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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전의이씨(李)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전의이씨)

 

본관(本貫): 전의(全義)

시조(始祖): 이도(李棹)

유래(由來):

 

전의 이씨(全義李氏)의 시조는 고려 개국공신인 이도(李棹)이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그는 초명이 치(), 고려 태조가 견훤을 정벌하고자 남하하여 금강에 도착했을 때 강물이 범람하자 태조를 도와 무사히 건너게 해주었으므로 태조가 도()라고 이름을 하사(下賜)하고, 통합삼한삼중대광태사익찬공신(統合三韓三重大匡太師翊贊功臣)으로 벼슬을 내리고 전의후(全義侯)에 봉했다.

그 후 그는 전의(全義) 이성산(李城山) 아래로 이거하여 정착 세거(定着世居)하였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전의(全義)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후에 그 후손 문의공(文義公) 언충(彦沖)과 효정공(孝靖公) 정간(貞幹), 문장공(文莊公) ()의 후손에서 인물이 많이 나와 3대 인맥을 이루었다.

 

가문의 중요 인물

 

이혼(李混)

()은 시조 도()8세손으로 고려 충선왕(忠宣王) 때 첨의정승(僉議政丞)을 지냈다.

 

이언충(李彦沖)

언충(彦沖)은 고려 고종 때의 장군 천()의 손자로서 충렬(忠烈충선(忠宣충숙(忠肅충혜왕(忠惠王)4대에 걸쳐 벼슬한 명신이며 정당문학(政堂文學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등을 지냈다.

 

이정간(李貞幹)

1360(공민왕 9) 1439(세종 21).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전의 ( 全義 ). 자는 고부(固夫). 아버지는 원종공신 구직(丘直)이다. 아버지의 음덕으로 벼슬에 올라 사헌부집의를 거쳐 1405(태종 5) 강화부사가 되었다.

이 때 목장에 뛰어든 호랑이를 인마의 살상없이 포획하여 비단을 하사받았다. 그뒤 내외의 관직을 역임하고 세종 때 강원도관찰사에 이르러 사임하고, 향리에 은거하면서 노모봉양에 정성을 다하였다.

성품이 온화하여 가내가 공순하기로 소문났다. 이에 세종은 궤장( 廓 杖)을 내리고 교서를 보내어 그 효행을 표창하였다. 명문들이 그 일을 노래하며 책으로 엮어 경수집 慶壽集 을 내었다. 관직은 중추원사에 이르렀고, 시호는 효정(孝靖)이다.

 

 

 

東皐(동고) 李蓂(이명)

 

황금을 돌같이 여긴 동고 이명 선생

조선 탱종 임금 때에 좌의정을 역임한 東皐(동고) 李蓂(이명) 선생이 젊었을 때의 일이다.

선생은 서울에 살았는데 한적한 곳에서 공부를 하고 싶었다.

마침 큰집의 사촌 형들이 풍산 하리에 내려와 살고 있어 자기도 풍산으로 내려와 부근의 한적한 절에서 과거 공부를 하였다.

 

선생은 너무 열심히 공부하여 독서 삼매경에 빠지면 누가 방을 드나들어도 알지 못할 도였다.

달도 뜨지 않은 캄컴한 그믐밤이었다. 그날도 선생은 희미한 촛불 아래 낭낭한 목소리로 책을 읽고 있었다.

선생은 독서에 너무 깊이 빠져 누가 슬며시 방문이 열고 들어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한참 고개를 들고 기지개를 켜던 선생은 바로 앞에 어떤 낯선 처녀가 얌전히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선생은 놀랐으나 침착하게,

누구냐? 귀신이면 물러가거라.”

하면서 逐鬼文(축귀문)(잡귀를 쫓기 위한 주문)을 외웠다.

그래도 처녀는 말없이 앉아 있었다.

선생은 다시,

너는 귀신도 아닌 듯한데, 야심한 이 시각에 처녀의 몸으로 어찌하여 외간 남자의 거처를 찾아왔느냐?”

