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李(안성이씨)
본관(本貫): 안성(安城)
시조(始祖): 이중선(李仲宣)
유래(由來):
안성 이씨(安城李氏)의 시조(始祖) 이중선(李仲宣)은 고려에서 경군 호장(京軍戶長)을 지냈고 장민(長民)의 공(功)으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올라 벼슬이 삼중대광(三重大匡)·태사(太師)에 이르렀으며 백하(白夏 : 안성의 고호) 군(君)에 봉해졌다.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어 정확한 계대(系代)는 알 수 없으나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안성(安城)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이영(李永)
생몰년 미상. 고려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성(安城). 자는 대년(大年). 안성군의 호장 ( 戶長 )으로 경군 ( 京軍 )이 된 중선(仲宣)의 아들이다. 부친이 죽은 뒤 영업전 ( 永業田 )을 물려받아 서리 ( 胥吏 )가 되고자 했으나 정조주사(政曹主事)가 허락하지 않자 숙종 때 과거에 응시, 급제하였다.
이어 직사관이 되었는데, 1104년(숙종 9) 내시 임언 ( 林彦 )이 동여진(東女眞)에 대한 공격을 주장하니, “ 병기는 흉한 물건이고 전쟁은 위태로운 짓이다(兵凶器戰危事). ” 라고 하여 반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평장사 ( 平章事 ) 임간 ( 林幹 )을 따라 종군했으나 여진에게 패하자 연좌되어 파면되었다.
이어 지경산부(知京山府)가 되어 청렴하고 부지런하였다고 한다. 예종이 잠저 ( 潛邸 )에 있을 때 한안인 ( 韓安仁 ) · 이여림 ( 李汝霖 )과 더불어 시학(侍學)하였다. 1113년(예종 8) 예부시랑으로 요나라에 가서 천흥절(天興節)을 축하하였다. 1116년에는 이자겸 ( 李資謙 )과 함께 송나라에 가서 대성악(大晟樂)을 보내준 데에 사례하였다.
이듬해 우간의대부 ( 右諫議大夫 )가 되고, 1118년에는 보문각학사로서 청연각(淸 博 閣)에서 ≪ 서경 ≫ 의 열명편(說命篇)을 강론하였다. 1122년 인종이 즉위해 지어사대사보문각학사(知御史臺事寶文閣學士)로 삼았으나, 이자겸이 한안인을 죽이자 매서(妹壻)인 연유로 문공미(文公美) · 정극영 ( 鄭克永 ) 등의 배척을 받아 진도에 유배되었다.
이어 모자의 가산을 몰수하고 노비로 삼는다는 풍문을 듣고 분노를 이기지 못해 자살하였다. 이자겸이 술사(術士)를 시켜 매장하니 우마가 밟지 않았고, 병학자(病 俺 者)가 빌면 나았다고 한다. 이자겸이 몰락하자 아들이 개장(改葬)하고, 조정에서는 첨서추밀원사(僉書樞密院事)를 추증함과 동시에 이부 ( 吏部 )의 죄안(罪案)에서 삭제하였다.
타고난 성품이 바르고 곧아 권력자에게 아부하지 않았으나, 벗을 사귀는 데 단정하지 못해 척준경 ( 拓俊京 )이 이여림을 모해하고 지녹연(智祿延)이 박경승(朴景升)을 배척할 때 참여하였다.
이희(李禧)
희(禧)는 공민왕 때 명경과에 급제하였으며 양광도 안무사(楊廣道按撫使)로 왜구방어에 큰 공을 세웠고 후에 이부 시랑(吏部侍郞)에 올랐다.
이경
우왕 때 삼중대광 문하시중(三重大匡門下侍中)으로 평왜 대장군(平倭大將軍)이 된 경은 왜병(倭兵)을 격파한 공으로 추충정난보조공신(推忠靖亂補祚功臣)에 오르고 안성부원군(安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이극엄(李克儼)
좌사낭중(左司郎中)을 역임하였다.
