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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이씨(李)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영천이씨)

 

본관(本貫): 영천(永川)

시조(始祖): 이문한(李文漢)

유래(由來):

 

영천 이씨(永川李氏)의 시조(始祖)는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한 이문한(李文漢)이며, 그의 후손으로 신호위 대장군(神虎衛大將軍)을 지내고 영양군(永陽君)에 봉해진 대영(大榮 : 시호는 문정), 울산 군사(蔚山郡事) 중영(仲榮), 영동정(令同正) 전을 각각 파조로 하는 3계통이 있다.

 

가문의 중요 인물

 

이인(李仁)

고려 때 인()이 좌우위상장군(左右衛上將軍)을 역임하였다.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무신. 1274(원종 15) 별장, 1276(충렬왕 2) 낭장, 1278년 중랑장 ( 中郎將 )을 거쳐 1281년 장군에 올랐다. 주로 원나라에 사신으로 내왕하였으며, 사료에서 확인되는 사행횟수는 일곱 차례에 이른다.

 

이국보(李國寶)

국보(國寶)가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역임했다.

 

이종검(李宗儉)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영천(永川). 호는 쌍계(雙溪).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석지(釋之)이고, 아버지는 집현전직제학 안직(安直)이며, 어머니는 문화유씨(文化柳氏)로 판의금 호()의 딸이다.

1429(세종 11) 종제인 이보흠 ( 李甫欽 )이 동방(同榜) 을과로, 식년문과에 동진사 ( 同進士 )로 동방급제(同榜及第)하여 한림·직제학·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효성이 지극하고 아우인 종겸(宗謙)과 우애가 독실하여 문종이 효우당(孝友堂)이라는 당호를 내려주었다.

세조가 즉위하여 이보흠과 내종인 유성원 ( 柳誠源 )이 화를 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용인 남곡(南谷)으로 돌아가 이맹전 ( 李孟專 김시습 ( 金時習 ) 등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고 여생을 마쳤다. 1786(정조 10)에 광주 ( 廣州 ) 대치사(大峙祠)에 봉향되었고, 1804(순조 4) 안성 덕곡(德谷)에 정려문이 세워졌으며, 공주 숙모전(肅慕殿)에 추배되었다.

 

이보흠(李甫欽)

? 1457(세조 3).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경부(敬夫), 호는 대전(大田). 아버지는 부사직 현보(玄寶)이다.

1429(세종 11)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1430년 동부훈도관(東部訓導官)으로서 공법 ( 貢法 )의 논의에 참여해 전제(田制)와 세법을 상론하였다. 1434년에는 사정 ( 司正 )으로서 우효강(禹孝剛) · 김순 ( 金淳 ) 등의 문사와 함께 자치통감훈의 資治通鑑訓義 찬수에 참여하였다.

이어 집현전박사를 역임하고, 1443년 감찰로서 사은사 ( 謝恩使 )의 서장관 ( 書狀官 )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성균주부가 되었다. 이어 축성법에 대한 건의나 공법 논의 등에 참여하였다.

1445년에는 외직을 맡을 때의 경험 등을 토대로 사창법(社倉法)에 관한 건의를 해, 사창 제도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던 세자(뒤의 문종)의 총애를 받았다.

1448년 지함양군사(知咸陽郡事)의 외직을 맡고 있던 중 사창 제도를 시행하려는 세자의 뜻에 따라 지대구군사(知大丘郡事)로 옮겨 최초로 사창법을 시험적으로 실시하였다.

대구 지방의 효과적인 사창법의 시행으로 순량(循良) ’ 의 칭송을 얻었으며, 문종은 즉위 후 총애하던 그를 임기를 채우지 않고 경직 ( 京職 )에 초탁(超擢)하려 했으나 사창제의 계속적 실시를 위해 임기를 마쳤다.

그 공으로 1452(문종 2) 장령에 초배(超拜)되었고 1454(단종 2) 직예문관으로서 세종실록 편수의 기주관이 되었다. 수양대군 ( 首陽大君 )이 단종을 몰아낸 이후는 지순흥군사(知順興郡事)로 보외(補外)되었다가 1457(세조 3) 순흥에 유배중인 금성대군 유(錦城大君瑜)와 함께 재향품관(在鄕品官) · 군사(軍士) · 향리 ( 鄕吏 ) 등 이른바 영남 사인들을 규합해 단종 복위를 모의했다는 혐의를 받고 박천에 유배된 뒤 같은 해 10월에 교살되었다.

그가 정몽주 ( 鄭夢周 )의 문하인 권근 ( 權近 )과 변계량 ( 卞季良 )의 제자인 유방선 (柳方善)에게 출신지인 영천에서 수학한 점, 길재 ( 吉再 )의 묘에 문제(文祭 : 以文祭之)를 지낸 점, 그리고 대구의 수령을 맡을 때 공렴품관(公廉品官) 등 영남 지방의 재향사류(在鄕士類)와 연결해 성리학적 향촌 질서의 이론으로 주자(朱子)가 고안한 사창법을 최초로 실시한 점 등으로 미루어 영남 성리학 학통의 계승 과정에서 일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조 때 복관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충청도 청안 ( 淸安 )의 향사(鄕祠), 광주(光州)의 대치사(大峙祠), 순흥의 성인단(成仁壇), 영천의 송곡서원 ( 松谷書院 )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이현보(李賢輔)

1467(세조 13) 1555(명종 10). 조선 중기의 문신 · 시조작가.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비중(菲仲), 호는 농암(聾巖) · 설빈옹(雪 靈 翁). 예안 출신. 참찬 흠()의 아들이다. 1498(연산군 4)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32세에 벼슬길에 올라 예문관검열 · 춘추관기사관 · 예문관봉교 등을 거쳐, 150438세 때 사간원정언이 되었으나 서연관의 비행을 논하였다가 안동에 유배되었다.

그 뒤 중종반정으로 지평에 복직되어 밀양부사 · 안동부사 · 충주목사를 지냈고, 1523(중종 18)에는 성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받았으며, 병조참지 · 동부승지 · 부제학 등을 거쳐 대구부윤 · 경주부윤 · 경상도관찰사 · 형조참판 · 호조참판을 지냈다.

154276세 때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만년을 강호에 묻혀 시를 지으며 한거하였다. 홍귀달 ( 洪貴達 )의 문인이며, 후배인 이황 (李滉) · 황준량 ( 黃俊良 ) 등과 친하였다. 조선시대에 자연을 노래한 대표적인 문인으로 국문학사상 강호시조의 작가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저서로는 농암집 이 있으며, 작품으로는 전하여오던 어부가 漁父歌 를 장가 9, 단가 5장으로 고쳐 지은 것과 효빈가 效嚬歌 · 농암가 聾巖歌 · 생일가 生日歌 등의 시조작품 8수가 전하고 있다. 1612(광해군 4) 향현사 ( 鄕賢祠 )에 제향되었다가 1700(숙종 26) 예안의 분강서원 ( 汾江書院 )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효절(孝節)이다.

 

 

聾巖(농암) 李賢輔(이현보)의 일화

 

漁父詞(어부사) 聾巖歌(농암가) 등으로 국문학사에 빛을 남긴 李賢輔(이현보)의 자()斐仲(비중), 호는 聾巖(농암)으로, 현감 ()의 아들로 1467(세조 13), 안동시 예안현 분천에서 태어났다.