 

그러자 처녀는,

소녀는 며칠 전 산나물을 뜯으러 왔다가 선비님의 읽는 소리를 듣고 너무 좋아서 그 소리를 잊을 수 없습니다. 집에 가서도 그 소리가 생각나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어 사람의 눈이 없는 이 밤에 염치 불구하고 찾아왔었습니다.”

하고 말했다.

덧붙여 처녀는,

독서에 방해가 되지 않겠으니 제발 쫓아내지는 말아 주십시오. 조용히 듣기만 하겠습니다.”

하고 간청을 하였다.

 

그 청을 못 이긴 東皐(동고) 선생은 그렇게 하라고 허락하고 처녀를 옆에 앉혀 공부를 계속하였다.

처녀는 선생이 공부하는 곁에서 선생의 읽는 소리를 듣다가 선생이 공부를 마치는 시각이면 돌아갔다.

 

어떤 날은 새벽까지 선생의 낭송에 취했다가 돌아가지도 않고 심지어는 그 방에서 잠을 자고 가기도 했다. 선생은 달이 지나도록 처녀와 같이 있었으나 선비의 체통을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았고 처녀의 몸에는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처녀가 울먹이면서 말했다.

선비님 !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내일부터는 선비님을 찾아뵙지 못하게 됩니다. 제가 출입하던 길을 따라가시다가 길이 끝나는 곳을 가보시면 단지가 묻혀 있을 것입니다. 3개월 동안 저를 물리치지 않고 따뜻이 대해 주신 보답으로 그것을 선비님께 드리겠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달라는 말과 함께 다음날부터는 정말로 처녀가 찾아오지 않았다.

처녀의 말이 궁금하기도 하고 워낙 간절히 말하던 그 모습에 동한 선생은 날을 집아 아침 일찍 일어나서 처녀가 말하던 곳을 찾아가 보았다. 과연 단지가 있고 그 안에는 누런 황금이 가득히 들어 있었다.

 

놀라서 그 황금 단지를 바라보던 동고 선생은 선비는 재물을 탐하여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마음을 다지었다. 그리고 그 재물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선생은 황금을 그대로 둔 채 단지의 뚜껑을 덮어 다시 원래대로 땅에 묻고 돌아와 전과 마찬가지로 열심히 과거 준비를 했다.

 

이렇게 열심히 공부한 결과 선생은 과거에 급제하여 후일 정승의 지위에 오르고 청백리에 뽑히기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 선생은 문득 옛일이 생각났다.

자신이 공부를 했던 절의 주지를 불러 단지가 파묻힌 곳을 알려 주며 파서 가져오라고 했다.

주지가 가져온 금을 바라보던 선생은 주위에 사람들을 모아 놓고 옛 일을 들려주면서, “여기 있는 금이 현재 시세로 냥쯤 것이다. 젊은 시절 내가 이 재물에 눈이 멀었다면 나는 지금과 같은 명망을 쌓지 못했을 것이다.”

하면서 그 금을 모두 사찰에 기부하였다.

 

 

 

李惟樟(이유장) 墓碣銘(묘갈명)

 

李惟樟(이유장) 仁祖 3年 乙亥(1625)~ 肅宗 27年 辛巳(1701) 77.

字 夏卿. 全義人. 號 孤山. 四益堂.

 

공의 묘는 풍산읍 만운동 현공산 용감동 정향 언덕에 있다. 만운 못을 지나 선성이씨 묘하동천이란 암각서 조금 못미처 왼편 골로 들어가면 되는데, 속칭 대채골이라 부르는 곳이다. 공은 1660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때부터 모친의 병환을 당하여 애모함이 하루 같았다. 1669년에 모친상을 당하여 애모함이 예에 넘쳤고, 복을 마친 뒤로 벼슬길을 단념하고 강학에 전념하였으며 存齋(존재) 李徽逸(이휘일), 葛菴(갈암) 李玄逸(이현일) 愚潭(우담) 丁時翰(정시한) 등과 道義交(도의교)를 맺었다.

