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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전주이씨(李)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전주이씨)

 

본관(本貫): 전주(全州)

시조(始祖): 이한(李翰)

유래(由來):

 

전주 이씨(全州李氏)의 시조(始祖) 이한(李翰)은 신라(新羅) 때 사공(司空)을 지냈고,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10세손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을 아내로 맞이해 우리나라 최대의 벌족(閥族)인 대성(大姓)의 연원(淵源)을 이루었다.

 

그 후 시조의 아들 자연(自延)이 시중(侍中)을 역임했고 손자 천상(天祥)은 복야(僕射)를 지냈으며, 증손 광희(光禧)는 아간(阿干), 현손(玄孫) 입전(立全)은 사도(司徒)를 역임하는 등 신라에서 벼슬을 지내다가 15 세손 용부(勇夫)에 이르러 고려조(高麗朝)에서 흥무위대장군(興武衛大將軍)을 역임하였다.

 

도도이 맥을 이어온 전주이씨의 파()를 살펴보면, 이태조의 고조부(高祖父)인 목조(穆祖) 안사(安社)의 상대(上代)에서 갈려진 파로는 시조 한()14세손 궁진(宮進)의 둘째 아들 단신(端信)으로부터 시작되었던 시중공파(侍中公派)15세손 용부(勇夫)의 둘째 아들 거를 파조(派祖)로 하는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 17세손 양무(陽茂)의 셋째 아들 영습(英襲)을 파조로 하는 주부공파(主簿公派)가 있으며, 둘째 안사 이후 이태조 이전에서 갈려진 파로는 안사의 아들 안천(安川안원(安原안풍(安豊안창(安昌안흥대군(安興大君) 파와 익조(翼祖) 행리(行里)의 아들 함녕(咸寧함창(咸昌함원(咸原함천(咸川함릉(咸陵함양(咸陽함성대군(咸城大君) 12파가 있으며 탁조(度祖) (椿)의 아들 완찬(完昌완원(完原완천(完川완성대군(完城大君) 등의 4파와 환조(桓祖) 자춘(子春)의 아들 완풍대군(完豊大君)과 의안대군(義安大君) 등을 포함하여 총 18개 파가 있다.

셋째 태조(太祖)의 후대에서 갈려진 파로는 진안대군(鎭安大君) 방우(芳雨)를 포함하여 99(대군: 25, : 74)로 알려졌으나, 미취졸(未娶卒: 결혼전에 죽음)이거나 후사(後嗣)가 없는 대군(大君)20명 정도가 되므로 실제로는 그 수가 줄어든다.

 

인맥을 살펴보면, 세종(世宗)의 아들 밀성군(密城君) ()의 계통에서 6명의 정승(政丞)3명의 대제학(大提學)을 배출하여 주목을 끌었고, 정종(定宗)의 아들 덕천군(德泉君) 후생(後生)의 계통에서는 영의정(領義政) 1명과 대제학 3명을 배출시켜, 정승 3명을 배출시킨 광평대군파(廣平大君派: 세종의 아들 여), 정승 2명의 선성군파(宣城君派: 정종의 아들 무생), 정승 1명과 많은 문무관(文武官)을 배출해 낸 효령대군파(孝令大君派: 태종의 둘째아들 보)와 함께 화려한 명맥(名脈)을 이루었으며 정종의 막내아들인 무림군(茂林君) 선생(善生)과 중종(中宗)7남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초의 계통은 무관(武官)의 집안으로 유명하다.

 

가문의 중요 인물

 

이린(李璘)

용부의 아들 린()이 내시집주(內侍執奏)로 시중(侍中) 문극겸(文克謙)의 딸게 장가들어 17세에 양무(陽茂 : 좌우위 중랑장을 역임)를 낳았다.

 

이양무

상장군(上將軍) 이강제(李康濟)의 딸에게 장가들었던 양무는 18세에 안사(安社)를 낳으니 이분이 바로 이태조(李太祖)의 고조부(高祖父)인 목조(穆祖)였다.

 

이목조(李穆祖)

호방(豪放)한 성품으로 신망을 받았던 목조는 처음에 전주(全州)에 살다가 산성별감(山城別監)과 사이가 나빠 강릉도 삼척현(江陵道三陟縣)으로 이거(移居)하였으나 공교롭게도 강릉도의 안렴사(安廉使)로 임명된 자가 바로 그 산성별감이어서 목조는 다시 가족을 데리고 삼척을 떠나 함길도 덕원(咸吉道德源)에 정착하였다가 원()나라에 귀화(歸化)하여 알동(斡東 : 경흥부의 동쪽 30리에 있었다.) 땅으로 이주(移住)하여 원주민 5천 호(五天戶)를 다스리는 다루하치(達魯花赤 : 원나라 벼슬 제도)가 되니 이때가 고려 고종(高宗 : 23대 왕, 재위기간 : 1213 1259) ()였고,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 동북 방면 사람들이 모두 목조에게 쏠려 쫓으니 이씨 조선 왕업(李氏朝鮮王業)의 시초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익조(李翼祖)

목조로부터 천호(千戶) 벼슬을 세습한 익조(翼祖 : 이행리)는 원나라 세조(世祖)를 도와 왜인정벌에 참전했고, 원나라에 귀화해 있으면서도 마음은 항상 본국에 있었다. 그가 충렬왕(忠烈王)을 공손히 뵈오니 왕이 말하기를 "그대는 원래 본국에서 벼슬하던 집안이니 어찌 근본을 잊을 것인가. 지금 그대의 거동을 보니, 마음이 본국에 있는 것을 알겠다"고 하였다.

 

이자흥(李子興)

익조가 부인 최비(崔妃)와 더불어 낙산 관음사(洛山觀音寺)에서 기도하여 낳았다는 탁조(度祖)의 장자 완창대군(完昌大君) 자흥(子興)은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고, 차자 환조(桓祖) 자춘(子春)은 원나라 총관부(摠管府)가 있던 쌍성(雙城)의 천호(千戶)를 지냈으며, 셋째인 완원대군(完原大君) 자선(子宣)은 완산백(完山伯)에 봉해졌다.

 

이자춘(李子春)

1315(고려 충숙왕 2)에 출생했던 환조(桓祖) 자춘(子春)은 공민왕(恭愍王)의 북강(北彊) 회수정책에 내응하여 쌍성을 함락시켜 함주(咸州) 이북의 땅을 회복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우고 대중대부 사복경(大中大夫司僕卿)이 되어 저택을 하사받았으며,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로 서강병마사(西江兵馬使)를 겸하여 왜구(倭寇) 침입을 토벌하고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에 임명되어 함경도 지방을 다스렸다.

 

이원계(李元桂)

슬하에 31녀를 두었던 환조의 장남 원계(元桂)1361(공민왕 10)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했을 때 박주(博州)에서 승전하고 개경(開京)을 탈환하는데 공을 세워 2등공신에 책록되었고 우왕(禑王) 때 원수(元帥)가 되어 왜구를 토벌했으며, 요동(遼東) 정벌 때는 팔도도통사 조전원수로 이성계(李成桂)의 휘하에서 공을 세웠다.

 

이화(李和)

환조의 둘째 아들 화()는 조선(朝鮮)이 개국되자 일등공신으로 의안백(義安伯)에 봉해졌으며, 두차례 왕자의 난을 평정하여 태종(太宗) 때 영의정(領義政)에 올라 대군(大君)에 진봉되었다.

 

이성계(李成桂)

1392(태조 1) 716일 송경(松京)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한 태조(太祖)로부터 마지막 임금인 순종(純宗)에 이르기까지 27명의 왕()이 승계하면서 519년간 지속한 조선왕조(朝鮮王朝)의 기초를 세웠던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는 환조(桓祖) 자춘(子春)의 셋째 아들이며, 시조 사공(司空) 이 한(李 翰)22세손이다. 외교정책으로서 사대교린주의(事大交隣主義)를 채택하고, 문화정책으로서 숭유배불주의를, 경제정책으로서 농본민생주의(農本民生主義)를 건국(建國) 이념으로 내세워 왕권을 중심의 권력구조를 확립하여 한국(韓國) 최대의 벌족(閥族)으로 발전해온 전주이씨(全州李氏)는 대소 120여 파()로 갈라져서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이방우(李芳雨)

태조(太祖)<우리 가문의 백이숙제(伯夷淑齊)>라 칭했던 진안대군(鎭安大君) 방우(芳雨)가 고려 말 우왕(禑王)을 폐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세웠을 때 밀직부사(密直副使)로 명()나라에 그 정변을 설명하러 갔었으며,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해주(海州)에 은거(隱居)하였다.

