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ail : juntonggahun@naver.com
>> 한국의 성씨


연안이씨(李)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연안이씨)

 

본관(本貫): 연안(延安)

시조(始祖): 이무(李茂)

유래(由來):

 

연안 이씨(延安李氏)의 시조(始祖) 이무(李茂)는 본래 당()나라 출신으로, 고종(高宗 : 당나라 제 3대 왕, 재위기간 : 650 683)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내다가 660(신라 태종무열왕 7) 나당(羅唐) 연합군 대총관 소정방(蘇定方)의 부

(副將)이 되어 신라에 들어와 백제(百濟)를 평정(平定)하는데 공()을 세워 연안후(延安侯)에 봉해졌고, 그 후 신라에 귀화하여 살게 되었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받들고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은 연안(延安) 땅을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고 정확한 계대(系代)를 알지 못하여 후손들은 태자첨사공파(太子詹事公派) 습홍(襲洪), 판소부감공파(判少府監公派) 현려(賢呂), 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 원주(元柱), 통례문사공파(通禮門使公派) (), 예부상서공파(禮部尙書公派) (), 이부시랑공파(吏部侍郞公派) 분양(汾陽), 전법판서공파(典法判書公派) (), 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 득량(得良), 판도정량공파(版圖正郞公派) 백연(伯衍), 영광군사공파(靈光郡事公派) 계연(季衍)을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각각 기일세(起一世)하고 있다.

 

가문의 중요 인물

 

이원발(李元發)

태자첨사공파(太子詹事公派) 습홍(襲洪)의 현손(玄孫)으로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했던 정공(靖恭)의 아들 원발(元發)이 고려 말(高麗末)에 전공판서(典工判書)를 지냈는데, 고려의 국운(國運)이 기울고 조선이 개국하여 이태조(李太祖)가 원천석(元天錫)과 함께 상신(相臣)으로 불렀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켰다.

 

이귀령(李貴齡)

1346(충목왕 2)1439(세종 21).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연안 ( 延安 ). 자는 수지(修之), 호는 계은(桂隱). 아버지는 전공판서 원발(元發)이며, 동생이 호조판서 귀산 ( 貴山 )이다. 고려말에 판선공시사(判繕工寺事)와 청주 등지의 관군만호(管軍萬戶)를 지냈다.

1392(태조 1) 조선이 개국되어 태조가 즉위하자 잠저 때의 공으로 개국원종공신 ( 開國原從功臣 )이 되었다. 1394년 중군사마(中軍司馬)를 거쳐 뒤에 형조와 예조의 전서(典書)를 지냈고, 지방으로 나아가 길주도도안무찰리사(吉州道都安撫察理使)와 동북면도순문병마도절제사(東北面都巡問兵馬都節制使) 등을 지냈다.

태종 때 원종공신이 되어 두번이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판승녕부사(判承寧府事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병조판서·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판좌군도총제부사(判左軍都摠制府事변정도감제조(辨定都監提調삼군판부사(三軍判府事) 등을 지냈다.

1415(태종 15) 검교우의정(檢校右議政)을 거쳐 이듬해 검교좌의정(檢校左議政)이 되었다가 곧이어 좌의정으로 사직하였다. 관직을 그만둔 뒤 20여 년을 한거하다가 94세로 죽으니 나라에서는 이틀 동안 조회(朝會)를 정지하고 조의를 표하였다. 시호는 강호(康胡)이다.

 

이귀산(李貴山)

귀산(貴山)이 세종(世宗) 때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여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이속(李續)

중훈대부(中訓大夫)로 춘천 도호부사(春川都護府使)를 지낸 속(: 관찰사 귀산의 아들)은 조선 초에 맹인(盲人)들의 궁중나들이를 금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맹인의 원한을 샀다.

태종(太宗)이 속()의 넷째 아들 근수(根粹)를 부마(駙馬)로 삼기위해 맹인 지화(池和)를 중매인으로 보냈는데, 그 원한으로써 무고로 모함을 하여 근수는 죄를 입고 창원(昌原)으로 귀양을 갔었다.

 

이주(李澍)

1534(중종 29) 1584(선조1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 ( 延安 ). 자는 언림(彦霖), 호는 분봉(盆峯). 인문(仁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삼척부사 말( )이고, 아버지는 군수 경종(慶宗)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운천군(雲川君) ( )의 딸이다.

인조 때의 호성공신 ( 扈聖功臣 ) 광정(光庭)은 그의 맏아들이다.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았다. 성품이 강직하여 남의 과실을 보면 반드시 이를 시정하게 하니 사람들이 모두 어려워하였다.

1558(명종 13)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학업중, 보우 ( 普雨 )가 문정왕후 ( 文定王后 )의 신임을 얻어 불사를 일으키려 하자 제생들과 함께 상소하여 보우의 죄를 성토하였다.

1573(선조 6)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동방(同榜)에 각각 장원과 병과로 급제한 이발 ( 李潑 ) · 김수(金 寞 ) 등과 함께 발탁되어 권지정자(權知正字)에 보임되고, 곧이어 경성판관에 특배되었으며, 이어서 1583년 사간원정언에 이르렀다.

조정의 공론이 동인 · 서인으로 갈라지자, 동인의 입장에서 홍여순(洪汝淳) · 유영경 ( 柳永慶 ) 등과 더불어 이이(李珥) · 성혼 ( 成渾 )을 논박하는 데 앞장섰다. 1584년 가산군수에 보임되었다.

 

이광정(李光庭)

1552(명종 7) 1627(인조 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 ( 延安 )이다. 자는 덕휘(德輝)이다. 호는 해고(海皐)이다. 부사 ( 府使 ) ( )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군수 경종(慶宗)이다. 아버지는 정언 ( 正言 ) ()이며, 어머니는 유사필(柳師弼)의 딸이다.

1573(선조 6) 진사시에 합격했다. 1590년 교관 ( 敎官 )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1년 승문원정자 · 사관 ( 史官 ) · 시강원설서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에 선조를 모시고 가서 정언과 지제교 ( 知製敎 ), 예조 · 병조의 좌랑을 지냈다. 이듬해 환도 후 접반사 ( 接伴使 ) 이덕형 ( 李德馨 )을 도와 실무를 담당하였다.

지평 · 병조정랑 · 동부승지 등을 지내고 이조 · 예조 · 병조의 정랑, 동부승지 등을 지냈다. 그 뒤 이조 · 예조 · 병조의 참의, 좌승지를 거쳐 대사성이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접반사로서 명나라의 부사였던 심유경(沈惟敬)을 만나러 갔다. 명나라에서 돌아와 호조참판이 되어 군향(軍餉 : 군수용 물품)을 정리하여 바로잡는 데 힘썼다.

공조참판을 거쳐 1598년 접반사로서 명나라의 제독 마귀(麻貴)를 따라 울산을 다녀왔다. 왜적을 물리치는 데 공헌했다. 1599년 호조 · 공조의 판서를 거쳐 한성부윤이 되었다. 1601년에는 지중추부사로서 청백리에 뽑혔다.

1602년 예조판서를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이 때 주청사 ( 奏請使 )로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책봉에 대한 고명(誥命)을 받으러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공로로 숭정대부 ( 崇政大夫 )로 승계되었다. 판돈녕 · 판의금을 거쳐 예조 · 이조의 판서가 되었다.

1604년에는 호성공신 ( 扈聖功臣 ) 2등에 책록되어 연원군(延原君)에 봉해졌다. 뒤에 보국숭록대부 ( 輔國崇祿大夫 )에 올라 부원군 ( 府院君 )이 되었다. 1621(광해군 13) 호조판서로 제수되었으나, 당시의 정치상황이 어지러운 것을 보고 병을 핑계로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 후에는 공조 · 형조의 판서를 거쳐 1626(인조 4)에는 개성유수가 되었다. 이 때 그곳의 인심이 매우 이익을 탐하여 이를 개혁하는 일을 단행하다가 마찰이 생겨 해직당하고, 기로소 ( 耆老所 )로 들어갔다. 정묘호란을 당해 왕을 강화도에 모시고 갔으나 병사했다. 인품이 근검하고 신중하여 주요 직책을 두루 맡았다.

 

이기설(李基卨)

1558(명종 13) 1622(광해군 1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 ( 延安 ). 자는 공조(公造), 호는 연봉(蓮峯). 참봉 계장(繼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장령 ( 掌令 ) 언침(彦 甚 )이고, 아버지는 지남(至男)이며, 어머니는 정원 ( 鄭源 )의 딸이다. 박지화(朴枝華)의 문인이다. 정세규 ( 鄭世規 ) · 목낙선(睦樂善)과 교유하였다.

