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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덕수이씨(李)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덕수이씨)

 

 

본관(本貫): 덕수(德水)

시조(始祖): 이돈수(李敦守)

유래(由來):

 

덕수 이씨(德水李氏)의 시조(始祖) 이돈수(李敦守)는 고려 때 신호위 중랑장(神虎衛中郞將)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양준(陽俊)은 조산대부(朝散大夫)로 흥위위 보승장군(興威衛保勝將軍)을 역임하고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어사대부(御史大夫이부 상서(吏部尙書) 등에 추증되었다.

 

가문의 중요 인물

 

이소(李召)

양준의 아들 소()가 고려 고종(高宗) 때 남성시(南省試)에 급제하여 통의대부(通議大夫)로 전법 판서(典法判書)와 지삼사사(知三司事세자내직랑(世子內直郞) 등을 역임하였다. 개풍군 중면 덕수리 군장산(開豊郡中面德水里軍壯山) 아래에 있는 그의 묘()는 공자(孔子)를 낳게 한 이산(尼山)을 닮았다는

 

이윤온

소의 아들 형제 중 장자인 윤온이 판도판서(版圖判書)와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하며 나라에 공을 세워 선충경절공신(宣忠勁節功臣)에 책록되고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으로 첨의정승(僉議政丞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에 추증되어, 덕수부원군(德水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이천선(李千善)

고려 말에 참지문하정사(參知門下政事)를 지내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수사공 주국(守司空柱國)에 올라 낙안백(樂安伯)에 봉해졌던 천선(千善 : 윤온의 아들)이 뛰어났다.

 

이변(李邊)

1391(공양왕 3) 1473(성종 4).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덕수 ( 德水 ). 아버지는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 공진(公晉)이며, 어머니는 정광조(鄭光祖)의 딸이다. 1419(세종 1) 식년문과에 동진사 ( 同進士 )로 급제, 승문원박사가 되었으며, 한문훈해(漢文訓解)에 정통하여 부교리에 올랐다.

1427년에 사역원판관이 되어, 이로부터 항상 승문원과 사역원의 직을 겸임하였다. 이어 전농시판관(典農寺判官) · 호군 · 봉상시윤(奉常寺尹) · 대호군 · 예문관직제학 · 우사간 · 호조참의 · 공조참의를 지냈다. 1448년에 중추원부사가 되고, 예조 · 이조 · 공조 · 병조의 참판을 거쳐, 경창부윤(慶昌府尹) · 형조판서를 지냈다.

1456(세조 2) 예문관대제학을 지낸 뒤, 공조판서 ·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 판중추원사를 지냈고, 1467년 궤장( 廓 杖)을 하사받았으며, 1472(성종 3) 영중추부사 ( 領中樞府事 )에 이르렀다. 화어(華語)에 능통하여 중국에까지 알려졌다고 한다. 시호는 정정(貞靖)이다.

 

이거

?1502(연산군 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덕수 ( 德水 ). 자는 자미(子美). 공진(公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제학 변()이고, 아버지는 조()이며, 어머니는 기분(奇賁)의 딸이다. 이순신 ( 李舜臣 )의 증조부이다. 1480(성종 11)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설경 ( 說經 홍문관박사· 사경 ( 司經 )을 역임하였다.

1484년 암행어사로 나가 과천에서 현감 최급(崔伋)을 오리(汚吏)로 잡아 올렸다. 1486년 사간원정언, 1489년 이조정랑, 1491년 장령, 1495(연산군 1) 보덕을 지내고, 이 해에 장악원정, 승문원참교·한학교수를 겸하여 춘추관편수관으로 성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97년 순천부사에 이어 호군이 되었다. 성격이 강직하여 언관으로 있으면서 부정한 관리에 대해서는 관직의 고하를 가리지 않고 탄핵하였다.

 

이이(李珥)

1536(중종 31) 1584(선조 17). 조선 중기의 학자 · 정치가. 본관은 덕수 ( 德水 ).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 · 석담(石潭) · 우재(愚齋). 강릉 출생. 아버지는 증 좌찬성 원수(元秀)이며, 어머니는 현모양처의 사표로 추앙받는 사임당 신씨(師任堂申氏)이다.

아명을 현룡(見龍)이라 했는데, 어머니 사임당이 그를 낳던 날 흑룡이 바다에서 집으로 날아 들어와 서리는 꿈을 꾸었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그 산실(産室)은 몽룡실(夢龍室)이라 하여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8세 때에 파주 율곡리에 있는 화석정 ( 花石亭 )에 올라 시를 지을 정도로 문학적 재능이 뛰어 났다. 1548(명종 3) 13세때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6세 때에 어머니가 돌아가자,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 장례하고 3년간 시묘 ( 侍墓 )하였다, 그 후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고 다음해 20세에 하산해 다시 유학에 전심하였다.

22세에 성주목사 노경린 ( 盧慶麟 )의 딸과 혼인하였다. 23세가 되던 봄에 예안 ( 禮安 )의 도산(陶山)으로 이황 ( 李滉 )을 방문했고, 그 해 겨울의 별시에서 천도책 天道策 을 지어 장원하였다. 전후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 ’ 이라 일컬어졌다. 26세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29세에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예조좌랑 · 이조좌랑 등을 역임, 33(1568)에 천추사 ( 千秋使 )의 서장관 ( 書狀官 )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부교리로 춘추기사관을 겸임해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 해에 19세 때부터 교분을 맺은 성혼과 지선여중(至善與中) ’ 안자격치성정지설(顔子格致誠正之說) ’ 등 주자학의 근본문제들을 논하였다. 34세에 임금에게 동호문답 東湖問答 을 지어올렸다.

37세에 파주 율곡리에서 성혼과 이기(理氣) · 사단칠정 ( 四端七情 ) · 인심도심(人心道心) 등을 논하였다. 39(1574)에 우부승지에 임명되고, 재해로 인해 만언봉사 萬言封事 를 올렸다.

40세 때 주자학의 핵심을 간추린 성학집요 聖學輯要 를 편찬했다. 42세에는 아동교육서인 격몽요결 擊蒙要訣 , 45세에는 기자의 행적을 정리한 기자실기 箕子實記 를 편찬했다.

47세에 이조판서에 임명되고, 어명으로 인심도심설 人心道心說 을 지어 올렸다. 이 해에 김시습전 金時習傳 을 쓰고, 학교모범 學校模範 을 지었으며, 48세에 시무육조 時務六條 를 올려 외적의 침입을 대비해 십만양병을 주청하였다.

49세에 서울 대사동(大寺洞)에서 영면, 파주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었다. 문묘에 종향되었으며, 파주의 자운서원 ( 紫雲書院 ), 강릉의 송담서원 ( 松潭書院 ), 풍덕의 구암서원 ( 龜巖書院 ), 황주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20여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1545년 을사사화가 발생해 수많은 사류(士類)가 죽고 유배되었다. 사림은 출사(出仕)를 포기하고 물러서서 학문을 닦을 수밖에 없었다. 1565(명종 20) 문정대비(文定大妃)의 죽음과 20년간 정사를 전횡하던 권신 윤원형 ( 尹元衡 )의 실각으로 나라 안의 정세가 바뀌었다.

을사사화 이후 죄를 입은 사람들이 풀려나고, 사림은 다시 정계로 복귀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 이이는 30세로서 출사 1년째 되는 해였다. 1567년에는 이황이 상경하였다. 그 해 6, 명종이 죽고 선조가 즉위하면서 8월에는 을사사화 이후 피죄되었던 노수신 ( 盧守愼 ) · 유희춘 ( 柳希春 ) 등이 서용(敍用)되었다.

선조 즉위 다음해인 1568년에는 조광조 ( 趙光祖 )에게 영의정을 추서, 이황이 일시에 대제학에 취임하고 남곤 ( 南袞 )의 관작을 삭탈하였다. 이황은 성학십도 聖學十圖 를 지어 올렸고, 1569(선조 2)에는 이이가 동호문답 을 지어 올렸다.

1570년에는 유관 ( 柳灌 ) · 유인숙 ( 柳仁淑 )의 신원이 이루어지는 등 정국이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면서 사림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그러나 오랜 구습이나 폐풍은 일시에 시정될 수 없었고 유림의 활동은 떨쳐 일어나지 못했다.

더구나 1575년부터는 동서의 분당으로 사림이 분열되고 정쟁이 심각해졌다. 연산군 이래의 폐법은 고쳐지지 않은 채 국가의 기강은 무너지고 민생의 곤고는 극도에 달하였으며, 군사적으로도 무력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1565년부터 1592(선조 26)까지의 약 30년 간은 국정을 쇄신해 민생과 국력을 회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이는 16세기 후반의 조선사회를 중쇠기(中衰期) ’ 로 판단해 일대 경장(更張)이 요구되는 시대라 보았다.

이이는 만언봉사 에서 시의(時宜)라는 것은 때에 따라 변통(變通)하여 법을 만들어 백성을 구하는 것 이라 하였다.

그는 조선의 역사에 있어서도 우리 태조가 창업했고, 세종이 수성(守成)경제육전 經濟六典 을 비로소 제정하였다. 세조가 그 일을 계승해 경국대전 을 제정했으니, 이것은 모두 시의(時宜)에 따라 제도를 개혁한(因時而制宜) ’ 것이요, 조종(祖宗)의 법도를 변란(變亂)함이 아니었다. ” 고 하였다. 그러므로 시대의 변천에 따른 법의 개정은 당연한 일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이에게 성리학은 단순한 사변적 관상철학(觀想哲學)이 아니었다. 그는 성리학의 이론을 전개함에 있어 시세(時勢)를 알아서 옳게 처리해야 한다는 실공(實功) ’ 실효(實效) ’ 를 항상 강조하였다.

그는 만언봉사 에서, “ 정치는 시세를 아는 것이 중요하고 일에는 실지의 일을 힘쓰는 것이 중요한 것이니, 정치를 하면서 시의)를 알지 못하고 일에 당해 실공을 힘쓰지 않는다면, 비록 성현이 서로 만난다 하더라도 다스림의 효과를 거둘 수 없을 것이다. ” 고 하였다.

따라서 이이는 항상 위에서부터 바르게 하여 기강을 바로잡고 실효를 거두며, 시의에 맞도록 폐법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사화로 입은 선비들의 원을 풀어주고, 위훈(僞勳)을 삭탈함으로써 정의를 밝히며, 붕당의 폐를 씻어서 화합할 것 등 구체적 사항을 논의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기(國基)를 튼튼히 하고 국맥(國脈)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이는 성현의 도는 시의와 실공 을 떠나서 있지 않으므로 현실을 파악하고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요() · () · () · ()이 있더라도 시폐(時弊)를 고침이 없이는 도리가 없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이이는 진리란 현실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고, 그것을 떠나서 별도로 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여기서 이()와 기()를 불리(不離)의 관계에서 파악하는 이이 성리설의 특징을 보게 되는 것이라 하겠다.

 

이황과 이이의 사상적 배경이이와 성혼은 평상시에 경학이나 도학과 관련해 문답하는 서한을 교환하였다. 이황이 죽은 2년 뒤 이이가 37세가 되던 임신년(1572)에 성리설에 대한 본격적인 논란을 벌였다.

그것은 이황과 기대승의 논변처럼 오랜 세월을 두고 계속한 것이 아니라, 1년 사이에 9회에 걸쳐 주고받은 것이다. 대체로 성혼이 이이에게 질의하고 이이가 회답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성혼의 질의내용은 비교적 단순한 것으로, 주자학의 핵심 논제를 집중적으로 거론하였다.

성혼은 일찍이 이황과 기대승(奇大升) 사이에 오간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에 대해 기대승의 논의를 존중하다가 이황의 이기호발설 ( 理氣互發說 )의 도덕적 고민을 이해하고 그 취지에 수긍하게 되었다. 성흔은 이 문제를 과연 어떻게 정돈해야 하느냐고 이이에게 의견을 물었던 것이다.

호발설(互發說) ’ 에 대한 성혼의 재론을 계기로 이이는 이황은 물론, 서경덕 ( 徐敬德 )과 나흠순(羅欽順)에 대한 논평뿐 아니라, 경전의 본의와 송대 제유(諸儒)의 성리설을 집약적으로 논술해 나갔다.

이 논쟁은 이이에게 성리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정리하고 심화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고, 후기의 저작인 성학집요 속의 성리설이나 만년작인 인심도심설 의 내용의 핵심을 형성하고 있다.

이이는 선배인 이황의 이원적 이기론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황이 이기를 그처럼 분열적 대립으로 이해하게 된 것은 그 자신이 잇달은 사화를 겪으며 당시의 사회정치적 혼란과 부조리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던 데 연유한다.

그는 개인과 집단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가 공의(公義)와 사리(私利)의 분별이 명확하지 못한 데서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그가 천리와 인욕, 인심과 도심, 사단과 칠정, 그리고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을 대립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같은 자각의 반영이다.

이황에게 이발(理發)과 기발(氣發), 사단과 칠정, 그리고 도심과 인심은 각기 순수한 정신적 가치와 신체적 · 물질적 욕구의 두 방향을 의미하였다. 그는 이기가 왕신관계(王臣關係)에 있으며, 인심은 항상 도심의 명령을 순종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관계가 전도되면 개인적으로는 도덕성의 방기를,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윤리의 파멸과 정치의 타락을 초래하게 된다. 따라서 이황은 일체의 작위의 근원은 마음의 위미지간(危微之間)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혼탁한 정치현실을 떠나 학문을 닦음으로써 입언수후(立言垂後) ’ 하여 도()를 전해주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

이에 비해 이이의 경우는 상황이 달랐다. 1565년 이후로 사림이 다시 복귀하게 되면서 사회적 상황을 개선하고 민생의 문제를 해결하며 국맥을 바로잡을 수 있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이이는 현실의 개선 그 자체에 진리성을 찾았다. 이이가 이기를 불상잡(不相雜)의 대립이 아니라 불상리(不相離)의 묘()에서 파악하는 것도 이같은 낙관을 반영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이이의 사칠론이나 인심도심설에 대한 해석도 이황의 이원적인 논의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칠정을 형기(形氣)에 속한 것으로만 보지 않고 본연지성 또한 기질지성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이와 기는 논리적으로 구별하는 것이지, 사실적으로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이에게 기란 단순히 혈기지기(血氣之氣)로서 타락의 가능성만을 지닌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기는 물질적인 것, 감성적인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영역, 심령이나 이성까지도 포괄한다.

여기서 기는 본연지성을 엄폐(掩蔽)하는 것일 뿐 아니라, 본연지성을 드러나게도 하고 나아가 회복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이이는 인심도심이 다 기의 발이요, 기에 있어 본연지리(本然之理)를 순()한다면 기가 본시 본연지기(本然之氣)이다. ” 라고 하며, “ 기의 청명여부(聽命與否)는 다 기의 소위(所爲)이니, 호발이 있을 수 없는 것 이라고 했다.