 

이여(李璵)

무안대군(撫安大君) 방번(芳蕃)의 후는 세종의 아들 광평대군(廣平大君) ()가 세종의 명을 받아 양자(養子)로 들어가 후계를 이었는데, 그의 아들 부()가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공을 세워 <종실(宗實)의 현자(賢者)>로 불리웠고, 20세에 요절했으나 그 이전에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급제하여 계감(戒鑑)을 편수했으며, 효경(孝經소학(小學사서삼경(四書三經음율(音律산수(算數) 등에 모두 뛰어났었다.

 

이의건(李義健)

()의 증손으로 배천 군수(白川郡守)를 역임했던 수한(守漢)의 아들 의건(義健)은 명종(明宗) 때 당시의 명현(名賢)들과 교유하며 시명(詩名)을 떨쳤고, ()과 학()으로 선비들로부터 우러름을 받았다.

 

이후원(李厚源)

군수(郡守) ()의 아들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했던 후원(厚源)은 평생을 의롭게 생활하여 인간저울이란 뜻인 <의형(義衡)>으로 불리웠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척화(斥和)를 주장했으며, 남한산성에서 굴욕적인 강화(講和)가 진행되고 세자(世子)의 인질문제로 침통해 있는 인조(仁祖) 임금에게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임금은 오직 나라를 위해 죽고, 신하들은 임금을 위해 죽어야 한다"는 대담한 발언을 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

특히 악신 김자점(金自點)의 축출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후원은 만년에 광주(廣州) 선형 곁에 집을 짓고 그 집 이름을 <오재(五齋)>라 했다.

 

이양원(李陽元)

선성군 무생의 증손 학정(鶴丁)의 아들 양원(陽元)은 명종(明宗) 때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한 후 종계변무사(宗系辯誣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광국 3등공신(光國三等功臣)으로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에 봉해지고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특히 그는 성품이 충후(忠厚)하고 박학하였으며, 당쟁이나 흑백의 논쟁에 편당되지 않았다. 어느 날 야대(夜對)에 입시(入侍)하였을 때 임금이 술을 권하고 <아로가(雅鷺歌)>를 지어 양원에게 화답(和答)을 청했다. <까마귀야 검지 말라, 백노야 희지 말라.(鴉兮莫黑鷺兮莫白)/ 흑백이 어지럽다. 수리야 너는 어찌 홀로 검지도 희지도 않느냐>하니 양원이 화답하기를, <()라 해도 내 아니요, ()이라 하여도 내 아니라(謂朱非我兮謂綠非我),/ 주록(朱綠)이 현란함도 내 고움이 아니어늘(朱綠之眩晃兮又非我之娜也),/ 님은 어찌하여 날 몰라 보시고 물들었다 하시오(君胡爲平不我知謂我兮染夏)>하니 임금이 좌요에 편당됨이 없음을 알고 더욱 어질게 여겼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한강(漢江)을 지키다가 해유치(蟹踰峙)에서 적군을 크게 대파한 후 영의정에 올랐던 양원은 의주(義州)에 피란 중이던 선조 임금이 요동(遼東)으로 건너가 내부(內附)했다는 와전된 소식을 듣고 "국사를 가히 어찌 할 도리가 없다"하며 나라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삼겠다면서 절곡(絶穀) 8일만에 피를 토하고 순절하였다.

 

이시경(李蓍慶)

양원의 아들 시경(蓍慶)은 임진왜란에 순절한 아버지의 3년상을 치루고 있는 동안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원수를 갚는다고 아버지 영전에 맹세하고 의병(義兵)을 일으켜 진주성(晋州城) 전투에 참전하여 육신으로 적을 격살하고 물에 빠져 죽으니 시체도 못 거두고 의관(衣冠)으로 장사를 지냈다.

 

이홍주(李弘胄)

군수(郡守) 극인(克仁)의 아들 홍주(弘胄)40년간 벼슬을 지내고 영의정(領義政)에 까지 이르렀으나 그의 집은 두어칸 초막뿐이었고 한 뙈기 공원에는 대()와 화초가 조촐하게 피어있었다고 하며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어 문묘(文廟)의 중수비문을 남겼다.

 

이헌국(李憲國)

진남군(鎭南君) 종생(終生)의 후손에서는 수창부정(壽昌副正) ()의 아들 헌국(憲國)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다스리는데 공을 세워 평난3등공신(平難三等功臣)에 오르고 선조 때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러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호성3등공신(扈聖三等功臣)으로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이효백(李孝伯)

덕천군(德泉君) 후생(厚生)의 아들 효백(孝伯)은 이 복(李 復이 형(李 衡)과 더불어 당대에 활 잘 쏘는 <칠사종(七射宗)>으로 불리웠으며, 뛰어난 지감(知鑑)으로도 유명했다. <원교집(圓嶠集)>에 의하면, 그의 무덤이 광주(廣州) 도논리(道論里)에 있는데 그 터는 효백이 평소에 활을 쏘고 사냥하던 곳이다. 그는 항상 언덕에 올라 멀리 바라보며 반드시 이곳에 묻히기를 원했다.

어느 날 활줄이 갓끈에 퉁겨져서 갓끈에 달렸던 큰 구슬을 잃었는데 장사할 때 그 구덩이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제

태종(太宗)의 맏아들인 양녕대군(讓寧大君) 제는 왕세자(王世子)로 봉해졌으나 세종(世宗)의 현명함을 위해서 <창광자자(猖狂自恣)>하여 세자를 아우에게 물려주고 여생을 방랑하였었다.

 

이보(李補)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孝寧大君) ()는 불교를 깊이 믿었다.

그의 형인 양녕대군이 사냥개를 끌고 어깨에는 사냥매를 얹고서 그가 있는 절에 와서 마당에 사냥한 짐승을 늘어놓고 자주 놀다가 갔는데, 이를 불쾌하게 생각한 효령대군이 "형님은 지옥이 두렵지 않습니까"하니, "이승에서는 임금의 형이요, 저승에서는 보살의 형이니 지옥에 갈 리가 있겠는가"라고 대꾸했다고 한다.

 

이중호(李仲虎)

효령대군의 현손 중호(仲虎)는 중종(中宗)과 명종(明宗) 때의 이름난 학자로 시문(詩文)에 뛰어났으며, 대쪽으로 만든 계명(戒銘)<안색은 온화하게 가질 것을 생각하며 이득을 보면 의리를 생각하라>는 등의 구사(九思)<머리 모양은 곧게 하고 손가짐은 온순하게 하라>는 등의 구용(九容)을 빽빽하게 새겨서 허리띠에 차고 다녔으며 죽을 때도 함께 묻어 달라고 하였다.

 

이직언(李直彦)

선조 때 식년문과에 급제했던 직언(直彦: 효령대군의 5대손, 형의 아들)은 우찬성(右贊成)에 이르러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이명(李溟)

이조판서(吏曹判書) 양의 손자 명()은 인조(仁祖) 때 병자호란 후 고갈된 재정을 맡아 국고(國庫)의 충실을 기하는 한편 물가를 안정시켜 한국 재정(財政) 사상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이수광

활을 잘 쏘아 장거리 사수로 이름을 떨쳤던 성녕대군(誠寧大君) 종의 후손에서는 <지봉유설(芝峰類說)>·<찬록군서(纂錄群書)>등 수십종의 명저(名著)를 저술하여 명망을 떨쳤다.

 

이성구(李聖求)

억울한 사람을 너무 많이 구해주어서 지옥에서도 계속 영의정을 지내고 있으리라는 성구(聖求 : 지봉 수광의 아들)의 부자(父子)가 유명했다.

특히 성구는 인조 때 기생(妓生) 제도를 폐하여 모두 고향에 돌려보냈던 일로 이름을 떨쳤고, 이 계의 온 가족이 처형되는 것을 구하려다가 오히려 탄핵을 당해 벼슬에서 물러나 양화강(楊花江) 위에 집을 짓고 살다가 집에 불이 났었다.

그는 밭뚝에 나와 태연히 앉아 있다가 다른 것에 대해서는 일체 묻지도 않고 "술독은 탈이 없느냐. 술을 따라 이웃 사람들에게 사죄하라."고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이원익(李元翼)

익녕군(益寧君) 치의 후손에서는 정은(貞恩)의 증손 원익(元翼: 합천 군수 억재의 아들)이 서민적(庶民的)인 인품으로서 <오리정승(梧里政丞)>이란 이름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다.

원익이 연로(年老)해서 퇴임을 청하니 인조(仁祖)는 술을 하사하여 전송하였고 해사(該司)로 하여금 흰 이불과 흰 요를 주게하여 그의 검소한 덕을 표하며, "평생의 검소는 가히 경의를 표할 만하다."하고 승지를 보냈다.

