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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이씨(李)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광주이씨)

 

 

본관(本貫): 광주(廣州)

시조(始祖): 이자성(李自成)

유래(由來):

 

광주 이씨(廣州李氏)의 시조(始祖)는 신라 내물왕(奈勿王 : 17대 왕, 재위기간 356 402) 때 내사령(內史令)을 지낸 이자성(李自成)이다.

문헌에 의하면 그는 본래 칠원(漆原)에 세거(世居)해온 호족(豪族)의 후예로, 신라에서 벼슬을 세습해 오다가 제56대 경순왕(敬順王)에 이르러 고려(高麗)에 손국(遜國)하자 이에 불복(不服)하고 절의(節義)를 지켰으므로 고려 태조(太祖)가 강계(降階)하여 회안 호장(淮安戶長)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본관(本貫)을 회안으로 칭관(稱貫)하다가 940(태조 23) 지명이 광주(廣州)로 개칭됨에 따라 광주를 관향(貫鄕)으로 삼게 되었다.

그 후 광주 이씨(李氏)는 이자성(李自成)으로부터의 소목(昭穆)이 실전(失傳)되어 고려 말에 현달(顯達)했던 현조(顯祖)를 각각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수보(修譜)를 하게 되었다.

 

가문의 중요 인물

 

이관의(李寬義)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 본관은 광주 ( 廣州 ). 자는 의지(義之), 호는 율정(栗亭). 성리학을 비롯, 천문·지리·기상·역학 등의 일반과학 분야까지 전심하여 각기 일가를 이루었다. 진사에 합격하고 여러 번 대과에 응시하였으나 번번이 낙방하였다.

당시 진사의 위차가 생원의 아래에 있어 나이 많은 진사도 젊은 생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폐단을 시정하기 위하여 예조에 고쳐줄 것을 상계(上啓)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뒤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율봉도찰방(栗峰道察訪)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향리에서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다.

1483(성종 14) 성종이 경서에 밝고 품행이 방정한 인물을 널리 구할 때 손순효 ( 孫舜孝 )의 추천을 받아 경연 ( 經筵 )에서 대학중용을 강론하였다.

서거정 ( 徐居正 허종 ( 許琮 ) 등의 석학은 물론, 성종도 그의 고매한 품위와 박식에 탄복하여 후한 상을 내렸다. 이 때 성종이 높이 등용하고자 하였으나 나이를 핑계로 거절하였다. 이천의 설봉서원(雪峰書院)에 제향되었다.

 

이점

1446(세종 28) 1522(중종 1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 ( 廣州 ). 자는 숭보(崇甫).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이고, 아버지는 찰방 관의(寬義)이며, 어머니는 강순경(姜舜卿)의 딸이다.

1477(성종 8)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사예 · 사간원사간 · 성균관사성을 거쳐, 1499(연산군 5) 사헌부집의 · 사도시정(司 歸 寺正)을 역임하였다. 1500년 초무부사(招撫副使)로 해랑도(海浪島)의 유민을 수색한 공으로 봉상시정(奉常寺正)이 되고, 이듬해 홍문관부제학 · 동부승지 · 좌승지 · 도승지 등에 이르렀다.

1503년 형조참판 · 경상도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으로 재직중 갑자사화에 연루, 부안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1508년 형조판서로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한성부판윤을 거쳐 이듬해 겸동지성균관사(兼同知成均館事)를 지내고, 1512년 경기도관찰사로 나갔다.

1515년 동지성균관사 · 특진관 ( 特進官 )을 역임하고, 1517년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몸가짐이 바르고 곧아 가는 곳마다 청백(淸白)으로 일컬어졌으며, 성명 ( 性命 )의 오묘한 이치를 통달하고 천지 · 일월 · 성신의 도수에 환하였다. 시호는 문호(文胡)이다.

 

이집(李集)

1327(충숙왕 14)1387(우왕 13). 고려 말기의 학자·문인. 본관은 광주 ( 廣州 ). 초명은 원령(元齡). 자는 호연(浩然), 호는 둔촌(遁村). 광주 향리 당()의 아들이다. 충목왕 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문장을 잘 짓고 지조가 굳기로 명성이 높았다.

1368(공민왕 17) 신돈 ( 辛旽 )의 미움을 사 생명의 위협을 받자, 가족과 함께 영천으로 도피하여 고생 끝에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1371년 신돈이 주살되자 개경으로 돌아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여주 천녕현(川寧縣)에서 전야(田野)에 묻혀 살면서 시를 지으며 일생을 마쳤다.

그의 시에는 꾸밈과 우회보다는 직서체(直敍體)에 의한 자연스럽고 평이한 작품이 많다. 그는 당시 임심문(任深文)을 비롯한 60명에 달하는 많은 인물들과 시로써 교유하였다. 특히, 이색 ( 李穡 정몽주 ( 鄭夢周 이숭인 ( 李崇仁 )과의 친분이 두터웠다.

문집 부록에 실린 삼은 ( 三隱 )의 기((()는 그와 삼은과의 관계를 잘 알 수 있게 하여준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그가 조선조에 벼슬을 지냈다고 잘못 기록되어 있는데, 1611(광해군 3) 8대손인 영의정 이덕형 ( 李德馨 )의 주청이 받아들여져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바로잡혀지게 되었다. 광주의 구암서원 ( 龜巖書院 )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둔촌유고가 있다.

 

이지직(李之直)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했던 맏아들 지직(之直)1380(우왕 6) 문과에 아원(亞元)으로 급제하여 교리(敎理)와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했으며 조선이 개국한 후 정종(定宗) 때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에 올라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이극배(李克培)

1422(세종 4)1495(연산군 1).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 ( 廣州 )이다. 자는 겸보(謙甫)이다. 호는 우봉(牛峰)이다. ()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지직(之直)이다. 아버지는 우의정 인손(仁孫)이며, 어머니는 노신(盧信)의 딸이다. 1447(세종 29)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었다.

그 해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였다. 처음에 승문원부정자로 보임되었다. 이어 감찰이 되었으며, 검찰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정언·지제교가 되었다. 얼마 뒤에 지난번 명나라에 갔을 때 검찰직을 잘 수행한 것으로 평가되어 병조 겸 좌랑이 되었다가 정랑으로 승진하였다.

