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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예안이씨(李)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예안이씨)

 

본관(本貫): 예안(禮安)

시조(始祖): 이도(李悼)

유래(由來):

 

예안 이씨(禮安李氏)는 전의 이씨(全義李氏)에서 분적(分籍)된 계통(系統)으로 태사공(太師公) 이도(李悼)를 시조(始祖)로 삼고 도()7세손인 천()의 아들 3형제 중 둘째인 혼()이 고려 원종(元宗) 때 과거에 급제하여 첨의정승(僉議政丞)을 지내고 예안백(禮安伯)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중시조(中始祖)로 하고 있다. 그후 혼의 손자 익()이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으로 예안군(禮安君)에 봉해졌으므로, 예안(禮安)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이천

1376(우왕 2) 1451(문종 1). 조선 세종 때의 무신 · 과학자. 본관은 예안 ( 禮安 ). 호는 불곡(佛谷). 군부판서 송( )의 아들이다. 1393(태조 2)17세의 나이로 별장 ( 別將 )에 임명되었고, 1402(태종 2)에는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세종 때에는 왜구의 침입을 막는 데 큰 공을 세워 충청도 병마 도절제사로 임명되어 병선 ( 兵船 )을 만드는 일에도 힘쓰게 되었다.

이 때부터 그는 물리학자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무예를 닦으면서도 틈틈이 여러 기계장치의 원리를 생각하고 연구하였다. 특히 금속공예와 그 주조법에 조예가 있어 세종은 그를 공조참판으로 임명하여 새로운 청동활자인 경자자 ( 庚子字 )를 만드는 일에 힘쓰게 하였다.

경자자의 주조로 인쇄 능률은 많이 좋아졌으나, 좀더 아름다운 자체(字體)와 인쇄 능률을 높이기 위한 주조사업이 다시 시행되어, 마침내 1434(세종 16)에 갑인자 ( 甲寅字 )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 20여만 개의 대소활자로 주조된 이 갑인자는 자체가 훌륭하고 선명할 뿐만 아니라, 큰 활자와 작은 활자를 필요에 따라 섞어서 조판할 수 있는 발전적인 것이었다. 갑인자의 인쇄로 조선의 활판인쇄기술은 일단 완성되었다.

그는 또한 서운관에서 정초 ( 鄭招 ) · 장영실 ( 蔣英實 ) · 김빈(金 聆 ) 등과 수년 동안 노력한 끝에 1437년에 대간의(大簡儀) · 소간의 · 앙부일구 ( 仰釜日晷 ) · 현주일구(懸珠日晷) · 천평일구(天平日晷) · 정남일구 ( 定南日晷 ) · 규표 ( 圭表 ) 등의 해시계를 만들었고, 선기옥형(璿璣玉衡)이라고도 불리는 혼천의 ( 渾天儀 )를 제작하였다.

또한 그는 평안도 도절제사가 되어 평안도와 함경도 변방에 나타나는 야인(野人 만주족)들의 침략을 막고, 그들을 토벌할 때 여진족에게서 얻은 중국의 제철기술을 바탕으로 수철(水鐵 무쇠)을 연철(軟鐵)로 만드는 기술을 익혀 부족한 구리 대신에 쇠로써 대포를 만드는 등 화포의 개량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밖에 병선 만드는 일에도 관심이 있어 갑조법(甲造法), 즉 판자와 판자를 이중으로 붙이는 방법의 시행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시호는 익양(翼襄)이다.

 

이명(李蓂)

1496(연산군 2) 1572(선조 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예안 ( 禮安 ). 자는 요서(堯瑞), 호는 동고(東皐). (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이고, 아버지는 연산현감 보간(輔幹)이며, 어머니는 감찰 윤혼(尹渾)의 딸이다.

1525(중종 20) 사마시에 합격, 152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 · 예문관검열을 거쳐 봉교로 승진하였다. 1531년 성균관전적으로 옮겼다가 병조 · 예조의 좌랑이 되었고, 1537년 사헌부지평이 되었다가 호조정랑이 되었으며, 이듬해 옥당 ( 玉堂 )에 들어가 교리(敎理) · 응교 ( 應敎 ) · 집의 ( 執義 )를 지냈다.