승지가 복명(復命)하니 임금이 그 거처의 현황을 물었다. "초가집이 쓸쓸하였고, 비바람도 못가리는 형편이었습니다."하였다. 임금은 "정승 40년에 초가 두어칸 뿐이더냐"하면서 본도 감사로 하여금 정침(正寢)을 지어 주도록 하였다.

 

이수록(李綏祿)

세종(世宗)의 아들 18형제 중 가장 명맥(名脈)을 이룬 밀성군(密城君) ()5대손 수록(綏祿)은 광해군(光海君) 때 원익(元翼)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활약하였고,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양근(楊根)에 물러가 살았다.

 

이경여(李敬與)

수록의 아들 경여(敬與)가 가난한 일생을 살면서 기국(器局)으로 영의정에 올랐다.

 

이관명(李觀命)

경여의 손자 관명(觀命: 대제학 민서의 아들)은 아우 건명(健命)의 죄목에 연좌, 덕천(德川)에 유배되어 관노(官奴) 살이를 하면서 패랭이(平凉子)를 쓰고, 새벽 일찍 관가의 마당을 쓸어놓고 군수가 드는 것을 기다렸다가 대령(待令)하는 일을 하루도 게을리하지 않고 소임을 다했다.

 

이건명

관명의 아우 건명은 경종(景宗)이 병석에 누어 후사(後嗣)를 정하는데, 아우로 하여금 대를 잇게 하자 세자(世子)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해야 한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하다가 무고를 받아 나로도(羅老島)에 유배되어 사사(賜死)당했다.

 

이명

건명의 사촌이 숙종조(肅宗朝)의 상신 이명이다. 그는 당대의 이름난 석학(碩學)으로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했으며, 특히 청() 나라의 실학사조(實學思潮)에 관심이 깊었고, 서학(西學)에 대해서는 깊이 연구하였다. 노론(老論) 4대신의 한 사람으로 영조(英祖)의 대리청정을 실현케 했으나 소론(少論)의 반대로 결정이 철회되자 파직, 남해(南海)에 유배되었다가 무고로 사사당했다.

 

이준(李浚)

임영대군(臨瀛大君) 구의 아들로 귀성군(龜城君)에 봉해졌던 준()은 문무 겸비의 명신(名臣)으로 이름났으며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여 적개1등공신(敵愾一等功臣))에 책록되고,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이어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병권(兵權)을 쥐자, 종실(宗室)에게 병권이 쥐이면 혁명이 있다는 한계희(韓繼禧)의 논척으로 파직당했다.

 

이충작(李忠綽)

중 보우(普雨)를 논척하다가 유배당했던 충작(忠綽)은 효행(孝行)이 뛰어났다.

부모의 복상(服喪)중에 너무 울어 눈이 멀었는데도 지팡이로 더듬거리며 먼거리의 묘소(墓所) 참배를 하루도 빠지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임금이 그의 효행을 높이 치하하여 승지(承旨)로 임명하자 조정에서는 장님승지는 있을 수 없다는 반론이 일어났다.

이에 왕이 교지를 내리기를 <신들은 그의 보이지 않는 눈을 미워하지만 나는 그의 보이지 않는 눈을 사랑한다. 보고서 못된 일을 하는 눈보다 아예 못 보는 눈이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정치는 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몽설(李夢設)

완원군(完原君) (성종의 다섯째 아들)의 증손 몽설(夢設)이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하고 보령(保寧)에 은거하여 향풍(鄕風)을 세웠다.

그의 아들 성()과 원은 학명을 떨쳤다.

 

이상질(李尙質)

진의 아들 상질(尙質)은 학문이 현달하여 <삼유신(三儒臣)>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으며, 그의 아들 훤은 언간(言諫)으로 절의(節義)를 세워, 대제학(大提學)으로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된 손자 조()와 함께 이름을 떨쳤다.

 

이서구(李書九)

순조(純祖) 때 우의정을 지내고 명문장가로 시명(詩名)이 높았던 서구(書九)는 박제가(朴齊家이덕무(李德懋류득공(柳得恭) 등과 함께 <한시(漢詩)4대가>로 손꼽혔다.

 

이상황(李相璜)

승지 득일(得一)의 아들 상황(相璜)은 순조 때 영의정을 지내고 영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이지연(李止淵)

헌종(憲宗) 때 우의정(右議政)으로 <순조실록(純祖實錄)>을 편찬했다.

 

이헌구(李憲球)

철종(哲宗) 때 좌의정을 지내고 궤장을 하사받았다. 헌구(憲球),

 

이하응(李昰應)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으로 이름이 유명하다.

 

이재원(李載元)

철종 때 영의정(領議政)을 역임하였다.

 

이승만(李承晩)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大統領)을 지낸 승만(承晩)은 가문을 빛낸다.

 

 

李成桂(이성계) 장군 설화.

 

1)

어수정(御水井)

조선의 태조 李成桂(이성계)가 아들 태종에 대한 분노와 불쾌감을 가슴 가득히 품고 왕좌에서 물러나 함흥 이궁으로 향하던 도중 동두천을 지날 때 잠시 어가를 멈추고 갈증을 풀기 위해 길가 우물에서 냉수를 떠오게 하였다. 시종이 떠다 바친 시원한 샘물을 마시고 난 태조는 그 시원한 물맛에 만감에 사로잡혔던 울적한 기분이 얼마간 후련해졌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임금님에게 냉수를 진상하게 된 벽촌 백성에게는 그 일이 크나큰 영광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우물을 어수정(御水井)이라 하였고 그것이 곧 마을 이름이 되었다 한다.

 

2)

글자 점

이성계가 등극하기 전  점집에 가서 글자 점을 치는데 차래를 기다리다 보니 앞에 점을 치는 어떤 사람이 問(문)자를 짚자 점쟁이는
「門(문)에 입(口자)을 대는 격이니 당신은 일생 남에 가서 집에 얻어먹을 신세입니다.」라고 했다.

이성계는 자기 차례가 되자 자기도 물을 ’ 문(問) ‘ 자를 짚고 점을 치니 점쟁이는
「좌로도 임금 ’ 군(君) ‘ , 우로도 임금 ’ 군(君) ‘ 이니 틀림없이 군왕이 되겠다.」고 하였다.

 

3)

선친의 묏자리

이태조가 등극하기 전에 함흥에서 친상을 당하였으나 좋은 지관을 만나지 못하여 아직 산지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 종아이가 나무를 하러 산으로 갔다가 길에 앉아 쉬던 스님과 상좌를 만났는데, 그 중 스님이
“ 저기 아래 것은 장상(將相)이 날 자리에 불과하나 위의 것은 당세에 왕후(王侯)가 날 자리 ” 라 하는 말을 엿들었다.

종아이가 빨리 달려가 태조에게 고하니, 태조는 즉시 말을 달려 10여 리를 쫓아갔다.
이윽고 두 사람을 만난 태조는 말에서 내려 공손히 절하고 자신의 집으로 가기를 요청하였다. 처음에는 사양하던 두 사람도 태조의 거듭된 간청에는 어쩔 수 없어 마침내 동행을 허락하고야 말았다.

그리하여 두 사람을 자신의 집으로 모신 태조는 정성을 다하여 융숭히 대접한 뒤 친상을 당한 자신의 처지를 말하고 산지를 보아 줄 것을 청원하였다. 스님은
“ 구름같이 떠돌아다니는 중이 무슨 산술(山術)을 알겠습니까? ” 하고 거절하였으나, 상좌가
“ 남의 성의를 차마 저버릴 수 없으니, 저번 그 자리를 가리켜 주면 좋겠습니다. ” 고 권유하여, 결국 스님도 왕후의 혈을 일러 주고 가 버렸다.

그곳이 환조(桓祖)의 능침인 정화릉 터였으며, 스님은 나옹(懶翁), 상좌는 무학(無學)이었다고 한다.

 

4)

  새 도읍지를 정하다.

무학은 왕사가 되어 처음 양주 회암사에 있었으나 늙었다는 핑계를 대고 용문산으로 옮겨 조용히 도를 닦고 있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고려 유신들 이 모두 두문동에 들어가 나오지 않는가 하면 먼 시골로 낙향하여 불사이군(不事二君)을 고집하는 바람에 고려의 수도 개성에 정이 떨어져 한양천도를 결심하였다. 그런데 한양보다 계룡산 밑이 더 좋다는 의견이 있어 이성계는 먼저 계룡산에 가보기로 했는데 무학을 데리고 갔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서로 만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인연 아니겠습니까. 도사께서는 보통 사람의 눈과 다르니 과연 계룡산 신도안이 수도로 정할 만한 곳입니까? 말씀해 주십시오』

이성계는 무학을 천하제일의 도사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항상 최종결정은 무학의 의견에 따랐다. 무학은 계룡산을 반대했다. 무학의 라이벌인 정도전도 반대했다. 그래서 공사를 중단하게 되고 이름만 신도안(新都安)으로 남게 되었다. 그 다음 후보지가 한양, 즉 지금의 서울이었다.

