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李(우계이씨)
본관(本貫): 우계(羽溪)
시조(始祖): 이양식(李陽植)
유래(由來):
우계 이씨(羽溪李氏)의 시조(始祖)는 알평(謁平)의 후손으로 고려 때 중서사인(中書舍人)을 거쳐 좌복야를 지낸 이양식(李陽植)이다. 그의 아들 순우(純祐)는 의종(毅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부상서(禮部尙書)·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으며, 경주(慶州)에서 우계(羽溪)로 이거(移居)하였다. 그 후 양식(陽植)의 5세손으로 예빈경(禮賓卿)을 지낸 구(球)에 이르러 경주 이씨(慶州李氏)에서 분적(分籍)하여 본관(本貫)을 우계(羽溪)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이광식(李光軾)
구(球)의 현손인 광식(光軾)이 조선 때 참판(參判)을 역임했다.
이감(李戡)
광식(光軾)의 아들 감(戡)이 대사헌(大司憲)을 지내 가문을 중흥시켰다.
이복남(李福男)
?∼1597(선조 30).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우계 ( 羽溪 ). 일찍이 무과에 급제한 뒤 1592년(선조 25) 나주판관이 되고, 이듬해 전라방어사·충청조방장(忠淸助防將), 1594년 남원부사·전라도병마절도사, 1595년 나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다시 전라도병마절도사가 되었고, 1597년 정유재란 때 남원성에서 왜군과 싸우던 중, 조방장 김경로(金敬老), 산성별장(山城別將) 신호 ( 申浩 )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되고, 1612년(광해군 4) 남원 충렬사에 봉향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이명남(李命男)
감(戡)의 손자 명남(命男)은 참판(參判)을 역임하였다.
이서우(李瑞雨)
1633(인조 1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우계 ( 羽溪 ). 자는 윤보(潤甫), 호는 송곡 (松谷). 성헌(成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길남(吉男)이고, 아버지는 경항(慶恒)이며, 어머니는 이경유(李慶裕)의 딸이다. 당색으로는 대북계열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1651년(효종 2) 생원시를 거쳐 1660년(현종 1) 성균관유생으로 과제(課製)에 1등하여 바로 전시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으며, 그해의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675년(숙종 1) 문장에 재주가 있다 하여 허목 ( 許穆 )의 추천을 받았다. 같은해 정언이 되어 인조반정 이후 대북가문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청직(淸職)에 올랐다.
서인 송시열 ( 宋時烈 )의 예론과 그것을 따르는 김수항 ( 金壽恒 )을 공격하였으며, 7월에는 대신을 공격하는 이수경 ( 李壽慶 )을 두호하다 파직당하였다. 1676년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남인으로 생활하다 1680년 경신환국 때 서인의 공격을 받아 유배당하였으나 1689년의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정권을 잡자 병조참의로 등용되었다.
그 뒤 김수항 등 서인을 공격하였으며, 인현왕후 ( 仁顯王后 ) 축출 때 승지로 있으면서 숙종의 뜻을 받들었다. 1691년 함경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인삼에 대한 행정처리 잘못으로 삭직당하였다. 이듬해 목내선(睦來善)에 의하여 문장으로 천거받아 예문관제학이 되었으며, 그 이듬해 황해도관찰사로 나아갔다.
1694년 갑술환국이 일어나자 삭출당하였다가 1697년에 풀려났다. 그 해 남인을 등용하는 정책을 펴던 최석정 ( 崔錫鼎 )에 의하여 청백함을 인정받아 서용하라는 명령이 임금으로부터 내려졌으나 현직에 나아가지는 못하였다.
이상우(李商雨)
상우(商雨)가 찰방(察訪)을 역임하였다.
이경제(李慶薺)
경제(慶薺)가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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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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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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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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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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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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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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炳(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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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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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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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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泰(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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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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基(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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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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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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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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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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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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鎭(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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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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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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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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應(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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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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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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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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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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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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圭(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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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우계이씨(羽溪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3,390가구, 14,09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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