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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한산이씨(李)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한산이씨)

 

본관(本貫): 한산(韓山)

시조(始祖): 이윤경(李允卿)

유래(由來):

 

한산(韓山) 이씨의 시조 이윤경(李允卿)은 한산 지방에 토착세거(土着世居)해온 호족(豪族)의 후예로 고려 중엽에 향직의 우두머리인 호장(戶長)을 역임했고, 5대에 걸쳐 호장직을 세습하여 오면서 명문의 기틀을 다졌다.

충남 서천군 한산면 지현리 건지산(乾至山) 밑에 있는 시조 윤경(允卿)의 묘는 금계포란(金鷄抱卵)형의 명당으로 알려졌으며, 본래 한산군의 동헌(東軒)이 있는 곳이었는데 관가의 현감(縣監)이 앉는 널판지가 지기(地氣) 때문에 자꾸 썩어가는 것을 눈여겨보고 지혈(地穴)이 바로 그 자리임을 익혀 두었다가 묘를 썼다고 한다.

 

가문의 중요 인물

 

이곡(李穀)

1298(충렬왕 24)1351(충정왕 3). 고려 말엽의 학자. 본관은 한산 ( 韓山 ). 자는 중보(仲父), 호는 가정(稼亭). 초명은 운백(芸白). 한산 출생. 한산이씨 시조인 윤경(允卿)6대손이다. 찬성사 자성(自成)의 아들이며, ()의 아버지이다.

이곡은 1317(충숙왕 4) 거자과(擧子科)에 합격한 뒤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원나라에 들어가 1332(충숙왕 복위 1) 정동성(征東省) 향시에 수석으로 선발되었다. 다시 전시 ( 殿試 )에 차석으로 급제하였다.

이 때 지은 대책 ( 對策 )을 독권관 ( 讀卷官 )이 보고 감탄하였다. 재상들의 건의로 한림국사원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이 되어 그때부터 원나라 문사들과 교유하였다.

이곡은 1334년 본국으로부터 학교를 진흥시키라는 조서를 받고 귀국하여 가선대부 시전의부령직보문각(嘉善大夫試典儀副令直寶文閣)이 제수되었다. 이듬해에 다시 원나라에 들어가 휘정원관구(徽政院管勾정동행중서성좌우사원외랑(征東行中書省左右司員外郎)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그 뒤에 본국에서 밀직부사·지밀직사사를 거쳐 정당문학 ( 政堂文學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가 되고 뒤에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다.

이곡은 이제현 ( 李齊賢 ) 등과 함께 민지 ( 閔漬 )가 편찬한 편년강목 編年綱目을 증수하고 충렬·충선·충숙 3(三朝)의 실록을 편수하였다. 한때는 시관이 되었으나 사정(私情)으로 선발하였다는 탄핵을 받았다. 다시 원나라에 가서 중서성감창(中書省監倉)으로 있다가 귀국하였다.

공민왕의 옹립을 주장하였으므로 충정왕이 즉위하자 신변에 불안을 느껴 관동지방으로 주유(周遊)하였다. 1350(충정왕 2) 원나라로부터 봉의대부 정동행중서성좌우사낭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郎中)을 제수 받았고, 그 이듬해에 죽었다.

이곡은 일찍이 원나라에서 문명을 떨쳤다. 원나라의 조정에 고려로부터 동녀를 징발하지 말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는 중소지주 출신의 신흥사대부로, 원나라의 과거에 급제하여 실력을 인정받음으로써 고려에서의 관직생활도 순탄하였다. 그는 유학의 이념으로써 현실문제에 적극적으로 대결하였다.

그러나 쇠망의 양상을 보인 고려 귀족정권에서 그의 이상은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그의 여러 편의 시에 잘 반영되어 있다.

동문선에는 100여 편에 가까운 이곡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죽부인전 竹夫人傳은 가전체문학으로 대나무를 의인화하였다. 그밖에 많은 시편들은 고려 말기 중국과의 문화교류의 구체적인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한산의 문헌서원 ( 文獻書院 ), 영해의 단산서원 ( 丹山書院 ) 등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가정집420권이 전한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이색(李穡)

1328(충숙왕 15)1396(태조 5).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한산 ( 韓山 ). 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 삼은 ( 三隱 )의 한 사람이다. 찬성사 곡()의 아들로 이제현 ( 李齊賢 )의 문인이다. 1341(충혜왕 복위 2)에 진사가 되고, 1348(충목왕 4) 원나라에 가서 국자감의 생원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1351(충정왕 3) 아버지 상을 당해 귀국해 1352(공민왕 1) 전제(田制)의 개혁, 국방계획, 교육의 진흥, 불교의 억제 등 당면한 여러 정책의 시정개혁에 관한 건의문을 올렸다.

이듬해 향시 ( 鄕試 )와 정동행성 ( 征東行省 )의 향시에 1등으로 합격해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가서 1354년 제과(制科)의 회시(會試)1, 전시 ( 殿試 )2등으로 합격해 원나라에서 응봉 한림문자 승사랑 동지제고 겸국사원편수관(應奉翰林文字承事郎同知制誥兼國史院編修官)을 지냈다.

귀국해 전리정랑 겸 사관편수관 지제교 겸예문응교(典理正郎兼史館編修官知製敎兼藝文應敎중서사인 ( 中書舍人 )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 해 원나라에 가서 한림원에 등용되었으며 다음 해 귀국해 이부시랑 한림직학사 겸사관편수관 지제교 겸병부낭중(吏部侍郎翰林直學士兼史館編修官知製敎兼兵部郎中)이 되어 인사행정을 주관하고 개혁을 건의해 정방 ( 政房 )을 폐지하게 하였다.

1357년 우간의대부 ( 右諫議大夫 )가 되어 유학에 의거한 삼년상제도를 건의, 시행하였다. 이어 추밀원우부승선(樞密院右副承宣지공부사(知工部事지예부사(知禮部事) 등을 지내고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남행할 때 호종해 1등공신이 되었다.

그뒤 좌승선·지병부사(知兵部事우대언·지군부사사(知軍簿司事동지춘추관사·보문각과 예관의 대제학 및 판개성부사 등을 지냈다.

1367년 대사성이 되어 국학의 중영(重營)과 더불어 성균관의 학칙을 새로 제정하고 김구용 ( 金九容 정몽주 ( 鄭夢周 이숭인 ( 李崇仁 ) 등을 학관으로 채용해 신유학의 보급과 성리학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1373년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지고, 이듬해 예문관대제학·지춘추관사 겸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였다. 1375(우왕 1) 왕의 요청으로 다시 벼슬에 나아가 정당문학 ( 政堂文學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역임했고 1377년에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받고 우왕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1388년 철령위문제(鐵嶺衛問題)가 일어나자 화평을 주장하였다. 1389(공양왕 1)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이 강화로 쫓겨나자 조민수 ( 曺敏修 )와 함께 창왕을 옹립, 즉위하게 하였다.

판문하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창왕의 입조와 명나라의 고려에 대한 감국(監國)을 주청해 이성계 ( 李成桂 ) 일파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다.

이 해에 이성계 일파가 세력을 잡자 오사충 ( 吳思忠 )의 상소로 장단 ( 長湍 )에 유배, 이듬해 함창 ( 咸昌 )으로 이배되었다가 이초(彛初)의 옥()에 연루되어 청주의 옥에 갇혔으나 수재(水災)로 함창에 안치되었다.

1391년에 석방되어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봉해졌으나 1392년 정몽주가 피살되자 이에 관련해 금주 ( 衿州 )로 추방되었다가 여흥·장흥 등지로 유배된 뒤 석방되었다.

1395(태조 4)에 한산백(韓山伯)에 봉해지고 이성계의 출사(出仕) 종용이 있었으나 끝내 고사하고 이듬해 여강(驪江)으로 가던 도중에 별세하였다.

그는 원·명 교체기 때 천명(天命)이 명나라로 돌아갔다고 보고 친명정책을 지지하였다. 또 고려 말 신유학(성리학)의 수용과 척불론이 대두되는 상황에서 유교의 입장으로 불교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즉 불교를 하나의 역사적 소산으로 보고 유·불의 융합을 통한 태조 왕건 때의 중흥을 주장했으며, 불교의 폐단을 시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척불론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도첩제 ( 度牒制 )를 실시해 승려의 수를 제한하는 등 억불정책에 의한 점진적 개혁으로 불교의 폐단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한편 세상이 다스려지는 것과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성인 ( 聖人 )의 출현 여부로 판단하는 인간 중심, 즉 성인·호걸 중심의 존왕주의적(尊王主義的)인 유교역사관을 가지고 역사서술에 임하였다.

아울러 그의 문하에서 권근 ( 權近 김종직 ( 金宗直 변계량 ( 卞季良 ) 등을 배출해 조선성리학의 주류를 이루게 하였다. 장단의 임강서원(臨江書院), 청주의 신항서원 ( 莘巷書院 ), 한산의 문헌서원 ( 文獻書院 ), 영해 ( 寧海 )의 단산서원 ( 丹山書院 ) 등에서 제향되며, 저서에 목은문고 牧隱文藁목은시고 牧隱詩藁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이맹균(李孟畇)

1371(공민왕 20)1440(세종 2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 ( 韓山 ). 자는 사원(士原), 호는 한재(漢齋). 할아버지는 색()이며, 아버지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종덕(種德)이다.

13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385(우왕 11) 문과에 합격해, 성균직학(成均直學사재소감(司宰少監내서사인 ( 內書舍人 지단양군사(知丹陽郡事예문관직제학을 지냈다. 1406(태종 6) 사헌부집의로 있으면서 사송(司訟)을 지체한 죄로 원주에 유배되었다가 사면되었다.

그 뒤 지영천군사(知永川郡事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판승문원사(判承文院事성균관대사성·좌사간·예조참의·경승부윤(敬承府尹충청도관찰사·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차례로 지냈다. 1421(세종 3)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예조참판·경기도관찰사·공조판서·예조판서를 지냈다. 1425년 진위사 ( 陳慰使 )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이조와 병조 판서를 지냈다.

1427년 좌빈객 ( 左賓客 )이 되어 세자를 가르쳤고, 그 뒤 의정부참찬 겸 대사헌·이조판서·예문관대제학을 역임하였다. 1429년 사은부사로 북경에 갔다가 다음 해 돌아와서 의정부참찬이 된 뒤 성균관대사성·판한성부사·이조판서·예문관대제학을 지냈다. 1437년 예문관대제학 겸 판이조사(藝文館大提學兼判吏曹事)가 되니 판이조사를 겸한 것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뒤 우찬성 겸 판이조사·판의주목사·좌찬성을 역임하였다.

1440년 부인 이씨가 심한 질투로 종을 죽인 사건으로 파면되어 황해도 우봉현(牛峰縣)으로 쫓겨났다가, 방면되어 돌아오는 길에 개성부에서 70세로 죽었다. 글씨와 시문에 뛰어났다. 시호는 문혜(文惠)이다.

 

이개(李塏)

1417(태종 17) 1456(세조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 ( 韓山 ). 자는 청보(淸甫) · 사고(士高), 호는 백옥헌(白玉軒). 6대왕 단종을 위해 사절(死節)한 사육신 ( 死六臣 )의 한 사람이다.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중추원사 종선(種善)이고, 아버지는 계주(季疇)이며, 어머니는 진명례(陳明禮)의 딸이다.

관직 활동태어나면서 글을 잘 지어 할아버지의 유풍(遺風)이 있었다. 1436(세종 18) 친시 문과에 동진사 ( 同進士 )로 급제하고, 1441년에 집현전저작랑으로서 당나라 명황(明皇)의 사적을 적은 명황계감 明皇誡鑑 의 편찬과 훈민정음의 제정에도 참여하였다.

1444년 집현전부수찬으로서 의사청(議事廳)에 나가 언문(諺文:國文)으로 운회 韻會 를 번역하는 일에 참여해 세종으로부터 후한 상을 받았다. 1447년 중시 문과에 을과 1등으로 급제하고, 이 해에 동국정운 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48년 지대구군사(知大丘郡事) 이보흠 ( 李甫欽 )이 조정에 사창 ( 社倉 )의 설치를 주장했을 때 백성들에게 부담을 준다는 점을 들어 반대하였다. 1450(문종 즉위년) 문종이 어린 왕세자를 위해 서연 ( 書筵 )을 열어 사() · ()의 상견례를 행할 때에 좌문학(左文學)의 직책으로서 소학 을 진강(進講)했는데, 문종으로부터 세자를 잘 지도해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았다.

1453(단종 1) 10월에 수양대군 ( 首陽大君 )이 단종을 보좌하던 대신 황보인 ( 皇甫仁 ) · 김종서 ( 金宗瑞 ) 등을 살해하고 정권을 쥔 이른바 계유정난을 일으켜 이 거사에 참여한 공신을 책정할 때, 환관 엄자치(嚴自治)와 전균(田畇)이 공로가 있다는 이유로 공신에 기록하고 봉군 ( 封君 )까지 하려고 하였다.