서울을 새 수도로 정하는데 있어서도 태조 이성계는 무학대사의 의견을 물었다. 이번에는 무학의 대답이 모호했다. 왕이 왕사 무학에게 『이 곳 한양이 어떻습니까?』라고 물으니 왕사는 『이 곳은 사방이 높고 아름다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중앙이 평탄해서 도성으로 알맞은 곳입니다. 그러하오나 대신들과 지관(地官)들의 의견을 묻고 따르는 것을 잊지 마소서』 라고 대답했다.

이 대화는 「태조실 록」에 기록된 것이다. 무학이 말끝을 흐린 데는 이유가 있었다.
무학은 한양 정도(定都) 문제를 놓고 정도전과 날카롭게 대립했었다. 무학은 정도전과 달리 무악산(毋岳山) 밑 지금의 신촌에 궁궐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도전은 한사코 무학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고 북한산 아래에 남향으로 경복궁을 지어야 한다고 우겼다.
이성계는 당황했다. 자기 눈에도 신촌은 왕도로 적절하지 않았다. 땅이 좁은 것은 고사하고 산이 동쪽에 기울어있어 궁궐을 서향으로 짓게 되니 그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이성계는 정도전의 주장에 기울게 되었고 무학의 동의를 구했던 것이다.
무학은 항상 자기 의견을 먼저 내비치지 않았다고 한다. 왕이 물으면 『잘 모르겠습니다.』로 일관했고 재삼재사 물을 때 비로소 대답하되 『대 신들의 의견을 참작하소서.』라는 단서를 붙였다 한다.


어쨌든 한양 천도문제에서 정도전이 무학에게 이긴 것 같으나, 곧 태종 방원에게 죽는 것을 보면 긴 안목으로 보아 무학이 이긴 것이다. ]

정도전은 광화문에서 태종에게 칼 맞아 죽는데 너무 살이 쪄서 칼이 배에 꽃일 때 물통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고 한다.
무학이 주장했던 무악산고개는 그 뒤 무학재(일명 무악재)로 바뀌어 두고  두고 무학이란 이름이 살아 남았다.

 

5)

우투리설화

가난하게 사는 집안에 지리산 산신이 점지한 귀한 아기가 억새로 탯줄을 자르고 태어났다.
아기는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려서 천장으로 날아오르는 등 비범한 능력을 보여서, 이름을 우투리라고 불렀다. 우투리는 콩 · 팥 등의 곡식을 가지고 바위 속에 들어가 새 나라를 세우고자 수련을 하였다.

이때 이성계가 왕이 되기 위하여 산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려고 팔도를 돌아다녔다. 한 소금장수가 이성계가 지낸 제사가 부정하다 하여 산신들이 받지 않았다는 나무들의 대화를 듣고 이성계에게 이를 알려 제사를 다시 지내게 하였다.
다른 산신들은 이성계가 왕이 되는 것을 찬성하였는데, 지리산 산신은 우투리가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이성계가 왕이 되는 것을 반대 하였다.
이를 알게 된 이성계는 우투리 어머니를 찾아가 거짓으로 혼인을 하였다.

우투리 어머니는 남편이 된 이성계가 끈질기게 우투리의 종적을 캐물으므로 그를 믿고 있는 곳을 일러 주었다.
이성계는 이제 때가 되어 용마를 타고 막 거의(擧義;의병을 일으킴.)하려는 우투리와 그의 군사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그 뒤 왕이 된 이성계는 지리산 산신을 자기를 도와주지 않았다고 전라도로 귀양 보냈다.
                                                                                                 <출전: 미족문화대백과사전>

 

6)

金尺(금척)

이성계가 등극하기 전 어느 날 꿈을 꾸니 꿈에 백발에 흰 수염을 한 神人(신인)이 하늘에서 내려와

“ 그대의 자질은 문무를 겸비했으며 덕망과 식견이 있어 백성이 촉망한 지 오래되었으니 이 자를 가지고 나라와 백성들을 잘 다스리라. ” 하며 金尺(금척)을 하나 주었는데 이성계는 절하고 받으니 꿈이었다고 한다.

잠에서 깬 이성계는 이는 필시 하늘에 자기에게 나라의 대권을 막기는 암시라고 생각하고 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한다.

 

7)

 이성계를 도운 僧軍長(승군장)

위화도 회군 때 또 한 사람의 스님이 이성계의 두뇌가 되어 전략을 세워 주었다. 신조(神照)가 그 사람이다.
신조는 이성계 부대의 주축인 승군(僧軍)을 지휘하고 있었다.

이처럼 이성계가 왕조교체에 성공한 배후에는 불교세력의 공이 컸다.
무학만 하더라도 이성계에게 반드시 군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해 주어 그에게 무한한 용기를 갖게 해 주었고 또 신조는 실제로 승군을 이끌고 이성계의 손발이 되었다.

그러나 집권한 뒤 이성계의 후손들은 유교세력과 손을 잡고 억불(抑佛)정책을 썼다.
정치의 속성이 비정한 것이라 하지만 그때 불교와 유교를 모 두 다독거려주었더라면 조선왕조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8)

 무학과 이성계와의 만남

무학은 태조 원년(1392) 10월11일 왕사로 임명되었다. 바로 태조의 생일날이었다.
태조는 무학을 왕사로 임명하면서 묘엄존자(妙嚴尊者)라는 법호를 하사 했다. 고려의 국사 되기를 한사코 거절하고 태조 이성계의 왕사가 되기까지 무학과 태조 사이에는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인연이 있었다.

일설에 이성계가 스무살 때 아버지 환조가 죽었는데 묏자리를 찾고 있었다.

그때 마침 중 두 사람이 함흥 땅을 지나가게 되는데 뛰어난 산세를 보고 스승이 먼저 제자에게 묻기를
『이 곳에 왕이 날 흥왕지지(興王之地)가 있다고 하는데 너도 아느냐』 하니 제자가 대답하기를
『산이 세 줄기 로 갈라져 내려오고 있는데 아마도 가운데 줄기에 명당자리가 있나 봅니다.』 하였다. 이에 스승이 제자의 의견을 고쳐주면서
『아니다. 사람을 보면 왼손보다 오른손이 더 긴요하듯이 저 산도 오른 쪽 긴 줄기에 명당자리가 있는 것이다』 고 하였다.

이 대화를 이성계 집 종이 옆에서 듣고 있다가 급히 집에 가서 주인에게 사실을 알렸다.
그랬더니 이성계가 하인에게 『무엇을 꾸물대고 있느냐 빨리 따라가서 두 분을 모셔오라』 하였다. 종은 함관령 밑 까지 따라가서 두 스님을 모셔와 환조의 장지를 택하게 되는데 바로 이 두 스님 중 스승이 나옹이요, 제자가 무학이었다는 것이다.

 

9)

이성계의 꿈을 해몽한 무학

이성계의 꿈을 해몽한 무학대사

무학 대사가 설봉산 아래 토굴에 살고 있었는데 태조가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이다. 이성계장군은 아주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에 1만 마리는 됨직한 닭이 일시 에 『꼬끼오』하고 우는가 하면 1천여호나 되는 큰 동네에서 한꺼번에 방아찧는 소리가 쿵하고 요란했다.
더욱 이상한 것은 이성계가 다 쓰러져 가는 집에 들어가서 서까래 세 개를 지고 나왔는데 꽃잎이 우수수 떨어지고 거울이 땅에 떨어졌다는 것이다.

꿈이 하도 이상해서 이성계는 먼저 이웃 마을 점쟁이 노파를 찾아갔다.
노파는
『여인의 소견으로는 도저히 해몽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멀지 않는 곳에 설봉산이 있고, 거기 토굴에 9년간이나 도를 닦고 있는 신승(神僧)이 있습니다. 가서 해몽을 부탁해 보시지요.』했다.

이성계는 노파가 가르쳐 주는 대로 설봉 산 토굴에 찾아갔다. 그 신승은 바로 무학이었다.
무학은
『당신이 찾아올 줄 알았다』고 하면서 해몽을 시작했다.