1586(선조 19) 효행과 순덕(純德 : 도덕을 빠짐없이 행함. 또는 순수한 덕)으로 남부주부에 특별 임명되고, 다시 청산현감에 추천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그러나 어버이의 뜻을 거역하지 못해 그 해 겨울 무주현감을 거쳐 이듬 해 송화현감으로 나갔다.

1591년 한성부판관이 되었고, 다음해 임진왜란의 발발로 굶주리는 백성이 많아지자 구제에 힘썼다. 이듬해 호조정랑으로 선릉 ( 宣陵 )과 정릉 ( 靖陵 )의 도감낭청(都監郎廳)을 겸했으며, 해주의 행재소 ( 行在所 )에 갔다가 그 해 겨울 왕과 함께 환도하면서 군향(軍餉) 수급의 책임을 지고, 또 비변사낭청까지 겸해 군량미 조달에 힘썼다.

12월에 덕천군수로 나갔으나 1594년 어머니 정씨(鄭氏)의 사망으로 사직하였다. 1596년 청풍군수에 제수되었는데, ()이 고향 가까이 있어서 사양하지 못하고 부임해 얼마 되지 않아 충북에서 가장 훌륭한 치적을 쌓았다는 평을 들었다 한다. 1599년 이산해 ( 李山海 )의 강력한 추천으로 상원군수로 나갔다.

1601년 청백리에 뽑혔으며, 이듬해 연안부사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 군자감부정 · 사도시정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은거하면서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한 뒤 이천부사 · 예빈시부정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부임하지 않았고, 1610(광해군 2) 부호군 임명도 거절하였다.

그 뒤 승지 등의 직책을 내렸으나 영창대군 ( 永昌大君 )이 서인(庶人)으로 쫓겨나고 폐모론이 일어나자 시국을 개탄해 끝내 벼슬을 사양하였다. 서울 삼청동 백련봉(白蓮峯) 아래에다 연봉정(蓮峯亭)을 짓고 학문에 전심해 경사 · 천문 · 지리 · 율학 · 병술 등 여러 방면에 정통했으며, 당시 사대부의 사표가 되었다.

1623(인조 1) 정경세 ( 鄭經世 )의 건의로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1633년 인조가 특명으로 정려를 내렸는데, 편액을 효자삼세(孝子三世)라 하였다. 저서로는 연봉집 이 있다.

 

이돈오(李惇五)

1585(선조 18) 1637(인조 1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 ( 延安 ). 자는 자전(子典), 호는 일죽(一竹).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언침(彦 甚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소격서참봉 지남(至男)이고, 아버지는 부호군 기설(基卨)이며, 어머니는 참봉 허진(許 所 )의 딸이다.

그의 문명이 높아지자 1608(선조 41)에 선공감역(繕工監役)으로 천거, 등용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듬해에 다시 제릉참봉(齊陵參奉)으로 임용되고, 1614(광해군 6)에 선원전참봉(璿源殿參奉)으로 전임되고, 곧 사섬시봉사(司贍寺奉事)를 거쳐 1616년에 익위사시직(翊衛司侍直)이 되었으며, 이듬해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하려고 하자 이를 반대하면서 관직에서 물러났다.

1623년에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이를 지지하여, 1625(인조 3)에 장례원사평(掌隷院司評)으로 등용되었고, 1628년에 익위사익찬(翊衛司翊贊), 1632년에 종친부전부(宗親府典簿)가 되었다가 이듬해에 정선군수로 전보되었으나 사임하였다. 1634년에 광흥고수(廣興庫守)로 복직, 국고출납의 질서를 세우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 뒤 외직인 가평군수로 나가 여러 가지 숙폐(宿弊)를 고쳤으며, 1636년에 사직하였다. 그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로 건너가서 훈련도감낭청으로 군기(軍器)를 관리하다가, 적이 침입하자 그들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좌참찬에 증직되었다. 강화의 충렬사 ( 忠烈祠 )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현(忠顯)이다.

 

이돈서(李惇敍)

1599(선조 32) 1637(인조 15). 조선 후기의 순절인. 본관은 연안 ( 延安 ). 자는 자륜(子倫), 호는 만사(晩沙).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언침(彦 甚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소격서참봉 지남(至男)이고, 아버지는 부호군 기설(基卨)이며, 어머니는 참봉 허진(許 所 )의 딸이다.

1627(인조 5)에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선산으로 피난하였다. 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성으로 들어갔다가, 그 성이 적에게 함락되자 마니산 ( 摩尼山 )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서 적병에게 잡혔으나 끝내 굽히지 않으면서, 함께 잡힌 유옹(柳雍)과 같이 절의를 지키기 위하여 죽기를 맹세하였다.

그는 적에게 끌려가다가 진강리(鎭江里)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다. 1824(순조 24)에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강화의 충렬사 ( 忠烈祠 )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이후정(李後定)

1631(인조 9)1689(숙종 1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 ( 延安 ). 자는 정숙(定叔), 호는 만안당(晩安堂). 소격서영 지남(至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장령 기설(基卨)이고, 아버지는 돈림(惇臨)이며, 어머니는 조경 ( 趙絅 )의 딸이다.

1660(현종 1)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675(숙종 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지평 ( 持平 )을 거쳐 정언 ( 正言 )이 되고, 이어서 부수찬· 헌납 ( 獻納 )을 지냈다.

1689년 병조참의로 있을 때 기사환국 직전에 인현왕후(仁顯王后 : 숙종비)의 폐위가 부당하다고 상소하였으나 용납되지 않자 격분하여 죽었다. 뒷날 청백리에 선록(選錄 : 뽑혀서 명부에 기록됨)되었다.

 

이석형(李石亨)

판소부감공파(判少府監公派) 현려(賢呂)의 후손에서는 9세 손 석형(石亨)이 뛰어났다. 일찍이 그의 아버지 회림(懷林)이 늦도록 아들이 없어서 삼각산(三角山) 신령에게 빌어서 잉태하였는데, 그 아버지가 마침 금성(禁省)에서 숙직을 하다가 꿈에 커다란 바위 위에 앉았더니 흰 용()이 바위를 쪼개고 나왔었다. 꿈에서 깨어나 아들을 낳았다는 기별이 왔으므로 아들 이름을 석형(石亨)이라 하였다고 한다. 나이 26세에 생원·진사와 문과 초시(初試)에 모두 장원하였고, 다음해 잇달아 삼장(三場)에 장원하여 정언(正言)을 지내고, 세조(世祖)의 총애를 받아 한성부윤(漢城府尹호조 참판(戶曹參判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등을 지낸 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거쳐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라 좌리4등공신(佐理四等功臣)으로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정귀(李廷龜)

석형(石亨)의 현손(玄孫) 월사(月沙) 정귀(廷龜)6세 때 이미 글을 깨우쳐 신동(神童)으로 일컬어졌고, 윤근수(尹根壽)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1590(선조 23)에 증광문과에 급제했으며,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인조(仁祖) 초에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렀다. 문장에 능했던 그는 외교에도 재치와 수완이 뛰어나 여러 차례에 걸쳐 사신(使臣)으로 중국을 다녀왔으며, ()나라 문사들의 청에 의해 1백 여 장()의 기행문을 모은 <조천기행록(朝天紀行錄)>을 간행하여 문명(文名)을 떨쳤다. 글씨에도 뛰어나 신 흠(申 欽장 유(張 維이 식(李 植) 등과 함께 조선중기의 4대 문장가로 일컬어졌다.

그의 아들 명한(明漢 : 이조 판서와 대제학을 지냄)과 소한(昭漢 : 이조 참판

을 지냄) 형제가 유명했다.

 

이명한(李明漢)

1595(선조 28) 1645(인조 23).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문신. 본관은 연안 ( 延安 )이다. 자는 천장(天章), 호는 백주(白洲)이다. 증 영의정 순장(順長)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삼등현령(三登縣令) ( )이다. 아버지는 좌의정 정구(廷龜)이며, 어머니는 예조판서 권극지(權克智)의 딸이다.

1610(광해군 2)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616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승문원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 · 전적 · 공조좌랑에 이르렀다. 앞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론이 일어났을 때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여 파직되었다. 그 뒤 병조좌랑 · 교리 등을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에 제수되었다. 이어 이조좌랑이 되어 어사로 관동(關東)에 나가 서리들의 정치와 백성들의 폐해를 살폈다. 다시 옥당 ( 玉堂 )에서 근무하다가 이조로 옮겨 호당 ( 湖堂 )에 들어갔다.

사가독서(賜暇讀書 :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를 했다. 이곳에서 승문원제술관(承文院製述官) · 한학교수 ( 漢學敎授 ) · 교리 · 사국수찬(史局修撰) 등을 겸대하다가 이조정랑이 되었다.