1689년에 학행으로 추천되어 공조좌랑 등 직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다시 익찬의 제수 받아 여러 번 恩命(은명)을 저버리기 미안하여 부임했지만 7일 만에 사직하고 귀환 도중, 愚潭(우담) 丁時翰(정시한)을 방문하여 서로 심정을 토로하였다. 공의 고아한 선비의 기상을 大山(대산) 李象靖(이상정)孤松病鶴(고송병학)이라 칭하였다. 洛淵(낙연)서원에 배향되었다. 문집 5, 외에 춘추편주5二先生禮說(이선생예설)3권등을 남겼다.

 

墓碣銘

今世多士 不學其學焉者專口耳以 資誦說以譁世取寵而 考實則無得也 若反己切實篤志力行淑人 傳後以沒其身者 惟孤山李先生 其人先生沒而二十八年 學士大夫 欽想景仰之不衰 一日先生之孫載基 袖秋潭金公之狀以 銘墓爲託 汝辭謝不獲則 竊念吾猶及先生時 戴冠稱人未嘗一登 先生之門 考德質業而先生沒矣 私爲詩一章以 道懺悼之意 今不鄙而屬玆筆 小子何敢讓焉 謹按狀 先生諱惟樟 字夏卿 李氏系出全義 祖於麗之太師棹至 十三世孫提學翊始自別爲 禮安人 簪纓不絶傳 五世入國朝有 諱薰 成均館生員 世居漢陽至公始移居 安東豊山縣 於先生爲高祖諱希仁禮曹生員 祖諱珎軍資主簿 出後叔父純仁 考諱迕發通德郞 妣順天金氏 大丘府使允安之女 先生以天啓乙丑五月十六日 生於豊山里 第兒時 嶷然重遲不戱 十餘歲就學 受讀書終日不休 大夫人恐傷之 令小息 對曰 如是尙不逮人 敢惰遊以貽長者 憂邪數年 離經辯志日進 嘗讀書山房 大夫人手裏寢具送之 數月而還寢具 不解裏自在也 父 通德公 性方嚴 諸子少有過不饒 先生和氣愉色 未嘗有違貽 甲午 通德公病 晝夜不解帶及其革也 斷指和藥而進之 不效則絶而 復趄不脫經帶 歠粥蔬食一依 文公家禮中 庚子司馬 是歲 大夫人患類中 症勢沈綿 先生調侍謹劇十年如一日 己酉丁大夫人 憂喪制一如前 喪服闋 無意世事 杜門求志一意講學 俯讀仰思 至忘寢食 已己夏大臣以行高學 優踐履篤實 薦之超授尼署別提 秋除 工曹佐郞 皆不赴 辛未秋 除安陰縣監 辭 冬又除翊贊强赴 朝入直七日 卽辭歸 道楊洲省墓 謁道峯書院 見丁眞善時翰 于原州 丁公嘗來訪 一見俊托心 契至是相見面 歎去就之合義 丁公爲築精舍 于丹陽之龜潭 以自近於先生 甲戌時事大變 葛菴李先生 竄謫屢年 始放還 先生往會于山寺 相與酬和論禮 數日而返 曾在丁酉 存齋李公 來見先生 講心經等書 先生素交 二公伯仲間定 爲道義交云 辛巳春 宿患痢疾復發 子弟請醫治之 先生曰 吾年八十 病如是 藥無益也 三月病益甚 四月以 書告設于丁進 善又奇 近體一首 有嶽蟾江魂夢相通之句 謂門人李成金曰 吾有琴一劍一 朱太史筆 故人所贈梅竹眞 此四者 吾所友也 吾欲以四益名吾堂 因命錄還他人 書冊延見門人 知舊來見者 五月病益 臻轉劇 葛菴先先生 書來問疾 欲答之侍子曰 夫子之病病矣 請徐之以待 後日曰 吾病至此可俟 後邪卽口呼 緘送顧謂孫載基曰 所編禮說國恤條 有關漏可取考補入李字定筮之得 訟卦九四曰 似無害先生曰 無謬我卽誦爻辭 無錯因却藥 載基泣而進曰 大父嘗疑南冥病而 却藥食何如是却之 曰南冥拜穀氣而 不食爾卽出 婦人于戶外 命侍子正席 侍子執席 問何鄕 先生指東 展枕而 臥俄自起叓衣 左臂纔脫已無及矣 扶擁就枕 未免 欹側自正身 齋手拱向左置心上而 逝卽 五月十四日也 嗚呼 此可以驗所學矣 享年七十有七以 其年九月日 葬于豊山縣 北懸空山龍甘洞丁向之原 先生沈靜 篤實簡淡 溫粹得之天賦簞思劇嗜心得 體驗資之學 力銖累寸積日見之行履 繩蹈矩安之 若性隆冬盛暑 不爐不扇 黙黙加工 未嘗放過 少時頗魯記性 不踰恒人 及其靜養 旣久操存

