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ail : juntonggahun@naver.com
>> 한국의 성씨


벽진이씨(李)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벽진이씨)

 

 

본관(本貫): 벽진(碧珍)

시조(始祖): 이총언

유래(由來):

 

벽진 이씨(碧珍李氏)의 시조(始祖) 이총언은 신라 말에 벽진군(碧珍郡) 태수(太守)를 지내고 왕 건(王 建)을 도와 고려 창업(高麗創業)에 훈공을 세워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벽진장군(碧珍將軍)에 올랐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이총언을 시조로 받들고 본관(本貫)을 벽진(碧珍)으로 삼게 되었다.

 

가문의 중요 인물

 

이영(李永)

벽진장군 총언의 아들 영()18세로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 개국에 공을 세웠으므로, 그 충절(忠節)을 가상히 여긴 옹이 대광(大匡) 사도귀(思道貴)의 딸과 혼인하게 하고 식읍(食邑)을 하사했다. 그 후 영()은 대제학(大提學)과 지경산부사(知京山府使)를 역임했다.

 

이방회(李芳淮)

영의 아들 방회(芳淮)는 추밀원사(樞密院使)를 역임하여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이견간(李堅幹)

시조 총언의 10세손으로 공부사(工部事)를 지낸 옹()의 맏아들 견간(堅幹)이 고려 충렬왕(忠烈王)과 충숙왕조(忠肅王朝)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주요 관직을 역임하였고 1317(충숙왕 4) 사신(使臣)이 되어 원나라에 가서 문명(文名)을 떨쳤으며, <산꽃의 말(山花之語)>이란 시()로 이름을 떨쳐 <산화선생(山花先

)>이라 불리웠다.

 

이맹전(李孟專)

1392(태조 1)1480(성종 11). 조선 제6대왕 단종을 위하여 절의를 지킨 생육신의 한 사람.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백순(伯純), 호는 경은(耕隱). 선산출신. 군상(君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도원수 희경(希慶)이고, 아버지는 병조판서 심지(審之)이며, 어머니는 공부전서(工部典書) 여극승(呂克勝)의 딸이다.

1427(세종 9)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김숙자 ( 金叔滋 김종직 ( 金宗直 ) 부자와 평생을 가까이 지냈다. 승문원정자를 거쳐 1436년 정언에 임명되고, 얼마 뒤 거창현감이 되었는데, 청렴결백하다는 평판을 받았다.

1453(단종 1) 수양대군이 단종을 보좌하는 황보 인(皇甫仁김종서 ( 金宗瑞 ) 등 대신을 죽이고 정권을 탈취하여 시국이 소란해지자, 이듬해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선산으로 돌아가서 귀머거리·소경이라 핑계하고는 은둔하여 친한 친구마저 사절하고 30여년이나 문밖에 나가지 않았다. 나이 90여세에 죽었다.

1781(정조 5) 영의정 서명선 ( 徐命善 )의 건의에 의하여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함안의 서산서원 ( 西山書院 )에 원호 ( 元昊 김시습 ( 金時習 조려 ( 趙旅 남효온 ( 南孝溫 성담수 ( 成聃壽 )와 함께 생육신으로 제향되었고, 또 선산의 월암서원(月巖書院)에는 김주 ( 金澍 하위지 ( 河緯地 )와 함께 제향되어 있다. 시호는 정간(靖簡)이다.

 

이계전(李季專)

1414(태종 14)1484(성종 15).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벽진 ( 碧珍 ). 자는 경지(敬止). 군상(君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희경(希慶)이고, 아버지는 심지(審之)이며, 어머니는 여극회(呂克誨)의 딸이다.

1447(세종 2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직학·사헌부감찰·예조정랑·승정원좌부승지·경기관찰사 등을 거쳐 이조참판에 이르러 병으로 사직하니 대호군에 제배되었다.