집의로서 좌사간인 성삼문 ( 成三問 )과 함께 환관의 폐해가 망국패가에 이르게 한 옛날의 예를 들어서 이들에게는 재백(財帛)으로 상만 내리고 공신과 봉군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힘써 아뢰었다. 이 해 12월에는 글을 올려 근일에 시정(時政)의 몇 가지 일로써 여러 번 임금에게 아뢰었으나 한가지도 윤허를 받지 못하므로 사직하기를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단종 복위 운동1456(세조 2) 2월 집현전부제학에 임명되었다. 이 해 6월에 성균관사예 김질(金 銷 )의 고변으로 성삼문 등 육신(六臣)이 주동이 된 상왕의 복위 계획이 발각되었는데, 박팽년 ( 朴彭年 ) · 하위지 ( 河緯地 ) · 유응부 ( 兪應孚 ) · 유성원 ( 柳誠源 )과 함께 국문을 당하였다. 이 때 그는 작형(灼刑)을 당하면서도 태연했다고 한다.

성삼문 등과 함께 같은 날 거열형 ( 車裂刑 )을 당했는데, 수레에 실려 형장으로 갈 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 우정(禹鼎 : 나라 우왕이 9주의 쇠를 거두어 9주를 상징해 만든 아홉 개의 솥)처럼 중하게 여길 때에는 사는 것도 또한 소중하지만 · 홍모(鴻毛 : 기러기의 털, 즉 아주 가벼운 물건의 비유)처럼 가벼이 여겨지는 곳에는 죽는 것도 오히려 영광이네 · 새벽녘까지 잠자지 못하다가 중문 밖을 나서니 · 현릉(顯陵 : 문종의 능)의 송백이 꿈속에 푸르고나! ” 이 때 이개의 매부인 전 집현전부수찬인 허조(許 璽 )도 단종 복위의 모의에 참여해 자결하였다.

사후 명예 회복과 작품사후에 남효온 ( 南孝溫 )이 당시 공론(公論)에 의거해 단종 복위 사건의 주도 인물인 성삼문 · 박팽년 · 하위지 · 이개 · 유성원 · 유응부 등 6인을 선정, 육신전 六臣傳 을 지었다. 육신전 이 세상에 공포된 뒤 육신의 절의를 국가에서도 공인, 1691(숙종 17)에 사육신의 관작을 추복(追復)시켰다.

그의 작품으로는 몇 편의 시가 전하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 까마귀 눈비맞아 희난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이 밤인들 어두우랴.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 ” 라는 단가 ( 短歌 )가 있다.

1758(영조 24)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노량진의 민절서원(愍節書院), 홍주의 노운서원(魯雲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이예견(李禮堅)

목은의 현손으로 홍귀달(洪貴達)과 함께 연산군(燕山君)의 폭정을 바로 잡으려고 대담한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당했던 예견(禮堅)은 만년에 고향에서 학문 연구에 진력했으며, 그의 아들 4형제가 문학과 절행으로 당세에 소문났었다.

 

이자

1480(성종 11)1533(중종 28).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한산 ( 韓山 ). 자는 차야(次野), 호는 음애(陰崖몽옹(夢翁계옹(溪翁). 이색 ( 李穡 )의 후손으로, 대사간 예견(禮堅)의 아들이다.

1501(연산군 7) 진사가 되었고, 1504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해 사헌부감찰을 지냈다. 천추사 ( 千秋使 )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온 뒤 이조좌랑에 승진했지만, 연산군 난정 하의 관직 생활에 환멸을 느껴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자청해 의성현령으로 나갔다.

1506년 중종반정 후에 발탁되어 홍문관수찬·교리 등을 지내다가 1510(중종 5) 아버지의 상으로 관직을 떠났다. 1513년 복직하여 부교리·부응교·사간원사간을 역임하고, 이듬해 어머니의 상으로 사직했다가 1517년부터 홍문관전한^직제학을 거쳐 부제학에 승진하였다.

그 후에 좌승지로 옮겼다가 다음해에 대사헌이 되었다. 이 무렵 조광조 ( 趙光祖 김정 ( 金淨 ) 등의 신진 사류들과 일파를 이루어 도학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으나, 그들의 급진적 개혁 정책을 완화하고자 노력하였다.

1518년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의 부사로 북경에 파견되었다. 이 때 정사로 갔던 남곤 ( 南袞 )이 병들어 거의 죽게 된 것을 지성으로 간호해 회복하게 했는데, 이 때문에 그는 기묘사화 후 큰 화를 면할 수 있었다. 1519년 귀국해 한성판윤·형조판서·우참찬 등에 임명되었다.

그는 사림파의 한 사람이었으나 성품이 온유하고 교제가 넓어 남곤· 김안로 ( 金安老 ) 등의 훈구 세력과도 원만하게 지냈다. 양파의 중간에서 반목과 대립을 해소하고 온건한 정책으로 유도하고자 했으나 급진 사림파의 반발로 실패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사림파가 참화를 입게 되자 그도 여기에 연좌되어 파직, 숙청되었다. 그 뒤 음성·충주 등지에 은거하여 세상을 등지고 독서와 시문으로 소일하고, 이연경 ( 李延慶 김세필 ( 金世弼 이약빙 ( 李若氷 ) 등과 학문을 토론하며 여생을 마쳤다.

효도와 우애가 돈독했고 학문과 수양에 정력을 기울였다. 많은 사평(史評)을 썼으나 일찍 죽어 정리되지 못하였다. 주자가례를 독신했으며 자손들에게 그 실천을 유언하였다. 기묘명현록에 올랐고, 충주의 팔봉서원 ( 八峰書院 )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음애일기와 시문집인 음애집이 있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이지함

1517(중종 12) 1578(선조 11). 조선 중기의 학자 · 기인(奇人), 토정비결 土亭 煉 訣 의 저자. 본관은 한산 ( 韓山 ), 자는 형백(馨伯) 또는 형중(馨仲)이며 호는 수산(水山) 또는 토정(土亭)이다. ()의 후손으로, 현령 치()의 아들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맏형인 지번(之蕃) 밑에서 글을 배우다가 뒤에 서경덕 ( 徐敬德 )의 문하에 들어가 그에게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후일에 그가 수리(數理) · 의학 · 복서 ( 卜筮 ) · 천문 · 지리 · 음양 · 술서(術書) 등에 달통하게 된 것도 서경덕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1573(선조 6) 주민의 추천으로 조정에 천거되어 청하(淸河 지금의 포천) 현감이 되었고, 재직중 임진강의 범람을 미리 알아서 많은 생명을 구제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이듬해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으나 1578년 아산 현감으로 다시 등용되었고, 부임한 즉시 걸인청(乞人廳)을 만들어 일정한 정착지가 없는 걸인들을 구제하였으며, 노약자와 기인(飢人 굶주린 사람)을 구호하였다.

생애의 대부분을 마포 강변의 흙담 움막집에서 청빈하게 지냈으며, 그 때문에 토정 이라는 호가 붙게 되었다. 토정이 의학과 복서에 밝다는 소문이 점차 퍼지자 그를 찾아오는 사람의 숫자가 많아지고 일 년의 신수를 보아 달라는 요구가 심해짐에 따라 책을 지었는데, 그것이 토정비결 이라고 알려져 있다.

전국의 산천을 두루 다니며 명당과 길지를 점지하였으며, 농아집 聾啞集 을 저술하여 어진 자에게 전하여 난을 구제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당대 성리학의 대가 조식(曺植)이 마포로 찾아와 그를 도연명(陶淵明)에 비유하였다는 이야기도 유명하다.

죽은 뒤 아산의 인산서원 ( 仁山書院 )에 제향되었고, 이어서 보은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도 제향되었다. 1713(숙종 39) 학덕이 인정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이산해(李山海)

1539(중종 34) 1609(광해군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 ( 韓山 ). 자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鵝溪) · 종남수옹(終南睡翁). 장윤(長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치()이고, 아버지는 내자시정(內資寺正) 지번(之蕃)이며, 어머니는 남수(南脩)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작은아버지인 지함(之 旅 )에게 학문을 배웠다. 1558(명종 13) 진사가 되고, 1561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등용되고, 이듬 해 홍문관정자가 되어 명종의 명을 받아 경복궁대액(景福宮大額)을 썼다. 이어 부수찬이 되고 1564년 병조좌랑 · 수찬, 이듬 해 정언을 거쳐 이조좌랑이 되었다.

1567(선조 즉위년) 원접사종사관(遠接使從事官)으로 명나라 조사(詔使)를 맞이한 뒤 이조정랑 · 의정부사인 · 사헌부집의 · 상의원정(尙衣院正) · 부교리를 역임하고, 직제학이 되어 지제교를 겸하였다. 이어 교리 · 응교를 지내고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위해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 전념하도록 휴가를 주던 제도)를 마친 뒤 1570년 동부승지로 승진하였다. 1577년 이조 · 예조 · 형조 · 공조의 참의를 차례로 지내고 대사성 · 도승지가 되었다.

1578년 대사간이 되어 서인 윤두수 ( 尹斗壽 ) · 윤근수 ( 尹根壽 ) · 윤현 ( 尹晛 ) 등을 탄핵해 파직시켰다. 다음 해 대사헌으로 승진하고 1580년 병조참판에 이어 형조판서로 승진하였다. 이듬 해 이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에 오르고, 다시 이조 · 예조 · 병조의 판서를 역임하면서 제학 · 대제학 · 판의금부사 ·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를 겸하였다. 1588년 우의정에 올랐고, 이 무렵 동인이 남인 · 북인으로 갈라지자 북인의 영수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다음 해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이 되었으며, 종계변무(宗系辨誣 : 명나라 태조실록 대명회전 에 이성계의 가계가 고려의 권신 李仁任의 후손으로 잘못 기록된 것을 시정하도록 요청한 일))의 공으로 광국공신 ( 光國功臣 ) 3등에 책록되고, 아성부원군 (鵝城府院君)에 책봉되었다.

이듬 해 정철 ( 鄭澈 )이 건저(建儲 : 세자 책봉) 문제를 일으키자 아들 경전(慶全)을 시켜 김공량(金公諒 : 仁嬪의 오빠)에게 정철이 인빈과 신성군(信誠君)을 해치려 한다는 말을 전해 물의를 빚었으며, 아들로 하여금 정철을 탄핵시켜 강계로 유배시켰다. 한편 이와 관련해 호조판서 윤두수, 우찬성 윤근수와 백유성(白惟成) · 유공진 ( 柳拱辰 ) · 이춘영 ( 李春英 ) · 황혁 ( 黃赫 ) 등 서인의 영수급을 파직 또는 귀양보내고 동인의 집권을 확고히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해 개성에 이르렀으나, 나라를 그르치고 왜적을 침입하도록 했다는 양사(兩司 : 사간원 ·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면되어 백의 ( 白衣 )로 평양에 이르렀으나, 다시 탄핵을 받아 평해 ( 平海 )에 중도부처 ( 中途付處 )되었다.

1595년 풀려나서 영돈녕부사로 복직되고 대제학을 겸하였다. 북인이 다시 분당 때 이이첨 ( 李爾瞻 ) · 정인홍 ( 鄭仁弘 ) · 홍여순 ( 洪汝諄 ) 등과 대북파가 되어 영수로서 1599년 재차 영의정에 올랐다. 이듬 해 파직되었다가 1601년 부원군(府院君)으로 환배(還拜 : 복직되어 제수됨)되었으며, 선조가 죽자 원상 ( 院相 )으로 국정을 맡았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신동으로 불렸으며, 특히 문장에 능해 선조조 문장팔가(文章八家)의 한 사람으로 불렸다 한다. 서화도 잘해 대자(大字)와 산수묵도(山水墨圖)에 뛰어났으며, 용인의 조광조묘비(趙光祖墓碑)와 안강의 이언적묘비(李彦迪墓碑)를 썼다. 이이(李珥) · 정철과 친구였으나 당파가 생긴 뒤로는 멀어졌다. 저서로 아계집 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이산보(李山甫)

1539(중종 34) 1594(선조 2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 ( 韓山 ). 자는 중거(仲擧), 호는 명곡(鳴谷). 증 영의정 색()7대손이며, 장윤(長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치()이고, 아버지는 지무(之茂)이며, 어머니는 능성 구씨(綾城具氏)이다. 작은아버지인 지함(之 旅 )을 사사하였다.

1567(명종 22) 사마시를 거쳐 1568(선조 1)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의 추천으로 춘추관에 들어갔다. 그 뒤 전적 ( 典籍 ) · 해미현감 · 정언 ( 正言 ) 등을 지냈으며, 왕명을 받고 순안어사(巡按御史)로 북도(北道)를 순찰하고 돌아와 수찬 ( 修撰 ) · 교리 ( 校理 ) · 지평 ( 持平 ) · 헌납 ( 獻納 ) · 이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1577년 양모의 상을 당해 관직을 사직하고 서천에 돌아갔다가 다시 사인 · 집의 · 사간 · 응교 · 직제학 등을 지냈으며, 당론을 끝까지 진술하다가 동인들의 탄핵을 받고 종부시정에 좌천되었다. 1년 뒤 다시 집의로 전임했고, 이어 동부승지 · 대사간 · 우승지를 지냈다.

