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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용인이씨(李)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용인이씨)

 

본관(本貫): 용인(龍仁)

시조(始祖): 이길권(李吉卷)

유래(由來):

 

용인 이씨(龍仁李氏)의 시조(始祖)는 고려에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태사(太師)로 구성백(駒城伯)에 봉해진 이길권(李吉卷)이다.

 

 

 

 

가문의 중요 인물

 

이세백(李世白)

1635(인조 13)1703(숙종 2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중경(仲庚), 호는 우사(雩沙) 또는 북계(北溪). 사경(士慶)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후천(後天)이고, 아버지는 목사 정악(挺岳)이며, 어머니는 김광린(金光燐)의 딸이다.

1657(효종 8) 진사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그 곳에서 송준길 ( 宋浚吉 )의 가르침을 받았다. 1666(현종 7) 의금부도사를 거쳐서 홍천현감에 이르렀다. 1675(숙종 1)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81년 지평 ( 持平 )이 되고 그 뒤 정언 ( 正言 교리·이조좌랑·집의·동부승지 등을 역임하면서 활발한 언론활동을 하였다. 또 경연에 참가해 강설하니 숙종이 경청했다 한다. 충청도암행어사로 파견되어 백성의 어려움과 관리의 폐단을 보고해 바로잡도록 촉구하기도 하였다. 우승지와 1684년 황해도관찰사를 거쳐, 이듬 해 평안도관찰사로서 선정을 베풀어 그 곳 백성들이 이원익 ( 李元翼 )의 사당에 함께 제사하였다.

그 뒤 1687년 수어사와 도승지를 비롯해 공조참판·대사간 등을 거쳐 1689년 기사환국 때에 도승지로 있으면서 송시열 ( 宋時烈 )의 유배에 반대하다가 파직되었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도승지로 복관되어 선혜청당상·한성부판윤을 거쳐 이듬 해 예조판서가 되었으며, 동지정사(冬至正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96년 호조판서를 거쳐, 1697년 이조판서가 되어 특히 지방관의 인사를 엄격히 해 관의 기강을 바로 세우는 데 힘썼다. 관직은 이 밖에도 대사헌·공조판서 등을 두루 거쳤다. 1698년 우의정에 올랐고, 1700년에는 좌의정이 되어 세자부 ( 世子傅 )를 겸했으며 인현왕후 ( 仁顯王后 )의 국상을 총괄하였다. 아들 의현(宜顯)과 연달아 정승이 된 것으로 유명하였다.

예학 ( 禮學 )에 밝아 국가의 중요 예론에 깊이 참여하였다. 특히 노론의 중심 인물로서 소론·남인과의 정치적 대립에서 중요한 몫을 하였다. 문집으로 우사집이 전한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이의현(李宜顯)

1669(현종 10) 1745(영조 2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덕재(德哉), 호는 도곡(陶谷). 후천(後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악(挺岳)이고, 아버지는 좌의정 세백(世白)이며, 어머니는 정창징(鄭昌徵)의 딸이다.

김창협 ( 金昌協 )의 문인으로 문학 ( 文學 )에 뛰어나 숙종 때 대제학 ( 大提學 ) 송상기 ( 宋相琦 )에 의해 당대 명문장가로 천거되었다. 1694(숙종 20)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검열 ( 檢閱 ) · 설서 ( 說書 ) · 정언 ( 正言 ) · 금성현령(金城縣令) · 부교리 ( 副校理 )를 거쳐 1707년 이조정랑, 이어 동부승지 · 이조참의 ·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1712년 다시 이조참의가 되었으나 판서 윤덕준 ( 尹德駿 )과의 불화로 부제학으로 옮겨 그 뒤 대사성을 지냈으며, 황해도관찰사로 2년여 재임한 뒤 도승지 · 경기도관찰사 · 예조참판을 역임하였다.

