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李(수안이씨)
본관(本貫): 수안(遂安)
시조(始祖): 이견웅(李堅雄)
유래(由來):
수안 이씨(遂安李氏)의 시조(始祖) 이견웅(李堅雄)은 고려 태조(太祖)를 도와 개국공신으로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에 이르렀으며, 후손 연송(連松)이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고 수안군(遂安君)에 봉해졌다고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通報)>에 전하며, 수안(遂安)을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아 후손들이 그 곳에 정착 세거(定著世居)하면서 본관을 수안(遂安)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계승하여 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이빈(李彬)
견웅(堅雄)의 손자 빈(彬)이 사공(司空)을 지냈다.
이연송(李連松)
?∼1320(충숙왕 7).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수안(遂安). 자는 백심(栢心), 호는 용계(龍溪). 안향 ( 安珦 )의 문인이다. 1296년(충렬왕 22) 장군으로 원나라에 가서 탐라 ( 耽羅 )의 피화(皮貨)를 바치고 돌아왔다.
1303년 행재소(行在所 : 임금이 일시 머무는 곳)인 향수원(香水園)에 이르러 충선왕을 해치려는 음모가 있자 평리(評理) 박경량 ( 朴景亮 )·유복화(劉福和) 등과 함께 힘써 이를 막았으므로, 1308년(충선왕 즉위년) 충선왕이 서용(敍用)하고 이것이 자손에까지 미치게 하였다.
그 뒤 추충보정공신(推忠輔靖功臣)으로 삼중대광 태사 평장사(三重大匡太師平章事)에 이르렀고 수안군(遂安君)에 봉해졌다. 1320년 박경량과 함께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다가 충선왕이 모욕을 당하자 금산사 ( 金山寺 )에서 음독자살하였다. 일찍이, ≪경사자집 經史子集≫을 간행하였고, 여러 군(郡)에 문묘 ( 文廟 )를 세웠다.
이염(李恬)
?∼1403(태종 3).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수안(遂安).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지내고 추충보절익대좌리공신(推忠保節翊戴佐理功臣)에 봉해진 수산(壽山)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 계속해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가 되었다. 우왕 때에 예의(禮儀)·전공판서(典工判書) 및 밀직부사·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를 지냈다.
1392년(공양왕 4)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이르렀는데, 팔관회에서 중방 ( 重房 )이 밀직사에게 예대(禮待)하지 않음으로 인해 틈이 생겼다.
이에 왕에게 송사(訟事)했으나 왕이 소장(訴章)을 모두 보유하고 조처를 취하지 않자, 연회에서 만취되어 왕에게 중방의 처벌을 강요하다가 순군 ( 巡軍 )에 갇히고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성계 ( 李成桂 )의 도움으로 합포(合浦 : 지금의 마신)에 장배(杖配)되는 데 그쳤다.
그 뒤 경상도절제사가 되고, 조선 건국 후에 정당문학 ( 政堂文學 )으로 개국원종공신 ( 開國原從功臣 )에 녹훈되었다. 이듬해 사은사 ( 謝恩使 )로 공민왕의 금인(金印)을 변환하기 위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명나라 태조를 만날 때 예를 잃어 조빙(朝聘 : 중국과의 통교)을 못하게 한 죄로 파직되었다.
1394년(태조 3) 다시 등용되어 심덕부 ( 沈德符 )와 함께 신도궁궐조성도감 ( 新都宮闕造成都監 )의 판사가 되었다. 이듬해 예문춘추관태학사로 궁궐에 말을 탄 채로 드나들었다는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였다.
1398년 신궁을 축조하는 제조관(提調官)이 되었고, 이어 삼사우복야(三司右僕射)에 이르렀다. 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 ( 鄭道傳 )의 일파로 몰려 순군옥에 갇혔다가 흥덕진(興德鎭)에 충군 ( 充軍 )되었으며, 이듬해 풀려나왔다.
1400년(정종 2) 이덕시(李德時)와 더불어 덕궁(德宮)에 있던 상왕(上王 : 태조)을 자주 찾아가 잡언(雜言)을 함부로 하여 춘주 ( 春州 )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이시항(李時恒)
1672(현종 13)∼1736(영조 1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수안(遂安). 자는 사상(士常), 호는 화은(和隱)·만은(晩隱). 평양 출신. 계달(啓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동의(東義)이고, 아버지는 사헌부지평 정한(廷翰)이며, 어머니는 원주변씨(原州邊氏)로 첨중추부사 진현(晉賢)의 딸이다. 유상운 ( 柳尙運 )의 문생이다.
1696년(숙종 22)에 진사가 되고, 1699년(숙종 25)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과거시험에 부정행위를 한 자가 있었다 하여 파방(罷榜)되어 이듬해 다시 설과(設科), 이에 급제하였다. 전적·직강·의금부도사·예조좌랑·병조좌랑·춘추관기사관·춘추관편수관·태천현감·어천찰방·병조정랑·덕천군수·경상도황장목경차관(慶尙道黃腸木敬差官) 등을 역임하였다.