益固則聰明 日進自經傳註解 以至百家之書 無不貫穿 淹綜如誦已 言案上無雜帙 惟經傳濂閩諸賢之書 每夜將庸學 正文整容莊誦 座隅摠壁間 劄錄 聖賢格言言以自警 省於易春秋 推究玩味而盡心焉 平居未嘗有惰容倣言晦人

終日無倦色 胸懷坦蕩和易 謙卑掩過揚善 猶恐傷人而其義之 所在明辯 痛析確然 不可奪其爲翊贊也. 當塗諸人固要之謝不往卽 出城不俟 終日比縣有倫紀之變 先生倡發究治之論 地主大怒 先生前待拒正不撓 地主怏 怏無奈卒 乃心服而薦之 未必朝處心公恕持論 正平其論時事則 未必甲者全是而 乙者全非也 其論出處則 未必山林爲高而 朝市爲汗也 嘗與丁公 論其六條 疏曰人君之道莫大於體天而 體天之道 在於無私目 今朝論潰裂 偏黨成習 公疏不言之何也 丁公笑曰 此老兄他日之言也 其與學者言曰 古之賢人君子 多由科目而出身 行道學者 雖不可不知 內外輕重之分於 爲己之學而 又使兼治擧業時 或命題課考 素不喜製述 或被人强要而 作則其文 平鋪質約 不事藻飾以詩 爲玩物喪志穻有 吟詠間有意會而 發則閒雅 重無世俗氣 雅好杜詩 手書而詠歎之抄 朱子及退溪 禮論類編彚分名曰 二先生禮說 就東史 删其煩亂間附己意而 至辛禑辛昌書曰 後廢王謂門人曰 是我罪也 至陰陽卜筮笄數 兵陣堪輿 家言皆略通大意 自以非所急而 不暇亦不以語人也 字畵楷正端好 雖造次間未嘗放意胡草 丁公每得詩 必請手寫藏去弟 處士公性卞急爲作 損卦贊以輿之子鳳朝 久病發心 疾作百順圖以警之 葛菴李先生薦之 於上請陞資收召 上將用之 終以時議遂寢 不行惜哉 配完山柳氏學生㰒之女 先先生二十三年沒 葬枉內佳洞先塋之側 先生誌其墓 無子女 取伯兄第二子鳳朝之 鳳朝娶郡守金啓光女 亦無子 早夭有二女 以其兄鳳周第二子載基爲後 卽乞銘者也 女適士人李碩亨 洪士賢 有側室子曰 鳳紀 先生詣理 旣精見道 分明自爲爲人 纖微必盡自小至老至 死不遷可謂成德君子

銘曰

資之美學之 博人一能己則 百惟其魯 是以得彼 儇銳其退速 惟先生至老 篤言爲法志 可則賁丘園 禮束帛商顔 皓起羽翼鴻 冥冥翔廓弋 何慕返初服 貧不改顔氏 樂斃得正曾子 簀懸空山封 四尺石增高 過者式後學

漢陽 趙德隣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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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갈명

지금 세상에 선비는 많지만, 독실하게 학문을 하지 않고 오직 입과 귀로 외운 것을 말로 토해내서, 어지러운 세상에 내 놓아, 실제로 득이 없는 사람만 많다.