이괄 ( 李适 )의 난 때 왕을 공주로 모시고 가서 이식 ( 李植 )과 함께 팔도에 보내는 교서를 지었다. 이어 응교 · 사간에 승진된 뒤 검상 ( 檢詳 ) · 사인 ( 舍人 ) · 집의 · 이조참의로 승진했다. 다시 사가독서를 허락받고 호당에 들어갔고 승문원부제조가 되었다.

그 뒤 병조참의 · 우승지 · 형조참의 · 좌승지 · 남양부사 · 대사간 · 대사성 · 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639(인조 17) 도승지 등을 거쳐 1641년 한성부우윤 · 대사헌이 되었다.

이 해 도승지로서 홍문관 · 예문관의 양관 대제학, 이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1643년 이경여 ( 李敬輿 ) · 신익성 ( 申翊聖 ) 등과 함께 척화파로 지목되어 심양(瀋陽)에 잡혀가 억류되었다.

이듬 해 세자이사(世子貳師)가 되어 심양에 가서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를 모시고 왔다. 1645년에 명나라와 밀통한 자문 ( 咨文 )을 썼다 하여 다시 청나라에 잡혀갔다가 풀려나와 예조판서가 되었다.

아버지 정구, 아들 일상(一相)과 더불어 3대가 대제학을 지낸 것으로 유명하다. 병자호란 때 심양까지 잡혀갔던 의분을 노래한 시조 6수가 전한다. 저서로 백주집 20권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이단상(李端相)

1628(인조 6)1669(현종 10). 조선 후기의 학자·문신. 본관은 연안 ( 延安 )이다. 자는 유능(幼能)이다. 호는 정관재(靜觀齋서호 ( 西湖 )이다. 할아버지는 좌의정 정구(廷龜)이다. 아버지는 대제학 명한(明漢)이며, 어머니는 금계군(錦溪君) 박동량 ( 朴東亮 )의 딸이다.

1648(인조 26) 진사시에 장원했다. 다음해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설서·대교·봉교·부수찬·교리 등을 역임하면서, 서연 ( 書筵 )에 나아갔다.

여러 차례 이조·병조의 정랑을 지내고 의정부사인으로 지제교 ( 知製敎 )를 겸하였다. 1655(효종 6) 사가독서(賜暇讀書 :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를 한 뒤 대간에 들어가 구애됨이 없이 정론(正論)을 밝혔다.

전라도지방을 두루 살펴 기근이 심한 고을을 구제하게 했다. 효종이 죽고 정국이 변하자 두문불출하고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잠시 청풍부사를 지냈다. 이어 응교를 거쳐 인천부사가 되었다. 1664(현종 5) 집의가 되어 입지권학(立志勸學)에 관한 다섯 조목을 상소하고 스스로 관직을 떠났다.

홍명하 ( 洪命夏 송준길 ( 宋浚吉 조복양 ( 趙復陽 ) 등이 그의 학문과 덕행을 인정해 경연관 ( 經筵官 )에 추천했다. 그러나 이를 사양하고 양주 동강(東岡)으로 은퇴했다. 그 뒤 승지와 병조참지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했다. 1669년 부제학으로 서연관을 겸했으나 곧 사양하고 물러났다.

1680(숙종 6) 민정중 ( 閔鼎重 )의 건의로 이조참판 겸 경연, 양관제학(兩館提學 : 홍문관·예문관의 제학)이 추증되고, 다시 이조판서로 증추되었다. 그의 문하에서 아들인 희조(喜朝)와 김창협 ( 金昌協 김창흡 ( 金昌翕 임영 ( 林泳 ) 등의 학자가 배출되었다.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인천의 학산서원 ( 鶴山書院 )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대학집람 大學集覽·사례비요 四禮備要·성현통기 聖賢通紀·정관재집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이가상(李嘉相)

1615(광해군 7)1637(인조 15). 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연안 ( 延安 ). 자는 회경(會卿), 호는 빙헌(氷軒). 이조판서 명한(明漢)의 아들이다. 척화신 공조참의 나만갑 ( 羅萬甲 )의 딸과 혼인하였다. 1630(인조 8) 진사시에 합격하고, 163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평소 효도가 극진하였는데, 이해 관직에 나가기 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 어머니를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하였다가 이듬해 강화도가 적에게 함락되자 자신은 적에게 잡히고 아내가 어머니를 모시고 옆의 섬으로 피난하였다.

그 뒤 풀려나왔으나 아버지와 형제에게 글을 남겨 이별하고 여러 차례 적진에 들어가 어머니를 찾아 헤매다가 마침내 적에게 피살되었다. 아내 나씨도 이 소식을 듣고 상심한 끝에 죽었다. 인조의 명으로 효자정문이 세워졌으며, 1671(현종 12) 승지 이단하 ( 李端夏 )의 건의로 수찬을 추증받았다.

 

이일상(李一相)

1612(광해군 4) 1666(현종 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 ( 延安 ). 자는 함경(咸卿), 호는 청호(靑湖). (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 정구(廷龜)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명한(明漢)이며, 어머니는 나주 박씨(羅州朴氏)로 동량(東亮)의 딸이다.

1628(인조 6) 17세로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으나 나이가 어려 벼슬대신 공부에 열중하였다. 1633년 검열이 되고, 대교 · 정언을 거쳐 헌납이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하지 못하고, 또한 척화신으로서 화의를 반대해 이듬 해 탄핵을 받아 영암으로 귀양갔다가 다시 위원으로 이배되었다.

뒤에 남노성(南老星) 등의 주장으로 풀려나 인조 말년에는 사간에 올랐으며, 1647년 창덕궁수리소도청으로 공을 세워 당상관에 올랐다. 효종이 즉위하면서 우승지에 발탁되어 총애를 입었으며, 대사간을 거쳐 1652(효종 3) 도승지가 되었다. 그러나 탄핵받은 특진관 ( 特進官 ) 윤강 ( 尹絳 )을 구하다가 한 때 파직되었다가 홍무적 ( 洪茂績 )의 탄원으로 복귀하였다.

이어 부제학 · 대사간 · 대사성을 거쳐 대사헌으로 있을 때 범금자(犯禁者)를 청탁으로 석방했다는 탄핵을 받아 다시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1654년 정조 겸 진하부사(正朝兼進賀副使)로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 해 귀국, 청나라의 실정을 보고해 효종의 북벌계획 수립에 송시열 ( 宋時烈 ) 등과 함께 도움을 주었다.

곧 이어 이조참판 · 대사헌 · 대사성 등의 청요직을 거쳐 1656년 부제학으로 실록수정청당상에 임명되어 선조수정실록 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한 때 경기감사로 나갔다가 1659년 대제학 올라 문형 ( 文衡 )을 장악하였다. 현종이 즉위하면서 빈전도감당상(殯殿都監堂上)에 차출되고, 찬집청당상(纂輯廳堂上)으로 영릉지장 寧陵誌狀 의 애책문(哀冊文)을 지었다.

예조참판으로서 대제학을 겸했으며, 1660(현종 1) 실록청당상으로 효종실록 편찬을 책임 맡았으나 이른바 미선사건(米船事件)으로 남인 계열의 이지익 ( 李之翼 )의 탄핵을 받았다. 그 뒤 병조참판 · 동지의금부사 등을 지내고, 실록편찬의 공으로 정헌대부 ( 正憲大夫 )에 가자되었으며, 공조판서 · 예조판서 · 좌우참판 · 호조판서를 거쳐 1666년 다시 예조판서가 되었다가 죽었다.

이듬 해 생전에 약방제조로서의 공이 인정되어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남인 계열이 편찬한 현종실록 에서는 학술이나 재능도 없는 주정꾼으로 평가되었으나, 서인 계열이 편찬한 현종개수실록 에는 할아버지 · 아버지와 함께 3대에 걸쳐 대제학을 지낸 것은 수백 년 동안 없었던 일이라 하고 있다.

 

이귀(李貴)

1557(명종 12)1633(인조 1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 ( 延安 ). 자는 옥여(玉汝), 호는 묵재(默齋). 세조조의 문신 석형(石亨)5대손으로, 대호군 수장(壽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기()이고, 아버지는 증 영의정에 추증된 정화(廷華)이며, 어머니는 안동 권씨로, 청송부사 용()의 딸이다.

이이(李珥). 성혼 ( 成渾 )의 문하에서 수학해 문명을 떨쳤으며, 1582(선조 15) 생원이 되었다. 이듬 해 일부 문신들이 이이와 성혼을 공박, 모함해 처지를 위태롭게 만들자 여러 선비들과 함께 논변하는 글을 올려 스승을 구원하였다.