『그 꿈은 매우 희귀한 꿈입니다. 1만여 집에서 일시에 닭이 울고 1천여 집에서 방아 소리가 난 것 은 높고 귀하게 된 것을 축하한다는 뜻이고, 헌집에 들어가서 서까래 셋을 지고 나온 것은 임금 왕(王)자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꽃이 떨어지면 열매를 맺는다는 뜻이요, 거울이 땅에 떨어지면 소리가 난다는 뜻이니 모두가 왕이 되라고 독촉하는 길몽입니다』 무학은 이성계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군왕이 될 상을 가졌습니다. 오늘 이 일을 남에게 말하지 마시오. 목숨이 위태할 것 이니 극비에 부치십시오. 큰일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반드시 성인(聖人)의 도움을 받아야 될 것 이니 이곳에 절을 짓고 이름을 석왕사(釋王寺)라 하고 천일기도를 드리도록 하시오. 그러면 반드시 당신 이 왕업을 일으킬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서산대사(西山大師)가 지었다는 설 봉산 석왕사기(雪峰山 釋王寺記)에 기록된 것이다.
이성계는 설봉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안변(安邊)에 살고 있었고 무학이 하라는 대로 절을 짓고 남몰래 천일기도를 드리며 왕이 될 야망을 불태웠다.

 

10)

할을 잘 쏘는 아이

이성계는 어릴 때부터 활을 아주 잘 쏘았다.
「아니, 아이가 어른 활을 가지고 쏘잖아?」  사람들은 이성계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성계는 형 원계, 천계와 함께 말달리기와 활쏘기를 겨루는 대회에도 참가해서 항상 최고상을 차지했다.
이성계는활을 너무나 잘쏴 못마추는 것이 없으로 神弓(신궁)이라는 말을 들었다.

 

 

11)

무학대사에게 궁궐 공사를 맡긴 이성계

이태조가 서울을 옮기기 위하여 무학에게 도읍 터를 구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무학이 한양 땅을 도읍 터로 정한 뒤 대궐을 지으려고 여러 번 시도하였으나  대권을 지으려고 세운 기둥이 무슨 까닭인지 번번이 허물어지고 말았다.

상심한 무학이 한강 가 어느 곳을 지나는데, 어떤 노인이 논을 갈면서 소를 나무라기를,
“ 이랴, 이 무학이보다 미련한 놈의 소! ” 라고 하였다. 놀란 무학이 노인에게 까닭을 물었더니,
“ 한양 땅이 학(鶴)터인데 등에 무거운 짐을 실었으니 학이 날개를 칠 것 아니냐. 그러니까 학이 날개질 할 때 맏 궁궐이 무너지는 것이 아닌가.
성부터 쌓으면 학의 날개가 눌려져 꼼짝 못하므로 대궐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외 무학은 모를까. ” 라고 하였다.
무학이 그 말을 듣고 먼서 사대문과 성을 머저 쌓고 집을 지으니 아무 탈 없이 공사가 잘 진행되어 대궐이 완공되었다.

그 뒤 무학이 그 노인을 찾으려고 밭에 가 봐도 다시는 그런 노인을 만날 수가 없었다.
그 노인은 삼각산 산신령이었다고도 한다.

 

 

12)

무학대사와의 농담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는 오랜 친구로 한 사람은 새 왕조의 창시자로, 다른 사람은 고문으로 조선 건국의 기틀을 다지는 데 협력한 사이다.
하루는 수창궁에서 같이 산책을 하다가 태조가 무학에게 누가 더 농담을 잘하는지 내기를 하자고 제의했다.

태조가 먼저 농을 걸었다.
˝내가 보기에 스님은 돼지 같소.˝
˝소승이 보기에 전하는 부처님 같습니다.˝
태조는 같이 농담을 하기로 해 놓고 무학이 하지 않자 의아해서 물었다.
˝그게 무슨 농담이오?˝
˝그것도 농담입니다.˝
˝돼지의 눈에는 모두 돼지로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모두가 부처님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두 사람은 껄껄 웃고 즐겁게 회포를 풀었다.

 

李衡祥(이형상)  선생의 일화

사당과 절을 폐한 목사

안덕면의 광정당은 신령이 세기로 유명한 곳이어서 누구나 앞을 지날 때는 말에서 내려 절을 해야만 하였다. 하루는 제주목사 이형상이 이곳을 지나면서 하마(下馬)하라는 부하의 권유를 듣지 않고 그대로 지나쳤다.

그러자 목사가 탄 말의 발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이에 당을 관장하는 무당을 불러 굿을 시작하니 커다란 이무기가 나타났으므로 군졸을 시켜 이무기를 베어 버렸다. 관아에 돌아간 목사는 그 길로 제주도의 사당 500채와 절 500채를 폐하고 무당을 관노로 삼아 중과 무당으로 인한 폐해를 근절시켰다 한다.

1653(효종 4) ∼ 1733(영조 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중옥(仲玉), 호는 병와(甁窩) · 순옹(順翁).
                                                                        <출전: 민족문화대백과사전>

 

 

李書九(이서구)  선생의 일화.

 

 

  歸家修己(귀가수기)
벼슬자리를 내놓고 隱退(은퇴)한 李書九(이서구)가 故鄕(고향)에서 餘生(여생)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허름한 옷차림으로 개울가에서 消日(소일)하고 있는데 한 젊은 선비가 다가왔다.

잘 차려입은 옷하며 생김새가 행세깨나 하는 집안 자제 같았다. 젊은 선비는 개울을 건너려고 周邊(주변)을 살폈지만 건널만한 다리가 없자 낭패스러워 하고 있었다. 신발과 버선을 벗을 생각은 하지 않고 가까이에 있는 이서구에게 말을 건넸다.
“여보시오 노인장, 나를 저 건너편까지 업어 건네줄 수 있겠소?” 같잖고 괘씸했지만 이서구는 짐짓 불쾌한 표정을 감추고
“그럽시다. 선비님” 하면서 젊은 선비를 등에 업었다.

개울을 반쯤인가 건넜을 때 노인장의 머리에 꽂힌 玉貫子(옥관자)를 본 젊은 선비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옥관자란 正三品(정삼품) 堂上官(당상관)이상이어야만 着用(착용)가능한 게 아니던가.
이서구가 누구인가. 朴齊家(박제가) 李德懋(이덕무) 柳得恭(유득공)과 더불어 漢學四家(한학사가)의 한사람으로 일컬어질 만큼 朝鮮朝(조선조) 한문학의 대가이자 벼슬도 右議政(우의정)까지 지낸 인물이었다.. 개울을 다 건넌 젊은 선비가 땅바닥에 넙죽 엎드려 謝罪(사죄)하자 이서구는 다음과 같은 글귀를 써주었다.

吾看世(오간세)시옷
是非在(시비재)미음
歸家修(귀가수)리을
不然點(불연점)디귿. 한참 들여다보던 젊은 선비는 무릎을 쳤다. 시옷은 사람 인(人), 미음은 입구(口), 리을은 몸기(己), 디귿(ㄷ)에 점을 찍으면 망할 망(亡)자가 된다. 그러니

吾看世人하니
是非在口라.
歸家修己하라.
不然이면 亡하리라로 읽힌다.

내가 세상 사람들을 보니
시비가 입에 있구나.
집으로 돌아가서 자신을 닦아라.
그렇지 않으면 망하리라.

물론 장난 글이다. 김삿갓도 비슷한 글귀를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젊은 선비는 그 글을 보고 자기를 용서 해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백배 사죄하며 종종 걸음으로 도망갔다고 한다.
                                                                            <출전: 김담구 전 문화일보 논설위원>

 

2

견두산(犬頭山)의 소란

 

관광 남원에서 구례 화엄사까지 20분 거리로 단축시키는 고속화 작업이 계획 중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견두산(犬頭山) 터널을 뚫기로 예정선이 되어 있다. 이 산은 지이산(智異山)의 한 줄기로서 높이 790m이며 수지면 호곡리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고평리(考坪里)와 유암리(柳岩里)에는 남원시 천거동(川渠洞) 구시장에 안치되어 있는 것과 같은 호석(虎石), 호랑이 모양의 조각돌이 견두산을 향하여 지켜보고 있다. 옛날에는 이산을 호두산(虎頭山)이라 불렀는데 그때에는 들개(野犬)(들이 이 산에 수십 수 백 마리가 떼 지어 살고 있었다고 한다. 들개는 어쩌다 한 마리가 짖으면 수백 마리의 개가 따라 짖게 되니 이럴 때면 산이 울리고 땅이 뒤집혀 질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와 같은 들개들이 한바탕 짖고 나면 반드시 큰 화재가 있거나 호랑이에 사람이 물려가는 등, 괴변이 생기기로 마련이었다.