또한, 춘추관기사관으로 세종실록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성종비(成宗妃)인 공혜왕후 한씨(恭惠王后韓氏)의 국장에는 국장도감제조(國葬都監提調)에 임명되었다. 시호는 공희(恭僖)이다.

 

이승언(李承彦)

참판(參判) 신지(愼之)의 손자 승언(承彦)은 성종 때 한성 참군(漢城參軍)을 지냈다.

 

이약동(李約東)

1416(태종 16)1493(성종 24).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벽진 ( 碧珍 ). 자는 춘보(春甫), 호는 노촌(老村). 희목(希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존실(存實)이고, 아버지는 증 호조판서 덕손(德孫)이며, 어머니는 유무(柳務)의 딸이다. 김종직 ( 金宗直 조위 ( 曺偉 ) 등과 교분이 깊었다.

1441(세종 23) 진사시에 합격하고, 1451(문종 1)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한 뒤 사섬시직장(司贍寺直長)을 거쳐 1454(단종 2) 감찰·황간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1458(세조 4) 지평 ( 持平 )이 되고, 이듬 해 사직했다가 1464년 선전관으로 복직하였다. 1466년 종부시정(宗簿寺正)이 되고 구성부사 등을 역임하다가 1468년 병으로 사직하였다.

1470(성종 1) 제주목사 때 관아 이속들의 부정과 민폐를 단속, 근절시키고 공물의 수량을 감해 백성의 부담을 더는 등 선정을 베풀어 칭송을 받았다. 또한,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 모르고 들고 온 관물(官物)인 말채찍을 성루 위에 걸어놓고 왔으며, 항해 중 배가 파선의 위기에 놓이자 하늘을 속인 노여움이라 단정하고 배 안을 살펴 부하들이 몰래 넣어둔 갑옷을 찾아내 강물에 던진 투갑연(投甲淵)의 일화는 유명하다.

1474년 경상좌도수군절도사를 거쳐 1477년 대사헌이 되어 천추사 ( 千秋使 )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 해 경주부윤이 되었으며, 호조참판·전라도관찰사를 지냈다. 1487년 한성부좌윤·이조참판 등을 거쳐, 1489년 개성부유수 등을 역임하다가 1491년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치사(致仕 : 나이가 많아 벼슬에서 물러남. 일종의 정년퇴임임)하였다.

금산의 경렴서원(景濂書院), 제주도 귤림서원(橘林書院)에 제향되었다. 성종 때 청백리로 뽑히고 기영록(耆英錄)에 올랐으며, 저서로는 노촌실기가 있다. 시호는 평정(平靖)이다.

 

이장곤(李長坤)

1474(성종 5)1519(중종 1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벽진 ( 碧珍 ). 자는 희강(希剛), 호는 학고(鶴皐금헌(琴軒금재(琴齋우만(寓灣). 신지(愼之)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흥해군사(知興海郡事) 호겸(好謙)이고, 아버지는 참군 ( 參軍 ) 승언(承彦)이며, 어머니는 이조참판 이래(李徠)의 딸이다. 김굉필 ( 金宏弼 )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492(성종 23) 유자광 ( 柳子光 )에 의해 유장(儒將)의 적격자로 천거된 적이 있으며, 1495(연산군 1)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502년 알성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04년 교리로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이듬 해 거제도에 유배되었다. 이 때 연산군이 무예와 용맹이 있는 그가 변을 일으킬까 두려워해 서울에 잡아올려 처형하려 하자 이를 눈치채고 함흥으로 달아나 양수척 ( 楊水尺 )의 무리에 발을 붙이고 숨어 살았다.

이 해 중종반정으로 자유의 몸이 된 뒤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위해 젊고 재능있는 관료에게 독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휴가를 내리던 제도)하고, 1508(중종 3) 박원종 ( 朴元宗 )의 추천으로 다시 기용되어 홍문관부교리·교리·사헌부장령을 거쳐 이듬 해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어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었고, 1512년 중국 산동성에서 도적이 크게 일어나자 그 화가 우리 나라에 미칠 것을 걱정해 비변사에 이를 보고하는 동시에 성곽을 수축하고 양곡을 비축해 대비하도록 건의하였다.