1544년 직제학 · 동부승지 · 우부승지가 되었으며, 1547(명종 2) 대사간이 되고, 이듬해 부제학에 올랐다. 당시 권신 이기(李 咬 )가 권력을 휘둘러 사류(士類)를 죽이거나 몰아내니 사람들이 모두 모른 체하였는데, 그는 자신을 돌보지 않고 대사헌 구수담 ( 具壽聃 )과 함께 이기를 탄핵하였다.

1549년 진위사 ( 陳慰使 )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52년 대사헌이 되었고, 특별히 대사성을 배()하였다. 이듬해 이조참판이 되어 특진관으로 입시, 을사사화 때 화를 입은 사람의 신원을 주장하여 왕의 승낙을 얻고 그날로 형조판서에 올랐다.

이어서 이조 · 호조 · 공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557년 좌참찬이 되어 세자빈객(世子賓客)을 겸하였다. 1559년 좌찬성, 1564년 우의정이 되었다. 이듬해 나이 70이 되어 사직할 것을 청하여 궤장( 廓 杖)을 하사받았다. 1566년 좌의정이 되었다가 선조 즉위 초 나이가 많아 사직하고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명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이경룡(李慶龍)

무관으로서 임진왜란 때 많은 공()을 세웠다.

 

이경정(李慶禎)

이괄(李适)의 난 때 공을 세워 진무공신(振武功臣)이 된 경정(慶禎)이 유명했다.

 

이간(李柬)

()은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의 한 사람으로 인물동성론(人物同性論)을 학문의 근본으로 하였다.

1677(숙종 3)1727(영조 3).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예안 ( 禮安 ). 자는 공거(公擧), 호는 외암(巍巖추월헌(秋月軒). 부호군 태형(泰亨)의 아들로서, 권상하 ( 權尙夏 ) 문하의 팔학사(八學士) 중 한 사람이다.

1710(숙종 36) 순무사 이만성 ( 李晩成 )에 의하여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천거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6년 뒤인 1716년에 다시 천거되어 세자시강원자의가 되었는데, 이 때 그의 나이가 적은데도 계급이 뛰어오름을 논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1717년 종부시정을 제수받고, 1725(영조 1) 회덕현감·경연관을 거쳐 충청도도사 겸 해운관·익위사익위를 제수받았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조선조 성리학은 중기를 고비로 사단칠정 ( 四端七情 )에 대한 이황 ( 李滉 )의 이기호발설 ( 理氣互發說 )과 이이(李珥)의 기발이승일도설 ( 氣發理乘一途說 )의 대립으로 그 뒤 치열한 논변이 벌어졌다.

중기에 접어들면서 한동안 잠잠했던 사단칠정 논변이 이제 주리(主理)와 주기(主氣)의 논변으로 이행됨으로써 성리학의 불꽃이 재연되었다. 그것은 주기적인 이이계통의 기호학파 ( 畿湖學派 ) 안에서 다시 주리와 주기로 대립해 논쟁이 일어난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호락 논쟁(湖洛論爭)이다. 호락 논쟁은 권상하의 문하에서 야기되었다.

그들은 처음에 인((((()의 오상(五常)을 금수(禽獸)도 가지느냐 못 가지느냐 하는 문제, 즉 금수와 오상의 관계와 또 사람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의 정()이 발동하지 아니하였을 때(未發)의 상태, 즉 심체(心體)에 기질(氣質)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 등을 논의하다가 의견의 대립이 생겼다.

본격적인 논쟁은 권상하의 문하 팔학사 중에서 이간과 한원진 ( 韓元震 ) 사이에서 시작되었다. 권상하가 한원진의 설에 찬동하자 이것이 점차 확대되어 전국의 석학들의 관심거리가 되었다.

이간의 설을 지지하는 이재 ( 李縡 박필주(朴弼周어유봉 ( 魚有鳳 ) 등 낙하(洛下 : 서울) 학자들은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은 다 같이 오상을 가진다는 인물성구동론(人物性俱同論), 미발한 마음의 본체는 기질의 선악이 없으므로 본래선(本來善)이라 하여 미발심체본선론(未發心體本善論)을 주장하였다. 이것을 낙론(洛論) 또는 낙학(洛學)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와 반대로 한원진의 설을 찬동하는 권상하· 윤봉구 ( 尹鳳九 최징후(崔徵厚채지홍 ( 蔡之洪 ) 등 호서학자(湖西學者)들은 인성은 오상을 가지지만 물성은 그 오상을 모두 가지지는 못한다면서 인성과 물성은 서로 다르다는 인물성상이론(人物性相異論), 미발한 마음의 본체에도 기질의 선악이 있다는 미발심체유선악론(未發心體有善惡論)을 역설하였다.