세조가 즉위하는 데 공이 인정되어 좌익공신 ( 佐翼功臣 ) 3등에 녹훈되었다. 1457(세조 3)에는 예조참의 겸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이어 가선대부 ( 嘉善大夫 )에 승자되어 광릉군(廣陵君)에 봉해졌다.

그 뒤 병조참판과 예조참판 겸 집현전제학을 거쳤다. 1459년에는 북변의 야인 정벌 때 신숙주 ( 申叔舟 )의 종사로 출전했고, 돌아와서는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1462년 이래 호조·공조를 제외한 4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다. 외직으로는 평안도절도사가 되어 변방의 어수선한 인심을 잘 무마했다. 그 공으로 정헌대부 ( 正憲大夫 )로 품계가 올라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예종 때는 우참찬이 되었다. 1471(성종 2)에는 좌리공신 ( 佐理功臣 )으로 책훈되고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1479년에는 보국숭록대부(輔國崇錄大夫)에 올라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1481년부터 2년 동안 대기근이 일어나자 진휼사(賑恤使)로 활약하고, 겸판호조사(兼判戶曹事)가 되었다. 1485년에 우의정이 되었다. 1493년에 영의정에 제수되었으나 노병을 구실로 사양했다. 다시 광릉부원군(廣陵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는 기국과 도량이 크고 깊으며 뜻과 생각이 견고했다. 경학으로 근본을 삼았고 행정 재능도 겸비하였다. 오래 정치권력을 손에 쥐고 있으면서도 사사로이 손님을 맞지 않았으며, 가무(歌舞)는 그릇된 것으로 여겼다. 나라의 일을 의논할 때는 대체적인 것에 힘쓰고, 세세한 것은 거론하지 않았다. 시호는 익평(翼平)이다.

 

이극감(李克堪)

1427(세종 9)1465(세조 11).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 ( 廣州 ). 자는 덕여(德輿).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직(之直)이고, 아버지는 우의정 인손(仁孫)이며, 어머니는 노신(盧信)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경사(經史)를 읽으면 대의를 통하였다.

1444(세종 2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집현전에 발탁되었고, 1447년에 중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부수찬에 임명되었으며, 1448년에는 세손강서원 ( 世孫講書院 )이 새로 설치되자 우찬독 ( 右贊讀 )이 되었다.

1450(문종 즉위년) 문종이 즉위하자 경연사경(經筵司經)을 지내고, 이듬해 대제학 정인지 ( 鄭麟趾 )의 추천으로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일으키기 위하여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를 하였다.

1455(세조 1) 수양대군 ( 首陽大君 )이 정권을 빼앗아 즉위하자 검상이 되었고, 즉위에 즈음하여 좌익공신 ( 佐翼功臣 ) 3등에 녹훈되고, 이조참의에 임명되었다. 왕세자가 책봉되었을 때 보도(輔導)의 책임을 부여받았다. 1458년에 동부승지가 되고, 이어 이조참판을 거쳐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1460년 북정(北征) 때에는 기무를 관장하였다. 신숙주 ( 申叔舟 )와 함께 국조보감 國朝寶鑑을 수찬하였으며, 치평요람 治平要覽·의방유취 醫方類聚등을 교정하여 간행하였고, 1461년에는 왕명으로 신숙주와 함께 북정록 北征錄을 찬진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이극증(李克增)

1431(세종 13) 1494(성종 25).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 ( 廣州 ). 자는 경위(景祁). 아버지는 우의정 인손(仁孫)이다. 1451(문종 1)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 되고, 문음 ( 門蔭 )으로 종묘녹사(宗廟錄事)가 되었다.

1456(세조 2)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군기시직장이 되고 우정자를 역임하였다. 그 뒤 이조좌랑에 이를 때가지 항상 서연 ( 書筵 )을 겸하였다.

1461년 정랑, 1463년 성균관직강 겸 의정부검상을 거쳐 사인을 역임하였다. 1467년 정략장군부호군(定略將軍副護軍)에 임명된 뒤 곧 승정원동부승지를 거쳐 좌승지가 되었다.

이듬 해 익대공신 ( 翊戴功臣 ) 2등으로 광천군(廣川君)에 봉해졌고, 1469년 도승지를 거쳐, 이듬 해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국가 경비의 식례(式例)식례횡간 式例橫看 을 찬정하였다. 1471(성종 2) 순성명량좌리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의 호를 받았고, 같은 해 정헌대부 ( 正憲大夫 )로 품계가 올라 호조판서가 되었다.

그 뒤 1477년 외직인 전라도관찰사로 나갔으며, 이듬 해 중앙으로 돌아와 우참찬을 지냈다. 1479년 병조판서 겸 지경연사(兵曹判書兼知經筵事)가 되고, 이듬 해 형조판서를 거쳐 1481년 좌참찬이 되었다.

이어 이듬해 병조판서를 거쳐, 1484년에는 겸동지성균관사(兼同知成均館事)로서 문묘를 수축하고 동무(東 黛 )와 서무(西 黛 )를 넓혀 위판제도(位版制度)를 일신하였다.

, 향관(享官 : 祭官)의 재숙소(齋宿所)를 정록청(正錄廳 : 성균관의 관원이 時政에 대해 적어 보관하던 곳)의 북쪽에 두었고, 관사의 무너진 곳을 고치는 등 학궁(學宮)에 공이 컸고 1488년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성품이 정직하고 성실하며, 번잡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한다. 또한, 관직에 있을 때는 부지런하고 성실히 공사를 처리했다는 평을 받았다. 시호는 공장(恭長)이다.

 

이극균(李克均)

1437(세종 19)1504(연산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 ( 廣州 )이다. 자는 방형(邦衡)이다. ()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지직(之直)이다. 아버지는 우의정 인손(仁孫)이며, 어머니는 노신(盧信)의 딸이다.

1456(세조 2)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했다. 무술에도 뛰어나 세조의 총애를 받고 선전관이 되었다. 1459년 성균관주부를 거치고, 이어 회령도사·지평, 도체찰사의 종사관을 역임하였다. 이듬 해 김구(金龜최항 ( 崔恒 정인지 ( 鄭麟趾 ) 등과 함께 교정손자주해 校正孫子註解를 찬하였다.