그 반면에 독실한 뜻을 갖고 힘써 행하는 맑은 사람으로, 몸이 죽은 뒤에도 전해지는 분을 생각하니, 孤山(고산) 李先生(이선생)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선생이 돌아가신지 28, 아직도 학자와 선비들이 흠모하고 그리워 함이 시들지 않고 있다.

하루는 선생의 손자 載基(재기)가 소매 속에서 秋潭(추담) 金公(김공)의 문서를 갖고와서 墓銘(묘명)을 써 달라고 부탁한다. 나는 고맙기는 하나, 사양하면서 받지 아니하였다.

잘 생각하니 선생이 살아 계실 때, 의관을 가추고 선생의 집에 간 일이 생각나고, 선생이 돌아가시자 끼치신 덕업을 생각하며, 사사로이 시를 지어 輓章(만장) 하나에 애도의 시를 담아 보냈다. 그런데 지금 내가 어찌 감히 써 달라 부탁하는 것을 사양만 할 수 있겠는가.

삼가 선생의 휘는 惟樟(유장)이고 자는 夏卿(하경)이며 全義(전의)에서 계출한 李氏(이씨)로서, 조상은 고려 태사 ()에서 비롯되었다.

13세손 提學(제학) ()에 이르러 비로소 禮安(예안)으로 갈려 나오니, 관직에 오른 사람이 끊이지 않게 이어 왔다. 조선조에 들어와, 5세에 휘 ()이라는 成均館(성균관) 생원이, 대대로 살던 漢陽에서, 안동 풍산현으로 처음 이사를 왔다.

선생에게 고조부가 되는 분은 禮曹(예조) 생원인 휘 希仁(희인)이다.

조부는 휘 ()으로 군자주부를 지냈으며, 북수 純仁(순인)에게 양자로 간 분이다. 아버지는 휘 迕發(오발)로 통덕랑이며, 모친은 순천 김씨 大丘(대구)부사 允安(윤안)의 딸이다.

선생은 천계 을축 516일에 풍산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도 벌써 영리하고 듬직하며 장난이 심하지 않았다. 열 살 쭘에 공부를 하기 시작했는데, 하로 종일 쉬지도 않고 책을 읽으니, 모친께서 몸이 상할 까 염려되어 좀 쉬라고 하니, 이렇게 해도 오히려 다름 사람을 따를 수 없는데, 어찌 감이 개으름을 피우고도 長者(장자)를 따를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그렇게 몇 년을 지나자 경전을 다 외우고 공부할 뜻이 더욱 더해 져 山房(산방)에 가서 고부를 하게 되니, 모친께서 손수 침구를 만들어 보냈다. 몇 달이 지나자 보낸 침구를 풀어보지도 않고 다시 돌려보냈다.

아버지 通德(통덕)공은 성격이 바르고 엄해서, 자식들이 조금만 잘못을 저질러도 용서가 없었다. 혹시 잘못이 있어도 선생에게는 너그럽고 온화하였다.

감오 년, 通德(통덕)공이 병이 드니. 밤낮으로 옷도 벗지 않고 간호하였고 손가락을 잘라 약으로 올렸으나, 효과가 없어 돌아가시니, 다시 經帶(경대)도 벗지 아니하고, 채식에 죽만을 마시며, 한결같이 文公(문공) 家禮(가례) 대로 행하였다.

경자 년, 司馬試(사마시)에 합격했는데, 그해 모친이 병이 나서 증세가 매우 위중해 지니, 선생은 옆에서 병수발하기 10년을 하루같이 잘 하였다. 기유 년, 모친이 돌아가자 앞서와 같이 수심으로 상을 치렀으며, 탈상을 하자, 세상일에 뜻을 버리고 집 밖을 나가지 않으며 오직 학문을 연마하는데 만 뜻을 두어, 구부려 책을 읽고 우러러 생각하며 침식조차 잊을 지경이었다.