 

그가 벼슬길에 나간 것은 32 세 되던 연산군 43, 문과에 급제하자 교서관 副正字(부정자)틀 거쳐, 5월에 종사랑이 되면서부터이다.

 

춘추관 기사관으로 있던 1504(연산군 10) 3, 끔찍한 甲子士禍(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연산군의 포악을 간하던 대신들이 모두 誅殺(주살)됨을 보고도 농암은 연산의 광적인 학정을 그대로 사초(史草)에 직필(直筆)했다. 그로 인하여 귀양살이에서 죽을 고비를 겪고 생명이 위태로운 지경에서도 농암의 처신은 한결같이 때쪽 같고 의연했으며 , 붓끝은 향상 곧고 날카로우며 , 성품이 소탈하고 댐담하여 燒酒陶甁(소주도병)이란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농암은 중종조에 司諫(사간)을 거처 호조좌랑 형조좌랑 등 요직에 있었으나, 농암의 마음은 향상 연로하신 부모를 걱정하고, 좀더 편안하게, 좀더 즐겁게 해 드리고자 하는 지극한 효성으로 가득 차 있어 모는 벼슬아치들이 선망하는 요직을 마다하고 한직을 자원하여 고향이 가까운 영천 군수로 부임하였다.

 

빛나는 덕행과 문장 학식은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바이지만, 농암이 지난 여러 값진 일 가운데서도 농암으로 하여금 더욱 출중하게 한 가장 큰 바탕이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지성으로 일관한 효도에 있다고 함이 마땅하다고 본다.

 

농암의 고향인 안동시 예안현 분천동은 지금은 거매한 안동 댐으로 수몰 되고 말았으나, 당시에는 낙동강 상류로서 도산 팔경의 산수의 아름다움 가운데서도 가장 절승인 절벽이 강기슭을 장식하고, 뒤로는 노송을 낀 깎아지른 봉우리가 병풍을 두른 듯한 곳이다.

 

강기슭의 널찍한 큰 바위(농암) 위에 자리하여 강을 굽어보는 곳에 애일당(愛日堂)이 있으나, 이는 아버지를 즐겁게 하고자 지은 집이라고 한다. 고향 가까운 영천 군수로 있을 때 지은 정자인데, 그것은 좀 더 좋은 환경에다 좀더 좋은 거처를 마련하여, 연로해 가는 어버이께 펀안함과 즐거움을 드리려는 정성에서 지은 것이다.

 

부모님을 모신다는 기쁨과 함께 어버이의 늙어감에 매한 두려움 때문에, 날과 달이 가는 것이 하도 애닮고 아쉬워 하루하루의 날을 사랑하고 아낀다는 뜻에서 이름마저 애일당(愛日堂)이라 했다 한다.

 

山紫水明(산자수명)하고 솜림(松林)이 울창한 그곳, 애일당 당상에 양천과 고향의 노인 아홉 분을 모시고, 구로회(九老會)를 열어 부모의 마음을 즐겁게 하니, 함께 모여 웃고 즐기던 향중 노인들을 생각한다면 오늘날 경로효친(敬老孝親)의 뜻도 담겼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달 밝은 가을, 꽃피는 봄철과 명철 같은 때면 노인들을 초청하여 산해진미를 장만 하여 농암은 어린아이가 되어 색동옷에 어려광을 부리면서 술잔을 올려 어버이를 기쁘게 해 드렸으나, 머리에는 서릿발이 배어가면서도 부모 앞에서는 한결같이 어린이었다.

 

아침이면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의관을 정제하고는 부모님 처소에 나아가 손수 자리를 치우고, 저녁이면 여러 아우들과 함께 부모님 곁에서 화기애애하게 즐기다가 자리를 깔아 드리고야 물러나 곤 했다.

 

바쁜 벼슬길에서도 자주 시간을 얻어 고향을 찾았고, 어버이 봉양을 위하여 벼슬을 내놓고 돌아오곤 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모천께서 는 85세를 일기로 돌아가시고, 부친께서는 98세를 사시다가 별세하였으니, 농암은 71 세의 고령이 되도록 평생을 효도하며 사신 분이라고 할 수 있다.

 

놓암의 양친이 별세한 뒤인 만년에는, 다시 그 아들 들이 농암을 섬기기를 꼭 전날 농암이 그 어버이 봉양한 듯 그대로 했다 하니, 애일당은 농암의 가문을 길이 효도 집안으로 만든 효양(孝養)源泉(원천)이라고도 했다.

 

또 농암에게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농암의 敬老思想(경로사상)이니, 농암이 지방 수령으로 많은 고을을 살면서 가는 곳마다 교학(敎學)敬老(경로)에 힘쓴 것이다.

 

그의 나이 50 세 되는 중종 11년 충주(忠州) 목사로 부임하였을 당시, 그 고을 습속이 일반적으로 생활은 사치한데다가 생업에는 게을렀기 해문에, 농암은 먼저 상류층에서부터 모범을 보이도록 하는 한편, 동리마다 지도 책임자를 정하여 관내를 샅샅이 돌며 독려하게 하면서, 자신도 마을을 순시하며 살피고 깨우치기에 정성을 다했다.

 

이렇듯 정성스런 다스림이 백성의 감화를 일으켜, 1 년쯤 될 무렵엔 고을 사람들의 생활 모습이 완연히 달라져 검소 근실한 기풍이 크게 진작되었으며, 따라서 피폐 했던 살림이 영글어가기 시작했다.

 

이듬해 2월에는 향교에서 釋奠祭(석전제)를 지내고 나서 양로회(養老會)를 성대히 베풀어, 그 고을 주민들로 하여금 경로의 정신을 북돋아, 주민들 이 스스로 늙어가는 자신들의 어버이를 섬기게 되니, 관내에 敬老孝親(경로효친)의 기풍(氣風)이 진작(振作)되었다.

 

그리고, 안동(安東) 부사로 재임 하던 1519(중종 14) 99일에, 府內(부내)에 사는 양반으로부터 천민에 이르기까지 80세 이상되는 노인을 모두 참여시켜 성대한 경로잔치를 베풀었는데, 그 자리에 농암 자신의 부모님도 모지고 술잔을 올리면서 부내(府內) 주민들에게 경로 효천을 몸소 솔선 해, 보는 사람마다 청송이 자자하였다.

 

또한 이 광경을 화공을 불러 그리게 하니, 이 그럼이 기묘 겨추 화산 양로연도(己卯季秋花山養老燕圖)이다.

 

한 마디로, 농암은 1555년 그의 나이 89세를 일기로 돋아 가실 때까지 평생을 효양(孝養)과 경로(敬老)를 몸소 설천한 장본인으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더없이 좋은 본보기가 된다.

 

참고 문헌 <내 고장 전통 가꾸기 (安東雄府)>

 

 

 

李賢輔(이현보)공의 묘갈명.

 

 

李賢輔(이현보) 世祖 12年 丁亥(1467)~ 明宗 10年 乙卯(1555) 89. 字 棐仲. 號 聾巖.

永川人 軍器少尹 軒玄孫. 諡 孝節

 

공은 연산군 1년에 생원, 4년에 식년문과에 급제한 귀 7년에 예문관 검열이 되어 사관으로 입시하여 史草(사초)의 서기관 자리가 榻前(탑전)과 멀리 떨어져 있어 임금의 거동이나 언어를 기록하기가 힘드니 더 가까이 나가게 하소서.하고 상언하여 허락을 받았는데, 뒤에 갑자사화 때 정언으로 書筵官(서연관)所失(소실)을 논함에 연산군이 이것을 허물 잡아 안동 안기역에 귀향가게 하였다 하고, 그 다음 해에도 공이 검열때의 언동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연산군이,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고 얼굴이 거고 수염이 있는 자를 하옥하라.하여 70여일을 갇혀 있다가 방면 되었다는 고사가 있다.

