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李(익산이씨)
본관(本貫): 익산(益山)
시조(始祖): 이문진(李文眞)
유래(由來):
익산 이씨(益山李氏)의 시조 이문진(李文眞)은 577년(고구려 평원왕 19)에 출행하여 영양왕 때 대학 박사(大學博士)·문부전서(文部典書)·오경박사(五經博士)로 공신후(功臣侯)가 되었고, 백제(百濟)의 공주(公主)와 혼인(婚姻)하여 백제로부터 익주(益州 : 익산의 고호)를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았다. 그러나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어 정확한 계대(系代)를 상고(詳考)할 수 없어 고려(高麗)의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태위(太尉)를 지낸 후손 이의(李誼)를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익산(益山)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이주연(李周衍)
생몰년 미상. 고려 중기의 문신. 1126년(인종 4)에 형부시랑(刑部侍郎)으로 추밀부사(樞密副使) 김부식 ( 金富軾 )과 함께 송나라에 가서 임금의 등극을 축하하였다.
1131년에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서 당시 혼란하였던 사회현실을 바로잡으려고 중승 ( 中丞 ) 임원준(林元濬) 등과 같이 상소를 올렸으나 인종은 다만 두세가지만 들어주었다.
1135년(인종 13)에 묘청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지어사대사로서 토적계(討賊計)를 상소하였으며, 또 직접 우군 ( 右軍 )을 지휘하여 반란진압에 나섰다.
서경반란군이 임금의 제(制)를 속여 양계 ( 兩界 )에서 군사를 징발하자, 인종의 명령을 받아 진숙 ( 陳淑 )·진경보(陳景甫) 등과 함께 우군 2,000명을 이끌고 동계 ( 東界 ) 여러 성을 돌면서 설유하는 등 서경반란의 진압에 공을 세웠다.
이주
주연(周衍)의 현손(玄孫) 주는 첨의평리(僉議評里)·찬성사(贊成事)를 역임했다.
이공수(李公遂)
행검(行儉)의 손자 공수(公遂)는 고려 때 첨의평리(僉議評里)·찬성사(贊成事) 등을 역임하고 익산부원군(益山府院君)에 봉해졌다.
항렬(行列)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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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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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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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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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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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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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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基(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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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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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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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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淳(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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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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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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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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潤(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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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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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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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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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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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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植(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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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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燮(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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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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植(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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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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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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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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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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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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煥(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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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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培(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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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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鍊(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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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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圭(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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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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鎔(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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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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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익산 이씨(益山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370가구, 1,62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출전 <한민족대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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