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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이씨(李)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성주이씨)

 

 

본관(本貫): 성주(星州)

시조(始祖): 이순유(李純由)

유래(由來):

 

성주 이씨(星州李氏)의 시조(始祖)는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 56대 왕 재위기간 924 927) 때 재상(宰相)을 지낸 이순유(李純由)이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그는 아우 돈유(敦由)와 더불어 기울어져 가는 신라의 마지막을 지켜본 충신으로, 경순왕이 고려(高麗) 태조에게 손위(遜位)하자 마의태자(痲衣太子)와 함께 민심을 수습하고 천년(千年) 사직을 보존하기 위하여 구국(救國)의 방책을 기도하였으나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고려 태조(太祖) 왕 건(王 建)은 순유의 재주와 기량을 흠모하여 벼슬할 것을 권유했으나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고 하여 거절하고 이름까지도 극신(克臣)이라 고쳐 경산(京山: 지금의 성주면 경산동)으로 옮겨 살았다. 그 절의에 감복한 태조 왕건은 "나의 신하는 아니지만 나의 백성임에 틀림없다"하고는 향직(鄕職)의 우두머리인 호장(戶長)으로 삼았다. 그로부터 후손들은 그 지방에 살며 대대로 호족(豪族)을 이루었고, 순유의 12세손 장경(長庚)이 크게 현달(顯達)하여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다.

 

가문의 중요 인물

 

이장경(李長庚)

고려 고종(高宗: 23대 왕, 재위기간 1214 1260) 때 그의 어머니가 에 문창성(文昌星)이 경산(京山)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를 낳았는데, 장경은 장성함에 따라 도량과 재주가 뛰어나서 주위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 사모했다고 하며, 학문에 정통하여 존경하며 따르는 자가 많았다. 강양군(江陽君) 이 약(李 若)이 성주쉬(지금의 군수)로 부임하여 장경의 인품을 보고 자기 딸과 혼인시켜 살게 하였는데, 슬하에 다섯 아들을 두어, 이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나가 크게 명성을 떨쳤으므로 나라에서 삼중대광 좌시중 도첨의정승 지전리사사 상호군(三重大匡左侍中都僉議政丞知典理司事上護軍)에 추증하고, 경산부원군(京山府院君)에 추봉하였다.

 

이승경(李承慶)

승경(承慶: 천년의 둘째 아들)이 원()나라에 들어가 벼슬을 지내며 특별한 공적을 세웠으므로 황제가 특별히 농서군공으로 선칙(宣勅: 크게 향연을 베푼 후에 내리는 칙령)하여 봉하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장경을 중시조(中始祖)로 받들고 처음에 농서 이씨로 칭관(稱貫)하다가 지명이 개칭됨에 따라 성주(星州)를 관향(貫鄕)으로 삼게 되었다.

 

이백년(李百年)

장경(長庚)의 맏아들 백년(百年)이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에 급제하여 봉익대부(奉翊大夫)로 밀직사사(密直司事)를 역임했고, 문성공(文成公) 안 유(安 裕)와 더불어 맹자(孟子)의 도()를 강론하여 유교(儒敎)의 발전에 공헌했다.

 

이인기(李麟起)

백년의 아들 인기(麟起)는 평양부윤(平壤府尹)으로 많은 치적을 남기고 향리에 돌아와 아버지 백년의 뜻을 따라 유교발전을 위해 진력했다.

 

이숭인(李崇仁)

1347(충목왕 3) 1392(태조 1). 고려 말기의 학자이며 고려 삼은 ( 三隱 )의 한 사람. 자는 자안 ( 子安 ), 호는 도은(陶隱). 경산부(京山府:지금의 성주) 출신.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 숙옹부승(肅雍府丞)이 되고, 그 뒤 장흥고사 겸 진덕박사(長興庫使兼進德博士)가 되었다. 문사(文士)를 뽑아 명나라에 보낼 때 수석으로 뽑혔으나, 25세가 못 되었으므로 보내지 않았다.

예의산랑(禮儀散郎) · 예문응교(藝文應敎) · 문하사인 ( 門下舍人 )을 지내고, 우왕 때 전리총랑(典理摠郎)이 되어 김구용 ( 金九容 ) · 정도전 ( 鄭道傳 ) 등과 함께 북원(北元)의 사신을 돌려보낼 것을 청하다가 귀양을 가기도 하였다.

다시 돌아와서 성균사성이 되고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로 전임해 동료와 함께 소를 올려 국가의 시급한 대책을 논하였다. 그 뒤 밀직제학이 되어 정당문학 ( 政堂文學 ) 정몽주 ( 鄭夢周 )와 더불어 실록을 편수하고, 동지사사(同知司事)로 전임하였다.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가 되어서는 원나라 서울에 가서 신정(新正)을 축하하고 돌아와 예문관제학이 되었다. 창왕 때 박천상(朴天祥) · 하륜 ( 河崙 ) 등과 더불어 영흥군 환(永興君環)의 진위를 변론하다가 무고로 연좌되어 헌사(憲司)가 극형에 처하기를 청했으므로 피해 다니다가 시중 이성계 (李成桂)의 도움으로 다시 서연 ( 書筵 )에 시강하게 되었다.

