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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인천이씨(李)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인천이씨)

 

본관(本貫): 인천(仁川)

시조(始祖): 이허겸(李許謙)

유래(由來):

 

인천 이씨(仁川李氏)는 본래 가락국 수로왕자(首露王子)로서 모후(母后)의 성을 따라 허씨(許氏)가 되었으나, 그 후손 기()가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아찬으로 사신이 되어 당나라에 공을 세워 현종(玄宗)으로부터 이씨(李氏)의 성()을 사성(賜性) 받았다. 그 후 그의 17세존 허겸(許謙)이 상서좌복야를 지내고 상주국(上柱國)에 올라 소성백(邵城伯)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이허겸(李許謙)을 시조로 받들고, 그가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았던 인천(仁川)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고려 중엽에 왕실의 척연으로 크게 세력을 떨쳐 명문의 지위를 굳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이자연(李子淵)

1003(목종 6) 1061(문종 15). 고려 중기의 문관. 본관은 경원(慶源 : 仁州, 지금의 인천). 자는 약충(若 食 ). 소성백(邵城伯) 허겸(許謙)의 손자로, 좌복야 ( 左僕射 )를 지낸 한()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낙랑군대부인 최씨(樂浪郡大夫人崔氏)이다. 처는 김씨(金氏)로 슬하에 11남매를 두어 권문세가를 이루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당시의 권세가였던 김은부(金殷傅)의 처조카로서 그는 정치적 함수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 1024(현종 15) 3월 유징필 ( 劉徵弼 )이 지공거가 되어 주관한 과거에서 장원으로 급제해, 1031(덕종 즉위년) 우보궐 ( 右補闕 )이 되었다.

그 뒤 이부낭중(吏部郎中) · 어사잡단(御史雜端) · 우승선을 거쳐 정종 ( 靖宗 ) 때에는 급사중 ( 給事中 ) · 지중추원사 · 중추부사 등을 지내다가, 1047(문종 1)에 이부상서 참지정사(吏部尙書參知政事)가 되었고, 1049년에 수사도(守司徒), 1050년에 내사시랑평장사 ( 內史侍郎平章事 )가 되었다.

1052년에는 그의 딸 셋이 문종에게 시집을 가 인예태후(仁睿太后) · 인경현비(仁敬賢妃) · 인절현비(仁節賢妃)가 되었다. 특히 인예태후는 순종 · 선종 · 숙종을 낳아 인종에 이르기까지 왕들 모두가 인예태후의 혈통이었다.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자 그는 사원세력을 장악하는 데도 신경을 써 아들 소현 ( 韶顯 )은 금산사 ( 金山寺 )의 혜덕왕사(慧德王師)가 되었고, 손자인 승통 ( 僧統 ) 세량(世良)과 증손자인 의장(義莊)은 현화사 ( 玄化寺 )에 있으면서 법상종 ( 法相宗 )의 세력을 장악하였다. 이로 인해 경원이씨가 고려의 최고 문벌로 성장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1052년 수태위(守太尉)가 되었고, 이어 문하시랑평장사 ( 門下侍郎平章事 ) · 태보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서(太保門下侍中判尙書吏部書)에 이르렀다. 그 뒤 추성좌세보사공신(推誠佐世保社功臣)에 봉해지고,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겸 중서령 감수국사 상주국 경원군개국공(開府儀同三司守太師兼中書令監修國史上柱國慶源郡開國公)이 되었으며 식읍 3,000호가 주어졌다. 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장화(章和)이다.

 

이호(李顥)

생몰년 미상. 고려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인주 ( 仁州 ). 문하시중을 지낸 자연(子淵)의 아들이며, 자겸(資謙)과 순종의 비인 장경궁주 ( 長慶宮主 )에게는 아버지가 된다. 관직은 호부낭중(戶部郎中)에 이르렀고, 뒤에 경원백(慶源伯)에 추증되었다.

 

이관(李灌)

조선조에 와서 태조(太祖)초에 등과(登科)하여 태종(太宗) 때 형조 참판(刑曹參判)과 함길도 도체찰사를 지냄.

 

이문화(李文和)

1358(공민왕 7) 1414(태종 14).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백중(伯仲), 호는 오천(烏川). 평장사 ( 平章事 ) 지저(之 泗 )6대손이며, 아버지는 전공판서(典工判書) ()이다.

1380(우왕 6) 문과에 장원 급제해 우정언 · 우헌납 · 예문응교를 거쳐 경상도안렴사를 지내고, 공양왕 때 우사의를 역임하였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좌간의대부에 등용되고 1395(태조 4) 검교시중직(檢校侍中職)의 혁파를 주장하였다. 1397년 좌승지를 거쳐 이듬 해 도승지 겸 상서윤을 지냈다.