경종이 즉위하자, 동지정사(冬至正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형조판서에 올랐다. 이조판서를 거쳐 예조판서에 재임하던 중 왕세제(王世弟 : 뒤의 영조)의 대리청정문제로 소론 김일경 ( 金一鏡 ) 등의 공격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났다.

뒤이어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신임옥사가 일어나 많은 노론 관료가 죄를 입자, 그 역시 정언 정수기 ( 鄭壽期 )의 논척(論斥)으로 평안도 운산에 유배되었다. 영조가 즉위해 노론이 득세하자 풀려 나와 1725(영조 1) 형조판서로 서용되었다.

그러다가 이조판서로 임명되어 수어사 ( 守禦使 )를 겸하면서 명류(名流)를 조정에 끌어들이는 데 힘썼다. 같은 해 왕세자 죽책제진(竹冊製進 : 세자의 책봉을 대나무에 새긴 글을 만들어 올림)의 공로로 승문원제조(承文院提調)와 비변사유사당상(備邊司有司堂上)을 겸했다.

공정한 성품을 인정받아 특히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임명되어, 유봉휘 ( 柳鳳輝 ) 등 소론의 죄를 다스리는 임무를 맡았다.

이듬해 예조판서로 옮기고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이 되어 세자빈객을 겸하다가 1727년 우의정에 발탁되었다. 이 때 좌의정 홍치중 ( 洪致中 )과 함께 김일경 소하(疏下)의 이진유 ( 李眞儒 ) 5인의 죄를 성토하고 처형을 주장하다가, 노론의 지나친 강경책에 염증을 느낀 왕에 의해 정권이 소론에게로 넘어가는 정미환국 때 파직되어 양주로 물러났다.

이듬해 무신란 ( 戊申亂 )이 발생하자 판중추부사 ( 判中樞府事 )로 기용되어 반란 관련자들의 치죄를 담당하였다. 이어 경종실록 편찬에 참여했으며, 1732년 사은정사(謝恩正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35년 특별히 영의정에 임명되어 김창집 ( 金昌集 ) · 이이명(李 蓬 命)의 신원(伸寃 : 원통함을 품)을 요구하는 노론의 주장을 누그러뜨리도록 부탁받았으나, 신원할 수 없다는 반야하교(半夜下敎 : 밤중에 내리는 교서)에 사직을 청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삭직되었다.

그러나 우의정 김흥경 ( 金興慶 )의 구원으로 곧 판중추부사로 서용되어 양주에 머물면서 국가의 자문에 응하였다. 1739년 영중추부사로 승진, 1742년 치사(致仕 :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 일종의 정년퇴임같은 것임.)하여 봉조하 ( 奉朝賀 )가 되었다.

그는 신임옥사 때나 정미환국 등의 비상시 때마다 청의(淸議)를 지켜 의론을 굽히지 않았다. 또한 영조초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사사로운 보복에 급급했던 민진원 ( 閔鎭遠 ) · 조관빈 ( 趙觀彬 ) 등의 전횡을 견제하고 청론(淸論)을 심으려 노력해 사림의 신망을 크게 얻었다.

민진원이 죽은 뒤 노론의 영수로 추대되었으며, 노론 4대신(김창집 · 이이명 · 이건명 · 조태채)의 신원과 신임옥사가 무옥(誣獄)임을 밝히는 데 진력하였다. 그 결과 1740년의 경신처분(庚申處分)1741년의 신유대훈(辛酉大訓)으로 신임옥사 때의 충역시비(忠逆是非)를 노론측 주장대로 판정나게 하였다.

청검(淸儉:청렴하고 검소함)을 스스로 실천, 청백리로 이름났다. 금양위박미비 金陽尉朴 掉 碑 · 충정공홍익한갈 忠正公洪翼漢碣 등의 글씨가 있으며, 저서로는 도곡집 陶谷集 32권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이보혁(李普赫)

1684(숙종 10)1762(영조 3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성원(聲遠). 좌의정 세백(世百)의 재종손이다. 음보로 기용되어 벼슬길에 올라 평양부윤이 되었는데 1725(영조 1) 부정혐의로 관직이 삭거되었다.