1467년 부호군으로 만포절제사(滿浦節制使)가 되었다. 건주위 정벌의 군공으로 3등공신이 되어 노비 6()가 하사되었다. 1469(예종 1)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472(성종 3) 천추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1474년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듬 해 동지중추부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77년 영안도관찰사가 되고, 1479년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1481년 의금부도사가 되었다. 이어 평안도절도사·한성부판윤·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1484년 대사헌을 거쳐 1486년에는 형조판서에 올랐다. 이어 의금부당상·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495(연산군 1) 다시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1498년에는 좌찬성을 역임했다. 이듬 해에는 경변사(警邊使)로 나아갔다. 1500년에는 우의정이 되었다. 그 이듬 해 좌의정 성준 ( 成俊 )과 함께 서북제번기 西北諸蕃記서북지도 西北地圖를 편찬하였다.

1502년에는 영의정 및 좌의정과 함께 시폐십조(時弊十條)를 왕에게 상소하였다. 1503년에는 좌의정이 되었다. 그가 여러 차례 연산군의 황음(荒淫)을 바로잡으려고 애쓴 것이 화근이 되어, 이듬 해 갑자사화 때 조카 세좌(世佐)와 함께 연루되어 인동 ( 仁同 )으로 귀양가서 사사되었고, 뒤에 신원되었다.

 

이준경(李浚慶)

1499(연산군 5) 1572(선조 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 ( 廣州 ). 자는 원길(原吉), 호는 동고(東皐) · 남당 ( 南堂 ) · 홍련거사(紅蓮居士) · 연방노인(蓮坊老人). 서울 출신. 극감(克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중추부사 세좌(世佐)이고, 아버지는 홍문관수찬 수정(守貞)이며, 어머니는 상서원판관 신승연(申承演)의 딸이다.

1504(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화를 입어 사사된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연좌되어 6세의 어린 나이로 형 윤경(潤慶)과 함께 충청도 괴산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났다. 외할아버지 신승연(申承演)과 황효헌 ( 黃孝獻 )에게서 학업을 닦고, 이연경 ( 李延慶 )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배웠다.

1522(중종 17)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 되고, 1531(중종 26)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한림을 거쳐 1533년 홍문관 부수찬이 되었다. 그 해 말 구수담 ( 具壽聃 )과 함께 경연에 나가 중종에게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사류들의 무죄를 역설하다가 오히려 권신 김안로 ( 金安老 ) 일파의 모함을 받아 파직되었다.

1537년 김안로 일파가 제거된 뒤 다시 등용되어 세자시강원필선 · 사헌부장령 · 홍문관교리 등을 거쳐 1541년 홍문관직제학 · 부제학으로 승진되고 승정원승지를 지냈다. 그 뒤 한성부우윤 · 성균관대사성을 지냈고, 중종이 죽자 고부부사(告訃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형조참판이 되었으며, 1545(인종 1) 을사사화 때는 평안도관찰사로 나가 있어 화를 면하였다.

1548(명종 3) 다시 중앙으로 올라와 병조판서 · 한성부판윤 · 대사헌을 역임했으나 1550년 정적이던 영의정 이기(李 咬 )의 모함으로 충청도 보은에 유배되었다가 이듬 해 석방되어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553년 함경도지방에 야인들이 침입하자 함경도순변사가 되어 그들을 초유(招諭 : 불러서 타이름)하고 성보(城堡)를 순찰하였다.

이어 대사헌과 병조판서를 다시 지내고 형조판서로 있다가 1555년 을묘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도순찰사로 출정해 이를 격퇴하였다. 그 공으로 우찬성에 오르고 병조판서를 겸임했으며, 1558년 우의정, 1560년 좌의정, 1565년 영의정에 올랐다. 1567년 하성군 균(河城君鈞 : 선조)을 왕으로 세우고 원상 ( 院相 )으로서 국정을 보좌하였다.

이 때 기묘사화로 죄를 받은 조광조 ( 趙光祖 )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을사사화로 죄를 받은 사람들을 신원하는 동시에 억울하게 수 십년간 유배 생활을 한 노수신 ( 盧守愼 ) · 유희춘 ( 柳希春 ) 등을 석방해 등용하였다. 그러나, 기대승 ( 奇大升 ) · 이이(李珥) 등 신진 사류들과 뜻이 맞지 않아 이들로부터 비난과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1571(선조 4) 영의정을 사임하고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임종 때 붕당이 있을 것이니 이를 타파해야 한다는 유차(遺箚 : 유훈으로 남기는 차자)를 올려 이이 · 유성룡 ( 柳成龍 ) 등 신진 사류들의 규탄을 받았다. 저서로는 동고유고 · 조선풍속 朝鮮風俗 등이 있다. 선조 묘정에 배향되고, 충청도 청안 ( 淸安 )의 구계서원 ( 龜溪書院 )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이중열(李中悅)

1518(중종 13)1547(명종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 ( 廣州 ). 자는 습지(習之), 호는 과재(果齋). 판중추부사 세좌(世佐)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부수찬 수정(守貞)이고, 아버지는 병조판서 윤경(潤慶)이며, 어머니는 현감 신종하(申宗河)의 딸이다.

1539(중종 3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조정랑에 이르렀다. 1545(명종 즉위년) 을사사화에 연루된 이휘(李輝)를 변호하다가 파직되어 이듬해 갑산에 유배되고, 1547년 사사되었다.

용모가 준수하고 태도가 의젓하여 조정에 있을 때 이황 ( 李滉 )에게 인정을 받았고, 유희춘 ( 柳希春 노수신 ( 盧守愼 ) 등과 친교를 맺었다. 선조 때 신원되었다. 편서로 을사전문록 乙巳傳聞錄이 있다.

 

이덕형(李德馨)

1561(명종 16) 1613(광해군 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 ( 廣州 ).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 · 쌍송(雙松) · 포옹산인(抱雍散人). 부사과 ( 副司果 ) 수충(守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좌찬성 진경(振慶)이고, 아버지는 지중추부사 민성(民聖)이며, 어머니는 현량 유예선(柳禮善)의 딸이다. 영의정 이산해 ( 李山海 )의 사위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고 침착했으며, 문학에 통달해 어린 나이로 양사언 ( 楊士彦 )과 막역한 사이였다 한다. 1580(선조 13)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 ( 承文院 )의 관원이 되었으며, 재주 있는 신하로 선발되어 선조로부터 서적을 받았다.