문장에도 능하였다. 특히, 사륙변려체(四六騈儷體)의 문장에 능하여 1727년(영조 3) 사은 겸 진주사(謝恩兼陳奏使)로 청나라에 파견된 우의정 심수현 ( 沈壽賢 )의 종사관으로 그 문명을 떨쳤다. 또한, 서북지방의 방수(防戍)에 관심이 깊어 스스로 이 지역의 각 진을 살펴보고 방비책으로 7곳의 관방(關防)을 중령(中嶺)에 설치할 것을 건의하였다.
말년에 향리로 돌아와 교육과 저술활동에 전념하여 20여 권의 책을 남겼는데, 그 가운데 ≪관서통지 關西通志≫는 서북지방의 경비와 관련하여 인물·산천·전부(田賦)·군량 등에 관한 견해를 수록하였다. 그밖의 저서로 ≪화은집≫·≪김장군유사 金將軍遺事≫·≪서경지 西京志≫ 등이 있다.
이준식(李俊植)
1900∼1966. 독립운동가·군인. 본관은 수안(遂安). 일명 웅(雄)·증손(曾孫)·진탁(辰卓)·휘석(彙碩). 호는 화강(火崗). 평안남도 순천 출신.
1919년 3·1운동 이후 중국 상해(上海)로 건너가서 임시정부에 참여했다가 1921년 윈난성(雲南省) 강무당학교(講武堂學校)를 제5기로 졸업하고 만주로 가서 대한통의부 ( 大韓統義府 )에 가담하였다.
1925년 대한통의부를 비롯한 남만주의 12개 독립운동단체가 모여 정의부 ( 正義府 )를 결성하자 중앙위원이 되었다. 1927년 군사위원장 겸 총사령관이던 오동진 ( 吳東振 )이 일본경찰에 잡힌 뒤에는 그 후임이 되었다.
1927년 길림성 신안둔(吉林省新安屯)에서 열린 민족유일당 조직을 위한 회의에도 참석하였다. 1928년 국민부 ( 國民府 )의 수립에 주동적 역할을 하여 중앙집행위원회의 군사위원장에 선임되고 8개 중대, 1개 호위대를 통솔하는 사령관이 되었다.
1929년 국민부를 지원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혁명당 ( 朝鮮革命黨 )의 23인 중앙위원 중 1인으로서 군사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ML파의 길림지방·간도지방 간부로서도 활동하였다. 그 뒤 만주에서의 무장독립운동이 어려워지자, 1930년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며 중국군에 들어갔다.
1933년경 산둥(山東)에 있으면서 한국독립당 주노집행부(韓國獨立黨駐魯執行部)를 조직하였다. 1934년 김철 ( 金澈 )·박창세(朴昌世) 등과 함께 한국군인회 ( 韓國軍人會 )를 만들었다. 1937년 일본군의 침공으로 임시정부가 창사(長沙)에서 광저우(廣州)로 이전할 때 중국군 고급장교를 지냈다.
1939년 중국군에서 자진 예편한 뒤 임시정부에 참여해 한국임시의정원(韓國臨時議政院)에서 홍진 ( 洪震 )·지청천(池靑天) 등과 13인의 의정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조성환 ( 曺成煥 )· 황학수 ( 黃學秀 ) 등과 임시정부 군사위원회 화북지구 특파단으로 파견되어 모병, 군사훈련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듬 해 한국광복군이 임시정부 아래 창설되자 총사령부 참모가 되었다가 산시(山西)·다퉁(大同)에 주둔하는 제1지대 지대장에 임명되었다.
1941년 산시성으로 지대를 이끌고 출발해 노태준 ( 盧泰俊 )·안춘생(安椿生)· 노복선 ( 盧福善 )· 조인제 ( 趙仁濟 )·이건우(李健宇)·김자동(金紫東)·이석화(李錫華) 등 제1지대 간부와 더불어 타이위안(太原)·다퉁·스자좡(石家莊)·린펀(臨汾) 등지에서 옌시산(閻錫山)군과 연합해 일본군에 항전하였다.
이 해 광복군 제1징모분처(第一徵募分處) 주임위원으로서도 활동하였다. 1942년 임시정부의정원의 비서장이 되고 중령구(中領區) 의원선거회장도 겸하였다. 1943년 광복군총사령부 고급참모가 되었으며, 같은 해 충칭(重慶)에서 개최된 한국독립당 총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45년 광복으로 귀국해 민족청년단(民族靑年團) 부단장을 맡았다. 국군 창설에 힘써 고급군사훈련반을 졸업한 뒤 대령에 임명되었다가 사단장·군단장 등을 역임하고 육군중장으로 예편하였다. 그 뒤 재향군인회 회장, 광복회 회원, 한국전력주식회사 고문 등을 역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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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
세
|
항렬자
|
세
|
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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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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在(재),坤(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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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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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해),濟(제)
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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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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煥(환),燮(섭)
燁(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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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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鐘(종),鎭(진)
鏡(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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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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相(상),東(동)
根(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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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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奎(규),均(균)
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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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수안 이씨(遂安李氏)는 남한에 총 3,541가구, 14,09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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