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李(단양이씨)
본관(本貫): 단양(丹陽)
시조(始祖): 이배환(李盃換)
유래(由來):
단양 이씨(丹陽李氏) 시조(始祖) 이배환(李盃換)은 고려(高麗) 태조(太祖)를 도와 삼한(三韓)을 통합하는데 공을 세워 삼한공신(三韓功臣)에 책록되고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후의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고려에서 내시진전직(內侍眞殿直)을 지낸 그의 10세손 이방규(李方揆)를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계대(繼代)해 오고 있다. 배환의 14손인 판서(判書) 거경(居敬)의 아들 무(茂)가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에 올라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를 지내고, 조선 개국 후 1398년(태조 7)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로서 왕자의 난(亂) 때 방원(芳遠)을 도와 정사일등공신(定社一等功臣)에 녹훈되고 단산부원군(丹山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단양(丹陽)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이겸(李謙)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자익(子益), 호는 손재(遜齋). 노(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양춘(陽春)이고, 아버지는 집의 ( 執義 ) 맹지(孟知)이며, 어머니는 강사민(姜思敏)의 딸이다.
1501년(연산군 7)에 진사가 되고, 1507년(중종 2)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흥덕현감·장령·사성을 거쳐 중화부사에 이르렀다. 1519년 기묘사화 때 장령으로서 대사성 유운 ( 柳雲 )과 조광조 ( 趙光祖 ) 등을 변호하는 극렬한 상소를 올려 파직되었다. 영조 때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이지시(李之詩)
?∼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영이(詠而), 호는 송암(松菴). 우의정 무(茂)의 후손이다. 아우 지례(之禮)와 더불어 문재와 무예에 다같이 뛰어났다.
1567년(선조 즉위년) 무과에 장원급제, 훈련원정으로 있다가 문장에 능통하였으므로 특별히 동반직(東班職)인 주서 ( 注書 )에 등용되었고, 곧이어 문무가 겸비한 것을 인정받아 승지로 발탁되었다. 1583년(선조 16)에는 이성현감으로 있으면서 북방 오랑캐의 침입을 격퇴하였다.
그 뒤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조방장(助防將)으로 경상도에 나가 여러 번 싸워 공을 세웠으며, 청주가 함락되고 적이 수원에 웅거하자 이를 격퇴하기 위하여 백광언 ( 白光彦 ) 등과 함께 분전하다가 아우 지례와 더불어 모두 전사하였다.
선무공신 ( 宣武功臣 )에 책정되고 병조참판의 추증을 받았다가 후에 다시 형제 모두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태인의 모충사 ( 慕忠祠 )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경의(景毅)이다.
이입(李立)
의병장(義兵將) 입(立)은 임진왜란 때 소사싸움에서 공을 세워 훈련판관(訓練判官)이 되어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에 올랐으며 정묘호란 때는 의병(義兵)을 일으켜 오랑캐를 무찔러 공을 세움으로써 명나라로부터 상을 하사받았다.
죽은 후에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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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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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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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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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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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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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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言(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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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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鳳(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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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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錫(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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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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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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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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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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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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潤(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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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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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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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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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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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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根(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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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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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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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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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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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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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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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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弘(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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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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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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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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均(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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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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汝(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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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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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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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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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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陽(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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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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基(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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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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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단양이씨(丹陽李氏)는 남한에 총 3,537가구, 14,34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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