이것을 호론(湖論) 또는 호학(湖學)이라 부르게 되었다. 호락론자들은 이이 계통의 기호학파에 속하므로 이이의 이른바 이통기국설 ( 理通氣局說 )을 철칙으로 신봉하였다.

이통기국설은 주희(朱熹)의 이동기이설(理同氣異說)에서 유래한다. 이통이란 이는 인()과 물()에 공통적·보편적인 것으로서 동일하게 상통한다는 것이고, 기국의 기는 인과 물에 국한적·특수적인 것으로서 상이하다는 것이다.

이간은 주리적 입장에 서서 이통과 이동을 내세움으로써 인성과 물성을 구동으로 보아 한 가지로 오상을 가진다는 동시오상의 논리로써 그의 철학 체계를 일관시켰다.

이에 대해 한원진은 주기적 관점에서 기국과 기이를 강조함으로써 인성과 물성을 상이한 것으로 보며, 그것은 기질의 차이로 말미암은 것이라 주장해 인기(因氣)의 논리로써 그의 철학 체계를 세웠다.

다시 말하면, 주리적 입장에 서는 이간은 성()은 곧 이()이므로 인성과 물성은 모두 이로서의 태극 ( 太極 ), 천명(天命)의 원형이정(元亨利貞), 사덕(四德)을 본성으로 품수함으로 말미암아 오상의 본연(本然)을 구유하므로 그들 본성은 이통으로 동시오상이라고 보았다.

다만, 인성과 물성이 상이한 것 같이 보이는 것은 그들 기질의 국한성, 즉 차이에 따라서 상이하게 드러날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인과 물의 본성, 즉 본연지성 ( 本然之性 )은 동시오상으로서 구동이요, 또 사람의 미발심체는 본선이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한원진은 주기적 경향이기 때문에 인성과 물성은 각기 그 기질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으로 상이한 것이며, 그 기질지성 ( 氣質之性 )이 각기 인과 물의 본연지성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인물의 본성, 즉 그 기질지성은 인기로서 상이한 것이요, 따라서 사람의 미발심체도 기질지성으로서 선과 악이 공재한다는 유선악론을 주장하였다.

이 양론을 보면 철학적 입장의 차이에 따라 방법론의 차이도 달라짐을 볼 수 있다. 이 호락 논쟁은 이간 이후 오래도록 계속되었지만 끝내 귀결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여기에서 제기되었던 여러 가지 문제들은 성리학의 근본 문제들이었고, 또 그 근본 문제를 해결하려는 철학적 방법론이 뚜렷이 드러나고 있는 것 등은 매우 주목할만한 것이다.

이간은 호서, 즉 충청도에 살았지만 그의 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낙하, 즉 경기도와 서울에 많이 있었으므로 그의 학을 낙학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1777(정조 1) 이조참판·성균관좨주를 추증하고, 순조 때에 이조판서를 증직하였다. 온양의 외암서원(巍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외암유고가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이천본(李天本)

하늘에서 내린 효자로 이름난 천본(天本)<첨심효자(天心孝子)>라 칭했다.

 

이식(李埴)

()은 영조(英祖) 때 학문과 효행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준영(李準永)

준영(準永)3·1운동 때 왜적과 싸워 예안 이씨의 가문을 빛냈다.

 

李蕆(이천)의 묘

 

李蕆(이천) 禑王 2年 丙辰(1376)~文宗 1辛未(1451) 76

初名 佶. 字 子見. 號 栢谷. 禮安人. 諡 翼襄

 

禑王 14년 무진(1388)廉興邦(염흥방)의 피화사건 때 아버지 ()이 연좌되어 처형 될 때, 공과 동생 ()이 모두 어렸으므로 山僧(산승)이 불쌍하게 여겨 바위굴에 숨겨서 목숨을 보전 할 수 있게 되었다. 태종 2(1402), 무과에 급제하고 10(1410)重試(중시)에 급제하여 累進兵(누진병), 호조팔서, 都節制使(도절제사)에 올랐다. 공은 재주가 남달라 銅鑄(동주) 활자를 완성하여 文籍(문적) 발간에 신기원을 이루었고, 호군 蔣英實(장영실)을 지휘하여 해시계, 측우기 등 천문학에 이르기까지 많은 발명을 하였으며 野人(야인)의 소탕, 北鎭(북진)의 개척은 물론이고 火砲(화포), 兵船(병선) 등 세종시대의 과학기술을 독창적으로 개발 하였다.

