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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재령이씨(李)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재령이씨)

 

본관(本貫): 재령(載寧)

시조(始祖): 이우칭(李禹偁)

유래(由來):

 

재령 이씨(載寧李氏)는 경주 이씨(慶州李氏)에서 분적(分籍)된 계통으로, 소판공(蘇判公) 거명(居明 : 경주 이씨 중시조)의 후손 이우칭이 고려조(高麗朝)에서 보조공신(補祚功臣)에 책록되고 문하시중을 지낸 후 재령군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우칭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그가 식읍으로 하사(下賜)받은 고을 재령(載寧)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경주 이씨(慶州李氏)에서 분적(分籍)하였다.

 

가문의 중요 인물

 

이원영(李元英)

시조 우칭의 후손 원영(元英)이 고려조(高麗朝)에서 공부 상서(工部尙書)를 역임했다.

 

이소봉(李小鳳)

소봉(小鳳 : 영동정 근인의 아들)은 공민왕(恭愍王)의 부마(駙馬)로 순성보조공신(純誠補祚功臣)에 오르고 상장군(上將軍)을 역임하여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이일선(李日善)

밀양(密陽) 서쪽 소음촌(召音村) 사제(私第)에서 공민왕의 외손으로 출생했던 일선(日善)은 고려 말에 사재령(司宰令)을 지냈으나 고려의 국운(國運)이 기울자 가족과 더불어 향리로 돌아가 은거(隱居)하였고, 슬하에 아들 6형제가 모두 고려에 마지막 충성을 다했던 절신(節臣)들이었다.

 

이신(李申)

사재령 일선(日善)의 맏아들 신()은 고려 말에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사헌부 시사(司憲府詩史)를 거쳐 공양왕(恭讓王)때 지평(持平)에 올라 간관(諫官) 김진양(金震陽) 등과 함께 정도전(鄭道傳남은(南 誾조준(趙浚) 등의 전횡을 탄핵했으며, 이성계(李成桂)의 추대를 극론하다가 유배되어 가던 도중에 숨졌다.

 

이술(李戌)

일선의 둘째 아들인 술()은 사정(司正)을 역임했다.

 

이축(李丑)

일선의 셋째 축()은 고려의 국운이 쇠망하자 신조(新朝 : 조선)의 벼슬을 마다하고 아우 오()와 함께 절의(節義)를 지켰다.

 

이오(李午)

공민왕 때 성균진사시(成均進士試)에 합격했던 모은(茅隱) ()는 기울어져가는 고려의 국운을 개탄하여 제현(諸賢)과 더불어 개성 두문동(開城杜門洞)에 은거, 망국의 한을 달래다가 경남 함안군 모곡리(茅谷理)로 내려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종신토록 절개를 지켰으며 조선(朝鮮)이 개국된 후 태종(太宗)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다.

특히 모곡리에 은거하면서 집 주변에 담장을 쌓고 담 밖은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영토이지만 담 안은 고려왕조(高麗王朝)의 유민이 거주한다는 뜻에서 마을 이름을 고려동(高麗洞)이라 불렀다고 한다.

임종(臨終)에 이르러 자손들에게 "내가 죽은 후 신왕조(新王朝)에서 내려주는 관명은 사용하지 말고, 신주(神主)도 이곳 고려동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서는 안된다" 고 유명을 남겨, 그의 아들 개지(介智)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조선왕조에는 벼슬에 나가지 않고 유업을 계승하여 후진양성에 진력했다.

그의 자손이 고려동에서 모은(茅隱)이 심은 자미화(紫薇花)가 피어 있는 옛 집을 지키면서 고려답(高麗沓)에 농사짓고, 고려정(高麗井)의 물을 마시며 600년간 한결같이 고토(古土)를 지켜왔다.

 

이맹현(李孟賢)

1436(세종 18)1487(성종 18).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사성(師聲),호는 근재(覲齋) 아버지는 호조참판 개지(介智)이며, 어머니는 진주하씨(晉州河氏)로 경리(敬履)의 딸이다.