, 이 해 7월에 야인 2,000여 명이 창성에 침입하자 군사를 거느리고 맞서 싸워 격파하였다. 이듬 해 이조참판이 되고, 1514년에 예조참판으로 정조사 ( 正朝使 )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515년 대사헌이 되고, 이듬 해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북쪽 변경의 일을 잘 안다 하여 곧 함경도관찰사로 교체되었다.

1518년 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고, 이듬 해 우찬성으로 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이 되고 병조판서를 겸임하였다. 이 때 심정 ( 沈貞 홍경주 ( 洪景舟 ) 등에게 속아 기묘사화를 일으키는 데 가담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목적이 조광조 ( 趙光祖 )를 비롯한 신진 사류들의 숙청임을 알고 이들의 처형을 반대하였다. 이 때문에 심정 등의 미움을 사서 결국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그 뒤 경기도 여강(驪江 : 지금의 여주)과 경상도 창녕에서 은거하였다.

학문과 무예를 겸비해 일찍부터 중종의 신임을 받아 승진이 빨랐으며, 관직을 삭탈당한 뒤에도 귀양을 보내자는 대간의 요구가 관철되지 못하였다. 중종은 그의 재질을 아깝게 여겨 군직(軍職)을 주어 유사시에 쓰려고 했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실현하지 못하였다. 창녕의 연암서원(燕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금헌집이 있다. 시호는 정도(貞度)이다.

 

이후경(李厚慶)

1558(명종 13) 1630(인조 8).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벽진 ( 碧珍 ). 자는 여무(汝懋), 호는 외재(畏齋). 아버지는 엄()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로 승의부위 ( 承義副尉 ) 광의(光義)의 딸이다. 정구 ( 鄭逑 )에게서 수학하였다. 학행이 높아 영남지방의 명유로 추앙을 받았다.

광해군 때 이시발 ( 李時發 ) · 김우옹(金宇 裵 )의 천거로 세자익위사세마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1627(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그 해 가을 강화도에 왕을 호종(扈從)하였고, 그 공으로 서울로 돌아와 음성현감을 지냈다.

죽은 뒤 1648(인조 26) 병조참의에 추증되고, 경상남도 영산의 덕봉서원 ( 德峰書院 )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외재집 이 있다.

 

이상길(李尙吉)

1556(명종 11) 1637(인조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벽진 ( 碧珍 ). 자는 사우(士祐), 호는 동천 ( 東川 ). 유번(有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석명(碩明)이고, 아버지는 동몽교관 ( 童蒙敎官 ) 희선(喜善)이며, 어머니는 경상도군사(慶尙道郡事) 정환 ( 丁煥 )의 딸이다.

1579(선조 12) 진사가 되고, 1585(선조 18)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88년 감찰 · 호조좌랑, 1590년 병조좌랑, 사간원정언, 지제교 등을 역임하였다. 1599년 광주목사 재임중에 선정의 치적이 뚜렷해 통정대부 ( 通政大夫 )에 올랐다.

1602년에 앞서 정언으로 있을 때 정인홍 ( 鄭仁弘 ) · 최영경 ( 崔永慶 ) 등을 정여립 ( 鄭汝立 ) 일당으로 몰아 추론한 죄로, 성혼 ( 成渾 ) 등과 함께 6년간 황해도 풍천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1608년 유배에서 풀려 나온 뒤 강원도 회양부사, 평안도 안주목사, 호조참의 등 벼슬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정인홍 등이 정권을 잡자 규탄을 받아 동문 밖 노원(蘆原)에 거처하면서 이항복 ( 李恒福 ) 등과 교우하였다.그 뒤 다시 등용되어 1617(광해군 9) 하지사(賀至使)로 명나라에 갔을 때 부하를 잘 단속해 재물을 탐내지 못하게 했고, 이듬해 평안감사로 있을 때 가도( 假 島)에 웅거하던 명장 모문룡(毛文龍)에게 군량을 보내어 구원하였다.