인심도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인심은 구체(口體) ’ 를 위한 것으로서 그리고 도심은 도의 ( 道義 ) ’ 를 위한 것으로서 서로 구별된다.

그러나 그는 이황의 주장처럼 하나는 기발, 하나는 이발로 서로 다른 본질과 근원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하나의 심이 단지 발하는 곳에 있어서 이단(二端)이 있을 뿐 이라고 생각했다.

인심은 성현이라도 면할 수 없으며, “ 먹을 때 먹고 입을 때 입는 것 은 바로 천리인 것이다. 이이는 인심이라 해도 그것이 알맞게 조절된 상태에서는 인심 또한 도심이 된다. ” 고 하였다.

 

서경덕·이황·이이의 이기론적 차이흔히 서경덕은 물론이요 이이까지도 주기론(主氣論) ’ 이라 하여 학문적으로 연관시켜 보는 경향이 있다. 서경덕과 이이는 다 같이 기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특히 기의 불멸성, 능동성을 강조해 기의 면을 전폭적으로 긍정한 점에서 그렇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이는 서경덕이 이기의 불리(不離)에 대한 이해는 깊고 투철하지만, 그 위에 뚜렷이 극본궁원(極本窮源)하는 이()의 면이 있음을 몰랐다고 비판했다. 서경덕이나 송대의 장재(張載)가 기에 치우치고 이기를 혼동해 성현의 뜻에 묘계(妙契)치 못하였다고 지적했다.

이이는 서경덕의 유기론적(唯氣論的) 입장에 대해 이통기국(理通氣局) ’ 을 모르는 소치라 하여 한 모퉁이를 본 사람(見一隅者) ’ 라 폄하했다. 이이 또한 이기지묘(理氣之妙)를 말하지만 그는 서경덕처럼 구극적 존재를 태허지기(太虛之氣)로 보지 않고, 태극지리(太極之理)로 이해한다.

이이는 이황처럼 이와 기를 엄격하게 구별하고 이가 기에 우월하다는 이우위설(理優位說)을 주장했다. 이와 기는 결코 혼동할 수 없는 것이며, 이는 기의 추뉴(樞紐)요 근저(根 沙 )요 주재(主宰)라는 것이다. 이의 본체는 통일적 원리이지만 그것은 사사물물에서 유행하는 것이요 만유(萬有)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황이 이와 기가 각각 실질적 동력으로 발용한다는 호발설을 주창한 데 대해 이이는 이기는 이합과 선후가 없다는 기발이승일도설 ( 氣發理乘一途說 )을 주장했다.

이이의 견해는 처음부터 이기를 이원적으로 파악하는 이황과 달리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현상 그 자체의 소이연으로서 이를 말하는 까닭에 이발(理發)이 따로 있을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이이는 서경덕의 주기론에 대해서는 특히 이통기국설 , 그리고 이황의 이기이원적 경향에 대해서는 기발이승일도설 로 대응했다.

서경덕은 실재하는 기의 생성변화를 떠나서 별도로 묘()를 말하는 것은 진리를 모르는 자라 하였다. 그러나 이황은 이와 달리 이()야말로 가장 알기 어려운 것으로서 이로 말미암아 모든 학문 도술의 차이가 생기는 것이라 하였다.

이처럼 이황은 만유를 가능하게 하는 초월적 존재로소 이를 강조한 반면, 서경덕은 이를 기 자체와 작용상의 자율성 또는 내재율로 보아 기의 실재성과 사실성을 강조하였다.

서경덕은 유기론자로서 기를 중시하고 이황은 이우위설을 논해 이의 구극성을 강조하였다. 서경덕과 이황은 거의 동시대의 인물이면서도 이와 같이 매우 대조적인 견해를 견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이는 이의 세계와 기의 영역을 완전히 긍정 포괄하면서 동시에 양면을 아울러 지양시켰다. 이이는 기의 사실성과 이의 초월성을 체인(體認 : 충분히 납득함.)해 양자를 불리의 관계에서 파악하면서 이기지묘 를 강조했다. 이이는 이기의 묘처(妙處)야말로 알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설명하기도 어렵다고 하였다.

이이는 태극과 음양, 이와 기의 관계는 일이이(一而二)요 이이일(二而一)이라는 기본 인식을 바탕으로 그의 이론을 대략 다음과 같이 집약하였다.

전훈(前訓)을 고찰하면 이기는 일()이면서 이(), ()이면서 일()이다. 이기가 혼연무간해 원래 떨어지지 않으므로 정자는 기즉도(器卽道)요 도즉기(道卽器) ’ 라 했고, 떨어지지 않을지라도 혼연한 가운데 섞이지 않아서 일물(一物)이라고 할 수 없으므로, 주자는 이는 스스로 이요, 기는 스스로 기 라고 한 것이다.

이 두 설을 종합해 깊이 생각하면 이기지묘를 거의 알 수 있으리라. 그 대강을 말하면 이는 무형하고 기는 유형하다. 그러므로 이는 통()하고 기는 국()한다. 이는 무위하고 기는 유위하므로, 기는 발()하고 이는 승()한다. 무형무위하면서 유형유위한 것의 주()인 것은 이이며, 유형유위하면서 무형무위한 것의 기()인 것은 기이다(聖學輯要). ”

이이의 이통기국과 기발이승일도설은 보편적 원리와 특수한 사실을 상호관련 하에 파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사사물물을 관통하고 있으며, 본연지리는 스스로의 보편성을 가지는 것이지만, 변화하는 사실과 관련한 유행지리(流行之理)를 떠나서 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보편적 원리가 사사물물의 개별적 사실을 관통하고 있으며, 또한 구체적인 변화의 상을 떠나서는 추구할 수 없다는 논리로서, 성리와 실사가 혼융무간한 관계임을 통찰한 결과이다.

 

이이성리설의 현실적 의미이이는 이른바 의()와 이()를 구별해 이원화하는 사고방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의리(義理)와 실리(實利)를 불가리(不可離)의 관계에서 보고 있다.

그는 시무칠조책 時務七條策 에서 ()의 병립할 수 없는 것은 시()와 비()이며, ()의 함께 할 수 없는 것은 이()와 해()이다. 한갓 이해가 급하다고 하여 시비의 소재를 불고(不顧)한다면 제사지의(制事之宜)에서 어긋난다. 또한 시비를 생각해 이해의 소재를 살피지 않는다면 응변지권(應變之權)에서 어긋난다. … … ()에는 정규(定規)가 없으니 중()을 얻음이 귀하고, ()에는 상제(常制)가 없나니 의()에 합함이 중하다. 중을 얻고 의에 합하면, 즉 시()와 이()가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다.

진실로 국가를 평안하게 하고 민중에게 이로우면 다 행할 수 있는 일이요, 나라를 평안하게 하지 못하고 민중을 보호하지 못하면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 고 하였다.

이와 같이 옳고 그름을 가르는 규범의 문제와 이해 관계를 따지는 현실 문제가 득중(得中) ’ , ‘ 합의(合宜) ’ 함으로써, 보국과 안민이라는 차원에어서, ()와 이()의 조화라는 하나의 사실로 지양됨을 볼 수 있다.

이이는 시대에 따라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이 각기 다르다고 보았다. 그는 시대를 창업(創業) ’ 수성(守成) ’ 그리고 경장(更張) ’ 의 과정으로 나누어 논했으며, 당시를 경장기라고 보았다.

이이는 동호문답 에서 가장 큰 폐법으로 다섯 가지를 들어 설명하였다. 그것은 모두 민생에 관계되는 것으로서, 일가절린(一家切隣)의 폐, 진상번중(進上煩重)의 폐, 공물방납(貢物防納)의 폐, 역사불균(役事不均)의 폐, 그리고 이서주구(吏胥誅求)의 폐를 꼽았다.

이러한 그의 지적은 당시의 시대상과 민중의 질고(疾苦)를 가장 잘 나타낸 것이다. 또한 그는 국세조사와 같은 전국적인 규모의 조사를 실시해 실정에 알맞게 폐법을 개혁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밖에도 이이는 만언봉사 · 성학집요 및 수많은 상소문을 통해 정치 · 경제 · 문교 · 국방 등에 가장 필요한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더 나아가 이이는 국정을 도모함에 있어서도 개인이나 일부 지도층으로부터 하향식으로 수행될 것이 아니라. 언로를 개방해 국민 모두가 말할 수 있게 하고, 위정자는 아래로부터의 중지(衆智)를 모아야 한다고 보았다.

조광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이에게 언로의 개색(開塞)은 국가 흥망에 관계된 중대한 일로서 강조되었다. 공론(公論)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 국민의 정당한 일반 의사가 곧 국시(國是)가 된다고 지적하면서, 언로의 개방성과 여론의 중요성을 피력했다.

또한 이이는 경제사(經濟司)의 창설을 제의하면서 단지 기성 관료가 아니라, 시무를 밝게 알고 국사를 염려하는 사류로서 윤리성과 합리성을 겸비한 최고의 지성이 동원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렇듯 의리와 실리, 이념과 현실의 통합적 구상은 후기에 한국의 의리학과 실학으로 전개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도 조선 중기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 전개에서 이이의 성리설이 끼친 영향을 깊이 관찰해야 한다.

그의 성리사상은 오늘날에도 유심과 유물, 주체와 상황, 그리고 현실과 이상의 괴리로부터 양자의 조화와 발전을 도모하는 데에 새로운 방향을 던져주고 있다.

 

이우(李瑀)

1542(중종 37) 1609(광해군 1). 조선 중기의 서화가. 본관은 덕수 ( 德水 ). 이름은 위() 또는 후(). 자는 계헌(季獻), 호는 옥산 ( 玉山 ) · 죽와(竹窩) · 기와(寄窩). 원수(元秀)의 아들이며, ()의 동생으로,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師任堂申氏)이다.

1567년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비안현감과 괴산 · 고부군수를 거쳐 군자감정에 이르렀다. () · () · ( ) · ()을 다 잘하여 4(四絶)이라 불렸다. 그림은 초충(草蟲) · 사군자 · 포도 등을 다 잘 그렸는데, 어머니의 화풍을 따랐다. 아들 경절(景節)도 가법(家法)을 이어 서 · · 금에 능하여 3절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가 초충을 그려 길에 던지면 닭이 와서 쪼았다는 일화가 있을 만큼 화훼초충(花卉草蟲)을 잘 그렸다고 한다. 묵매화(墨梅 怜 )는 주로 횡관식구도(橫貫式構圖)로 힘차게 묘사하였다. 유작으로는 설중매죽도 雪中梅竹圖 (개인 소장) · 노매도 老梅圖 · 수과초충도 水瓜草蟲圖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 포도도 葡萄圖 등이 전하고 있다.

 

 

이의무(李宜茂)

1449(세종 31)1507(중종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덕수 ( 德水 ). 자는 형지(馨之), 호는 연헌(蓮軒). 공조참의 양()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돈녕부사 명신(明晨)이고, 아버지는 지온양군사 추()이며, 어머니는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윤회 ( 尹淮 )의 딸이다.

1467(세조 13) 사마시를 거쳐 1477(성종 8)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정자·박사·장례원사평(掌隷院司評)을 역임하고, 1487년 성균관전적으로 동국여지승람편찬에 참여해 사슴가죽이 하사되었다. 이 해 홍문관교리로 밀양에 파견되어 흥학(興學)에 관한 일을 조사, 보고하고, 이듬 해 사헌부지평, 1492년 사헌부장령을 지냈다.

1493년 홍문관응교로서 특명을 받고 형벌을 남용해 사람을 죽인 임실현감 노처원(盧處元)을 엄히 국문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노처원의 동생 노처리(盧處利)가 음모를 꾸며 해하려 하자, 이 사실을 알고 노처리를 잡아 장형 ( 杖刑 )을 가하다가 치사(致死)하게 한 사건으로 파직되었다.

1495(연산군 1) 사간원사간이 되고, 승정원교감으로 성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사헌부집의·상의원정을 역임하고, 1498년 무오사화로 평안도 어천역(魚川驛)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502년 성균관사성·군기시정에 보직되었으나, 정치가 문란해지자 외직을 청해 홍주목사로 나갔다가 기한 내에 조세를 수납(輸納)하지 않아 한 때 투옥되기도 하였으나, 1507(중종 2) 선정으로 표리(表裏 : 왕이 내린 안팎의 옷감)가 하사되었다.

1510년 예조참판에 추증되고, 1516년 예조판서에 가증되었다. 기품과 도량이 활달하고 시문에 능했으며, 조정에 들어간 지 30여 년 동안 저축이 조금도 없어 가세가 늘 청빈했다 한다.

 

이권(李卷)

()은 절도사(節度使)를 역임.

 

이기

1476(성종 7)1552(명종 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덕수 ( 德水 )이다. 자는 문중(文仲)이다. 호는 경재(敬齋)이다. 명신(明晨)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지온양군사(知溫陽郡事) ()이다. 아버지는 사간 의무(宜茂)이며, 어머니는 성희 ( 成熺 )의 딸이다. 좌의정 행()의 형이다. 1501(연산군 7) 식년문과에 삼등과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장인인 군수 김진(金震)이 장리(贓吏 : 부정하게 뇌물을 받거나 직권으로 재물을 탐한 죄를 저지른 관리)였기 때문에 좋은 벼슬을 얻지 못하고, 종사관·종성부사·경원부사·의주목사로 전전했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승진했지만, 삼사를 비롯한 철요의 직책이나 6경 등 서경 ( 署經 )을 필요로 하는 지위에는 나가지 못했다. 1522(중종 17) 공조참의를 지내고, 이어서 함경도병마절도사·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1527년 한성부우윤이 되어 성절사 ( 聖節使 )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경상도관찰사·평안도관찰사를 거치면서 민정과 국방에 이바지했다. 1533년 공조참판에 오르고, 이어서 예조참판·한성부판윤을 역임했다. 1539년 진하사 ( 進賀使 )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동안 지은 공로로 국왕이 병조판서에 임명하려 했으나, 이조판서 유관 ( 柳灌 )이 장리의 사위로서 서경을 받을 수 없다며 반대하였다. 이 때문에 유관은 나중에 보복을 당했다. 국왕의 신임과 이언적 ( 李彦迪 )의 주장으로 형조판서가 되고, 이어 병조판서로 발탁되었다.

1543년 의정부우찬성에 이어 좌찬성·우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인종이 즉위하여 대윤 일파가 득세하자 윤임 ( 尹任 ) 등이 부적합하다고 탄핵하여 판중추부사·병조판서로 강등했다.

이에 원한을 품고 있던 중 명종이 즉위해 문정왕후 ( 文定王后 )가 수렴첨정을 하자 윤원형 ( 尹元衡 )과 손잡고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이 때 윤임·유관 등을 제거하고, 추성위사협찬홍제보익공신(推誠衛社協贊弘濟保翼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대광보국숭록대부 ( 大匡輔國崇祿大夫 )가 되면서 병조판서를 겸하여 조정의 대권을 장악하였다. 풍성부원군(豊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어 좌의정이 되고, 1549(명종 4) 영의정에 올랐다. 그를 반대한 사림은 거의 모두 숙청되었다. 그가 죽자 문경(文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나 그가 받은 훈록은 선조 초년에 모두 삭탈되었다.