 

그래서 고을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들개들의 소란을 없애고 호환이나 화재 등 재앙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여러 해를 두고 연구하고 궁리하여 보았으나 별 뾰족한 해결책이 없었다.

 

그리다가 영조(英祖 )때 이서구(李書九)관찰사가 부임하였다. 이서구 관찰사는 이 해괴한 사실을 자세히 조사하더니 쥐는 고양이라야 잡을 수 있듯이 개는 호랑이라야 잡는 것이니 솜씨 있는 석수를 시켜 돌로 큰 호랑이를 깎아 세우면 재앙이 없어 질 것이니라.”하고 그날로 호랑이를 돌로 새기는 일이 시작 되었다.

 

이윽고 돌호랑이가 완성되니 이것을 남원시 복판에 안치하되 견두산을 바라보도록 자리를 잡았다. 이런 시설을 하였더니 과연 이후로 견두산의 개도 온데간데없어지고 호환이나 화재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후 어느 때인가 구시장 거리에 안치한 호석을 광한루로 옮겼더니 이상하게도 또다시 호환과 화재가 잦아, 사람들의 여론에 따라 다시 먼저의 자리로 호석을 옮겼더니 그 호로 재앙이 근절되었는데, 이런 일이 있은 후로는 호석을 더욱 소중히 보호하게 되었다.

 

호석을 안치한 부근을 호석거리라 하여 지금도 이와 같이 부르고 있다. 또 전설에 의하면 40년 전만 하드라도 견두산 당마당 굴속에 임진왜란 때 어느 장군이 썼다는 돌로 만든 투구가 있었다 하고, 그 옆의 샘에 는 금 바가지가 있어 목마른 사람이 이 금 바가지로 물을 떠 마시면 3일간이나 물을 안 마셔도 견뎌 냈다고 한다.

 

당마당 굴안의 암벽에는 높이 5m, 가로2m내외의 불상이 새겨져 있다. 이 불상은 영험이 있어 옛날에는 임신을 하지 못한 여자들이 찾아와 기도를 드려 아들을 낳은 사람이 많았고, 소원이 있어 이 불상에 여러 날 기도하였더니 뜻한 바를 이루게 된 일이 허다하여 각처의 기도드리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고 전한다.

 

 

 

李元翼(이원익) 선생의 일화

손녀사위 보기

이원익이 손녀사위를 구하려고 항상 젊은 사람들을 유심히 보고 다녔는데, 어느 날 퇴궐하던 중 길에서 초라한 선비를 보고는 하인을 시켜 집에 데려오게 했다. 그 총각은 許穆(허목)이라는 촌의 가난한 선비였지만 뛰어난 인재여서 이원익이 손녀사위로 삼았지만, 그 부인은 문벌 좋은 도령들을 두고 형편없는 시골 선비에게로 혼처를 정했다고 원망이 대단했다.

뿐만 아니라 許穆(허목)은 묻는 말에만 대답할 뿐 거의 말을 하지 않아 주변 어른들이 답답해하며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런 허목을 이원익은 항상 두둔했으며, 견문을 넓히도록 여행을 시켰다.

그는 두루 다니며 당대의 석학들과 학문을 논하고 친분을 맺고는 돌아왔고, 뒤에는 이원익의 기대대로 좌의정에 오르는 인물이 되어 그 이름을 만세에 빛내는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


李元翼(이원익) 1547(명종 2) ∼ 1634(인조 1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 한성부 출신. 태종의 아들 익녕군 치(益寧君 迅 )의 4세손.

 

 

李昰應(이하응) 선생의 일화.

        대원군의 탄식

興宣大院君(흥선대원군)은 아들을 왕위에 앉히고 정권을 잡기 이전 온갖 어려움과 멸시를 받으며 시정 가를 방황하였다.
그면서도 자기를 멸시하는 사람들을 행애 마음속으로는 늘
[어디 두고 보자. 반드시 내게도 볓들날이 있으리라.]하고 남이 보이보지 않는 비수를 갈고 있었다.

그때 늘 자신을 위로하면서 다음과 같은 노래로서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人無十日好(인무십일호) 이요
        花無十日紅(화무십일홍) 인데
        月滿卽虧(월만즉휴) 이니
        權不十年(권불십년) 이니라.
        <해>        10일 계속 좋은 일만 겪는 사람 없고 
                        10일 붉게 피는 꽃도 없도다.                
                         달도 차면 기우는 법이요 
                        10년 변함없는 권세도 없느니라.

人無十日好,花無十日紅은 중국 고전에 있는 내용을 인용한 것이고 뒷부분은 興宣이 즉흥적으로 읊은 것이라고 한다.항간에는 이 내용에서,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우나니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등등 많이 변형된 노래가 파생된 것으로 안다.


 

 

李國魯(이국로) 선생의 일화.

 

 

異蹟(이적)을 낳은 李國魯(이국로)의 효행: 義昌郡(의창군)

효자 李國魯(이국로)의 자는 順直(순직)이요, 호를 梨村(이촌)이라 하니 본관은 全州(전주)이다.
그는 타고난 효성으로 숫한 異蹟(이적)을 낳았으니 사람들은 그가 살던 鎭北面(진북면) 梨木里(이목리)를 「효자마을」이라 불러온다.

평소에 찰떡을 좋아하는 부친을 공양키 위해 그는 해마다 두마지기 논에 따로 찰벼를 심었었다. 어느 해 큰 가뭄이 들어서 벼논이 모두 타들어 가니 그는 밤마다 논둑에 서서 하늘을 우러러 통곡을 하였던 바 하루는 마른하늘에서 흔연히 비가 내려 두마지기의 찰벼 논에만 흔건이 빗물이 고였었다고 한다.

또 한번은 부친이 잉어가 먹고 싶다고 하여서 그는 멀리 宜寧(의령)까지 잉어를 구하러 갔으나 허행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岩津(암진) 나루에서 배를 탔더니 느닷없이 잉어 한 마리가 그의 뱃전으로 뛰어 올랐다고 한다.
親喪(친상)을 당하고는 십리밖에 墓(묘)를 쓰고 묘 곁에 움막을 지어 3년 동안 侍墓(시묘) 사리를 하는데 밤마다 호랑이가 찾아와서 지켜주니 사람들이 모두 그의 효성에 짐승까지 감동한 탓이라 하였다.

 

 

 

李도(이도: 세종대왕)

 

1

공부를 좋아해 왕이 된 세종대왕.

조선 역대 군주 중 공부를 좋아했던 임군으로 으뜸인 분이 세종대왕이라는 것이 잘 알려져 있다.
어떤 때는 몸이 아픈 데도 불구하고 책읽기를 멈추지 않고 밤을 새워 점점 더 병이 심해지기도 했다.
이를 본 아버지 태종이 탄식하기를,
「충녕이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은 참으로 기특한 천성이나 건강을 해치는 것은 참으로 않됬다.」고 말할 정도였다.

잘 알려져 있듯이 세종은 원래 태종의 셋째 아들 충녕대군이었다. 그런데 문무백관이 첫째 아들인 세자 제(양녕대군)가 덕을 잃었다는 이유로 하나 같이 폐위시키기를 천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태종은 이에 평소 마음속에 두고 있던 충녕을 세자로 거론하였다.
「충녕은 천성이 총명한데다 학문을 좋아하고 게을리 하지 않아 아무리 추운 겨울이나 무더운 여름이라 하더라도 밤새도록 글을 읽느라 손에서 책을 잃지 않으며 정치의 대체를 통달 하였으니, 나는 충녕을 세자로 삼고자 한다」하니
신하들이 모두 서둘러 하리하고 세자로 옹립하였다.

결국 공부를 좋아하는 천성이 장남을 재치고 태종의 셋째 아들이었던 세종을 왕위에 올려놓는데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2

옻나무 기름으로 붉을 밝히며 공부한 세종대왕.

세종대왕은 글 읽기를 좋아하여 밤을 새워가면 책을 열심이 읽엇다.
그런데 조명이 어두어 밤에 책을 보기란 여간 힘이 드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한 번은 세종이 경기 ·충청 ·경상 전라 강원 황해 ·함길도의 감사에게 명을 내려 옻나무의 열매를 이삭까지 달아서 통째로 서울로 올려 보내도록 지시한 적이 있었다.
이는 옻나무의 열매로 기름을 짜면 연기가 없고 다른 기름보다 불을 더 밝게 환히 밝히는데 아주 제격이었기 때문이었다.
새벽까지 책읽기를 개을리 하지 않았던 세종이 시력을 보호하기 위해서 생각해낸 것이라 한다.
이 일화도 세종이 공부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 수 있는 일화이다.
이밖에도 세종의 공부에 대한 열정을 엿볼 수 있는 일와는 수없이 많다.