그러나 폐모론이 일어나자 전라도 남원으로 돌아가 은퇴하였다. 인조반정 후에 다시 출사(出仕)해 승지 · 병조참의 · 공조판서를 역임한 다음 기로소 ( 耆老所 )에 들어가 평난호성정사진무원종공신(平難扈聖靖社振武原從功臣)이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조정의 명을 받아 영위사(迎慰使)가 되어 80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묘사(廟社)를 받들고 강화도에 들어갔다. 다음 해 청군이 강화도로 육박해오자 아들 경()을 불러 뒷일을 부탁한 뒤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강화도의 충렬사 (忠烈祠)에 배향되고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동천집 이 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이상급(李尙伋)

1572(선조 5)1637(인조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벽진 ( 碧珍 ). 자는 사언(思彦), 호는 습재(習齋). 유번(有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석명(碩明)이고, 아버지는 동몽교관 ( 童蒙敎官 ) 희선(喜善)이며, 어머니는 정환 ( 丁煥 )의 딸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학문에 힘써 1605(선조 39) 진사가 되고, 이듬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의 정자·저작·박사를 거쳐 형조좌랑 때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 평안도사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권신인 이이첨 ( 李爾瞻 )과 뜻이 맞지 않아 승진에 어려움이 많았다. 한때는 병을 빙자하여 벼슬을 그만둔 일도 있었으나 다시 형조정랑을 거쳐 풍기군수가 되었다.

이때 경상도관찰사로 정조 ( 鄭造 )가 임명되자, 그의 속관이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벼슬을 버리고 고향 성주로 돌아가 농사와 낚시로 소일하였다. 인조반정 후 다시 등용되었으나, 장령·집의 등 대간으로 있을 때 직신(直臣)의 기품이 있어 싫어하는 자가 많았다.

단천군수와 연안군수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어 신망을 얻고 세자시강원의 보덕이 되었다. 이어 병조참지로 있을 때 치군(治軍축성(築城) 등 국가방위에 공헌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가 40여일 동안 대결하였다.

그러나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묘사(廟社)를 받들고 강화도로 들어간 형 상길(尙吉)을 찾아가다가, 도중에서 적병을 만나 살해되었다. 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강(忠剛)이다.

 

이지걸(李志傑)

상길의 손자 지걸(志傑)은 숙종(肅宗) 때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거쳐 영덕 현감(盈德縣監)으로 나가 토호(土豪)세력과 관권의 치열한 싸움 끝에 토호 세 사람을 죽임으로써 님형이라 하여 유배당하기도 했다. 뒤에 풀려나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내고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이세근(李世瑾)

영조(英祖) 때 봉조하(奉朝賀)가 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됨

 

이항로(李恒老)

1792(정조 16) 1868(고종 5). 조선 말기의 성리학자. 본관은 벽진 ( 碧珍 ). 초명은 광로(光老)였으나 철종 사친(私親)의 이름을 피하여 개명하였다. 자는 이술(而述), 호는 화서(華西). 경기도 포천 출신. 회장(晦章)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전의이씨(全義李氏) 의집(義集)의 딸이다.

3세 때 천자문 을 떼고, 6세 때 십구사략 十九史略 을 읽고 천황지황변 天皇地皇辨 을 지었다. 12세 때 신기령(辛耆寧)에게서 서전 書傳 을 배웠다. 1808(순조 8) 반시(泮試 : 한성초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당시 권력층의 고관이 과거급제를 구실로 자기 자식과의 친근을 종용하자, 이에 격분하여 과장의 출입마저 수치스럽다 하여 끝내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과거를 포기한 뒤 당시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던 서울의 임로 ( 任魯 )와 지평의 이우신 ( 李友信 ) 등을 찾아가 학우의 관계를 맺었다.