공은 중정반정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안동, 대구, 경주 부윤, 경상도관찰사, 현조참판을 역임하였으며 71세 때 부친상을 당하고 재산면 정자동으로 이장하였는데, 신도비명은 忍齋(인재) 洪暹(홍섬) 찬이며 글씨는 礪城尉(여성위) 宋寅(송인)이 썼다. 이 신도비는 가정 45(명종 231566)에 다시 세웠으나 우리 지방에서는 가장 오래된 신도비라 여겨진다.

그리고 墓前碑(묘전비)蔡濟恭(채제공) ()으로 선조 24(1824)에 세운 것이다.

 

碑銘

自古人臣當宦成名立之後非不欲斂身而退老於閒適率多難於自由苟且求容其德足以廉頑立懦年足以爲國大老蕭散丘園能保晩節求之近世惟孝節李公一人而已公諱賢輔字棐仲其先永川人有諱軒始移居于禮安縣遂爲縣人官至軍器少尹於公爲高祖少尹生諱坡義興縣監縣監生諱孝孫通禮門奉禮奉禮生諱欽麟蹄縣監縣監娶護軍權謙之女以成化丁亥七月二十九日生公奉禮公嘗遊山寺夢有神人告曰積善之家必有餘慶旣寤聞權氏婦生男心異之故公少名有慶公生而穎秀骨相不凡頗好弋獵不肯專意學問自遊鄕校始發憤讀書爲詞章造語警拔見重流輩受業於文匡公洪貴達爲文匡所器重中乙卯司馬試捷戊午科初補校書館正字辛酉見薦爲藝文館檢閱始秉史筆書事不苟壬戌公啓于燕山主曰史官記人主言動而遠伏榻下請稍近榻前使記注無疏漏主心咈而且許之甲子陞成均典籍選入侍講院爲司書司諫院正言論書筵官所失是時燕山方讎視言官因此恚甚曰諫官當有聞卽啓何以淹至一日下禁府竟配安東之安奇驛丙寅中廟反正公起自謫籍授戶曹佐郞陞敍司憲府持平直不撓權時人號爲燒酒陶甁蓋以外黭然而內實淸烈也戊辰以親老由刑曹正郞出守永川郡癸酉秩滿入爲軍資僉正陞司諫院司諫甲戌出爲密陽府使善治取最遺愛在民乙亥因事罷丙子授繕工副正出牧忠州丁丑朝廷欲使近其親便養許換安東公以化民之本莫先學校大會儒士贍養有方遠近輳集黌舍不能容入爲司僕寺正移司憲府執義遞爲軍資監副正未幾出牧星州上以公所至有美政賜以表裏下書褒奬乙酉以親老辭歸丙戌還拜侍講院輔德丁亥特陞通政爲兵曹參知尋爲同副承旨戊子因事左遷出爲大丘府使未久棄官歸己丑出守榮川郡辛卯遭外艱癸巳服闋拜刑曹參議轉入弘文館爲副提學移右副承旨甲午春出爲慶州府尹剗弊尙簡治效尤著丙申以親年益老解官歸養以禮曹參議徵未及就命擢陞嘉善階觀察慶尙道公以本道親舊所在監司職兼風憲若許私謁則法由此壞峻爲之防子弟親舊無敢伺候於公館者一道肅然丁酉因事罷丁內艱公時年七十有一猶能率諸弟廬墓三年己亥服闋拜刑曹參判公雅有退休之志至庚子秋上章乞骸骨不許請浴椒井時吾先君文僖公爲相知公欲不復來請留之上引見公諭令遄歸以是志不果遂遷戶曹參判壬寅春遞拜同知樞府又引疾請浴買舟東歸一時搢紳自議政以下出餞都門外列幕至于漢濱車馬騈闐觀者以謂近古所未有之盛事癸卯中廟嘉公恬退特授知中樞府事以奬之推恩先世追贈皇考以議政府左參贊母夫人以貞夫人祖考以吏曹參判曾祖以兵曹參議乙巳仁廟嗣位公以老病不能造闕因拜疏陳請大略以謂爲治之要在乎得人明以辨之於受任之初信以委之於旣任之後先王非不好賢樂士而或致賢邪相混任用不終此殿下耳目之所及也惓惓以難愼和一爲新政之要見者以爲深得老成告君之體上嘉之特陞資憲階以褒之是年秋仁廟昇遐公方在野二聖相繼賓天聞喪呼慟欲輿疾赴臨子弟以公衰病已甚挽而力止之及今上己酉金贊成光準請褒節義命加正憲階是年國擧優老之典又授公崇政階甲寅有一諫官啓于上曰李某國之耆德精力不衰苟能召致必有獻替之益上降書褒美仍命乘馹赴闕公以褒辭太過懼不敢當上箋辭謝因獻言曰禪科之復寺院之修得非殿下向善之心有所間斷乎辭甚切至其處畎畝不忘君老而彌篤乙卯五月寢疾至六月十三日終于正寢享年八十九訃聞于朝上震悼謂左右曰累召不來今則已矣予甚慘怛賻贈有加卜得是年八月二十八日葬于縣北龍頭山南道谷先塋之側公天性孝友急於奉養立朝事主恩眷不衰而乞閒請浴上章相繼朝廷亦知其至情無不順適其意故專城以養者幾八邑卜居汾川築室其上名堂以愛日以爲侍親遊玩之所又名其巖曰聾巖以寓意焉嘗以副提學來覲是時參贊公年九十四叔父鈞年九十二舅權僉知受益年八十二又聚鄕人年高者六人作九老會子孫盈前公親戲綵以娛之榮孝之盛聳動觀聽親旣沒喪葬之資不責諸弟取辦於家力周門族之窮者令不失嫁娶之期時得君賜輒分戚隣深以滿盈爲戒一級之陞每瞿然不寧者久之一時三子以三城來養而反以爲憂不以爲榮服用簡儉敬謹自將雖當燕居必晨興盥漱正衣冠而出終日簾閣據几不以寒暑而廢勤於爲人拙於謀家性雖高介接人以誠不遺愚賤酒食邀請亦不強辭鄕曲愛慕視以父兄居鄕不肯干公以私本縣民小邑凋戶出一夫弊幾不可捄公始倡議請以八結出夫賦輕役均民賴其賜料事明審如有疑則虛懷以咨已有失則對人不諱人服公公直之量澹泊寡欲不慕聲利構小堂于宅邊扁以明農壁畫陶潛歸去來圖人亦知公志之有在年踰致仕據禮力辭朝廷以公筋力耳目未覺衰替不可引去公自料身退而秩進處野而朝銜因循悶抑如此則是終無遂志之日非臣子進退以義之道自庚子以不求退不已期於必退然後已禁家不受祿俸因而家食者十四年而愛君憂國不以進退異其心身旣閒益以溪山自娛竹杖芒鞋穿林陟巘田夫牧豎遇之不知其爲宰相也喜乘小艇往來臨江寺以爲棲息之地風神脫洒韻致森逸酒微醺令侍兒歌漁父詞超然有遺世獨立之想吟成詩句立意淸新有非少年盛作之所能及也臨終諸子在傍號泣公曰吾年九十汝輩俱存厚受國恩死無可憾喪務儉約葬無過期言訖而絶公娶安東權氏忠順衛孝誠之女生六男一女男長曰碩樑次文樑平陵道察訪次希樑奉化縣監次仲樑登甲午文科爲承旨方有時名次季樑義興縣監次叔樑進士女適郡守金富仁側室生二男閏樑屬太醫次曰衍樑文樑娶李承孫之女生一男三女男曰元承女長適黃俊良次適琴應洗次適金箕報希樑娶黃珽女生二男一女男曰善承克承女嫁宋福崇承旨娶習讀潘士洞女生一男曰令承季樑娶金玉堅女生一男二女男曰光承女長適楊漢臣次適任鈞叔樑娶李復新女郡守生四男曰壕承旨公旣免喪携退溪李知事滉之狀囑暹以神道之文嗚呼公與吾先人同年司馬公之長玉署吾忝博士熏炙旣久義不敢辭況退溪述公心事旣詳且盡而其言足以信後世故爲序悉用退溪之文而綴以銘曰懿德在人莫先於孝公能盡孝曾閔是紹可貴匪爵爵來縻我身退秩崇人不我捨九十曰耄聖未必有公能享之天賦孔厚德爵與齒是謂達尊兼斯三者從古鮮存明農有堂樂我耕耘喚巖以聾擬斷知聞貢疏兩朝期以華勛忠由孝推敢忘吾君王念老成禮辟空勤如蒼生何前途告曛誠乎愛日怠孝者企聲利若浼嗜進者恥懦立頑廉沒餘淸風石于紀實式昭無窮嘉靖四十五年丙寅二月日大提學洪暹撰礪城君宋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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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추부사 증시효절이공신도비명