그러나 간관 구성우(具成佑) · 오사충 ( 吳思忠 ) · 남재 ( 南在 ) · 심인봉(沈仁鳳) · 이당(李堂) 등이 상소, 탄핵해 경산부로 유배당하였다. 이 때 첨서밀직사사 권근 ( 權近 )이 그를 구출하기 위해 무죄를 상소했으나 간관이 도리어 권근의 상소가 거짓을 꾸민 것이라 상소하니 창왕은 그를 우봉현(牛峯縣)에 유배하였다.

공양왕 때 간관이 그를 다시 논죄해 타군에 옮겨 유배했고, 뒤에 청주옥(淸州獄)에 수감되었으나 수재로 말미암아 사면되었다.

얼마 뒤 소환되어 지밀직사사 · 동지춘추관사가 되었으나 정몽주의 당이라 하여 또 삭직당하고 멀리 유배되었다.

조선조의 개국에 이르러 자기와 함께 처세하지 않은 데 앙심을 품고 정도전이 보낸 심복 황거정 ( 黃居正 )에 의해 유배소에서 장살(杖殺)되었다.

그는 천자(天資)가 영예하고 문사(文辭)가 전아해, 이색 ( 李穡 )이 칭찬하기를 이 사람의 문장은 중국에서 구할지라도 많이 얻지 못할 것이다. ” 하였다.

또한 명나라 태조(太祖)도 일찍이 그가 찬한 표문 (表文)을 보고 이를 가상히 여겨 표의 문사가 참으로 절실하다. ” 고 했으며, 중국의 사대부들도 그 저술을 보고 탄복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저서로 도은시집 5권이 있다. 그 서문에 의하면, 그의 생존시에 관광집 觀光集 · 봉사록 奉使錄 · 도은재음고 陶隱齋吟藁 등을 지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고 있다.

 

이승경(李承慶)

?1360(공민왕 9). 고려 후기의 명신. 몽고 이름은 티무르부카(帖木兒不花). 정당문학 ( 政堂文學 ) 조년(兆年)의 조카이다. 원나라 조정에 들어가 어사가 되고, 결단있게 일을 한다 하여 요양성참정(遼陽省參政)에 이르렀다.

1357(공민왕 6)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귀국하였는데, 이듬해 원나라에서 요양성사(遼陽省事) 탑해첩목아(塔海帖木兒)를 보내 불러가려고 하였으나 가지 않았다. 이에 공민왕은 문하시랑평장사 ( 門下侍郎平章事 )로 임명하였다.

1359년 홍건적이 침범하자, 도원수로 나가 서경 ( 西京 )을 회복하였으나 부하 장수들이 홍건적을 힘껏 쳐부수지 않았음을 분하게 여겨 음식을 폐한 끝에 병을 얻고 집에 돌아와서는 만사를 돌보지 않았다. 공민왕은 여러 재상들과 더불어 그 충의를 칭찬하여 마지않았고 충근경절협모위원공신(忠勤勁節協謀威遠功臣)의 호를 내렸다.

 

이지활(李智活)

1434(세종 16) ? 조선 전기의 학자.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망기(忘紀), 호는 고은(孤隱). 아버지는 이조판서 · 대제학을 지낸 비( )이다. 성품이 단정, 총명하여 일찍이 학업에 뜻을 두어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문명으로 운봉현감무(雲峰縣監務)에 제수되었으나, 1455년 수양대군 ( 首陽大君 )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즉일로 벼슬을 사직하고 거창에 있는 박유산(朴儒山) 속으로 은거하였다.

산속에 망월정(望月亭)을 지어놓고 달이 뜨면 단종을 생각하며 북향재배하였다. 마침내 단종이 살해되자, 현세에 마음을 잃고 매일 술로써 날을 보내다가 산속에서 죽었다. 순조 때 고을선비들이 정려를 세우고 충신으로 떠받들었다.

 

이조년(李兆年)

1269(원종 10) 1343(충혜왕 복위 4).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원로(元老), 호는 매운당(梅雲堂) · 백화헌(百花軒). 농서군공( 娘 西郡公) 장경(長庚)의 아들이다. 1294(충렬왕 20) 향공진사(鄕貢進士)로 문과에 급제하여 안남서기(安南書記)에 보직되고, 예빈내급사(禮賓內給事)를 거쳐 지합주사(知陜州事) · 비서랑(秘書郎) 등을 지냈다.

1306년 비서승으로 왕을 호종하여 원나라에 갔을 때 왕유소(王惟紹) · 송방영 ( 宋邦英 ) 등이 충선왕을 모함하여 충렬왕 부자를 이간시키고 서흥후 전(瑞興侯琠)으로 하여금 충렬왕의 후계를 삼으려 획책하다가 충선왕의 세력이 커지자 처벌된 일이 있었다.

이 때 어느 파에도 가담하지 않고 최진(崔晉)과 단지 충렬왕을 보필하고 있었으나 그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그 뒤 귀양에서 풀려나와 13년간 고향에서 은거하면서 한번도 자신의 무죄를 호소하지 않았다.