공의 사후 양주치 동북지 명산에 入葬(입장)하였는데, ()의 아들이 공 보다 먼저 죽어서, 자손이 없어 묘소가 실전되어 공이 출생한 예안, 지금의 도산면 동부동 만촌리 위 효자봉 아래 유허비(문학박사 이희승 찬, 김택진 서)1982년에 세웠다.

원래 그곳은 공의 손자 上將(상장) 承石(승석)의 묘이며 둘째 아들 忠老(충로)의 묘단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李山斗(이산두) 墓碣銘(묘갈명)

 

李山斗(이산두) 肅宗 6年 庚申(1680)~ 英祖 48年 壬辰(1772) 93.

字 子昻 . 號 懶拙齋. 諡 淸憲. 禮安人.

 

懶拙齋(나졸재) 李公(이공)의 묘는 남후면 단지리에 있다.

선생은 집이 가난하였으나 남의 도움을 받으려 하지 아니하고 35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유학하였는데 공의 언어동작이 단정하여 유생들의 추중을 받았다 한다.

영조 8(1732)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 예조좌랑을 거처 감포현감이 되어서는 백성을 구휼하는데 힘썼다. 그 후 여러 벼슬을 내렸으나 다 나가지 않았는데 영조 43(1767) 지중추부사로 기로소에 입소하여 영조께서 화공을 내려 보내 초상을 그려서 원손(정조)에게 90세상이라 쓰게 하여 풍산에 내려 보냈다 한다.

사후에 淸憲(避遠不義曰淸 行善可紀曰憲<피원불의왈청 행선가기왈헌>)이라 시호를 내렸다. 小山(소산) 李光靖(이광정)의 행장과 立齋(입재) 鄭宗魯(정종로)의 신비명이 있고 문집 약간권이 있다.

 

墓碣銘

先生諱山斗 字子昻 號懶拙齋 諡淸憲 貫全義 麗開國翊贊二等功 三重大匡太師 諱棹 諡聖節爲鼻祖 九世諱 彦冲提學 諡文義 十四世諱樺兵判 諡 良靖 選淸白吏 則公七代祖 曾祖諱苓 贈左承旨 祖諱鳴吉 贈戶參 考諱泌 贈戶判 皆以公貴也 妣貞夫人 慶州安氏 判書儀之女 肅宗 庚申 六月生 英祖 甲午生員試 戊戌朝家設別科 應講得第自以誤讀 一字辭 考試官愕然曰 試官所不知 何爲自言 公曰 人雖不知已 豈可自欺人乎 聞者莫不驚歎 壬子英祖八年 殿講直赴登第 講畢上曰 應是 操心人也 侍大臣 齋聲啓曰 嶺南望士也 臣等敢爲得人賀 甲寅 宣務郞 乙卯正月 陞典籍 尋遷兵曹正郞 十二月拜藍浦縣監 戊辰陞 朝散大夫 禮曹正郞 俄遷成均司藝 丙子上加尊號 推恩 內外例陞通政 戊寅拜掌隸院判決事 辛巳正月特陞 嘉善陞拜 工曹參判 退官歸 豊山縣 丹邱村 而居小齋 上特旨召曰 在家爲未安 行到咸寧疏謝 丙寅陞資憲 丁亥以知中樞 入耆社 己丑命畵工像 令其子孫 持來 孫諱 全春奉以入侍 下敎曰 知事李公 畵像 摹作二件 一則內人一則留耆社 本件還給其家 又親題知中樞李山斗六字 又命元孫 題九十歲像 四字 右因 築小齋于中村奉安御筆影幀 庚寅陞 正憲大夫 知中樞府事 兼 五衛都摠府都摠管 壬辰英祖四十八年 四月二十日 考終于正寢 享年九十三 訃聞 上震悼輟朝 親製文 命本府致祭 又命待喪畢錄用 諡曰 淸憲 葬縣南 鳳山下丁坐 後 五十六年 移葬于 丹丘艮坐原 配貞敬夫人 安東權氏 聖輔之女 墓桂坪亥坐 有一男一女 男 邮公先卒 女適尹 餘不書錄

哲宗 十三年 壬戌 五月 上澣

資憲大夫 禮曹判書 申錫愚 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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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갈명

선생의 휘는 山斗(산두), 자는 子昻(자앙), 호는 懶拙齋(나졸재)이며 시호는 淸憲(청헌)이고 관향은 全義(전의)로 고려 개국 때, 翊贊二等功臣(익찬이등공신) 三重大匡(삼중대광) 太師(태사) () 시호 聖節(성절)공이 鼻祖(비조)이다.

