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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우봉이씨(李)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우봉이씨)

 

본관(本貫): 우봉(牛峰)

시조(始祖): 이공정(李公靖)

유래(由來):

 

우봉 이씨(牛峰李氏)의 시조(始祖)는 고려 때 사람인 이공정(李公靖)이다. 공정은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잠성부원군(岑城府院君)에 봉해졌고 우봉(牛峰잠성(岑城) 등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아 그 곳에 세거하면서 관향(貫鄕)을 우봉(牛峰)으로 했다.

 

가문의 중요 인물

 

이재(李縡)

1680(숙종 6) 1746(영조 2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희경(熙卿), 호는 도암(陶菴) · 한천(寒泉). 유겸(有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숙( )이고, 아버지는 진사 만창(晩昌)이며, 어머니는 민유중 ( 閔維重 )의 딸이다. 김창협 ( 金昌協 )의 문인이다.

1702(숙종 28)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가주서 · 승문원부정자를 거쳐 예문관검열이 되어 단종실록 부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704년 설서, 이듬해 사서가 되어 1707년 문과 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문학 · 정언 · 병조정랑을 거쳐, 홍문관부교리에 임명되었다.

1709년 헌납 · 이조좌랑 · 북평사를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위해 젊고 재능있는 관료에게 독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휴가를 내리던 제도)했고, 1711년 이조정랑으로 승진, 이어 홍문관의 수찬 · 부교리 · 응교 · 필선 · 보덕 등을 지내고 집의로 옮겼다.

1712년 장악원정 · 수원도호부사, 1713년 형조참의 · 대사성, 1715년 병조참의 · 예조참의를 거쳐 다음해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어 호조참의를 거쳐 부제학이 되었을 때 가례원류 家禮源流 의 편찬자를 둘러싸고 시비가 일자 노론의 입장에서 소론을 공격하였다. 이후 노론의 중심 인물로 활약하였다.

1719년 형조참판 · 승문원제조 · 부교리 등을 거쳐 경상도에 균전사 ( 均田使 )로 파견된 뒤 당면한 토지 정책을 논하다가 파직되었으며 이듬 해 함경도관찰사가 되었다.

1721(경종 1) 대사헌 · 동지춘추관사를 겸하다가 실록청당상에 임명되었고, 이조참판에 제수되면서 실록청도청당상으로 승진하였다. 같은 해 예조참판을 거쳐 도승지가 되었으나 소론의 집권으로 삭직되었다.

1722년 임인옥사 때 중부 만성(晩成)이 옥사하자 은퇴하고, 인제에 들어가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1725(영조 1) 영조가 즉위한 뒤 부제학에 복직해 대제학 · 이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대제학에 재임되었다.

그러다가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 중심의 정국이 되자 문외출송(門外黜送 : 서울 성문 밖으로 쫓겨남)되었으며, 이후 용인의 한천(寒泉)에 거주하면서 많은 학자를 길러냈다. 1740년 공조판서, 1741년 좌참찬 겸 예문관제학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였다.

의리론(義理論)을 들어 영조의 탕평책을 부정한 노론 가운데 준론(峻論)의 대표적 인물로, 윤봉구 ( 尹鳳九 ) · 송명흠(宋命欽) · 김양행 ( 金亮行 ) 등과 함께 당시의 정국 전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의 호락논쟁 ( 湖洛論爭 )에서는 이간 ( 李柬 )의 학설을 계승해 한원진 ( 韓元震 ) 등의 심성설(心性說)을 반박하는 낙론의 입장에 섰다.

예학 ( 禮學 )에도 밝아 많은 저술을 편찬하였다. 용인의 한천서원 ( 寒泉書院 )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도암집 陶菴集 · 도암과시 陶菴科詩 · 사례편람 四禮便覽 · 어류초절 語類抄節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이채(李采)

1745(영조 21)1820(순조2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우봉 ( 牛峯 ). 자는 계량(季亮), 호는 화천(華泉). 할아버지는 재()이며, 아버지는 대사간 제원(濟遠)이다.

1774(영조 50)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이듬해 휘령전(徽寧殿) 참봉에 제수되었다. 그 뒤 사헌부·호조·형조의 벼슬을 거쳐 돈녕부주부를 지냈다. 음죽현감이 되었을 때 무고로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여 학문에 전념함과 동시에 가업을 계승하는 데 힘썼다.

1790(정조 14) 다시 벼슬길에 올라 홍릉령(弘陵令), 지례현감, 선산부사, 상주·충주·황주의 목사, 익위사의 위수·사어 등의 관직을 거쳐 호조참판, 한성좌우윤 및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저서로 화천집168책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이휘정(李輝正)

1760(영조 3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우봉(牛峰). 초명은 광정(光正). 자는 경복(景服).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제원(濟遠)이고, 아버지는 채()이며, 어머니는 최항진(崔恒鎭)의 딸이다. ()에게 입양되었다.