1582년 명나라에서 온 조사(詔使) 왕경민(王敬民)이 만나보고 싶어했으나 사적인 면대는 도리에 어긋남을 들어 사양하였다. 이에 왕경민은 만나보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그의 인격을 칭찬하는 글귀를 보내왔다고 한다.

이어 정자를 거쳐 1583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 진작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 전념하도록 휴가를 주던 제도)를 하였다. 이듬 해 서총대(瑞 升 臺)의 응제(應製)에서 장원을 했고, 이 외의 시험에서 여러 차례 수석을 차지하였다.

그 뒤 부수찬 · 정언 · 부교리를 거쳐 이조좌랑이 되었고, 1588년 이조정랑으로서 일본사신 겐소(玄蘇) 등을 접대해 그들의 존경을 받았다. 1590년에는 동부승지 · 우부승지 · 부제학 · 대사간 · 대사성 등을 차례로 지내고, 이듬 해 예조참판이 되어 대제학을 겸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북상중인 왜장 고니시(小西行長)가 충주에서 만날 것을 요청하자, 이를 받아들여 단기(單騎)로 적진으로 향했으나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왕이 평양에 당도했을 때 왜적이 벌써 대동강에 이르러 화의를 요청하자, 단독으로 겐소와 회담하고 대의로써 그들의 침략을 공박했다 한다.

그 뒤 정주까지 왕을 호종했고, 청원사(請援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파병을 성취시켰다. 돌아와 대사헌이 되어 명군을 맞이했으며, 이어 한성판윤으로 명장 이여송(李如松)의 접반관(接伴官)이 되어 전란 중 줄곧 같이 행동하였다. 1593년 병조판서, 이듬해 이조판서로 훈련도감당상을 겸하였다.

1595년 경기 · 황해 · 평안 · 함경 4도체찰부사가 되었으며,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어사 양호(楊鎬)를 설복해 서울의 방어를 강화하는 한편, 스스로 명군과 울산까지 동행, 그들을 위무(慰撫)하였다. 그 해 우의정에 승진하고 이어 좌의정에 올라 훈련도감도제조를 겸하였다.

이어 명나라 제독 유정(劉綎)과 함께 순천에 이르러 통제사 이순신 ( 李舜臣 )과 함께 적장 고니시의 군사를 대파하였다. 1601년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로 경상 · 전라 · 충청 · 강원 4도체찰사를 겸해 전란 뒤의 민심 수습과 군대 정비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대마도정벌을 건의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듬 해 영의정에 올랐다. 1604년 이항복 ( 李恒福 )이 그의 공을 들어 호성공신 ( 扈聖功臣 )에 녹훈할 것을 건의했으나 본인의 사양과 시기하는 자들의 반대로 책록되지 못하였다.

1606년 영중추부사가 되었다가,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진주사 ( 陳奏使 )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1613(광해군 5)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삼사에서 영창대군 ( 永昌大君 )의 처형과 폐모론을 들고 나오자 이항복과 함께 이를 적극 반대하였다.

이에 삼사가 모두 그를 모함하며 처형을 주장했으나, 광해군이 관직을 삭탈해 이를 수습하였다. 그 뒤 용진 ( 龍津 )으로 물러가 국사를 걱정하다 병으로 죽었다. 남인 출신으로 북인의 영수 이산해의 사위가 되어 남인과 북인의 중간 노선을 지키다가 뒤에 남인에 가담하였다.

어렸을 때 이항복과 절친한 사이로 기발한 장난을 잘해 많은 일화가 전해진다. 글씨에 뛰어났고, 포천의 용연서원 ( 龍淵書院 ), 상주의 근암서원(近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한음문고 漢陰文稿 가 있다. 시호는 문익 ( 文翼 )이다.

 

이지강(李之剛)

1363(공민왕 12)1427(세종 9).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 ( 廣州 ). 자는 중잠(仲潛). 아버지는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역임한 집()이다.

1382(우왕 8) 과거에 급제, 중서문하성의 녹사 ( 錄事 )를 거쳐, 1392(태조 1) 기거주 ( 起居注 )로서 조선 건국에 참여하였다. 특히, 이방원 ( 李芳遠 )의 측근으로서 1393년 정도전 ( 鄭道傳 ) 일파에 의해 탄핵, 순군옥 ( 巡軍獄 )에 투옥되기도 하였다. 그 뒤 이방원이 즉위해 정권을 잡자 사헌부장령으로서 풍기단속과 공신세력 제거에 앞장섰다.

1407(태종 7) 문과 중시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직제학에 특별히 제수되었고 전토 40결을 하사받았다. 이어 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를 지내면서 창업 초기의 궁궐 수축에 힘썼으며, 외직으로 수원부사가 되어 민정을 직접 다스렸다.

1411년 예조우참의로서 충청도·전라도 경차관에 임명되어 민정을 순찰, 탐학을 저지른 전라도수군도절제사 홍유룡(洪有龍), 임실감무 최참(崔漸), 당진감무 임을생(任乙生)을 탄핵해 파직시켰다.

그 뒤 이조참의·예문관제학을 역임하고, 1416년 한성부윤이 되어 도성의 살림을 주관하였다. 이듬 해 경상도도관찰사를 거쳐, 다시 내직으로 옮겨 호조참판·형조참판을 지냈다.

1419년 세종이 즉위하자 하정사 ( 賀正使 )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평안도도관찰사·이조참판을 역임하고 다시 호조참판이 되어 재정 체계를 바로 하는 데 힘썼다.

1420(세종 2) 호조판서, 이어 예조판서·대사헌·의정부참찬을 지내고 1425년 중군도총제(中軍都摠制)가 되어 군권을 총지휘하다가 곧 신병으로 사임하였다.

성품이 단정하고 검소했으며, 특히 재정 부서에 오래 근무했음에도 결코 축재에 관심이 없었다 한다. 문장에 능했고, 행정 업무에 있어 결단력이 있었다. 후사가 없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이지유(李之柔)

지유(之柔)는 성주 목사(星州牧使)를 역임했다.

