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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평창이씨(李)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평창이씨)

 

본관(本貫): 평창(平昌)

시조(始祖): 이광(李匡)

유래(由來):

 

평창(平昌) 이씨의 시조 이광(李匡)은 고려 명종(明宗 : 19대왕, 재위기간 : 1170 1197) 때 태사(太師)를 역임하고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올라 백오군(白烏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8세손 천기(天驥)가 고려 말에 산기상시(散騎常侍)를 역임한 후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아들 3형제를 데리고 장단(長湍)으로 내려가 절의를 지켰으므로 태조가 그 충절을 가상히 여겨 평창군(平昌君)에 봉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이광(李匡)을 시조로 받들고 본관을 평창(平昌)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이영서(李永瑞)

? 1450(세종 3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평창(平昌). 자는 석류(錫類), 호는 노산 (魯山) · 희현당(希賢堂). 천기(天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육( )이고, 아버지는 판관 종미(宗美)이며, 어머니는 이징(李澄)의 딸이다.

일찍이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4(세종 16) 알성문과에 을과 3등으로 급제, 집현전에 들어갔다. 그 뒤 수찬에 올라 강희안 ( 姜希顔 )과 더불어 금은(金銀)으로 불경을 썼다. 이어서 병조 · 예조 · 이조의 정랑을 거쳐 광주목사(廣州牧使)를 지내고 퇴임하였다. 글씨에 뛰어났다.

 

이계남(李季男)

? 1512(중종 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평창(平昌). 자는 자걸(子傑). 음직으로 1468(예종 즉위년) 감찰에 임명되었다. 1479(성종 10)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거쳐 1486년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로 근무하다가 그 해 우부승지 · 우승지를 역임하였다. 1489년 좌승지로 있다가 같은 해 이조참의가 되었으며, 이듬해 호조참의가 되었다.

1491년 충청도관찰사로 천거되었을 때 장령 이거(李 綱 ) 등이 그가 별다른 공로나 특별한 재능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관찰사 임명에 반대했으나 그대로 임명되었다. 1493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가 같은 해 한성부우윤으로 임명되었고, 이듬해 함경도관찰사로 자리를 옮겼다.

이 때 어머니가 와병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사임을 요청했으나, 성종은 충효를 모두 오로지 할 수 없으니 그대로 직책을 수행하라고 명하였다. 1496(연산군 2) 호조참판이 되었고 2개월 후에 대사헌이 되었다.

의금부 당상으로 있을 때 연산군이 무죄한 사람에게 벌을 내리도록 요구했으나, 명령을 어기고 무죄로 방면했기 때문에 연산군의 진노를 사서 곤장을 맞기도 하였다.

이듬해 형조참판, 1504년에 호조판서가 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이 있던 날 새벽에 박원종 ( 朴元宗 ) 등이 군대를 이끌고 대궐로 진군할 때 그도 유자광 ( 柳子光 ) 등과 합류해 반정에 협력하였다. 그 공으로 보사반정공신 2등에 녹훈되고 평원군(平原君)에 봉해졌다.

물욕이 많고 인색해 집안의 일상 생활에 쓰는 물건이나 비용을 직접 관여하였다. 공신전 ( 功臣田 )을 지급받을 때에도 호조판서라는 직함을 이용해 근거리의 비옥한 토지를 차지해 주위 사람들의 빈축을 샀다.

그러나 국가의 재정에 대해서는 대단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당시 중국과의 사신 내왕이 잦고 국가에 대상마저 있어 그전의 두 배에 가까운 재정 지출이 요구되었으나, 예산을 적절히 사용해 국가 재정을 건실하게 운용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호조판서로서의 그의 능력과 아우 계전(季全)이 문무를 겸해 고위 관직을 나란히 차지하고 있음을 부러워하였다. 1511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시호는 익평(翼平)이다.

 

이계동(李季仝)

1450(세종 32)1506(중종 1).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평창(平昌). 자는 자준(子俊). 1470(성종 1) 무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훈련원판관에 임명되었다. 1476년 무과 중시에 급제해 종친부전첨(宗親府典籤)이 되었다가 창성부사로 나갔다.

이 해 10월 일본에 파견된 통신사의 부사로 대마도에 갔다가, 정사 이형원 ( 李亨元 )이 병으로 죽자 일을 잘 처리하고 돌아왔다. 같은 해 황해도관찰사로 나가게 되었으나 경력이 없어 동부승지로 임명되었다가, 도원수 윤필상 ( 尹弼商 )의 종사관으로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하고 돌아와 형조참판에 승진하였다. 1479년 선전관이 되었다.

1480년 주문부사(奏聞副使)로 중국으로 떠나기 전의 사연(賜宴 : 베풀어준 향연)에서 불경한 행동으로 전라도 해남현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이듬 해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쓴 성종의 명으로 동지중추부사로 임명되었다. 1482년 여진어에 능통하고 그들의 사정을 잘 안다는 점이 인정되어 함경도절도사로 임명되었다.