 

이행(李荇)

1478(성종 9)1534(중종 2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덕수 ( 德水 ). 자는 택지(擇之), 호는 용재(容齋창택어수(滄澤漁水청학도인(靑鶴道人). 지돈녕부사 명신(明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온양군사 추()이고, 아버지는 홍주부사 의무(宜茂)이며, 어머니는 창녕 성씨(昌寧成氏)로 교리(敎理) ()의 딸이다.

1495(연산군 1)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권지승문원부정자로 관직 생활을 시작해 예문관 검열·봉교, 성균관전적을 역임하고, 성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1500년 하성절질정관(賀聖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홍문관수찬를 거쳐 홍문관교리까지 올랐다.

1504년 갑자사화 때 사간원헌납을 거쳐 홍문관응교로 있으면서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복위를 반대하다가 충주에 유배되고, 이어 함안으로 옮겨졌다가 1506년 초 거제도에 위리안치되었다.

이 해 9월에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와 다시 홍문관교리로 등용되고, 이어 부응교로 승진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위해 재능있는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만 전념하도록 휴가를 주던 제도)하였다.

1513(중종 8) 다시 성균관사예가 되었다가 이듬 해 사성으로 승진하였다. 사섬시정(司贍寺正)을 거쳐 1515년 사간원사간이 되고, 이어 대사간으로 승진하였다.

이 때 신진 사류인 담양부사 박상 ( 朴祥 )과 순창군수 김정 ( 金淨 ) 등이 폐비 신씨(愼氏)의 복위를 상소하자 이에 강력히 반대하였다. 이어 첨지중추부사·홍문관부제학·성균관대사성·좌승지·도승지를 거쳐 1517년에 대사헌이 되었다.

그러나 왕의 신임을 얻고 있는 조광조 ( 趙光祖 ) 등 신진 사류로부터 배척을 받아 첨지중추부사로 좌천되자 사직하고 충청도 면천에 내려갔다. 이듬해 병조참의·호조참의로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 일파가 실각하자 홍문관부제학이 되고, 이듬해 공조참판에 임명됨과 동시에 대사헌과 예문관대제학을 겸하였다. 그리고 동지의금부사와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도 겸임하였다.

1521년 공조판서가 된 이후 우참찬·좌참찬·우찬성으로 승진하고, 1524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다시 좌찬성을 거쳐 1527년 우의정에 올라 홍문관대제학 등을 겸임하였다. 1530동국여지승람의 신증(新增)을 책임맡아 끝내고 좌의정이 되었다.

이듬해 권신 김안로 ( 金安老 )의 전횡을 논박하다가 오히려 그 일파의 반격으로 판중추부사로 좌천되고, 이어 1532년 평안도 함종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1537년 김안로 일파가 축출되면서 복관되었다. 문장이 뛰어났으며, 글씨와 그림에도 능하였다. 중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용재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定)이었으나 뒤에 문헌(文獻)으로 바뀌었다.

 

이령

령은 군수(郡守)를 역임했다.

 

이미(李薇)

()는 대사헌(大司憲)을 지냈다.

 

이안인(李安仁)

행의 증손 안인(安仁)은 임진왜란 후 면천(沔川)에 초당(草堂)을 짓고 끝내 벼슬의 뜻을 버리고 학문에만 진력했다.

 

이식(李植)

1584(선조 17) 1647(인조 2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덕수 ( 德水 ). 자는 여고(汝固), 호는 택당(澤堂) · 남궁외사(南宮外史) · 택구거사(澤 崑 居士).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좌의정 행()의 현손이다. 아버지는 좌찬성에 증직된 안성(安性)이다. 어머니는 무송윤씨(茂松尹氏)로 공조참판 옥()의 딸이다.

이식은 1610(광해군 2)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1613년 설서를 거쳐 1616년 북평사(北評事)가 되었다. 이듬해에 선전관을 지냈다. 1618년 폐모론이 일어나자 은퇴하여 경기도 지평(砥平:지금의 양평군 양동면)으로 낙향하였다. 남한강변에 택풍당(澤風堂)을 짓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호를 택당이라 한 것은 여기에 연유하였다.

1621년 누차 출사(出仕)의 명을 받았으나 이를 거부하였다. 그래서 왕명을 어겼다 하여 구속되기도 하였다. 이식은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난 뒤에 교분이 두터운 친구들이 집권하게 되었다. 그래서 요직에 발탁되어 이조좌랑에 등용되었다. 이듬해에 부수찬 · 응교 · 사간 · 집의를 역임하였다.

1625(인조 3) 예조참의 · 동부승지 · 우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에 대사간 · 대사성 · 좌부승지 등을 지냈다. 1632년까지 대사간을 세 차례 역임하였다. 사친(私親)의 추숭(追崇)이 예가 아님을 논하다가 인조의 노여움을 사 간성현감으로 좌천되었다. 1633년에 부제학을 거쳐 1638년 대제학과 예조참판 · 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이식은 1642년에 김상헌 ( 金尙憲 )과 함께 척화를 주장한다 하여 심양(瀋陽)으로 잡혀갔다. 돌아올 때에 다시 의주에서 잡혀 갇혔으나 탈출하여 돌아왔다. 1643년 대사헌과 형조 · 이조 · 예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1646년 별시관(別試官)으로 출제하였다가 시제에 역의(逆意)가 있다고 하여 관직이 삭탈되었다.

당대의 이름난 학자로서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이식은 문장이 뛰어나 신흠 ( 申欽 ) · 이정구 ( 李廷龜 ) · 장유 ( 張維 )와 함께 한문사대가로 꼽혔다. 그의 문장은 우리 나라의 정통적인 고문으로 높이 평가되었다. 김택영 ( 金澤榮 )에 의하여 여한구대가(麗韓九大家)의 한 사람으로 뽑혔다.

여한십가문초 麗韓十家文 崇 사간원차자 司諫院箚子 등의 6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그의 시는 각 체에 모두 능숙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다. 대체로 정경의 묘사가 뛰어나고 직서적인 것이 많다. 그는 고체에 능하였다. 오언율시에 가장 특색을 발휘하였다.

1686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여주의 기천서원 ( 沂川書院 )에 제향되었다. 이식의 문집으로는 택당집 이 전한다. 초학자훈증집 初學字訓增輯 · 두시비해 杜詩批解 등을 저술하였다. 수성지 水城志 · 야사초본 野史初本 등을 편찬하였다.

 

이순신(李舜臣)

1545(인종 1) 1598(선조 31). 조선 중기의 명장.

성장배경본관은 덕수 ( 德水 ). 자는 여해(汝諧). 아버지는 정()이며, 어머니는 초계 변씨(草溪卞氏)로 수림(守琳)의 딸이다. 서울 건천동(乾川洞 지금의 중구 인현동 부근)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가계는 고려 때 중랑장을 지낸 이돈수(李敦守)로부터 내려오는 문반 ( 文班 )의 가문으로, 이순신은 그의 12대손이 된다.

그의 가문은 4대 때에 조선 왕조로 넘어오면서 두각을 나타낸다. 5대조인 변()은 영중추부사 ( 領中樞府事 )와 홍문관 대제학을 지냈고, 증조부 거( )는 병조참의에 이르렀다.

그러나 할아버지 백록(百祿)이 조광조 ( 趙光祖 ) 등 지치주의 ( 至治主義 )를 주장하던 소장파 사림(少壯派士林)들과 뜻을 같이하다가 기묘사화의 참화를 당한 뒤로는 아버지 정도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던 만큼 이순신이 태어날 즈음에 가세는 이미 기울어 있었다.

그러하였음에도 그가 뒤에 명장으로 나라에 큰 공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유년시절에 어머니 변씨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던 때문이었다. 변씨는 현모로서 아들들을 끔찍이 사랑하면서도 가정교육을 엄격히 하였다.

그는 위로 희신(羲臣) · 요신(堯臣)의 두 형과 아우 우신(禹臣)이 있어 모두 4형제였다. 형제들의 이름은 돌림자인 신()자 위에 삼황오제(三皇五帝) 중에서 복희씨(伏羲氏) · () · () · ()임금을 시대순으로 따서 붙인 것이다.

그는 사대부가의 전통인 충효와 문학에 있어서 뛰어났을 뿐 아니라 시재(詩才)에도 특출하였으며 정의감과 용감성을 겸비하였으면서도 인자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강한 정의감은 뒤에 상관과 충돌하여 모함을 받기도 하였으며, 용감성은 적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투에서 매양 선두에 나서서 장졸들을 지휘함으로써 예하장병의 사기를 북돋 워 여러 전투에서 전승의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 그의 인자한 성품은 홀로 계신 노모를 극진히 받들 수 있었고, 어버이를 일찍 여읜 조카들을 친아들같이 사랑할 수 있었다.

그의 시골 본가는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면 백암리이나 어린 시절의 대부분은 생가인 서울 건천동에서 자란 듯하다. 같은 마을에 살았던 유성룡 ( 柳成龍 )징비록 懲毖錄 에서 이순신이 어린 시절부터 큰 인물로 성장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었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순신은 어린 시절 얼굴 모양이 뛰어나고 기풍이 있었으며 남에게 구속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라치면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고 그것을 가지고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하였으며,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하여 어른들도 그를 꺼려 감히 그의 문앞을 지나려 하지 않았다. 또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으며 무과에 급제하여 발신(發身)하려 하였다. 또 자라면서 말타고 활쏘기를 좋아하였으며 더욱이 글씨를 잘 썼다. ”

 

관직생활28세 되던 해에 비로소 무인 선발시험의 일종인 훈련원별과(訓鍊院別科)에 응시하였으나 불운하게도 시험장에서 달리던 말이 거꾸러지는 바람에 말에서 떨어져서 왼발을 다치고 실격하였다.

그 뒤에도 계속 무예를 닦아 4년 뒤인 1576(선조 9) 식년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鍊院奉事)로 처음 관직에 나갔다.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에 보직되고, 이듬해에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를 거쳐, 1583년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 · 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을 역임하고, 1586년에는 사복시주부가 되었다. 그러나 무관으로 발을 들여놓은 그의 진로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는 사복시주부에 이어 조산보만호 겸 녹도둔전사의(造山堡萬戶兼鹿島屯田事宜)가 되었는데, 이 때 그는 국방의 강화를 위하여 군사를 더 보내줄 것을 중앙에 요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던 차에 호인(胡人)의 침입을 받고 적은 군사로 막아낼 수 없어 부득이 피하게 되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그것이 오로지 그의 죄라 하여 문책하였다. 그러나 그는 처형당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장(主將)의 판결에 불복하면서 첨병(添兵)을 들어주지 않고 정죄(定罪)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하여 끝내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서 중형을 면하기는 하였으나, 첫번째로 백의종군(白衣從軍)이라는 억울한 길을 걷게 되었다.

그 뒤 전라도관찰사 이광 ( 李洸 )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助防將) · 선전관 등이 되고, 1589년 정읍현감으로 있을 때 유성룡에게 추천되어 고사리첨사(高沙里僉使)로 승진, 이어 절충장군 ( 折衝將軍 )으로 만포첨사(滿浦僉使) · 진도군수 등을 지내고, 47세가 되던 해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그는 곧 왜침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좌수영(左水營 여수)을 근거지로 삼아 전선 ( 戰船 )을 제조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등 일본의 침략에 대처하였고, 나아가서 군량의 확보를 위하여 해도(海島)에 둔전(屯田)을 설치할 것을 조정에 요청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시의 활동이듬해인 1592413일 일본의 침입으로 임진왜란이 발발되었는데 일본의 대군이 침입해 왔다는 급보가 전라좌수영에 전달된 것은 이틀 뒤였다.

이 날은 국기일(國忌日)이었으므로 그는 공무를 보지 않고 있었는데, 해질 무렵 경상우수사 원균 ( 元均 )으로부터 왜선 350여 척이 부산 앞바다에 정박중이라는 통보에 이어 부산과 동래가 함락되었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그 때 부산 앞바다의 방어를 맡은 경상좌수영의 수군은 왜선단을 공격하지도 않았고, 경상좌수사 박홍 ( 朴泓 )은 부산이 함락된 뒤에야 예하 장졸을 이끌고 동래 방면에 당도하였으나 동래가 함락되는 것을 보고는 군사를 돌려 육지로 도망하였다.

, 거제도에 근거를 둔 우수사 원균은 적이 이르기도 전에 싸울 용기를 잃고 접전을 회피함으로써 일본군은 조선수군과 한번 싸우지도 않고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소식에 접한 그는 즉시 전선을 정비하고 임전태세를 갖추었지만, 적을 공략하기에 앞서 전황을 면밀히 분석하였다. 그의 휘하 전함대는 429일 수영 앞바다에 총집결하여 매일 작전회의가 열리고 기동연습도 강행하여 완전한 전투태세에 임하게 되고, 그는 총지휘관으로 52일 기함에 승선하였다.

4일 새벽 출진을 명하니, 이때의 규모는 전선 24, 협선(狹船) 15, 포작선(鮑作船) 46, 도합 85척의 대선단이었다. 이틀 뒤 한산도 ( 閑山島 )에 이르러 경상우수사 원균의 선단을 만났는데, 그 규모는 전선 3척과 협선 2척에 불과하였으나 연합함대를 조직하지 않을 수 없었다.

7일 옥포 ( 玉浦 ) 앞바다를 지날 무렵 척후선(斥候船)으로부터 적선이 있음을 알리는 연락이 왔다. 이 때 옥포에 정박중인 적선은 30여 척이었다.

왜군은 조선수군이 해상으로부터 공격해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육지에 올라가서 불을 지르고 약탈을 자행하다가 아군의 공격 소식을 듣고 급히 배에 올라 도망하려 하였으나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순식간에 왜선 26척이 조선수군의 포화와 불화살 火矢 에 격파되고 많은 왜병이 궤멸되었다. 이 싸움이 옥포대첩으로 그의 최초의 해전으로 기록된다.

옥포해전이 있던 다음날에는 고성의 적진포(赤珍浦)에 정박중인 왜선 13척을 쳐서 불태웠다. 1차 출동 후 전력을 보강하고 전선을 정비한 뒤 다음 출동에 대비하고 있던 그는 일본수군의 주력함대가 서쪽으로 나아간다는 정보가 계속 들어오자, 전라우수사 이억기 ( 李億祺 )에게 합동으로 출동하여 왜선을 격파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경상우수사 원균으로부터 왜선 10여 척이 사천 · 곤양 등지로 진출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예정출동일을 변경하여 적에게 선제공격을 가하기로 하였다.