그 뒤 성주목사로 기용되었다가 1728년 이인좌 ( 李麟佐 )의 난이 일어나자 우방장으로 영남에서 기병한 정희량 ( 鄭希亮 )의 난을 토평한 공으로 분무공신 ( 奮武功臣 ) 3등이 되었으며 인평군(仁平君)에 봉하여졌다.

1733년에 동의금·호조참판을 거쳐, 1736년 병조참판을 역임하고, 1738년 공홍도관찰사(公洪道觀察使)로 재직 중 남형을 한 죄로 파직되었다가, 1740년 풍덕부사가 되어 군액과람의 폐를 시정하였고 이듬해 한성부좌윤에 전임되었다. 1748년에 부총관 ( 副摠管 ), 1753년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그 이듬해에 공조판서가 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이재협(李在協)

정조 때 좌의정(左議政)과 영의정(領議政)을 역임하였다.

1731(영조 7)1790(정조 1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여고(汝皐). 의진(宜振)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좌의정 보혁(普赫)이고, 아버지는 병조판서 경호(景祜)이며, 어머니는 정후일(鄭厚一)의 딸이다.

음보(蔭補)로 통덕랑 ( 通德郎 )이 되었다가 1757(영조 33) 정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사간원지평·홍문관교리 등의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한 뒤, 1760년 암행어사로 호서지방을 검찰(檢察)하였다.

이어 홍문관교리로서 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문학 ( 文學 ) 등을 겸임하였고, 사헌부헌납(司憲府獻納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을 거쳐 대사간에 올랐다.

이어 승지를 역임하였고,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대사헌에 승배(陞拜)되었다. 1781(정조 5) 병조판서로 승차(陞次)한 뒤 인릉군(仁陵君)에 봉해졌으며, 1787년 우의정을 거쳐 곧 좌의정이 되었고, 1789년 영의정에 올랐다.

 

이의철(李宜哲)

영조 때 대사성(大司成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역임했다.

1703(숙종 29) 1778(정조 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원명(原明), 호는 문암(文庵). 후준(後俊)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악(胤岳)이고, 아버지는 좌랑 ( 佐郎 ) 세운(世運)이며, 어머니는 성집(成鏶)의 딸이다. 조여벽(趙汝璧)의 사위이다.

1727(영조 3)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된 뒤 장릉참봉(長陵參奉)과 군자감봉사(軍資監奉事) 등을 지내다가, 1748(영조 24)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검열 ( 檢閱 )이 되었다. 1752년 정언 ( 正言 )으로서 언로확대를 주장하였으며, 뒤에 지평 ( 持平 )과 대사간을 거쳐 승지로 취임하였다.

1769년 왕은 홍봉한 ( 洪鳳漢 )에게 철이 고서를 많이 읽고 성격 또한 침착하고 깨끗한데 너무 오랫동안 침체시켜두었다. ” 고 말하면서 발탁의 뜻을 비춘 뒤 대사헌에 임명하였다. 그 해 전라도 광주지방 유생들이 박세채 ( 朴世采 )를 문묘 ( 文廟 )에서 출척하려고 상소하자 지배층의 노여움을 사 박해를 받았는데, 그 곳 유생들을 옹호하다가 진도에 유배되었다.

1775년 다시 승지가 되고, 영조가 죽자 그의 행장 ( 行狀 )과 시장 ( 諡狀 )을 짓기 위하여 찬집청 ( 撰集廳 )을 세웠는데, 이때 채제공 ( 蔡濟恭 ) 등과 같이 당상(堂上)이 되어 이를 주관하였다. 그 뒤 예조판서를 거쳐 대제학 ( 大提學 )을 지냈다.