1585년 부제학 김우옹(金宇 裵 )이 이이(李珥) · 정철 ( 鄭澈 )을 논박하자 이에 반박해 선조로부터 충절이 있다는 칭찬을 받고 대사헌으로 특진하였다. 뒤에 이이 · 박순 ( 朴淳 ) · 정철의 공적을 논하다가 사간원의 탄핵으로 경상도와 황해도의 관찰사로 전직되었다.

1589년 정여립 ( 鄭汝立 )의 모반사건인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대사간의 자리에서 난국을 수습하고, 이듬 해 성절사 ( 聖節使 )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1591년 황해도관찰사로 있다가 건저문제(建儲問題 : 왕세자의 책봉 문제)로 정철 등 서인이 화를 당하자 이에 연루, 곧 파직되어 고향인 보령에 내려가 독서로 시간을 보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扈從)했고, 대사간 · 이조참판 ·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명나라 군대가 요양(遼陽)에 머물면서 진군하지 않자 명나라 장군 이여송(李如松)을 설득해 명군을 조선으로 들어오게 하는 데 큰공을 세웠다.

이어 군량을 조달하기 위해 북도와 삼남지방의 도검찰사(都檢察使)로 나가, 지난날의 선정에 감복한 도민들의 적극 협조로 무사히 해결하였다. 1594년 대기근이 들자 동궁의 명을 받고 밤낮으로 구휼에 힘쓰다가 병을 얻어 죽었다. 1604년 호성공신 ( 扈聖功臣 ) 2등에 책록되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한흥부원군(韓興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성품이 소박하고 정직해 이해득실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으며 시정에는 심신으로 다했다 한다. 보령의 화암서원 ( 花巖書院 ), 서천의 건암서원 ( 建巖書院 )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이경전(李慶全)

1567(명종 22)1644(인조 2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 ( 韓山 ). 자는 중집(仲集), 호는 석루(石樓).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번(之蕃)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산해(山海)이며, 어머니는 조언수 ( 趙彦秀 )의 딸이다.

1590(선조 2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사가독서 ( 賜暇讀書 )를 하였다. 1596년 예조좌랑·병조좌랑을 지내고, 1608년 정인홍 ( 鄭仁弘 ) 등과 함께 영창대군 ( 永昌大君 )의 옹립을 꾀하는 소북 유영경 ( 柳永慶 )을 탄핵하다가 강계에 귀양갔다.

이 해 광해군이 즉위하자 풀려나와 충홍도(忠洪道전라도의 관찰사를 지내고, 1618(광해군 10) 한평군(韓平君)을 습봉(襲封)하고 좌참찬에 올랐다. 1623(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서인들에게 아첨하여 생명을 보전하고 주청사 ( 奏請使 )로 명나라에 가서 인조의 책봉을 요청하였다.

이어 한평부원군(韓平府院君)에 진봉되고, 1637년에 장유 ( 張維 이경석 ( 李景奭 ) 등과 함께 삼전도 ( 三田渡 )의 비문 작성의 명을 받았으나 병을 빙자하고 거절하였으며, 1640년 형조판서를 지냈다. 문필이 뛰어나 이름이 높았으며 저서로는 석루유고가 있다.

 

이현영(李顯英)

1573(선조 6) 1642(인조 2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 ( 韓山 ). 자는 중경(重卿), 호는 창곡(蒼谷) · 쌍산(雙山). 귀지(貴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희백(希伯)이고, 아버지는 군수 대수(大秀)이며, 어머니는 남양 홍씨(南陽洪氏)로 장사랑 질( )의 딸이다.

1595(선조 28)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보직되고, 평안도평사 · 지평 등을 거쳐 수찬 · 교리 · 지제교 등을 역임하였다. 1610(광해군 2) 헌납이 되었다가 교동현감으로 나갔다. 그 때 인척인 이이첨 ( 李爾瞻 )으로부터 그곳에 유배중인 임해군(臨海君 : 광해군의 형)의 암살을 종용받았으나 이에 불응해 미움을 받아 투옥되었다.

이듬해 다시 부수찬으로 기용된 뒤 서흥부사 · 예빈시정 · 봉상시정 · 필선 등을 역임하고, 1619년 성절사 ( 聖節使 )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21년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대북파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 은퇴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대사간에 등용, 1624년 경기도관찰사, 1625년 예조와 형조의 참판 및 대사헌, 1626년 이조참판, 1627년 동지중추부사, 1629년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부제학 · 도승지 · 참찬관 등을 역임하고, 1632년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죽자 행호군으로 산릉도감 ( 山陵都監 )을 겸하였다. 이어 동지경연사 ( 同知經筵事 ), 대사헌, 예조 · 형조의 판서를 지내고 사직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양근 ( 楊根 )에서 의병을 일으켜 후금의 군사와 싸웠다. 이듬해 형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호란 때 왕을 호종하지 못한 것을 자책해 사퇴했다가, 다시 이조판서를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1642년 청나라 용골대(龍骨大)가 소현세자 ( 昭顯世子 )를 볼모로 삼아 심양(瀋陽)에 잡아놓고 조선 사신의 입국을 요구하자, 김상헌 ( 金尙憲 )과 함께 심양에 가서 한달 동안 감금되었다가 돌아오던 중 평양에서 죽었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이기조(李基祚)

1595(선조 28) 1653(효종 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 ( 韓山 )이다. 자는 자선(子善)이다. 호는 호암(浩菴)이다. 희백(希伯)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대수(大秀)이다. 아버지는 판서 현영(顯英)이며, 어머니는 유사규(柳思規)의 딸이다. 박동열(朴東說)의 문인이다.

1615(광해군 7) 진사로서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승문원에 들어가 박사가 되었으나, 대북파에 의해 파직되어 그의 아버지 현영과 함께 수원 쌍부촌(雙阜村)에서 은거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형조좌랑이 되었다가 뒤이어 정언이 되었다.

이듬 해 이괄 ( 李适 )의 난 때는 한남도원수(漢南都元帥)의 종사관 ( 從事官 )으로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 뒤 지평 · 헌납 · 수찬 · 교리 · 이조좌랑 · 응교 · 좌부승지 등의 청요직(淸要職)을 여러 차례 역임하고 병조참의 · 공주목사 · 호조참의를 거쳤다.

1635(인조 13)에는 경상도관찰사로 나가 많은 치적을 쌓아 송덕비가 세워졌다. 1636년 안변부사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평안도찬획사(平安道贊劃使)로서 적과 싸우기를 원했으나 감사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그러자 죽도 ( 竹島 )에 영을 설치하고 백성들을 피란시켜 적봉(賊鋒)을 피하게 했다.

이후 도승지에 이어 대사간, 이조참의 · 참판을 역임했다. 1645년 부제학으로 동지 겸 정조성절사(冬至兼正朝聖節使)로 청나라에 가서 지나친 세공미(歲貢米)의 부담을 줄이는 데 성공하였다. 효종이 즉위하자 호조판서에 올랐으나 대동법 및 행전(行錢) 등의 문제로 김육 ( 金堉 )과 뜻을 달리해 대립하였다.

1650(효종 1) 효종이 성지(城池)를 수축하기 위해, ‘ 왜정가려(倭情可慮) ’ 라는 이유로 청나라에 보내는 주문(奏文)에 남방의 수성연졸(修城鍊卒)을 주장했다. 그러자 청나라가 이를 강화조약 위반이라고 추궁하고, 그 책임으로 이경석 ( 李景奭 ) · 조경 ( 趙絅 ) 등이 청사(淸使)의 사문(査問)을 받을 때 이들을 적극 변호해 구원하여 효종의 총애를 받았다.

그 해 진주부사(陳奏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우참찬이 되었다. 이어 예조판서가 되었으나 종묘 수리에 태만했다는 김육 등의 탄핵으로 함경감사로 밀려났다가 병으로 사퇴하였다. 1653년 공조판서에 임명되어 돌아오던 중 김화에서 병사하였다.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이의배(李義培)

1576(선조 9) 1637(인조 15). 조선 후기의 무신. 자는 의백(宜伯). 할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한양군(同知中樞韓陽君) 흥준(興俊)이고, 아버지는 장령 ( 掌令 ) ()이며, 어머니는 여흥 이씨(驪興李氏)로 예조판서 우직(友直)의 딸이다.

1599(선조 32) 무과에 급제해 선전관이 되고 이어 감찰로 전임되었다. 그 뒤 연해(沿海) 지역인 보령현감으로 발탁되었으나, 이 무렵은 임란 왜군이 겨우 철수한 때라서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교체되었다.

광해군 혼정(昏政) 때에는 출사하지 않다가 1623년 인조반정에 앞서 정사(靖社)의 밀모에 가담해 반정 후 통정(通政)으로 승진하고 명천부사에 제수되었다. 이괄 ( 李适 )의 난 후 전라좌수사로 승진하였다.

이어 인동부사로 전임되고, 1630(인조 8) 한천군(韓川君)으로 봉해졌으며, 공청병마절도사(公淸兵馬節度使) · 김해부사, 전라병사, 오위도총부부총관, 황해 · 평안 · 함경도 등의 병사를 거쳐 1635년 공청병마절도사로 다시 부임해 그곳에서 병자호란을 맞았다.

적의 변란 소식을 듣고 남한산성 행재소 ( 行在所 )에 달려가기 위해 급히 임지 부근의 속오병(束伍兵) 수 천명을 겨우 모아 출전을 서둘렀다.

가사를 동생에게 맡기고 부인에게 흰 명주로 행전(行纏 : 바지 · 고의를 입을 때 정강이에 꿰어 무릎 아래에 매는 물건)을 만들게 해 푸른 비단으로 바지 속 양 다리에 동여매니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묻는 말에 전투에 임하기 전에 사생을 알 수 없는데, 후일 이것으로써 알아차리게 함이다. ” 하고 결연히 고군(孤軍)을 이끌고 남한산성을 향하였다.

광주 ( 廣州 ) 부근 죽산에 당도해 다음 날 남한산성으로 향하다가 전봉장 이차형(李次衡) · 이근영(李根永)이 적의 습격을 받아 전사하고 중과부적이 되자, 영남 근왕병(嶺南勤王兵)의 합류를 기다렸다가 다시 진격하였다.

경상좌절도사 허완 ( 許完 )과 우절도사 민영(閔 兩 )의 군과 함께 광주 쌍령에 정족(鼎足)으로 진을 치고, 먼저 공격해온 적과 치열한 접전 끝에 아군이 많은 사상자를 내고 무너지자 비장 ( 裨將 )의 피신 권유를 물리친 채 살아남은 노비 축생(丑生)과 힘을 다해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이 싸움에서 허완 · 민영 등 양 절도사도 함께 전사하였다. 조정에서는 후일 이들의 공을 가상히 여겨 이의배 부자 및 허완 · 민영 등 양 절도사, 노비 축생을 모두 정려하였다. 그리고 의배는 처음에 병조판서로 추증했다가 다시 영의정으로 승격 추증하였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이남규(李南珪)

한말에 일본의 침략정책에 항거하다가 아들과 함께 살해당한 남규(南珪)가 유명하다.

 

이경직(李耕稙)

1841(헌종 7)1895(고종 32).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 ( 韓山 ). 자는 위양(威穰), 호는 신부(莘夫). 충청북도 청주 출생. 참판 선보(善溥)의 아들이다.

1876(고종 13) 동몽교관 ( 童蒙敎官 )이 된 뒤 1885년 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홍문관부수찬·참의내무부사(參議內務府事) 등을 거쳐 1892년 전라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이듬해 과거응시를 가장하여 전라도 동학교도들이 대거 상경, 교조의 신원(伸寃)을 요구한 사건이 일어나 그 책임을 지고 파면되었다가, 1895년 궁내부대신이 되었다.

을미사변이 일어나면서, 821일 밤에 궁궐을 습격한 일본 낭인(浪人)패에 항거하다가 민비 ( 閔妃 )와 함께 살해되었다. 1897년 대광보국숭록(大匡輔國崇祿)에 들고, 1899년에는 의정부의정(議政府議政)이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이상재(李商在)

1850(철종 1) 1927. 독립운동가 · 정치가 · 민권운동가 · 청년운동가. 본관은 한산 ( 韓山 ). 자는 계호(季 染 ), 호는 월남(月南). 충청남도 서천 출신. 아버지는 희택(羲宅)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이다. 어려서는 전통교육을 받고, 1864(고종 1) 강릉유씨(江陵劉氏)와 결혼하였다.