 

이양중(李養中)

고려 말에 형조 우참의(刑曹右參議)를 역임하며 강직(剛直)한 충절(忠節)로 이름이 높았던 양중(養中)1392(태조 1) 고려의 국운이 기울고 조선이 개국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은거했으며, 후에 남한산(南漢山) 밑으로 퇴거하여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

태종(太宗)이 왕위에 오르자 몸소 양중을 찾아와 농주(農酒)로서 옛정을 나누며 시()를 짓기를 "그대가 어찌 옛날의 우정을 잊었는가? 광무황제(光武皇帝)와 엄자룡이 우의를 보나 한()나라 왕도 정치는 모두 우정에서 이루어 왔지 않았던가"하니, 양중이 답()하기를 "옛날의 우정이 아니면 어찌 오늘의 대작(對酌)이 있으리요"하니 왕도 그의 굳은 지조를 알고 밤을 새우며 우정을 나누었고, 양중의 아들 우생(遇生)에게 사온서 주부를 제수했다.

 

이양몽(李養蒙)

고려 말에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지내고 형()인 석탄공 양중과 함께 충절을 지켰던 암탄공(巖灘公) 양몽(養蒙)은 자손(子孫)들에게 조선조에 불사(不仕)하기를 유언했고, 지금의 서울시 고덕동(高德洞)은 양중과 양몽이 절의를 지켰던 고덕(高德)을 기리기 위해 붙여진 이름으로 전한다.

 

이필성(李必成)

효행(孝行)과 문장(文章)으로 이름 높았다.

 

이휴징(李休徵)

1607(선조 40) 1677(숙종 3). 조선 후기의 문신 · 학자. 본관은 광주 ( 廣州 ). 자는 선세(善世), 호는 휴암( 彧 庵). 아버지는 현령 ( 縣令 ) 필성(必成)이며, 어머니는 평산신씨(平山申氏) 교위 ( 校尉 ) 용수(龍壽)의 딸이다. 1648(인조 26) 교관 ( 敎官 )이 되었으며, 1651(효종 2)에 알성시 ( 謁聖試 )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전적 ( 典籍 ), 예조좌랑(禮曺佐郞), 사간원 정언 ( 正言 ) · 헌납 ( 獻納 ), 사헌부 지평 ( 持平 )을 거쳐 1663(현종 4) 삼척부사(三陟府使), 1665년에 성주목사(星州牧使)에 제수되었다. 1668년 장령 ( 掌令 )이 되었으며, 주로 양사 ( 兩司 )의 언관 ( 言官 )으로 있으면서 국왕에게 많은 간언을 하였다. 저서로는 휴암유고 가 있다.

 

이은(李誾)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했던 극기(克基 : 예손의 아들)의 아들 은()은 학자로 영광(靈光)의 보촌우에 배향되었다.

 

이윤우(李潤雨)

1569(선조 2)1634(인조 1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 ( 廣州 ). 자는 무백(茂伯), 호는 석담(石潭). 성주 출신. 고려의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의 후손이며, 진사 덕무(德茂)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준경(遵慶)이고, 아버지는 증좌승지 희복(熙復)이며, 어머니는 청도김씨(淸道金氏)로 도화서별서 숭()의 딸이다. 처음에는 이이(李珥)로부터 수학하였으나 그 사후에 정구 ( 鄭逑 )의 문인이 되었다.

1591(선조 24) 진사가 되고 1606(선조 39)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을 거쳐 광해군 즉위 초 승정원주서를 지냈다. 1610(광해군 2) 예문관검열로서 시강원설서를 겸임하고, 이어 사관으로서 정인홍 ( 鄭仁弘 )의 비위사실을 직서하였다가 탄핵을 받아 사퇴하였다.

그 뒤 예문관의 대교·봉교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다가 수성도찰방(輸城道察訪)을 지냈고 대북의 전횡이 심하여지자 사직하였다. 1623년의 인조반정 후 예조정랑·사간원정언·홍문관수찬·교리를 거쳤고, 1624년 이괄 ( 李适 )의 난 때 초유어사(招諭御史)로 특배(特拜)되었다.

이어 예문관응교·사간·성균관사성을 역임하고 1631년 공조참의에 이르렀다. 특히 여진이 활발히 자국의 강토를 강하게 넓힐 때 변방의 방어에 힘써 표리(表裏 : 왕이 내린 안팎의 옷감)를 하사되었다. 저서로는 석담집이 있다.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칠곡 사양서원 ( 泗陽書院 )과 성주 회연서원(檜淵書院)에 제향되었다.

 

이도장(李道長)

청명고절(淸名高節)로 명망이 높았다.

1603(선조 36)1644(인조 2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 ( 廣州 ). 자는 태시(泰始), 호는 낙촌(洛村). 준경(遵慶)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희복(希復)이고, 아버지는 공조참의 윤우(潤雨)이며, 어머니는 인천채씨(仁川蔡氏)로 생원 응린(應麟)의 딸이다. 장현광 ( 張顯光 )의 문인이다.

1630(인조 8)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곧 승문원권지정자로 등용되었다. 그 뒤 사근도찰방(沙斤道察訪주서 등을 지내다가, 1634년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사임하였다. 1636년 다시 주서로 복직하고, 그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이듬해인 1637년 검열이 되었고, 이어서 봉교가 되었다가 지평으로 승직하였다. 1638년 교리를 거쳐 이조좌랑으로 있을 때에, 청나라에서 요청하여온 군사의 파견을 앞장서서 막았다.

그 뒤 수찬을 지내고, 외직인 합천군수로 나갔다가 관직을 사임하였다. 그 뒤 응교·사간 등으로 임용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담명(李聃命)

숙종(肅宗) 때 영남(靈南)의 대기근을 구제하여 전설에 오르기까지 한 담명(聃命)이 광주 이씨의 전통을 이었다.

 

李恒福(이항복)  선생의 일화

 

1)

오성의 담력

한음으로부터 한밤중에 전염병으로 일가족이 몰살한 집에 시체 감장을 부탁받은 오성이 혼자 그 집에 이르러 시체를 감장하다가 갑자기 한 시체가 벌떡 일어나며 볼을 쥐어박는 바람에 혼비백산하였는데, 알고 보니 시체인 체 누워 있었던 한음의 장난이었다는 것이다.