이 때 여진을 성심으로 대해 재임 중 그 지역이 안정되었으며, 뒷날 중국에 사신으로 갈 때에는 모련위(毛憐衛)의 여진인들이 늘어서서 인사를 할 정도로 신망을 받았다. 1486년 좌윤이 되어 정조사 ( 正朝使 )의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도상중원교사지법 圖上中原敎射之法을 필사해 왕에게 바쳤다.

1487년 형조참판을 거쳐 전라도병마절도사로 나갔다. 1489년 황해도에 김경의(金京儀김막동(金莫同)의 도적이 일어났을 때 금제사(擒制使)로 파견되어, 구질포지산(仇叱浦只山)을 공격해 우두머리를 체포하는 등 적을 소탕하고 돌아와 포백(布帛)과 무기를 상으로 받았다. 1490년 무과 출신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사양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이듬 해 야인(野人) 이마거(尼麻車)가 조산(造山)에 침입했을 때 윤필상의 추천으로 부원수가 되어 도원수 허종 ( 許琮 )을 보좌해 토벌에 나섰다. 이 때 큰 성과는 없었으나 돌아와 형조판서에 올랐다. 1492년 경기도관찰사로 나갔을 때, 계속된 흉년으로 도둑이 들끓자 연로수직법(沿路守直法)을 만들어 검색을 강화했으나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494년 지중추부사로서 성종이 죽자 고부사 ( 告訃使 )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중국의 무기 통제나 조선에 대한 태도 등에 대해 보고하였다. 1498(연산군 4) 병조판서에 임명되었으며, 이듬 해 왕명으로 이극균 ( 李克均 )과 함께 서북제번기 西北諸藩記서북지도 西北地圖를 편찬해 올렸다. 1500년 병으로 병조판서에서 물러났다.

병조판서 재임 시에 특히 북방에 관한 여러 시책에 관심을 기울였고 용의주도한 대비를 하였다. 1504년 우찬성이 되었다가 이듬 해 좌찬성과 영중추부사에 이르렀다. 무신으로 크게 활약했으며 독서에도 힘써 당시 문무를 겸했다는 칭찬을 들었다 한다. 시호는 헌무(憲武)이다.

 

이광(李光)

1474(성종 5)1496(연산군 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평창(平昌). 자는 명원(明遠). 아버지는 형조참판 계남(季男)이다.

1491(성종 22)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494(연산군 즉위년) 연산군이 죽은 성종을 위하여 불재(佛齋)를 올리자 성균관의 유생으로서 이목 ( 李穆 ) 등과 함께 불사로 명복을 비는 것은 선왕의 뜻이 아니라는 상소를 하여 정거처분(停擧處分)을 받았다.

얼마 뒤 죄가 풀리고, 1495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에 이르렀으나 23세로 요절하였다. 시문과 글씨가 뛰어났고, 말타기·활쏘기를 잘하였다.

 

이승훈(李承薰)

1756(영조 32)1801(순조 1). 조선 후기의 천주교인. 세례명 베드로. 본관은 평창(平昌). 자는 자술(子述), 호는 만천(蔓川). 아버지는 참판 동욱(東郁)이며, 어머니는 이가환 ( 李家煥 )의 누이이다. 한국천주교회 창설자의 한 사람으로 한국인 최초의 영세자이다.

서울 남대문 밖 반석동(盤石洞지금의 中林洞 일대)에서 태어나, 장성하여 마재馬峴의 정재원 ( 丁載遠 )의 딸을 아내로 맞아 정약전 ( 丁若銓 약현(若鉉약종(若鍾약용(若鏞)과 처남매부 사이가 되었다.

1780(정조 4)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이 때 북경으로부터 들어온 서학이 남인 소장학자들 사이에 활발히 연구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도 역시 서학에 접하게 되었다.

또한 서학 모임의 중심 인물인 이벽 ( 李檗 )과도 자연 친교를 맺어 천주교를 알게 되었다. 1783년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떠나는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들어가 약 40일간 그 곳에 머물면서 선교사들로부터 필담으로 교리를 배운 뒤, 그라몽(Gramont) 신부에게 세례를 받아 한국인 최초의 영세자가 되었다.

1784년 수십 종의 교리서적과 십자고상(十字苦像묵주(默珠상본(像本) 등을 가지고 귀국하여 이벽·이가환·정약종 형제 등에게 세례를 주고 그들과 상의하여 명례동의 김범우 ( 金範禹 ) 집을 신앙집회소로 정하고 정기적인 신앙의 모임을 가짐으로써 비로소 한국천주교회가 창설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785년 김범우의 집에서 종교집회를 가지던 중 형조의 관헌에게 적발된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발생하자 한때 배교하였지만, 곧 교회로 돌아가 신자들에게 세례와 견진성사(堅振聖事)를 집전하는 등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주도하였다.