1867년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부패한 관리들의 매관매직 때문에 낙방거사가 되었다. 이를 개탄하고 낙향하여 세상을 등지고 살고자 하였으나, 친족 장직(長稙)의 권유로 당시 승지였던 박정양 ( 朴定陽 )의 집에서 1880년까지 개인 비서일을 보았다.

1881년 박정양의 추천으로 박정양 · 어윤중 ( 魚允中 ) · 홍영식 ( 洪英植 ) · 조준영(趙濬永) · 김옥균 ( 金玉均 ) 10여 명으로 구성된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으로 유길준 ( 兪吉濬 ) · 윤치호 ( 尹致昊 ) · 안종수 ( 安宗洙 ) · 고영희 ( 高永喜 ) 26명과 함께 일본에 갔다.

이때 일본의 신흥문물과 사회의 발전상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으며, 홍영식과 두터운 교분을 쌓고 귀국한 뒤 개화운동에 참가할 수 있는 소지를 마련하였다. 그래서 1884년 신관제에 의해 개설된 우정총국(郵政總局)의 총판 ( 總辦 ) 홍영식의 추천으로 주사로 임명되었으나, 그 해 12월 갑신정변의 실패로 낙향하였다.

1887년 박정양에 의해 친군영 ( 親軍營 )의 문안(文案)으로 임명되었고, 그 해 6월 박정양이 초대주미공사로 갈 때 2등서기관으로 채용되었다. 이 때 청나라가 우리 나라와 미국이 직접 외교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국서(國書)의 수교를 방해하였으나, 이상재는 청국공사와 단판을 벌여 박정양으로 하여금 단독으로 국서를 전달하게 하였다.

귀국한 뒤 낙향하였으나, 1892년에 전환국위원, 1894년에 승정원우부승지 겸 경연각 참찬, 학부아문참의 겸 학무국장이 되었다. 이 때 신교육제도를 창안하여 사범학교 · 중학교 · 소학교 · 외국어학교를 설립, 한때는 외국어학교교장을 겸하기도 하였다.

1896년 내각총서(內閣總書)와 중추원1등의관이 되고, 다시 관제 개편에 따라 내각총무국장에 올라 탐관오리의 구축 등 국운을 바로잡는데 힘썼다. 이 해 7월 서재필 ( 徐載弼 ) · 윤치호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였으며, 독립협회가 주최한 만민공동회 의장 또는 사회를 맡아보았다.

만민공동회가 종로에서 개최되었을 때, 척외(斥外) · 황권(皇權) 확립 등의 6개 조항을 의결하고 두 차례 상소문을 올렸다. 이 때문에 16명과 함께 경무청에 구금되었으나 참정 심상훈 ( 沈相薰 )의 간곡한 상소로 10일 만에 석방되었다.

그러나 18981225일 독립협회가 정부의 탄압과 황국협회의 방해로 해산되자, 모든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며, 탐관오리의 부패상과 비정을 탄핵하였다.

때문에 정부대신들의 미움을 받아, 19026월 국체개혁(國體改革)을 음모하였다는 이른바 개혁당사건에 연루되어 둘째 아들 승인(承仁)과 함께 다시 구금되었다가 19042월 석방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된 뒤 고종의 애절한 하명을 거절할 수 없어 잠시 의정부참찬에 머물렀고, 1907년 법부대신의 교섭을 받았으나 사양하였으며, 군대해산이 있은 뒤 관계를 떠났다.

한편, 1902년 이른바 개혁당사건으로 구금되어 있을 때, 기독교신자가 되었으며 석방된 뒤 함께 감옥에 있었던 김정식 ( 金貞植 ) · 유성준 ( 兪星濬 ) 등과 함께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에 가입하여, 초대 교육부장이 되어 민중계몽에 투신하였다.

1910년 국권을 강탈한 일제는 무단정치를 강행하며, 1913년에는 어용단체인 유신회 ( 維新會 )를 동원하여 청년회를 파괴하였고, 이 때문에 간부들은 축출 · 구금 · 국외추방 당하거나 해외망명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1913년 총무에 취임, 사멸직전의 청년회를 사수하였으며, 1914년에는 재일본조선YMCA를 비롯한 세브란스 · 배재 · 경신과 개성의 한영서원, 광주의 숭일, 군산의 연맹, 전주의 신흥, 공주의 연맹 등 학생YMCA를 망라한 조선기독교청년회 전국연합회를 조직하였다.

이 때 모든 민간단체는 해산되는 동시에 집회 · 출판 · 언론의 자유를 완전히 박탈당하였으나, 오직 YMCA만은 해산당하지 않고 튼튼히 서 있음으로써 국내의 유일한 민간단체로 남게 되었다. 그래서 19193 · 1운동의 발판이 되게 하였다. 또한, 3 · 1운동에 연루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고, 특히 3 · 1운동의 무저항 · 비폭력의 혁명운동정신을 이루어 놓았다.

1920년부터는 YMCA의 명예총무 또는 전국연합회회장으로, 1920년 미국 국회의원으로 구성된 시찰단이 내한하였을 때, 이른바 제2독립운동 · 물산장려운동 · 소년척후대(보이스카웃)운동 · 학생청년회운동 등 YMCA운동을 주관하였다. 그리고 각종 강연회 · 토론회 · 일요강좌 · 농촌운동 · 지방순회강연 등 폭넓은 민족운동을 주도하였다.

1922년에는 신흥우 ( 申興雨 ) · 이대위(李大偉) · 김활란 ( 金活蘭 ) · 김필례 ( 金弼禮 ) YMCA대표단을 인솔하여, 북경에서 열린 세계학생기독교청년연맹대회(WSCF)에 참석하여 한국YMCA가 단독으로 세계YMCA연맹에 가입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으며, 한국YMCA 창설에도 기여하였다.

한편, 1922년 조선교육협회를 창설하여 회장에 취임하였고, 조선민립대학기성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었다. 1924년 조선일보사 사장, 1925년 제1회 전국기자대회 의장으로 한국언론의 진작 및 단합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편, 공산주의사상에 물들어가는 지식인과 언론인들을 민족주의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1927215일 민족주의진영과 사회주의진영에서 이른바 민족의 단일전선을 결성하고, 공동의 적인 일본과 투쟁할 것을 목표로 신간회 ( 新幹會 )를 조직할 때, 창립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그 해 사망하여 47일 사상초유의 성대한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한산 선영에 안치되었다. 1957년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하리로 이장되었고, 변영로 ( 卞榮魯 )가 비문을 지었다.

풍자와 기지가 넘쳐 차원 높은 해학으로 살벌한 사회분위기를 순화시켰고, 악독한 일제의 침략과 불의를 날카로운 풍자와 경구로써 제어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李穡(이색) 선생의 일화.

구양현과 대적

고려 때 牧隱(목은) 李穡(이색)이 중국에 들어가 과거에 급제했다. 이때 학사 歐陽玄(구양현)이 그를 변방 사람이라 하여 경솔히 여기고 글한 짝을 지어서 조롱하는 것이다.

˝짐승의 발자취와 새의 발자취가 어찌 중국에 와서 왕래하느냐?[獸蹄鳥迹之道 交於中國]˝ 하자, 목은은 즉석에서 대답하기를,
“개 짖고 닭 우는 소리가 사방에 들려오고 있다[犬吠鷄鳴之聲 達于四境].˝ 하여 구양현을 놀라게 했다.
짐승의 발자취와 새의 발자취가 어찌 중국에 와서 다니느냐 ? 한 것은 우리를 극도로 멸시하여, 너희들 새나 짐승 같은 것들이 어찌 감히 우리 중국 땅을 더럽히느냐 하는 글이다.

그러나 여기에 화답한 목은의 시가 더욱 묘하다. 개 짖는 소리, 닭 우는 소리가 사방에 들려옵니다, 라고 대구 한 것은 중국 사람을 모두 개나 닭에 비유한 것이기 때문에 더 큰 욕을 한 것이다.

 

 

李之函(이지함) 선생의 일화.

1

       웃음의 비결

‘토정비결’의 土亭(토정) 李之函(이지함) 선생은 모를 사람이 없을 것이다. 호를 함부로 부르기가 무엇해서 토정 선생이라고 함이 마땅할 이 거인은 예언이나 점술에만 뛰어난 게 아니다.
학식, 인품, 식견 그리고는 體貌(체모)까지 두루 걸출한 인물이었다. 그러자니 웃음으로도 사뭇 걸출할 수밖에 없다.

그는 세속적 욕망을 걸레통보다 못하게 여겼다.
명예고 돈이고 권력이고 해봤자, 한 여름 개꼬리에 붙은 벼룩만큼도 여기지 않았다.
매인 데라곤 전혀 없던 이 위대한 자유인은 웃음으로도 그의 풍모를 여지없이 발휘했다.

그는 평생을 패랭이만 썼다. 댓개비를 엮어서 만든 갓, 아니 갓 축에 들지 못할 갓 비슷한 것을 애용했다.
喪制(상제) 아니면 천민이나 머리에 얹어놓기 일쑤인 그 천한 것을, 그나마 다 헐어 터진 것을 토정 선생은 쓰고 다녔다.
발에는 짚신을 신고 몸에는 누더기 꼴의 옷을 걸치고도 되레 위풍이 당당했다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게다가 율곡 선생이며 남명 선생까지도 그리고 백사 이항복까지도 그를 敬畏(경외)하였다니 어안이 벙벙해진다.
그런데 그는 당대의 대학자들의 천거를 받아 원치 않던 벼슬살이를 하게 되었다.

억지로 포천 현감 자리를 떠맡게 된 그가 부임한 첫날 아침에 아전이 밥상을 차려서 바쳤다.
이를테면 흰 쌀 밥에 우거지 국에 간에 절인 생선 구이 그리고 나물과 젓갈이며 김치 등으로 밥상은 제법 융숭했다.
기별도 없이 나타난 그에게는 과분한 것이었다.
그런데 상을 받은 패랭이 현감이 툭박지게 말했다.


“내가 먹을 게 못 되는구먼!”
아전이 한참 만에 다시 상을 보아 왔다. 그야말로 珍羞盛饌(진수성찬)이었다.
그런데, “아니, 더 한층 내가 먹을 게 못 되는구먼!”

패랭이 현감은 손을 저어댔다. 그제야 아전은 소문에 듣던 토정의 성품이 생각났다. 다시 차려 왔다. 달랑하니 보리밥에 김치가 전부인 개다리 밥상을 앞에 놓고 상전은 빙긋 웃으며 숟갈을 들고 아전은 싱긋 웃으며 머리를 긁었다고 전해진다.                                                                                              <출전:동아일보 2002.11.27>

2

우암산 묘혈

우암산은 청주의 동편에 가로누운 시의 진산인데 소가 앉아 있는 형국이다. 토정 이지함(李之菡)이 이곳을 지나다가 황소 모습의 웅장한 산세를 발견하고는 급히 달려가 신비스런 묘혈을 찾아냈다.

흡사 소가 앉아 있는 배 부분에 해당하는 곳에 바위를 굴려 표시하고는
“ 이곳은 장수에게 적합한 곳이니 보통사람은 건드리지 말라. ” 는 푯말을 세워 놓고 떠났다.
그때 진천에 사는 조풍수(趙風水)라는 사람이 이곳에 당도해 푯말을 뽑아내고 가묘를 써버렸다.
그러자 눈에 황금불을 켠 우두장군(牛頭將軍)이 입에 피를 흘리며 가묘 속으로 가라앉아 화석으로 변했는데, 지금도 그 화석묘가 있다는 풍수설화가 전한다.

 

3

토정비결

이지함에게는 무위도식하는 작은아버지가 있었다. 이에 이지함이 작은아버지에게 돌아다니며 비결을 봐 주고 밥이나 얻어먹게 하기 위해 비결책을 만들어 주었다.
그런데 그 비결책이 너무도 적중해 이지함이 일부러 몇 군데 틀리게 고쳐 놓았다고 한다.
그래서 ,<토정비결>에 맞지 않는 곳이 있다는 것이다.

 

 

李山海(이산해)  선생의 일화.

꿈으로 잉태한 아기

이산해의 아버지 이지번(李之蕃)이 명나라에 사신이 되어 갈 때 山海關(산해관)에서 유숙하면서 집에 있는 부인과 동침하는 꿈을 꾸었다.

그런데 이지번의 부인도 같은 날 남편과 동침하는 꿈을 꾸고 아기를 잉태하여 낳은 아들이 이산해라는 것이다.
그러나 집안에서는 이지번의 부인을 의심하여 내치려 하다가 이산해의 삼촌 이지함의 만류로 참았는데, 이지번이 귀국하여 꿈꾼 사실을 말하여 부인의 결백함이 입증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들의 이름을 꿈꾼 곳인 [산해관]에서 [산해]를 따서  ‘ 山海(산해) ’ 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2

귀신의 아들 李山海(이산해)

 

선조대왕 때 영의정이요 임진왜란 때 평란공신으로 아성부원군이 된 아계(鵞溪) 이산해(李山海)는 기성면 황보리에서 5년간 귀양살이를 하였다.