오성의 아버지는 오성의 담력을 시험하려고 한밤중에 외딴 숲 속의 고목나무 구멍에 무엇이 있는가를 알아 오라고 시키고, 먼저 가서 나무 구멍 속에 숨어 있다가 오성이 구멍 속으로 손을 넣을 때 안에서 그의 손을 잡았는데, 오성은 놀라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체온이 느껴지자 귀신이 아니고 사람의 장난임을 알고 손을 놓으라고 호통을 쳤다는 것이다.

 

2)

오성에게 똥을 먹인 한음 부인

오성이 한음 부인과 정을 통하였다고 한음에게 농담으로 말을 하자, 이 말을 들은 한음 부인은 어는 날 오성을 초청해서 상을 잘 차리고 그 위에 먹음직한 떡을 만들어 놓았는데, 떡 안에 똥을 넣어 오성에게 먹이고 거짓말을 하는 입에는 똥이 들어가야 한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3)

오성의 선보기

오성은 신붓감을 선보려고 인절미를 해서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고 몽둥이로 자기를 쫓아오며 때리라고 시킨 뒤 도망치는 체하며 신부의 치마폭 속으로 들어갔다.
신부는 오성의 작난인 줄 알고 당황하지 않고
「선을 보려면 겉선이나 보시지 속선까지 보십니까.」
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4)

오성과 대장장이

오성은 어려서 집 앞에 있는 대장간에 놀러 다니면서 대장장이가 만들어 놓은 못(釘)을 하나씩 궁둥이에 끼어다가 모아 놓았다.
못이 하나씩 없어지자 대장장이는 오성의 장난인 줄 알고 오성이 올 때 쭘 불에 달군 아직 식지 않는 정을 맨 위에 놓았다.
오성은 그것도 모르고 못 위에 올라 앉아 궁둥이에 끼우려고 하다가 볼기짝을 데게 되었다.
오성은 혼이 나서 달아나고 그날부터는 못을 궁둥이에 끼워 가는 장난을 하지 않게 되었다.

뒷날 대장장이가 곤궁하게 되자 오성은 그간 모아 놓았던 정을 도로 주어 곤궁을 면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5)

권율과 오성

오성 집의 감나무 가지가 권율의 집으로 휘어 들어갔는데 이 가지에 열린 감을 권율 집에서 차지하자, 오성은 권율이 있는 방문에 주먹을 찔러 넣고
“ 이 주먹이 누구 주먹이오? ” 하고 물었다.
권율이
“ 네 주먹이지 누구 주먹이겠느냐. ” 라고 말하자 감을 가로챈 일을 추궁하였다는 것이다.

 

6)

큰 고기

권율이 어는 날 오성을 시험하려고, 동내 아이들을 자기 잡에 불러 모아 하인들을 시켜 맛이 있는 점심 식사를 대접하였다.
그런데 상 가운데 아주 큰 고기를 한 마리 맛있게 요리를 해서 내 놓았는데,  아이들은 고기가 너무 커서 아무도 손을 댈 엄두를 내지 않는데, 오성이 보더니 절로 고기를 가르고 커다란 살을 띠어 맛있게 먹는다.
그것을 본 다른 아이들도 그때서야 고기를 집어서 먹었다.

이를 본 권율장군은 오성이 장차 큰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더욱 귀여워하고 사위를 삼았다고 한다.

 

 

李德馨(이덕형) 선생의 일화.

한음의 참을성

오성과 한음은 한때 산속 절에 가서 공부를 한 일이 있었다.
그때 오성은 변소에서 용변을 보다가 우연히 도깨비를 만나 장차 정승까지 하리란 예언을 듣는다.
그리고 한음에게 변소에서 자기는 불알을 당기는 도깨비를 만나 예언을 들었다고 하며 변소에 가서 앉아 있어 보라고 한 뒤, 노끈으로 한음의 불알을 매어 당겼다.
한음이 아픔을 참고 견디자 정승까지 하겠다고 말한 뒤 한음에게 변소에서 일어난 일을 본 것같이 말하였다.

이에 한음은 비로소 오성에게 속은 줄 알았다는 것이다.

 

 

 

 

李世珩(이세형)의 효행.

 

벼슬길을 사양한 뜻은

 

이조 중기의 유학자 이 세형(李世珩)의 자는 초백(楚白, 호는 서헌(恕軒)으로 본관은 광주(廣州), 병조 좌랑(兵曹左郞) 석 문공(石門公) 기명(基命)의 아들로 초당(草塘) 현명(顯命)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공은 숙종 11년에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총명이 뛰어났으며, 행실이 단정하고 잡된 놀이를 하지 아니하며 아버지가 기특히 생각하고 매우 사랑하였다. 초당이 젊은 나이에 병사하자, 양모 윤씨가 청상과부(靑孀寡婦)로 슬하에 자식이 없는지라 양자를 물색하던 중 석문공(石門公)이 애지중지하는 세형을 선택하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아픔을 이기지 못하여 망설이고 있을 때, 조모가 중재 간청하여 입양하게 되었다.

 

천성이 효성스럽고 근실하며 총명한 공은, 입양 후 심신을 닦는 학문에 전심하였고, 효행도 남달리 뛰어나 양모를 섬기는 데 있어서도, 낳고 길러 주신 친어머니보다 더 극진히 섬긴 효자였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의관을 갖춘 후 어머니 침소에 나아가 밝은 표정을 띄우고 음성을 부드럽게 하여 문안을 드리고, 저녁이면 이부자리를 보아 드리고 덥고 추운 것을 살피며 항상 즐거운 표정으로 공경히 응대하여 매사 정성을 다하였으며, 출입할 때에는 반드시 절하고 고하여 예에 어긋남 이 없었다.