예로부터 인신(人臣)은 벼슬은 이루고 명망(名望)이 선 뒤에는 몸을 거두어 한적한 곳에 물러나 있고 싶으나 대개 자유로이 하기 어려워 구차하게 容納(용납)함을 구()하였다. 그 덕은 완악한 자가 청렴하여지고 나약한 자가 서게 되며 그 나이에 족히 나라에 대로가 되고 고향 언덕과 동산에 쓸쓸히 한산하게 거닐고 만절(晩節=만년)을 보전함은 근세에 구해 보니 오직 효절(孝節) 이공 한 사람 뿐이다.

 

()賢輔(현보)요 자는 棐仲(비중)이고 그 선조는 영천인 이다. () ()이 처음 예안현(禮安)에 이거하여 드디어 縣人(현인)이 되었다. 벼슬은 군기소윤(軍器小尹)인데 공에게 고조가 되고 소윤이 () ()를 낳았으니 의흥현감이고 현감이 () 효손을 낳으니 통례문봉례(通禮門奉禮)이며 () ()을 남았으니 인제현감이다. 현감이 호군(護軍) 권겸(權謙)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성화(咸化) 二十九일에 공을 남았다. 처음에 봉례공(奉禮公)이 일찍 산사(山寺)에 노닐다가 꿈에 신인(神人)이 고하여 말하되 적선의 집에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다.고 하였다. 잠을 깬뒤에 권씨 며느리가 생남하였다는 것이다.

마음이 이상한 까닭으로 공의 어릴 때 이름을 유경(有慶)이라 하였다. 공이 나서부터 才智(재지)가 뛰어나서 골상(骨相)이 비범하고 뜻이 호합하여 구애됨이 없고 자못 활 쏘고 사냥하기를 좋아하여 학문에는 전력하지 아니 하였다. 향교에 遊學(유학)할 때부터 비로소 발분하여 글을 읽고 문장을 짓게 되니 글을 짓는데 뛰어나서 여러 무리 가운데 견중(見重)이 되었다. 文匡公(문광공) 홍귀달(洪貴達)에게 수업하니, 문광이 그릇 된 바를 중히 여겼다.

을묘 년에 진사에 합격하고 무오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처음 교서관정자(敎書館正字)가 되고, 신유 년에 藝文館檢閱(예문관검열)에 추천되었다. 처음 사필(史筆)을 잡고 국사를 쓰는데 구차하지 아니하였다. 임술 년에 공이 연산주(燕山主)에 계달하여 말하되 사관은 인주(人主=임금님)의 언동을 기재하는데 멀리 엎드려 있으니 청하건 데 임금 앞에 가까이 있어 기주(記注)하는데 소루하고 빠짐이 없도록 하여야 합니다.하니 폐주(廢主)가 마음에 엇잖니 여겨 불응하였다. 갑자년에 성균관전적에 올라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 사간원정언(司談院正言)이 되어 서연관(書連官)의 잘못을 말하니 이때 연산주가 언관(言官)을 원수같이 보아 이로 인하여 그만 화가 나서 말하되 諫官(간관)들은 일이 있으면 즉시계달(啓達)하지 어찌 늦추어 하루를 넘기는고?하며 금부(禁府)에 내리고 안동(安東)의 안기역(安奇驛)에 유배를 시켰다. 병인년에 중종대왕(中宗大王)이 반정(反正)하여 공이 배소로부터 일어나 戶曹佐郞(호조좌랑)을 받고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올랐다.

곧아서 권세에 힘쓰지 않아서 때에 사람들이 소주도병(燒酒陶甁)이라 칭호하니 대개 바깥은 검은 듯 하나 안으로는 밝고 맵다는 말이다. 무진년에 어버이가 늙음으로 형조정랑(刑曺正郎)에서 영천군수(永川郡守)로 나갔다 계유년에 만기가 되어 들어와 군자첨정(君子倉正)이 되었다.

갑술년에 나가 밀양부사(密湯府使)가 되어 잘 다스려 백성에 끼친 사랑이 켰었다. 을해년에 파면되고 병자년 겨울에 선공부정 (繕工副正) 을 받고 겨울에 충주목사(忠州牧使)로 나갔다. 정축년에 조정에서, 가까이서 그 어버이를 편양(便養)하라고 안동으로 바꾸었다. 공이 백성을 교화하는 근본이 학교가 제일이라 하여 선비들을 크게 모아 공궤를 넉넉히 하니 원근에서 모여들어 향교가 다 용납하지 못하였다. 들어와 사복시정 (司儀待正)이 되고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로 옮기고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으로 바뀌었다.

얼마 되지 않아 성주목사(星州牧使)로 나가니 임금이 공이 가는 곳에 정치가 아름답다.하여 표리(表裏=의복)를 주시고 유서(論書)로 표창하셨다.

을유년에 친로(親老)로 사직하시고 돌아오셨다. 병술년에 시강원보덕(侍講院補德)을 제래 받았고, 정해년에 특별히 통정(通政)으로 오르고 병조참지(兵嘗參知)가 되었다가 곧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다.