당시 충숙왕은 5년간이나 원나라에 억류되어 있었기 때문에 심양왕 고(瀋陽王暠)가 왕위 찬탈을 도모하자 홀로 원나라에 들어가서 중서성 ( 中書省 )에 그 부당함을 상소하여 이러한 음모를 분쇄하였다. 1325(충숙왕 12) 왕이 귀국하자 감찰장령으로 발탁되고, 전리총랑(典理摠郎)으로 관동지방을 안무(按撫)하였다.

1327년 충숙왕이 원도(元都)에 있을 때 왕을 도운 공로로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로서 이등공신이 되었으며, 이어 군부판서(軍簿判書)에 승진하였다. 이 때 충숙왕은 심왕당(瀋王黨)의 끊임없는 모략으로 왕위를 심왕에게 선양(禪讓)하려 하였으나 한종유 ( 韓宗愈 ) 등과 함께 극력 반대하여 이를 저지시켰다.

1330년 충혜왕이 즉위하자 장령이 되었고, 그 뒤 여러 번 충혜왕을 따라 원나라에 내왕하였다. 1339년 충혜왕이 복위하자 그 이듬해 정당문학에 승진하였고, 예문관대제학이 되어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다.

충혜왕의 음탕함을 여러 번 간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이듬해에 사직하였다. 1342(충혜왕 복위 3) 성근익찬경절공신(誠勤翊贊勁節功臣)에 녹권되고 벽상(壁上)에 도형(圖形)되었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시조 1수가 전한다.

뜻이 확고하고 할 말은 하는 엄격한 성품 때문에 경외시되었으며, 역임한 관직에서 많은 명성과 공적이 있었다. 공민왕 때 성산후(星山侯)에 추증되고, 충혜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이포(李褒)

조년의 아들 포()는 광정대부(匡正大夫)로 도첨의평리(都僉議評理)를 역임했다.

 

이인복(李仁復)

1308(충렬왕 34) 1374(공민왕 23).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극례(克禮), 호는 초은(樵隱). 할아버지는 성산군(星山君) 조년(兆年)이고, 아버지는 검교시중(檢校侍中)을 지낸 포()이며, 권신 인임(仁任)의 형이다. 일찍이 백이정(白 蓬 正)에게서 수학해 성리학에 밝았다.

1326(충숙왕 13) 문과에 급제해 복주사록(福州司錄)이 되었다가 춘추공봉(春秋供奉)에 발탁되었다. 1342(충혜왕 복위 3) 기거사인 ( 起居舍人 )으로 원나라의 제과(制科)에 급제해 대령로금주판관(大寧路錦州判官)의 벼슬을 받고 돌아와 기거주 ( 起居注 )에 올랐다.

1344년 충목왕이 즉위하자 우부대언 ( 右副代言 )이 되었고 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승진한 뒤에는 서연 ( 書筵 )에서 진강하였다. 이어 삼사좌사(三司左使)가 되니 원나라에서 정동행성도사(征東行省都事)라는 벼슬을 주었다.

1352(공민왕 1) 조일신 ( 趙日新 )이 난을 일으키자 이를 토평하는 데 공을 세워 1354년 정당문학 겸 감찰대부(政堂文學兼監察大夫)에 올랐다. 이어 성산군에 봉해졌으며 원나라에서 정동성원외랑(征東省員外郎)이라는 벼슬도 받았다.

1356년 사은사로 원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고금록 古今錄 을 편수하였다. 1359년 수사공 상서좌복야 어사대부(守司空尙書左僕射御史大夫)에 올랐으며, 1362년 참지중서정사(參知中書政事) ·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이어 삼사우사(三司右使) · 서북면도찰군용사(西北面都察軍容使)를 역임했다.

1364년 찬성사에 올라 단성좌리공신(端誠佐理功臣)이 되고, 이 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공민왕이 복위된 것을 사례하고 돌아왔다. 이어 왕에게 신돈 ( 辛旽 )을 멀리할 것을 간했다가 한때 파직당하였다.

이듬해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에 진봉되었으며, 판삼사사(判三司事)를 거쳐 1371년 감춘추관사 ( 監春秋館事 )가 되어 이색 ( 李穡 )과 함께 금경록 金鏡錄 을 증수하였다. 1373년에 검교시중(檢校侍中)에 이르렀다.

성품이 강직해 옳은 일이라면 작은 일이라도 반드시 기뻐했고 옳지 못한 일을 보면 노기가 얼굴에 나타났으나 함부로 입 밖에 나타내지는 않았다 한다. 우왕 때 충정왕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초은집 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이직(李稷)

1362(공민왕 11)1431(세종 13).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우정(虞庭), 호는 형재(亨齋). 할아버지는 정당문학 ( 政堂文學 ) 조년(兆年)이며, 아버지는 문하평리 ( 門下評理 ) 인민(仁敏)이다.

1377(우왕 3) 16세로 문과에 급제해 경순부주부(慶順府注簿)에 보직되고, 그 뒤 사헌지평·성균사예·전교부령(典校副令종부영(宗簿令밀직사우부대언(密直司右副代言) 등을 거쳐 공양왕 때 예문제학을 지냈다. 1392년에 이성계 ( 李成桂 ) 추대에 참여해 지신사 ( 知申事 )로서 개국공신 3등이 되고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중추원도승지(中樞院都承旨중추원학사(中樞院學士)로서 사은사 ( 謝恩使 )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7(태조 6) 대사헌을 지내고, 1399(정종 1) 중추원사(中樞院使)로서 서북면도순문찰리사(西北面都巡問察理使)를 겸임해 왜구의 침입을 격퇴시켰다.