9세에 위 彦冲(언충)提學(제학)으로 시호가 文義(문의)였고, 14세에 휘 ()는 병판으로 시호가 良靖(양정)으로 청백리로 뽑혔는데 바로 공의 7대조이다.

증조부의 휘는 ()이고 左承旨(좌승지)로 증직되었고, 조부의 휘는 鳴吉(명길)인데 戶參(호참)으로 증직되었다. 부친의 휘는 ()이며 戶判(호판)으로 증직되었다. 이분들은 모두 공에게 귀한 분들이다.

모친은 貞夫人(정부인) 慶州安氏(경주안씨)로 판서 ()의 따님으로 숙종 경신년 6월에 공을 낳았다.

英祖(영조) 갑오년에 生員試(생원시)에 합격하고, 무술년 조정에서 실시한 別科(별과)에 응시해서, ()하는 것을 듣는 차에 잘못 읽는 한 글자를 말하니 고시관이 깜작 놀라면서 하는 말이 試官(시관)도 모르는 것을 어찌 말을 한단 말인가.하니 공이 이르기를 사람은 비록 자기가 모른다 해도, 어찌 남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하니 듣는 자들이 노라지 않는 이가 없이 감탄했다.

壬子(임자) 英祖(영조) 8, 殿講(전강)에 바로 가서 登第(등제)하니 ()을 마치고 상감이 응당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조용해야 하느니라.하니, 모시던 대신들이 모두 같은 소리로 영남의 유망한 선비입니다. ()들은 감히 좋은 사람을 얻게 된 것을 경하 드립니다.하였다.

갑인 년에 宣務郞(선무랑)이 되었고, 을묘년 정월에 전적으로 승진하고 다시 병조정랑으로 옮겨 가서 12월에 남포현감을 배수 했다. 무진년에 승진해서 조산대부 예조정랑이 되었다가 갑자기 성균사예로 가게 되었으며, 병자년에 尊號(존호)가 더해지는 은총을 입엇다. 내외의 예대로 通政(통정)으로 승진했다.

무인년에 장예원판결사를 배수하고, 신사 정월에 특별 승진으로 가선이 되었다. 또 승진하여 공조참판이 된 다음 관직을 퇴임하고 풍산현 단구촌으로 돌아와 작은 집에서 살았는데, 상감의 특별 소집명령이 내리자. 집에 있기가 미안하구나.하며 咸寧(함녕)에 가자, 상소를 올려 사직하였다. 병인년에 資憲(자헌)으로 승진하였고, 정해년에 知中樞(지중추)가 되어 기로소에 입소하였다.

기축 년 상감이 화공에게 초상화를 그리라 명하시니, 그 자손이 갖져 오는데, 손자인 휘 全春奉(전춘봉)이 대궐에 들어오자, 하교 하시기를 知事(지사) 李公(이공)의 화상의 모작을 두 장 만들어 하나는 그 집안에 주고, 하나는 기로사에 두라.하였다.

그래서 그 그림은 집으로 보냈는데, 친필로 知中樞李山斗(지중추이산두)라는 여섯 글자를 쓰고 또한 元孫(원손)에게 명해서 九十歲像(구십세상)이라는 넉 자를 쓰게 하였다.

그로 인해 마을 안에 작을 집을 지어 그 안에 御筆影幀(어필영정)을 봉안하게 되었다. 경인년에 정헌대부 지중추부사 겸 오위도총부도총관으로 승진하였고, 임진 영조 48420일 정침에서 숨을 거두니 향년 93세였다. 부고를 들은 삼감은 너무 슬퍼서 조회를 중지하고, 친히 제문을 지어, 本府(본부)에 명해서 제사를 지내도록하고, 또 명해서 초상을 마치자 諡號(시호)淸憲(청헌)이라 내렸다.

현의 남족 鳳山(봉산) 아래 정좌에 매장하고, 56년 뒤 다시 이장하여 丹丘(단구) 간좌 언덕에 이장하였다.