1456(세조 2)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460년에는 춘당시(春塘試)에 을과로 급제한 뒤 성균관주부를 거쳐, 1464년에는 수찬낭관(修撰郎官)으로 동국통감 東國通鑑을 편수하는 데 참여하였다. 그 뒤 이조정랑·예조참의·홍문관부제학·이조참판·나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1475(성종 6) 경회루를 중수하자는 논의가 있자, 백성들이 극심한 가뭄에 시달리고 있는 때에 공사(公私)의 영선(營繕)은 일절 금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경상도재상경차관(慶尙道災傷敬差官)이 되어 여러 읍의 전적(田籍)을 살펴보고 전안 ( 田案 )에 모람(冒濫)과 결수(結數)의 착오가 많음을 지적하여 그 시정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뒤에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저술로는 유시(遺詩) 4수가 전한다.

 

이중현(李仲賢)

개지의 아들 중현(仲賢)은 성종(成宗) 때 예조 참의(禮曹參議)와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을 지내고, 영해부사(寧海府使)로 나가 치적을 남겼으며, 학문이 뛰어나고 형제간에 우애(友愛)가 돈독하여 백형(伯兄) 맹현(孟賢), 장례원사의(掌隷院司議)를 역임했던 아우 계현(季賢)과 함께 가문의 의맥(義脈)을 이었다.

 

이붕(李鵬)

임진왜란 때 혁혁한 훈공을 세워 공신(功臣)에 책록되었다.

 

이정(李瀞)

1541(중종 36)1613(광해군 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여함(汝涵). 부제학 중현(仲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건국원종공신 무()이고, 아버지는 경성(景成)이다. 조식(曺植)의 문하생이다.

1592(선조 25) 임진왜란 때 함안군수 유숭인 ( 柳崇仁 )의 휘하에서 소모관 ( 召募官 )으로 의병을 모집하고 진해·창원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의령현감으로서 경상우도병마절도사 김응서(金應瑞)와 함께 의령에 침입한 나베시마(鍋島直茂) 휘하의 왜군을 격파하였으며, 1602년 상주목사, 뒤에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어릴 때 조식 문하에서 배운 까닭에 병란중 파괴된 진주의 덕천서원 ( 德川書院 )을 다시 중창해서 옛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내었다. 함안의 도림서원(道林書院), 진주의 대각서원 ( 大覺書院 )에 제향되었다.

 

이숙(李潚)

정의 아우 숙()1576(선조 9) 무과에 급제하고 정기룡(鄭起龍)과 합세하여 왜적을 섬멸, 합천 군수(陜川郡守)와 장성 현감(長城縣監)을 역임한 후 광해군(光海君) 때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에 올랐으나 광해군의 난정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학문에 전심했다.

 

이운룡(李雲龍)

1562(명종 17) 1610(광해군 2).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경현(景見), 호는 동계(東溪). 청도 출신. 아버지는 남해현령 몽상(夢祥)이다. 1585(선조 18) 무과에 올라 1587년 선전관에 임명되고, 1589년 정월에 옥포만호로 임명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이 부산에 접근하자, 경상좌수사 박홍 ( 朴泓 )은 적군의 거대한 형세에 진영을 버리고 곧 도망하였다. 이어 적군이 서남해안을 돌아 거제로 향해오자 경상우수사 원균 ( 元均 )도 대적할 수 없다고 판단해 전선과 무기를 바다 속에 침몰시키고, 수많은 군사도 흩어버리고서는 남해현의 앞 바다에 떠돌아다니다가 육지를 찾아 도망하려 하였다.

이 때 옥포만호로서 휘하에 있던 그는 원균에게, 나라의 중책을 맡은 장관으로서 강토를 사수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더욱이 이 지역이 남방의 주요 방어선으로서 최대의 관문임을 상기시키면서, 전라 수군과 힘을 합쳐 왜적을 쳐부수어야지 도망은 직분과 국가에 대한 배신 행위라고 항언했다 한다.

이에 원균은 그의 강한 항변에 따라 율포만호 이영남 (李英男)을 전라좌수영으로 보내 이순신 ( 李舜臣 )에게 구원군을 요청하였다. 159257, 원균이 인솔한 경상도 수군과 이순신이 지휘하는 전라도 수군이 합세해 거제도 동쪽 옥포양(玉浦洋)에서 적선을 맞아 싸웠다.