1400년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에 오르고, 이어 삼사좌사(三司左使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를 역임하였다. 이 해 제2차 왕자의 난 때 방원(芳遠 : 뒤의 태종)을 도와 1401(태종 1) 좌명공신 ( 佐命功臣 ) 4등이 되고, 사은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2년 대제학을 거쳐, 이듬해 판사평부사(判司評府事)로서 왕명으로 주자소 ( 鑄字所 )를 설치, 동활자인 계미자 ( 癸未字 )를 만들었다. 1405년 육조의 관제가 정해지자 처음으로 이조판서가 되었다. 1407년 동북면도순문찰리사·영흥부윤이 되고, 이어 찬성사로서 대사헌을 겸임하였다.

이듬해 다시 이조판서로 판의용순금사사(判義勇巡禁司事)를 겸임하고, 1410년 천릉도감제조(遷陵都監提調)로서 덕릉 ( 德陵 안릉 ( 安陵 ) 등을 함흥으로 옮겼다. 1412년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으로 진봉되고, 1414년 우의정에 승진되어, 진하사 ( 進賀使 )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황희 ( 黃喜 )와 함께 충녕대군(忠寧大君 : 뒤의 세종)의 세자책봉을 반대하다 성주에 안치되었다. 1422(세종 4) 풀려 나와 1424년 영의정에 오르고, 이 해 등극사 ( 登極使 )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26년 좌의정으로 전직했다가 이듬해 사직하였다. 성주의 안봉서원(安峰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형재시집이 남아 있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이제(李濟)

?1398(태조 7).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성주(星州). 성주호장 장경(長庚)의 고손(高孫)이자, 조년(兆年)의 증손이며, 아버지는 권신 인임(仁任)의 아우인 인립(仁立)이다. 음보(蔭補)로 벼슬길에 올라 1352(공민왕 1) 좌대언 ( 左代言 )이 되고, 이 해 밀직제학으로 연저수종공신(燕邸隨從功臣) 1등에 봉해졌다.

이성계 ( 李成桂 )의 셋째 딸 경순공주 ( 慶順公主 )와 결혼하였으며, 1392(공양왕 4) 전법판서(典法判書)로 있으면서 정몽주 ( 鄭夢周 )의 살해에 가담하고,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공신 1등에 책록되고, 흥안군 ( 興安君 )에 봉해졌다.

의흥친군위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를 거쳐, 1393(태조 2) 우군절제에 올랐다가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 ( 鄭道傳 )일파로 몰려 이방원 ( 李芳遠 )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세종 때에 신원(伸寃 : 원통함을 풀어버림)되어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후사가 없어서 조카 윤()으로 뒤를 이었다. 시호는 경무(景武)이다

 

이항(李恒)

1499(연산군 5)1576(선조 9).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항지(恒之), 호는 일재(一齋). 아버지는 의영고주부(義盈庫主簿)인 자영(自英)이며, 어머니는 전주최씨(全州崔氏)로 소경전참봉 인우(仁遇)의 딸이다. 박영 ( 朴英 )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30세가 되었을 때 백부로부터 깨우침을 받아 스스로 학문을 시작해 성현의 글을 섭렵하였다. 주희(朱熹)백록동강규 白鹿洞講規를 읽고는 더욱 분발해 도봉산 망월암 ( 望月庵 )에 들어가서 수년을 독학해 깨달은 바가 컸다.

그 뒤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태인으로 돌아가 스스로 농사지으면서 어머니를 봉양하고 위기(爲己)의 학문에 전념하였다. 당시의 학자 백인걸 ( 白仁傑 )은 이항의 학문이 조식(曺植)에게 비길만하다고 칭찬하였다.

당시의 대학자인 기대승 (奇大升김인후 ( 金麟厚 노수신 ( 盧守愼 )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의 질을 높였다.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어 이기(理氣)를 논함에 있어 이와 기, 태극과 음양을 일체라고 주장해 이황 ( 李滉 )의 비평을 받기도 하였다.

1566(명종 21) 명경행수(明經行修)하는 선비를 뽑을 때 첫 번째로 추천되어 사축승전(司畜承傳)에 임명되었다. 왕에게 진학(進學)과 치지(致知)하는 방법을 진언하여 칭찬을 받았다.

의영고령(義盈庫令)을 지내고 임천군수가 되었는데, 부임할 때 왕이 귀마개를 하사해 노고를 위로하였다. 15675월에 병으로 사퇴하고 돌아오니 왕이 의원을 보내어 문병을 하기도 하였다.

선조 초년에 의빈경력을 지내고 선공감부정·사옹원정을 역임하였다. 1574(선조 7) 사헌부장령을 거쳐 장악원정을 지냈으나 병이 악화되어 사퇴하고 돌아왔다.

