곧 형제의 의를 맺었다.

 

이성계는 당대 유명한 명궁인데, 이지란도 그에 못지않았다.

이지란이 지나가는 아낙이 인 항아리를 화살로 쏘아 구멍을 뚫으면, 이성계는 활촉에 솜을 끼워 쏴서 그걸 막았다고 한다.

 

이지란은 퉁씨이며, 조상은 악비이다. 본 성은 악씨가 맞겠지만, 그의 조상 중 진희의 난을 피해서 흑룡강에 숨어 성을 고친 사람이 있었다.

외가 쪽 성이 퉁씨였으므로, 이지란도 퉁두란이 본명이었다.

 

이지란은 귀화하였으나 죽을 때 중국식 화장법을 따라 장사지내라고 유언하였다.

                                                                                                                    출전: 아임 (uiiam)

 

 

 

李之蘭(이지란)

 

이성계의 의형제 이지란.

 

나를 명중시킬 수 있나 두고 봅시다.”

퉁두란이 눈을 부릅뜨고 이성계의 얼굴을 향하여 시위를 당겼다.

퉁두란은 평소 자기보다 솜씨가 몹시 뛰어난 이성제가 동북 지방에 살있다는평소에 불만이 많았다. 그리하야 오늘 활 솜씨를 겨루어 이성계를 없애려고 것이다.

 

쉬잇!”

세상 어떤 명궁도 당하지 못할 빠르고 강한 화실이었다. 그런 어찌 일인가? 이성계가 화실을 손에 쥐고 웃고 있었다.

퉁두란은 몹시 약이 올랐다 그는 또다시 두 번째 화살을 쏘았다.

그는 마음속으로 네놈이 아무리 날쌔다 해도 이 화살은 피하지 못 할 거다.’ 하고 쾌재를 부르려 했다.

 

그러나 이때 이성계가 어느새 땅바닥에 납엎드려 퉁두란을 쏘아보고 있지 않는가? 그의 가슴은 칠렁 내려앉았다.

퉁두란은 그냥 물러날 수 없었다. 재빨리 번째 화살을 날렸다.

그러자 이성계기 땅 위에서 펄뛰어올라 두 다리를 벌리고 있었다. 회살은 그의 두 다리 사이로 삐져 나갔다.

 

퉁두란은 몹시 당황하여 활을 던지고 이성계에게 곧장 달려왔다. “, 내가졌소. 그러니 나를 미음대로 하시구려.”

이성계는 퉁두란의 정직하고 활달한 성격이 매우마음에 들었다.

어서 일어나시오. 오늘 이기고 사람은 없소. 다만 오늘은 내가 운이 좋았을 뿐이오.”

이성계가 퉁두란의 손을 잡고 일으켰다.

 

그는 이성계의 너그러운 마음에 다시 한 번 감복했다. 그러나 언제든 기회를 엿보아 오늘의 실수를 없애야 한다는 생각에 시달렸다.

어느 날 밤이었다. 이성계가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있었다. 퉁 두란은 기회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망설이지 않고 화살을 쏘았다. 이성계가 손으로 날이 오는 회잘을 잡았다.

 

퉁두란은 틀림없이 명중되었으리라고 믿었으나, 그래도 미심쩍어 화살을 한 쏘았다. 그리고 잠시 담벼락 옆에 숨어 이성계의 동정을 유심히 살 폈다.

이성계가 화장실에서 나오며 기침을 하면서 회살 주인 어디 갔나?’

통두란은 깜짝 놀라 담벼락에서 뛰어나오며 땅바닥에 엎드려 용서를 빌었다.

 

, 내가죽을 죄를 졌소이다. 죽여주시오.”

오늘도 내가 운이 좋았소이다.”

, 를 거두어 주시겠소?’

나는 오늘부터 그대를 아우처럼 여길 것이오.”

형님, 한평생 형님을 모시면서 충성을 바치겠나이다.”

고맙구먼.”

이성계와 퉁두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성계가 고려 조정에 나아간 조선을 세울 때까지 퉁두란은 한시도 이성계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어느 이런 일도 있었다. 두 사람이 의형제를 맺은 지 얼마 지뒤였다. 두 사람이 마을의 길에서 놀고 있었다.

그때 마을의 아낙이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지나갔다. 이성계가 재빨리 철환을 던져 물동이에 구멍을 냈다. 그것을 지켜보던 퉁두란이 날싸게 진흙을 뭉쳐 던져 물동이의 물이 새어 나오기 전에 구멍을 막았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동네 사람들은 모두 혀를 내둘렀다.

이성계는 조선을 세운 퉁두란에게 이씨 성과 지린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이때부터 퉁두란은 이지란이 되었다. 그는 개국 좌명공신으로 청해군에 봉해지고 벼슬이 찬성시에 이르렀으며, 죽은 후에는 시호로 앙렬공을 받았다.

이지란은 끝까지 이성계를 모셨다. 이성계가 왕자의 난 후 영흥으로 내려갈 때 따라가서 풍양에 은퇴했다.

 

이때 이지란은 이성계에게 사퇴의 뜻을 밝히고 중이 것을 아뢰었다.

신이 성군을 만나 장수가 되어 남북으로 전쟁터를 누빌 은 목숨을 빼앗았사 옵나이다.

이제공신이 되었고 형님 전하의 총애가 몹시 극진하오나 지옥의 화가 매우 두렵사옵니다. 이제 머리를 꺾고 중이 되어, 죽은 뒤에 보복을 면하기만 엎드려 비리옵나이다.”

그뒤 이지란은 절에들어가 세상사와 인연을 끊어 버렸다.

 

이지란은 72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체는 화장이 되었다. 그의 자손들은 그의 의관을 장시 지냈다. 그의 무덤 앞을 지나 는 사람들은 감히 소나 말을 타고 지나가지 못했다.

그는 충효와 예절을 중히 여겼고, 생활은 매우 검소하였으며 깨끗하게 일생을 살았다.

-한국의 대표 야사에서-

 

 

출전 <한미녹대성보>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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