기사년 여름, 대신들이, 행실이 바르고 학문이 높으며, 독실하게 실천함으로 尼署別提(니서별제)로 높여 천거하고, 가을에 공조좌랑을 제수하였으나 모두 나가지 아니했다. 신미년, 安陰縣監(안음현감)이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겨울에 또 翊贊(익찬)으로 임명하니 마지못해 취임해서, 조정에 들어간 지 7일 만에 사직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楊洲(양주)에 들려 선묘를 하고, 도봉서원에서 進善(진선) 丁時翰(정시한)을 찾아보고, 原州(원주)에 가니 ()공이 방문하여, 한번 보자 마음을 열고는 서로 만날 것을 기약하고, 뜻이 서로 맞아 시를 읊으며 떠나 왔다. ()공은 선생이 있는 곳과 가까운 丹陽(단양) 구담에 精舍(정사)를 지었다.

갑술년에 時事(시사)에 큰 변화가 생겨, 葛菴(갈암) ()선생이 여러 해 지내던 귀양살이에서 비로소 풀려나 돌아왔다. 선생은 만나로 山寺(산사)에 가, 서로 ()에 관해 이야기 하며 몇 일간을 있다가 돌아 왔다.

정유년에 存齋(존재) ()공이 선생을 만나로 와, 心學(심학)등의 책을 읽으며 선생과 오랜 회포를 풀며, 두 사람은 서로 형 동생의 道義交(도의교)를 매었다.

신사년 봄 숙환인 이질 병이 다시 도지자, 자제들이 의원을 불러 치료하자고 하였으나, 선생은 내 나이 80, 병이 이와 같으니, 약이 별 도움이 안 된다.하였다.

3월에 병이 더욱 심해지고, 4월에, 쓸 것을 가져오라 해서 丁進善(정진선)에게 글을 쓰고 近體詩(근체시) 한수를 지어 보내며, 산과 섬강에 혼은 꿈속에서도 서로 통하네,하는 구절을 넣었다.

문인 李成金(이성금)내게 () 하나, () 하나, 朱太史(주태사)의 붓 한 자부, 그리고 고인이 보낸 梅竹(매죽) 그림, 이 네 가지는 나의 벗이다. 나는 이 네 가지로 우리 집의 명성을 더하고자 하므로,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주지 말라는 ()을 적었다.하였다.

쓴 글을 펼쳐서 문인들과 찾아오는 친구들에게 보였다. 5, 병이 더해가고 심하게 되자, 葛菴(갈암)선생의 글을 갖고 문병을 왔다. 답장을 쓴다고 하니 侍子(시자)선생님은 병자입니다. 병이 좀 낫기를 기다려 다음에 쓰시지요.하니

내 병은 이 지경까지 왔으니 뒤로 기약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하며 봉해서 보내며, 손자인 載基(재기)를 돌아보며 내가 편찬한 禮說(예설) 國恤條(국휼조)와 관련된 것을 빠짐없이 챙기고, 잘 생각해서 李宇(이우)를 보충해 써넣어라. 주역 訟卦(송괘)로 점쳐 얻은 것인데 九四(구사)에 이르기를, 아무 해가 없는 것과 같다. 했느니라.하였다.

선생께서 내가 외우는 爻辭(효사)에 어긋남이 없다.하였는데, 착고가 없었고 그리고 약은 물리쳤다.

載基(재기)가 울면서 진언하기를 조부께서도 가끔 南冥(남명)을 괴이하게 생각하셨습니다. 병에 약을 물리치고 음식을 어찌 이같이 물리칩니까.하니 南冥(남명)穀氣(곡기)를 숭배하니, 먹지 않는다. 너는 즉시 나가라.하였다.

부인에게 문밖으로 나가라 하고, 시자가 자리에 오니, 시자가 자리를 들고, 어느 쪽에 펼까 물자 선생께서 동쪽을 가리켰다. 자리를 펴니, 누었다가 갑자기 일어나 옷을 벗기 시작하는데 왼팔을 겨우 벗으며 혼자 할 수가 없었다.

안아서 자리에 눕히니, 옆으로 누었다가 몸을 바로하고 손을 가지런히 모아 왼쪽 심장 위에 얹은 체 돌아 가셨다. 514일이었다. 아아! 이는 가이 배울만한 일이었다. 향년 77세였다.

그해 9월 모일에 풍산현 북쪽 현공산 용감동 정향 언덕에 자아사 지냈다.