529일 그는 거북선을 앞세우고 23척의 전선으로 여수항을 출항하였다. 노량 ( 露梁 ) 앞바다에 이르러 전선 3척을 인솔하고 있던 원균이 그의 전함에 올라와 적정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조선수군은 곧 일본수군이 정박중인 사천으로 달려갔다. 이 때 왜군은 대부분 상륙하여 있었고 해변에는 왜선 12척이 줄지어 정박하고 있었다.

그는 공격이 용이하지 않자 그들을 바다로 유인하여 섬멸할 계획을 세웠으며, 그 작전계획은 적중하여 왜선 12척을 파괴하고 많은 왜군을 섬멸하였다.

이 싸움에서 군관 ( 軍官 ) 나대용 ( 羅大用 ) 등이 부상하였고, 그도 적의 조총탄에 맞아 왼쪽어깨가 뚫리는 부상을 입었다. 이 싸움에서 최초로 출동한 거북선의 위력은 확고한 인정을 받았다. 62일 왜선이 당포(唐浦)에 정박중이라는 보고를 받은 그는 곧 그곳으로 달려갔다.

당포 선창에는 일본수군장 가메이(龜井玆矩)와 구루시마(來島通元)가 인솔하는 대선 9, · 소선 12척이 정박하고 있었으며, 일본수군들은 성 안팎에서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다 조선수군을 보고 발포하였으나 거북선을 앞세운 조선수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대패하고 왜장 구루시마가 전사하였다.

당포해전 다음날 그의 함대는 가박지(假泊地)인 창신도(昌信島)를 떠났다. 다음날 당포 앞바다에서 왜선이 거제로 향하였다는 정보를 받고 즉시 전함대에 거제출격을 명하고 발선(發船)하려는 때에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전선 25척을 이끌고 이곳에 오자 그는 매우 반갑게 맞았다.

5일 아침 전선 51척과 중 · 소선 수십척의 연합함대는 일제히 거제로 향하였다. 이 때 피난민으로부터 거제로 도피하였던 왜선단이 다시 당항포로 도주하였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그와 이억기와의 연합함대는 바로 길을 바꾸어 당항포로 향하였다. 당항포 내만(內灣)에는 왜의 대선 9, 중선 4, 소선 13척이 정박 중이었다.

조선수군의 내습을 발견한 일본수군은 먼저 공격을 가해 왔다. 아군의 전선들은 적선을 포위하고 먼저 거북선을 돌입시켜 맹공을 가하였다. 이 싸움에서 왜군은 대패하였고 왜선은 모두 소실되었다.

이와 같이 이순신은 해전에서의 연전연승으로 자헌대부 ( 資憲大夫 )에 승계(陞階)되었다. 그 뒤 그는 다시 선제공격으로 거제 · 가덕에 출몰하는 일본수군을 격멸하기 위하여 우수사 이억기에게 작전을 전달하고 연합함대의 조직을 통첩하고, 76일 전라좌 · 우수군이 일제히 출동한 뒤 노량해상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전선 7척과도 합세하였다.

이 때 일본군은 해전에서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하여 병력을 증강하여 견내량(見乃梁)에는 적장 와키사카(脇坂安治) 등이 인솔한 대선 36, 중선 24, 소선 13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그는 견내량이 지형이 좁고 활동이 불편하다는 판단 아래 장소를 한산도로 물색하였다.

그는 약간의 판옥선 ( 板屋船 )으로 일본의 수군을 공격하면서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한 뒤 학익진(鶴翼陣)을 쳐 일제히 총통 ( 銃筒 )을 발사하는 등 맹렬한 공격을 가하여 층각선(層閣船) 7, 대선 28, 중선 17, 소선 7척을 격파하였다.

이 싸움에서 와키사카의 가신(家臣) 와키사카사베에(脇坂左兵衛) · 와타나베(渡邊七右衛門)를 위시하여 이름 있는 자들이 전사하였다. 그는 이 한산대첩의 공으로 정헌대부 ( 正憲大夫 )에 승계되었다.

한산대첩 후 그는 다시 전진하여 안골포(安骨浦 창원군 웅천면)의 적선을 격파하였다. 와키사카와 합동작전을 하려던 구키(九鬼嘉隆) · 가토(加藤嘉明) 등의 일본수군장은 와키사카의 수군이 전멸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안골포에 정박 중이었다.

그는 수심이 얕아서 적선을 유인하여 공격하려 하였으나 적선이 포구 밖으로 나오지 않자,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교대로 종일토록 적선을 공격하여 대선을 거의 분멸(焚滅)하였다.

3차 출동의 결과로 가덕도 서쪽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한 그는 왜침의 교두보인 부산포공격의 결단을 내렸다. 전라좌 · 우도의 전선 74, 협선 92척은 824일 좌수영을 떠나 가덕도 근해에서 밤을 지냈다. 공격 전날은 밤을 새우며 원균 · 이억기와 작전회의를 하여 부산포공격에 따른 작전을 구상하였다.

91일 오전 몰운대 ( 沒雲臺 )를 지나 파도를 헤치고 다대포를 바라보며 절영도(絶影島 지금 影島)에 이르렀을 때, 왜의 대선 수 척이 아군함대를 보고 도주하였다.

절영도에서는 수 척의 적선을 쳐부수고 척후선을 부산포에 보내어 적정을 탐지하게 한 결과, 왜선 약 500척이 선창 동쪽 산기슭 해안에 줄지어 정박해 있고 대선 4척이 초량(草梁) 쪽으로 나오고 있다는 보고였다.

적이 부산포를 요새화한 것을 알게 된 여러 장수들은 부산포로 깊이 들어가기를 꺼렸으나, 그는 이를 거부하고 독전기(督戰旗)를 높이 들고 진격을 재촉하였다. 우부장(右部將) 정운 ( 鄭運 ) 등이 선두에 서서 먼저 바다로 나오는 왜군의 대선 4척을 공격하여 불사르니, 뒤에 있던 여러 전선들도 함께 돌진하였다.

그러나 3진으로 나누어져 정박 중인 일본수군의 대 · · 소선 470여 척은 아군의 위용에 눌려 나오지 못하고 있다가 아군이 돌진하며 맹공을 가하자, 배의 안과 성 안, 굴 속에 있던 왜군은 모두 산으로 올라가 아군에게 총통과 화전을 쏘았다. 아군은 이에 맞서 더욱 맹공을 가하며 종일토록 교전하여 적선 100여 척을 격파하였다.

날이 어둡자 그는 육지로 올라가는 것을 포기하고 전함을 돌리게 하였다. 이 싸움에서 적의 피해는 말할 수 없이 컸으며, 아군도 이 해전에서 30여 명의 사망자를 냈으며 특히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이 전사하였다. 1593년 다시 부산과 웅천의 적 수군을 궤멸, 남해안 일대의 적군을 완전히 소탕하고 한산도로 진을 옮겨 본영으로 삼고, 그 뒤 최초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내원(來援)하자, 죽도 ( 竹島 )로 진을 옮기고, 이어 장문포(長門浦)에서 왜군을 격파, 적군의 후방을 교란하여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왜군의 전진을 막아 이들의 작전에 큰 차질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 뒤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회담이 진행되면서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그는 후일에 대비하여 군사훈련, 군비확충, 피난민 생업의 보장, 산업장려 등에 힘썼다.

정유재란시의 활동1597년 명 · 일 사이의 강화회담이 결렬되자, 본국으로 건너갔던 왜군이 다시 침입하여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그러자 그는 적을 격멸할 기회가 다시 왔음을 기뻐하고 싸움에 만전을 기하였다. 그러나 그는 원균의 모함과 왜군의 모략으로 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고니시(小西行長)의 부하이며 이중간첩인 요시라(要時羅)라는 자가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에게 가토(加藤淸正)가 어느날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수군을 시켜 이를 사로잡을 것을 은밀히 알려오자, 조정에서는 통제사 이순신에게 이를 실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이것이 적의 흉계인 줄 알면서도 부득이 출동하였으나, 가토는 이미 수일 전에 서생포(西生浦)에 들어온 뒤였다. 이 때 마침 조정에서도 영의정 유성룡을 몰아내려는 자들이 있었다. 그는 유성룡이 전라좌수사로 추천한 사람이라 이를 구실로 먼저 그가 모함당하게 되었다.

, 그 중에서도 경상우수사 원균 같은 이는 한층 더 노골적인 불만을 가졌던 터라 이순신을 모함하는 소를 올리게 되었다. 상소를 받은 선조는 돌아가는 실정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여 원균의 상소만을 믿고 크게 노하여 이순신이 명령을 어기고 출전을 지연하였다는 죄를 들어 그에게 벌을 주고 원균으로 하여금 그 직을 대신하게 하였다.

그러나 유성룡은 끝까지 통제사의 적임자는 이순신밖에 없으며, 만일 한산도를 잃는 날이면 호남지방 또한 지킬 수 없습니다. ” 하고 간청하였지만 정세판단에 어두운 선조가 그것을 받아들일 리 없었기에, 이순신을 잡아들이라는 명령만을 내렸다.

이 때 그는 전선을 거느리고 가덕도 앞바다에 있었는데, 이러한 소식을 듣고 바로 본영인 한산도로 돌아와 진중을 정리하고 원균에게 직위를 인계하였다. 당시 한산도에는 밖에 있는 군량미를 제외하고도 9,914석의 군량이 있었으며, 화약은 4,000, 총통은 각 선척에 적재한 것을 제외하고도 300자루나 되었다.

이 때, 영남지방을 순시하던 도체찰사 이원익 ( 李元翼 )은 그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왜군이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의 수군인데, 이순신을 바꾸고 원균을 보내서는 안 된다. ” 고 반대하는 치계(馳啓)를 올렸지만 허사였다.

그가 서울로 압송되자, 지나는 곳곳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백성들이 모여들어 통곡을 하며 사또는 우리를 두고 어디로 가십니까. 이제 우리는 모두 죽었습니다. ” 하였다.

서울로 압송된 그는 이미 해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였지만, 그러한 공로도 아랑곳없이 가혹한 고문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는 남을 끌어들이거나 헐뜯는 말은 한마디도 없이 자초지종을 낱낱이 고하였다. 죽음 직전에서 그는 우의정 정탁 ( 鄭琢 )의 변호로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도원수 권율 ( 權慄 )의 막하(幕下)로 들어가 두번째 백의종군을 하게 되었다.

남해안으로 향하던 그는 중도에서 어머니의 부고를 받고 세상천지에서 나 같은 일을 겪는 수도 있을까. 일찍이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 ” 라고 한탄하면서 잠시 들러 성복 ( 成服 )을 마친 다음 슬픔을 이기고 다시 남쪽으로 향하였다.

그 해 7월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적의 유인전술에 빠져 거제 칠천량(漆川梁)에서 전멸당함으로써 그가 힘써 길러온 무적함대는 그 형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한산도의 군비는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초계(草溪)에서 이 소식을 들은 그는 우리가 믿은 것은 오직 수군인데 그같이 되었으니 다시 희망을 걸 수 없게 되었구나. ” 하며 통곡하였다.

원균의 패보가 조정에 이르자 조야(朝野)가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고, 왕은 비국대신(備局大臣)들을 불러 의논하였으나 당황하여 바로 대답도 못하였다. 오직 병조판서 이항복 ( 李恒福 )만이 그를 다시 통제사로 기용할 것을 주장하였을 뿐이었다.

이리하여 조정을 기만하고 임금을 무시한 죄, 적을 토벌하지 않고 나라를 저버린 죄, 다른 사람의 공을 빼앗고 모함한 죄, 방자하여 꺼려함이 없는 죄 등의 많은 죄명을 뒤집어씌워 죽이려고까지 하였던 그를 다시 통제사로 기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선조도 변명할 말이 궁하였던지 교서 ( 敎書 )에서 지난번에 경의 관직을 빼앗고 죄를 주게 한 것은 또한 사람이 하는 일이라 잘 모르는 데서 나온 것이오, 그래서 오늘날 패전의 욕을 보게 된 것이니 그 무엇을 말할 수 있겠소. ” 하며 얼버무렸다.

통제사에 재임용된 그는 남해 등지를 두루 살폈으나 남은 군사 120인에 병선 12척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조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수전에서 적을 맞아 싸울 것을 결심하였다.

명량해전(鳴梁海戰)에 앞서 장병에게 필승의 신념을 일깨운 다음 81513(일설에 12)의 전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하여 31척을 부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 싸움은 재차 통제사로 부임한 뒤의 최초의 대첩이며 수군을 재기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 싸움이었다.

명량대첩으로 제해권을 다시 찾은 그는 보화도(寶花島 목포의 高下島)를 본거로 삼았다가, 다음해 2월에 고금도 ( 古今島 )로 영()을 옮긴 다음, 군사를 옮겨 진()을 설치하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널리 둔전을 경작시키고 어염(魚鹽)도 판매하였다.

이로 인하여 장병들이 다시 모여들고 난민(難民)들도 줄을 이어 돌아와서 수만 가를 이루게 되었으며, 군진(軍鎭)의 위용도 예전 한산도시절에 비하여 10배를 능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단시일에 제해권을 회복하고 수군을 재기시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의 개인적 능력에 의한 것이었다.

15981119일 그는 노량에서 퇴각하기 위하여 집결한 500척의 적선을 발견하고 싸움을 기피하려는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陳璘)을 설득하여 공격에 나섰다. 그는 함대를 이끌고 물러가는 적선을 향하여 맹공을 가하였고, 이것을 감당할 수 없었던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와 선척을 잃었다.

그러나 선두(船頭)에 나서서 적군을 지휘하던 그는 애통하게도 적의 유탄에 맞았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삼가라. ” 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운명을 지켜보던 아들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그대로 통곡하려 하였으나, 이문욱(李文彧)이 곁에서 곡을 그치게 하고 옷으로 시신을 가려 보이지 않게 한 다음, 북을 치며 앞으로 나아가 싸울 것을 재촉하였다.

군사들은 통제사가 죽은 사실을 미처 모른 채 기운을 내어 분전하여 물러나는 왜군을 대파하였으며, 모두들 죽은 순신이 산 왜군을 물리쳤다. ” 며 외쳤다. 부음(訃音)이 전파되자 모든 백성들이 애통해 하였다.

 

사후평가그는 지극한 충성심, 숭고한 인격, 위대한 통솔력으로 보아 임진왜란 중에 가장 뛰어난 무장으로 큰 공을 세워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민족사에 독보적으로 길이 남을 인물이다.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도 그를 평하여 유경천위지지재 보천욕일지공(有經天緯地之才 補天浴日之功) ” 이라 하여 높이 평가하였고, 그의 부음을 접하자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선조실록 에서 사관 ( 史官 )은 그의 죽음에 대하여 그의 단충(丹忠)은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쳤고, 의를 위하여 목숨을 끊었네. 비록 옛날의 양장(良將)이라 한들 이에서 더할 수가 있겠는가. 애석하도다! 조정에서 사람을 쓰는 것이 그 마땅함을 모르고, 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주를 다 펼치지 못하게 하였구나. 병신년 · 정유년 사이 통제사를 갈지 않았던들 어찌 한산도의 패몰(敗沒)을 초래하여 양호지방(兩湖地方 忠淸 · 全羅道)이 적의 소굴이 되었겠는가. 그 애석함을 한탄할 뿐이로다. ” 라고 평하였다.