1592년 강릉참봉(康陵參奉)으로 있던 중 왜적의 침입으로 어가 ( 御駕 )가 서행(西幸)한다는 소식을 듣고, 제기를 땅에 묻고 능침에 곡읍한 후 물러 나와 의병을 모집해 황정욱 ( 黃廷彧 )의 진중으로 갔다가 다시 어가가 주재하는 평양으로 가서 죄를 청하고 방어 대책을 아뢰었다.

이어 이덕형 ( 李德馨 ). 이항복 ( 李恒福 ) 등의 주청으로 삼도소모관(三道召募官)에 임명되어 군사를 모집, 이천으로 가서 세자를 도와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였다. 이듬 해 숙천 행재소로 가서 왕에게 회복 대책을 올려 후한 상을 받고, 다시 삼도선유관(三道宣諭官)에 임명되어 군사 모집과 명나라 군중으로의 군량 수송을 담당하였다.

그는 체찰사 유성룡 ( 柳成龍 )을 도와 각 읍으로 순회하며 군졸을 모집하고 양곡을 거두어 개성으로 운반해서 서울 수복전을 크게 도왔다. 그 뒤 장성현감.군기시판관(軍器寺判官).김제군수를 역임하면서 난후 수습에 힘썼다.

1603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형조좌랑.안산군수.양재도찰방(良才道察訪).배천군수 등을 차례로 지냈고, 1616(광해군 8) 숙천부사로서, 해주목사에게 무고를 받고 수감된 최기 ( 崔沂 )를 만난 일로 탄핵을 받아 이천에 유배되었다. 1619년에 풀려나와 1622년 평산부사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난정을 개탄하고, 김류( ).신경진(申景 ). 최명길 ( 崔鳴吉 ). 김자점 ( 金自點 ) 및 두 아들 시백(時白).시방(時昉) 등과 함께 반정 의거를 준비하였다.

이듬 해 3월 광해군을 폐하고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 종(綾陽君倧)을 왕으로 추대, 인조반정에 성공해 김류. 이서 ( 李曙 ). 심기원 ( 沈器遠 ).김자점.신경진.최명길. 이흥립 ( 李興立 ).심명세 (沈命世). 구굉 ( 具宏 ) 등과 함께 정사공신 ( 靖社功臣 ) 1등에 책록되었다. 그 뒤 호위대장(扈衛大將).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우참찬.대사헌.좌찬성 등을 역임하고,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에 봉해졌다.

그 동안 남한산성의 수축, 호패법의 실시, 무사의 양성, 국방 강화 등을 건의해 국력 충진에 힘썼다. 1626(인조 4) 병조.이조의 판서를 지내고, 이 해에 김장생 ( 金長生 )과 함께 인헌왕후(仁獻王后 : 元宗妃)의 상기를 만 2년으로 할 것을 주장하다가 대간의 탄핵으로 사직하였다.

이듬 해 정묘호란 때에는 왕을 강화도에 호종해 최명길과 함께 화의를 주장하다가 다시 탄핵을 받았다. 당쟁이 치열하고 명.청 관계의 외교가 복잡한 시기에 나라를 위해 크게 공헌하였다. 저서로는 묵재일기3권이 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인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이시백(李時白)

1581(선조 14) 1660(현종 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 ( 延安 ). 자는 돈시(敦詩), 호는 조암(釣巖). (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화(廷華)이고, 아버지는 연평부원군 귀(延平府院君貴)이며, 어머니는 인동 장씨로 증 참판 민()의 딸이다. 시방(時昉)의 형이다. 성혼 ( 成渾 ) · 김장생 ( 金長生 )의 문인이다.

1623년 유생으로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 ( 靖社功臣 ) 2등으로 가선대부 ( 嘉善大夫 )에 오르고 연양군(延陽君)에 봉해졌다. 다음 해 이괄 ( 李适 )의 난이 일어나자 협수사(協守使)가 되어 이천으로 달려가서 향병을 모집해 길목을 지켰다. 그러나 이괄이 다른 길을 택해 곧바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안현(鞍峴)에서 정충신 ( 鄭忠信 ) 등과 함께 반란군을 격파하였다.

그 공으로 수원방어사가 되어 병마 3,000을 훈련시키고, 유사시에는 십장기(十丈旗)와 방포(放砲)를 신호로 모이도록 하였다. 그 결과 정묘호란 때 병마를 이끌고 신속히 동작나루에 도착, 인조를 강화도로 무사히 인도하기도 하였다. 1629(인조 7) 삼수미 ( 三手米 )를 국고에 수납하는 데 태만했다는 죄로 관직을 떠났으나, 곧 판결사가 되었다가 양주목사 · 강화유수가 되었다.

1633년 병조참판, 1636년 경주부윤이 되었으나, 왕이 불러들여 병조참판으로 남한산성수어사를 겸하였다. 그 해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맞이했으며, 서성장(西城將)으로 성을 수비했고, 다음 해 공조판서에 승진되어 지의금부사를 겸하였다. 1638년 병조판서 때, 척화신(斥和臣)으로서 청의 강압에 못이겨 심양(瀋陽)에 아들 유() 대신 서자를 볼모로 보냈다가 2년 뒤 탄로되어 여산 ( 礪山 )에 중도부처 ( 中途付處 )되었다.

다음 해 풀려나서 총융사가 되고, 1644년 심기원 ( 沈器遠 )의 모반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무고를 받았으나 왕의 신임으로 추궁을 받지 않고, 이어 한성판윤과 형조 · 공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소현세자 ( 昭顯世子 )가 죽고 원손이 어려 인조와 중신들은 봉림대군 ( 鳳林大君 )을 세자로 삼을 것을 희망했으나, 이경여 ( 李敬輿 )와 함께 원손을 그대로 세울 것을 주장하였다.

1646년 다시 병조판서가 되어 휴가를 받아 공주로 성묘 가던 중 호서에 토적이 날뛴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서울로 돌아와 토벌을 자원해 군사를 이끌고 달려갔으나 이미 토평되어 그대로 돌아왔다. 1649년 인조가 불러 술을 대접하고, 또 세자를 소개하면서 세자에게 이르기를 내가 이 사람을 팔다리처럼 하니 너도 뒷날 나와 같이 대접하라. ” 하며 위로했다 한다.

그 해 5월 효종이 즉위하자 이조판서 · 좌참찬이 되고, 1650(효종 1) 우의정에 올랐다. 다음해 김자점 ( 金自點 )의 모역 사건이 일어났을 때 아우 시방이 그와 가깝다는 이유로 혐의를 받자 도성 밖으로 나가 조용히 지냈다. 1652년 사은사 ( 謝恩使 )로 청나라를 다녀와 언사(言事)로 견책을 받은 조석윤 ( 趙錫胤 ) 등을 신구(伸救)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벼슬에서 떠났다.

그러나 바로 좌의정에 이어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에 봉해지고, 1655년 영의정에 임명되자 다시 벼슬에 나왔다. 1658년 김육 ( 金堉 )의 건의에 따라 호남에도 대동법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다음 해 효종이 죽자 윤선도 ( 尹善道 ) 등이 수원에 능을 정하자고 건의했으나, 그가 교통이 빈번해 적합하지 못함을 들어 여주의 영릉 ( 寧陵 )을 택하도록 하였다.

일곱 번이나 판서를 역임했고 영의정에까지 올랐으나, 청빈해 빈한한 선비집 같았다 한다. 장유 ( 張維 ) · 최명길 ( 崔鳴吉 ) · 조익 ( 趙翼 )과 교유하였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이시방(李時昉)

1594(선조 27)1660(현종 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 ( 延安 )이다. 자는 계명(季明)이다. 호는 서봉(西峯)이다. 아버지는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며, 영의정 시백(時白)의 아우이다. 1623년 인조반정 때 유생으로 아버지와 함께 가담해 정사공신 ( 靖社功臣 ) 2등으로 연성군(延城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이괄 ( 李适 )의 난이 일어나자 군사를 모아 반란군을 토벌했다. 1625(인조 3)에 서산군수가 되었다. 그 뒤 공조참판이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인조가 강화로 피란하기에 앞서 순검사가 되어 먼저 강화에 가서 군비를 정비하고 경계를 엄히 했다. 왕이 도착한 뒤에는 8도의 군량미를 조달하는 중책을 맡았다.

이듬해 광주목사로 남한산성방어사를 겸했다. 1632년 한성부의 좌·우윤이 되었다. 이어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죽자 국장도감 ( 國葬都監 )과 산릉도감 ( 山陵都監 )의 제조가 되었다. 1636년 나주목사로 나갔다가 전라도관찰사로 승진했다.