무자년에 좌천이 되어 대구부사(大郎府使)가 되었다. 얼마 후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기축년에 영천군수(永川郡守)가 되었다가 신묘년에 外艱喪(외간상)을 만났다가, 계사년에 복을 마치고 刑曹參議(형조참의)를 제베 받고 다시 흥문관(弘文館)으로 들어가 부제학(副提學)이 되었다가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옮겼다. 갑오년 봄에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나가서 폐해를 없애고 간소화하여 다스린 효과가 더욱 드러났다. 병신년에 친년(親年)이 더욱 높아서 벼슬을 두고 돌아와 봉양하였다. 겨울에 禮曹參議(예조참의)로 불렀으나 가지 않았다. 발탁이 되어 嘉善大夫(가선대부) 慶尙道(경상도) 관찰사(觀寮使)를 제수(除授)받으니 공이 본도는 친구들이 있는 바이니 감사(監司)는 풍헌(風憲)을 겸하는 것이니 사사로이 되는 것을 허락 한다면 법이 문란하여질까 하여 엄하게 막으니 자제와 친구들이 감히 공관에 오지 아니하고 일도(一道)가 숙연해졌다.

정유년에 어떤 일로 파면되었다가 內艱喪(내간상)을 당하니 공이 이때에 연세가 71세나 오히려 여러 아우를 데리고 여묘(廬墓) 3년을 하다가 기해년에 복을 마치고 刑曹參判(형조참판)을 제수 받았다.

공이 본래 퇴휴(退休)의 뜻이 있었더니 경자년 가을에 이르러 글을 올려 몸을 빌었으나 허락을 아니 하시어 椒井(초정)에 목욕을 청하였다.

때에 나의 선군(先君)文僖公(문희공)이 정승이 되어 공이 다시 오지 않을 것을 알고 머물러 두기를 청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시고 속히 돌아오라 명령하시어 이로써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겨울에 호조참판(戶曺參判)에 옮겼다. 임인년 봄에 同知中樞府使(동지증추부사)가 되었다가 가을에 또 병으로 목욕을 청하고 배 삯을 주고 돌아오니 일시에 縉神(진신=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의정(議政) 이하로부터 도문(都門) 밖에 나와 전별하니 천막이 한강까지 뻗혔고 수레가 꽉차게 되니 보는 사람이 근고에 없었던 일이라 하였다. 계묘년에 중종대왕(中宗大王)이 공의 恬退(념퇴=벼슬을 사직함)嘉賞(가상)히 여기시어 특별히 知中樞府事(지중추부사)를 주시고 선세(先世)를 추중(追贈)하여 황고(皇考)를 의정부좌참찬(議政府左參贊)을 주시고 모부민(母夫人)을 정부인(貞夫人), 조부를 吏曹參判(이조참판)에 중조를 병조참의(兵曺參議)를 주시었다.

을사년에 인종대왕(仁宗大王)이 즉위하시니 공이 노병으로 조정에 못가시고, ()를 올려 청하기를 대략 정치의 요령은 사람을 얻는데 있으니 임무를 맡기는 처음에 밝음으로써 변별하여야 하며, 임명 후에 믿으로 맡겨야 합니다. 선왕께서 어진 이를 좋아하시고 선비를 즐거이 하셨으나 혹 어진 이와 간사한 무리가 서로 섞이고 임용(任用)이 마치지 못 하였으니 이것은 전하의 耳目(이목)에 미친 바입니다. 힘써서 삼가 어렵기는 하나, 하나로 화하는 것을 신정(新政)의 요령으로 삼아야한다 하였으니 보는자가 깊이 노성(老成) 한 분이 임금께 고하는 체통을 얻었다 하였다. 임금이 아름답게 여겨 특별히 자헌(資憲)계제를 올려 포상하였다,

이 해 가을에 인종(仁宗)이 승하하시니 공이 시골에 있었는데 두 임금이 계속 돌아가시니 상()을 듣고 슬픔을 부르짖어 수레로 빨리 부임하려 하시니 자제들이 공의 쇠병이 심하다하여 힘써 만류하여 그만두게 하였다. 명종 을유년에 김찬성(金贊成) 광준(光準)이 절의 표상을 청하여 정헌계제(正憲階悌)를 주시고, 이 해에 나라에서 우로지전(優老之典)이 있어 또한 숭정을 주셨다. 갑인년에 한 諫官)이 계발하여 말하기를 이모(李某)는 나라의 기덕(者德)이요, 정력 (精力)이 쇠하지 않았으니 진실로 불러오면 반드시 선()을 취하고 악을 버림의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글을 내려 褒美(포미)하시고 역마를 타고 조정으로 오게하이니 褒辭가 지나침을 惶懼(황구)하게 여기고 글을 올려 사양하시고 또 소에 말하기를 선과(禪科)의 복설(復說)과 사원(寺院)의 수선이 전하의 선()에 향하는 마음이 간단(間斷)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사의(辭意)가 절실하여 시골에 있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충성은 늙어서도 더욱 돈독하였다. 을묘년 오월에 병이 들어 613일에 정침(正寢)에서 돌아가시니 향년이 89세였다. 부음이 조정에 올라가니 상이 놀라서 슬퍼하시고 좌우에 이르되 여러 번 불러도 오지 않더니 지금은 그만이다.고 하시고 내가 심히 슬프고 비통하구나. 부의를 더 주도록 하라.하였다. 이 해 828일에 縣北(현북) 용두산(龍頭山) () 도곡 선영하에 장사 지내다.

공의 천성이 효도와 우애에 급하여 조정에 나아가 임금을 섬김에 은혜를 돌봄이 쇠하지 아니하였고, 한가하기를 빌어 목욕을 청하고 잇따라 소장을 올리니 조정에서도 또 그 지정(至情)을 알고 그 뜻에 순하게 쫓음으로 군수로 봉양케 한 것이 여덟 고을이며 汾川(분천)에 살면서 그 위에 정자를 지어 愛日堂(애일당)이라 하고 어버이를 받들어 위안하여 노시고, 그 바위는 농암이라 하여 자기의 생각을 사물에 비하여 은근히 나타냈다. 일찍이 부제학으로 근친하여 오니 이 때 참찬공의 나이 94세요 숙부 ()의 나이 92세이고 외숙(外叔) 권첨지 수익(受益)82세이고 또 향인 중 나이 높은 사람 6인을 모아 구로회(九老會)를 만들었고 자손이 앞에 가득하고 공이 채색 옷으로 춤을 추워 영광스런 효도의 성()함이 시청자로 하여금 움직이게 하였다.

어버이가 이미 돌아 가셔도 상장(喪葬)의 비용은 여러 아우에게 돌리지 아니 하시고, 문족(文族)의 곤궁한 자가 있으면 힘으로 도와주어서 혼인에 떼를 잃지 않게 하고, 때로 임금 하사(下賜)가 있으면 인척에 나누어 주고 가득히 찾는지 깊이 경계하며 일급이라도 올리면 놀란 듯이 불안해하였다.

일시에 3(三子)가 셋 고을로 봉양하는 것을 도리어 근심하여 영광으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복용(服用)이 간소 검박하여 공경하고, 삼간으로 지내고 비록 평상시에도 반드시 새벽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의관을 바르게하고, 종일 주렴 안에서 의지하며 춥고 덥더라도 폐하지 아니하고 남을 위하여 부지런하고 자기를 위해서는 졸()하고, 성품이 고상 개결(介潔)하나 남을 대접하는 데는 정성으로 하여 어리석고 천한 사람에게도 빠지지 않고 술과 음식으로 청하면 억지로 사양하지 않으니 향당 사람들이 모두 애모(愛慕)하여 부형과 같이 보더라도, 시골에 살면서도 사사(私事)를 공()에 범하지 않았다. 本縣(본현)이 백성도 적고 고을도 피폐하여 일호당(一戶堂) 한 사람이 나오게 되니 폐가 구할 수가 없었다.