 

공은 소학(小學)으로 수신하는 법을 배웠고, 대학(大學)을 읽어 바른길을 찾았으며, 사서 삼경(四書三經)등을 통달하여 의리(義理)를 밝히고 진리를 탐구하여 스스로 깨달음이 많아, 많은 선비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또 예학 (禮學)에도 깊은 조예(造詣)가 있어 상제의례(喪察儀禮)’를 엮어 내니, 참고하는 이가 일목요연하여 일을 당함에 곤란함이 없었고, 원근 사대부가에서 예절을 문의하는 사람이 줄을 이었는데, 공의 가르침에 따라 시행하니 모두가 예의에 어긋남이 없었다. 그리고, 당시 구세안민(救世安民)을 위해 세상에서 가장 급한 일 열 가지를 골라서 시무(時務)’라 하여 사회의 폐단을 제거하고 풍속을 순화하는 방책을 밝히니, 당시 행정 당국이 이 시무 일부를 실제로 시행하여 실효를 거두었다고 한다.

 

일찌기 과거에 응하여 누차 합격하였는데, 기해년에 서울에 가서 세상의 도리가 허물어져 있음을 깨닫고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단념했다. 그러나, 향리에서 학덕을 닦으며 어머님께 효도하는 것을 더 큰 기쁨으로 삼았다.

 

한번 은 외삼촌 이조 판서 윤 양래(尹陽來)댁에 갔을 때 여러 대감들이 내방하여 공의 학식과 인품이 뛰어남을 높이 평가하여, 나라의 동량으로 등용할 것을 합의하고 떠난 일이 있었다. 이 사실을 안 공은 단호하게 거절하여 말하기를

내 외숙의 힘으로 벼슬길에 나아감은 내게 영광이 아니라 도리어 누() 가 됨이라.”

하고 끝내 사양하니, 옆에서 듣고 있던 사람들이 지금 세상에 벼슬을 사양 하는 사람은 오직 이 공뿐이라고 하였다.

 

공은 양모를 봉양함에 있어서도 온갖 정성과 예의를 다하여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 아침 저녁 식사 시에는 밥상 앞에 꿇어앉아 국과 밥의 따스함을 살피고, 그 반찬의 많고 적음을 챙겨 밥상을 치운 후 물러가서 밥을 먹었다. 이렇게 하기를 날마다 하였으니 어머니는 나이 많아도 쇠약하지 아니 하였으며, 매양 말씀하시기를 내가 청상과부로 이 세상에 오래 살 뜻이 없었는데, 이같은 효성스러운 자식이 있어 죽지 못하고 80이 넘도록 살았다고 했다. 혹 근심되는 일이 있어도 내색을 하지 않았으니 어머니는 늘 편안한 마음으로 지낼 수가 있었다.

 

무인년에 공의 장자가 죽자, 역리의 슬픔을 억누르기 어렵거늘 공은 어머님 앞에서 슬픈 빛을 외부에 나타내지 않으니, 모두가 공효심과 의지에 감복하였다.

 

어머니가 84 세에 노환으로 병석에 눕자, 효성이 지극한 공은 손수 약을 달여 올리고 잠시도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고 대소변을 받아내며 바깥 세상 이야기를 해 드려 위로하여 드렸고, 어머니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 드려 간호를 극진히 하였다.

 

그러나, 어머니가 끝내 세상을 떠나자 공의 슬픔은 옆에서 보는 이가 딱할 정도였으며, 사후 효성도 지극하였었다. 상중(喪中)에 슬픔을 이기지 못했음은 물론, 상례도 가례(家禮)를 준수하여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고, 3 년간 질대(絰帶)를 벗지 않고 내실에 출입을 금하며, 편안한 곳에 거처하지 않고 삼갔으며, 밥상을 올릴 때도 노비나 아들에게 맡기지 않았다. 또 제삿날을 당함에 집안을 깨끗이 청소하고 의복을 깨끗이 하여 온갖 정성을 다했다.

 

사람을 접할 때도 표리를 가지지 않고 오직 성실한 마음으로 대하니, 모든 사람들이 따르지 않는 이가 없었다. 가세가 넉넉지 못하나 마음이 편안하고 침착하게 처신했으며, 집안과 이웃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극진히 구조 하였으며, 자손들에게 훈계하여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내가 여유가 있을 때 남을 구제하려면 끝내 구제할 날이 없느니라 내 능력과 분수에 따라 힘 닿는 대로 구제함이 옳으니라.” 하셨다.

 

공은 매사에 사리의 옳고 그름을 가려내고, 이해를 초월하여 예에 어긋남이 없었으니, 향읍 대소사가 모두 공의 가르침에 따라 시행되니 이치와 의리에 어긋남이 없었다.

공은 천품이 중후(重厚)하고 기상이 늠름하며 성품이 소박하여 화려한 옷을 몸에 가까이하지 않았고, 맛있는 음식을 멀리하여 재물을 탐내는 일은 꾀하지 않아 청빈을 생활신조로 삼았고, 사람을 대할 때나 사물을 접함에 있어서 예의에 어긋남이 없었다.

 

공은 참으로 양어머니를 극진히 공대 봉양하였으며, 신실로 어머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참된 효도를 실천하였으며, 벼슬에 뜻을 두지 않은 채 자신의 심신을 닦는 학문에 전심하여 일생 수양에 힘써, 예에 어긋남이 없는 참으로 인격이 고매(高邁)한 분으로 오늘날 청소년들이 본받을 만한 인격자요 효자였다.

 

칠곡군 신동초등학교 이 교사

참고 문헌韓國人名大辭典, 嶠南誌, 漆谷誌, 恕軒先生文集,

 

 

 

 

 

李靜齋(이정재) 선생의 효행.

 

피적삼을 입고 지낸 한평생

 

()은 조선조 숙종 때 명신으로 자는 이로(耳老), 호는 정재(靜齋), 본관은 광주, 벼슬은 도승지, 대사헌, 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문익공(文翼公) 이 원정 (李元禎)의 맏아들로 1646723일 성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 터 남달리 총명하고 민첩하였으며, 특히 부모님에 대한 효성과 형제간의 우 애가 돈독하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하였다. 6 세 때 어머님이 병환에 드시자 자신이 의원을 불러 약을 쓰려 하다가 만류 당하자, 물러나 어 머님의 병을 근심하면서 나이 어린 것을 한탄하기도 하였다.