 

이산해는 토정비결을 지은 이지함(李之函)의 조카이며 이지번(李之蕃)의 아들로서 이지번이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 오는 길에 산해관(山海關)에서 하루 저녁 자는데 꿈에 부인과 정사(情事)를 나누었는데 집에 돌아와서 부인에게 꿈 이야기를 하였더니 부인도 그날 밤 같은 꿈을 꾸었다고 하여 기이하게 생각했는데 부인이 마침 태기가 있어 10개월 만에 낳은 아들이 바로 이산해선생이시다.

 

산해관 몽교(夢交)로 인하여 태어났으므로 이름을 산해(山海)라고 지었다고 한다.

 

또한 귀신의 아들이라고도 하였는데 백일하(白日下)에 다녀도 그림자가 없었다고 한다.

 

태어난 지 5개월 만에 하인이 쇠스랑을 메고 가는 것을 보고 저것은 뫼산() 자라 하였다 하니 가희 그 재주를 짐작할만하다.

                             <출전: 울진군지>

 

 

 

李穀(이곡)

 

차마설'중의 내용.

나는 가난해서 말이 없기 때문에 가끔 남의 말을 빌려서 탄다.

둔하고 야윈 말을 얻었을 땐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채찍을 쓰지 않는다. 금방이라도 쓰러지고 넘어질 것처럼 전전긍긍한다.

개천이나 도랑을 만나면 그 말에서 내린다. 때문에 후회하는 일이 거의 없다.

 

반면 발굽이 높고 귀가 쫑긋하며 잘 달리는 말을 얻었을 땐 의기양양해져서 멋대로 채찍을 갈기거나 고삐를 놓기도 한다. 언덕이나 골짜기를 모두 평지로 생각하며 유쾌하게 질주한다.

그러나 가끔 위험하게도 말에서 떨어지는 일을 면하지 못한다.”

 

 

 

李穡(이색) 선생 일화

 

때는 바야흐로 고려 말, 일찍이 아버지 李穀(이곡)은 원나라에 유학을 해 과거에 급제하고 그곳에서 벼슬까지 하여 널리 알려진 터에 아들 牧隱(목은)까지 원나라에 가서 급제를 하니 그 명성은 원나라 전국에 소문이 자자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목은이 원나라에 들어가 향시[鄕試]와 성시[省試]에 모두 장원급제 하여 수재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뒤 한림원 검토관 학사벼슬에 임명되어 원나라 조정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이때 원나라 재상의 딸이 목은에게 연정을 품고 한통의 편지를 보내게 되는데. 그내용은 이렇하다.

 

.....소년은 이나라 재상의 외동딸로서 방년 18세의 규수이옵니다.

이번에 목은 선생께서 장원급제 하였으나 이 나라 조정 신료들의 시기와 질투로 억울하게도 1위 자리를 이 나라 선비에게 내어주고 2위로 내려앉은 내막을 이 소녀 잘 알고 있으며 의분을 참지 못 하였나이다,

불행히도 천하 제1의 명예를 탈취 당했사오나 천하 제1의 미녀와 천하 제1의 부귀를 얻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소녀의 부모님께서도 원하시는 바이오니 속히 회답을 주시옵소서.............

 

말하자면 요즘말로 프러포즈 청혼인 셈이었다.

목은은 이미 고려에 아내가 있어 정중히 거절했다. 이 사실이 북경에 알려지자 목은은 화제의 주인공이 되어 원나라 젊은이들의 시기와 질투를 사게 되었다

 

원나라 선비들이 牧隱(목은)을 공연히 미워하여 당시 북경 문단을 우지좌지 하던 조수, 염복, 구양헌이 목은의 재주를 시험 하려고 북경의 요정으로 초청하여 일류문사 명기들과 글 시합을 한번 해 보자는 것이었다,

으레 술자리가 벌어지면 시[]를 지어주고 화답하는 것이 그 당시 선비들의 일상 이었으니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조선이란 조그만 나라에서 부자간에 과거급제 한 것은 원나라가 생기고 처음 있는 일이니 얼마나 글을 잘하는지 은근히 글 시합을 하자는 속셈이었다,

 

구양헌이 사관으로 앉아 있다가 갑자기 종이를 펴더니 持盃入海曰海大[지배입해왈 대해]라 쓰고 싱긋 웃고 나서 이색[李穡]에게 대구를 채우라고 하는것 이었다.

가만히 생각하니 나를 골탕 먹이려고 하는 짓이로구나 하여 좀 마음이 상하였지만 그냥 꾹참고 坐井觀天曰天小[좌정관천왈천소]

라 거침없이 써버렸다.

 

구양헌이 쓴 글귀는 고려를 조롱하는 말 이었다, 달팽이 같은 너희가 달팽이 껍질 같은 술잔을 들고 바다에 처음 뛰어들 때는 중국이 큰 줄 몰랐다가 보니 어떻냐 ? 이었다.

이에 대한 댓구로, 너희들은 우물에서 자란 개구리 모양으로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하늘이 작은 줄만 아는 불상한 사람들이다.

 

구양헌이 약이 올라 또 다음과 같은 글로서 이색을 모욕 하였다.

獸蹄鳥賊之徒交於中國[수제조적지도교어중국]이라 썼다. 이 뜻은 조수[鳥獸.새와 짐승]들이 이제는 중국에 교재하게 되었지, 였다.

이색은 피식 웃고서 댓구를 이렇게 적었다, 鷄鳴狗吠之聲達于四隣[게명구폐지성달우사린] 이뜻은, 너희들 수작은 닭 개짓는 소리와 다를 것이 없다,는 뜻이었다. 실로 통쾌한 댓구였다.

 

그 자리엔 중국 선비들뿐만 아니라 멀리 인도 등에서 온 한문을 아는 나라의 사절이 다 모여 있는 자리이었다. 참석자 모두 혀를 내둘렀다, 분위기를 파악한 조수가 이젠 이색을 치켜세웠다.

이 한림[이색]은 소문대로 천재이다, 이 한림과 재주를 겨누다가는 망신만 달할 뿐이다.

이 한림을 장원으로 뽑지 않은 것이 우리의 수치이외다. 라고 하면서..................

 

중국 선비들은 이색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술상을 다시 차려 밤새도록 즐겼다는 이야기이다

 

                          최범서 지음 야사로본 고려사에서  옮김

 

 

牧隱(목은) 李穡(이색)선생 일화

 

고려가 기울자 야은 吉再(길재)李穡(이색)에게 지신의 거취 문제를 상의해 왔다. 길재는 이색의 제자였다.

스승님, 이러한 조정에 계속 더 머물러 있어야 하오리까?’ 이색은 집시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가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마땅히 각자가 뜻을 행할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은 나라의 대신이기 때문에 나라와 더불어 기쁜 일과 슬픈 일을 함해야 하니 물러 갈 수 없다 허나 그대는 물러갈 만하다.”

알겠습니다.

 

길재는 그 길로 곧장 벼슬을 버리고 금오산으로 숨어 버렸다.

 

 

 

 

牧隱(목은) 李穡(이색)선생 일화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고려의 유신인 李穡(이색)은 여주의 자기 집에 머물렀다.

이때 그의 두 아들 종학과 종덕이 혁맹군에게 죽은 후였다. 두 아들을 죽이는 데 공을 세운 鄭摠(정총)鄭道傳(정도전)은 다름 아닌 이색의 제자였다.

 

어느 제자가 그를 찾아왔다. 이색은 그를 데리고 깊은 산골짜기로 데리고 들어갔다.

제자는 영문을 모른채 그를 따라갔다.

깊은 산골짜기로 들어간 이색이 제자 앞에서 통곡했다.

이때 제지는 승의 참담한 심정을 알고하루 종일 따라울었다.

 

해가 질 무렵, 이색이 제자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오늘에야 내 가슴이 매우 시원히구나.”

선생님, 미처 깊은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나이다.

내 미음을 헤아린들 어쩌겠느냐. 나는 망국의 신하요, 자식을 잃은 애비이거늘..........”

 

이색은 이성계가 나라를 세우자 고려의 멸망을 슬퍼하면서 망국의 한을 품고 여생을 마쳤다.

 

 

牧隱(목은) 李穡(이색)선생 일화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어느 이색을 불렀다.

李穡(이색)은 이성계를 만나자 읍만 하고 절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성계는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고 용성에서 내려와 이색을 반갑게 맞이했다.

잠시 시강관이 차례로 줄을 서서 들어왔다. 이성계는 재빨리 용상에 다시 올랐다.

이색이 이성계에게 말했다.

나는 이곳에 앉을자리가 없으니 이만 가겠소.” 그러자 이성계가 만류했다.

원컨대 공의 가르침을 받들겠소. 덕이 없고 우매하다고 나를 버리지 미시오.”

망국의 대부는 일신을 보존하기를 도모하지 않소. 다만 나의 해골을 가져다가 선산에 묻을 뿐이오.”

이색은 곧장 나가 버렸다.

 

 

 

李塏(이개) 선생의 시 한 수.

梨花(이화)

院落深深春晝淸(원락심심춘주청)

梨花開遍正冥冥(이화개편정명명)

鶯兒儘是無情思(앵아진시무정사)

掠過繁枝雪一庭(략과번지설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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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안이 깊고 깊어서 봄날이 맑은데

배꽃이 가득 피어 몹시 자욱하구나

꾀꼬리란 놈은 생각이 아주 없는지

가지들 사이를 뛰어 온 뜰이 눈이로다.

 

이화(梨花) - 이개(李塏 ? - 1456 조선 단종 때 사육신)이개는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된 사육신 중에서 가장 문학적인 재능이 뛰어난 인물로 글이 청절(淸絶)하고 글씨를 잘 썼다고 한다.

안평대군은 안견에게 꿈에 본 무릉도원인 '몽유도원도'를 그리게 하였다.

 

이개는 이 환상적인 그림에 예찬하는 글을 써 넣었고, 사육신인 박팽년, 이개, 성삼문 등도 그랬다는데, 그들이 꿈꾼 이상세계는 무엇이었던가?

 

 

李塏(이개) 선생의 일화.

 

단종복위의 거사가 발각되어 연루자는 국문을 당하게 되었다.

李塏(이개)親鞫(친국)장에서 형벌을 받으며 세조에게 물었다.

나리, 이것이 무슨 형벌이오?’

세조는 기가 막대답을 하지 못했다.

李塏(이개)牧隱(목은) 李穡(이색)의 증손자이며 지는 백고 · 청보였다. 시와 이 매우 뛰어나서 선비들이 그를 몹시 중하게 여겼다.

숙부 이계전이 수양대군의 집에 지주 출입하는 것을 보고 그는 숙부를 경계했다. 단종 복위 모의가 실패로 돌아가 친국을 받을 때 세조는 그때의 일을 상기하고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일찍이 나는 숙부 이계전에게 경계의 말을 들었다. 너는 이제 보니 그때부터 다른 돗이 있었구나.”

그는 몸이 몹시 말라 형벌을 견디지 못할 것같이 보였으나,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아 보는 이들이 모두 감-탄했다.

李塏(이개)가 직제학으로 있을 때였다. 박사 성긴과 집현전에서 聯句(연구)를 지은 적이 있었다.

                                                           <출전: 한국대표 야사 집 >

 

 

 

李之函(이지함) 선생의 일화.

 

1517(중종 12)1578(선조 11)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기인(奇人)으로 토정비결의 저자이다.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형백(馨伯), 호는 토정(土亭), 현령 치()의 아들이며, ()의 후손이다. 그는 생애의 대부분을 한강의 마포강변(현재 마포구 토정동 마포주차장 부근)에서 토담 움막집을 짓고 청빈하게 살았으며, 그로 인하여 토정이라는 호가 붙여지게 되었다. 또한 그의 기이한 행동과 예언, 술수에 대한 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맏형인 지번(之蕃)에게 글을 배웠으며, 후에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그에게서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성리학뿐만 아니라 수리(數理의학· 복서(卜筮천문지리 등에 달통하였다. 그가 의학과 복서에 밝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자 그를 찾아오는 사람이 늘어나고, 일년(一年)의 신수(身數)를 보아달라는 요구가 많아져서 토정비결을 지었다고 한다. 그는 1573(선조 6)에 주민의 추천으로 포천(抱川)현감이 되었으며, 재임 중에 임진강의 범람을 예견하고 미리 대비하여 많은 인명을 구했다. 이어 1578년에는 아산(牙山)현감에 임명되어 걸인과 기민(饑民노약자의 구호에 힘썼으며, 재임 중에 세상을 떠났다.

<다음: “에서 인용.>

 

 

李光靖(이광정)의 묘

 

李光靖(이광정) 肅宗 40年 甲午(1714)~

正祖 13年 己酉(1795) 76. 字 休文. 號 小山. 韓山人. 象靖의 아우.