25 26세 때 어버이와 사별한 뒤 학문에 전념하였다. 30세 때 그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한 청년들이 많이 모여들었으나, 세속을 피해 쌍계사 · 고달사 등 사찰을 옮겨다니며 사서삼경과 주자대전 朱子大全 등 성리학연구에 힘을 쏟았다.

그의 학덕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1840(헌종 6) 휘경원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으며, 그 뒤에도 지방수령 등에 제수되었지만 고사하고 향리에서 강학을 위해 여숙강규(閭塾講規)를 수정하여 실시하였다. 이 무렵 한말의 위정척사론자로 유명한 최익현 ( 崔益鉉 ) · 김평묵 ( 金平默 ) · 유중교 ( 柳重敎 ) 등이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62(철종 13) 이하전 ( 李夏銓 )의 옥사에 무고로 체포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1864(고종 1) 당시 권력자 조두순 ( 趙斗淳 )의 천거로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 · 전라도사 · 지평 · 장령 등에 임명되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모두 거절하였다.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동부승지의 자격으로 입궐하여 대원군에게 주전론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 뒤 공조참판으로 승진되고 경연관 ( 經筵官 )에 임명되었으나, 대원군의 비정(秕政)을 비판한 병인상소와 만동묘 ( 萬東廟 )재건 상소 등으로 대원군의 노여움을 사서 삭탈관직당한 뒤 낙향하였다.

그의 학문은 주리철학(主理哲學)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호남의 기정진 ( 奇正鎭 ), 영남의 이진상 ( 李震相 )과 함께 침체되어가는 주리철학을 재건한 조선조 말기 주리철학의 3대가의 한 사람이다.

그의 주리철학은 이기합일설(理氣合一說)을 주장한 중국의 나흠순(羅欽順) 일파의 우주론을 반대하고, ()와 기()를 엄격히 구별하는 동시에 그것을 차등적으로 인식하였다.

, ‘ 가 주가 되고 가 역()이 되면 만사가 잘 다스려져 천하가 편안할 것이나, 만일 반대로 기가 주가 되고 이가 버금이 되면 만사가 어지러워져 천하가 위태로울 것이라 하여 이 · 기를 차등적으로 보았다.

, 주리론에 기초를 둔 심전설(心專說), 즉 심즉리(心卽理), 심즉기(心卽氣)설을 반대하고 심합이기설(心合理氣說)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존기비(理尊氣卑)를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중교가 비판하였듯이 이리단심(以理斷心)의 이론이라 할 수 있으니 그의 심설은 심전설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사상은 심전주리론에 바탕을 둔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그의 심전주리론은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춘추대의(春秋大義)라는 윤리와 아울러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처럼 하고, 나라 걱정하기를 내집처럼 한다는 애국사상과 자주의식을 강조함으로써 조선조 말기의 민족사상인 위정척사론의 사상적 기초가 되고, 나아가서 민족운동의 실천적 지도이념으로 승화되었다.

저서로는 화서집 · 화동사합편강목 華東史合編綱目 60, 주자대전차의집보 朱子大全箚疑輯補 , 화서아언 華西雅言 12권 등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이화서

고종(高宗)이 즉위하자 장원서 별제(掌苑署別提)에 천거되었던 화서는 전라도사(全羅都事)와 지평(地平장령(掌令) 등을 역임했고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승진, 경연관(經筵官)이 되었으나, 사직상소(辭職上疏)에서 경복궁(景福宮) 중건(重建)의 중지와 취렴(聚斂)의 시정을 촉구하는 등 대원군(大院君)의 실정을 반대하여 노여움을 샀다.