배위는 정경부인 안동권씨로 聖輔(성보)의 딸이며, 묘는 桂坪(계평) 해좌에 있다. 11녀가 있는데 아들 ()는 공보다 먼저 죽었다. 딸은 ()가에게 시집을 갔다.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철종 13년 인술 5上澣(상한)

자헌대부 예조판서 申錫愚(신석우) .

 

行狀

正憲大夫知中樞府事懶拙齋李先生行狀

先生姓李氏諱山斗字子昂全義人高麗太師棹其遠祖也麗季典農正雄見時事將亂與叔父司宰正思敬自松京俱下嶺南司宰公居開寧典農公居安東之豐山縣於公爲八世也七世祖樺仕世祖朝兵曹判書諡襄貞選淸白吏曾祖諱苓贈左承旨祖諱鳴吉贈戶曹參判考諱泌贈戶曹判書皆以公貴也妣貞夫人廣州安氏判官偁之女明陵庚申六月日生公生而明秀端好異凡兒三歲嘗得病而絶家人將收瘞之有推命者曰此兒終必遠到且待之越三日而甦聞者異之及就傅受業于井谷處士權公憕之門每當祈寒諸童無不呼寒呵凍而公以單衣袴兀然端坐了不見寒色同學子問之公曰非不寒也若不能耐則將不勝其寒如是端束自可忘寒矣長者心知其飢寒而不敢推食以與之以其氣象操執嶄然而不可犯也受業十數年進止有常處不以寒暑而失尺寸焉家貧長飢藜藿不充而讀書之聲益響亮一日自里塾歸忽仆地不省人始知不食已四日矣而公未嘗形於色辭故雖同業人莫之知也兒時製官月課居嵬府伯大奇之累使禮吏邀請時先考公以逋糴逮獄公方在獄門外以父兄囚繫爲辭府伯立命蠲減而放釋之固要相見公不得已入見府伯盛稱詞華之夙成因請與其二子同鉛槧之工公改容謝曰地主曲賜之恩銘在骨矣而至於邑子與官子弟同事此土無此風不敢聞命府伯再三勸勉而知不可強乃曰士各有志何可詘邪更以篤工成就之意慰諭之辛巳中鄕解榜聲至閭里聳賀而公坐不移處顔色不動識者知其所存甲申丁判書公憂外兄金佐郞九成悶其竆苦要與同居丙戌奉殯移居焉金公月周穀十斗公量口計日而支人所饋遺亦量而後受未嘗苟也家人習而安之亦無愁歎色服闋常寢處於金公九用之軒日必晨起盥櫛端坐讀書竟日無跛倚欠伸時夜亦如之金公慮其積苦生病或勸止之公曰吾平生耐苦病非所慮也金公割數畝田以畀之及徙宅之日以田還之金公亦不受遂爲閒廢時人謂之閒田終屬金公齋舍金公常隨乏隨助公輒辭之不得而後受之金公常曰以物與君難於取人之物也甲午中生員試第三常遊泮宮介然自守言動擧止和易端重儕友僕隷無不敬服館隷輩私相語曰此上舍當爲血食君子有一館儒淫戲敗露館僕羣起作挐突入齋舍亂投瓦石齋儒恐㤼失措莫敢誰何公出而正色叱之亂卒退縮自定其見憚於下隷如此戊戌朝家設別科公時在泮隔試八日棄而南下洪判書重徵聞而歎曰今世更有此人否蓋默會公微意之所在也辛丑應講講畢將出栍公自言誤讀一字臺官洪龍祚坐帳外愕然曰諸掌試之所不知儞何獨自明也公曰人雖不知己則知之豈可自欺而欺人乎聞者皆驚歎以爲不可及壬寅丁內艱壬子殿講直赴及第講畢上曰應是操心人也入侍大臣齊聲啓曰嶺南望士也臣等敢爲得人賀癸丑殿試甲寅授宣務郞龍宮倅李公延德與公舊訪之而不遇見數間破屋不庇風雨問諸隣嫗嫗曰樂歲恒飢况今年乎無煙氣已數日矣李公傾行槖得數斗米及魚肉使嫗傳致之夫人辭曰家翁不在不敢受李公歸語人曰累日不食能辭米肉之饋可見此人刑家之道矣乙卯正月陞典籍尋遷禮兵曹佐正郞十二月拜藍浦縣監時內浦諸邑例凋弊朝廷選能安集吏判書金公時炯薦公曰此人所館與吾對門足跡一不到恬退如此必是穌殘人也旣到公私赤立弊瘼深痼隨事殫心約已裕民編戶逃故甚多