1813(순조 13) 교관으로 있으면서 증광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검열·정자를 거쳐 1824년 의주부윤, 1829년 예방승지·행호군을 역임하고, 1834년 진하부사(進賀副使)로 청나라에 들어가 외교적 성과를 얻고 귀국하였다.

1837(헌종 3) 경상도관찰사, 1839년 강원도관찰사, 1841년 한성부판윤·대사헌, 그 이듬해 호조판서, 1843년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1850(철종 1) 지돈녕부사가 되었으나 고령을 이유로 왕에게 여러 차례 간청하여 허락을 받고 치사한 뒤 봉조하 ( 奉朝賀 )가 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이광문(李光文)

1778(정조 2)1838(헌종 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경박(景博), 호는 소화(小華). 증조가 재()이며, 아버지는 호조참판 채()이다. 1801(순조 1) 사마시 ( 司馬試 )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807년 식년문과에 별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1809년에 천거로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와 예문관검열이 되고, 이어 전라감사 등 내외직을 두루 거쳐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일찍이 전라감사로 있을 때는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자 기민들을 요령 있게 잘 구호하였고, 백성에게 농사를 장려하고 선비에게 책읽기를 권장하는 것이 지방관의 상례를 훨씬 뛰어넘는 바가 있었다.

타고난 성품이 화후(和厚 : 화평하고 후덕함.)하고, 의도(儀度 : 자세와 태도)가 장중하여 말과 웃음이 적었다. 입으로는 돈을 말하지 않고, 재물은 의례가 아닌 것은 받지 않았으며, 연경(燕京)에 두번이나 다녀왔건만 값진 물건은 하나도 가져온 것이 없었다.

벼슬이 판서에 이르러서도 생활은 지극히 검소하여 의복과 음식이 가난한 선비와 다를 바 없었다. 평생 물건을 놓고 남과 다툰 일이 없었으므로, 비록 높은 지위에 올라도 사람들이 시기하지 않았으며, 세상살이에 결점이 없어 탁연히 한 시대의 완벽한 인물이 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李有謙(이유겸) 선생의 일화.

 

선생은 재능이 많고 성격은 강직하며 우애가 깊었다.

광해군 때에 조수륜이 화를 당하여 아무도 모른체 하자 감히 나서서 수습하고자 하였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비시키고자 하는 것에 대한 잘못을 직언하여 도리어 죄를 입게 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뒤 광해군 때에 직언으로 피죄된 사실이 인정되어 6품직인 유일(遺逸 : 높은 학식과 덕망으로 과거를 거치지 않고 높은 관직에 임명될 수 있는 인물)로서 신령현감에 임명되었다.

 

신령현감 재임 시 모략을 받자 백성들이 자진해서 포()를 상납하여 죄를 풀고자 할 정도로 업무를 잘 처리하였다.

그 뒤 공조좌랑· 함흥판관 등을 지냈다.

 

1636(인조 14) 병자호란 당시에는 의병을 일으켰으나, 남한산성에 도착하기 전에 함락되고 말았다. 말년에는 왕실의 타락을 보고 관직을 버리기도 하였다.

벼슬은 호조참의에 이르렀으며, 사후에는 고양의 문봉서원(文峯書院)에 제향되었다.

(출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李敬輿(이경여) 선생의 일화.

 

1601(선조 34) 사마시를 거쳐, 1609(광해군 1)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1611년 검열이 되었으나, 광해군의 실정이 심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직후 수찬(修撰)에 취임했고,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공주에 호종하였다. 이어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이 되었으며, 1630(인조 8) 부제학(副提學청주목사·좌승지·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모시고 남한산성에 피란하였다. 이듬해 경상도관찰사가 되고, 그 뒤 이조참판으로 대사성을 겸임해 선비 양성의 방책을 올렸고, 이어 형조판서에 승진하였다.

1642년 배청친명파로서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지 않음을 이계(李烓)가 청나라에 밀고해 심양(瀋陽)에 억류되었다가 이듬해 세자와 함께 귀국해 대사헌이 되었고, 이어 우의정이 되었다. 1644년 사은사로 청나라에 갔다가 다시 억류되었으나, 그 동안 본국에서는 영중추부사라는 벼슬을 내렸다.

이듬해 귀국, 1646년 민회빈 강씨(愍懷嬪姜氏:昭顯世子嬪)의 사사(賜死)를 반대하다가 진도에 유배되고, 다시 1648년 삼수에 안치되었다. 이듬해 효종이 즉위하자 풀려 나와 1650(효종 1)에 다시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이어 영의정으로 다시 사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온 뒤 청나라의 압력으로 영중추부사로 옮겼다.

 

시문에 능하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부여의 부산서원(浮山書院), 진도의 봉암사(鳳巖祠)와 흥덕(興德)의 동산서원(東山書院)에 제향 되었으며, 저서로는 백강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출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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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우봉 이씨(牛峰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4,278 가구, 17,51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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