 

공의 묘는 군위군 소보면 내의동 선영에 있다. 공은 종숙 志和公(지화공)에게 계출했다. 15세에 외조부 密庵(밀암)선생 문하에 나갔다. 영조 11(1735) 증광향시에 합격, 16년에 향시에 합격했으나 殿試(전시)에 불리하여 학문에만 전염하였다.

뒤에 어사가 영남인재 3인을 추천하는데 들었고, 정조 7(1783) 국왕이 李象靖(이상정)의 아우 光靖(광정)이 학문과 行檢(행검)이 도내에 알려져 그 형의 風度(풍도)를 지녔다 하니 가상한 일이다 하고 이조에 명해 기용토록 분부했다.

문집 137책 등 저술을 남겼고, 고산서원에 재향되었다.

 

 

 

李象靖(이상정) 墓碣銘(묘갈명)

 

 

李象靖(이상정) 肅宗 37年 辛卯(1711)~ 正祖 6年 壬寅(1782) 71.

字 景文 號 大山. 韓山人 睡隱 弘祚玄孫

 

외조부 밀암 李裁(이재)에 사사하여 영조 11년 을묘(1735) 생원으로 증광문과 병과에 급제하고 승문원정자를 거쳐 연일현감, 형조참의에 이르렀다. 벼슬에 나가기에 앞서 향리에 大夕山(대석산) 밑에서 서당을 지어 후진을 양성하면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공의 학문은 도산의 嫡傳(적전)으로 敬齋箴集(경재잠집) 理氣彙集(이기휘집) 朱子語節要(주자어절요) 등 많은 저술이 있고 사후 龜卨(구설) 金㙆(김홍)의 상소에 의하여 순조 16(1816)에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의금부사 홍문관제학 동지춘추관사 세자부빈객 오위도총부도총관에 증직 되었다가 다시 고종 임오년(1882)에 이조판서로 가증되고 경오년(1910)에는 文敬(문경)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학가산 광흥사 앞산에 있는 공의 묘 아래에는 특이하게도 大山先生之墓(대산선생지묘)라 전면 큰 글자(생원 金羲壽(김희수) 글씨)蔡濟恭(채제공) 찬 비명을 음각한 높이 6척 넓이 22촌 폭 25촌의 큰 비기 서있다.

신도비는 柳致明(유치명) 찬으로 문집에 실려 있으나 묘아래 세우지는 못한 것 같다. 뒤에 고산서원에 재향되고 저서로는 문집 52, 續集(속집) 4, 實記(실기) 10, 高山及門錄(고산급문록) 3권 등이 있다.

 

墓碣銘

通政大夫禮曹參議大山李公墓碣銘

五年辛丑之十二月九日大山先生李公卒於安東蘓湖之里第嶺之民涕洟曰大山無福實斯民無福嶺之士相嚮而哭曰哲人亡矣吾儕將安所宗仰朝之薦紳先生咸咨嗟曰才不究用世何以勸及至葬士林來會者千有二百餘人退而有私述其言行者其悅服若七十子之服孔子生而任吾道之重死而關斯文之運斯可以驗矣嗚呼盛哉公當英宗乙卯中司馬俄又捷大科時年二十五聲望冠一世先是公自幼少受業外大父密庵李先生慨然知俗學非所務及釋褐芥視榮利潛心此學體若不勝衣而進道之勇孟賁莫奪言若不出口而析理之精蚕絲不遺寧學聖人而未至不欲以一善成名以故林下三四十年無一日不讀孔孟程朱之書無一息或輟存養省察之工致謹乎日用彝倫而門路端的用力於銖積寸攀而堦級齊整體具用備居安資深逮夫晩歲矜持者和順辛苦者快活面背睟盎儼然成德此非一人之言士林所共言也非士林之言國人之所共知也天德王道本無二致使公修之身者推之天下國家何適不宜而其如天不欲平治何哉其仕也內則槐院正字別檢典籍禮兵二曹郞外則連源察訪延日康翎二知縣而已而連居半年棄歸延治二載因事遞康不赴英廟嘗欲晉用公屢詢筵席而未及用也今上御極之元年丁酉特除司諫院正言已又因大臣交口薦達特除兵曹參知移禮曹參議辭不赴辛丑又拜刑曹參議上在銅闈已知公爲儒林第一人及卽位親拔擢數年之間三遷佐貳必欲一致之朝以賁飾文治或親降玉音諭之以必欲一見或命筵臣貽書勸起葢側席之思至矣公量時度義綽有定計以在家無變動爲臣分所不敢安則旣發言旋者再矣乃曰身旣不可進以言事君亦古人之道陳九條䟽一立志二明理三居敬四體天五納諫六典學七用人八愛民九尙儉上五條論君德也下四條論治體也末乃言七十致事之義乞賜骸骨畢命田野䟽至上命促入嗟歎者久賜批曰九條萬言言言眞切庸替座右之銘要作觀省之資葢公之幼學壯行使人日可見者惟連郵之氷蘗律己延邑之治化浹民然此塵糠也惟九條䟽帝王出治之本吾儒體用之學粲然斯備在公未始非精力所萃而畢竟得聖主曰兪而已居頃之疾作及其革召門弟子入命加上衣拖帶謂曰願諸公着實用工耳又曰此事只是平常平常中自有妙處謂弟光靖曰隨分收拾勉進後學又謂從祖弟師靖曰敎子弟以依本分不失儒家氣味翼日怡然而逝享年七十一粤明年壬寅三月葬于府北鶴駕山下巳向之原公以其至行則居家而孝友盡倫居喪而致哀盡禮以其修辭則約中篇憂情熾而性鑿也制養錄欲制外而安內也持敬爲平日用工之要則作敬齋箴集解以資顧諟理氣爲造次沈潛之所則作彙編以明其先後偏全同異分合朱子語類退陶書編袠浩穰難於究觀則節其要成書以便誦習至若四七理發氣發之說有朱退定論而後來談者便以是分朋公以爲理與氣不相離處自有不相雜者不可分中亦有不可不分者聖賢之言有渾淪言時亦有分開說處渾淪處作渾淪看分開處作分開看於是作四七說所與知舊問答與論著各體又有若干卷葢公資稟旣異上力又到凡有妙契從以疾書皆所以祖述朱退羽翼斯道者也四方學者有百里重繭執經問難戶屨日盈公各隨其材諄諄誘掖一以開明心術變化氣質爲務公雖歿嶺儒之言貌謙恭瞻視端重者不問尙可知爲大山公門人也公諱象靖字景文韓山人文孝公穀文靖公穡文章節行聞天下公其裔也入國朝數傳至大司諫允蕃以淸節顯有弘祚官縣監號睡隱於公四世也當光海斁倫盡室踰大嶺依外氏西厓柳先生居焉子孫遂爲安東人曾祖諱孝濟祖諱碩觀考諱泰和俱有隱德爲鄕里重妣載寧李氏密庵諱栽之女密庵服庭訓倡道南方夫人生長法門賢有行以肅宗辛卯生公方四五歲雖嬉戲微事必敎以義公已能惕然知戒公配贈淑夫人長水黃氏翼成公喜之後處士混之女公之淸修保養得內助爲多先公十四年卒有一子埦文科別檢生三男二女男長永運弱冠成進士蔚有士望次永進永遠女適進士柳晦文季幼昔程伊川先生曰明道之葬門人朋友爲文以述其道學者甚衆各用其所知葢不同也而以爲孟子之後傳聖人之道者一人而已是則同今以公知舊門人祭告之文及私錄言行者觀之稱述慕仰之辭不一其說而其曰得陶山嫡傳無異辭也嗚呼昔之稱明道以孟子後一人者今知爲的確不易之論則以後而視今知公之爲陶山嫡傳者必當如今之視昔是爲銘銘曰

聖遠言湮道寄方冊洛閩之後陶山廓之誰其私淑公在南服黃甲之擢匪我所樂我有身心操存整飭寤寐持敬翼翼臨淵王曰汝來汝惟儒賢山耀谷輝恩旨自天公曰臣駑分合林泉九條治法臣言止是生而感發陶山孔邇歿而贊歎陶山是似睠顧斯世墜緖茫茫勉哉吾黨視此銘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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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갈명

지금 임금(정조) 즉위 5년인 신축년(1781) 129일에, 대산(大山)선생 이공(李公)이 안동 蘇湖里(소호리) 집에서 세상을 마치시니, 영남의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대산이 복이 없음는 것이 실로 이 백성이 복이 없는 것이나 같다.하고, 영남의 선비는 서로 빈소를 향하여 곡을 하며 말하기를 철인(哲人)이 돌아가시니 우리들은 장차 누구를 종앙(宗仰)할 것인가?하였고, 조정의 사대부들도 모두 탄식 하며 말하기를 대산의 제능을 살펴, 등용해서 쓰지못 하였으니 세상의 인재를 무엇으로써 권면 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장사를 지내니 사림에서 모인 사람이 12백여 명이었는데, 장사를 마치고 돌아가 개인적으로 그 언행을 기술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기꺼이 선셍에게 복종함이 마치 육예(六藝)에 통한 일흔 명의 제자가 공자에게 복종하는 듯이 하였다.

이상에서 생전에는 儒道(유도)의 중책을 맡고, 사후에는 斯文(사문)의 운에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으니, ! 위대하도다. 공은 영조 을묘년(1735)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조금 있다가 또 대과에 급제했는데, 당시의 연령이 25세였으니, 성망(聲望)이 한 시대에 으뜸이었다.

공은 어려서부터 외조부 密庵(밀암) 이재(李栽)선생에게 학업을 배웠는데, 慨然(개연)히 시속의 학문은 힘 쓸 바가 아님을 알았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가서는, 영리(榮利)草芥(초개) 처럼 보았다. 몸은 입은 옷을 감당하지 못할 듯이 삼갔으나, 도에 나아가는 용기는 孟賁(맹분)도 빼앗지 못하고, 말은 입에서 잘 나오지 못하는 듯이 조심 하였으나, 이치를 분석하는 정밀함은 蠶絲(잠사)의 가는 것 하나도 빠뜨리지 않을 정도로 정밀하였다.

차라리 성인의 학문을 배우다가 이르지 못할지언정, 한 가지 선으로 이름을 이루고자 하지 않았다. 이러한 까닭으로 임하(林下)에서 3~40년 동안 하루도 공자 맹자 정자 주자의 글을 읽지 않는 날이 없었고, 잠시도 존양성찰(存養省寮)의 공부를 그치는 일이 없었다.

항상 人倫(인륜)에 정성을 다하여 나가는 문로(門路)가 분명하고, 잊지도 않으며 조장하지도 않는것(勿忘勿助)에 마음을 써서, 공부 하는 단계에 순서가 있었다. 이에 ()가 갖추어지고 ()이 갖추어지며, 起居(기거)가 편안하고 바탕이 깊어 갔다.

만년에 이르러서는 矜持(긍지)로써 힘쓰던 것이 화순(和順)하고 辛苦(신고)를 겪었던 것이 쾌활(快活)하여, 덕이 얼굴에 드러나 밝고, 온 몸에 넘쳐서 엄연히 덕을 이루었다. 이는 한사람이 하는 말이 아니라, 많는 사림이 다 말하는 것이고, 사림의 말이 뿐이 아니라, 온 나라 사람들이 다 아는 바이다.

天德(천덕)王道(왕도)는 본디 두 가지 다른 이치가 아니니, 공이 그 몸에 닦은 덕으로서 천하와 국가에 미루어 행하게 했더라면 어디에 간들 옳다고 하지 않았을 것인가? 그러나 하늘이 천하를 평정하지 않고, 국가를 편히 다스리지 않고자 하는 데는 어쩔 것인가?

벼슬한 이력은 내직으로는 承文院(승문원)의 정자(正字別監(별감전적(典籍)과 예조와 병조의 정랑을 역임하고, 외직으로는 連源察訪(연원찰방), 연일(延日)康翎(강령) 두 고을의 현감을 역임 하였을 뿐이었다.

연원에서는 반년을 지내다가 직책을 버리고 돌아오고, 연일에서는 두해를 다스리다가 어떤 일로 인하여 遞職(체직)되고, 강령에는 부임하지 않았다.

영조가 일찍이 공을 등용 하고자 하여, 누차 정사를 논하는 자리에 불었으나 미처 등용하지 못했더니, 지금 임금의 즉위 원년인 정유년(1777)에 특별히 사간원정언에 제수하고, 이윽고 또 대신들이 서로 천거하여 특별히 병조참지에 제수하고, 예조참의로 옮겼으나 사직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신축년(1781)에 또 형조참의에 임명되었는데, 주상이 동궁에 계실 때 이미 공이 유림의 제일인 자임을 알고 즉위하자, 친히 발탁하여, 몇 년 안에 세 차례 다리를 옮겨가며 임금을 가까이에서 보좌하 하였고, 한 번은 조정에 불러 문치(文治)를 빛내고자 하였다.

그래서 가끔 친히 옥음(玉音)을 내려 한번 보고자 하는 뜻으로, 유시하기도 하고 혹 筵臣(연신)에게 명하여 편지를 보내어, 조정을 위해 관직에 나오기를 권하였으니, 대체로 현자를 겸허하게 기다리는 생각이 지극하였다.