그 뒤 5도의 찰방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못했고, 왕이 네 차례나 의원을 보내 치료하게 했으나 결국 완쾌되지 못하였다.

홍직필 ( 洪直弼 )은 그의 글에서 호남의 5()을 설명한 바 있는데 그 가운데 이항이 포함되어 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태인의 남고서원 ( 南皐書院 )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일재집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이집

태종(太宗)의 딸 숙혜옹주(淑惠翁主)와 혼인하여 성원위(星原尉)에 봉해졌던 정녕(正寧: 영의정 직의 손자)의 아들 집은 성종(成宗) 때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와 이조참의(吏曹參議부제학(副提學대사간(大司諫이조 판서(吏曹判書) 등을 역임하였으며, 지나치게 청렴하고 사청(私請)을 거절하여 송()나라 포증(包拯)이 법관으로서 사정(私情)이 없었기에 지옥의 염라대왕에 비유하여 붙여졌던 별칭인 <포염라(包閻羅)>로 불리웠다.

 

이광적(李光迪)

1628(인조 6)1717(숙종 4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성주(星州). 초명은 연(). 자는 휘고(輝古), 호는 은암(隱巖). 대사헌 언충(彦忠)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세미(世美)이다.

1650(효종 1) 생원·진사가 되고, 165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64(현종 5) 주서를 거쳐 전적·지평·정언·지제교 등을 역임하였고, 외직으로는 함경도사를 비롯하여 함평현감·강릉현감·영월군수·안변부사 등을 두루 거쳤다.

그는 수령으로서 많은 치적을 쌓아 임금으로부터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칠순에 가선대부 ( 嘉善大夫 )에 올랐으며, 1706(숙종 32) 공조참판으로서 임보(林溥)의 옥사를 소홀히 다룬 죄로 파직되었다.

이듬해 80세로 지중추부사가 되어 치사하였는데, 왕이 조화(造花)를 내려 조정이 모두 성사(盛事)로 칭송하였다. 시호는 정헌(靖憲)이다.

 

이충건(李忠楗)

? 1521(중종 1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자안 ( 子安 ), 호는 눌재(訥齋) · 목수(木 馬 ). 영의정 직()의 현손이며, 계령(繼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숙생(叔生)이고, 아버지는 승문원권지부정자 윤탁(允濯)이며, 어머니는 신회(申澮)의 딸이다. 조광조 ( 趙光祖 )의 문인이다.

1510(중종 5) 진사시에 합격한 뒤, 1515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16년 천문이습관(天文肄習官)을 지내고, 1518년 사간원정언 · 이조좌랑을 거쳐, 이듬해 사간원헌납 · 이조정랑이 되었으나 남곤 ( 南袞 ) · 심정 ( 沈貞 ) 등의 배척으로 기묘사화 때 파직되었다.

조광조의 장례 때 사람들이 감히 가지 못하였으나 이연경 ( 李延慶 ) · 성수종 ( 成守琮 ) 등과 함께 가서 통곡하였다. 1521(중종 16) 안처겸 ( 安處謙 )의 옥사에 연루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귀양가는 도중 청파역(靑坡驛)에서 죽었다.

 

이문건(李文楗)

1494(성종 25) 1547(명종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자발(子發), 호는 묵재(默齋) · 휴수(休 馬 ). 함령(咸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숙생(叔生)이고, 아버지는 승문원정자 윤탁(允濯)이며, 어머니는 신회(申澮)의 딸이다.

일찍이 중형 충건(忠楗)과 더불어 조광조 ( 趙光祖 )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고, 1513(중종 8) 중형과 함께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화를 입자, 문인들이 화를 염려해 조상하는 자가 없었으나 그의 형제는 상례 ( 喪禮 )를 다했다 한다.

이에 남곤 ( 南袞 ) · 심정 ( 沈貞 )의 미움을 받아 1521년 안처겸 ( 安處謙 )의 옥사에 연루되어 충건은 청파역(靑坡驛)에 정배되었다가 사사되고, 그는 낙안 ( 樂安 )에 유배되었다.

1527(중종 23) 사면되어 이듬해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정원주서에 발탁되었고, 이어서 승문원박사를 거쳐 정언 · 이조좌랑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때 전날의 혐의로 대간으로부터 서경 ( 署經 )이 거부되었으나, 김안로 ( 金安老 )의 협조로 관로는 순탄하였다.

1539년 장령을 역임하며 관기 확립에 힘썼고, 그 뒤 통례원우통례(通禮院右通禮)를 거쳐 승문원판교가 되어, 중종의 국상을 맞아 빈전도감(殯殿都監) 낭관으로서 대사를 무난히 처리하였다.

1546년 명종이 즉위하면서 윤원형 ( 尹元衡 ) 등에 의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족친 이휘(李輝)가 화를 입었고, 이에 연루되어 성주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성품이 근후했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23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면서 오로지 경사(經史)에 탐닉하고 시문에 힘쓰니, 뒤에 이황 ( 李滉 ) · 조식(曺植) · 성수침 ( 成守琛 ) · 이이(李珥) 등이 그의 시문을 즐겨 읊었다 한다. 괴산의 화암서원 ( 花巖書院 )에 제향되었다.