이 때 조정에서는 남도의 군사를 동원해 평안도를 방어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양서(兩西)의 백성을 모아 대처하도록 하고 남도민은 군량미 조달에 활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호란이 일어날 조짐이 뚜렷해지자 입암산성(笠巖山城)을 수축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그 해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즉시 군사를 동원해 남한산성의 위급을 구원하지 않았다는 죄로 정산 ( 定山 )에 유배되었다. 1640년에 사면되어 제주목사로 나갔다. 이듬해 그곳에 안치되어 있던 광해군이 죽자 손수 염습하였다.

1642년 병으로 직책을 그만두었으나 겨울에 광주수어사(廣州守禦使)가 되었다. 이어 병조참판에 제수되었으나, 본의 아닌 일로 파직되었다. 1644년 다시 광주수어사가 되었으나 마침 심기원 ( 沈器遠 )의 역변(逆變)이 일어나, 그의 형 시백과 함께 관계되었다는 흉서사건으로 피해를 입었다.

1645년 호조참판이 되어 충청도와 전라도에 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1647년에는 병조참판이 되고, 가선대부에 승계(陞階)되었다. 이듬해 공조판서에 올랐다. 1649년 인조가 죽자 산릉제조를 거쳐 형조판서가 되었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고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10월 사은사의 부사로 청나라에 들어가 외교 수완을 발휘해, 조선에 대한 의심을 풀도록 했다. 다시 수어사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 뒤 공조판서와 형조판서를 역임하고, 호조판서가 되어 폐정개혁(弊政改革)에 힘썼다. 그러나 김자점 ( 金自點 )의 모역사건이 일어나 그와 가까웠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현종이 즉위하자 공조판서로서 판의금부사를 겸하여 재차 호남지방에 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남한산성을 개수하다가 이듬해에 병으로 죽었다. 저서로는 서봉일기가 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이시직(李時稷)

1572(선조 5) 1637(인조 1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 ( 延安 ). 자는 성유(聖兪), 호는 죽창(竹窓) · 삼송(三松).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석형(石亨)6대손이며, 양주목사 기(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군수 정현(廷顯)이고, 아버지는 찰방 ( 察訪 ) ()이며, 어머니는 목사 이응기(李應 菌 )의 딸이다.

1606(선조 39) 사마시에 합격하고 1623(인조 1) 사축서 별제가 되었다. 이듬해 직장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같은 해 이괄 ( 李适 )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공주까지 호종하였다. 이어 종묘서직장을 거쳐 성균관전적이 되었다. 1635년 병조좌랑 · 사간원정언 · 사헌부장령 · 세자시강원필선 등과 장악원정 · 사복시정 · 봉상시정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에 들어갔다가, 강화가 함락되자 사복시주부 송시영 ( 宋時榮 )이 먼저 자결하자, 묘 둘을 파서 시영을 매장하고 하나는 비워놓아 노복에게 자기를 그곳에 매장하도록 부탁한 다음 활끈으로 목을 매어 죽었다. 특히, 아들에게 전하라는 편지의 글 중에는 살신성인부앙무작(殺身成仁俯仰無 鼻 ) ’ 이라는 말이 보인다.

어려서 총명이 뛰어나 10세에 조호익 ( 曺好益 )에게 배웠으며, 뒤에 김장생 ( 金長生 )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강화의 충렬사 ( 忠烈祠 )와 회덕의 숭현사(崇賢祠)의 별사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이숙기(李淑琦)

1429(세종 11) 1489(성종 20). 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은 연안 ( 延安 ). 자는 공근(公瑾).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백겸(伯謙)이고, 아버지는 증 연성부원군(贈延城府院君) 말정(末丁)이며, 어머니는 한옹 ( 韓雍 )의 딸이다.

1453(단종 1) 무과에 급제해 훈련원주부를 지냈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참군 ( 參軍 )으로서 원종공신 ( 原從功臣 ) 2등에 책록되고, 세조의 가전훈도(駕前訓導)로 선발되었다. 1456(세조 2) 무과 중시에 급제해 사온서영(司 倍 署令)이 되었고, 1459년 평양판관, 1461년 영변판관을 지냈다.

1467년 이시애 ( 李施愛 )가 함길도에서 난을 일으키자 진북장군(鎭北將軍) 강순 ( 康純 ) 휘하의 맹비장(猛裨將)으로서 공을 세워 절충장군에 특진되고, 난이 평정된 뒤 적개공신 ( 敵愾功臣 ) 1등에 책록되어 전토와 노비를 하사받았다. 그리고 가정대부에 특진되어 이조참판이 되고 연안군(延安君)에 봉해졌다.

이 해 겨울에 건주위(建州衛)의 야인 정벌에 참여해 또 공을 세웠다. 이듬 해 함길남도절도사가 되고, 1470(성종 1) 북청부사를 겸임했으며, 1471년에는 좌리공신 ( 佐理功臣 ) 4등에 책록되었다.

이어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1475년 황해도관찰사, 이듬 해 전라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479년 다시 건주위 정벌에 참전하고, 그 공으로 이듬 해 자헌대부로 승진하였다.

이 해 전라도절도사로 있으면서 제주 관리에게 부탁해 말을 산 죄로 파직당하였다. 그 뒤 복직되어 영안도(함경도)관찰사 · 경상좌도병마절도사 · 지중추부사를 거쳐 1487년 형조판서가 되었다.

이듬해 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가 곧 교체되어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489년 특진관에 임명되어 특히 영안도 5진에 대한 자문에 응했으며, 이어 호조판서가 되었다.

성품이 강직했으며, 사사로운 것 때문에 공을 버리지 않았다. 경상도 지례 ( 知禮 )의 도동사(道東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양(靖襄)이다.

 

이숙함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 ( 延安 ). 자는 차공(次公), 호는 몽암(夢菴양원(楊原).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백겸(伯謙)이고, 아버지는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추증된 말정(末丁)이며, 어머니는 한옹 ( 韓雍 )의 딸이다.

1454(단종 2)에 생원으로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경창부승(慶昌府承)이 되고, 이듬해 세조가 즉위하자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이 되고, 감찰이 되었다. 1457년 문과중시에 급제하고, 1459(세조 5)에 세자사경(世子司經)으로 한관(閑官)을 제수받고 사가독서 ( 賜暇讀書 )하였다.

1464년에 집현전 대신 문사를 둘 때에 겸예문에 뽑히고, 이어 전라도경차관(全羅道敬差官)으로 나아가 읍폐를 살폈다. 그리고 응교 ( 應敎 )로 있을 때인 1466년에는 발영시(拔英試 : 세조가 이해 단오에 임시로 문신을 대상으로 시행한 과거)2등으로 급제하였다.

1470(성종 1)에 사섬시첨정이 되고, 이어 군기시정·판교 등을 역임하였다. 1484년에는 홍문관부제학에 임명되었다. 1485년에는 서거정 ( 徐居正 ) 등과 함께 동국통감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1488년에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이듬해 수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이어 1490년에 성균관대사성·충청도관찰사를 거쳐 1498년에 이조참의에 이르렀다. 글씨를 잘 썼다. 대제학에 증직되었고,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이후백(李後白)

1520(중종 15) 1578(선조 1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 ( 延安 ). 자는 계진(季眞), 호는 청련(靑蓮). 관찰사 숙함(淑 諫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현감 원례(元禮)이고, 아버지는 국형(國衡)이며, 어머니는 홍씨(洪氏)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큰아버지 집에 살면서도 어버이의 상을 예법대로 치렀다. 하루는 집안 어른이 그에게 단술을 권하자 비록 단술이라도 () ’ 자가 붙은 이상 상주가 마실 수 없다고 거절했다 한다. 1535(중종 30) 향시 ( 鄕試 )에 장원하고 곧 상경해 이의건 ( 李義健 ) · 최경창 ( 崔慶昌 ) · 백광훈 ( 白光勳 ) 등에게서 배웠다.

1546(명종 1)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5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주서를 거쳐 1558년 승문원박사로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케 하던 제도)하였다. 그 뒤 전한이 되고, 이어 시강원설서 · 사서 · 정언 · 사간 · 병조좌랑 · 이조정랑 · 사인 등을 역임하였다.

1567(선조 즉위년) 원접사 ( 遠接使 )의 종사관이 되어 명나라 사신을 맞았다. 그 해 동부승지에 발탁되었으며, 이어 대사간 · 병조참의를 거쳐 도승지 · 예조참의 · 홍문관부제학 · 이조참판을 역임했으며, 1573년 변무사 ( 辨誣使 )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인성왕후(仁聖王后 : 仁宗)가 죽어 복제 문제가 일어나자 3년상을 주장해 그대로 시행되었다.