공은 시의(時義)를 헤아림에 정한계책이 확고하게 서 있었는데, 집에 있으면서 꼼짝 하지 않는 것은 신하의 본분으로서 감히 편한 일이 아니라고 여겨, 이미 쩡을 위해 좋은 의견을 말 하고 돌아선 것이 두 차례였다.

그리고 말하기를,몸이 이미 나이가 들어 관직에 나가기가 불가능 하니, 말로라도 임금을 섬기는 것이 또한 고인의 도리이다.하고, 9조소(九條疏)를 작성하여 아뢰었는데, 그 내용은 차례로 뜻을 세울 것, 도리를 밝힐 것」 「경건히 처할 것」 「천도를 체득 할 것」 「간언을 받아들일 것」 「학문을 흥하게 일으킬 할 것」 「인재를 등용할 것」 「백성을 사랑할 것」 「검약을 숭상 할 것등이었다.

앞에 5조는 군주의 덕을 논한 것이고, 위에 4조는 정치의 본체를 논한 것이 였다. 마지막에는 일흔살에는 벼슬에서 물러난다.는 의를 말하고, 물러날 것을 허락하여 田野(전야)에서 목숨을 마치게 해 주기를 청하였다. 상소가 이르자 주상은 빨리 그 상소문을 들여보낼 것을 명하고, 탄식하기를 오래도록 하다가 비답(批答)을 내리기를 9조의 만언(萬言)이 말마다 참되고 절실하니 이 9조소로써, 좌우명을 삼아보고 반성하는 자료로 삼고자한다.라고 하였다.

대개 공이 어려서 배우고 장성하여 행한 일을 사람들이 늘 보고 알았던 것은, 오직 연원찰방으로 있었을 때 淸苦(청고)한 지조로 자신을 다스리고, 연일 현감으로 있었을 때 치화(治化)가 백성들에게 깊이 수며 든 것뿐이었다. 그러나 이 일은 공이 한 일 중에 하참은 찌꺼기에 불과하고, 오직 9조소가 제왕이 선치(善治)를 내는 근본, 우리 유학의 체용(體用)의 학문이 그 속에 찬연하게 갖추어져 있으니, 공에게 있어서 처음부터 정력이 모인바 아넘이 없어서 결국 우리 성주(聖主)가 인정 했던 것 이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질병이 일어났는데, 위독하게 되자, 문하의 제자들을 불러 방에 들어오게 하고, 명하여 옷을 입히고 띠를 걸치게 하시고는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이 착실히 공부하기를 바랄뿐이다.하고, 또 말씀 하시기를 학문은 다만 平常(평상)한 것이니 평상한 가운데 절로 묘처(妙處)가있다.고 하였다. 아우 光靖(광정)에게 말씀하시기를 본분을 따라 수습하여 후학을 勸勉(권면)하여 진보하게 해야 할것이다.하고, 또종제 師靖(사정)에게 말씀하시기를 자제를 가르치기에 본분에 의거고 기미(氣味)를 잃지 않아야한다.라고 하였다.

다음날 고요히 세상을 떠나시니 향년이 71세였다. 이듬해 임인년(1782) 3월에 안동 부북쪽 학가산 아래 사향(星向) 등성에 안장하였다. 공은 지극한 선한 행실을 하였으며, 가정에서는 효성과 우애의 인륜을 극진히 하였으며 상중에 계시면서는 슬픔을 다하고 예를 다하였다. 저술에는, 약중편(約中籍)()이 드세어 성()이 상할까 근심한 것이고, 제양록(制養線)은 외면을 제어하여 내면을 편안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지경(持敬)이 평일 공부의 요체였는데 즉 경제잠집설(敬齋箴集說)을 지어, 자신을 돌아보아 살피는 바탕으로 삼고, 이기(理氣)는 잠깐 사이라도 침잠하는바 이기휘편(理氣彙編)을 지어 ()()의 선후(先後偏前(편전))과 동이(同異분합(分合)의 문제를 밝혔다.

朱子語類(주자어류)退溪集(퇴계집)의 서찰은 그 偏秩(편질)이 매우 많아서 연구하고 보기에 어려웠으므로 그 가운데 요긴한 것을 절략(節略)하여 책을 이루어 외우고 익히기에 편하게 하였다. 사단(四端칠정(七情)의 이발(理發기발(氣發)에 대한 학설 같은데 이르러서는 주자와 퇴계의 정론이 있었는데 후일에 말하는 사람들이 문득 이로써 무리가 갈라지니, 공은 이와 기는 서로 떨어져 있을수 없으나 또한 절로 서로 섞이지 못할 것이 있으니, 분리 할수 없는 가운데 또한 분리 하지 않을 수없는 것이 있다. 성현의 말씀은 혼륜(渾淪)으로 말 한 때도 있고 또한 분개(分開)하여 말 한 때도 있으니 혼륜처에는 혼륜으로 보아야하고 분개처에는 분개 하여보아야 한다.하고, 이에 사칠설(四七說)을 지어 더불어 아는 벗들과 묻고 답한 것과 논저(論著) 각체가 또 얼마간의 분량이 있다.

대개 공은 자품이 이미 남다르고 공력이 또한 지극했다. 무릇 깨달음이 있으면 곧 이어 급히 기록하였으니 모두 주자와 퇴계를 조종으로 삼아 기술하고 유학의 도리를 보위하는 것이었다. 사방에서 배우기를 청하는 사람들이 백리 먼길에 발이 부르트도록 걸어와 경전을 들고 어려움을 묻느라 문앞에는 신이 날로 가득 넘쳤는데, 공은 각기 그 재능을 따라 자상하게 가르쳐 인도하여 한결같이 마음을 열어서 밝히고, 기질을 변화시키는 것으로써 일을 삼아 힘썼다.

공이 비록 돌아가셨으나 영남 선비들 가운데 말과 모습이 겸허하고 공손하며 경건한 시선이 단정하고 무게가 있는 이는 묻지 않고도 대산공의 제자임을 알 수 있다.

공의 휘는 상정(象靖), 자는 경문(景文),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고려조의 문효공(文孝公) ()과 문정공(文靖公) ()은 문장·절행이 천하에 드러났으니, 공은 그 후예이다. 조선조에 들어와 몇 대를 지나 대사간 윤번(允蕃)에 이르러 청렴한 절조로 세상에 그 이름이 드러났다. 휘 홍조(弘祚)는 관직이 현감이고 호는 수은(睡隱)인데 공에게 고조부이다. 광해군이 인륜을 패한 때를 당하여 수은공은 가족을 모두 거느리고 대령(大嶺)을 넘어 외조부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선생에게 의지하여 사니, 자손들이 드디어 안동사람이 되었다.

증조의 휘는 효제(孝濟)이고, 조부의 휘는 석관(項觀)이고, 부친의 휘는 태화(泰和)인데 모두 은덕(隱德)이 있어 향리의 추중을 받았다.

모친은 재령(載寧)이씨(李氏)인데 밀암(密庵) 휘 재()의 따님이니 현숙하여 훌륭한 행실이 있었다. 숙종 신묘년(1711)에 공을 날았다.

이씨는 공이 4~5세에 비록 아이들 놀이의 하찮은 일이라도 반드시 의로써 가르치니, 공은 이미 두려운 마음으로 경계 할줄 알았다.

부인은 증숙부인 장수(長水) 황씨(黃氏)로 익성공(翼成公) ()의 후손이고 처사 혼()의 따님인데, 공보다 14년 먼저 돌아가셨다. 한 아들 완()이 있었는데 문과에 급제하여 별검(別檢)이 되었고 32녀를 날았다. 장남 영운(永運)은 약관의 나이에 진사가 되어 울연히 사망(士望)이 있었고, 차남은 영진(永進)이고, 삼남은 영원(永遠)이다. 장녀는 진사 유회문(柳晦文)에게 출가하고, 막내는 어리다.

옛날에 이천(伊川) 정이(程頤)선생이 말씀 하시기를, 명도(明道)의 장례에 문인 붕우들이 글을 지어 명도의 도학(道學)을 기술한 사람이 매우많았는데 각기 그들이 아는 것으로써 하여 대개 동일하지 않다. 그러나 맹자 후에 성인의 도를 전한 사람은 명도 한 사람뿐이다.라고 한 것은 동일하다.라고 하였다. 지금 공의 벗과 제자들이 공에게 고한 제문과 개인적으로 공의 언행을 기술한 것으로써 본다면, 칭송하고 기술하며 사모하고 추앙하는 글이 그말은 동일하지 않으나 도산(陶山)의 적전(嫡傳)을 얻었다.고 한 것에는 다른 말이없었다.

! 옛날에 명도를 두고 맹자 후에 한사람이라고 칭송 한것이 지금 정확하여 바꿀 수없는 정론임을 안즉, 후일에 오늘을 보면 반드시 오늘 옛 말을 보는것과 같으리라. 이에 명()을 짓는다.

 

聖遠言湮 성인이 멀어지고 말씀이잠기니

道寄方冊 도는 책에 전하게 되었네.

洛閩之後 낙민의 후에

陶山廓之 퇴계선생이 넓히셨네.

誰其私淑 누가 사숙했던가?

公在南服 공이 남쪽 지방에 계셨네.

黃甲之擢 황갑에 뽑히는 것은

匪我所樂 즐기는 바 아니었네

我有身心 나에게 몸과 마음이 있으니

操存整飭 마음을 보존하고 몸을가다듬었네

寤寐持敬 자나 깨나 경을 유지하여

翼翼臨淵 경건히 깊은 못에 임한듯 하였네

王曰汝來 왕이 말씀 하시기를 그대여 올지니

汝惟儒賢 그대는 유현이로다 하셨네

山耀谷輝 산곡에 광채가 발하니

恩旨自天 임금의 교지가 내렸네

公曰臣駑 공은 말하기를 신은 노둔하니

分合林泉 분수가 산림에 처함이 합당하고

九條治法 구조로써 법을 다스리도록 아뢰니

臣言止是 신의 말은 이에 그친다하였네

生而感發 생시에 감발하니

陶山孔邇 도산이 매우 가깝고

歿而贊歎 사후에 찬탄하니

陶山是似 퇴계와 매우 닮았네

睠顧斯世 이 세상을 돌아봄에

墜緖茫茫 실추한 실마리 망망하니

勉哉吾黨 힘쓸지어다. 우리 당이여

視此銘章 이 명의 글을 보라

 

순조 병자년(1816)에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의금부사

홍문관제학 지춘추관성균관사 세자좌부빈객 오위도총부부총관의

증직을 받고, 고종 임오년(1882)에 또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 의금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성균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의 증직을받았다.

경술년(1910)에 문경(文敬)이라는 시호를 받았는데 도덕빅문(道德博文)''이라 하고, '숙야경계(夙夜儆戒)'''이라고 한다.

 

 

 

 

李弘祚(이홍조) 墓碣銘(묘갈명)

 

李弘祚(이홍조) 宣祖 28年 乙未(1595)~ 顯宗 元年 庚子(1660) 66.

字 汝廓. 號 睡隱. 韓山人.

 

공의 묘는 일직면 명진동 장곡 병좌원에 있다. 묘 앞에 密庵(밀암) 李裁(이재) 찬문의 비가 숭정 기원후 130년 을유(영조 41, 1765) 현손 통정대부 大山(대산) 李象靖(이상정) 글씨로 세워져 있다.

공은 서애선생의 외손자이다. 병자호란 때 안동 의병장으로 향병을 모집하여 진군하였으나 조령에 이르러 남한성이 함락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罷兵(파병)하게 되었다,

뒤에 沙西(사서) 全湜(전식)의 천거로 자여도찰방, 상의원직장, 의금부도사를 거쳐 회인현감이 되어서는 청렴하고 法理(법리)에 다라 宿弊(숙폐)를 없애니 현민 들이 칭송하였다. 林泉(임천)에서 한유 자적하였으며 물욕이 없었다. 뒤에 서산서원에 배향되었다.