이 싸움에서 그는 선봉장으로서 아군을 진두지휘해 용전분격하니 적병이 감히 대항하지 못한 채 배를 버리고 육지로 달아났다. 이 결과 적선 50여 척을 분소시키는 큰 전과를 거두었는데, 이것이 임진왜란 최초의 승전인 옥포해전의 대전과였다.

그 뒤 사천 · 진해 · 한산양 · 안골포 · 부산해 등 여러 해전에 참가, 진두에서 용감히 싸워 적군의 내양(內洋) 진출을 막아 우리 수군이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는 데에 공을 크게 세웠다. 1596년 이순신의 천거로 경상좌수사에 승진하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경상도의 수군을 주도하였다. 1604년 전후의 논공행상에서 선무공신 ( 宣武功臣 ) 3등에 책록되고, 식성군(息城君)에 봉해졌다.

1605년 내직으로는 도총부부총관 · 비변사당상관을 지내고, 외직으로는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어 국가의 중요 군직에 복무하면서 많은 공적을 남겼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청도의 금호서원 ( 琴湖書院 )과 의령의 기강서원( 較 江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식성군실기 2권이 있다.

 

이현일(李玄逸)

1627(인조 5)1704(숙종 30).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익승(翼昇), 호는 갈암(葛庵). 아버지는 참봉 시명(時明)이며, 어머니는 안동 장씨(安東張氏)로 흥효(興孝)의 딸이다. 휘일(徽逸)의 아우이다.

1646(인조 24)1648년에 초시에 모두 합격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복시를 단념하였다. 1652(효종 3) 중형 휘일의 홍범연의 洪範衍義편찬에 참여했으며, 1666(현종 7)에는 영남 유생을 대표해 송시열 ( 宋時烈 )의 기년예설(朞年禮說)을 비판하는 소를 올렸다. 1674년에 학행으로 명성이 높아지자 영릉참봉(寧陵參奉)에 천거되었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해 나가지 않았다.

1676(숙종 2) 사직서참봉(社稷署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삼년상이 끝나지 않아 나가지 않았다. 이듬 해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 이어 공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사은(謝恩)만 하고 곧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어 사헌부지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678년 공조정랑·지평에 임명되었으며, 외척의 용사와 당쟁의 폐단 등을 논하였다.

1686년에는 홍범연의를 속성(續成)했으며, 1689년 산림(山林 : 재야에 있으면서 학덕과 인품으로 한 학파와 정파를 아우르는 우두머리)에게만 제수되는 사업 ( 司業 )에 임명되고, 이어 사헌부장령·공조참의에 임명되었다. 이 때 인현왕후 ( 仁顯王后 ) 폐비문제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사직소를 올렸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임술무옥의 신설(伸雪 :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을 건의했고, 6월에는 산림유현(山林儒賢)의 벼슬인 좨주 ( 祭酒 )에 임명되어 경연 ( 經筵 )에 참석하였다.

이어 예조참판 겸 좨주·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에 제수되어 거듭 사임의 뜻을 표했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8월에는 겸직과 함께 대사헌에 올랐고, 9월에는 인현왕후를 위한 소를 올렸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고 11월에는 분황(焚黃 : 관직이 추증될 경우 자손이 추증된 자의 무덤에 가서 누런 종이의 부분을 태우던 의식)을 이유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1690년 이조참판·세자시강원찬선에 임명되어 세자책례(世子冊禮)에 참석했고, 다시 대사헌·이조참판에 거듭 임명되었으나 그 때마다 사직 상소를 내었다. 1692년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며, 경신·임술 무옥의 신설을 건의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어 병조참판· 자헌대부 ( 資憲大夫 우참찬·이조판서에 연이어 임명되었다. 16944월 인현왕후가 복위된 뒤 갑술환국 때 조사기 ( 趙嗣基 )를 신구하다가 함경도 홍원현으로 유배되었다.

다시 서인 안세징 ( 安世徵 )의 탄핵을 받아 종성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으며, 유배지에서 글을 가르치며 수주관규록 愁州管窺錄을 완성하였다. 1697년 호남의 광양현으로, 1698년에 갈은리(葛隱里)로 유배지가 바뀌었고, 1699년에는 방귀전리(放歸田里 : 재야로 돌아감)의 명이 내렸다. 1700년에는 안동의 임하현 금소역(琴詔驛)에 이거했다가, 여기에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금양(錦陽)에서 집을 짓고 강학하였다.