 

이자건(李自建)

1455(세조 1) 1524(중종 1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건지(健之). 판서 발()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감찰 유()이고, 아버지는 건공장군 ( 建功將軍 ) ()이며, 어머니는 부사 권이순(權以順)의 딸이다.

1480(성종 11) 생원이 되고, 1483(성종 14)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 · 박사 · 성균관전적 · 사헌부감찰을 거쳐 사간원정언 · 형조좌랑 · 사헌부지평 · 예조정랑을 지냈으며, 1495(연산군 1) 사헌부장령으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사헌부집의 · 군기시정 · 승문원판교를 역임하였다.

평소 무재(武才)가 있고 중국어에 능하여 항상 선전관과 승문원의 벼슬을 겸하였다. 1500년 동부승지, 1502년 좌승지 · 도승지, 이듬해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하고 대사헌에 이르렀다.

이때 연산군에게 대간 ( 臺諫 )을 시켜서 기생들의 가사 ( 歌詞 )를 지어 올리도록 하는 일은 성덕(聖德)에 누가 될 것입니다. ” 라고 하여 중지하도록 하였으므로, 집의 이계맹 ( 李繼孟 )()이 아니었다면 후세에 조롱을 면치 못하였을 것이다. ” 라고 하였고, 우상 이극균 ( 李克均 )당대의 풍헌(風憲)을 지킨 사람은 오직 이모(李某)뿐이다. ” 라고 하였다.

이어 갑자사화에 연루, 선산에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으로 대사헌에 복직되었다. 그 뒤 한성부좌윤 · 호조참판 · 황해도관찰사 · 형조참판 · 경기도관찰사 · 형조판서 · 좌우참찬 · 호조판서 · 한성부판윤을 거쳐, 공조판서 ·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공간(恭簡)이다.

 

이종일(李鐘一)

1858(철종 9)1925. 언론인·독립운동가. 본관은 성주(星州). 호는 묵암 ( 默菴 옥파(沃坡), 도호(道號)는 천연자(天然子). 충청남도 서산 출신. 교환(敎煥)의 맏아들이다. 1873(고종 10) 문과에 급제한 뒤 18822월 박영효 ( 朴泳孝 )를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1894년에는 보성보통학교 교장으로 취임해 2세교육에 힘썼다.

1896년 독립협회가 발족되자 그 막후에서 민권의식과 민권사상 고취에 노력했으며, 대한제국민력회 ( 大韓帝國民力會 )를 조직해 민권운동에 앞장섰다. 1898년 청년애국회에 관여하였다. 개화사상을 보급시켰던 해국도지 海國圖志등의 신서적을 통해 전래적인 실학에서의 주상적(主商的)인 해외교류의식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신문사업을 실학운동의 재현으로 인식, 이해하였다.

18983월에는 이승만(李承晩) 등이 창간한 경성신문에 논설을 쓴 시작한 경험을 살려 개화사상가 유영석(柳永錫장효근 ( 張孝根 이종면(李鍾冕이종문(李鍾文) 등 이문사(以文社) 관계인의 권유와 추대로 그 해 8제국신문을 순 한글로 창간하였다. 1910년까지 10여년간 사장 겸 기자로서 언론계에서 개화와 계몽·구국에 앞장섰다.

그 중에서도 황성신문·만세보·대한민보등의 언론기관에 참여하다가 1919년에는 천도교의 지하신문인 조선독립신문을 창간하기도 하였다. 190512월 홍산 ( 鴻山 )의 최학래(崔鶴來)의 권유로 천도교에 입교하였다. 손병희 ( 孫秉熙 )와는 제국신문창간 당시부터 교분이 있었다.

천도교에 입교한 뒤 천도교회월보의 월보과장으로 월보를 발행, 집필하면서 천도교 직영의 인쇄소인 보성사 ( 普成社 )의 사장으로 천도교관계 각종 서적을 간행하였다. 19069월 대한자강회 ( 大韓自强會 )의 평의원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회가 일제에 의해 강제해산되자, 1907년 그 후신으로 조직된 대한협회의 회보 편집 겸 발행인으로 일제의 침략정책에 대항하였다.

1912년 천도교의 풍족한 재정과 전국적인 조직망을 이용, 1894년 갑오동학농민운동, 1904년 갑진개화신생활운동을 1914년 갑인년에 재현하는 삼갑운동(三甲運動)으로 불리는 대대적인 민중운동을 계획하였다.

1919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227일 밤 장효근·김홍규(金弘奎신영구(申永求) 등과 협력, 보성사에서 극비리에 독립선언문 35000장을 인쇄해 인종식(印宗植)간사를 통해 전국에 배포하였다. 3·1운동으로 3년 복역 중 26개월만에 가출옥하였다.

192231일 또다시 보성사팀과 같이 천도교 교인 등의 단독으로 제23·1운동을 계획, 실천하던 중 발각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지조를 지키다가 아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李世幹(이세간) 일화

 

李世幹(이세간)1724(경종 4)에 테어 났고 자는 대임(大任), 호는 남강(南岡)이라 했다. 공은 금릉 조마의 신곡리에 살았는데 두뇌가 멍석 하고 글을 잘 지어 주위에 칭찬이 자자했다.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이웃 사람들은 물론 하늘도 그 지극한 효성에 감동 했다고 한다.

