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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영천이씨(李)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영천이씨)

 

본관(本貫): 영천(寧川)

시조(始祖): 이능간(李凌幹)

유래(由來):

 

영천 이씨(寧川李氏)의 시조(始祖) 이능간(李凌幹)은 고려의 이름난 명신으로 충선왕(忠宣王)이 토번(吐蕃)으로 귀양 가자 역졸을 시켜 금()을 바쳐 왕과 호종신(扈從臣)의 옹색을 면하게 했으며, 원나라가 고려에 성()을 두려고 하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서 원제(元帝)에게 주청(奏請)하여 이를 중지시켜 <토좌당(兎左當)>이라는 사림(士林)의 액호(額號)를 받았고, 충혜왕(忠惠王)때 조적의 난이 일어나자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왕을 호종(扈從)하여 일등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영천부원군(寧川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영천(寧川)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이명(李銘)

상서(尙書)를 역임했다.

 

이상휴

고려(高麗)가 망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일생(一生)을 마친 능간(凌幹)의 손자 상휴가 유명하다.

 

이분(李芬)

상휴의 아들로 조선조에서 벼슬을 하지 말라는 아버지의 명에 따라 관직에 나가지 않고 현금(玄琴)을 즐겼던 분()이 유명했다.

 

이중엽(李重燁), 이부춘(李富春), 이재성(李在誠)

동몽교관(童夢敎官)을 역임하였다.

 

이복겸(李福謙), 이덕근(李德根)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추증되어 영천 이씨를 더욱 빛냈다.

 

 

李賢輔(이현보) 선생의 일화

 

   학이 되어 날라 간 글시

지금부터 약 400여년전 조선시대 연산군 때 경상 관찰사로 있던 농암 이현보선생이 고향의 수려한 산천도 즐길 겸 늙으신 어머님을 위하여 말년에 정계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안동군 도산면 분천동에 愛日堂(애일당)이라는 정자를 짓고 현판을 걸기 위하여 중국에 있는 명필에게 글씨를 받으려고 아끼는 제자를 보내게 되었다.

중국까지 머나먼 길을 가게 된 제자는 반년 만에 중국에 도착하여 다시 그 명필을 찾기에 한 달을 헤매게 되었다. 드디어 깊은 산중에 있는 그를 찾아 조선국 농암선생에 대한 말씀을 올리며 애일당 현판 글씨를 청하였다. 그 사람은 뭐 보잘것없는 사람의 글씨를 받으려고 그 머나먼 길을 왔느냐고 하면서 산에서 꺾어 온 풀줄기로 먹을 듬뿍 찍더니 단숨에 '愛日堂(애일당)' 석자를 써서 내주었다.

좋은 붓에 잘 간 먹을 찍어 정성스레 써 줄 것을 기대했던 제자는 내심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건 글씨가 아니라 장난으로 휘갈긴 것 같았다. 제자는 다시 써 줄 수 없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중국 명필은 「이 글씨가 마음에 안 드시오?「하더니 쓴 종이를 가볍게 두 세 번 흔들었다. 그러자 세 글자가 꿈틀거리더니 세 마리의 하얀 학이 되어 날아가 버렸다.

제자는 자신의 우매함을 백배 사죄하며 다시 써 줄 것을 며칠 동안 간청하였으나 결국 거절당하고 말았다. 허나 그는
「이 아래에 내려가면 나보다 나은 사람이 있으니 찾아가 보라.」고 했다. 제자는 어쩔 수 없이 그가 이르는 대로 다시 산 아래에 있는 명필을 찾아가니
「산중에 계신 분이 우리 스승님인데 그곳을 찾아가 보시오.」하므로 자신이 당한 일을 소상히 밝히니「본국에서도 별로 남에게 글씨를 써주지 않는 분인데, 특별히 조선국에서 왔다하여 써 주셨는데‥‥ 좋은 글씨를 놓쳤군요」하며 자기의 글씨는 스승 글씨의 반도 따라가지 못하며, 학 세 마리는 못되어도 한 마리 정도는 된다고 말하며 붓을 들어 정중히 써 주었다.

글씨를 받아 가지고 돌아온 제자는 농암선생께 면목이 없고 그 애석함을 누를 길이 없어 아무에게도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가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유서에서 이 사실이 밝혀졌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애일당의 현판은 걸려지게 되었다.그러던 어느 해 큰 홍수가 나서 정자를 휩쓸어 갔을 때 현판도 함께 떠내려가 영영 잃어버렸다고 체념을 했는데 그 곳에서 백 여리 떨어진 곳의 한 어부가 이 현판을 주워서 들고 와 무사히 애일당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어부는 고기를 잡으려고 강에 나갔더니 무언가 물결을 타고 흘러 내려내는데 금빛 찬란하기에 행여 금물을 입힌 진귀한 것이 아닌 가해서 급히 배를 저어 건져보니 애일당 현판이었다고 한다.