정인보 ( 鄭寅普 )이충무공순신기념비 李忠武公舜臣紀念碑 에서 ()은 명장보다도 성자(聖者)이다. 신묘불측(神妙不測)이 오직 지성측달(至誠惻 淃 )에서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공은 성자이므로 명장이다. ” 라고 하였고, 천관우 ( 千寬宇 )한국사의 재발견 에서 충무공은 거의 완전무결한 인물이었다. 그러기에 성자라 하고 영웅이라 일컫는 것이다. ” 라 하였다.

그는 당대에는 죽음으로써 나라를 구하였고, 사후(死後)에는 그 정신으로써 민족의 나아갈 길을 일깨워 주었다. 해전사연구가(海戰史硏究家)이며 이순신을 연구한 발라드(G.A.Ballard) 제독은 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이순신 제독은 서양 사학자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그로 하여금 넉넉히 위대한 해군사령관 가운데서도 뛰어난 위치를 차지하게 하였다. 이순신은 전략적 상황을 널리 파악하고 해군전술의 비상한 기술을 가지고 전쟁의 유일한 참정신인 불굴의 공격원칙에 의하여 항상 고무된 통솔정신을 겸비하고 있었다. 어떠한 전투에서도 그가 참가하기만 하면 승리는 항상 결정된 것과 같았다. 그의 물불을 가리지 않는 맹렬한 공격은 절대로 맹목적인 모험이 아니었다. 그는 싸움이 벌어지면 강타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나, 승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신중을 기하는 점에 있어서는 넬슨(Nelson)과 공통된 점이 있었다. … … 중략 … … 영국사람으로서는 넬슨과 어깨를 견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시인하기란 항상 어렵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인정할 만한 인물이 있다면 그는 한번도 패배한 일이 없고 전투중에 전사한 이 위대한 동양의 해군사령관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것이다. ” 라고 평하였다.

그가 전사한 데 대하여는 후대인들의 많은 의문을 자아내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리에 불과한 것이며 확실한 근거는 없다. 그는 글에도 능하여 난중일기 亂中日記 · 시조 ( 時調 ) 등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진중(陣中)에서 읊은 시조들은 우국충정이 담긴 걸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그가 전사했다는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선조는 관원을 보내 조상하고 우의정에 추증하였다. 1604년 선무공신 ( 宣武功臣 ) 1등에 녹훈되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좌의정에 추증, 1793(정조 17) 다시 영의정이 더해졌다.

묘는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於羅山)에 있으며, 왕이 친히 지은 비문과 충신문(忠臣門)이 건립되었다. 충무의 충렬사 ( 忠烈祠 ), 순천의 충민사 ( 忠愍祠 ), 아산의 현충사 ( 顯忠祠 ) 등에 제향하였는데, 이 중에 현충사의 규모가 가장 크다.

현충사는 조선 숙종연간에 이 고장의 유생들이 그의 사당을 세울 것을 상소하여 1707(숙종 33)에 사액(賜額), 현충사가 입사(立祠)되었다.

그 뒤 일제강점기 때에 동아일보사가 주관하여 전국민의 성금을 모아 현충사를 보수하였고, 3공화국 때 대통령 박정희 ( 朴正熙 )의 특별지시에 의하여 현충사의 경역을 확대, 성역화하고, 새로이 전시관을 설치하여 종가에 보존되어 오던 난중일기 와 그의 유품 등을 전시하였다.

그리고 그의 일생과 중요 해전을 그린 십경도(十景圖)가 전시되어 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저서로는 이충무공전서 가 전한다. , 그를 대상으로 삼은 작품으로는 신채호 ( 申采浩 )이순신전 李舜臣傳 등이 있으며, 성웅 이순신 이라는 제목으로 영화가 제작되어 그의 행적과 공로를 일반에 널리 알리기도 했다.

 

이완(李莞)

1579(선조 12)1627(인조5).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덕수 ( 德水 ). 자는 열보(悅甫). 할아버지는 정()이며, 순신(舜臣)의 조카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이순신 휘하에서 종군하였고, 1598년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전사한 사실을 알리지 않고 독전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1599년 무과에 급제, 1618(광해군 10) 평양중군이 되었고, 1623년 충청도병마절도사에 올랐다. 이듬해 호현에서 결집하여 이천으로 도망치는 이괄 ( 李适 )의 난군을 평정한 공으로 가선대부에 올랐고, 의주부윤으로 있을 때는 모문룡(毛文龍)과 사이가 좋지 못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 적이 의주를 포위하였을 때 적과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패하자 병기고에 불지르고 종제 신()과 함께 분사(焚死)하였다.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1706년 아산 현충사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강민(剛愍)이다.

 

이봉상(李鳳祥)

1676(숙종 2)1728(영조 4). 조선 후기의 순절자. 본관은 덕수 ( 德水 ). 자는 의숙(儀叔). 순신(舜臣)5대손이다. 1702(숙종 28)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경종의 재위 중에 포도대장·훈련원도정·삼도수군통제사·총융사·한성부우윤 등을 역임하였다.

1725(영조 1) 형조참판으로서 훈련금위대장을 겸임하였다. 이 때 이광좌 ( 李光佐 조태억 ( 趙泰億 ) 등의 죄상을 논박하였다가, 정미환국으로 그들이 다시 정권을 잡자 어영대장에서 좌천되어 충청도병마절도사로 나갔다.

1728(영조 4) 이인좌 ( 李麟佐 )가 반란을 일으켜 청주를 함락하였을 때 작은아버지 홍무(弘茂)와 함께 반란군에게 붙잡혀 죽었다. 충청감영에 들어온 이인좌가 항복할 것을 권하였지만 충무가(忠武家)의 충의(忠義)를 내세워 끝내 굽히지 않았다 한다.

어사 이도겸(李道謙)이 청주로부터 돌아와 그 순절을 전하자, 영조는 정려를 세우고 좌찬성에 추증하였으며, 뒤에 헌종이 청주에 표충사 ( 表忠祠 )를 세워 제향하게 하였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이집

한성 판윤(漢城判尹) 광하(光夏)의 아들 집이 영조(英祖) 때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이 되고 실록청 총재관(實錄廳摠裁官)으로 <경종실록(景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이덕흠(李德欽)

군수(郡守) 선연(善淵)의 아들로 선원에게 입양했던 덕흠(德欽)은 윤 증(尹 拯)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연구하여 만년에 성력(星曆상수(象數기예(技藝)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여 명망을 떨쳤다.

 

 

이은

1722(경종 2) 1781(정조 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덕수 ( 德水 ). 자는 치호(稚浩), 호는 첨재(瞻齋). 광하(光夏)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집( )이고, 아버지는 병조판서 주진(周鎭)이며, 어머니는 민진원 ( 閔鎭遠 )의 딸이다.

1740(영조 16)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음보로 남평현감을 지냈으며, 1759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교리가 되고 1764년에 사직이 되었다. 그 이듬해 대사헌으로 한후락(韓後樂)을 신구(伸救)하려다가 왕의 분노를 사 강화유수로 전직되었다.

1767년에 다시 대사헌이 되었으나 강화유수로 있을 때 백성들을 괴롭혔다는 탄핵을 받아 삭녕군수로 좌천되었으며, 뒤에 이조판서가 되었다. 1772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으나, 대사헌 정광충(鄭光忠), 대사간 이담 ( 李潭 ) 등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가 다시 좌의정이 되었다.

1775년에 판중추부사로 왕세손에게 국정을 대행시키는 문제로 논란이 일어났을 때 지지파인 서명선 ( 徐命善 )을 도운 공으로 정조가 국정을 대리하게 되면서 좌 · 우의정이 되었으나, 조영약(趙榮約)에 관한 일로 임금과 대좌할 때 대신의 체모에 어긋나는 언행이 있다 하여 면직되었다.

1777년에 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로 청나라에 가서 고금도서집성 古今圖書集成 5,020권을 구득하여왔다. 그 뒤 영중추부사 ( 領中樞府事 )가 되었으며, 그 이듬해에 다시 심양문안사(瀋陽問安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좌의정으로 있다가 1780년에 사직하였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이병모(李秉模)

1742(영조 18)1806(순조 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덕수 ( 德水 ). 자는 이칙(彛則), 호는 정수재(靜修齋). 단하(端夏)의 현손으로, 할아버지는 악진(岳鎭)이고, 아버지는 연()이며, 어머니는 남유상(南有尙)의 딸이다.

1773(영조 49) 진사시를 거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당시 영의정 한익모(韓翼謨)의 주청으로 6품에 올랐다. 경기지방·관동지방을 암행하고,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김상로 ( 金尙魯 )의 죄를 탄핵하였다. 이조좌랑·대사간·예조참의를 거쳐 이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1779(정조 3) 운산에 유배되고, 1781년에는 사판(仕版)에서 제명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곧 특서(特敍)되어 국조보감찬집당상(國朝寶鑑纂輯堂上우부승지·동래부사·대사간 등을 거쳐 경상도관찰사로 재임 중인 1784년에 돈효록 敦孝錄을 간행하였다. 이어 대사성·이조참판·예조판서·형조판서·호조판서·병조판서·예문관제학·홍문관제학·함경도관찰사·평안도관찰사 등을 거쳐 1794년 우의정에 임명되고, 좌의정을 거쳐 1799년 영의정이 되었다.

그동안 1778년 동지부사(冬至副使), 1795년 진하사 ( 進賀使 ) 등으로 중국에 다녀왔으며, 1800년에도 책봉주청사(冊封奏請使)로 사행(使行)중에 정조의 상을 당하였다. 순조가 즉위하자 실록총재관에 임명되고, 1803(순조 3)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시호는 문익 ( 文翼 )이다

 

이춘영(李春英)

한말(韓末)에 춘영(春英)은 민비(閔妃)가 시해(弑害)되자 안승우(安承禹) 등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단양(丹陽) 등지에서 일본군(日本軍)을 격파했고, 류인석(柳仁錫)의 막하에서 중군(中軍)이 되어 조령(鳥嶺달천(達川안보(安保) 등지에서 일본 연합군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이세영(李世榮)

내금위장(內禁衛將) 민하(敏夏)의 아들 세영(世榮)은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의병을 모집하여 항일운동을 주도했다.

 

이민화(李敏華)

1898 1923. 독립운동가. 충청남도 아산 출신. 1917년 만주로 망명하여 대종교 ( 大倧敎 )에 입교하였고, 서로군정서 ( 西路軍政署 )에 가담하였다. 1919년 북로군정서 ( 北路軍政署 ) 조직에 참여하여 사관학교 교관이 되었고, 1920년 북로군정서 종군장교로 청산리(靑山里)독립투쟁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동지 김훈(金勳)북로아군실전기 北路我軍實戰記 1020일 첫 전투 기사에 의하면 ()의 보병 1대대는 본대가 되고 여행단(旅行團)은 후위가 되어, 이범석 ( 李範奭 )이 차임(此任)에 당하고 후위첨병(後衛尖兵)은 이민화 ( 李敏華 )와 본인이 각각 군인 5명을 대()하였는데, 이민화는 골짜기 본도(本道)의 전방 60도 경사진 산복(山腹)에서, 본인은 오른쪽 90도 벼랑인 고지에서 적이 지나는 것을 기다렸다. ” 고 기술하고 있다. 그 달 23일까지 계속된 10여 차례의 접전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청산리전투 후, 일본군의 간도출병을 피하여 러시아령 자유시(自由市)에 가서 고려혁명군의 장교가 되었으나, 자유시참변을 겪고 러시아령을 탈출하여 다시 만주로 돌아오던 중 1923년 노령(露領)과의 국경지대인 밀산현(密山縣)에서 중국의 토병(土兵)과 맞닥뜨려 교전중 전사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栗谷(율곡) 선생의 일화.

 

1)

        율곡 선생의 예견.

왕에게 왜병의 침입을 막기 위해 10만 양병을 주청했으나 받아드려 지지 않자 이율곡은 관직에서 물러나와 나라를 구하기 위해 자기 나름대로 세 가지 준비를 하였다.

먼저 이순신을 찾아가 두보의 시를 가르쳤습니다.
[독을 품은 룡이 숨어있는 곳에 물이 곧 맑네]
이런 내용의 시를 일천 번 읽으라고 했는데 어떤 뜻인지는 알려 주지 않았다.

후일 이순신장군이 전함들을 제정비하기 위해 섬에 머물러 있으면서 나무를 채집하고 있었다.
쿵쿵 나무 자르는 소리가 귓가를 울리고 있을 때 이순신 장군은 순간 두보의 시가 떠올랐다.
그리고 물을 바라보니 매우 맑았다
그래서 부하들을 시켜서 배 밑을 창끝으로 찌르게 했더니 곧 붉은 피가 바다를 물들였다.
왜놈들이 배 밑에 숨어서 바닥에 구멍을 내고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로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백사 이항복을 찾아가서
[서럽지 않는 문물에는 고춧가루 싼 주머니가 약이다.]하고 알려 주었다.
언제 어떻게 쓰일 거라는 이야기는 전혀 안하였다.

훗날 명나라 이여송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원군을 왔을 때 그들은 매우 거만했다. 그들에게 원군을 청하려고 가게 된 사람이 바로 백사 이항복 이였는데 도움을 청하기 위해 슬픈 표정을 지어야 하는데 잘 되지 않았다.
그때 문뜩 율곡 선생이 전해준 이야기가 생각나서 고추 가루 싼 주머니로 눈을 비벼서 슬픈 듯 눈물을 흘리면서 이여송장군에게 나아가 원군을 해서 무사히 소임을 다 했다고 한다.

 

2)

       화석정

화석정(花石亭)은 율곡의 5대조 이명신이 세운 정자로 이이는 관직에 있을 때도 틈틈이 이곳을 찾았으며,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며 제자들과 함께 학문을 논했다고 한다.

화석정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얽혀있다. 율곡이 이곳에서 자랄 때 하인들에게 틈틈이 화석정의 기둥에다 기름칠을 하도록 하면서 “훗날 다 쓰일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과연 임진왜란을 피해 의주로 피난하던 선조가 한밤중에 임진강에 닿으니 캄캄한 한밤중이라 앞이 보이지 않아 강을 건널 수가 없었다.

이때 신하들이 화석정에 불을 놓아 그 불빛으로 천신만고 끝에 건널 수 있었다고 한다.
현재 화석정은 임진왜란 때 불타 80년간 터만 남아있던 것을 현종 14년에 유림들이 복원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또 타버리고, 1966년 다시 복원한 것이다.
정자 안에는 이이가 여덟 살에 지었다는 시가 걸려 있다. 8세에 율곡이 쓴 시를 그 후 당시 92세 된 성목(成穆)이 현판을 써서 백세현판(百歲懸板)이라 이름 붙였다.