선생은 마음이 차분하고 조용하며, 독실하고 대쪽같이 바르며, 따뜻하고 순수하였다. 하늘에서 타고난 넓은 생각을 갔었고, 체험으로 배운 자질은 심득하였으며, 힘써 조금식이라도 매일 쌓 나가는 것이 보였으며, 편안 것을 답습하지 아니 하였고, 엄동과 한 여름에 화로와 부채를 쓰지 않았다. 말없이 공부하며 내치기나 과하지 않았다.

어릴 때 기억하는 것이 둔한 편이 었고, 항산 남보다 뛰어나지 못하였으나, 심신을 조용히 하여 수행하기를 오래도록 하니, 더욱 총명하게 되어, 날로 발전하여 경전의 주해와 百家(백가)의 책을 통하지 않는 것이 없게 되고, 모두 종합해서 암송하게 되었다.

책사위에 雜書(잡서)는 없고 오직 經典(경전)과 유명한 선비들의 책만 있었다. 매일 밤 열심히 공부를 하였고 바른 글을 바른 자세로 엄숙하게 외었다. 좌석 옆 벽에는 성현의 격언을 잘라 붙여 자신을 경계하는 말로 하였다. 春秋(춘추)를 잘 살펴보고, 이치를 미루어 생각하며 음미하는데 마음을 다 하였다.

평소에도 나태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남을 비방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종일 피로한 기색이 없었으며, 가슴에 편안하고 온한 생각을 품고, 겸손하면서도 허물을 버리고 선을 높이 숭상하였다. 옮은 일을 하는 사람을 다칠까 두려워했고, 소재를 분명히 밝혀 확고하게 정치를 도우는 일을 잊어버리지 아니했다. 중요한 지위에 있는 자들이 원해도, 사례하고 종일토록 성 밖으로 나가지 아니했다.

현에 윤리와 기강의 변고가 있어, 선생이 불러서 추궁하고 바로 잡으려 말하니, 지주가 크게 노하며, 선생 앞에 기다렸다 가로막고 소란을 부리며 원망을 하더니, 나중에는 원망 없이 마침내 마음으로 복종하고 바뀌었다.

반드시 조정에서 공은 處心(처심)함에 용서함을 지론으로 하지 아니함이 없었는데, 時事(시사)를 논할 때는 바르게 하였는데 즉, 반드시 갑이란 자의 모두를 바르다고 아니할 수 없고, 을이란 자는 모두가 잘못이 었다.

그 말의 출처는 곳, 반드시 산림을 조정과 시장을 위한 임금의 명으로 높이지 아니할 수 없는데, ()공과 함께 그 六條(육조)를 살펴보니 소장에서 말하기를 인군의 ()는 막대해서 하늘과 같고, 하늘의 도는 사사로운 안목에 있지 아니합니다. 지금의 조정은 사리를 밝히는 것이 문란하고 분열되어, 당에 치우치는 습성이 생겼다.하였다.

공은 소에 말하지 않는 바가 무었 인가 하니 ()공은 웃으면서 이 노형은 다른 날의 말을 했다.하였다.

 

거기에 관하여 학자들은 말하기는 옛날의 현인과 군자는 대부분 과거를 통한 출신으로 道學(도학)을 행하는 자이다. 그러나 안팎의 경중을 구별 할 줄 알지 아니하면 안 되고 자신의 학문으로 삼아야한다. 하였다.

또한 다스리고 사업을 할 때, 혹은 과해진 문제를 생각해 보게 해서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는 바를 말하게 하며, 혹은 사람들에게 강요해서, 글을 짓게 해 솔직한 마음을 펼쳐보게도 한다.

꾸밈없이 솔직한 시에서 뜻을 죽이고 사물을 희롱하며, 창에서 읊으며 간혹 뜻이 맞는 이와 모여 한가함을 보냈는데 세사의 속된 기풍은 없었다.

杜甫(두보)의 시를 좋아하고 손으로 읊을 것을 초하였고, 朱子(주자)退溪(퇴계)禮論(예론)을 묶고 분류해서 二先生禮說(이선생예설)이라 이름하였다.