 

墓誌銘

通訓大夫行懷仁縣監李公墓誌銘

公諱弘祚字汝廓韓山人其十一世祖諱穀貴顯高麗世嘗自號稼亭是生諱穡官至侍中以文章節義著於麗史世所謂牧隱先生者也入國朝連世有達官聞人曾祖諱希伯延安府使贈吏曹參判祖諱大馨隱德不仕考諱文英利仁道察訪贈承政 院左承旨妣豐山柳氏領議政諡文忠公豐原府院君諱成龍之女以萬曆乙未十月某日生公于咸悅郡以日兵方充斥僑寓湖南故公生四歲察訪公下世後二年其兄昌祚就學花山折花枝揷公首而去公每抱花枝而泣其友愛出於天性如此八歲隨母夫人來覲花山文忠公聽其讀書琅然文義通曉甚奇之十三始受學於季舅修巖公勵志飭身修行之工乙卯丁內艱居廬于漢城樂善洞朝夕祭奠之需皆自其手不委之婢僕三月不脫絰帶而寢朞年菜果不入口羸毀幾滅性親戚勸止之終不變以終制時當光海朝李爾瞻發廢母議邪黨傅會做出大無狀公歎曰三綱絶矣卽日挂冠南歸廢擧從所好嘗讀書氷院見尋院錄有鄭造名卽削去造曾爲爾瞻鷹犬者也時方按節嶺南人皆爲公懼公不爲動卒以無事及仁祖改玉屢擧不中第崇禎丙子冬狄人來侵上出居南漢城花山人士推公爲義兵將行至醴泉郡聞參判全公湜爲義兵大將次聞慶縣卽馳赴之協贊軍謀激厲義徒欲爲勤王計聞南漢圍解乃止公起自書生摠攝戎務諸參佐皆平生故舊初甚易之及當治事嚴毅不可犯兵罷諸公乃 曰吾儕常以君爲惟直柔耳今乃能如此公笑曰大丈夫當事固如是也後全公因入對盛稱公才可用遂有除職之命戊寅拜自如察訪轉尙衣直長尋遷金吾郞莅職勤敏同僚服其能癸未出知懷仁縣事爲政廉貞寬恕宿弊祛而私徑杜氓征簡而獄訟平吏民至今稱思在縣三年遭內子之喪於是投紱而歸行李蕭然橐中只有行糧數斗而已自是放閒林泉不復有仕進意丁酉拜司圃別提不就庚子春移寓眞城之方田村偶感疾不起三月十三日也享年六十六以卒之年某月某日歸葬于義城縣北長 洞丙向之原以淑人南氏同穴而祔淑人英毅公敏之後龍驤衛副護軍煌之女有丈夫子二人曰孝濟孝潤女子子一人適士人朴渼餘男一人曰孝溫女二人爲申深金命賚妻孫男女十四人男碩觀碩藎碩賢碩耇碩輔碩望碩亨碩章女皆嫁爲士人妻曾孫男十四人泰和鼎和元和重和尙和致和餘幼玄孫男四人皆幼公爲人簡淡平實平生無疾言遽色居家篤孝友謹喪祭睦親信朋友居官淸愼擧職其於勢利紛華泊然無所顧慕從祖叔父顯英再從弟基祚相繼爲天官長貳未嘗以一言求薦家貧簞瓢 屢空處之晏然其沒也內弟拙齋柳公爲文以祭之曰絶俗之介不拔之志初非務爲矯激自然人不可及公之胤子孝濟能輯父事無失來請銘于玄逸辭謝不獲命輒据家牒參以舊聞序而銘之曰

李氏於麗重光奕世猗歟河柳載顯昭代公鍾兩美似續蟬聯牧老之裔豐原外孫自持謙謙臨事嶷嶷治軍行法僚佐敬伏撫瘵寬征闔境稱思惟不顧慕德崇位庳卷歸林泉休休其樂溪莊樵社從容偃息乘化全歸存沒奚疑尙其有後委祉來茲

葛庵先生 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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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명

통훈대부 행회인현감 이공 묘지명

공의 휘는 弘祚(홍조), 자는 汝廓(여곽) 韓山人(한산인)으로, 그의 11세조 휘 ()은 고려조에서 들어난 귀인이었으며 自號(자호)稼亭(가정)이라 했으며, 그가 휘 ()을 낳았는데 관직은 侍中(시중)에 이르렀고 문장과 절의로 고려사에 저명했고, 세간에서 소위 말하는 牧隱先生(목은선생)이다.

조전 조에 들어오면서, 연이어 세상에서 현달한 관원이 많다고 들었는데, 증조부인 휘 希伯(희백)은 연안부사이고 이조참판에 증직된 분이다.

조부의 휘는 大馨(대형)으로 덕이 있는 분이었으나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았다.

부친의 휘는 文英(문영)으로, 利仁道察訪(이천도찰방)으로 承政(승정) 院左承旨(원좌승지)로 증직되었던 분이다.

모친은 豐山柳氏(풍산류씨)로 영의정 문충공 풍원부원군 휘 成龍(성룡)의 딸이다. 萬曆(만력) 을미 10월 모일에 공을 咸悅郡(함열군)에서 낳았는데, 마침 일본군이 많이 나타나 湖南(호남)에서 임시로 지냈다.

공이 태어나 4세일 때, 察訪(찰방) 공이 세상을 떠났다.

그 뒤 2년이 지났을 때, 그의 형인 昌祚(창조)花山(화산)에 있는 학교에 입학을 하여, 꽃을 꺾어 공의 머리에 꽂아주고 떠나가니, 공은 매번 꽃가지를 안고 울었다. 그 우애는 이와 같이 천성에서 울어 나왔다.

8세 때, 어머니를 따라 花山(화산)으로 형을 보러 왔다. 文忠公(문충공)의 그 낭랑한 책 읽는 소리를 듣고, 글의 뜻을 환하게 깨달으니 매우 신기한 일이었다.

13세에 처음으로 글을 季舅(계구)修巖公(수암공)으로부터 배우게 되어 전력을 다해 힘써 수행하며 공부하였다.

을묘 년에, 모친상을 당하고, 漢城(한성) 樂善洞(악선동) 오두막집에 살면서, 조석으로 올리는 제사의 제물은 모두 자기 손으로 장만하고, 婢僕(비복)에게 맡기지 아니했다. 석 달이나 상복과 띠를 잘 때도 벗지 아니하였고, 朞年(기년) 동안에는 체소와 과일도 입에 넣지 아니했다. 그리하여 많이 여위고 목숨마저 위태로워지니, 친척들이 중지하라고 권했으나 끝내 상이 끝날 때 까지 그치지 아니하였다.

때는 광해군 조, 李爾瞻(이이첨)廢母論(폐모론)을 발의 하여, 사악한 무리들이 모여, 아무 근거도 없는 큰 무례한 일을 꾸며내니, 공은 탄식하며, 三綱(삼강)이 끊어졌구나.하면서, 그날로 관을 벗어놓고 남쪽으로 돌아 왔다. 과거에 오를 것을 그만두고, 좋아하는 것을 쫓아 氷院(빙원)에서 독서를 하다가 尋院錄(심원록)鄭造(정조)라는 이름을 보고 즉시 삭제하였다. 鄭造(정조)라는 자는 일찍이 鄭爾瞻(정이첨)의 앞집이었는데 마침 영남의 안찰사였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공을 위해 두려워했으나 공은 움직이지 아니했고, 결국 무사하였다.

仁祖(인조)가 새로 옥좌에 오르자, 여러 번 천거하였으나 중앙으로 나가지 아니하였다.

崇禎(숭정) 병자 겨울, 북방 여진족이 침범해 오자, 위로 올라가 南漢城(남한성)에 가려 하니, 花山(화산) 사람들이 공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예천군에 갔을 때 참판 全湜(전식)공이 문경에서 의명배당이라는 말을 듣고 즉시 달려가, 막하에서 군사 일을 도우고, 의병들을 격려하며, 임금을 받들어 충성을 다 하려 했는데, 들으니 남한산성의 포위가 풀려 이에 진격이 중단되었다 하니, 공은 일어나 스스로 글을 지어, 병사의 뒷 일을 총괄하는데, 모든 참가자들은 다 평생을 사귀어 온 친구 들었지만,

처음에는 매우 편하게 대하였으나, 일을 바로잡을 때는 엄하고 굳세어 감이 범할 수가 없었다.

군을 마치자, 많은 사람들아 말하기를, 우리들은 항상 임군을 위해 솔직하고 복종하는데, 지금 이와 같이 잘 하고 있다, 하니 공이 웃으며, 대장부라면 마땅히 이와 같이 확고하게 해야 한다,라 했다.

그 뒤 全公(전공)은 대궐에 들어가 임금에게 공을 매우 칭찬하고, 그 재주를 등용하는 것이 좋다고 말을 하니, 드디어 관직을 제수하라는 명이 떨어져, 무인 년에, 自如察訪(자여찰방)을 배수 하고, 尙衣直長(상의직장)으로 전근되고, 다시 金吾郞(금오랑)이 되어, 맡은 직무에 부지런하고 민첩하니, 동료들도 그 능력에 감복하였다.

계미 년, 知懷仁縣事(지회인현사)로 나가, 바르고 청렴하며 관용으로 현을 다스리니, 옛날의 폐단은 없어지고,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취하는 떳떳하지 못한 일들도 두절되었다.

백성을 바로 지도하고, 송사와 옥사를 공평하게 하여, 지방의 아전과 백성은 지금도 그를 칭송하며 생각하고 있다. 현에 3년을 있다가 부인의 상을 당해, 관직을 버리고 돌아오는데, 행장은 호젓하고 쓸쓸하며, 전대 속에는 다만 여행 중에 필요한 양곡 몇 말분뿐이었다.

이때부터 자연 속에서 한가로이 지냈으며, 다시는 벼슬에 나갈 뜻이 없었다. 정유년에, 司圃別提(사포별제)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아니했다.

경자 년 봄, 眞城(진성) 方田村(방전촌)으로 이사하여, 뜻하지 않게 병을 얻어 다시 일어나지 못하였으니, 313이었으며 향년 66세였다.

졸한 해의 모월 모일, 義城縣(의성현) 北長洞(북장동) 병향 언덕에 장사지내고, 淑人(숙인) 南氏(남씨)도 같은 ()에 부장하였다.

淑人(숙인)英毅公(영의공) ()의 후예이며, 龍驤衛副護軍(룡양위부호군) ()의 딸이었다.

씩씩한 아들이 둘인데, 孝濟(효제)孝潤(효윤)이고, 딸은 하나이며, 사인 朴渼(박미)에게 출가하였다. 다른 아들 하나는 孝溫(효온)이라 하고, 딸 둘은 申深(신심)金命賚(금명뢰)의 처가 되었다.

손자 손녀는 14명으로, 남자는 碩觀(석관)碩藎(석신)碩賢(석현)碩耇(석구)碩輔(석보)碩望(석망)碩亨(석형)碩章(석장)이고 여자는 모두 시집을 가서 士人(사인)의 처가 되었다.증손도 남자가 14명으로 泰和(태화)鼎和(정화)元和(원화)重和(중화)尙和(상화)致和(치화)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현손 남아 4명은 모두 어리다.

공은 사람됨이 단박하고 곧으며 성실했고, 평생 빠르고 급하지 아니했으며 당황한 빛을 보이지 않았다. 집에서는 효우하고 독실했으며 삼가 제례를 잘 모셨다. 친구와는 친하고 신의가 있었으며, 관직에 있을 때는 淸愼(청신)해서 직책이 올랐고, 그 세도를 믿고 분잡하고 화려하지 아니하여, 돌아봐도 반성할 일이 없었다.

종조 숙부가 영달하였고, 재종제 基祚(기조)가 이어서 이조에 있었지만 한 번도 천거해 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집이 가난해서 도시락도 못싸서 자주 빈 도시락이었지만, 느긋하고 태연하게 살았다.

그가 졸 하자, 내제 拙齋(졸재) 柳公(류공)이 그의 제문에 말하기를, 세속을 뛰어넘은 절개와 꺾일 줄 모르는 의지는, 처음부터 굳세고 과격하지 않았고, 자연스러워도 다른 사람들이 미치지 못하는 바이었다, 라 했다.

공의 아들 孝濟(효제)는 부친의 기록을 잃지 않고 잘 모아, ()玄逸(현일)에게 청하니, 사양 할 수가 없어, 모은 家牒(가첩)과 옛날에 들은 바를 참고해서, 서와 명을 쓴다.

 

이씨는 고려조에서 李氏於麗

대대로 덕망이 있는 重光奕世

아름다운 강가 버들 猗歟河柳

태평세대에 나타나 載顯昭代

아름답게 들어내니 公鍾兩美

잇따라 뻗어 가는 似續蟬聯

牧老(목로)의 후예 牧老之裔

豊原(풍원)의 외손 豐原外孫

스스로 겸손하여 自持謙謙

성숙하게 일 처리하니 臨事嶷嶷

군대 바로잡아 법 행하고 治軍行法

막료는 모두 경복하네. 僚佐敬伏

어루만져 너그럽게 하니 撫瘵寬征

지역에서 칭찬하고 闔境稱思

생각하니 미련 없어 惟不顧慕

가난해도 덕 숭상 德崇位庳

임천으로 돌아오니 卷歸林泉

그치고 쉬는 재미 休休其樂

개울가에 오두막집 溪莊樵社

은거해서 사는 곳 從容偃息

승화해서 모두 돌아가니 乘化全歸

존몰이 의심스럽네 存沒奚疑

아직도 그 후손에게 尙其有後

와서 하늘의 복 내리소서. 委祉來茲

 

葛庵(갈암) .

 

 

 

 

 

출전 <한미녹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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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한산 이씨는 남한에 총 28,471가구, 119,17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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