1701년 인현왕후가 승하하자 석방 명령을 환수했으나 압송되지는 않았다. 1704년에 인덕리(仁德里)로 이거했다가 금소로 돌아와 금양에서 죽었다. 1710년에 죄명이 풀리고 이듬해 복관되었다가 환수되었다. 1718년 영해의 인산서원 ( 仁山書院 )에 제향되었으며, 1853(철종 4) 다시 복관되었다가 환수되었다. 1871(고종 8) 문경(文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가 환수되었으며, 1909년에 관직과 시호가 모두 회복되었다.

영남학파 ( 嶺南學派 )의 거두로 이황 ( 李滉 )의 학통을 계승해 이황의 이기호발설 ( 理氣互發說 )을 지지하고 이이(李珥)의 학설을 반대하였다. 저서로는 갈암집과 편서로 홍범연의가 있다.

 

이재(李栽)

1657(효종 8) 1730(영조 6).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유재(幼材), 호는 밀암(密菴). 아버지는 현일(玄逸)이며, 어머니는 무안박씨(務安朴氏)로 경력 늑( )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작은아버지 휘일(徽逸)과 숭일(嵩逸)에게 배웠다.

아버지가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었을 때 따라가서 시봉하였고, 1700(숙종 26) 유배에서 풀려나자 안동군 금수(錦水)에서 살았다. 벼슬은 주부에 이르렀으나 사직하고 오직 학문에만 몰두하여 성리학의 대가가 되었다.

그는 주리론(主理論)으로 영남학파를 이끌었으며 후진양성에 힘써 많은 문인을 배출하였다. 그의 이기(理氣)에 대한 견해는 태극 ( 太極 )에 동정(動靜)이 있어서 음양이 나뉘고 오행(五行)이 갖추어진다고 생각하고 오직 사람만이 그 빼어나고 영묘한 것을 얻었다고 생각하여 기의 작용을 기다리지 않고 이만으로도 일용동정(日用動靜)의 체용(體用)이 될만한 묘법을 갖추었다고 주장하였다.

또 대개 이기란 이물(二物)인데 상리(相離)하지도 않고 상잡(相雜)하지도 않는 것으로서 이것을 나누어 둘이 되게 할 수도 없고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할 수도 없다고 하였다. 1704년 정시한 ( 丁時翰 )의 은거지 법천우사(法泉寓舍)로 가서 이기사칠지변(理氣四七之辨) · 건순오상지덕(健順五常之德) · 인물품수지동이(人物稟受之同異)를 강론하였다. 그뒤 아버지가 쓰다가 완성하지 못하고 절필한 홍범연의 洪範衍義 를 완성하였다.

성유록 聖喩錄 · 금수기문 錦水記聞 · 주서강록간보 朱書講錄刊補 · 안증전서 顔曾全書 · 주어요략 朱語要略 등을 저술하였다. 그의 대표적 제자로는 이상정 ( 李象靖 ) · 이광정(李光靖)이 있다. 저서로는 밀암문집 2513책이 있다.

 

이만

융일의 아들 만은 종형(從兄)인 정심(精深) ()와 함께 퇴계(退溪) 이 황(李 滉) 학파(學派)의 맥()을 계승하여 가문을 빛냈다.

 

李崇逸(이숭일) 선생의 일화.

 

어진 현감

이숭일 현감은 부임즉시 민간의 숨겨진 딱한 사정을 찾아내어 폐해 되는 일은 일체 패지하고, 억울함은 풀어주고, 민중을 지도함에 전통적인 美風良俗(미풍양속)을 바탕으로 하였으며, 文廟(문묘)에 선비들을 모아 민중교육에 힘을 쏟았다.
향약을 일으켜 백성들이 자율적으로 교화하도록 지도하니, 현민들이 현감을 덕을 기리어 「李佛子(이불자)」라 하였다.
「부처님 같은 李(이) 사또」라는 뜻이다.

그러한 선정도 잠시고 2년 뒤 다른 곳으로 가게 되었다.
현민들이 아쉬워함은 말할 수도 없었다.

                                                             

 

 

 

 

출전 <한미녹대성보>

 

 

항렬(行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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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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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재령 이씨(載寧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11,060가구, 45,41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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