1574년 형조판서가 되고 다음 해 평안도관찰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그 뒤 이조판서와 양관(兩館 : 홍문관과 예문관의 합칭)의 제학을 지내고, 호조판서로 있을 때 휴가를 얻어 함안에 성묘를 갔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청백리에 녹선되고, 앞서 종계변무(宗系辨誣 : 명나라의 태조실록 대명회전 에 이성계가 고려의 권신 李仁任의 후손으로 잘못 기재된 일을 바로잡은 것)의 공으로 1590년 광국공신 ( 光國功臣 ) 2등으로 연원군(延原君)에 추봉되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덕망이 높아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한다. 함안의 문회서원 ( 文會書院 )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청련집 이 있다. 시호는 문청 ( 文淸 )이다.

 

이호민(李好閔)

1553(명종 8)1634(인조 1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 ( 延安 ). 자는 효언(孝彦), 호는 오봉(五峯남곽(南郭수와(睡窩).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증조부는 호조판서·적개좌리공신 연안군(延安君) 숙기(淑琦), 할아버지는 홍문관수찬 세범(世範)이다. 아버지는 이천현감(伊川縣監) 국주(國柱)이다., 어머니는 정경부인으로 비안박씨(比安朴氏) 사직 여()의 딸이다.

이호민은 1579(선조 12)에 진사가 되었다. 1584년에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85년에 사관 ( 史官 )으로 발탁되었다. 응교·전한을 역임하였다. 집의·응교를 겸하였다. 1592년에 이조좌랑으로 임진왜란을 만나 의주까지 왕을 호종하였다.

요양(遼陽)으로 가서 명나라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여송(李如松)이 이끄는 명나라의 군대를 끌어들이는 데에 크게 공헌하였다. 상호군 ( 上護軍 행사직(行司直)을 거쳤다. 1595년에 부제학으로 명나라와의 외교문서를 전담하여 초안하였다. 1596년에 참찬관 ( 參贊官 )을 거쳤다.

이호민은 1599년에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사은사 ( 謝恩使 )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01년 예조판서로 인성왕후 ( 仁聖王后 )의 지문(誌文)을 다시 썼다. 대제학·좌찬성을 지냈다. 1604년에 호성공신 ( 扈聖功臣 ) 2등으로 연릉군(延陵君)에 봉해졌다. 그 뒤에 대광보국숭록대부 ( 大匡輔國崇祿大夫 )가 되었다. 부원군 ( 府院君 )에 진봉되었다.

이호민은 1608년에 선조가 죽자 영창대군 ( 永昌大君 )의 즉위를 반대하고 적서의 구별 없이 장자를 옹립하여야 된다는 입장론(立長論)을 주장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고부청시승습사(告訃請諡承襲使)로 명나라에 가서 입장론을 내세웠다. 광해군이 공을 세운 것에 대하여 포상하려 하였다. 그러나 고부시공로사차 告訃時功勞辭箚를 올려 이를 사양하였다.

이호민은 1612년 김직재 ( 金直哉 )의 옥사에 연루되었다. 1614년 정온 ( 鄭蘊 ) 등이 영창대군 살해에 대한 항의를 하다가 귀양을 가게 됐다. 그러자 청환수정온보외차 請還收鄭蘊輔外箚를 올려 이들의 방면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1615(광해군 7) 정인홍 ( 鄭仁弘 ) 등의 원찬론(遠竄論)에 봉착되어, 7년간 교외에서 대죄(待罪)하였다. 인조반정 후에 구신(舊臣)으로 우대를 받았다. 죽은 뒤에 청백리에 올랐다.

이호민은 문장에 뛰어났다. 임진왜란 때에는 왕명으로 각종 글을 많이 작성하였다. 그가 지은 교서 ( 敎書 )의 내용이 간절하여 보는 이의 감동을 자아냈다고 한다. 그러나 문장보다는 시에 뛰어나다는 평을 들었다.

의주에 있을 때에 적의 수중에 있는 서울을 삼도의 군사가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지은 시 용만행재하삼도병진공한성 龍灣行在下三道兵進攻漢城은 절창이다. 널리 애송되었다. 지례 ( 知禮 )의 도동향사(道東鄕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오봉집16권이 있다.

 

이명적(李明迪)

정조(正朝) 때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지낸 정운(鼎運)의 아들 명적(明迪)은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했다.

 

이술원(李述源)

1679(숙종 5)1728(영조 4).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연안 ( 延安 ). 자는 선숙(善叔), 호는 화촌(和村). 거창 출신. 할아버지는 김해도호부사 중길(重吉)이다.

1728(영조 4) 이인좌 ( 李麟佐 )가 난을 일으켜 청주를 점령하고 서울로 북상할 때 안의의 정희량 ( 鄭希亮 )도 이에 호응하여 안의의 남리에서 난을 일으키니 현감 오수욱(吳遂郁)은 현을 버리고 도망가 버렸다.

이 때 그는 거창의 좌수 ( 座首 )로서, 현감 신정모 ( 申正模 )에게 군사를 내어 정희량을 쳐야 한다고 하고 곧 현병(縣兵)을 동원하였으나, 모두 도망갔고 오히려 정희량의 반군에 가담하는 자가 많았다.

정희량의 격서가 오자 신정모는 도망쳤으며, 그만이 나아가 대적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생포되어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그의 아들 우방(遇芳)은 우영장(右營將)을 따라 거창에서 정희량을 공격하였는데, 장사 여해달 (呂海達)이 정희량을 사로잡아 군중(軍中)에 보내 오니, 그 자리에서 희량의 목을 베어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 그의 사절(死節)이 조정에 알려지자 양무원종공신(揚武原從功臣)에 봉하고 사헌부집의를 증직하였다.

뒤에 영조는 어사 이종성 ( 李宗城 )을 보내어 치제하게 하였고 가선대부에 대사헌을 증직하는 동시에 관찰사를 시켜 거창의 포충사 ( 褒忠祠 )에 제향하게 하였다. 시호는 충강(忠剛)이다.

 

이우방(李遇芳)

술원의 아들 우방(遇芳)이 아버지의 시신을 거두고 우두령(牛頭嶺)에 올라가 적 틈에 잡혀 있는 거창 시민에게 포고를 하였다. "거창군민은 나의 말을 들어라. 역적 희량에게 붙어 있으면 죽을 날이 멀지 않을 것이요, 희량을 잡아 오진(吾陳)에 데려오면 조정에 품하여 녹훈을 할 것이다." 군민들이 밤중에 정희량의 거소를 습격하여 회량을 묶어 우방의 진용에 데려오자 난이 평정되었다.

 

이봉수(李鳳秀)

1778(정조 2)1852(철종 3). 조선 후기의 학자·문신. 본관은 연안 ( 延安 ). 자는 자강(子岡), 호는 대은 ( 大隱 ) 또는 금계(襟溪). 아버지는 이조판서 시원(始源)이며, 어머니는 청풍김씨(淸風金氏)로 현감 안묵(安默)의 딸이다.

종조부 이직보 ( 李直輔 )와 임로 ( 任魯 오희상 ( 吳熙常 ) 등에게 수학하여 1805(순조 5) 생원시에 합격하고, 1812년 세마 ( 洗馬 )가 되었으며, 감찰·의빈부도사(儀賓府都事의령현감을 지냈다. 뒤에 동녕부판관을 거쳐 장악원정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므로 정조가 그를 특별히 사랑하여 근사록을 하사, 그에게 면학의 정신을 격려하여 주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금계집66책이 있다.

 

이지수(李趾秀)

1779(정조 3)1842(헌종 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 ( 延安 ). 자는 계린(季麟), 호는 중산재(重山齋). 형신(衡臣)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희보(熙輔)이고,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명원(命源)이며, 어머니는 경주김씨(慶州金氏)로 통덕랑 하주(廈柱)의 딸이다.

19세에 서울로 올라가 족부(族父) 병원(秉源)에게 수학하였다. 1809(순조 9) 사마시에 합격하고 1813(순조 1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 이어 성균관전적·사간원정언을 거쳐 병조좌랑·시강원사서가 되고, 1825년 옥구현감으로 나갔고, 1831년 동부승지, 1840(헌종 6) 회양부사 등을 지내고, 1842년 다시 동부승지가 되었다.

옥구현감으로 있을 때는 민폐를 없애고 백성을 구휼하는 한편 향약을 만들어 교화에 힘썼다. 동부승지가 되어서는 여러 차례 소대(召對 : 왕의 부름에 의한 대좌)에 응하여 국가기본정책을 건의하였다. 만년에는 향리에 돌아와 중산재를 짓고 후진교육에 힘썼다. 저서로는 중산재집8권이 있다

 

이약우(李若愚)

1782(정조 6)1860(철종 1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 ( 延安 ). 자는 경용(景容), 호는 호거(壺居). 길보(吉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성원(性源)이고, 아버지는 돈녕부도정 낙수(洛秀)이며, 어머니는 서유후(徐有後)의 딸이다. 규장각대교 곤수(崑秀)에게 입양되었다.