그 후 다섯 차례나 내려진 벼슬을 사양하는 사직상소에서 시폐의 시정을 강력하게 촉구했고,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학자(學者)로서 조선 말기 성리학(性理學)의 결론을 맺었다.

특히 화서는 한국 역사상 보기 드문 민족교육자(民族敎育者)로서 평소 애군여부(愛君如父우국여가(憂國如家)를 문도(門徒)들에게 역설하여 민족주체의식을 고취시켜 한말창의(韓末倡義) 호국운동(護國運動)의 주역들을 대거 배출시켜 나라에 공헌했다.

 

이우면(李愚冕)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오적신(五賊臣)>의 처형을 강력하게 상소했다.

 

이덕후(李德厚)

기미독립운동 때 유림(儒林)에서 궐기하여 파리장서사건으로 투옥되었다.

 

이태일(李泰一)

[정학통록(正學通錄)][오도가(吾道歌)]의 저자로 유명.

 

이우익(李愚益)

대구 고등검사장(大邱高等檢事長)으로 검찰행정의 기초 확립에 이바지했다.

 

李長坤(이장곤) 선생의 일화.

 

유기장이의 딸

이장곤이 혼란한 정국을 피해 전국을 방황 하다가 보성군 미력면 도개리 정자마을에 당도하여 냇가에서 물 긷는 처녀에게 물 한 그릇을 청하였다.
그런데 처녀가 이장곤을 바라보더니 물에 버들잎을 띄워주므로, 이상히 여겨 연유를 물으니 처녀가 말하기를 갈증이 심한데 급히 냉수를 마시면 해를 입을 것 같아 천천히 물을 마시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대답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이장곤이 감격하여 처녀를 따라가 데릴사위를 자청하여 유기장이의 사위가 되었다.
3년 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나라의 질서가 다시 바로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유기를 납품하러 관가에 갔다가 옛 동료인 원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의 주선으로 다시 벼슬길에 올라 온 가족이 서울로 올라가 잘 살았다고 한다.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31

()

35

()

39

()

32

()

36

()

40

()

33

()

37

()

41

()

34

()

38

()

42

()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벽진 이씨(碧珍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19,807가구, 80,66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게시물 목록
번호 제 목 글쓴이 등록일 조회
485 서산 이.jpg 서산이씨(李) 청남 14-08-29 2765
484 서림 이.jpg 서림이씨(李) 청남 14-08-29 2875
483 상산 이.jpg 상산이씨(李) 청남 14-08-29 2563
482 부평 이.jpg 부평이씨(李) 청남 14-08-29 3347
481 부여 이.jpg 부여이씨(李) 청남 14-08-29 2305
480 부안 이.jpg 부안이씨(李) 청남 14-08-29 2543
479 봉산 이.jpg 봉산이씨(李) 청남 14-08-29 4008
벽진 이.jpg 벽진이씨(李) 청남 14-08-29 6066
477 덕은 이.jpg 덕은이씨(李) 청남 14-08-29 2941
476 덕수 이.jpg 덕수이씨(李) 청남 14-08-29 4770
475 덕산 이.jpg 덕산이씨(李) 청남 14-08-29 3425
474 대흥 이.jpg 대흥이씨(李) 청남 14-08-29 3680
473 담양 이.jpg 담양이씨(李) 청남 14-08-29 3132
472 단양 이.jpg 단양이씨(李) 청남 14-08-29 4448
471 단성 이.jpg 단성이씨(李) 청남 14-08-29 3650
470 남평 이.jpg 남평이씨(李) 청남 14-08-29 2469
469 나주 이.jpg 나주이씨(李) 청남 14-08-29 3652
468 김포 이.jpg 김포이씨(李) 청남 14-08-29 2786
467 금구 이.jpg 금구이씨(李) 청남 14-08-29 2665
466 광주 이.jpg 광주이씨(李) 청남 14-08-29 4505
게시물 검색