山吐孤輪月(산토고윤월)        높은 산은 보름달을 뱉어내고  
江含萬里風(강함만리풍)        깊은 강은 만리 불어갈 바람을 머금었도다.
塞鴻何處去(새홍하처거)        변방의 기러기는 어디를 가는가 ?
聲斷暮雪中(성단모설중)        기러기 울음은 저무는 눈 속에 베이누나.  

8세에 이런 시를 지었다니 과연 우리나라 최고의 지성이었음을 알겠다.

 

3)

율곡 아버지의 용꿈

율곡의 아버지는 서울에서 벼슬을 하다가 청룡 · 황룡이 얼크러져 품에 안기는 꿈을 꾸고 대길할 태몽이라고 여겨 강릉으로 부인을 만나러 내려오던 중이었다.
대관령 마루에 있는 주막에서 주막집 여자가 율곡 아버지의 기상을 보고 유혹하였으나 율곡의 아버지는 꿈꾼 것을 생각하고 거절한 뒤 부인 신사임당에게 와서 율곡을 잉태하게 하였다.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율곡의 아버지는 대관령 주막에 들러 여인의 소망을 들어주려 하였으나 그 여자는 율곡의 아버지가 이미 큰 인물을 낳을 시기를 놓쳤다며 거절하였다는 것이다.

 

4)

임진왜란을 예언한 방화정 이야기

율곡은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임진강 나루에 정자를 지어 이름을 화석정이라 하고 기름에 젖은 걸레로 정자 마루를 닦도록 하였다.
그리고 임종 때 어려움이 닥치면 열어 보라고 하며 봉투를 남겼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선조의 어가가 몽진 차 임진 나루에 도착하였을 때, 날이 궂고 밤이 되어 지척을 분별할 수 없었다.

이 때 대신 중 한 사람이 율곡이 남긴 봉서를 열어보니 “ 화석정에 불을 지르라. ” 고 씌어 있었다.
화석정에 불이 붙자 나루 근처가 대낮 같이 밝아서 선조 일행이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는 것이다.

 

 

李舜臣(이순신) 장군의 일화.

 

1)

        군기가 엄한 전쟁놀이

이순신은 어렸을 때 아이들과 함께 전쟁놀이를 하였는데 얼마나 군기가 바짝 섰으며 위엄이 있는지 어른들도 함부로 지나쳐가지 못하였다.
한번은 이순신이 전쟁노리로 쌓은 모래 성 위로 어른 한명이 지나가려 하자 이순신은 그에게

“성이 말을 피해가야 합니까, 말이 성을 돌아가야 합니까?”하며 장수다운 위엄을 보이며, 성을 함부로 지나친다고 꾸짖었는데 그 어른은 이순신의 위엄을 오히려 가상히 여겨서 말머리를 돌려 돌아서 갔다고 한다.

 

2)

이순신을 도우려던 마귀할멈

임진 왜란으로 전쟁이 한창일 때 이순신을 돕기 위해 마귀할멈이 지금의 고흥군 동쪽에 있는 구무섬을 밧줄로 신지도 근해까지 끌고 왔다.
그리고 고금도 진영이 있는 덕동해협을 구무섬으로 막아 왜군의 진로를 차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물살이 세고 깊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현재의 자리에 놓아두었다는 것이다.

 

3)

몰서(沒嶼)바위전설

몰서바위는 완도읍에서 약 1.5 ㎞ 동쪽으로 뻗은 산 끝의 100m 앞 바다 속에 있는 바위이다.
썰물 때만 모습을 드러내는 바위인데, 이순신이 이 바위에 쇠줄을 연결해 밀물 때 왜선을 유인해서 왜군의 배를 이 쇠줄에 걸리 도록 해서 무수히 침몰시켰다는 것이다.

 

 

李週龍(이주룡)선생의 일화.

乳泉(유천)

주룡이 4살 때 어머니를 여이고 젖먹이 동생을 기르는데 어른 못지않게 잘 길렀다고 한다.

하루는 배가고파 우는 동생을 안고 뜰에 나가 종일 통곡하며 하늘에 비니 그 정성이 하늘도 감복시켰는지 지진인 듯 땅이 흔들리더니 뜰아래에 맑은 샘이 솟아났다.
우는 동생에게 그 물을 마시게 했더니 울음을 그치고 배고파 보채는 일도 없어졌으며 아기는 무럭무럭 잘 자라났다.

마을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그 물을 마셔보니 과연 배가 고프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샘을 乳泉(유천: 젖이 나는 우물)이라 부르고, 지금도 상친사 가는 길목에 옹달샘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李世幹(이세간) 선생의 일화

호랑이와 함께 산는 효자

남강 이세간은 하늘이 낳은 효자 였다.
그 아버지가 병에 걸려 자리에 누웠는데 아버지의 병에는 살구꽃이 약이 된다는 말을 듣고 정성드려 기도를 하였더니 한겨울에 살구꽃띠 피더라고 한다.
그 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묘소를 지키며 시묘를 하였다.
눈이 많이 내리던 겨울밤에 춥고 허기에 지친 남강이 정신을 잃고 쓰러졌고. 얼마가 지났는지 정신이 들어 깨어보니 온돌방처럼 따뜻하기만 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가 자신을 감싸고 있었다. 이렇게 호랑이와 친해져서 같이 아버지의 3년 시묘를 마치고 집으로 내려왔다.

어느 날 밤에 호랑이가 웅덩이에 빠져 있는 꿈을 꾸었다.
잠에서 깬 남강은 이상히 여기고 밖을 내다보았더니 마루 밑에 있어야 할 호랑이가 보이지 않았다. 남강은 그 길로 옷을 입고 꿈속에 기억을 더듬어서 호랑이를 찾아 나섰다.
산을 넘고 고개를 넘어 성주땅에 다다랐을 때 호랑이는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져 울부짖고 그곳 사란들은 돌을 던져 호랑이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여보시오들 그 호랑이는 내가 기르던 호랑이요. 제발 부탁이니 죽이지 마십시오.」
밤낮으로 산속을 혜매다가 가시덤불에 옷은 나뭇가지에 걸려 갈가리 찢ㅇ지 땀에 절린 꼴은 말이 아닌 남강이 소리를 치며 웅덩이에 뛰어들려 했다..
「미친 사람이군. 호랑이를 자기가 길렀다니.」
「맞아. 미쳤어. 」
사람들은 저마다 남강을 믿지 아니했다.
「아니 저 사람이 ‥‥」
사람들이 말릴 틈도 없이 남강은 웅덩이로 뛰어들러 호랑이를 껴안았다.
그러자 호랑이는 꼬리를 흔들며 좋아했다.
「아니 저럴 수가‥‥‥ ?」
사람들은 저마다 놀라지 많을 수가 없었다.
남강은 호랑이를 대리고 집으로 들아 와서 오랫동안 함께 살다가 남강이 죽자 호랑이도 남강의 묘에 엎드려 굶어 죽었다고 한다.

 

李珥(이이) 선생의 일화.

 

부정한 물건을 받지 않는다.
율곡(栗谷) 이이(李珥)선생은 항상 남을 도와주기를 좋아했다. 심지어는 처가에서 마련해 준 집까지 팔아서 가난한 친척에게 나누어 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선생 자신의 생활은 청빈하여, 때로는 양식이 떨어져 끼니를 굶는 때도 있었다.
어느 때 선생이 양식어 없어 몹시 어렵다는 소식을 들은 친구, 재령 군수 최립이 쌀 몇 가마니를 보냈다.
그러나 율곡은 쌀을 받지 아니하고 쌀을 싣고 온 사람에게 말하기를 「도로 쌀을 갖고 돌아가서 아뢰어라. 뜻은 고마우나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더라 일러라.」하였다.

심부름꾼은 할 수 없이 쌀을 도로 가지고 돌아갔는데, 선생 댁 하인들이 아까운 듯 불평했다.
「대감님, 모처럼 성의로 보내 주신 것을 돌려보내시면 어쩝니까.」 그러자 율곡이 말했다.
「옛 친구의 사사로운 물건이라면 왜 안 받겠느냐.
그러나 아까 그 쌀은 관가의 물건이니라. 그것을 받는 것은 나라의 곡식을 횡령하는 것이니 죄가 되느니라.」
「그것이 관가의 물건이라는 것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대신을 지낸 나도 이렇게 넉넉하지 못하고 양식 걱정을 하는데, 하물며 지방 수령이야 오죽 가난 하겠는가. 그러니 보지 않아도 그 쌀이 어디서 나왔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는가.」

그 말을 듣고 하인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선생 앞을 물러났다고 한다.


 

李純亨(이순형) 선생의 일화.

李純亨(이순형) (1498~     관왕묘
선생의 본관은 德水(덕수)이고 자는 仲嘉(중가)이며 李蘭(이란)공의 아들로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중종 20년(152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그 뒤 형조 좌랑을 지냈다. 1534년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思政殿(사정전)에서 국왕을 접견하고 사행에 있었던 상황을 보고하였다.
1538년 예조 정랑으로 있었으며 이듬해 성균관직강으로 재직하다가 김해 부사로 나갔다. 1542년 청주 목사로 충청우도 監試(감시)에 上試官(상시관)으로 있었는데 시관인 단양 군수 李邇(이이) 온양 군수 林洙(임수) 등이 부정을 저질러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이듬해 장령이 되었고, 명종 1년(I546) 통례 중시문과에 급제하였다. 1548년 孝烈(효열)황후상에 진위사로 명나라에 가다가 三又河(삼우하)에 이르러 수레가 뒤집혀 表文(표문)이 물에 떨어져 다시 표문을 작성하여 가져가기도 하였다.
1550년 형조 참의를 거쳐 이듬해 병조 참지가 되었다. 1552년 경주 부윤에 임명되었으나 衿川(금천)農舍(농사)에서 지내면서 부임하지 않아 이듬해 윤3월 파직되었다. 이 해 원주 목사로 나갔으나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563년 장례원 판결사에 임명되고, 이듬해 權徹(권철)의 도움으로 청홍도 觀察使(관찰사)가 되었다 1565년 안동 부사로 재직 유생이 승려에게 구타를 당했는데도 유생이 時變(시변)을 알지 못한다고 하고 승려의 편에 서서 재판을 하자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566년 5월 한성부 우윤에 임명되고 이듬해 5월 한성부 좌윤이 되었다. 선조 6년(1573) 특진관으로 입시하기도 하였으며, 경회루에서 국왕이 親試(친시)와 觀射(관사) 할때 시관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청백리 이안눌

 

이안눌의 자는 자민(子敏)이며, 호는 동악(東岳)이다. 덕수이씨로 선조 4(1571)에 태어나 선조 32(1599)에 정사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형조, 호조, 예조의 좌랑을 역임하였다. 1601년 예조정랑으로 진하사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이후 성균관 직강(直講 )으로 명나라 사신이 오면 이를 맞아들이는 원접사의 종사관이 되기도 했다. 선조 41(1608) 2월 동래부사로 부임, 선조 42(1609) 7월에 퇴임해갈 때까지 동래지방에 많은 업 적을 남겼다. 1601년 담양부사, 1613년 경주부윤을 거쳐 1615년 승문원부제조(承文院副提 調), 동부승지를 지내고 문신정시에 급제한 후 1671년 예조참의가 되었으며, 이듬해 강화 부윤으로 나아갔다. 이 해 광해군의 폭정에 분개, 사직하고 은퇴생활을 하다 인조반정으로 예조참판에 등용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는 일찍이 특진관으로 왕을 모실 때 조정의 시비가 밝지 못하고 상벌이 공평하지 못함을 극간하여 대신들을 공박하였다. 이로부터 그의 관직운은 그의 바른 말을 싫어하는 조정 대신들에 의하여 배척됨으로써 점점 소외되어 갔다. 그러나 항상 고결한 심지를 지녀 그 뜻 이 광명정대하였다. 정묘화란 때는 인조가 피난처인 강화도에서 그곳 주민들이 강화부윤의 치적을 칭송하는 소리를 듣고 그를 불러 강화유수직을 맡게 하였으며, 이어 형조참판을 거쳐 인조 9(1631에는 함경도 관찰사를 지냈다. 다음해 주청부사로 명나라에 가서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의 추존(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 제왕의 칭호를 내림)을 허락받아 원종의 시호를 받고 돌아왔다. 그 공으로 예조판서가 되어 예문관제학을 겸하였다. 당시 조정에서 청렴 근면한 관리 5명을 뽑는데 들어 숭록대부의 가자(加資)를 받고 형조판 서 겸 홍문관제학에 임명되었는데, 그 해(1636) 겨울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모시고 남한산성에 다녀와서 죽으니,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죽은 후에 그의 검소한 생활로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선조 41(1608) 2월에 동래부사로 그는 이곳 임진왜란때 의사적을 조사하며, 당시 정경을 담담하게 읊은 행하유감시가 전한다. 한편, 송상현공을 모신 사당 인 송공사에 휘진제를 올려 임진왜란 때 순절한 분들을 애도하였던 것인데 이때 지낸 휘진제(諱辰祭=忌祭)의 전통이 이어진 것이 바로 오늘날의 송공단을 남기고 단제가 끊이지 않게 한 초석이 된 것이다.

 

 

 

申師任堂(신사임당)의 일화.

 

흑룡이 바다에서 집으로 날아들다.

李珥(이이)1536년 외갓집인 강원도 강릉 오죽헌에서 좌찬성 이원수를 아버지로 사임당 신씨를 어머니로 하여 태어났다.

태어나던 날 사임당 신씨가 흑룡이 바다에서 집으로 날아오는 꿈을 꿨다. 이이가 태어난 방을 夢龍室(몽룡실)이라고 하여 지금도 보존되고 있.

<출전: 인물 왕조실록 >

 

 

 

李珥(이이) 선생의 일화.

 

이이는 사임당 신씨와 함께 화석정에 올라갔다.

그것은 이이의 5조 할아버지인 이지돈이 경기도 파주군 율곡마을에 세운 정자였다. 율 곡이란 ()도 이 동네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었다. 사임당 신씨와 함께 한성 본가가 있는 수진방(지금의 수송동과 청진동)으로 올라왔던 이이는 그녀를 따라 고향 마을에 다니러 것이었다.

이이가 가을빛에 젖은 강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시를 읊기 시작했다. 겨우 8세밖에 안된 李珥(이이)지만, 사임당 신씨로 부터 여러 해째 한문을 배워오고 있던 터였다.

 

숲 속 정자에 가을이 깊었는데

글 읊는 사람의 마음 다할 길 없도다.

멀리 물빛은 하늘에 닿아 푸르고

서리 맞은 단풍은 타는 듯 붉구나.

산에서는 외로운 달이 둥글게 솟아오르고

강은 끝없이 바람 속에 흐르는데

아아, 어디로 가는 기러기인가

처량한 울으소리 구름 속에 사라지네.