 

이재학(李在學),

1745(영조 21)1806(순조 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성중(聖中), 호는 지포(芝浦). 의규(宜揆)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보순(普淳)이고, 아버지는 예조판서 숭우(崇祐)이며, 어머니는 김협(金浹)의 딸이다. 장인은 정동현(鄭東鉉)이다.

1770(영조 46)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정자를 거쳐 수찬 ( 修撰 )과 교리(敎理)가 되었다. 1776년 시독관 ( 侍讀官 )으로 있으면서 주강(晝講)하는 자리에서 명분을 바르게 하고 기강을 확립해 억강부약하는 정치 풍토를 수립하자고 상소하였다.

이듬 해 대강(對講) 때에는 관직은 구실이 매우 중요하므로 국가가 신중하게 다루어야 하는데, 지금 납속(納粟)에 의한 관직 제수는 크게 잘못된 처사이니, 국가에 공이 있으면 상을 줄지언정 관직 부여는 불가하다고 역설해 왕의 승인을 받았다.

1780(정조 4) 대사간에 취임해서는 군신이 모두 실질을 숭상하고, 특히 정치기강을 세워줄 것을 거듭 강조하였다. 그 뒤 여러 조()의 참의와 참판을 지내고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1789년에는 감진사 ( 監賑使 )로서 교제곡(交濟穀)3분의 2를 유치시키는 법을 만들어 국가와 백성을 모두 이롭게 하였다.

1793년 동지 겸 사은부사(冬至兼謝恩副使)로 청나라에 가서 활약했으며, 1795년 형조판서로 승진해서는 의옥사건을 잘 처리했고, 다시 척신 김구주 ( 金龜柱 )의 역모를 탄핵해 나주로 유배시켰다.

그 뒤 순조가 어려서 즉위하고 정순대비(貞純大妃)가 수렴청정을 하자, 김구주의 일당인 채지영(蔡趾永)이 공격을 가하는 한편, 정조 사후에 산릉도감의 당상으로 있으면서 산역 공사를 지연시켰다는 벽파 ( 僻派 )의 탄핵도 받게 되어 가산 ( 嘉山 )으로 귀양갔다.

이듬 해 온성으로 이배되었다가 1805(순조 5) 풀려났으나 이듬 해 곧 죽었다. 한학 친시(漢學親試)에서 1등을 차지해 상을 받을 정도로 문장에 뛰어났고 글씨도 잘 썼다.

 

이삼현(李參鉉)

철종 때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역임했다.

1807(순조 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태경(台卿), 호는 종산(鐘山). 진흥(普興)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종호(宗祜)이고, 아버지는 재익(在翼)이며, 어머니는 유한철(兪漢哲)의 딸이다.

1834(순조 34) 사마시에 합격하고, 1841(헌종 7)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홍문관주서가 되었다. 행관록 行館錄에 기록되었으며 1845년에 도당회권(都堂會圈) 23인에 선발되었다. 이듬해 부사과가 되어 진전작헌례(眞殿酌獻禮)에 참가하여 시상을 받았다.

1850(철종 1) 평안도암행어사로 내려가서 민정을 살피고 탐관오리를 징계하여 국권의 위엄을 보였다. 1855년 좌부승지가 되었으나 대사헌 이경재(李經在)와의 논쟁 때문에 반대파의 탄핵을 받아 삭직되었다.

1860년 대사성이 되었고, 1862년 진주에서 민란이 일어났을 때 경상도선무사가 되어 영남지방의 민심을 수습하고 관련된 관리들을 징치하였다. 1864(고종 1) 함흥부안핵사가 되어 흉흉한 북방의 민심을 무마하고 부세(賦稅)와 호역(戶役)을 경감하여 회유하였다. 이듬해 예조판서가 되었다. 저서로는 종산집이 있다.

 

이원명(李源命)

고종 때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했다.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용인 이씨(龍仁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6,572가구, 27,38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출전 <한민족대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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