 

3

책한 권을 1,100번 읽은 세종대왕

세종대왕은 등극하기 전 책일기를 너무 조하해서 『좌전』과 『초사』라는 책은 백 번을 넘게 읽었다.
그래서 책을 너무 좋아 하는 아들의 건강을 위해  태종이 내관을 시켜 세종이 잠시 건강을 회복 할 때 까지 책을 못 일게 하기 위해 읽던 모든 책을 압수해 올 것을 지시했다.
내관은 태종의 명을 받고 세종이 거처하는 전각에 있는 책을 한권도 남김 없이 다 거두어 갔다. 하지만 세종은 미리 책을 수거하러 오는 줄 눈치 채고 『歐蘇手簡(구소수간)』이라는 한 권의 책만은 병풍 사이에 몰래 감추어 두었다가 내관들이 간 뒤에 몰래 읽었다.

그 책은 중국 송나라 대문장가인 구양수와 소동파의 짧은 편지글을 뽑아 엮은 것인데 세종은 이 책을 세종은 천백 번이나 읽었다고 신하들에게 말한 적이 있다.

왕위 에 오른 뒤 에도 세종의 공부에 대한 열정은 멈추지 않았다. 날마다 경연(經筵)을 열어 자신의 학문에 깊이를 더하고 신하들에게도 공부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558,019 가구 2,379,53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李錫佑(이석우) 선생의 일화.

노름판의 기생

남원 골 어느 마을에는 「갓바위」라는 것이 있었다.
옛날에 우리나라의 유명한 풍수가이며 전라감사였던 이석우가 갓바위를 보며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지나간 적이 있다 한다.
그 이유는, 그 바위가 마을에 「천비(못된 기생)」를 나게 하는 것이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후에, 그 마을에서 실제로 요사스러운 기생이 한명 나왔다 한다.
그 기생은 노름판에서 노름을 할 때 옷을 풀어 헤치고 과다노출을 하며 노름을 했기 때문에, 함께 노름하던 남자들이 그것을 훔쳐보노라 정신이 팔려 그만 노름에 저서  가산을 탕진하여, 결국 기생은 3백석의 재산을 모으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마을에서는 이 바위를 소위 「비천석」이라 하며 천시하게 되었다한다.

 

 

李安社(이안사) 선새의 일화.

 

이안사를 살려준 호랑이

 

이안사 穆祖(목조)가 어릴 때 하루는 아이들을 이끌고 屛風里(병풍리) 좁은목에 놀러나갔다가 갑자기 폭우를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근처 바위굴속에 들어가서 비를 피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호랑 한마리가 입구에 나타나서 으르렁거리며 금방 덤벼들 기세였다. 기겁을 하고 벌벌 떨며 어쩔 줄 모르는 아이들에게 목조는 침착하게 말했다.

 

너희들 걱정하지 마라. 호랑이란 놈은 결코 한꺼번에 여러 사람을 물지는 않는다. 한사람밖에는 물어가지 못해. 그러니 누구든 윗도리 옷을 벗어던져봐서 만약에 호랑이가 받아 무는 아이가 모두를 대신해서 물려가기로 하자 ‥‥ 」

이 말을 들은 여러 아이들은 더욱 겁을 집어먹고 말했다.

그럼 우리들 중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네가 먼저 옷을 벗어 던져봐.

족아 내가 먼저 던지겠다. 내 옷을 받아 물면 내가 몸을 던져 너희들을 구해야겠다.

목조는 비상한 결심을 하고 윗도리를 벗어 호랑이에게 던졌다.

호랑이는 덥석 받아 물고 사납게 으르렁 거렸다. 여러 아이들은 목조를 붙들어 밖으로 밀어냈다.

목조는 눈을 딱 감고 쏜살같이 굴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러자 천둥이 치면서 천지가 무너져 내리는 듯 와그르르 바윗돌이 굴러 내렸다. 호랑이는 어리로 갔는지 눈에 보이지 않고 뒤를 돌아보았더니 완전히 굴이 내려앉아 입구가 막혀버렸다.

안에 있던 아이들은 모두 갈려죽고 말았다.

호랑이가 이안사를 살리러 온 것이다.

 

 

李凌(이산)과 남태령.

 

李凌(이산)正祖(정조)의 이름이다.

正祖(정조)水原(수원)으로 陵幸(능행)을 하던 중 여우고개라 불리는 데에 이르러 그 곳에 사는 촌로(村老)에게 고개의 이름을 묻자 노인은 임금에게 남태령 이라 거짓 이름을 대었다. 그런데 그 고개 이름을 알고 있던 정조가 노해 거짓으로 이름을 댄 까닭을 추궁하자, ‘ 여우고개 라는 이름이 너무 상스러워 감히 아뢸 수 없어 서울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중 맨 처음 있는 큰 고개라는 뜻으로 그렇게 답했다고 하였다.

그러자 정조가 촌로를 오히려 가상히 여겨 周知(주지)는 벼슬을 주었고 이후로는 그 고개 이름을 남태령이라 부르게 되었다.

 

李甦(이융)과 관악산 왕후묘.

李甦(이융)燕山君(연산군)의 이름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燕山君(연산군)이 관악산에서 사냥을 하다가 빨래하던 처녀를 발견하고는 탐해 그녀의 집에서 강제로 잠자리를 같이 했다.

하지만 처녀에게는 이미 정혼한 남자가 있었는데 왕에게 당하게 되니 약한 백성으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그러나 할 수 없이 상처를 안은 채 이들은 혼인을 했는데, 연산군은 관악산에 사냥을 올 때면 올 때 마다 그녀를 찾아 잠자리를 같이 하고는 환궁하곤 하였다.

그녀는 결국 남편에 대한 죄책감에 자결을 했고, 남편은 아내의 시체를 큰 돌 밑에 묻고는 자취를 감췄다. 그 뒤 연산군이 다시 그녀의 집에 들렀을 때 그녀가 자결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무덤을 파서 시체를 확인하려 하였다.

그러자 허공에서, 지아비에 대한 사죄로 세상을 하직했으니 더 이상 괴롭히지 말라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연산군은 놀라 무덤을 덮고 비석을 세워 단장하고는 왕후묘라고 이름 짓게 하였다고 한다.

 

 

仁祖(인조)胎峰山(태봉산)의 유래.

仁祖(인조)의 이름은 李倧(이종)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李适(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로 몽진한 仁祖(인조)가 피난지에서 왕자를 얻고 그 태를 계룡산에 묻었다. 그러나 계룡산이 邪惡(사악)한 땅이었기 때문에 태를 그곳에 묻은 이래 왕자의 건강이 좋지 않았다.

이에 그 ()을 없애기 위해 계룡산 老僧(노승)에게 무르니, 산신령의 계시에 따라 그 태를 무등산 아래의 태봉산으로 옮겨 묻으면 왕자의 건강이 좋아지고 아무 탈 없이 잘 자란다고 하였다. 왕은 사람을 시켜 계룡산에 묻었던 태를 다시 태봉산으로 옮겨 묻으니, 왕자는 암무 탈 없이 건강하게 잘 자랐다고 한다.

 

 

興宣大院君(흥선대원군)과 한 노인.

 

구한말 흥선대원군이 청나라 군사에 의하여 중국으로 압송당할 때 송산면 마산포로 향하고 있었는데 도중에 의관을 정제한 어떤 노인이 대원군 일행의 앞을 가로 막으며 만백성을 두고 홀로 떠나시면 이 나라는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 하면서 통곡하였다. 대원군도 같이 눈물을 흘리며 훗날을 기약하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문제가 해결되어 還國(환국)한 흥선대원군이 그 노인을 찾았으나, 그때 그 노인은 이미 죽었으므로 대원군은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忠節碑(절비를) 세우게 되었다.

                                   <출전: 민족문화대백과사전>

 

 

首陽大君(수양대군)의 일화.

 

조의 이름은 , 자는 수지었다.

그는 1417세종의 둘째 아들로 태이나 조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했으나, 재위 기간에 엽적을 남기기도 했다. 세조는 얼굴이 괴기하고, 쏘기와 타기에 뛰어났다. 성격은 매우 공손하고 검소한편이었다.

 

그가 보위에 오른 어느 신하들이 내전에 들어가 보았다. 세 조는 이때 감색 무명 호구를 입고 푸른 짚신을 신고 나무 갓끈에 대나무 지팡이를 들고 풀을 거닐고 있었다.

그 누구도 흉내 내지 할 차렵이었다.

 

세조가 대군으로 있을 때였다.