1810(순조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1813년 강릉참봉에 제수되었다가 세자익위사부수(世子翊衛司副率)를 지냈다. 이 해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홍문관에 보직된 뒤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이듬해 대사성을 거쳐 1826년 병조참의, 1835(헌종 1) 대사헌이 되고, 그 뒤 이조·병조·형조·공조·호조의 참의를 두루 역임하였다.

1841년 동지정사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1848년 형조판서에 이어 좌참찬으로 삼조보감 三朝寶鑑의 찬집당상(纂輯堂上)을 겸하고, 이어 예조판서에 올랐다. 그 뒤 청녕군(淸寧君)에 봉해지고 공조·이조의 판서, 판의금부사를 역임하였다. 헌종이 죽자 왕의 시장제술관(諡狀製述官)이 되고, 1852(철종 3) 이후 예조·공조·형조의 판서가 되었다.

이 후 지중추부사 겸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그는 위로 삼조(三朝 : 순조·헌종·철종)의 권우(眷遇)를 입었고, 아래로 사류(士類)의 추앙을 받아 청요직을 두루 편력하였다. 문장에 뛰어나 그의 상소문은 명문으로 유명하였으며, 문사(文詞)는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고, 역학·산수에도 정통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이종우(李鐘愚)

석농체(石農體)의 독특한 필체를 이루었다.

1801(순조 1)? 조선 후기의 문신·서화가. 본관은 연안 ( 延安 ). 자는 대여(大汝), 호는 석농(石農). 조원(肇遠)의 아들이다. 1851(철종 2) 홍문관에 등용되었다. 1853년 부사과·예방승지, 1856년 강원도관찰사, 1859년 우참찬·이조판서를 지냈다. 1860년 판의금부사, 이어 병조판서, 1862년 함경도관찰사로 있다가 함흥민란으로 파면되었다.

시문과 서화에 뛰어났고, 글씨는 독특한 필체를 이루어 세칭 석농체라 한다. 그의 행서나 초서는 신위 ( 申緯 )와 김정희 ( 金正喜 )의 필법이 어우러진 글씨로 필력이 있으며 짜임새도 뛰어나다. 그림은 산수화를 잘하였다. 강원도 삼척의 산양서원묘정비 山陽書院廟庭碑를 썼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이현섭(李鉉燮)

한일합방의 소식을 듣고 비분하여 자결함.

1844(헌종 10)1910. 조선 말기의 순국지사. 본관은 연안 ( 延安 ). 자는 서규(瑞圭), 호는 우헌(愚軒). 경상북도 군위 출신. ()의 후손이다.

1885(고종 22) 성균생원으로 관직에 나아갔다가, 1895년 일제가 민비를 시해하는 만행을 자행하자 통분을 참지 못하여 관직을 사임, 안동군 예안면 양평리에 은거하였다. 1910년 국치의 소식을 듣고 음독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이도재(李道宰)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서양의약 교육기관을 세우게 했다.

1848(헌종 14) 1909.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 ( 延安 ). 자는 성일(聖一), 호는 심재(心齋) · 운정( 普 汀). 서울 출신. 명익(溟翼)의 아들로 건익(建翼)에게 입양되었다. 1882(고종 19) 생원으로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홍문관부수찬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6월 경상좌도암행어사, 10월 강원도암행어사를 거쳐 승정원동부승지에 특제(特除), 1884년 참의군국사무(參議軍國事務) · 강원도독련어사(江原道督鍊御史) · 좌부승지를 역임하고 이조참의가 되었다. 1885년 성균관대사성을 거쳐 1886년 호군으로 재임 중 사대수구파에 의해 고금도에 유배, 가극안치(加棘安置)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개화파 정부가 수립되자 풀려나와 공무협판으로 군국기무처의원(軍國機務處議員)이 되었고, 이어 전라도관찰사로 부임, 그 해 12월 동학농민군 지도자 전봉준 ( 全琫準 )을 순창에서 사로잡아 서울로 압송하였다. 이듬해 5월 지방 관제개혁에 따라 전주부관찰사가 되고, 이어 부장으로 군부대신에 임용, 곧이어 학부대신으로 바뀌었으나 단발령이 강행되자 이에 반대, 사직하였다.

1896년 동로선유사(東路宣諭使)로 특파, 강원도 지방 의병의 선유에 나섰고, 이어 중추원의관을 거쳐 궁내부특진관이 되었다. 1898년 외부대신 · 비서원경(秘書院卿)을 거쳐 농상공부대신이 되어 그 해 7월에 설치된 양지아문 ( 量地衙門 )의 총재관을 겸임하였다. 10월에 다시 학부대신이 되어 비서원경을 겸하고 지석영 ( 池錫永 )의 건의를 들어 한성의학교 설치를 인가, 우리 나라 최초의 서양의학 교육기관을 세우는 데 기여하였다.

이어 내부대신서리 · 궁내부특진관을 거쳐 경효전제조(景孝殿提調)가 되었다. 1899년 법부대신이 되어 고등재판소재판장을 겸하고, 이어 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 · 귀족원경을 거쳐 19007월 평안북도관찰사에 발령, 19023월까지 근무하였다. 그 뒤 재차 시종원경(侍從院卿) · 궁내부특진관을 거쳐 그 해 11월 홍문관학사, 12월 육군부장(陸軍副將)으로 철도원총재가 되었다.

1903년 초 외부대신, 그 해 말에 평안북도관찰사, 1904년 충청남도관찰사를 거쳐 내부대신 · 표훈원의정관(表勳院議定官)을 역임하고 다시 농상공부대신에 임명되었으며 1905년 다시 내부대신에 발령되었다. 경상북도 · 평안남도 · 충청남도 · 전라북도 · 충청남도 · 전라남도관찰사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9068월 그 동안의 공적으로 태극장 ( 太極章 )을 서훈받고, 그 뒤 장례원경 · 시종원경에 임명되었으나 19077월 총리대신 이완용의 모함으로 박영효 등과 함께 나문정죄(拿問定罪)당하였다. 글씨에 뛰어났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이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매국 5적신(五賊臣)의 처형을 상소했던 설 등이 명문(名門)의 전통을 이었다.

 

이동녕(李東寧)

1869(고종 6) 1940. 독립운동가 · 정치가 · 행정가. 본관은 연안 ( 延安 ). 자는 봉소(鳳所), 호는 석오(石吾, 石五, 石梧) · 암산(巖山). 충청남도 천원 출신. 영해군수 병옥(炳 汶 )의 큰아들로, 어머니는 광주안씨이다.

고향 서당에서 전통 교육을 받고 10세 때 충청북도 청원군 문의면 후곡리의 할아버지 석구(錫九)의 집에서 소년시절을 보냈다. 1885년 일가가 상경, 서울 종로 봉익동에 정착하였다. 다음 해 아버지를 따라 경상북도 영해읍으로 갔으며, 1888년 평양으로 갔다.

1892년 응제진사시(應製進士試)에 합격하였다. 다음 해 아버지를 따라 원산으로 가서 육영사업에 조력하였다. 1896년 독립협회에 가담, 개화 민권의 기수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다음 해 독립협회 주최로 서울 종로 네거리에서 만민공동회 ( 萬民共同會 )가 열렸을 때 잘못된 정치를 탄핵하고 상소하며 국민운동 일선에 나섰다. 이로 인해 이준 ( 李儁 ) · 이승만(李承晩)과 함께 옥고를 치렀다.

18987개월 간의 옥고를 치르고 출옥한 뒤 이종일 ( 李鍾一 )이 창간해 경영하는 제국신문 帝國新聞 에 사설을 집필하면서, 이종일의 가르침을 받아서 본격적으로 민족의식과 사상 정립을 위해 수련하였다. 제국신문 논설위원으로 개화 논설 수십 편을 집필하였다.

1903년 이상재 ( 李商在 ) · 전덕기 ( 全德基 )목사 등 종교인과 손잡고 YMCA운동을 전개하였다. 1904년 한일협약이 강제 체결되자 서울 상동교회 ( 尙洞敎會 )에서 전덕기 · 양기탁 ( 梁起鐸 ) · 신채호 ( 申采浩 ) · 조성환 ( 曺成煥 ) 등과 같이 청년회를 조직해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면서 김구 ( 金九 ) · 이회영 ( 李會榮 ) 등과 교유하기 시작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일제의 강압으로 체결되자 동지들과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이 조약이 체결된 덕수궁 대한문(大漢門)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면서 조약의 무효와 파기를 선언했다가 일본 헌병에 잡혀 2개월 간 고문을 받았다.