<출전: 인물 왕조실록 >

 

 

 

 

李珥(이이) 선생의 일화.

 

이이는 9세 때 이륜행실도를 읽고 크게 감동을 받았다.

그것은 1518(중종 13) 曺伸(조신)이 임금의 명에 의하여 어른과 아이, 친구 사이 의 윤리를 진작하기 위하여 만든 책이었다. 이 책이 나오던 해는 趙光祖(조광조)의 혁신정치가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때였다.

전통적인 유교 정치를 회복하고 민중생활에 있어서도 윤리적인 규범의 확립을 요구하던 시기였다. 내용은 어른과 아이 친구 사이의 행실이 뛰어난 역대 명현의 행적을 가려 뽑은 것이었다. 그 내용 가운데는 중국 당나리 때 장공예라는 사람의 집안이 9대에 이르도록 형제들끼리 한 집에서 화목하게 살았다는 내용도 있었다.

<출전: 인물 왕조실록 >

 

 

 

 

師任堂(사임당) 신씨의 일화.

13세 때 이이는 진사시험에 훌륭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15세 때 아버지 이원수가 수운판관이 되어 관서지방으로 장을 가게 되었다.

길에 불편하실 터이니 아이들을 데리고 가시지요. 아이들에게는 산 공부가 될 테니까요.”

사임당 신씨가 남편에게 말했다.

이이는 맏형 이선과 함께 아버지를 모시고 관서지방으로 떠났다. 삼부자를 떠나보낸 사임당 신씨는 그 벙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되었다. 둘째 아들과 넷째 아들이 지성으로 간호했으나 사임당 신씨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출전: 인물 왕조실록 >

 

 

 

師任堂(사임당) 신씨의 일화.

 

, 글씨, 그림에 능하였던 사임당 신씨

사임당 신씨는 1504(연산군 10) 외가인 강릉 북평촌에서 태어났다. 율곡집에 의하면 사임당 신씨는 어릴 때부터 경전을 읽고, 글을 잘 썼을 뿐 아니라 바느질 자수에도 능했다. 7세 때 벌써 安堅(안견)의 필치를 본받아 산수도를 그렸다.

19세 때 이원수와 결혼했다.

사임당 신씨는 그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아들이 없었기에 남편의 동의를 얻어 시댁에 가지 않고 친정에 머물렀다.

결혼 몇 달 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3년상을 마친후 한성으로 올라가 시어머니에게 인사를 올리고 눌러 살았.

시댁의 고향인 파주로 내려가 살다가 다시 한성으로 올라가 살기도 하고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에서 년간 살기도 했다.

그리고 이따금 친정에 가서 홀로 사는 어머니와 같이 지내기도 했다.

38세에 시집 살림을 주관하기 위하여 아주 한성으로 왔다. 이원수가 사임당 신씨의 시당숙인 우의정 李沂(이기)의 문하에 가서 노닐었다. 李沂(이기)尹元衡(윤원형)과 결탁해 을사사화를 일으켜 선비들에게 크게 화를 혔던 사람이다.

어진 선비를 모해하고 권세만을 탐하는 사람이 얼마나 오래 가겠어요. 그집에 발을 들여놓지 마세요.”

사임당 신씨가 남편에게 말했다.

당신의 당숙이긴 하지만 어진 선비를 모해하는 사람이니 내 앞으로 가까이 하지 않겠소.”

아내의 말을 받아들인 이원수는 뒤에 회를 당하지 않았다.

내가 죽거든 당신은 다시 장가를 들지 마세요. 이미 아들이 넷이나 있으니 공연히 후시를 많이 구하여 禮記(예기)’의 가르침을 어기지 마세요.”

사임당 신씨가 말했다.

공자가 아내를 내쫓은 것은 ()에 맞는 거요?” 남편이 물었다.

공자가 노나라 소공 때에 난리를 만나게 되어 제나라 이계란 곳으로 피란을 가게 되었을 때에 그 부인이 함께 가지 않고 혼자 송나라로 갔기 때문에 공자가 그 뒤로는 같이 기거하지 않았을 뿐이지 그 아내를 내쫓았다는 말은 없습니다. ”

그러면 증자가 아내를 내보낸 것은 무슨 ()입니까?”

증자의 아버지가 찐 배를 좋아했는데 배를 찌지 못해서 그 아버지를 공양하는 도리에 어긋나 부득이 했던 일이오. 그러나 짝이 된 의리가 중하다 하여 평생토록 다시 장가를 들지 않있다 하오.”

그러면 주자가례에도 이런 예가 있소?”

. 주자가 마흔 일곱에 그 부인 유씨가 죽고, 이들 ()도 아직 미처 혼인하지 않아서 음식 만들 사람도 없건마는 주지는 다시 장가들지 않았습니다.”

사임당 신씨가 한문 서적을 두루 읽었다는 사실이 부부 사이의 대화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어머니기에 아들 이이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

<출전: 인물 왕조실록 >

 

 

 

師任堂(사임당) 신씨의 일화.

 

사임당 신씨가 남긴 예술 작품

사임당 신씨가 남서예 작품은 초서 여섯 폭과 해서 한 폭이 남아 있고, 그림으로는 채색화 묵화 등 40폭 정도가 전해지고 문학 직품은 시가 3있을 뿐이다.

사임당 신씨의 그림은 풀벌레 · 포도 화조 · 어죽 · 매화 · 난초 · 산수 등이 주된 畵題(화제)였다. 마치 생동하는 듯한 섬세사실화를 그려서 풀벌레 그림을 마당에 내놓아 햇볕에 말리려 하자 닭이 와서 풀벌레인 알고 쪼으려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사임당 신씨의 작품은 모두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하게 묻어 있다.

 

대관령을 념으면서 천정을 바라보다

늙으심 어머니을 고향에 두고

외로이 서울길로 떠나는 이 마음

돌아보니 북평은 아득도 한데

흰구름은 날고 산은 져무네.

 

·*어머니를 생각하며

산 첩첩 내 고향 천리언마는

자나 깨나 꿈속에도 돌아가고파

한송정 가에 외로이 뜬달

경포대 앞에는 한 줄기 바랍

갈애매기는 모래밭에 헤이락 모이락

고깃배는 바다위로 오고 가리니

어느 때나 강릉길 다사 밟아가

색동입 곱고 입고 바느질할고.

<출전: 인물 왕조실록 >

 

 

李珥(이이) 선생의 일화.

.

금강산에불경을 공부하다

어머니의 산소 곁에서 3년을 지낸 李珥(이이)는 세상을 등지고 금강산으로 수도의 길을 떠날 결심을 했다. 그 소식을 듣고 여러 친구들이 이이의 집으로 왔다.

그래 산으로 들어가야만 하는가?” 친구가 이이의 손을 쥐며 말했다.

하루 이틀 생각해 결심한 것이 아니네. ” 이이가 말했다.

앞으로 지주 보기도 힘든데, 우리에게 좋은 이야기 하나 해주고 가게.”

친구가 이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글은 배워서 능할 수 없으나 ()는 길러서 이룰 수 있네. 이 기라 는 것은 사람마다 똑같이 타고난 것으로서 기르면 마음의 하자는 대로 하게 되고, 기르지 못하면 마음이 기의 하지는 대로 하게 되는 것이네. 기가 미음의 하지는 대로 하게 되면 몸이 主宰(주재)가 되어서 성현도 될 수 있는 것이요 마음이 기의 하지는 대로 하게 되면 칠정을 통솔하는 데가 없어서 어리석고 미친 사람이 됨을 면수 없는 것이 네. 옛날 사람으로 기를 기른 이가 있는데, 맹자가 바로 그분이네.

 

공자가 말하기를,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즐겨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즐겨한다했는데, 산을 즐겨하는 자는 우뚝 서 있는 것만을 취할 것이 아니라 그 고요한 도를 본받아야 하며 물을 즐겨하는 자는 흘러가는 것만을 취할 것이 아니라, 그 움직이는 ()도 본받아야 할 것이니, 어질고 지혜로운 사람으로 기를 기르는데 산과 물을 제외하고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말일세.”

이이가 말을 끝내고 여러 친구들과 작별의 인시를 했다.

금강산에 들어간 이이는 자신의 호를 의암이라 짓고 내금강의 마하연이란 절에 서 스님들과 함께 불경 공부에 몰두했다. 어느 날이었다. 이이가 산속 에서 좌선하고 있는 늙은 스님을 만났다.

여기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李珥(이이)가물었다.

늙은 스님은 웃기만 했다.

무엇을 먹고 요기를 하십니까?” 이이가 물었다.

저 나무가나의 양식이다.”

늙은 스님이 손가락으로 소나무를 가리켰다.

공자와 석가, 누가 성인이십니까?”

이이가 물었다.

나를 희롱하지 말라.” 늙은 스님이 말했다.

불가의 묘한 이치는 우리 유가에도 있습니다.” 이이가 말했다.

유가에도 마음이 곧 부처님이란 말이 있느냐?” 늙은 스님이 물었다.

맹지는 사람이 나면서부터 본성이 착하다고 했으니 이 어찌 그 말과 다르겠습니까?” 이이가 대답했다.

()도 아니오 ()도 아니란 말을 아느냐?” 늙은 스님이 물었다.

이것은 前境(전경)입니다. 중용에 소리개가 하늘에 떠돌고 물고기 강물에서 뛰어 논다했으니 이것이 색입니까 공입니까?”

이이가 물었다.

색도 아니고 공도 아닌 것은 眞如體(진여체)이다. 이것을 어찌 詩句(시구)에 비할수 있겠느냐.” 늙은 스님이 대답했다.

이미 말을 하였으니 바로 ()입니다. 어찌 ()라 하겠습니까?” 이이가 말했다.

그대는 속된 유생이 아니다, 나를 위하여 연어시 한 수를 지어주 게나.”

늙은 스님이 말했다.

 

어느덧 1년의 시간이 흘러갔다. 이이는 마하연에 머물면서 수많은 불경을 읽었다. 불경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이이는 지금까지 자신이 공부해온 유교와 불교의 세계가 서로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직 다른 점은 불교에서는 죽어서 극락에 간다는 사실이었다. 극락은 현실이 아니고 꿈이었다. ‘꿈은 꿈일 뿐이다라는 것에 생각에 미친 이이는 자신을 금강산으로 인도해준 보응 스님을 아갔다.

스님, 속세로 다시 돌아갈까 합니다. ”

의임, 정 뜻이 그러하다면 말리지 않겠소.”

보응스님은 서운한 빛을 애써 감췄다. 금강산을 내려온 이이는 강릉외가로 갔다. 오죽헌 옆의 대나무숲으로 바람소리가 지나갔다. 대나무가 서로 허리를 비벼댔다. 외할머니는 이이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잘 생각했다. 열심히 공부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는 길만이 돌아가 어머니께 효도하는 길이다.”

외할머니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이는 오죽헌에서 1년 남짓 지내며 공부에 몰두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채찍질하기 위해 자경문이라는 글을 지었다. 그리고 실천할 것을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자경 문의 내용을 적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聖人(성인)의 경지에 도달할 때까지 끊임없이 노력하여야 한다.

둘째, 마음을 결정하는 데는 먼저 말을 적게J 하여야 한다.

셋째, 놓아버린 마음을 거두어 들여야 한다.

넷째, 공손하고 근신하여야한다.

다섯째, 일보다 생각이 앞서야 한다. 실천이 없는 독서는 쓸데없는 학문임을 알아야한다.

여섯째, 재산과 명예에 마음을 투어서는 안 된다.

일곱째, 만한 일이면 정성을 다해야 한다.

여넓째, 천하를 얻기 위하여 없는 사람을 한 명이라도 희생시켜서는 안된다.

아홉째, 아무리 포악한 사람이라도 감화를 시켜야 한다.

번째, 아닌 잠을 자서는 된다.

열한 번째, 수양과 공부는 서두르지도 쉬지도 말고 꾸준히 해야 한다.

<출전: 인물 왕조실록 >

 

 

 

李珥(이이) 선생의 일화.

 

李珥(이이)20세가 되던 외갓집을 떠나 서울 본가로 돌아왔다. 때마조정에서는 한성시를 실시했다. 이이는 이 시험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합격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 이이는 경상도 성주의 목사 벼슬을 하고 있는 노경린의 딸과 결혼했다. 그의 나이 24세였다.

이이는 처가인 노경린 집에서 강릉 외갓집으로 가던 예안(지금의 경북 안통시)에 들러 이황을 찾아갔다. 그는 이황에게 절을 올렸다. 이황을 스승으로 모신다는 뭇이었다. 李滉(이황)도 반갑게 반절로 답례했다. 사람은 해가 지고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학문과 나라의 장래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눴다. 李珥(이이)는 도산서당에서 이틀 동안을 머물렀다.

李滉(이황)은 이이와 헤어진 뒤에도 가끔 편지를 띄워 그를 격려해주었다.

 

세상에 영특한 인재가 한량없이 많지만 옛날 학문에 마음 두기를 좋아하지 않는데, 그대 같이 뛰어난 채주와 젊은 나이로서 바른 길에 발을 내디뎠으니 앞으로 성취할 바가 어찌 한량이 있겠습니까. 천만번 부타 하오니 더욱 더 遠大(원대)하게 될 것스스로 기약하소서.

 

이이는 이황의 편지를 받고, 갚은 생각에 잠겼다.

<출전: 인물 왕조실록 >

 

 

 

李珥(이이) 선생의 일화.

 

강릉에서 돌아온 이이는 그 해 겨울 별시를 쳤다. 이때 그는 천도책을 써서 장원으로 급제했다. 천도책은 이기론에 입각하여 우주의 이치를 설명한 뛰어난 글이었다.

이이가 26세 되던 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이이는 아버지 산소 곁에 움막을 짓고 3년 동안 지켰다. 아버지의 삼년상을 마친 이이는 1564(명종 19) 사마시를 치러 장원으로 급제했다.

이어서 그 해 8에는 대과에도 장원으로 급제했다.

이로써 이이는 크고 작은 과거에 아홉 번이나 장원으로 급제했다. 나라 안의 백성들은 李珥(이이)를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이를 구도장원공이라 부르며 우러러 보았다. 구도장원공이란 과거에 아홉 번 장원을 한 사람이라는뜻

이었다.

이이는 호조좌랑이라는 벼슬에 올랐다. 그 뒤 이이는 예조좌랑을 거쳐 사간원의 正言(정언)이 되었다.

이이는 우선 정치를 바로 잡기 위해 명종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첫째, 참되고 바른 마음으정치의 근본을 세울 것.

둘째, 현명한 인물을 등용해서 조정부터 맡게 할 것.

셋째,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나라의 근본을 굳건히 할 것.