每當籍年充以虛戶其來已久公欲蠲其弊而上司不聽公躳造營門以去就爭之上司不得已從之自前縣吏之磨鍊田稅米視本曹所定更高詰其由則以官用之不足故加出取贏已成謬規公立杖該吏依本數釐正因揭板于鄕廳軍額多闕每當操鍊時輒收錢于民雇丁隣邑民不堪其苦而富室良丁依託於權勢家者無慮數百戶一一括出以塡闕額軍額乃足邑民過縣衙者有叩頭再拜而去者而不悅者造爲飛語以相恐動公若不聞也田稅漕運時例貰海船往往漏敗公蓄廩餘八百餘緡造大船自是無臭載之患有一銓官專价囑簡公只以空簡爲謝適有一邑子見之力言銓相有書不可無伴簡之物公笑而不應其人出語人曰我太守於官爵非惟不求乃不欲也靈城君朴公文秀運碑石于境內請麴子官儲所餘只有一圓以一圓應之朴公受而笑曰曾聞官庫如洗果然矣數年之間宿弊漸省民始有樂生之意丁巳秋將棄官歸與族孫後冕書曰今方決歸而無託身之所信所謂罷則無所於歸者也及歸就豐縣東丹丘村而居焉數間草舍依前寒素人不知其新解官歸也戊辰陞朝散大夫禮曹正郞俄遷成均司藝皆不赴己巳築小齋于烽山下有新居詩末句曰回頭點檢平生事堪號人間懶拙翁平生未嘗有齋號至是人以懶拙稱之公不喜牆壁間標識而惟以飯䟽食飮水曲肱而枕之樂亦在其中不義而富且貴於我如浮雲數語手書于座右朝夕玩誦焉丙子以上加尊號推恩內外例陞通政階爲副護軍尋陞僉知戊寅拜掌隷院判決事先是趙公雲逵爲本道伯聞公名復命日盛陳公年老固竆淸風高節爲嶺南師宗上嘉之有是命上書以老病辭特下少間上來之敎公以年過休致再辭不赴人有悶公竆餓恨不如邑守之除公勵聲責之曰是何言也仕雖有時乎爲貧而爵祿是君上所命何敢論俸廩厚薄乎十月遞付僉知中樞府事庚辰韓承宣光肇入對陳公負士林重望而竆困年老之狀上曰李山斗有山斗之望矣辛巳正月特陞嘉善階拜工曹參判三月柳公正源以承宣入侍上親問公精神筋力下特旨曰年過八十精力尙不衰云量力上來事下諭道臣令給馬公以累違召命偃息在家分義未安行到咸昌上書辭癸未陞嘉義丙戌陞資憲丁亥以知中樞入耆社己丑命工圖像令其子孫持來孫全春奉以入侍眷諭出尋常命除寧陵參奉翌日下敎曰知事李山斗畫像摹作二件一則內入一則留耆社本件還給其家又親題知中樞李山斗六字又命元孫題九十歲像四字于右因令該曹造藏櫃給人馬陪持下去蓋異數也庚寅陞正憲壬辰四月二十日考終于正寢享年九十三訃聞上親製文命本府致祭又命待喪畢錄用其子孫十月九日奉窆于縣南對鳳山下丁坐之原會者數百人公天品絶異而制行有方梅香而玉潔也鳳翔而鶴瘦也自在齠齔坐必端正行必徐緩動靜有常氣象安閒宂雜鄙褻之言不出於口惰慢傾仄之容不設於身雖急遽顚沛之頃未嘗變也稍長遊於先生長者之門則其於處心行己之方益詳以密矣篤於愛親就養無方而若纖毫非義則不苟取也謹於奉先之節不論物之豐約而務令潔精祭之日前期齋滌不解衣帶坐待雞鳴將事之後亦不惰其身以終其日及至篤暮之年雖不得與祭而其齊宿之誠則無替也至於師門忌日亦爲之變食平居晨起盥櫛整飭冠服竦身高拱合眼而坐常若嚴師之在座讀書不務多日以兩三紙爲限潛心致志逐句尋繹其於音釋句讀一字差誤雖讀之中半必從頭更讀其爲文詞刊落枝葉專務簡當未嘗以間雜語點綴焉密菴李先生嘗見而歎曰此眞誌狀手段少時酒戶甚寬嘗倒盡一甁忽自警懼曰是而不節必有喪儀之患自是每以一杯爲限及至七耋時或進兩三杯笑曰破吾戒矣餓乏寒苦之中樹立甚嚴泰然而常有懽顔紛華聲利之場一刀兩段泊然而無所願慕喫辛耐苦痛加斂束年益高德益卲未嘗一日懈也少時嘗爲黌舍長失所著履校僕進草鞋到家卽脫而還之傍人曰無乃已甚邪公笑曰吾亦知其太過然吾之竆涸異於