 

어느 해 겨울, 아버지 병환이 깊어 온갖 약을 구해 올려도 차도가 없던 차, 살구꽃과 참외 꽃이 특효약이 란 말을 진해 들었다. 집 안 사람들은 한겨울에 무슨 꽃이냐고 고개를 저었으나 공은 부모를 위해서는 이 한 몸 기꺼이 바치겠노라며 눈 덮인 산야를 헤맸다.

 

공이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도 며칠을 찾자, 홀연히 살구나무에 꽃이 피고, 언 땅을 뚫고 참외 꽃이 피어 하늘이 그의 효성을 저버리지 않았다 한다.

 

그 후, 오랜 병환으로 기력이 쇠약해진 부모님 공양에 애쓰던 공의 집안에 스스로 날이든 꿩을 잡아 부모님께 공양한 일도 있다.

 

특히 시묘 중 눈 속에 갇혀, 굶주림과 추위로 동사 적진에 있던 공에게 호 랑이 한 마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공은 호랑이에게

 

죽을 목숨 배고픈 너에게 보시하는 것은 좋은 얼이나, 부모상을 당해 시묘를 다하지 못하니 이 불효를 어찌 할꼬.”

 

하고 한탄을 했다.

 

그러자, 호랑이는 달려들기는커녕 오히려 공의 폼을 감싸 추위를 녹여 줘, 효성이 지극함에 하늘까지 감동 시켰다고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공의 목숨을 구한 호랑이는 시묘 3 년간 공과 함께 지냈으며, 그 뒤에도 공의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공의 꿈에 호랑이가 함정에 빠져 구해 달라고 애원을 했 다. 꿈을 깬 공이 이상하게 여기고 있던 차, 등 너머 성주에서 함정에 빠진 호랑이를 동민들이 죽이려 하고 있다는 전갈을 받고 호랑이를 구해 준 적도 있다.

효심은 하늘도 감동시키고 진성은 사람과 짐승 사이에도 통한다는 것을 공과 호랑이의 우정에서 배울 수 있다.

 

1795(정조 19) 공이 작고하자, 나라에서 남대를 ()하고 士林(사림)에서는 그 효성을 거리어 시묘 자리에 장천사를 건립해서 공을 제향 했다.

 

또 사당의 벽에는 공의 지극한 효성에 감복해 펑생 동안 따르띤 호랑이 상을 그려 현재도 천해지고 있으며, 의호비(義虎牌)도 세웠다.

 

공의 부언 장씨(張氏) 또한 열녀였다.

그 남편이 자리에 눕자, 온갖 정성으로 보살피다가 끝내 남편이 죽자 노구에 장례를 극진히 치르고

 

남편이 죽고 그 아내가 삶은 삼강대외에 어긋나지 않겠느냐 ! ’

 

하며, 마치 잠들 듯이 죽음을 택해 남편을 따랐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지아비에 지어미.” 라 감탄했다.

 

참고 문헌내 고장 우리 향토, 孝烈行誌(효렬행지)

 

 

 

 

 

李民(이민)의 효행

 

연짓볼 적신 둘내의 눈물

 

대구서 성서를 지나 다사고개를 올라서면 맞은편에 바로 내려다보이는 조그만 마을이 있다.

이 곳이 달성군 매곡동(梅谷洞)이다. 이 마을은 김해 김씨(金海金民)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여기 성주행 국도 왼편에 세워져 있는 효부각은 그들 김씨 문중뿐만 아니라 이 마을의 자랑이요 효()의 표상이기도 하다.

 

이 효부각은 1958년에 이 곳 면민들이 세운 것으로 가난과 시련을 이겨 내고 오로지 지극한 정성을 다해 불구의 시부모님을 봉양한 김씨 가문의 한 며느리의 효행을 기린 것이다.

 

효부 유인 성주 이씨의 비 (孝歸孺人星州李民之碑)’

성주 이씨가 이 이야기의 장본인인 것이다. 그 마을에서도 꽤나 고령이신 변 씨 할아버지는, ‘하늘이 낳은 효부였음을 극찬하셨고, 그의 외아들 김 문수(金文秀)씨는 지극한 가난이 나의 모친을 효부로 만들었다.’며 자신이 무식하여 그 어머니의 뜻을 못 펴고 사는 것을 퍽 안타까워했다.

 

효부 성주 이씨의 이름은 둘내란다. 둘내는 1882, 월배 마을 한 농부 의 네쩨 딸로 태어났다.

 

가난한 가정의 네째 딸이라 호강스럽게는 자랄 수가 없었고 따라서 일자무식한 규수로 자라 보릿고개의 회오리에 쫓겨 열일곱 어린 나이로 꽃가마를 탔다.

 

재산이 문제인가, 사람 하나면 됐지.”

아무리 그렇지 만. ”

정든 집을 떠난 가마가 강나루를 건너니 이젠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절박감과 함께 지난밤의 부모님의 대화가 몽롱히 떠올라, 가슴은 타고 연짓볼은 젖었다.