그의 나이 14세 때 기방에 출입했다. 어느 밤 기생과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기생의 기둥서방이 갑자기 들이닥쳤다. 수양대군은 그 순간 발로 방벽을 힘껏 차서 무너뜨리고 높은 담을 뛰어넘었다.

 

기생의 기둥서 빙도 만만찮았다. 그는 담을 뛰어넘어 곧장 쫓아왔다.

이놈, 섰거라! 남의 계집을 훔친놈을 그냥두지 않겠다!”

수양은 신분이 밝혀지면 망신을 당테고, 조정에서 대군의 실을 놓고 이러콩 저러콩 하는 일을 생각하면 정신이 아찔했다.

수양은 힘껏 달렸다.

이때 무엇이 앞을 가로막았다. 올려다 보니 성곽 이었다. 그는 정신 없이 성곽을 뛰어 념었다. 그리고 오리 쭘더 달려 뒤를 돌아보았다.

이놈, 섰거라!”

기둥서방은 수양을 끝까지 쫓아왔다. 수양은 길가의 버드나무를 발견했다. 그 나무는 고목이 되어 나무속이 비어 있었다. 수양 은 그 속으로 곧장 들어가 몸을 숨겼다.

 

기둥서방이 벼드나무 가까이 다가와 갑자기 사라진 수양을 찾다가 그냥 뒤돌아섰다.

 

세상에 나보다 더 빠른 놈도 있구나. 귀신같은 솜씨인걸.”

기두서방은 투덜거리며 가버렸다.

 

잠시 후 버드나무 곁에 있는 오두막에서 점잖게 보이는 사내가 나외 징검다리 옆에서 소변을 본 후 하늘의 별을 우러러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紫微星(자미성=임금에 비유되는 별일컬음)이 버드나무에 걸려 있다니, 침으로 묘한 일이로다.”

그 사내는 한참 동안 별을 관찰하고 버드나무 주위를 맴돌다가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내가 입금이 된다는 말인가? 괴이하다.’

 

수양이 집으로 돌아가 그 이튿날 알아보나, 그 사내는 관상감에 서 천문을 보는 관리였다.

수양이 왕위에 올라 그 사내를 찾았으나 죽은지 이미 오래였다.

                                                           <출전: 한국대표 야사 집 >

 

 

 

흥선대원군과 한 노인에 얽힌 이야기

 

구한말 흥선대원군이 청나라 군사에 의하여 중국으로 압송당할 때 송산면 마산포로 향하고 있었는데 도중에 의관을 정제한 어떤 노인이 대원군 일행의 앞을 가로 막으며

대원군이시여! 만백성을 두고 홀로 떠나시면 이 나라는 장차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하면서 통곡하였다. 대원군도 감회가 복바쳐 같이 눈물을 흘리며 훗날을 기약하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정치적인 문제가 다 해결되어 환국한 흥선대원군이 당시의 일이 생각나서 사람을 보내어 그 노인을 찾았으나, 그때 노인은 이미 죽었으므로 대원군은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그 곳에 충절비를 세우게 되었다.

<출전: 민족문화대백과사전>

 

 

李成桂(이성계)장군의 전설.

함경도 사람인 이씨가 그의 하인 주씨를 데리고 명당을 찾아 전국을 헤매다가 마침내 천자봉에 이르렀는데, 그 곳에서 굽어보니 갑자기 바다에서 반인반어(半人半魚)의 괴물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 이 아래 바다에 굴이 둘 있는데 오른편이 天子(천자)가 날 明堂(명당)이다. ” 라고 하고는 사라졌다.

하인 주씨는 이 말을 듣고 욕심이 나서 자기 선친의 유골을 오른편에 묻고 주인 이씨의 유골을 왼편에 묻었다.

이로 말미암아 후에 ()씨 가문에서는 명나라 태조가 나고 이씨 문중에서는 조선의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났다고 한다.

<출전: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성계의 등장과 그의 활약상

 

(조선왕조실록에 있는 글 인용)

 

이성계의 집안은 고조부 이안사가 여진의 남경(당시 원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지금의 간도지역)에 들어가 원의 지방관이 된 뒤부터 차차 그 지역에서 기반을 닦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증손자 춘은 원이 고려 출신의 이주민들에 대해 차별 정책을 실시하자 점차 원에 대해 회의를 품기 시작하고 원에서 등을 돌려 고려를 돕기로 결심하게 된다.해서 이자춘은 아들 성계와 함께 고려가 실로 99년 만에 옛 땅을 회복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게 된다. 훗날 이자춘은 동북면의 안정을 위해 최선을 다하다가 4년 후인 1360년에 병사하고 그의 차남 이성계가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게 된다.

이자춘의 아들 성계는 1335년 화령부(지금의 함경남도 영흥)에서 태어났다. 이자춘과 최한기의 딸 최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담대했으며 특히 궁술에 뛰어났다.

이성계가 성년이 될 무렵인 14세기 중반의 한반도는 문인보다는 무인이 대접을 받는 시기였으며 1360년 고려의 관리가 된 지 4년 만에 이자춘이 병으로 죽자 이성계는 사병을 육성하여 동북면 지역에서 자신의 세력을 키워나갔다.

 

그리고 이듬해 10월에 독로강의 만호인 박의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면서 공민왕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또한 같은 해에 홍건적이 고려를 침입하여 개경이 함락될 지경에 이르자 그는 사병 2천 명을 거느리고 수 도 탈환 작전에 참가해 가장 먼저 입성하는 성과를 올렸다. 1362년에 원의 나하추가 수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홍원 지방으로 쳐들어 오자 고려는 비로소 이성계에게 동북면병마사 벼슬을 제수하여 나하추 부대에 응전케 한다. 이로써 이성계는 27세의 나이에 문부를 겸비한 고려의 주목받는 관리로서 역사 전면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성계는 1356년 쌍성총관부 수복 전쟁을 시작으로 1388년 위화도 회군에 이르기까지 30여 년을 전쟁터에서 살다 시피 했지만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던 맹장이었다. 이성계는 승전할 때마다 위치가 올라갔으며 1362년 동북면병마사가 된 이후 같은 해에 밀직부사에 제수되고 1382년 에는 동북면도지휘사, 1384년에는 동북면 도원수문하찬성사가 되었으며 1388년에는 수상격인 문하시중 바로 아래인 수문하시중이 되었다.

 

 

 

 

李薰(이훈) 집안의 孝行(효행).

 

효자 집에서 효자 난다

 

李薰(이훈)의 아버지는 원수(元守), 할아버지는 ()이요, 증조할아버지는 세종 때의 수학자인 순지(純之)이다.

그들은 경기도 양주에서 살았는데, 아버지 원수를 극진히 성기고 받으러 모시던 할아버지인 공()이 돌아가자 무덤 지키기를 2년 극진히 하다가 병을 얻어 3년 무렵 지키기를 못하고 돌아가니, ()은 그의 아버지가 못다 한 할아버지 무덤 지키기를 1년 마치고, 다음 해에 아버지의 시신을 모시되 영주에서 문수로 와서 무념을 모시고 옆에 띠집을 짓고 지키기를 극진히 하였으며, 이어서 어머니기 돌아가자 다시3년 동안 무덤 지키기를 하였으니, 무덤 지키기를 6, 7 년 하였으며 그 동안 집에 간 일이 없었다고 한다.

 

문수로 온 까닭은 이 집안의 효행을 상주기 위하여 임금이 문수의 땅 사방 10 리를 하사하였는데, 문수라는 곳이 경남에도 있거늘 살기 좋은 선산의 문수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 집안은 어버이 가신 뉘 무덤을 지키는 일에 정성을 다할 뿐 아니라 어버이 사실 때 성기기를 더욱 정성 드렸으니, 아침 일찍 일어나서 어버이에게 문안드리고 음식을 극진이 대접하며 항상 어버이 마음을 편안하게 하며 어버이 앞에서는 성내지 아니하고 나들이 할 때는 반드시 알리고 허락을 받았고, 보고들은 일을 이야기했으며 잠자리가 펀하고 따뜻하고 서늘한지 밤마다 살피었다.

 

조상 제사 때는 온 가족이 목욕하고 손수 음식을 장만하여 정성으로 받들고 조상을 모신 사당에 아침저녁 참례하여 이웃과 자손이 본받게 하니, 임금이 그의 효성을 알고 나라에서 표창을 하여 더 많은 사람이 본받게 했다.

 

그를 거리어 지은 집이 효사정(孝思亭)이니, 여름이면 효사정 언저리에 백일홍이 온통 뒤덮어 피니 옛사람의 부모 그리는 정을 그 꽃이 우리의 가슴에 되새겨 주는 듯하다.

 

참고 문헌선산지.

 

 

 

 

 

출전 <한미녹대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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