 

열 살 전후에 향교 앞을 지날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려 걷기에, 보는 이가

어린 아이가 왜 그렇게 하느냐?” 고 하면

남들이 다 내리는데 내 비록 어리지만 어찌 안 내릴 수 있습니까.”고 하 여 듣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당시 성주 목사가 이 말을 전해 듣고

이 아이는 뒷날 반드시 큰 인물이 될 사람이다.”

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일찍이 당대의 문장가이며 명필인 미수(眉叟) 허 목(許穆)을 찾아뵙고 스 승으로 섬겨 20 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25 세에 문과에 차석으로 급제해 차츰 승진하여 30 세에 정언(正言)이 되었을 때, 어머님이 병환에 드시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정성을 다하여 어머님의 병환을 보 살펴 완쾌된 후 다시 벼슬길에 나갔으며, 고향에서 지방 관리들의 비행과 군정 (軍政)의 문란함을 보고는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상소를 올려 시정 하도록 하였다.

 

1679(숙종 5), 다음 해에 닥칠 경신대출척(경신 사화)의 징조가 차츰 보이기 시작하자 외직을 자원, 홍주 목사가 되어 군민들에게 관청을 개방하고, 몸소 고을을 두루 살펴 백성들과 가까이하면서 그들의 고통을 일일이 덜어 주는 참다운 목민관이 되었다. 이듬해 경신대출척 때 아버님 문익공이 반대파인 서인의 모함을 받고 억울하게 함경도 초산(礎山)으로 귀양을 가게 되자 공도 또한 공직에서 쫓겨나 아버님과 함께 가게 되었다.

 

그 곳 귀양지 에서 험준한 땅을 맨발로 다니면서 아버님의 억울함을 눈물로 항거하였으나 반대파의 모함은 더더욱 심하여, 문익공은 그 곳에서 매를 맞고 죽는 억울 함을 당하였다. 이 때 공은 아버님의 죽음이 너무 억울하고 분하여, 아버님 이 매맞고 운명할 때 입었던 피묻은 적삼을 10 년 동안이나 입고, 문을 굳 게 닫고 이를 갈며 원한을 풀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1689년 기사환국(기사사화) 때 서인 일파가 다시 몰락하자 아버님의 원한을 기어코 풀고야 말았다. 숙종께서 말씀하시기를

경신사화 때 경의 아버지가 가장 원통히 죽어 내 늘 슬퍼하노라.”고 하시 니, 공은 임금님 앞에 엎드려 북받치는 설움을 참지 못하여 눈물을 비오듯 흘렸으며, 뒷날 정조께서 이 사실을 아시고 말씀하시기를

숙종 때 이 담명 (李聃命)의 복수는 중국 제 ()나라 양공 후에 처음 있는 일이다.”라고 극구 칭찬하셨으니, 이것은 공이 부모에 대한 효성이 얼마 나 지극하였는지가 잘 나타난 말들이다.

 

1690, 경상도 지방에 극심한 흉년이 들어 백생들이 거의 굶어 죽게 되었다. 이 때 조정에서는 이 곳 백성들을 구원할 사람은 공밖에 없다하여, 어 려운 시기에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자 곧 백성을 구하는 길은 세금과 부역 을 감해 주는 일이라 생각하고, 여러 가지 구원책을 세워 조정에 상소한 후 경기, 충청, 함경, 황해도 등지에서 곡식 수십만 석을 운반하여 오도록 조치 하고, 자신의 봉록(월급)도 함께 굶주리는 백성 구원에 내놓아, 경상도 백 성이 한 사람도 굶어 죽은 사람이 없었으니, 이는 공의 애민하는 마음과 치 밀하고 신속한 결단력의 덕택이었다.

 

이 일을 마쳤을 때 머리가 백발이 되었다고 하니, 백성을 구원하는 데 불철 주야 노심초사한 공의 흔적을 역력 히 찾아볼 수 있겠다.

이 사실을 자세히 기록한 진정 기록(賑政記銀) 두 책이 종가에 보관되어 있는데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이 공적을 기리는 송덕비가 왜관읍 석천동 수도산에 옛 칠곡읍에서부터 옮겨져 있다.

 

1692년 봄, 또 어머님이 병환에 드시자,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지극한 정성으로 병을 보살폈으며, 병이 낫자 다시 대사헌으로 부임하였다.

1694(숙종 20), 다시 김춘택(金春澤) 일파가 세력을 잡자, 그들이 제 일 미워하던 공은 또다시 모함을 받아 평안도 창성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귀양지에서 태연히

사람의 재앙과 복은 하늘에 달렸다.”

고 체념하고, 집으로 보낸 글에

나는 내가 죽고 사는 데는 아무런 두려움이 없다, 다만 늙으신 어머님을 멀리 떠나온 것이 원통하고 절통할 따름이다.”라 했다.

 

4 년간 귀양살이를 하면서 어머님을 그리는 사친곡(思親曲) 12 장을 지었으니, 그 글 속에 지극한 효심이 담겨 있다.

공은 벼슬이 높았으나 가난한 선비와 똑같은 생활을 하였으며, 어머님을 한 집에서 모실 때는 첫닭이 울면 문안을 드렸고, 음식을 드릴 때는 먼저 맛을 보고 권했으며 매사는 어머님 뜻을 쫓아 행하였으니, 공은 곧 참 효도를 행하라고 하늘이 보낸 출천의 효자였다.

 

170111656 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니, 공을 흠모하던 많은 선비들이 애석해 하였다. 문집, , , 손수 쓰신 졸구(拙構)가 전하는데, 졸구에 필사된 사친곡이 아직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아, 필자가 현대 표기로 고쳐 애절한 마음의 일면을 엿볼 수 있게 하였다.

 

봄은 오고 또 오고 풀은 푸르고 또 푸르네.

나도 이 봄 오고 이 풀 푸르기같이

어느 날 고향에 돌아가 노모께 뵈오려뇨.

친년(親年)은 칠십이요, 영로(嶺路)는 수천 리요.

돌아갈 기약은 갈수록 아득하다.

아마도 잠 없는 중야에 눈물겨워 설워라.

 

출전칠곡군 순심중학교 신교사

참고 문헌 靜濟集, 漆谷邑誌, 孝烈行誌,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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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광주 이씨(廣州李氏)는 남한에 총 33,816가구, 141,83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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