1787년에는 정약용과 반촌(伴村지금의 惠化洞)에서 천주교 교리를 강술하는 등 교회활동을 영도하였다. 그러나 가성직제도가 교회법에 어긋난 행위임을 알고는 이 조직을 해산하고 성직자영입운동을 추진하였다.

1789년에 평택현감으로 등용되었다. 때마침 1790년 북경에 밀파되었던 윤유일 ( 尹有一 )이 돌아와 가성직제도와 조상제사를 금지한 북경 주교의 명을 전하자, 보유론적(補儒論的)인 이해에서 출발한 그의 신앙은 유교적 예속과 천주교회법의 상치라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어 고민하던 끝에 다시금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1791년 전라도 진산 ( 珍山 )에서 윤지충 ( 尹持忠 권상연 ( 權尙然 )의 폐제분주(廢祭焚主)로 인한 진산사건이 일어나자 권일신 ( 權日身 )과 함께 체포되어 향교에 배례하지 않았던 사실과 1787년의 반회사건(伴會事件)이 문제되어 투옥되었지만, 관직만을 삭탈당하고 곧 방면되었다.

1795년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체포하려다 실패한 을묘실포사건(乙卯失捕事件)이 일어나 성직자영입운동에 관계했던 혐의로 다시 체포되어 충청남도 예산으로 유배되었다가 얼마 뒤 풀려났다.

그러나 순조가 즉위한 1801년 신유박해로 이가환·정약종·홍낙민(洪樂民) 등과 함께 체포되어 48일 서대문 밖 형장에서 대역죄로 참수되었다.

문집으로 만천유고 蔓川遺稿를 남겼다. 그의 가문은 4대에 걸쳐 순교자를 내었다. , 1868(고종 5)에 아들 신규(身逵)와 손자 재의(在誼)가 순교하고, 1871년에 증손인 연구(蓮龜균구(筠龜)가 제물포에서 순교하였다. 이승훈은 1856(철종 7)에 아들 신규의 탄원으로 대역죄만은 신원되었다.

 

이정규(李正奎)

1864(고종 1)1945. 조선 말기의 의병. 일명 장규(章奎). 호는 옥산 ( 玉山 ). 충청북도 제천 출신. 소년시절부터 시와 문장으로 널리 알려졌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스승 유인석 ( 柳麟錫 )과 충청북도 제천·장담(長潭) 등지에서 거의, 의진을 편성하여 참모장으로서 적과 접전하였다.

18961월 유인석이 충주성을 점령할 때 참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2월에는 유인석의 종사관으로서 제천·충주·단양·풍기·평창 등지로 행군하면서 군수(軍需)를 증가시켰다.

3월에는 유인석이 판서 심상훈 ( 沈相薰 )의 설득을 듣고 조정에 의병의 입장을 전하려고 갔다가 심상훈이 의병을 보호할만한 위인이 못된다는 것과 의병관계의 인물을 체포하려 하자 서울로 탈출하였다.

9월 유인석을 호위하여 서간도 통화현(通化縣)으로 망명하였다. 뒤에 유인석과 종군하였던 종의록 從義錄을 남겨 초기 의병운동연구에 도움을 주고 있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이병식(李炳植)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쳤다.

 

이현근(李炫瑾)

1912 1940. 독립운동가. 일명 학철(學喆). 함경북도 북청 출신. 1929년 경신고등보통학교 재학시 동맹휴학을 주도하는 등 항일학생운동을 주도하다가 퇴학당하였다. 1930년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하게 되었다.

일본 유학시절에 재대판 조선유학생(在大阪朝鮮留學生) 웅변대회에서 일제의 비인도적이고 야만적인 식민통치책을 신랄히 성토, 규탄함과 동시에 격양된 분위기를 이기지 못하고 웅변대회장에 참석한 일본인 학생 수십 명을 발길로 걷어차 퇴학당하고 말았다.

1932년 적극적으로 독립운동 대열에 참여하기 위하여 상해(上海)로 건너가, 격렬한 민족지도자의 독립운동 조직인 남화한인청년연맹 ( 南華韓人靑年聯盟 )에 가입하였다. 1933년에는 유자명 ( 柳子明 ) 등이 조직한 무장항일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 ( 義烈團 )에 가입하여 무장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뒤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中央陸軍軍官學校) 11기생으로 입교하여 193610월 제1총대(第一總隊) 보병과를 졸업한 뒤 초급장교로 임관, 실전배치를 위한 제반 실무교육을 받았다. 그 뒤 중국군 보병 상위(上尉)로 진급, 중국군 제6사단 제17여단 제30단 제26연장(第二營六連長)으로 활동하였다.

1937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 일제가 중국본토를 침공하자, 이에 참전하였다가 경호전역(京 廉 戰役) 때 일본군에 잡혀, 19383월 군법회의서 사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순국하였다. 1983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출전 <한미녹대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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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평창 이씨는 남한에 총 13,531가구, 55,48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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