1906년 만주 북간도 용정촌(龍井村)으로 망명, 이상설 ( 李相卨 ) · 여준 ( 呂準 ) 등과 같이 서전평야에 서전의숙(瑞甸義塾)을 설립, 한국 동포와 2세의 민족 교육을 본격적으로 실시해 독립운동의 기수들을 길러냈다.

1907년 이준 · 이상설 · 이위종 ( 李瑋鍾 )이 헤이그특사로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 가자 귀국하였다. 귀국 후 안창호 ( 安昌浩 ) · 전덕기 · 양기탁 · 이동휘 ( 李東輝 ) · 이갑 ( 李甲 ) · 노백린 ( 盧伯麟 ) · 유동열 ( 柳東說 ) 등과 신민회 ( 新民會 )를 조직하였다.

또 안창호 · 이회영과 협력해, 전국에 교육단을 조직하고 대한매일신보 大韓每日申報 발행을 지원하였다. 대성학교 ( 大成學校 )와 오산학교(五山學校) 설립에도 조력했으며, 상동학교(尙洞學校)를 설립, 교사로 재직하기도 하였다.

1910년 나라를 일제에 빼앗긴 뒤 만주 서간도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망명하였다. 이석영(李石榮) · 이철영(李哲榮) · 이회영 · 이시영 ( 李始榮 ) · 이상룡 ( 李相龍 ) 등과 함께 한국인 자치기관인 경학사 ( 耕學社 )를 설립해 교포들의 신분 보장과 독립정신 고취에 앞장섰다.

곧이어 신흥학교(新興學校)를 설립하고 초대 소장으로 취임하였다. 이 학교는 1919년 신흥무관학교로 확장, 개편되어 항일독립군 양성의 중추기관이 되었다. 1913년 노령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났으며,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2년 뒤 이상설의 알선으로 시베리아총독 보스타빈이 약속한 한국군관학교(韓國軍官學校) 설립을 추진하다가 발각되어 3개월 간 투옥되었다. 1915년 이상설 · 이동휘 등과 함께 대한광복회정부를 수립하였다. 독립운동가의 사업기관으로 권업회 ( 勸業會 )를 조직해 대동신문 大東新聞 해조신문 海朝新聞 을 발행, 보급하였다.

1918년 길림성(吉林省)에서 대종교 김교헌 ( 金敎獻 ) 외에 조소앙 ( 趙素昻 ) · 조완구 ( 趙琬九 ) · 김좌진 ( 金佐鎭 ) · 여준 등 민족 대표 39명이 191921일 독립선언서[대한독립선언서]를 내외에 선포할 때 대종교 서도본사(西道本司)의 포교책으로 활약하였다.

그 해 2월 블라디보스토크와 니콜리스크에서 상해로 건너가 정부 조직을 모색하였다. 국내에서 3 · 1운동이 일어나자 413일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의 초대 의장으로 선임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탄생을 주선하였다. 41328명의 동지들과 임시정부 수립을 내외에 선포하고 얼마 뒤 국무총리로 취임하였다.

그 해 9월 국내 · 노령 · 중국 3갈래의 임시정부가 통합되고, 헌법이 대통령 중심제로 바뀌면서 내무총장(內務總長)이 되었다. 1921년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서 돌아와 국무총리로 지명하자 사양하다가, 이동휘 일파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사퇴한 뒤 국무총리대리를 맡아 위기를 극복하였다.

그 뒤 국민대표회(國民代表會)의 소집 등 대한민국임시정부 불신이 표면화되었다. 이에 그는 안창호 · 여운형 · 조소앙 · 이시영 · 차이석(車利錫) · 홍진 ( 洪震 ) · 노백린(盧伯麟) 등과 시사책진회 ( 時事策進會 )를 조직, 대동단결을 호소하였다.

전장(鎭江)에서 요양 중 상해로 와서 1924년 국무총리로 정식 취임했고, 군무총장(軍務總長)도 겸임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장기 궐석으로 직무수행이 어렵게 되자 대통령 직권을 대행하였다.

1925년에 두번째로 의정원의장[11]이 되었다. 1926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헌법이 대통령 중심제에서 국무령 제도로 개정되자 잠시 국무령(國務領)이 되었으며, 법무총장도 겸임하였다. 다음 해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 ( 主席 )이 되어 약화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튼튼한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1929년 김구 등과 한국독립당 ( 韓國獨立黨 )을 조직, 이사장에 추대되었고, 당기관지 한보 韓報 · 한성 韓聲 을 발행하였다. 192910월 세번째로 의정원의장[13]이 되어 존폐의 위기를 극복하였다. 그리고 두번째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1930 1932)이 되는 중책을 짊어졌다.

1932년 이봉창 ( 李奉昌 ) · 윤봉길 ( 尹奉吉 ) 의거를 김구 · 이유필 ( 李裕弼 ) 등과 지도, 윤봉길의 쾌거를 이룩하였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과 같이 저장성(浙江省) 자싱(嘉興) 수륜사창(秀綸紗廠)으로 피신하였다.

1935년 세번째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1935 1939)이 되었다. 이때 양우조 ( 楊宇朝 ) · 엄항섭 ( 嚴恒燮 ) · 이시영 · 조성환 · 차이석 · 송병조 ( 宋秉祚 ) 등과 함께 한국국민당 ( 韓國國民黨 )을 조직해 당수로 추대되었다.

1937년 한국국민당 대표로 대한광복진선(大韓光復陣線)을 결속하고 진로를 모색하였다. 193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네번째 주석(1939 1940)이 되어 김구와 합심해 전시 내각을 구성, 시안(西安)에 군사특파단을 파견하였다.

그 뒤 급성폐렴으로 쓰촨성(四川省) 치장( 鮫 江)에서 죽었다. 조국광복 후 1948년 사회장으로 봉환식을 거행했고, 효창원에 안장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여기에 사진 설명을 넣으세요.

 

 

항렬(行列)

태자첨사공파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25

()

32

()

39

()

26

()

33

()

40

()

27

()

34

()

41

 

28

()

35

()

42

 

29

()

36

()

43

 

30

()

37

()

44

 

31

()

38

()

45

 

 

대장군공파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25

(),()

28

(),()

31

(),()

26

(),()

29

(),()

32

 

27

(),()

30

(),()

33

 

 

판소부감공파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29

()

33

()

37

()

30

()

34

()

38

()

31

()

35

()

39

()

32

()

36

()

40

 

 

판소부감공파. 중월사공파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9

()

13

()

17

()

10

()

14

()

18

()

11

()

15

()

19

 

12

()

16

()

20

 

 

통례문사공후파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15

(),()

18

(),()

21

()

16

(),()

19

(),()

22

()

17

(),()

20

(),()

23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연안(延安) 이씨(李氏)는 남한에 총 30,274가구가 126,56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게시물 목록
번호 제 목 글쓴이 등록일 조회
505 옥구 이.jpg 옥구이씨(李) 청남 14-08-30 3210
504 예안 이.jpg 예안이씨(李) 청남 14-08-30 3766
503 영해 이.jpg 영해이씨(李) 청남 14-08-30 3166
502 영천 이1.jpg 영천이씨(李) 청남 14-08-30 4645
501 영천 이.jpg 영천이씨(李) 청남 14-08-30 5734
연안 이.jpg 연안이씨(李) [2] 청남 14-08-30 5800
499 여주 이.jpg 여주이씨(李) 청남 14-08-30 3683
498 양주 이.jpg 양주이씨(李) 청남 14-08-30 2248
497 양성 이.jpg 양성이씨(李) 청남 14-08-30 3707
496 양산 이.jpg 양산이씨(李) 청남 14-08-30 2924
495 안악 이.jpg 안악이씨(李) [2] 청남 14-08-30 5177
494 안성 이.jpg 안성이씨(李) 청남 14-08-30 3859
493 안산 이.jpg 안산이씨(李) 청남 14-08-30 3408
492 아산 이.jpg 아산이씨(李) 청남 14-08-30 4365
491 신평 이.jpg 신평이씨(李) 청남 14-08-30 4047
490 순천 이.jpg 순천이씨(李) 청남 14-08-30 3435
489 수원 이.jpg 수원이씨(李) 청남 14-08-30 3264
488 수안 이.jpg 수안이씨(李) 청남 14-08-30 5041
487 성주 이.jpg 성주이씨(李) 청남 14-08-29 4750
486 성산 이.jpg 성산이씨(李) [2] 청남 14-08-29 3445
게시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