1399(정종 1) 생원시를 관장하고 이듬 해 첨서의흥삼군부사(簽書義興三軍府事)가 되어 하정사 ( 賀正使 )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해 사평부우사로 등용되었으나 분경(奔競 : 大官이나 권세가를 찾아다니면서 엽관이나 이권운동을 함)으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취임하지 못하고 예문관대제학이 되었다.

1402(태종 2) 경상도도관찰출척사로 외방에 나가고 이어 참찬의정부사 · 사평부우사를 거쳐 예문관대제학 · 대사헌을 지냈다. 1405년 예조판서를 거쳐 이듬 해 전라도도체찰사 임무를 대행하고 이어 명나라 황엄(黃儼)의 접반사가 되었다. 1408년 호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그 해 처녀진헌사(處女進獻使)로 명나라에 갔다.

1409년 형조판서를 거쳐 대사헌에 이르렀으나 민무질 ( 閔無疾 ) 사건에 연루, 면직되었다. 1411년 개성유수로 있을 때 저화 ( 楮貨 )삼사신판(三司申判) ’ 이라는 글 대신 호조신판(戶曹申判) ’ 으로 바꿀 것을 주장, 시행하게 하였다. 1413년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 해 귀국해 참찬의정부사가 되었다.

뒤에 영의정으로 추증, 장흥의 금계사(金溪祠), 대구의 서계서원 ( 西溪書院 ), 함안의 도천사(道川祠)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공도(恭度)이다.

 

이효상(李孝常)

세종(世宗) 때 문과에 급제했던 효상(孝常)은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에 올라 학문과 충효로 명망이 높았다.

 

이성동(李成童)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차옹(次翁), 호는 졸옹(拙翁). 수양(守良)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참판 중손(仲孫)이고, 아버지는 판관 희안(希顔)이다. 1495(연산군 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지평 ( 持平 )을 지냈다.

1507(중종 2) 사간을, 1517년 부제학 · 직제학 · 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충청도관찰사로 나갔으며 1519년 예조참의를 거쳐 대사간으로서 사헌부의 관원인 이청(李淸) · 송호지 ( 宋好智 ) · 김익(金 鳳 ) · 권전(權 愈 ) 등과 함께 정광필 ( 鄭光弼 ) · 신용개 ( 申用漑 ) · 안당(安 揆 ) 등 삼공 ( 三公 )의 인물됨에 대하여 논하여 임금에게 알렸는데 이 때의 인물평이 이후 조신들 사이에서 자주 인용되었다.

, 조광조 ( 趙光祖 ) 등과 함께 합사(閤司)하여 정국공신 ( 靖國功臣 ) 가운데 외람되게 등록된 사람들을 삭제하도록 하였다. 이 해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전 대간 유인숙 ( 柳仁淑 ) · 김익 · 권전 등과 함께 예궐하여 조광조 등과 함께 처벌받기를 청하였다.

이듬해 안처겸 ( 安處謙 )의 옥사에 연루되어 관직을 삭탈당하였으나, 다시 등용되어 1521년 강원도관찰사 · 예조참의를 지냈으나 조광조 일파로서의 죄가 추론되어 삭직당하였다.

 

이주

당대의 석학(碩學)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했던 주는 명유(名儒) 정경세(鄭經世) 등과 교유하며 성리학을 연구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군량 조달에 공헌했고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소모관(召募官)으로 유공했다.

 

이휴복(李休復)

1568(선조 1)1624(인조 2).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사장(士長), 호는 양졸정(養拙亭). 좌참찬 문화(文和)8세손이며, 아버지는 판서 인()이다. 박제인(朴齊仁)의 문인이다.

임진왜란 때 곽재우 ( 郭再祐 )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고, 1606(선조 39) 무과에 급제하여 절충장군 ( 折衝將軍 순천부사(順天府使)를 역임하였다. 1624(인조 2) 이괄 ( 李适 )의 난이 일어나자 관군 별장 ( 別將 )으로 안현(鞍峴)에서 공을 세워 진무공신 ( 振武功臣 ) 3등에 녹훈되었다.

호산군(壺山君)에 봉하여지고 그가 죽은 뒤 정사공신 ( 靖社功臣 )을 책훈(策勳)하여 관작을 추증한다는 뜻으로 예조에서 제문을 지어 치제(致祭)하였다. 호조판서에 추증되고, 함안 도천사(道川祠도계서원 ( 道溪書院 )에 제향되었다.

 

이동영(李東英)

한말에 간계(間溪) 동영(東英)이 자기 창고를 털어 빈민구휼에 앞장섰다.

 

이변연

독립운동가로 이름났던 변연은 원모(元模각연(恪然진국(鎭國) 등과 함께 조국광복운동에 진력하여 명문 인천 이씨의 가통을 지켰다.

 

 

 

출전 <한미녹대성보>

 

 

항렬(行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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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인천 이씨(仁川李氏)는 남한에 총 14,605가구, 61,04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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