이유(李裕)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역임했다.
이유인(李惟仁)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역임했다.
이숙번(李叔蕃)
1373(공민왕 22) ∼ 1440(세종 2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안성(安城). 아버지는 경(坰)이다. 1393년(태조 2) 문과에 급제하였다.
1398년에 지안산군사(知安山郡事)로 있으면서 방원(芳遠 : 뒤의 태종)을 도와 사병을 출동시켜 세자 방석(芳碩)과 정도전 ( 鄭道傳 ) · 남은 ( 南誾 ) · 심효생 ( 沈孝生 ) 등을 제거하는 데 공을 세워 정사공신 ( 定社功臣 ) 2등에 책록되고 안성군(安城君)에 봉해졌으며, 우부승지에 임명되었다.
그 뒤 방원의 측근이 되어 정종이 왕위에 오르자 방원에게 “ 공을 왕으로 추대하고 싶을 뿐이다. ” 라고까지 말했다 한다. 1399년(정종 1) 좌부승지가 되고, 이듬 해 초 박포 ( 朴苞 )가 방원과 반목하던 방간(芳幹)을 충동해 거병하자 군사를 동원해 이들을 제거하였다.
이어 좌군총제(左軍摠制)가 되고, 태종이 즉위하자 좌명공신 ( 佐命功臣 ) 1등이 되었다. 1402년(태종 2) 새로 설치한 내갑사 ( 內甲士 )의 좌번(左番) 책임자가 되고 지승추부사(知承樞府事)가 되었다. 같은 해 말 안변부사 조사의 ( 趙思義 )가 반란을 일으키자 도진무 ( 都鎭撫 )가 되어 좌도도통사와 함께 출정해 진압하였다.
이어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가 되고, 1405년 지공거 ( 知貢擧 )에 선임되었다. 1406년 겸중군총제(兼中軍摠制) · 겸판의용순금사사(兼判義勇巡禁司事)가 되고, 이듬해 겸충좌시위사상호군(兼忠佐侍衛司上護軍) · 겸의흥시위사상호군(兼義興侍衛司上護軍) 등을 역임하였다.
1408년 십사상호군(十司上護軍)이 폐지되면서 겸중군도총제(兼中軍都摠制)가 되고, 이듬해 동북면절제사가 되었다. 이어 참찬의정부사 · 겸지의흥부사(兼知義興府事)를 거쳐, 1412년 말 종1품 숭정대부 ( 崇政大夫 )로 승진하였다.
1413년 병조판서, 이듬해 의정부찬성사가 되었는데, 뒤에 의정부의 직제 개편에 따라 동판의정부사(同判議政府事) · 좌참찬 · 찬성이 되었다. 한편, 1414년 지춘추관사로서 영춘추관사 하륜 ( 河崙 ) 등과 함께 ≪ 고려사 ≫ 중 공민왕 이후의 사실을 고쳐서 바로잡도록 명을 받았다. 이듬 해 안성부원군(安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원래 성품이 망령된데다 자신의 공과 태종의 총애를 믿고 거만방자해 국왕에게 불충하고 동료들에게 무례하게 굴어 여러 차례 대간의 탄핵을 받아, 결국은 관작을 삭탈당하고 1417년 경상도 함양에 유배되었다.
세종 때 ≪ 용비어천가 ≫ 를 짓게 되자 선왕 때의 일을 상세히 알고 있었기에 서울에 불려와서 편찬을 도왔으나, 편찬이 끝난 뒤 다시 유배지에 보내져 그곳에서 죽었다.
이항혁(李恒赫)
항혁(恒赫)은 학자(學者)로 이름을 날렸다.
이건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순절하여 충절(忠節)의 안성 이씨(安城李氏) 가문(家門)을 더욱 유명하게 했다.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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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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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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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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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
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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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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昌(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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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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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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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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燦(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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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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顯(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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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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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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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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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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坤(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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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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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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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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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안성 이씨(安城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4,258가구, 17,54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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