공이 倡論(창론)하여 팔결(八結)에 한명씩 나오게 하니 세금이 가볍고 부역이 고르게 되어 백성이 모두 편리하였다. 일을 헤아림에 밝게 살피고 만일 의심이 있으면 허심탄회하게 물어보고, 자신이 과실이 있다면 남에 대하여 감추지 않으니, 사람이 공의 공직(公直)한 도량에 감복하였다 단박하고 욕심이 적어 명성과 이익을 생각지 아니하고, 집가에 작은 당()을 지어 명농(明農)이라 일컫고 벽에 陶淵明(도연명)의 귀거래도(歸去來圖)를 붙이니, 남이 공의 뜻 있음을 알았고, 치사할 연령이 넘어 예법을 따라 힘껏 사양하였다. 조정에서 공의 근력 이목(耳目)이 쇠퇴하지 않으므로 퇴직할 수 없다하였다.

공은 몸이 물러 나와도 벼슬살이로 因循(인순=옛 습관을 고치지 못하고 우물거림)하여 지나가면 끝내 이를 수 없을 것이니 이것이 신하의 진퇴 의리가 아님을 생각하고, 경자년 이후로 기어이 물러 나와서 14년을 지냈으나 애군우국(愛君憂國)은 진퇴(進退)가 다르지 아니하였고, 그 심신은 이미 한가하여 더욱 계산(溪山)을 즐기며 죽장망혜로 언덕과 숲을 찾으니 농부와 소먹이가 만나도 재상(宰相)인지 몰랐다.

작은 배를 타고 임강사(臨江寺)를 왕래하여 栖息(서식)하는 곳으로 삼으니 풍신(風神)이 탈속 하였고 운치가 조용하였다. 술이 약간 취하면 시아(待兒). 하여금 어부가를 부르게 하고 초연히 세상일을 잊어버리고 독립하는 생각이 있었다. 시를 지어도 의사가 청신하여 소년의 생각이 미칠 수 없었다.

임종에 모든 아들이 호읍(號泣)하니 공의 말이 내 나이90이고 너희들이 모두 있고 국은을 후히 받았으니 죽어도 유감이 없다. 초상을 검약하게 하고 장사는 시기를 넘기지 말라.하고 말을 마치고 가시었다. 공이 안동 권씨 충순위 효성(孝誠)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61녀를 낳으니, 장자는 碩樑(석량)인데 요수하였고 ,다음은 文樑(문량)인데 평릉도찰방(平陵道察訪)이고, 다음은 希樑(희량)인데 봉화현감(奉化縣監)이고, 다음은 중량(仲樑)인데 갑오년에 문과에 올라 승지(承旨)가 되고 바야흐로 때에 이름이 있고, 다음은 계량(季樑)인데 의흥현감(義興縣監)이고, 다음은 숙량(叔樑)인데 진사(進士), 딸은 군수(郡守) 김부인(金富仁)에게 갔고, 다음에 2남을 낳으니 윤량(閨樑)인데 태의(太醫)가 되고, 다음은 衍樑(연량)이다. 문량(文樑)은 이승손(李承孫)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3녀을 낳았으니 아들은 원송(元承)이고, 딸은 황준량(黃俊良)에게 갔고, 다음은 금응선(琴應洗)에게 갔고, 다음은 김기보(金箕報)에게 갔다.

희량(希樑)은 황정(黃珽)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21녀를 남으니 아들은 선승(善承)이고 극승(克承)이며 딸은 송복숭(宋福崇)에게 갔다.

승지(承旨)는 습독 반사형(潘士泂)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으니 영승(令承)이고, 계량(秊樑)은 김옥견(金玉堅)의 따님에게 장가가서 12녀를 낳았다. 아들은 광승(光承)이고 큰딸은 양한신(楊漢臣)에게 갔고 다음은 임균(任均)에게 갔다.

숙량(叔樑)은 이복신(李復新)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군수(郡守)4남을 남으니 (((()이다, 승지공이 이미 면상(免喪)하고 퇴계 이지사 ()이 지은 행장(行狀)을 가지고 ()에게 신도문(神道文)을 지으라 부탁하니 슬프다. 공이 내 선인(先人)과 등년 사마(司馬)시고 공이 옥당 장관 때 내가 박사로 더렵혔고 편달하기를 오래하였으니 의()로서 감히 사양할 수 없고 하물며 퇴계가 공의 심사(心事)를 지어 자세히 하였고, 또 다하였으니 그 말이 족히 후세에 믿을만한 까닭으로 서()는 퇴계의 글을 쓰고 이어 명()을 지으니 명에 말하기를

아름다운 덕이 사람에 있는데 효()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 공이 효를 다하였으니 증자(曾子)를 이을 것이다. 귀한 것이 벼슬이 아넌데 벼슬이 와서 나를 얽매었네. 몸은 물러 나와도 벼슬은 높였으니 남이 나를 버리지 아니하였다. 90()라하니 성인(聖人)도 반드시 두지 못하였는데 공이 능히 누렸으니 천성이 심히 후하였다. 덕과 벼슬과 나이를 달존(達尊)이라 하였는데, 이 세 가지를 겸하였으니 예전부터 있기 드물었다. 명농당(明農堂)이 있으니 내가 갈고() 매는() 것이 즐겁다. 바위를 농()이라 불렀으너 알고 듣는 것을 단절할까 하였다. 양조(兩朝=중종·인종)에 소()를 올려 요순시대를 기약하였고 충성은 효도로부터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다. 내 임금을 어찌 잊을 손가 임금께서 노성(老成)을 생각하여 예()로 부르기를 부지런히 하였다. 창생을 어찌하는고. 앞길이 저물어 간다. 정성은 애일(愛日)에 있으니 효도에 게으른 자가 본받아야 하며 명성(名聲)과 이익은 더럽힐 듯하니 나아가기를 즐거워하는 자가 부끄러운 것이다. 나약한 자가 서게 되고 완악한 자가 청렴하게 되니 돌아가신 후에 청풍(淸風)이 남았다. ()에 사실을 기재하여 무궁토록 밝게 한다.

 

嘉靖(가정) 45년 병인 2월 일

숭록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지경연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 춘추관 성균관사 강영군 洪暹(홍섬) ()

봉헌대부 여성군 송인(宋寅) (),

 

 

李文樑(이문량) 묘갈명

 

 

李文樑(이문량) 燕山君 4(1498)~ 宣祖 14年 辛巳(1581)

字 大成. 號 碧梧. 永川人 賢輔,

 

공의 묘소는 靈芝山(영지산) 庚坐(경좌)로서 현 도산면 분천리에 있다.

옛날에는 분천 강가로 난 길을 따라 계곡으로 올라갔지만 현 월천서원 가는 길로 가다가 좌측으로 꺾어 내려가면 된다.

공에게는 많은 蔭職이 내려졌고, 명종 14년에는 平陵道(평능도)찰방에 재수 되었으나 벼슬보다는 학문에 뜻을 두었다. 퇴계와 이웃하여 道義交(도의교)를 맺었다. 퇴계의 高弟(고제)錦溪(금계) 黃俊良(황준량)은 공의 사위였다. 문집 2권이 있다.