 

둘내의 시집살이는 예상한 대로였다. 시아버님은 시력이 좋지를 않아 마당길도 더듬었고, 시어머님은 반신불수의 앉은뱅이니 이미 앞서 온 맏동서의 그늘진 얼굴에서도 짐작이 갔다.

 

시숙은 머슴살이로 가고, 둘내의 남편혼자의 날품팔이로서는 여섯 식구의 허기진 배를 채울 수가 없었다.

둘내는 생각을 키웠다.

 

친정의 힘을 빌어서라도 입을 줄이는 분가 방법을 남편과 의논하여, 마침내 3 년만에야 그 뜻을 이뤄 천청 가까이로 분가를 했다. 그 동안 둘내는 귀여운 첫딸을 낳았다. 살림을 꾸렸지만 빈 몸 빈 손의 첫살림은 의외로 힘겨웠다.

 

그 가운데도 큰댁 부모님이 굶고 있다는 소식은 둘내의 가슴을 아프게 했 다. 견디다 못하여 부모님을 모실 것을 결심하고 어느 날 밤 곤히 잠든 남 편을 깨웠다.

 

여보, 부모를 모시는 책임을 어찌 장남만이 져야 하나요? 우리 형편이 큰댁보다는 나을 것 같으니 부모님을 모셔 옵시다. 그래서, 당신은 물고기를 잡아 팔고 저는 베를 짜고 방아품을 든다면 부모님을 모실 수가 있으니 내일 당장 부모님을 모셔 옵시다.”

“.....”

 

둘내는 남편에게 사흘을 졸라대니 마침내 남편이 동의를 했다.

그 동안 둘내는 둘째 딸을 낳았다. 둘내의 할 일은 세월 따라 늘어만 갔다. 시어머님의 똥, 오줌 가리기, 시아버님의 나들이시키기, 빨래하기, 산에 가서 나무 해오기 등 팽이처럼 돌아야 했다.

 

그러나, 자기가 직접 부모님을 모신다는 오붓한 보람이 그의 피로를 덜어 주었다.

이러자니 살림은 늘기는커녕 더욱 쫃들리는 판에 또 세번째도 딸을 낳으니 화가 난 남편은 훌쩍 어디론가 가출을 하고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둘내는 남편이 일본인가 동경인가 하는 먼 곳으로 갔다는 훗날의 소식에 하염없이 울었다. 그리고 하늘을 쳐다보며 원망을 했다.

남편이 없는 생활은 끼니를 걸르기가 일쑤이고 굶고 앉은 부모님을 보다못해 둘내는 부끄러움도 아랑곳없이 구걸길에 나섰다.

 

처음엔 미친 여자라는 수모와 천대도 받았지만 밥을 얻어다 불구의 시부모를 봉양한다는 소문이 돌자 마을의 인심은 동정으로 바뀌었다.

여름에는 시원한 곳에 시부모님을 모셔 부채를 부쳐 드리고, 겨울에는 몇 번이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밥은 비록 얻어 온 것이나 나무를 팔아서 생선 을 구워 상에 올리니 , ‘하늘이 낳은 효부라는 소리 가 온 마을로 퍼져 갔다.

 

남편이 없는 가운데서 시어머님의 상고를 당하니, 그 동안 동냥을 하여 비축해 둔 곡식으로 떡을 빚고 숲을 담아 제상에 올리고 대성통곡을 허니, 모두가 혀를 차며 칭찬하고 눈시울을 적셨다.

10년이 지나서야 다소의 돈을 벌어 남편이 돌아오고, 그 후 네번째로 아들 하나를 낳으나 그 아기가 지금의 김 문수 씨요, 다시 딸 하나를 더 낳아 이제 구걸을 하지 않아도 될 형편에 이르렀다.

 

그러나 둘내는 시아버지와 그 남편, 그리고 다섯 남매를 남겨 둔 채 쉰둘의 한창 나이로 눈을 감고야 말았다. 그의 일생은 실로 기구했다.

십 년을 남편과 헤어져 살았고, 십 년 가까운 세월 동안 구걸 행각을 했으며, 꼬박 35 년간, 가난과 역경과 싸우면서 밤마다 별을 향해 자신의 불효를 뉘우쳐 가며 불구의 시부모를 극진히 섬겼다.

 

그가 한 많은 세성을 떠나던 날, 앞을 못보는 그의 시아바지는 하늘이 내린 자기의 지팡이를 잃었다면서 밤낮 사흘 동안 통곡을 했다 한다.

보잘것 없는 여인, 가난과 외로움에 한 맺힌 일생을 눈물과 한숨으로 보낸 여인, 그러나 그녀가 행한 갸륵한 행적은 만인의 거울이 되어, 세월이 흐를 수록 그 이름은 더욱 빛나고 있다. 넉넉하고 지체 높다 하여 어찌 으뜸이라 하겠는가. 둘내의 지성스럽고 뜨거웠던 효행은 지금도 국도 길목을 지키며, 오가는 길손들의 가슴에 훈훈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출전多斯鄕土誌(다사향토지) 달성군 동곡초등학교 교감. 이모모

 

 

 

출전 <한민족대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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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성주 이씨(星州李氏)는 남한에 총 37,251가구, 153,14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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