東史(동사)를 다루어 그 번잡했던 문제에 자신의 뜻을 끼워 넣어 辛禑辛昌(신창) ()에 이르러 말하기를 廢王(폐왕)이 뒤에 문인에게 말하기를, 이는 내 죄이다. 음양으로 점을 쳐보니 蓍草(시초)의 숫자가 兵陣(병진)이 수례를 감히 견딘다고 했다.라고 하였다 한다.

家言(가언) 모두의 뜻을 대략 통달하고 자연이 급하지 아니하고 느긋하며 남의 말을 하지 아니했다. 글씨는 楷書(해서)로 바르고 단아하게 썼으며 혹시라도 흐트러져 胡草(호초)를 쓰지 않았다.

()공은 시를 받을 때 마다 반드시 손수 뺏겨 갈무리하고 동생에게 갔다.

진사공은 성질이 급해서, 주역의 損卦(손괘)()을 만들어 아들 鳳朝(봉조)에게 주고, 오랜 병인데도 발심하여 아픈 중에도 百順圖(백순도)를 만들어 경계하였다. 葛菴(갈암) 李先生(이선생)이 천거해서, 상감에게 청하여 자격을 승진해서 소집하라 해서, 上將(상장)으로 쓰려고 의농이 드디어 다 했는데, 죽게 되니 실행 하지 못하였는데 아깝도다.

배위는 完山柳氏(완산류씨) 學生(학생) ()의 딸이며, 선생 보다 23년 앞에 죽었다. 枉內(왕내) 佳洞(가동) 선영 옆에 장사 지냈다. 선생이 그 묘의 墓誌(묘지)를 썼다.

자식이 없어, 伯兄(백형)의 둘 째 아들 鳳朝(봉조)를 입양해서 대를 잇고, 鳳朝(봉조)는 군수 金啓光(김계광)의 딸을 얻었는데, 역시 아들이 없었다, 두 딸이 있었는데 일찍 죽었다. 그래서 그 형 鳳周(봉주)의 둘째 載基(재기)를 후사로 삼았다. ()을 써 달라고 한 바로 그 자이다.

딸은 사인 李碩亨(이석형), 洪士賢(홍사현)에게 각각 시집갔고, 측실의 아들은 鳳紀(봉기)이며 선생이 달 다스려, 정밀하게 ()를 분별할 줄 알며, 자신을 위해서나 남을 위해서나 분명했고, 소년에서 노인에 이르기 까지 찬찬하고 세밀하게 보살핌을 다 하였다. 그리고 죽을지언정 成德君子(성덕군자) 다움을 버리지 아니했다.

 

명에 이르기를

학문을 좋아하는 자질로 잘 배워서 資之美學之

넓게 사람들은 오로지 자기처럼 잘하니 博人一能己則

많은 생각으로 성현의 자취 알아 내고 百惟其魯

그리하여 그들의 학문도 얻었네. 是以得彼

총명하기 빨리 물러나기를 알아 儇銳其退速

생각하니 선생이 늙기에 이르러 惟先生至老

법에 뜻을 둔 독실한 말하더니 篤言爲法志

언던 위에 부풀어 오른 한 무덤 可則賁丘園

예를 다해 비단으로 얼굴 덮어 禮束帛商顔

깨끗하게 일어난 홍새의 깃털같이 皓起羽翼鴻

아득하게 빙빙 돌다가 죽으니 冥冥翔廓弋

어찌 그리원도 初服(초복) 돌아가리. 何慕返初伏

가난은 顔氏(안씨)도 못 바꾸었고 貧不改顔氏

曾子(증자)는 바로 알고 기꺼이 죽었으니 樂斃得正曾子

살평상에 달아 공산에 봉하니 簀懸空山封

넉자의 비석 더욱 높아 솟아 四尺石增高

지나가는 자를 본받아 뒤로 배우라. 過者式後學

 

한양 趙德隣(조덕린)

 

 

 

 

 

 

 

 

 

 

출전 <한미녹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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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남한에 총 26,970가구 112,08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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