 

병종은 이 정책을 받아들였다. 1567(명종 22) 628, 명종이 이날 새벽 갑자기 위독했다. 李浚慶(이준경) 심통원 등이 승지 사관과 함께 침전에 들어갔다. 명종은 의식을 잃고 신음하고 있었다. 이준경 등이 드려 울면서 후사의 결정을 재촉했다.

명종이 겨우 손을 들어 안쪽 병풍을 가리켰다. 이준경은 명종의 뜻이 중전에게 물으라는 것임을 아차렸다. 이준경이 중전에게 후시를 물었다.

이미 을축년(명종20)에 위독하실 때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으로 정하시었소.”

중전이 병풍 안에서 이렇게 말했다.

명종이 죽자, 중종의 서자였던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 균이 명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조선왕조 14임금 선조였다. 그때 선조의 나이는 16세였다.

이이는 이황의 편지를 받고, 갚은 생각에 잠겼다.

<출전: 인물 왕조실록 >

 

 

 

李珥(이이) 선생의 일화.

 

선조가 등극한 이듬해 5, 이이는 명나라 왕세자의 생일을 축하하러 보내는 사신천추사의 서장관으로 뽑혀 명나라로 갔다. 그 해 가을 이이 일행이 돌아오자, 선조는 이이에게 홍문관 부교리라는 벼슬을 내려주었다. 이이는 글을 올려 사퇴하려고 했으나 선조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이는 강릉의 외할머니가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웠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이가 계속 사퇴를 고집하자 선조는 이이에게 휴가를 주어 외할머니를 보살피게 했다. 휴기를 받은 이이는 강릉을 오가며 외할머니를 보살펴드렸다.

그러는 한편 동호문답이라는 책을 써서 선조에게 올렸다.

동호문답은 왕도정치에 대한 경륜을 묻고 대답하는 형식으로 엮은 책이었다. 동호문답에는 논군도」「논신도, 논동방도학불행, 논당금지세, 논교인지술등의 11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논군도에서는 임금이 어떻게 나라를 다스려야 할 것인지 임금의 도리를 자세하게 논하고 있고, 논신도에서는 신하의 도리를 역사적인 예를 들어 논하고 있으며, 논동방도학불행에서는 우리나라에서 과거에 도학이 행하여지지 못했던 예를 논하고 있고 논당금지세에서는 당시 우리나라 형세에 대해 논하고 있고 논교인지술에서는 이미 경제적으로 부유 하고 평화롭게 후에 윤리 도덕을 교육시킬 것을 강조하면서 그 방법을 논하고 있다.

그러나 이이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신하들의 반대가 심했기 때문이었다.

그 해 10, 외할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은 이이는 강릉으로 급히 내려갔다. 그의 극진한 간호도 보람 없이 외할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다음해 4이이는 선조의 부름을 받아 교리가 되었다. 그러나 병이 나서 그만두고 황해도 해주에 있는 처가로 내려갔다. 그런데 그곳에서 128이퇴계가 세상을 떠났다는 슬픈 소식을 뒤늦게 들었다.

이이는 이황의 편지를 받고, 갚은 생각에 잠겼다.

<출전: 인물 왕조실록 >

 

 

 

李珥(이이) 선생의 일화.

 

이이는 해주의 수양산 서쪽 고산에 조출한 집을 지어 이사를 갔다.

시내와 산이 수려하고 바위와 돌이 기괴했다. 물이 감돌아 아홉 차례 나 구불구불 굽이쳤으며 높은 데는 절벽이 병풍같이 서 있었다. 흐르는 물은 돌아서 못이 것이 마치 무이산 구곡의 모양 같았다. 이이는

주자의 무이구곡을 본따서 고산구독가를 지었다.

九曲(구곡)은 어드메인고 文山(문산)에 세모커다.

기암괴석이 눈 속에 묻혀세라

遊人(유인)은 오지 아니하고 볼 것 없다 하더라.

 

구곡은 어드메인고 문산에 해의 마지막 때가 되었다. 괴한 바위들은 눈 속에 묻혀 있도다. 겨울 정치도 좋건마는 그러나 遊客(유객)들은 오지도 아니하고 볼 것이 없다고만 하더라.

선조는 이이에게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다.

이이는 병을 핑계로 사양했다. 그러자 선조는 이이가 지방에 머물면서 나리를 위해 일을 할 있도록 청주목사의 벼슬을 내렸다. 이이는 선조의 청을 이상 리칠 없어 청주목사가 되었다. 청주목사가 이이는 백성을 들을 위하여 鄕約(향약)’을 만들었다. 이웃끼리 서로 돕고 도움을 받는 향약의 내용은 대체로 착한 일을 권하고 잘못을 서로 고쳐주고, 바른 예절로 서로사귀고, 어려운 일은 서로 도와주자는 것이었다.

그외에 이이는 또 지방백성이 지켜야할 도덕으로서 부모에게 효도 하고, 나라에 충성하고, 형제간에 의좋게 지내고, 어른을 공경하고, 남녀 간에 서로 존경하고 친족과 이웃 사이에 화목하고, 자손을 바로 가르치고, 아랫사람을 지도하며, ()해도 청렴하며 부유해도 겸손해서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말고 맡은 일에 부지런하고, 약속을 분명히 지키는 10조목을 들었다.

 

이이가 만든 형약은 얼마 가서 열매를 맺었다.

청주 고을은 나날이 변모해갔다.

1574(선조 7) 선조는 이이를 우부승지로 임명했다. 그는 이때 명한 만언봉사소라는 글을 지어 올렸다. 봉사는 상서나 봉장이 누설 될까 두려워하여 주머니에 넣어 봉해서 바치는 것이다.

 

하늘이라는 것()()뿐입니다. ()아주 작은 틈도 없으()流通(유통)하는 길이 있어서, 사람이 하는 일에 얻고 잃는 것이 있으며, 재앙과 祥瑞(상서) ()에 따라서 상응하는 것입니다. 런고로, 국가가- 흥하려면 반드시 상서가 있어서 깨우쳐 주고, 국가가 장망하려면 반드시 요사스러운 일이 있어 망하는데, 아래로 실정을 하연 (하늘)에서 꾸지람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되는 만언봉사에서 이이는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믿지 않고, 벼슬아치들이 맡은 일에 성실치 못하고, 어진 인물을 등용 하지 않고, 재앙을 만나도 구제의 길이 없고, 경연에서 공론만 하면서 실천이 없고, 모든 정책이 백성을 실제로 잘살게 하지 못하고 있고, 심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것 일곱 가지를 당시의 썩어빠진 사회의 실정으로 들고 있다. 이러한 폐단을 바로잡는 방법으로서 이이는 정치를 히는 사람 스스로가 덕을 닦고, 백성을 편안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잘됐도다. 논란한 것은 예전 사람도 나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신하가 있는데, 어찌 정치 못하는 것을 근심할소냐. 너무 일이 많기 문에 모든 것을 개혁하는 것은 졸지에 다 변경할 수는 없으나, 이 상소는 대신에게 의논해 처리하겠다.

선조가 말했다.

음식을 조심하는 것이 병을 고치는 데 중요합니다. 부제학 유희춘이 계를 올렸다.

병을 고치는 데는 단지 약이나 음식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니고, 드시 마음을 다스리고 기운을 양성한 뒤에 병을 고칠 있는 것이다. ”

이이가 말했다.

<출전: 인물 왕조실록 >

 

 

 

李珥(이이) 선생의 일화.

 

1574(선조7) 선조는 이이를 황해도 관찰사로 임명했다.

황해도 관찰사가 이이는 청주 목사로 있을 때 만든 향약을 널리 실시했다. 1576(선조 9) 이이는 다시 벼슬을 내놓고 고향 파주 율곡 마을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 해 가을, 황해도 해주 석담 이란 곳으로 옮겨갔다.

이이는 일찍이 장공예의 집안사람이 9대에 이르도록 형제와 일가친척이 함께 모여 사는 일을 사모해왔다. 그는 그 곳에 청계당이란 집을 짓고 가난한 친척들을 모아 함께 살았다. 어느 청계당으로 찾아오는 친척들이 점점 늘어 100여 명 가까운 큰 식구가 되었다. 가난한 친척들을 돌보느라 이이의 기족들은 양식이 떨어질 때가 많았다.

이이의 형편이 어렵다는 소문을 듣고 재령 군수 최립이 쌀을 보내왔다. 그러나 이이는 쌀을 받지 않고 돌려보냈다.

생각해서 보내온 쌀을 돌려보내십니까?” 친척들이 물었다.

나라의 쌀이라 돌려보내는 것이오. 벼슬에서 물러난 사람이 어찌 나라의 쌀을 축낼 있단 말이오. ”

이이가 말했다.

이이가 청계당에 머물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선비들 이 방방곡곡에서 모여들었다. 제자들이 돈을 모아 은병정사를 지었다. 이이는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격몽요결을 지었다. 이 책은 덕행과 지식의 함양을 위한 초등과정의 교재였다. 이이는 서문에서 은병정사에서 初學(초학)의 향방을 정하지 못하여 굳은 뜻이 없는 제지들에게 뜻을 세우고, 몸을 삼가며, 부모를 봉양하고, 남을 접대하는 방법을 가르치기 위해 이 책을 지었다고 밝혔다.

은병정사에서 이이가 가르제지들 가운데 빼어난 사람만 해도 108명에 이르렀다. 이이는 농기구가 모자라 고생하는 백성들을 위해 은병정사 옆에 대장간도 만들었다. 이이는 대장간에서 만든 농기구를 백성들에게 헐값으로 나누어 주었다.

<출전: 인물 왕조실록 >

 

 

李珥(이이) 선생의 일화.

 

그릇 모양은 달라도 속에 담긴 물은 같다

저녁식사를 끝낸 이이는 제자들과 은병정사에서 자유롭게 토론에 들어갔다.

제자가 말했다.

선생님, 퇴계 선생님은 ()()를 갈라 보려고 하였으며, 그 기운데 리를 강조했습니다. 퇴계 선생님에게는 리가 도덕의 원리였던 거지요. 선생님께서는 리를 어떻게 보시는 지요?

이이는 대답했다.

나는 다르지. 나는 리와 기를 함께 보려고 해. 리와 기를 갈라 보려는 사람은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제자가 또 물었다.

리는 모든 사물의 원리이고 기는 그 원리를 담는 그릇이라고 볼 수 있다고 했는데 좀 더 쉽게 설명해주세요.

이이는 비유한다면 리는 이상이고 기는 그 이상을 담아 놓은 현실이 라고 할 수 있지. 물론 리는 달라지지 않지. 잘 들어 봐. 둥근 그릇에 물을 담으면 물 모양이 둥글게 되고 모난 그릇에 담으면 물 모양이 모 나게 되지만, 그 속에 담긴 것이 물이라는 점에서는 같지. 또 마찬가지로 큰병이나 작은 병이나 그 속에 담긴 공기는 같은 공기지.

 

제자가 말했다.

나무가 불에 타면 재가 되고 그 재는 언뜻 보기에는 없어진 같지만 사실은 다른 원소로 변하여 이 세상에 남는다고 한 화담 선생님말씀과 통하는 거네요.

이이는 이제 이와 기가 뭔지 알아듣는 것 같군.

<출전: 인물 왕조실록 >

 

 

 

李珥(이이) 선생의 일화.

 

10명의 군사를 길러야 합니다.

1580(선조 13), 선조는 이이에게 또다시 대사간 벼슬을 내렸다.

이이는 이상 선조의 부름을 뿌리칠 없어 한성으로 올라갔다.

지금이라도 당파싸움을 그치게 해야 합니다.”

알겠소. 그대의 뜻에 따르리라.”

1582(선조 15), 이이는 병조판서에 올랐다. 이이는 국방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 선조에게 시무6라는 글을 올렸다.

첫째, 어질고 능력 있는 선비를 .

둘째, 군대를 훈련시킬 것.

셋째, 전투 장비를 풍족하게 준비할 것.

넷째, 국경 지대의 정계를 튼튼.

다섯째, 전투에 쓸 말을 충분히 준비할 것.

여섯째, 백성들을 잘 가르칠 것.

 

그 해 4이이는 선조 앞에 나아갔다.

당파 싸움으로 나라의 힘이 몹시 약해졌습니다. 국방의 근본이 되는 것은 군사의 힘이옵니다. 장차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니 10년 안에 미리 10만 명의 군사를 길러 한성부에 2만 명을 두고 나머지 8만 명은 8도에 고루 배치하여 급한 일이 있을 때에 대비하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10년이 못되어 토담 무너지듯 하는 화가 있을 것입니다. ”

이이가 머리를 조아렸다

여러 대신들과 한번 의논해 보겠소.”

선조가 말했다. 선조는 대신들을 대궐로 불러들였다.

나리를 온전히 지키려면 국방력이 튼튼해야 되오. 병조판서가 10 만 군사를 양성하라고 하는데 경들의 의견은 어떻소?”

일이 없이 군대를 양성하는 것은 화근을 만드는 것이 옵니다.”

유성룡이 반대 의견을 말했다. 난리가 오랫동안 없이 오래되어 신하 들은 편안한 것만 좋아했다.

전하! 이 태평한때에 군사양성이라니 그 무슨 당치 않는 말씀이옵니까? 오히려 나라의 힘만 약하게 하는 낭비에 지나지 않사옵니다. 게다가 명나라에 공연한 의심만 사는 일이 될 뿐이옵니다. ”

옳습니다. 군사를 기르다니 당치 않는 말씀이옵니다.”

대신들은 하나같이 반대했다. 모두들 이러니 선조는 이이의 상소를 묵살해 버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장차 난리가 난다면 이 나라는 어찌될 것인가!’ 이이는 한숨을 쉬며 대궐을 빠져 나왔다.

나라 형세의 위태하기가 달걀을 쌓아 놓은 것 같은데, 시속 선비는 이때 어떻게 할 것을 모르니 다른 사람이야 진실로 기대할 것이 없지 마는 당신이 또한 그런 말을 하는가?”

이이가 뒤돌아서서 유성룡에게 말했다. 이이는 다시 벼슬을 내놓고 율곡 마을로 내려갔다. 당파 싸움에 눈이 어두운 간신의 무리들과 이상 나랏일을 의논할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이가 벼슬에 서 물러났다는 소문이 퍼지자 전국에서 선비들이 들고 일어났다. 成渾(성혼) 먼저 충신을 헐뜻는 무리들을 조정에서 내쫓아야 할 것이라는 내용의 글을 선조에게 올렸다.

이어서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선비 4백여 이를 헐뜻는 간신들을 쫓아내라는 글을 올렸다.

선조는 이이를 헐뜯은 송응개 · 허용 · 박근원 세 사람을 멀리 귀양 보내고 그리고 이이를 다시 이조판서에 임명했다. 그러나 이이는 한성으로 올라온지 석 달 뒤 다시 심한 병으로 자리에 누웠다.

이이는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다가 1584(선조 171)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 49때였다.

        <출전: 인물 왕조실록 >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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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덕수 이씨(德水李氏)는 남한에 총 10,580가구, 43,50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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