人一生如行百尺危棧差一跡便是坑塹若於此用變通法末流將有不可勝救者是以於此等事每從稍過處著脚此吾宿戒不欲破也每以毋自欺一句爲三字符嘗曰吾平生以不欺自勉而到今點檢可媿者實多少於場屋有一故事在依俙地而爲晷刻所迫不免抑勒使用卒以是得中每一念到未嘗不踧踖不能安也嘗戒學者曰人之爲學何書不可讀而惟四書爲做人坏墣初學之士此最緊要有請業者必以此先之又曰自以爲知者終無進就之望又曰好善惡惡人之常情而今人大抵見人之善則不稱也其不善者必播揚之不祥莫大焉須以大舜之隱惡揚善爲法又曰吾幼時家甚貧男妹四人或藜糝不繼而先妣敎訓嚴正未嘗以飢餓之故而使兒輩有所狎恃吾輩抵此得免奔走於口腹云又曰吾平生不識飢飽字常食不至飽而止或三四日不食而不知餒也鄕黨篇中不多食不使肉勝食氣惟酒無量不及亂此三事庶幾企及之耳晩年有一門生進曰先生今至耄期之年而律身猶不衰不審何事用工最深乎公笑曰如我者何能謂律身但平生粗識界分凡於擧措有不慊於心則不措也不欺心三字或無媿於人邪嗚呼世衰道微風俗頹靡惟硬著脊梁豎起精神方可以立定脚跟若孔門之行行狷介程門之單衣禦冬而忘飢寒者皆是也公資之近而志之篤守之確而行之久吾心可安簞瓢不足以害其樂義有不可鍾駟不足以易其介無事則澹然淵停而若有臨也有事則從容靜暇而無所動也力量旣充坦然有裕瞻之而睟面盎背卽之而豈弟樂易表裏始終絶無瑕諐豈所謂言有物行有恒而貧富威武不能移之大丈夫哉晩始筮仕棲遲於郞署之間一試於民社之寄而旋卽投紱間有召旨而杜門堅臥甘忍竆餓二十有餘年矣及其晩年上眷益隆位躋亞卿而年力旣愆亟上休致之章公又不喜著述其傳於文字之間者寂寥而簡淡後之人必有想像欽慕而慨惋之者矣然公淸修貞介之風猶未盡泯而播於街談巷議之餘者猶足以廉頑而立懦則其立人敎扶世道之功於是乎無竆也配安東權氏贈貞夫人學生聖輔之女有一男一女男先公卒女適尹德麟一男四女男全春參奉女適李基靖權天度柳良春李汝敏尹德麟二男二女男侗女適丁載範柳殷春一日寢郞君以家狀及權公䋠之狀屬於光靖曰先祖考棄世已十二年狀德之文尙未就嘗以是託於仲氏大山先生未及屬筆而捐後學矣又曰府君少壯時全春未及省事區區採錄皆在傳聞及晩暮後疎略是痛深恐荏苒之間幷與此而湮沒焉則是府君行義生無以施於世歿無以表於後而不肖之罪益無所逃焉惟吾子亦嘗得侍於無恙時知吾祖爲深敢以是請光靖居稍間雖不得朝夕趨隅以考德問業而每一進見雖在篤耋之中整襟端坐肩背竦直視瞻無回聲音若出金石覿德歸來充然若有得也屬此遲暮倀倀無依益切高山景行之思惜乎家兄親炙之日尤多必有得於言行之外而善形容之者而人事至此亦君家之不幸也今以無能之辭摸狀德媺其何以傳信於後來乎蓋以是辭之而不得謹依家狀及權公之狀掇拾序次附以見聞之一二以竢能言之君子有所採擇云謹狀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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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예안 이씨(禮安李氏)는 남한(南韓)에 총2,724가구, 11,28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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