 

墓碣

公諱文樑 字大成 其先永川人 自軍器少尹諱軒 始移居于禮安汾川 是公五世祖 少尹之子諱坡 義興縣監 贈承政院左承旨 生諱孝孫 通禮門參奉 贈司憲府大司憲 大憲生諱欽 麟蹄縣監 贈兵曹判書 判書生諱賢輔 崇政大夫知中樞府事 贈諡孝節公 孝節娶 忠順衛權孝誠女 以弘治戊午十二月二十六日生公 公質美而 不見知能文而 屈於人命之竆也 暫試 馬官而 不復仕 以山水自娛 至辛巳十月七日 以疾終于正寢 享年八十四 公娶李承孫女 生一男 曰元承進士 三女 長嫡黃俊良牧使 次適琴應侁 次適金箕報司諫 又有 側生 曰福承 全承 元承無子 以從子 士純爲後 女適柳仲淹 應侁之子 曰硈 箕報之子曰克兌 元女適金瀹 次適李啓陽 以是年十二月二十七日 葬于靈芝山 南叢林庚坐之原 萬曆十一年癸未十月日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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墓碣

공의 휘는 文樑(문량)이고 자는 大成(대성)인데 그 선계는 永川人(영천인) 軍器少尹(군기소윤) ()이 처음 禮安(예안) 분천으로 이거함에서 비롯되었는데, 그가 바로 공의 5대조인 少尹(소윤)의 아들 휘 ()義興縣監(의흥현감)으로 承政院左承旨(승정원좌승지)에 증직된 분인데, 通禮門參奉(통례문참봉)으로 司憲府大司憲(사헌부대사헌)에 증직 된 휘 孝孫(효손)을 낳았다. 大憲(대헌)은 휘 ()을 낳았는데 麟蹄縣監(인제현감)으로 兵曹判書(병조판서)에 증직된 분이다. 判書(판서)눈 휘 賢輔(현보)를 낳았는데 崇政大夫知中樞府事(숭정대부지중추부사)로 시호는 孝節公(효절공)이다.

효절공은 忠順衛(충순위) 權孝誠(권효성)의 딸과 혼인하여, 홍치 무오 1226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타고난 바탕이 좋아 능히 글을 배우지 아니해도 알아서 사람들의 명하는 바를 알아서 따랐다. 시험에 합격하여 馬官(마관)이 되었으나 임하지 아니하고 산수를 즐기며 살다가 신사 107일에 병으로 정침에서 숨을 거두니 향년 84세였다.

공으 李承孫(이승손)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이름은

元承(원승)으로 진사이며 셋 딸은 장녀가 牧使(목사)黃俊良(황준량)에게 시집 갔고, 다음 딸은 琴應侁(금응신)에게 가고, 그 다음 딸은 司諫(사간)金箕報(김기보)에게 갔다.

또한 側生(측생)이 있는데 福承(복승), 全承(전승)이다.

元承(원승)은 자식이 없어 조카인 士純(사순)後嗣(후사)로 하였다.

딸은 柳仲淹(류중엄)에게 시집가고. 應侁(응신)의 아들은 ()이고, 箕報(기보)의 아들은 克兌(극태)이다. 큰딸은 金瀹(김약) 차녀는 李啓陽(이계양)에게 갔다.

그리하여 이 해 1227일에 靈芝山(영지산) 남쏙 숲 庚坐(경좌) 언덕에 장사지냈다.

萬曆(만력) 11년 계미 10월 세우다.

 

參考

書十五代祖考碧梧先生墓碣後

謹按先生 天姿頴秀 才學夙詣 金昆玉友 迭侍大老 庭下四皓 同調而講 棣革之篇九 老續會而 張風流之篤少興 退陶先生居近數弓 一生篤好唱酬書 牘多至 筍束琅玕斳與之 戱橄欖甛苦之 證可見道義之重有曰 以公之人物 風槩豈下於曹植乎 有曰 看大成意似欲變揖 爲拜君於我以友 相處已久豈 以爵秩崇卑有變 於朝夕遊從之問哉 所謂爵秩如空雲過去 初非我有耶 又將卜築書堂 自京送屋圖子馳 書縷縷指授蓮僧以 期見眼前 突兀與共一 山煙霞之趣 卽今隴雲精舍是也 晩除關東郵丞 惟攻駒是勤 妹壻金公富仁 適判江陵共堗山海之勝 未幾賦歸此皆載 在陶山全書 與夫 國朝實錄而 歷世旣遠 文蹟散逸 百不一存 遂前小碣文 且闕略無以推尋 其行治本末 謹據集中狀本所載

僣竊輔遺以寓追感景慕之忱

 

 

 

李銀仝(이은동) 北征功臣贈承政院左承旨行展力副尉公墓碣銘

 

(북정공신증승정원좌승지행전력부위공묘갈명)

 

 

 

李銀仝(이은동) 北征功臣贈承政院左承旨行展力副尉公墓碣銘

(북정공신증승정원좌승지행전력副尉公墓碣銘)

 

前面大字贈承政院左承旨永川李公之墓

 

碑 文

古之賢士專以存心修己爲務不屑於名聲然自後世而觀之亦有幸不幸焉出而展布其所蘊事功在人耳目處而立言著書有足以徵諸久遠行也其不幸者世代玄遠累經兵燹遂復湮沒而文獻無傳焉將何所考問而徵信焉自今以往愈遠愈晦則安知祖先之至行懿德不幾於泯滅也哉若吾先祖副尉公實記無傳而惟有先君子黃中允所撰碣文焉其文曰公諱銀仝字國珍生卒年代未詳而嘉靖丙戌武科別試登第爲龍驤衛部長一轉而爲都摠都事出而通判入爲都摠經歷望其盛也初公出征北方六鎭而當野人山羊會堡焚蕩之變先鋒出戰勇猛無雙而忽虜敵將斬首其徒數十人當時北兵使知公之武藝出衆者而拔一時名武首薦公北征一等功臣啓以不次擢用至若論功酬勳之日公以未老之年不求榮進而屛樹之故公歿後上嘉之贈承政院左承旨可知其爲人器局宏偉心雄氣豪令人望其精采者也而其貫姓永川李也始祖諱文漢高麗平章事中祖諱大榮神虎衛大將軍封永陽君傳至六世有諱軒軍器寺少尹卽公曾祖也祖諱塢入朝鮮翰林直提學考諱凞良敦勇副司正妣奉化琴氏觀察使淑之女生二男公其秀也娶安東金氏察訪如石之女淑夫人有婦德生三男曰仁輔參奉曰仁弼贈吏曹參判曰仁碩判官噫文有可傳而傳之者文也人有可傳之實而傳之者亦文也公之文誠略矣後之人以其略焉而不爲之傳是吾憂也墓碣歲久頹圯不可讀乃改修墓道而略敍如右銘曰 歲之深兮守之密石可朽兮銘不滅

檀君紀元四三三八年乙酉二月 日 十四世孫 羲特 謹識

 

북정공신 증승정원좌승지행 전력부위공 묘갈명

옛날의 훌륭하신 선비는 오로지 마음을 두고 자신을 수양하는데 힘써 명성을 더럽히지 않았다. 하지만 후세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행과 불행이 있다고 하겠다. 출세하여 실력을 발휘하고 공을 쌓음은 사람의 이목에 따라 정해지니 언행을 남기고 책을 저술하여 오래도록 증거를 남긴다면 행복한 사람이요 불행한 사람은 세월이 오래되고 여러 번 전쟁을 겪게 되어 마침내는 그 기록이 없어져서 문헌이 전하지 못함이니 어느 곳에서 그 사실을 고증하고 묻고 증거하여 믿을 수 있게 한단 말인가. 지금 이후로 더욱더 세월이 흐르고 기록이 희미해진다면 무엇으로써 조상의 또렷한 행적과 아름다운 덕을 알겠으며 그 발자취가 사라진다고 하지 않겠는가.