 

2

조선 왕조 연산군 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원 사관으로 관직에 발을 디딘 이현보는 자기 직책에 충실한 관리였다. 사관이라면 왕의 정사를 기록하는 직책이라, 이현보는 자기 직책을 더욱 충실히 수행하기 위하여 왕과 가까운 자리 앞으로 옮겨 연산군의 언행과 정사를 상세하게 기록해 나갔다. 그러나 사관의 이러한 태도는 오히려 연산군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연산군은 마침내 금부에 명하여 임금을 업신여겼다는 죄목으로 이현보를 잡아들이도록 하였다. 금부에 잡혀간 이현보는 임금을 불경한 죄로 모진 벌을 받았는데, 그 후 연산군은 이현보를 정 6 품 벼슬인 정언(正言)으로 승진시켰다.
고집이 세고 자기 일에 충실한 이현보를 골려 주려는 연산군의 장난기 섞인 짓이었지만, 임금 불경죄로 벌을 받았으니 당연히 삭탈관직당할 줄 알았던 이현보는 어리둥절하기만 하였다.  
이현보는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와 함께 있을 때는 항상 천진한 어린애처럼 어리광을 부려 기쁘게 해드렸다.
부모가 그걸 좋아하셨던 까닭이다.
그래서 그 부모가 연로하여 병약해졌을 때 이현보는 고향으로 달려가, 점잖은 부사의 벼슬아치임에도 불구하고 옥관자가 달린 관복을 차려 입고 뽐내며 자랑하기도 하였다.

  벼슬이 더욱 올라 부제학으로 올랐을 때 그는 고향으로 내려가, 90세가 된 부모를 위해 고을 안 의 70세 이상 되는 노인들을 모셔와 부모와 함께 지내도록 하였다. 그 노인들 앞에서 이현보는 즐거움과 웃음을 선사하기 위하여 어린애처럼 행동하곤 하였다.

  형조참판의 자리에 오른 뒤 그는 90세가 넘은 부모를 모시고 살기 위하여 조정에 사직서를 제출 했다.
그러나 조정에서 사직서를 받아들이지 않자 그는 병을 핑계로 부모가 있는 고향으로 내려 가 부모를 봉양하며 부모를 기쁘게 하는 일에 여념이 없었다.  
그는 부모가 맑은 공기와 수려한 경치를 즐기며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분천 동쪽 언덕 위에 '愛日堂'이라는 정자를 세웠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집'이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그는 날씨가 좋은 날이면 몸소 아버지를 업고 이 정자를 오르내렸다.
이와 같은 효도를 받은 이현보의 아버지 이흠은 100세 가까운 천수를 누리다 세상을 떠났다.

 

 

 

李軒(이헌) 공의 묘비

 

 

永川人 官 軍器小尹

 

영천 이씨가 예안현에 처음 살게 된 것은 공이 군기소윤을 지내다가 예안현 봉수산 남쪽 사천 마을에 자리 잡고 살면서부터라고 한다.

공의 아들 의흥현감 ()가 분천으로 이사를 가서 살면서부터 그 후손들이 번성하였다.

공의 묘소와 부인의 묘소도 분천에 있는데, 풍수설에 의하면 청룡두 미암하의 작은 개울에 龜巖(구암)이 있고, 그 위에 화개가 있어서 자손이 번성한다 하였다는데, 임진왜란 때 당나라 군대들이 이 바위를 水口(수구)에 굴러 떨어뜨리고 부터는 부진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중종 때의 명신 농암 현보는 공의 현손이며, 선조 때 학자 간제 덕홍은 농암의 從孫(종손)이다.

 

少尹公墓在慶尙道禮安縣 西十里許 烽燧山南 沙川洞也 字局 辛坐之原 艮破立表石

夫人墓在 乾位左邊越山 相望處 亥坐之原 巽破立表石

東距 禮安縣十里 汾川二十里 南距 安東府四十里 西距 瓮泉驛二十里 西北距 榮川界十里 北距奉化縣 六十里

享祀每歲以三十月上旬正式

山圖後記

夫人墓 靑龍頭層巖下 小溪中有龜巖 巖號爲華蓋堪與衆皆言 子孫之蕃行 以此巖之在於水口也 世傳龍蛇之亂 爲唐人所擠下 而水中 自此以後子孫不振 故先父兄 謀欲上覆 累次試事而未果 哲廟正月日 遠近諸宗竭力擠上 記事一冊藏在齋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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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윤공의 묘는 경상도 예안현 서쪽 10리 봉수산 남쪽 사천동에 있으며 신좌 언덕 간파에 표석을 세우다.

부인의 묘는 乾位(건위)에 있으며, 좌변 산 넘어 바라보이는 해좌 언덕에 표석이 서 있다.

동으로는 예안현과 10리 떨어져 있고, 분천과는 20리 떨어져 있으며, 남으로 안동부와 40리 떨어져 있고, 서쪽으로는 옹천역과 20, 서북으로는 영주 경계와 10, 북쪽으로 봉화현과 60리 떨어져있다.

향사는 매년 3월과 10월 상순에 정해서 행하고 있다.

 

산도후기

부인의 묘 앞에는 청룡두 바위아래 작은 개울이 있는데, 개울 안에는 龜巖(구암)이 있고 암 위에는 화개가 있었는데, 가문의 자손들이 번성하는 것은 이 바위가 수구에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당나라 사람들이 이것을 물속으로 밀어 떨어뜨린 이후로는 자손들이 부진하므로, 옛날 부형들이 바위를 위로 들어 올리려고 몇 번을 시도 하였으나 아직 이루지 못하고 있다.

철종 경술정월 원근의 많은 종인이 힘을 다해 위 기사를 적은 한 책을 재사에 소장한다.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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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영천 이씨(寧川李氏)는 남한에 총 23,290가구, 95,47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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