우리 선조 부위공께서는 기록 전하는 것이 전혀 없고 다만 황중윤 어른이 지은 비문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 내용을 보면 공의 휘는 은동, 자는 국진이고 출생과 사망년도는 확실치 않다. 가정 병술(1526)년 무과별시에 급제하여 용양위 부장이 되었다가 다시 들어와서는 도총경력이 되었으니 그 벼슬이 순탄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처음에 공이 산양회보분탕의 변을 당하여 선봉으로 출전하여 용맹무쌍하게도 적장을 사로잡고 그들의 무리 수 십 명을 참수하자 당시 북병사가 공의 무술이 출중함을 알고 한 시대의 유명한 무사로 선발하여 승진 서열에 상관하지 않고 북벌일등공신을 발탁하여 등용토록 품계하니 공()을 논하고 서훈을 내리는 날에 이르러 공이 늙지도 않은 나이에 영진을 구하지 않겠노라하여 수훈을 물리치므로 공이 돌아가신 후에 나라님이 가지하여 승정원좌승지 벼슬을 내리니 가히 그의 사람됨이 그릇이 크고 위엄이 있었으며 포부와 기상이 호걸스러워 사람들로 하여금 선망의 대상이었음을 알리라.

공은 영천이씨로 시조의 휘는 문한으로 고려 때 평장사 벼슬을 지냈으며 중시조 대영은 신호위대장군이며 영양군으로 봉해졌다. 그로부터 6세를 전해 내려와 휘 헌()은 군기시소윤 벼슬을 하니 곧 공의 증조이다. 조부의 휘는 오요 벼슬은 조선조 한림직제학이다. 고의 휘는 희량으로 돈용부사정이요 비는 봉화금씨로 관찰사 숙의 따님이다. 안동김씨 찰방 여석의 딸에게 장가드니 숙부인으로 부덕이 있었다. 아들 셋을 두니 인보는 참봉이요 인필은 이조참판을 증직 받았고 인석은 판관이다.

! 그 가문에 문장이 있어 전해지는 것도 문헌이요 그 집안에 사람이 있어 전해지는 것도 또한 문헌이어늘 공의 문헌은 너무나도 미약하도다. 후손들이 이렇게 기록이 미약함을 탓하여 전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나의 걱정일 뿐이다. 비문이 오래되어 떨어져 나가 다시 세우기로 하고 간략하게 기록하고 명()을 짓노니

세월이 깊어지더라도 지키기를 철저히 한다면 비석은 썩을지언정 비명은 없어지지 않으리라.

 

단기4338년 을유(2005)2월에 14대손 희특은 삼가 기록한다.

 

 

 

李塢(이오) 翰林直提學公墓碣銘(한림직제학공묘갈명)

 

李塢(이오) 翰林直提學公墓碣銘(한림직제학공묘갈명)

 

前面大字通訓大夫行藝文館直提學永川李公之墓

配淑夫人平海黃氏之墓

 

碑 文

公諱塢永川人也永陽君諱大榮爲鼻祖高祖諱文卿保勝護軍曾祖諱松侶吏部侍郞祖諱日忠主簿考諱軒軍器寺少尹皆麗爵也妣宣城李氏洽之女也少尹公不樂居永川來卜禮安之沙川有志於佳勝爲世居處也公又移居安東之佳野妙齡釋褐入翰苑陞直提學皆文任極選也夫以人材之盛發軔伊始出此淸道百載之下猶可想像其文章聲望而年位不克稱惜哉配平海黃氏判書有定之孫進士鋌之女也先公卒葬于陵谷子坐之原公歿亦葬于同原而異壙伯氏參議公乃聾巖先生曾王考也公與之友愛甚篤少尹喪同爲廬墓三年至今傳者猶指某基焉一子熙良司正司正二子玉仝參奉銀仝副尉北征功臣康熙戊子八世孫生員永植持平昌葉樹碣年久石泐今將改竪主事而幹者十世孫昌龍壽龍十一世孫質與實二君也二君爲來乞銘深以生卒年之未詳爲私憾而嘗見韓文公爲殿中監銘何嘗言生卒耶但恨文辭拙非韓文健筆也銘曰少尹有子孝且友而才且秀而長途遠志竟不得其年奈何乎天

乾隆庚子 前執義 李級 撰

한림직제학공 묘갈명

공의 휘는 오()이고 영천이씨이다. 영양군(永陽君) 휘 대영(大榮)이 비조요, 고조의 휘는 문경(文卿)이고 벼슬은 보승호군이요, 증조의 휘는 송려(松侶)이고 벼슬은 이부시랑이요, 조부의 휘는 일충(日忠)이고 벼슬은 주부이며 아버지의 휘는 헌()이고 벼슬은 군기소윤이니 모두 고려 때 관작이다. 어머니는 선성이씨로 흡()의 따님이다.

소윤공이 영천에 살기를 즐겨하지 않고 예안 사천에 와서 살았는데 경치가 아름다웠기 때문에 뜻을 두었고, 자손들이 세거지로 삼았으나 공이 다시 안동 가야로 옮겨서 묘령석갈로 지내다가 한림원에 들어가 직제학에 올랐으니 문임으로는 최고로 뽑혔다. 대개 인재가 성하게 출발할 때 처음부터 청도에서 나오면 백년 이후라도 오히려 그 문장과 명망을 추상하거늘 나이와 벼슬이 능히 칭송하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도다.

부인은 평해황씨로 판서 유정(有定)의 손녀이고 진사 정()의 따님이다. 공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니 능골의 자좌지원에 장례 지냈더니 공이 돌아가심에 역시 같은 곳에 장례를 지냈으나 봉분은 달리했다.

백씨 참의공은 농암선생의 증조할아버지로 공과 더불어 우애가 심히 두터웠으며 소윤공의 상에 함께 여묘 3년을 모처에서 지냈다고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아들 하나를 두니 희량(熙良)은 벼슬이 사정이고 사정이 아들 둘을 두니 옥동(玉仝)은 참봉이고 은동(銀仝)은 부위로 북정공신이다.

강희 무자(1708)8세손 생원 영식(永植)과 지평 창엽(昌葉)이 묘비가 세월이 오래 되어 비석이 낡아서 지금 개수하려고 하니 일을 주간하는 사람은 10세손 창룡(昌龍)과 수룡(壽龍)11세손 질()과 실() 두 사람이다. 두 사람이 내게 와서 비명을 청하거늘 출생일과 죽은 연도가 상세하지 못한 것이 유감이나 일찍 한문공이 궁중에서 비명을 볼 때 생졸년대를 말 하겠는가 다만, 문장이 졸렬해서 한퇴지 같은 건필이 못됨을 한탄한다. ()에 이르기를,

 

소윤이 아들을 둠에 효도하고 우애하며 재주 있고 뛰어났으나 갈 길은 멀고 뜻은 원 대하였으나 나이를 득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하늘을 원망하랴.

 

건륭 경자(1780)년에 전 집의 이급(李級)은 짓다.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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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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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영천 이씨(永川李氏)는 남한에 총 2,134가구, 8,66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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